7/17/2010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 3 – 믿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

로마서 10 17절에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기록한 말씀인 이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또한 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말씀하셨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준비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 하와가 자식들에게 에덴동산 이야기를 종종 했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에덴동산에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 했느냐. 거기에는 여기처럼 수고와 고생도 없고, 저주도 없이 마냥 행복하고 기쁘기만 했지. 매일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우리는 행복하고 즐겁게 살았단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어요?”라고 자식들로부터 질문도 받았을 것입니다.

이에 아담은 자식들에게 “그건 말이야, 어느 날 너희 엄마가 뱀에게 꼬임을 받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내게도 갖다 주며 먹어 보라고 졸라댔지. 그래서 내가 마음이 약해 그것을 받아먹었단다. , 그런데 어떻게 된지 알아? 전에 느끼지 못했던 걸 느꼈어. 갑자기 벌거벗은 수치를 발견한 거야.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우리의 수치를 보게 됐어. 그리고 하나님이 두려워졌어. 그래서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지. 그것이 처음 만들어 입은 옷이야. 그런데 낮에 햇볕이 나니까 잎사귀는 금새 말라버리고, 돌아다니며 몇 번 앉았다 일어났다 했더니 다 부서져 버렸지. 저녁때쯤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걸치나 마나 한 꼴이 되었단다.

아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하나님이 갑자기 부르시는 거야. ‘아담아, 아담아!’ 그래서 깜짝 놀라 숲 사이에 숨었지. 그런데 계속 부르시는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자백했더니,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거야.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하나님이 물으셔서 나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네 엄마한테 책임을 떠 넘겼지. 그러자 하나님이 네 엄마한테 하시는 말씀이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며 심한 책망을 하셨단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네 어머니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셨다. 또한 이 아버지에게는 하나님께서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서 우리 부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단다. 그 때부터 이 땅에는 저주와 고생이 시작되었단다”.

아담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쫓아내시기 전에 하나님이 짐승 두 마리를 끌고 오시는 거야. 우리는 여전히 수치스럽고 두려워서 숲 사이에 숨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끌고 온 짐승 두 마리를 잡으시는 거야. 짐승이 비명을 지르면서 피를 펑펑 쏟으며 죽었지.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을 그 때 처음 봤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말이야, 하나님이 그 짐승을 죽여 가죽을 벗기고 직접 디자인해서 옷을 만들어 주셨는데, 이것이 그 옷이란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세기 3:21).

아담과 하와가 입었던 그 가죽 옷은 최초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옷입니다. 그렇다면 왜 발가벗겨 쫓아내지 않으시고 짐승을 죽여서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힌 후에 추방하셨을까요? 괜찮은 가죽 옷은 요즘도 비싼데 하나님이 직접 만드셨으니 얼마나 멋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죽 옷 한 벌씩을 해 입히시고 내쫓으신 것은 지금은 죄 때문에 쫓아내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인간의 죄를 가리울 조치를 마련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훗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대가를 충분히 경험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가리워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덮는다, 가리워 준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의 피로 가리워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담 하와는 그 정확한 내용까지는 깨달을 수 없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 이야기를 다 들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아벨은 그 안에서 뭔가 하나를 깨달은 것입니다. “아! 바로 그거구나.” 요즘 말로  뭘 하나 ‘캐취’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아, 좋은 말씀이구나!”로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브리서 4:2).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그릇을 엎어놓으면 물이 한 방울도 담길 수 없는 것과 같이,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고 말씀을 들으니 그 말씀이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 덩어리를 주워도 그 가치를 모르면 남이 달라고 했을 때 주어버릴 수도 있고, 잃어버려도 아까운 줄도 모를 것입니다. 그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가인과 아벨은 아마 의논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죄를 범해서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구나. 그렇지만 이제라도 하나님과 친해질 방법이 없을까? 그렇지! 우리가 하나님께 각각 예물을 드려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보자.” 두 형제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를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아벨은 키우던 새끼 양 한 마리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이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하나님, 저희 부모와 저의 죄로 인하여 감히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 부모가 범죄한 후 벌거벗고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을 때, 제 부모의 수치를 가리워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 때 죄 없는 짐승이 피 흘려 죽음으로 말미암아 제 부모의 죄가 가리움을 받았음을 압니다. 그래서 저 역시 저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 여기 양 한 마리를 피 흘려 죽였습니다. 하나님, 이 피를 보시고 저의 죄도 가리워주시고 저도 받아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죄인이 죄 있는 채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가 털끝만큼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 죄로 인해 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는 죄 값을 치러야 사()해지기 때문에, 죄 사함 받으려면 피 흘림, 즉 생명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로마서 6:23) 흘림이 없은즉 ()함이 때문에(히브리서 9:22), 죽음을 통한 속죄 외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

피 흘려 죽어야만 죄 값이 치러지고, 죄가 사해집니다. 아벨은 그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해 아벨은 그 구속의 원리,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죄 값을 담당할 양 한 마리를 죽여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 진리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아벨은 그 양의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속죄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아벨의 제물을 사르셨습니다. “아벨, 너는 이제 의롭다. 네 죄는 사해졌다. 이제 내가 너를 구원했다”는 약속, 그것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아벨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저의 제사를 받으시고 저를 받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아벨은 비로소 하나님과 영적 생명의 교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형님, 나는 됐는데 형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가인은 “나는 아직 덜 됐다”고 대답하고 “하나님, 제게도 응답해 주십시오. 제게도….”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런데도 감감무소식입니다. 동생 아벨이 제물로 양 새끼 한 마리 잡아 바치자, 그 때만 해도 가인은 ‘저것 가지고 되겠느냐’ 싶었을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 제물이 보기에도 훨씬 좋고, 거기에는 땀과 열심과 정성이 담겼으므로 하나님이 즐거이 받으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깨어지자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올라왔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형편없는 동생의 제물은 그냥 받으시더니, 나는 아무리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은 척도 안하시네. 세상에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어!” 동생 아벨은 거기다가 속도 없이 “형님은 안됐구려. 나는 됐는데. 형님은 참 안됐네요”라며 화를 돋우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이에 가인의 마음속에 ‘죽여 버려’ 하는 살인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생겼을 것입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라고 하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올바르게 제사 드렸다면 그럴 리가 있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결국 가인은 첫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한 1 3:1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는 사단인데, 사단은 아담, 하와를 꼬여서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를 이간시켜 쫓겨나게 하더니, 이제는 그 자식을 통해 자기 동생을 죽이는 엄청난 죄를 짓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작품입니다.

유다서 11절에 있을진저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라는 말씀이 있는데, 가인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는 수 십 년 교회 다녀도 구원받는 것,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막연하며, 정성을 드리고 열심도 하고 하나님을 위해 잘 믿어 보려고 노력하는데도 자기 마음에는 구원의 확신도 없고 답답하기만 한데, 엊그제까지 죄 짓고 교회도 다니지 않던 사람이 어디서 무슨 집회에 참석해서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았다, 거듭났다고 좋아하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평생 교회에 다녀도, 열심히 해도 구원받지 않으면 소용없다,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니 불쾌하고 밉기까지 합니다.  

그 미운 마음이 결국 무엇을 불러왔습니까? 예수님께서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하셨듯이, 미움이 증폭되면 그 결과 살인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유대 종교가들 속에 역사해서 예수님과 주님의 제자들을 죽이도록 했던 그 마귀는 또한 거듭나지 못한 종교가들 마음속에 분노와 시기와 질투심을 일으켜 믿는 사람을 핍박하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라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요한복음 16:2). 만일 그들에게 믿는 사람들을 처치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다면, 그들은 정치 세력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말은 “신자”라고 하지만, 그냥 종교인이 있고 확실히 구원의 진리를 깨달은 신앙인, 즉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자기가 천국 가기 위해 열심인 사람이 종교인이라면, 천국 가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를 핍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스마엘은 이삭을 때렸고, 장자의 명분을 스스로 팖으로 축복을 빼앗긴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육체를 따라 자가 성령을 따라 자를 핍박한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라디아서 4:29). 그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 2 - 두 가지 제사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구덩이에 빠지리라”(마태복음 15:13,14).

세례도 받고 교회에서 직분도 받고 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부하나 그 속에 하나님이 심으신 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생명이 없으면 모두 뽑아 버리실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소경된 자가 얼마나 많으며 또 그들에게 맹종하며 함께 소경된 기독교인들은 그 수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예정하셨기 때문에 받으시고 어떤 사람은 예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받지 않으신다는 주장이 있는데, 창세기 4장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정론(豫定論)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예정을 말한다면 개개인을 어떠어떠하게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예정된 두 부류 안에 각 개인의 운명이 결과적으로 정해진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인은 형이고 아벨은 동생입니다. 형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고 동생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였고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삭이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낳았는데, 형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겼고 동생 야곱이 축복을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첫 번째 것은 실패하고 두 번째 것이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는 우리 개개인이 첫째이거나 둘째이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첫 아담은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 개인이 첫 아담 안에 있느냐, 둘째 아담 예수님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첫 아담 안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나면서부터 죄와 죽음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에서 거듭나지 못한 상태로 있는 개인의 운명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열심을 다해도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둘째 아담인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의 축복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의 운명을 종결시켰고, 부활하심으로 둘째 아담, 새로운 대표가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 첫 아담은 죄인이고 둘째 아담 예수님은 의인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났고, 거듭날 때 예수님 안에서 의인으로 탄생합니다. 아담 한 사람 안에서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아담 안에서 예수님 안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지, 어떤 개인을 천국 가도록 택하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받지 않고는 완전히 개인 각자의 책임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 드리는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이 재미있게 말하던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정성을 들여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정성 없이 아무렇게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정성을 다해, 열심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때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배우다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성이 있고 없고, 열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열심으로 말하자면 가인이 아벨보다 훨씬 더 열심을 기울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처음으로 드리는 제사였으니 아무렇게나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농사한 것 가운데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땀 흘리고 정성을 들였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수고와 모든 열심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벨은 기르던 양 새끼 한 마리를 죽여서 바쳤으므로 정성으로 친다면 가인보다 훨씬 덜 할 것입니다.

필자가 첫 번째 농촌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인데, 추수감사절이면 집집마다 농사한 것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가져옵니다. 호박도 제일 큰 것, 무도 제일 굵은 것, 배추도 제일 탐스러운 것… 무엇이든 제일 좋은 것을 먼저 하나님께 가져옵니다. 제일 보기 좋고 색깔도 가장 좋은 것을 가져와서 강대상 앞에 수북이 쌓아 놓고 하나님께 감사 찬미를 드립니다. “감사하세 감사하세 하나님께 감사드리세.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께 바치고.” 아주 풍성하고 볼 만한 제물입니다. 아마 가인의 제물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으로 모아 제사 드리기 위해 특별히 정성을 들이고 애써서 가꾸었을 것입니다.

아벨은 새끼 양 한 마리를 바쳤는데, 짐승새끼는 살아 있을 때나 보기 좋지 잡아놓으면 볼품 없습니다. 피가 흐르고 창자가 흘러내리고 피비린내 나며 볼품없는 새끼 양 한 마리 바친 것을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저 같으면 아마 가인의 제물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거야 하나님이 채식보다 육식을 좋아하시니까 그렇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들에 있는 양과 염소와 모든 짐승이 다 내 것이라 네가 양을 바친들 소를 잡아 바친들 내가 좋아할 줄 아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시편 50) . 거기에는 비밀(秘密)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이 없습니다. 그 답은 신약 히브리서 11 4절 말씀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4).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를 발견하셨습니까? “믿음으로”라는 말씀이 답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너, 의롭다”고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너, 죄 없다. 깨끗해졌다”며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사람처럼, 완전히 의로운 일을 행한 사람처럼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에게는 그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믿음”이 무엇일까요?

믿음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는다는 의미가 참 애매하게 인식되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믿는다’고합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을 열심히 잘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말 앞에 행위를 나타내는 ‘열심히’라는 수식어는 붙일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대한민국 사람임을 열심히 믿는다”고 말하거나,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나는 이 비행기가 미국으로 간다는 것을 열심히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표현입니다. . 성경에 열심히 믿는다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죽을 때까지 해도 믿음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진 데 있어 그 “믿음”은 마치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할 때 “믿는다”는 것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사실을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맡긴다, 부탁한다, 의뢰한다(trust)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도 아니고, 또한 내가 무엇을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인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준비해 놓으셨는지 그것을 깨닫고 의지하고 맡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아벨은 그 믿음이 어디서 생겼을까요?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 1 - 영원으로 가는 길, 생명의 길, 좁은 문과 넓은 문

영원으로 가는 , 생명의
"아담이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아우의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입을 벌려 손에서부터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없나이다”(창세기 4:1∼13).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식물, 동물 그리고 사람을 만드신 것이 나옵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에게 지켜야 할 계명을 주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창세기 3장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깨뜨린 최초의 범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는 죄를 범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즉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이 나옵니다. 그래서 창세기 처음 몇 장에 제목을 붙인다면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순서, 2장은 율법의 시작, 3장은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른 저주의 선언, 4장은 최초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여 타락한 후 최초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사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 영생으로 가는 길을 발견한 사람이 아벨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밖에서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 중에 가인과 아벨, 이 두 아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요즘말로 똑같이 교회 다니고 똑같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어떤 사람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간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심판을 받고 쫓겨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태어나 말 배우면서 율법을 배우고, 성경을 외우고 십일조를 바치며, 금식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열심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했다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저지른 어리석은 옛 이야기이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고 열심히 기도하고 천국 가고자 노력하는 사람 중에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과  넓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

주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과 넓은 문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신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 가운데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믿고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고도 지옥에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12). 사람의 보기에는 바른 같으나 하나님 보기에 바르지 못한 것이 얼마든지 있을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리라 하리라”(마태복음 7:21~23)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먼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요한복음 6:40)입니다.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천국에 들어갈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문제는 현재 우리에게도 관심거리입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24)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사람 중에 실제로 들어가는 사람보다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있을까요? 이는 참으로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믿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에 속하는지, 아니면 믿고도 지옥 가는 사람 가운데 속하는지 점검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말씀 대로 믿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인지의 여부를 하나님 말씀에 비춰보아야 합니다. 교회당에 다닌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로마서 8:9) 말씀 대로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곧 성령이 증거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로마서 8:16). 교회당에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믿음 좋다고 칭찬과 존경을 받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시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버리운 자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