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태복음 15:13,14).
세례도 받고 교회에서 직분도 받고 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부하나 그 속에 하나님이 심으신 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생명이 없으면 모두 뽑아 버리실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소경된 자가 얼마나 많으며 또 그들에게 맹종하며 함께 소경된 기독교인들은 그 수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예정하셨기 때문에 받으시고 어떤 사람은 예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받지 않으신다는 주장이 있는데, 창세기 4장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정론(豫定論)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예정을 말한다면 개개인을 어떠어떠하게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예정된 두 부류 안에 각 개인의 운명이 결과적으로 정해진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인은 형이고 아벨은 동생입니다. 형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고 동생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였고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삭이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낳았는데, 형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겼고 동생 야곱이 축복을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첫 번째 것은 실패하고 두 번째 것이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는 우리 개개인이 첫째이거나 둘째이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첫 아담은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 개인이 첫 아담 안에 있느냐, 둘째 아담 예수님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첫 아담 안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나면서부터 죄와 죽음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에서 거듭나지 못한 상태로 있는 개인의 운명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열심을 다해도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둘째 아담인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의 축복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의 운명을 종결시켰고, 부활하심으로 둘째 아담, 새로운 대표가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장). 첫 아담은 죄인이고 둘째 아담 예수님은 의인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났고, 거듭날 때 예수님 안에서 의인으로 탄생합니다. 아담 한 사람 안에서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아담 안에서 예수님 안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지, 어떤 개인을 천국 가도록 택하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받지 않고는 완전히 개인 각자의 책임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 드리는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이 재미있게 말하던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정성을 들여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정성 없이 아무렇게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정성을 다해, 열심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때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배우다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성이 있고 없고, 열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열심으로 말하자면 가인이 아벨보다 훨씬 더 열심을 기울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처음으로 드리는 제사였으니 아무렇게나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농사한 것 가운데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땀 흘리고 정성을 들였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수고와 모든 열심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벨은 기르던 양 새끼 한 마리를 죽여서 바쳤으므로 정성으로 친다면 가인보다 훨씬 덜 할 것입니다.
필자가 첫 번째 농촌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인데, 추수감사절이면 집집마다 농사한 것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가져옵니다. 호박도 제일 큰 것, 무도 제일 굵은 것, 배추도 제일 탐스러운 것… 무엇이든 제일 좋은 것을 먼저 하나님께 가져옵니다. 제일 보기 좋고 색깔도 가장 좋은 것을 가져와서 강대상 앞에 수북이 쌓아 놓고 하나님께 감사 찬미를 드립니다. “감사하세 감사하세 하나님께 감사드리세.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께 바치고.” 아주 풍성하고 볼 만한 제물입니다. 아마 가인의 제물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으로 모아 제사 드리기 위해 특별히 정성을 들이고 애써서 가꾸었을 것입니다.
아벨은 새끼 양 한 마리를 바쳤는데, 짐승새끼는 살아 있을 때나 보기 좋지 잡아놓으면 볼품 없습니다. 피가 흐르고 창자가 흘러내리고 피비린내 나며 볼품없는 새끼 양 한 마리 바친 것을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저 같으면 아마 가인의 제물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거야 하나님이 채식보다 육식을 좋아하시니까 그렇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들에 있는 양과 염소와 모든 짐승이 다 내 것이라 네가 양을 바친들 소를 잡아 바친들 내가 좋아할 줄 아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시편 50편) . 거기에는 비밀(秘密)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이 없습니다. 그 답은 신약 히브리서 11장 4절 말씀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4).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를 발견하셨습니까? “믿음으로”라는 말씀이 답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너, 의롭다”고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너, 죄 없다. 깨끗해졌다”며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사람처럼, 완전히 의로운 일을 행한 사람처럼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에게는 그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믿음”이 무엇일까요?
믿음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는다는 의미가 참 애매하게 인식되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믿는다’고합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을 열심히 잘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말 앞에 행위를 나타내는 ‘열심히’라는 수식어는 붙일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대한민국 사람임을 열심히 믿는다”고 말하거나,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나는 이 비행기가 미국으로 간다는 것을 열심히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표현입니다. . 성경에 열심히 믿는다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죽을 때까지 해도 믿음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진 데 있어 그 “믿음”은 마치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할 때 “믿는다”는 것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사실을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맡긴다, 부탁한다, 의뢰한다(trust)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도 아니고, 또한 내가 무엇을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인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준비해 놓으셨는지 그것을 깨닫고 의지하고 맡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아벨은 그 믿음이 어디서 생겼을까요?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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