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2009

색깔의 예언적 의미

이글은 환상과 꿈과 같은 예언적인 계시들에서의 "색깔"의 의미와 뜻을 성서적으로 참고하고자 하는 글입니다. 특히 꿈을 꾸는 분들과 예언적인 환상들을 보시는 분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리라 믿습니다.

붉은색 - 예님의 보혈(히9:12-14), 속죄(레17:11), 은혜의 언약(히9:15), 전쟁(계 19:11), 그리스도의 희생(습1:7-8, 행 20:28), 소멸하는 불(히12:29), 예수님의 인성(히12:2), 찬양의 제사(히 13: 15), 새 언약(히 8:12-13), 죄(이사야 1:18), 구속함(창 38:28-29) 피의 언약(눅 22:20), 유월절/보호(출12:23), 용서/구출(수 2:18,21), 용서(히 9:22)

녹색 - 영원한 생명(요 1 5:12), 건강, 치유, 영생(계 22:2), 번영, 신선함, 활력이 넘침, 결실이 풍부한, 생기가 넘침, 새로운 삶(시 92:14), 회복 (시 23:2) 새로운 시작, 하나님의 거룩한 씨(창1: 11-12), 보호 (시 52:8), 소중한 부부관계 (아가 1:16), 찬양: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 입는 흉배의 세번째 조각으로서 녹색의 에메랄드이며 이것은 야곱의 세번째 아들 레위를 묘사하는 것이었다.(출 28:15,17), 주님께 기쁨으로 축하와 감사의 찬양을 올림(역대상 16:4, 역대하 29:30), 대제사장으로서 아버지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모범으로서의 찬양과 기도(히 2:12), 찬양과 감사 (히 13:15, 시 50:23), 보좌:천국의 하나님의 보좌에는 무지개가 둘러 있는데 대체로 녹옥, 녹색 에메랄드 빛이다(계 4:3), 백성들의 찬양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시 22:3)

파랑색 - 천국의 주님의 자리(엡 2:6), 천국, 하나님의 보좌(에스겔 1:26), 하나님 계시, 계시의 지식(출 24:10), 은혜(살후 2:16), 제사장직 (출 28:6), 권세, 극복자, 정복자(계시록 12:11), 진리(요 1:14), 하나님의 말씀(벧전 1:23), 여호와의 영광(엡 1:17), 영광의 소망(골 1:27), 소망, 희망 (딤전 1:1, 엡 1:18)

자주빛(진홍빛) - 메시야의 왕위(요 19:2), 왕권 (삿 8:26, 막 15:17,20), 믿는 자들의 왕위(벧전 2:9), 제사장직(출 39:1-3, 28:15), 빛나는 왕의 위엄(에 1:6), 왕(아가 7:5, 3:10), 장막(출 25:4, 26:1, 27:16), 부유와 아름다움(잠언 31:22), 중재자(딤전 2:5), 왕국의 권세와 능력과 주권(겔 27:7), 하나님의 약속(고후 1:20), 상속과 순종(창 49:15),

노란색 - 축제, 축하(시 46:4-5), 빛(사 2:5), 영광의 나타남(롬 8:18), 하나님의 영광(겔 1:4), 영광과 기쁨(살전 2:20), 즐거움(시 30:5), 한 환상, 기름부음 (고후 1:21, 요1 2:20, 시6813)

주황색(Orange) - 추수 (마 9:38), 열매가 풍성함(골 1:9-10), 성령(마 3:11-12), 하나님의 불(시 97:3), 능력/성령 세례(행 2:3), 제물(레 3:3), 깨끗함/ 정련함(말 3:2), 소멸의 불(히 12:29), 용사(계 19:11)

분홍색 - 육신의 심장(겔 11:19), 충성됨 (살전 5:24), 겸손 (벧전 5:5-6, 디도 3:2), 친밀함 (아가 1:2), 샤론의 장미(아가 2:1), 하나님의 자녀(막 10:15), 어린아이 같은 믿음(마 18:3-5)

황갈색(Amber) - 하나님의 영광(겔 8:2), 하나님의 기름부음/성별됨(출 29:7), 예수님(겔 1:27)

옥색(Aqua)/청록색(Turquoise) - 상쾌함(Refreshing)(행 3:19), 성화/씻김(고전 6:11), 생수(요 4:10,14, 7:37-39), 삶을 성령님이 흐르시도록 내어 드림(사 11:2), 새 예루살렘 (계 21:1), 소원의 항구(시 107:30)

진주색 - 보물/사례/문 (마 13:44-46), 천국의 문(계 21:21)

맑고 투명한 색 - 물 세례(마 3:11, 요 3:3, 5-7), 생명의 강(계 22:1)

흰색 - 신부의 예복(계 19:8), 순수함(계 3:18, 단 12:10), 구원(단 12:3), 빛 (마 17:2), 천사들 (요 20:12), 성도들(단 12:3), 먼 옛날(단 7:9), 모든 열방들로부터의 군중들(모든 색을 내포한 흰색, 계 7:9), 극복자(계 3:5, 요 15:5), 승리(요 20:12), 주님께 성결함(레 6:10, 출 39:27), 공의 (계 19:8), 충실/진실/정의(계 19:11), 하나님의 군대 (계 19:14), 성령/기사와 표적(롬 15:18-19), 영광(요 16:14), 의로움(사 61:10), 정결함(시 51:7), 복종함 (엡 5:21), 환희/기쁨(시 118:24), 평화(벧전 3:11), 승리(시45:4-5)

무지개 빛 - 극복자/정복자(계 21:7,27), 언약의 무지개(계 4:3), 귀한 돌/숨겨진 보배(계 21:11-19)

검은색 - 죽음/형벌/기근/고통(애 4:8), 사망/공포(계 6:5), 재난/비탄(렘 8:21), 죄(요 3:19-20), 회개(계 3:19), 흑암(유 13), 속박(시 107:14), 화해의 중재자(롬 5:10, 계6:5), 겸손/자아의 죽음(벧전 5:5), 빛이 없음/ 색이 없음

갈색 - 하나님의 자녀(사 11:1, 렘 23:5), 겸손, 복종, 회개(벧전 5:5, 마 11:21)

황갈색(Tan) - 빵, 친교, 예수님의 몸(눅 22:19)

검붉은색(Wine) - 새 포도주(눅 5:38), 즐거움( 시 118:15),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히 2:10), 새 언약의 잔(눅 22:20), 성령의 충만(엡 5:18), 사랑(아가 1:2) 풍성한 삶(요 10:10) 축복(욜 2:24, 겔 34:26), 기쁨(시 16:9), 풍성함/부유함(엡 3:20), 예언(욜 2:28), 항복(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시험하시에 대한, 출 16:4)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주를 으깨야만 한다.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다 부서져야만 포도주가 될수있다. 영적으로 말하는 것은 육적인 찌꺼기 다로 남아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기도하다. (출 17:7, 마 4:5-7)

청동색, 놋색, 담황색, 구리빛, 적갈색 - 심판(단 2:39), 불시험(벧전 4:12-13), 예수님의 발(계 1:15), 세탁(출 30:17-21), 제물(출 27:1-3), 힘(욥 40:18), 죄값/용서(신 21:9) 장막의 보수(출 38:30)

은색 - 구속(신 18:15-16, 레 5:15, 27:3-6), 하나님의 말씀(히 4:12), 지혜(골 2:2-3, 잠언 2:1-5), 강한 믿음(빌 4:13), 순수함(시 66:10)

금색- 아름다움(아 5:11), 귀중함(벧전 1:7), 영원한 하나님(시 21:3), 신격(계 14:14), 영광(겔 21:23, 겔 1:4), 하나님의 영광의 빛(계 21:23), 위엄찬(유 8:26), 불의 심판(벧전 1:7), 자비(출 25:17), 명예(마 2:11), 제련된(출 37:2,6), 왕(시 21:3), 승리( 21:1-3), 추수(계 14:16), 하나님의 본성(계 3:18), 천사들은 금빛 허리띠를 차고 천국의 성소에서 사역한다(계 15:6), 성경적으로 금 목걸이는 큰 권세아래 있는 사람의 권위의 상징이다.(창 41:42, 겔 16:11), (단 5:29), 사도 요한은 천국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금으로 만들어진 왕관이 씌워 있는것을 보았다. (계 14:14), 희랍어에서 왕관이 권세와 명예와 축복의 수단이며 승리의 화관으로 보는것에 익숙하다

번역:한성진.
http://cafe.godpeople.com/KingdomMove/

색깔과 상징의 예언적 의미들

1.색깔과 상징의 의미들 -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색깔들과 의미들의 목록들을 찾는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충분한 목록들을 포함하기위해 노력했지만 성경에 관계되지 않은 것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검은색 - 고통, 노예, 암흑, 죽음, 사악, 죄, 슬픔. - 검은색은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들을 되돌려 보낼 수 있다. 이것의 기원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리고 암흑(검은) 하나님이 창조한 하늘과 땅의 밖에 있는 공허함(어두움)이다.

푸른색 - 하나님의 계시, 믿음, 충실함, 은총, 하늘, 하나님의 사랑, 진리

빛나는 색깔들 - 은혜, 주님의 기쁨

청동색 - 하나님의 심판

갈색 - 영적인 죽음

금색 - 모든 성도들, 영원하신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거룩한 삶, 청결, 정화

회색 - 슬픔

녹색 - 자비, 영원한 삶, 건강, 희망, 번영, 봄, 삼위 일체

자홍색 - 기쁨, 열정

오랜지색 - 가을 추수, 치료, 찬양

핑크색 - 새로운 삶

자주색 - 왕의 신분, 왕국의 권위, 주권, 귀족, 힘, 왕권

빨간색 - 속죄, 예수의 피, 용기, 사랑, 순교하는 성도들, 구속, 희생, 주권자의 힘

장미색(담홍색) - 메시아

주홍, 진홍색 - 그리스도 희생의 양, 용기

은색 - 속죄, 구속의 대가, 조화, 지혜, 하나님의 말씀

보랏빛 - 사랑, 열정, 회개, 슬픔, 고통

흰색 - 그리스도의 정의, 창조자 하나님, 거룩함, 순결, 깨끗함, 정직, 성도들

노란색 - 기쁨, 영적 계몽

2. 육체적 의미, 사물, 상징들  - 많은 사람들은 구조들, 장식들, 깃발 모양의 것, 그리고 어떤 것들의 상징들에 대해서 의문들을 가지고 있다. 다음의 목록들이 그런 의문에 약간의 도움은 될 것이지만 이것은 그 의미의 전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무늬를 넣어 짠 직물(브로케이드) - 왕들이 입는 옷

흰색의 내의류(세마포: 리넨) - 예수님의 순수, 성도들의 정의들, 왕족과 사람들의 계급에 의한 옷

천등이 얇은 재료들 - 자유와 밝음, 주님의 존재속에서의 우리들의 즐거움

다이아몬드들 - 영속적인, 중요한 가치, 하나님의 성도들,

번쩍이는 돌들과 보석들 - 하나님의 빛, 영광의 하나님

진주들 - 영속적인, 중요한 가격

종(벨)들 - 거룩한 장소속에 있는 고위 성직자들의 운동, 찬양과 경배속에서의 승리

양초 - 예수님 - 인류에게 비취는 빛

십자가 - 예수님의 죽음 위로의 승리, 우리들의 믿음

왕관 - 영관의 왕관, 생명의 왕관, 정의의 왕관

예수님 - 모든 하늘과 땅 위의 왕, 승리

비둘기 - 성령

불꽃 - 성령

꽃들 - 하나님의 사람들의 “활짝 핀” 풍성한 열매들, 예수님 - 샤론의 장미와 골짜기의 백합화

열쇠들 - 영적인 영역 위에 있는 영적인 권위

어린양 - 예수님 - 우리의 죄들에 대한 희생

등불 - 지혜와 지식

다윗의 별 - 이스라엘의 백성들

태양 - 예수님 - 정의의 아들

장식술(Tassels) - 거룩함, 하나님의 명령들을 복종하도록 생각나게 하는 것

번역 : 한동윤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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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두 방면

지혜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의 두 방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혜와 지식을 얻기 위하여 많은 학문을 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지혜가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8-21절을 보면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셨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 것으로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9-21절을 보면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만약 관원들이 세상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혜를 말하되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닌 오직 비밀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데 이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골로새서 2장 2-3절을 보면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비밀이십니다. 비밀은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그 비밀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모두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소경이라는 그 자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5-27절을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들을 아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아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는 성경을 통해서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들의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기 위하여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감추어진 책입니다. 영의 안목으로 봐야 합니다. 육의 안목으로 그냥 봐서 안다고 하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의 눈을 떠야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성경이 비밀인 것은 거의 모두가 두 방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공개된 부분과 은밀하게 감추인 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시는 분은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으로서의 또 하나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비밀을 나타내는 방법은 계시입니다. 세례요한도 하나님의 어린 양을 알아볼 때에 하나님의 환상과 계시로 알았었습니다(요1:32-33) 그러므로 아들을 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의 눈을 떠서 성경을 통해서 아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서 아는 방법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12절을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학식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깨닫고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지식이나 모든 것들을 똥으로 여기고 다 내어버린 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의 믿는 이들은 그와 역행하는 것 같습니다. 유명한 사람의 말을 교훈삼는 자들은 유식한 자 같으나 사실은 미련한 자들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의 말이라도 그것은 초등학문에 속한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 한 권이면 족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에는 두 방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 미련한 것이요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썩어버린 이유는 사람의 지혜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의 눈을 떠서 성경을 통해 아는 방법이 있고 계시를 통해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을 중심 삼지 말고 유명한 사람들의 말로 교훈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하라고 하신 누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비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어야 합니다. 그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아멘!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아멘! <예수님따라가기>

영광의 뜻의 두 방면

이제 경배에 관한 지식들 중 세 번째 말씀으로서 영광에 대해서 알아 볼 것입니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영광의 뜻도 두 방면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말하고 또 하나의 뜻은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나 명예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뜻하는 영광에 대한 성구들
[겔 43:5]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 뜰에 들어 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출 33:18-23]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아버지 하나님은 영체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에 싸이신 분이시며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볼 때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실체의 형상을 볼 수 있도록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서의 본체는 실체나 실상을 말하고 형상이란 정확한 복사나 재 묘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을 정확하게 복사하듯 그대로 그러내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본체가 계시고 본체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신 분이 계시는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은 본체이시고 그 본체의 모습을 똑같이 그대로 드러내신 분이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나 명예를 뜻하는 영광에 대한 성구들
[사 42: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고후 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영광의 뜻은 원래 무게를 뜻하는 말인데 그것은 곧 중요한 것이나 가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영광의 뜻은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나 명예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으시되 찬송의 그릇으로 지으셨습니다(사43:21) 그러므로 자신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시며 자신의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영광이란 두 방면의 뜻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말합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볼 수 없는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아들이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영광의 뜻은 무게 있는 것을 지칭하는 말로서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나 명예 같은 귀한 것을 말합니다. 아멘!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립니다.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 원합니다. 아멘!
<예수님따라가기>

찬송의 뜻의 두 방면

이제 경배에 관한 지식들 중 두 번째 말씀으로서 찬송에 대해서 알아볼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두 방면으로 구성 되어 있듯이 찬송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춤을 추며 찬양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높이며 존귀히 여기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사무엘 하 6장을 읽어 보면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삼하6:5) 다윗 왕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을 친 후에 법궤를 메어 올 때에 그는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춤을 추며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던 중 소들이 뛰므로 법궤가 떨어질까 봐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습니다(삼하6:6-7)

그러므로 다윗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오지 않고 오벳에돔 집에 석달을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오벳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는 것을 보고 다윗이 다시 다윗성으로 법궤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을 불고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다윗이 베로 만든 에봇을 입었음으로(삼하6:14-15) 속살이 드러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 미갈이 창문 너머로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겼습니다. 사무엘 하 6장 20절을 보면 미갈이 다윗 왕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한 다윗의 답변은 21-2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갈은 사울의 딸로서 다윗 왕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궤가 다윗 성에 들어올 때에 다윗 왕이 너무나 기쁜 나머지 법궤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추었습니다. 그 때에 베로 된 에봇을 입었기 때문에 하얀 속살이 드러났습니다.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본 미갈이 다윗 왕을 업신여겼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미갈은 죽을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또 출애굽기 15장 1-2절을 보면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고 기록하고 있고 출애굽기 15장 20절 보면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을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찬송하거나 춤을 추며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43장 19-24절을 보면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와하였으며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 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예물로 인하여 너를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찬송하는 삶을 말합니다.

천년왕국 때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할 것인데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짐승들도 하나님을 존경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으실 때에 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심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것을 하여 하나님을 괴롭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찬송의 나라를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괴로워하였으며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않았으며 만족케 하지도 않았으며 죄 짐으로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며 죄악으로 하나님을 괴롭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죄 짐으로 인하여 수고하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괴로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하는 삶이란 먼저 죄악을 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찬송은 입술로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찬송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고 존경하며 그 이름을 부르고 공경하며 만족을 드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와 악을 버리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찬송하는 그릇으로 지어졌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은 괴로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죄를 끝내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때로는 다윗이나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모든 체면 염치 버리고 춤을 추며 수금과 비파와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면으로는 하나님을 뜻을 향한 합당한 마음을 품고 중심으로 하나님 인정하고 찬양하며 그 이름을 부르고 존중히 여기는 삶을 드려야 합니다. 이런 삶이 없는 입술의 찬송은 거짓된 찬송입니다. 그러므로 입술의 찬송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찬송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찬양의 두 방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수금과 소고와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춤을 추며 찬양하는 것을 말하고 또 하나는 죄를 끝내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말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죄를 끝내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 향기로운 번제의 삶을 살겠습니다.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 원합니다. 아멘!   <예수님따라가기>

11/29/2009

제 3 성령의 물결 -펜사콜라 대부흥

'성령의 불’ 축제가 시작되다'  - 밤마다 평상시와는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쾌하고 사내답게만 보이던 십대 소년들이 성령의 권능아래 억제할 수 없이 진동을 하고, 잘 차려입은 부유한 사업가들이 무릎을 꿇고 울었다. 나이 많은 부인들과 젊은 어머니들은 춤을 추고, 어린 아이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을 찬양하면서 웃었다. 마약 중독자들과 창녀들도 마루바닥에 엎드려 회개했다. 1995년 어버이 날 예배를 기점으로, 브라운스빌 교회는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한 부흥의 불길로 인해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매일 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교파와 인종을 초월하여 미국 전역과 전 세계로부터 펜사콜라 브라운스빌 교회로 모여들었다. 이들의 목적은 하나,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성령의 불’ 축제가 시작된 이후 불과 몇 주일 동안 9만7천명의 남녀노소, 십대와 할아버지 할머니, 친구들과 이웃들과 가족들,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저녁집회에 참석했다.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다. 당회장 존 킬패트릭(John Kilpatrick)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밤마다 낮 익은 사람들과 낮선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을 더욱더 사모하며 성령께서 그들의 삶에 역사 하시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주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치켜든 사람들의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성령의 생수를 마셨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불의 축제를 주시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죠!” 킬패트릭 목사는 자신이 찰스 피니의 믿음도, 아주사 거리의 윌리엄 시무어의 끈질긴 힘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직감도 없었지만 이런 은총이 임하기를 지난 2년 반 동안 계속 기도했다고 말했다.

조용기 목사의 예언 - 한국의 조용기 목사는 1991년 미국 워싱톤 주 시애틀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미국의 영적 쇠퇴를 깊이 염려하여 미국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그 때 조 목사는 성령의 감동으로 미국 지도를 가져오게 한 후, 손가락으로 좁고 길게 돌출한 플로리다 주의 펜사콜라 도시를 가리켰다. 조 목사는 이렇게 예언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닷가 도시인 펜사콜라에 부흥을 보내려 한다. 이 도시로부터 불길이 일어나 마침내 전 미국이 타버릴 것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다. - 브라운스빌 교회의 담임 존 킬패트릭 목사는 8세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고함을 지르면서 집을 나가버린 후 “하나님, 전 이제 아버지가 없어요.”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때 거대한 따뜻한 손이 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시원한 물 한 컵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존,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주마.” 어린 킬패트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고 계시는 것을 알았다. 킬패트릭은 성령 충만하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1965년 아놀드 중학교 생물학 시간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존, 오늘 내가 너를 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불렀단다. 너의 삶에 나쁜 영향을 줄 네 이웃의 소년과 소녀들을 멀리 하렴. 그들과 가까이 하면 내가 너를 잃어버리게 된단다. 오늘 네가 나의 말씀을 결코 의심하지 않도록 너에게 나의 부름을 확신시켜 주마.” 그 날 학교 교목은 킬패트릭을 보고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구나, 오늘 네가 다르게 보인단다.”라고 말해주었다. 주님은 킬패트릭의 어머니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오늘 내가 너의 아들을 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불렀다. 아들의 삶에 나쁜 영향을 줄 이웃의 다른 소년 소녀들을 멀리 하게 하라.”

두 천사를 만나다 - R. C. 웨첼(Wetzel) 목사는 큰 키에 당당한 모습이었으며, 온건하고 힘과 지혜가 있는 덕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앞으로 목회자가 될 십대들을 데리고 심야 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는 지난 2년간 계속 이 기도회를 이끌어왔다. 당시 교회는 분열되고 사회상은 혼란으로 말이 아니었다. 웨첼 목사를 포함해 17명의 기도가 계속됐다. 그러기를 얼마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 졌다. 거룩함이 교회 안에 가득 찼다. 그리고 굳게 채워 놓은 강단 양쪽 문이 갑자기 활짝 열렸다. 17명 모두 힘차고, 아름답게 빛나는 두 천사가 들어와서 강단 양쪽에 근엄하게 서는 것을 봤다. 그들의 존재는 마루에서 천장까지 가득 찼다.

천사들 주변은 푸른색과 분홍색과 황금색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천사들은 5분 가령 서 있더니 서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킬패트릭은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실제였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거룩한 땅에 서 있었다. 킬패트릭은 이렇게 말했다. “천사들이 섰던 자리에 다가갔다가 모두들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져버렸어요. 그 권능은 너무나 강력해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죠. 문들은 열려있었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새벽 3시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거룩한 품안에서 평안하게 안겨있었어요. 아침 햇살이 빛날 때가 돼서야 일어날 수 있었답니다.” 그 후 주중 예배 시간에 웨첼 목사가 기도를 시작하자 성령의 권능아래 참석한 38명 모두가 쓰러졌으며, 모두가 성령세례를 체험했다. 이후부터 교회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브라운스빌 교회로 부임하다 기도의 깃발을 만들고 축복을 강조하다 : 킬패트릭 목사는 1982년 펜사콜라에 있는 교인 3백 명의 브라운스빌 하나님의 성회에 부임했다. 그의 부임 이후 교회가 성장하여 1989년에 보다 큰 교회를 세웠다.

교회는 나날이 성장했고 교인들은 성공적인 목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킬패트릭 목사는 공허함,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는 성전에서 기도에 힘쓰며 주님의 말씀에 더 한층 갈증을 느꼈다. 1992년 8월에서 9월 동안 킬패트릭 목사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마태복음 21장 13절 말씀에 의지하여 토요일 밤마다 성령세례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첫날밤 1백여 명의 교인들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를 받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와서 기도를 받았다.

그는 12가지의 기도 깃발을 만들었는데(사31:9), 영적 전쟁 깃발, 가정 깃발, 영혼의 깃발,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한 깃발, 치유 깃발, 목회자들을 위한 깃발, 예루살렘 평화를 위한 깃발, 학교 깃발, 브라운스빌 목회 깃발, 부흥을 위한 깃발, 자녀들의 깃발, 재난의 생존자들을 위한 깃발 등이었다. 주일 밤 예배에 1천여 명의 교인들이 참석하여 각각의 깃발아래 모여 행진하며 기도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깃발 아래서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었다.

놀랍게도 주일 밤 예배 참석인원이 20퍼센트나 증가했다. 교인들은 한 깃발 아래서 45분간 기도하고 다음 깃발로 옮겨갔다. 이렇게 기도의 행진이 계속하는 동안 킬패트릭 목사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만일 저들이 이 집을 계속 기도의 집으로 만든다면, 나는 나의 영광으로 이 집을 방문하리라.” 킬패트릭 목사는 부흥의 깃발을 강조하며 더 많이 기도하면서 설교 때에는 축복을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더욱 더 갈망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교회를 위해 예비하고 계시는 축복을 부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신약과 구약의 축복을 연구하고 설교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여덟 가지 축복, 유대 전통에서 부모들이 오른 손으로 안수하며 자녀들을 축복하는 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신 것(갈3:13-14),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현상대로 창조하시고 축복하신 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손자 요셉의 차남 에브라임을 축복한 일 등 축복에 관한 많은 것을 연구하고 설교했다.

교회에서 천사를 만나다 - 어느 토요일이었다. 성전 문을 열었을 때 킬패트릭 목사는 갑자기 모든 머리카락이 일어서고 온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문을 열자마자 어떤 찬란한 힘(아마도 천사의) 속으로 바로 들어간 것 같았었죠. 회중석 옆에 기대 주저앉았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그는 오래 전에 있었던 두 천사의 방문을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몇 시간을 기도하면서 울었다. 그는 이제 큰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으나 그 다음 날 주일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후 그는 토요일 밤마다 성전에 와서 기도했다. 그는 설교할 때마다 교회 부흥과 성령의 역사를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 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원하지 않는다면, 저는 사임하겠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무관심한 2천 명의 교회를 목회 하느니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50명의 교회를 목회 하겠습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20여 명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다. 1천8백 명이 남았다.

스티픈 힐 목사를 초청하다 - 존 킬패트릭 목사는 브라운스빌 교회의 부흥을 위해 2년 반 동안 기도한 후, 스티픈 힐(Stephen Hill)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 집회를 열었다. 힐 목사는 회심하기 전에 마약 중독 자였으며, 마약을 구하기 위해 훔치는 버릇까지 있었다. 그는 목사가 된 후 아르헨티나 부흥운동을 위해 7년간 사역했으며 남미,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집회를 가졌다. 그는 영국에 머무는 동안 성령 충만한 영국 국교회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고 성령체험을 했다. 1995년 어버이날 예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힐 목사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아침에 역사 하실 것입니다.”를 반복해서 선포했다. 힐 목사가 기도 받을 사람들을 강단 앞으로 초청하자 1천여 명이 달려 나왔다. 킬패트릭 목사는 힐 목사의 안수기도를 돕기 위해 힐 목사를 따라 강단 오른 편으로 갔다. 힐 목사가 기도하기 시작하자 킬패트릭 목사는 평상시와는 다른 다소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성령의 강한 바람이 불어오다 - 킬패트릭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힐 목사님의 등에 한 손을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한 남자 분의 머리에 얹고 힐 목사님과 함께 기도했어요. 하나님의 권능아래 그 남자 분은 마루에 쓰러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춤추기도 하고,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억제할 수 없이 떨기 시작했죠.” “갑자기 사도행전 2장에서와 똑같이 바람이 저의 두 다리를 통해서 불어왔습니다.

강한 바람이 저의 두 다리를 통해서 불어오더니 갑자기 저를 넘어뜨렸습니다. 일어설 수가 없었어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죠.”킬패트릭 목사는 토니 테일러(Tony Taylor) 목사의 도움으로 강단위로 옮겨졌다. 킬패트릭 목사는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여기 계십니다. 모두 앞으로 오세요, 오세요!”하고 외쳤다. 하나님은 브라운스빌 교회에서 드려진 2년 반 동안의 부흥을 위한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성령의 불’ 축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스티픈 힐 목사는 그의 손을 킬패트릭 목사를 향해 흔들면서 단순히 “주님, 더욱 부어주시옵소서!”라고 했다. 킬패트릭 목사는 1톤의 벽돌에 눌린 것처럼 대리석 마루에 나가떨어졌다. 그는 12시 반부터 오후 4시까지 마루에 누워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한 것이다. 몇 사림들이 와서 그를 일으켰다. 그는 두 주일 동안 강한 힘에 눌려 있었다.

사람들은 킬패트릭 목사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을 보러 왔다. 사람들은 이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목사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킬패트릭 목사 자신만은 자신의 일을 믿을 수 있었다. 브라운스빌 집회를 통해 성령의 역사하심이 여러 가지 현상으로 강하게 계속 나타났다. 매일 밤 성령의 역사가 계속 일어났다. 성령의 권능 아래 사람들이 쓰러졌다. 예배시간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누워있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전기에 감전되듯이 하나님의 능력이 찬란한 힘으로 임재하시니 사람들이 견디지를 못하고 쓰러졌으며, 억제할 수 없이 떨기도하며, 울부짖기도 하며, 한없이 웃기도하고,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술 취한 듯 비틀거리기도 하고, 근엄하기도 하며, 춤추고 노래하기도 하며, 환상과 꿈을 꾸기도 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다. 그 결과 생수의 강물을 마시게 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마약중독자와 창녀가 변화되고, 사업가가 새로워지고, 병자가 치유되고, 마음 약한 자가 강해지는 등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났다. 보기에도 놀라웠다. 조지 휫필드와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 때와 같았다

성령의 기름부음, 세계를 강타하다 - 어버이날의 예배 이후 부흥집회는 계속됐다. 성령의 역사는 기이하고도 감동적인 방법으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터치’했다. 몇 개월 후 ‘펜사콜라 뉴스 저널’은 이 부흥운동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전 세계 사람들이 이 부흥운동에 호기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언론은 “1995년 6월 18일 어버이날에 성령의 임재하심과 생수의 강물이 흐르기 시작한 이후 6주 만에 교단의 벽을 넘어 22개국으로부터 3만여 명이 예배에 참석했고, 1만여 명이 회심하였으며, 매일 밤 예배에 2천3백~4천2백 명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는 9만7천 명이, 2000년까지 3백50만 명이 다녀갔으며 회심한 사람만도 35만 명이 넘었다.

한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 사람들이 펜사콜라 브라운스빌 교회로 모여들었으며, 세계 교회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브라운스빌 교회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영국을 강타했다. 영국의 카리스마적인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체험하고자 미국의 펜사콜라에 속속 모여들었다. 1998년 통계에 의하면 1백90만 명 이상이 부흥의 불길을 경험하기 위해 펜사콜라 시로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도 영국으로부터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다녀갔으며, 영국의 4만2천 교회 중 1만2천 교회가 토론토와 펜사콜라의 부흥에 영향을 받고 다시 부흥의 불길을 경험했다.

청소년들에게 성령의 불이 붙다 - 브라운스빌 교회의 10대들에게 성령의 역사하심이 강하게 나타났다. 타락해 가던 그 곳 청소년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그 결과 청소년을 위한 경배와 찬양예배가 목요일 밤마다 드려졌다. 1995년 1백 명으로 시작한 경배 찬양 예배는 3년만인 1998년에 9백 명으로 불어났다. 청소년들을 위해 매주 기도회를 가졌다. 학생들을 교실에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어 국기 게양대 앞 학교 잔디밭에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1년 만에 3백 명에서 2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기도했다. 10대들이 강단 앞으로 몰려와 담배, 콘돔, 마리화나 봉지, 각종 마약, 복권, 유행가 CD, 이상한 글귀가 새겨진 T셔츠 등 잡다한 현대 청소년 세대의 우상들을 큰 드럼통이 가득 차도록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그 지방 경찰서장은 브라운스빌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여 청소년들이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경찰 서장은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이러한 복음적인 집회만이 미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습니다.”고 감탄하며 말했다. 몇 주일이 지난 후 경찰서장의 딸도 브라운스빌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됐다.청소년 담당 목사인 리차드 크리스코(Richard Crisco) 목사의 청소년 선교와 교육 전략은 감동적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 13주간의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그는 청소년들을 위한 새로운 제자훈련의 3가지 요소는 첫째, 간단할 것(simple) 둘째, 실질적일 것(practical) 셋째, 영적일 것(inspirational) 등이라고 말했다.

제자훈련 리더들이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간단했다.

첫째, 하루에 성경 3장을 읽을 것,

둘째, 한 주에 성경 한 절을 암기할 것,

셋째, 한 주에 한 사람에게 전도하기의 세 가지 뿐이었다.

크리스코 목사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이 진동하든지, 쓰러지든지, 방언을 하든지 모두 좋아. 그러나 사단이 나타나 자네들을 유혹한다면 어떻게 하지? 사단 앞에서 진동만 하고 있으면 사단이 도망갈까? 성령의 권능 아래 쓰러져서 죽은 척 하고 누워 있으면 사단이 자네들을 가만히 두고만 있을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따라서 우리가 사단을 이기려면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해야만 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성경에 이렇게 기록돼 있단 말이야’하고 말씀으로 대항을 해야 한다구.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면, 아무리 성령이 충만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질 수밖에 없어.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란 말이야!”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말씀 증거를 위해 사용할 것을 강조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동료 학생들에게 전도할 때 암기한 성경 구절을 그들의 말을 뒷받침 해 주는 증거로 삼았다. 그들은 탈의장에서도, 체육관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식당에서도 친구들에게 말씀으로 전도했다.

결국 이들의 많은 친구들이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구원을 받았다. 크리스코 목사가 학생들에게 한 말을 이 글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크리스코 목사는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원인은 대부분의 청소년목회 사역자들이 성령의 능력 없이 사역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아무리 깔끔한 프로그램, 깔끔한 설교, 모든 것에 깔끔한 충격을 주어도, 틴에이저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목회자들이 교회를 성장시키고 청소년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일어나서 청소년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접촉하는 길 뿐이라는 것이다. 크리스코 목사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바라는 것은 그들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체험하는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말은 오늘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충고라고 생각한다.
<예영수 박사>

제 3 성령의 물결 -토론토 블레싱

1994년 1월 20일, 역사적인 날 - 1994년 1월 20일, 캐나다 토론토 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작은 창고 같은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의 존 아놋(John Arnott) 목사는 빈야드 계열의 랜디 클라크(Randy Clark) 목사를 초청하여 4일 동안 부흥집회를 가졌다. 이 집회가 그 교회 교인들의 삶을 활성화시킬 뿐 아니라, 세계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갱신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인 집회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집회 첫 날 밤 예배 때,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에 압도되어 쓰러지고, ‘거룩한 웃음’을 웃게 되고, 진동하고, 방언하고, 치유 받고, 울부짖는 등 여러가지 현상을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더하여, 무엇보다도 그 집회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누리게 되고, 육체적 감정적 영적 치유를 경험하게 되고, 인간 관계의 회복과 부부관계의 회복을 갖게 되고, 하나님과 부활 생명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교회 생활의 활성화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집회에서 일어난 신기한 현상들을 세계 매스컴들은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이라고 했다.

로드니 하워드 브라운, 랜디클라크 목사의 영향 - 랜디 클라크 목사는 ‘토론토 축복’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남아프리카로부터 온 오순절 교회의 로드니 하워드 브라운(Rodney Howard-Browne)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93년 봄, 미국 플로리다 카펜터즈 교회의 칼 스트레이드(Strader) 목사는 하워드-브라운 목사를 초청하여 1주간 예정으로 갖게 된 집회가 4주간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 집회가 특이한 것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웃음이 터지는 등의 현상이었다. 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프리카, 영국,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집회에서 2천2백명이 세례를 받고, 예배가 새벽 2시까지 계속되기도 했다.

스트레이드 목사는 28년 동안 그 교회에서 시무 했으나 이렇게 은혜 받는 부흥집회를 본적이 없었다고 탄복했다. 그 교회는 하워드-브라운 목사를 세번 초청해서 집회를 가졌는데, 5개월 동안에 8백명의 새 신자들이 등록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플로리다 리빙워터 교회에 시무하는 클라크 목사가 하워드-브라운 목사의 집회에 참석한 것은 이때였다. 클라크 목사는 별로 마음 내키지 않았으나 스트레이드 목사의 권유로 참석하여 스트레이드 목사 옆에 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 클라크 목사는 자신이 마루바닥에 넘어져서 억제할 수 없는 웃음을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클라크 목사는 간증하기를 “그 웃음은 기쁨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때 나타나는 기적 중 하나는 사람들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이 벗겨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기쁨을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웃기만 한답니다”라고 했다. 아직도 클라크 목사는 웃고 있다. 1년만에 클라크 목사의 교회는 8백명에서 1천5백여 명으로 성도가 늘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 확장을 위해 새 건물을 구입해야 했다. 클라크 목사는 성령의 권능에 압도되는 ‘토론토 축복’과 같은 현상으로 자신의 교회는 개종, 세례, 치유 등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말을 한다.

하워드-브라운 목사는 자신을 ‘성령의 바텐더’라고 말한다. 하워드-브라운 목사가 교회 좌석 사이의 통로를 따라 걸어가면서 회중을 향해 손을 저으면 여러 줄의 사람들이 모두 마루바닥에 벌렁 넘어지고, 겉잡을 수 없는 웃음이 터지고, 기쁨에 차서 울기도 한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집회에 참석한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은 결국 교회 마루 바닥에 쓰러져서 억제 할 수 없는 웃음을 웃는 것이다.

하워드-브라운 목사는 작년(2002년 11월)에 흰돌산 기도원에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집회를 가졌다.

‘토론토 축복’ 세계로 확산되다 - 랜디 클라크 목사를 강사로 한 4일간 예정된 이 집회는 몇 달 동안이나 계속되는 밤 예배로 이어졌으며, 때로는 새벽 3시까지 계속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토론토 축복’에 대한 것을 직접 알아보기 위한 호기심과 또한 그 ‘축복’을 체험하기 위해 수천 수만 명의 방문객들이 이 곳에 모여들었다. 존 아놋 목사와 30명의 직원들이 인도하는 이 부흥회는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밤 열렸으며, 세계적인 관심이 줄어들지 않고 계속 더해 갔다.

이 부흥운동이 시작된 후로 세계 각 나라의 미디어는 ‘토론토 축복’에 대한 내용을 신문 기사와 TV 보도물로 알리기 시작했다. 매스컴들은 이 부흥운동이 어떻게 지구촌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가는지를 보도했는데, ‘토론토 축복’이 시작된지 1년 되는 1995년 2월까지 이 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20만명에 달했으며, 이 중 1만여 명은 성직자들이었다. 그 이후 ‘토론토 축복’의 갱신운동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와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토론토에서 나타난 현상들이 온 세계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토론토 축복’은 ‘갱신(renewal)’ 운동인 동시에 부흥운동이었다. 왜냐하면 ‘토론토 축복’의 영향으로 교회 갱신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많은 새로운 회심자들이 교회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토론토 축복’의 파도는 캐나다의 다른 교회로 넘쳐나갔다. 캐나다, 뉴 브룬스윅크의 스테반 윗트 목사와 5명의 다른 목사들은 토론토 교회에서 모두 안수기도를 받았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쓰러져서 것잡을 수 없는 웃음을 체험했다.

교회로 돌아온 윗트 목사가 주일 예배 때 교인들에게 안수기도를 하자 1백여 명의 교인들이 카페트 위에 쓰러졌다. 이날 아침 예배는 오후 3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으며, 교인들은 웃음, 기쁨, 평화, 해방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후 윗트 목사는 성령의 임재하심 가운데 6개월 동안 매일 밤 집회를 가졌으며, 계속해서 매 금요일과 토요일에도 집회를 갖게 되었다. 영국 국교회와 가톨릭을 포함해서 다른 교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윗트 목사의 교회에 참석하여 ‘성령의 새술’을 마시는 체험을 했으며 캐나다의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토론토 축복’의 파도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은 ‘토론토 축복’의 가장 큰 영향과 효과를 불러일으킨 나라가 됐는데, 모든 교단들이 진한 감동을 체험하게 되었다. 실제로, 토론토 방문객들 중 약 40퍼센트가 영국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으며, 침체의 늪에 빠졌던 영국 교회가 새 술에 취해 다시 소생하기 시작했다.

영국 국교회 존 멈포드 목사의 사모인 엘리노어 멈포드(Mumford)는 1994년 봄에 토론토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게 된 후, 오로지 주님을 위한 뜨거운 열정만으로 불타게 되었다.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오자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기도회를 가졌다. 그 집회에는 영국 국교회에서 제일 큰 런던의 홀리 트리니티 브롬프톤 교회의 닉키 검벨(Gumbel) 목사도 있었다. 검벨 목사는 런던의 수천명의 화이트 칼라 엘리트 층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검벨 목사는 멈포드 사모를 통해 ‘토론토 축복’과 같은 현상을 체험하게 되고, 검벨 목사를 통해 그의 교인들 사이에 ‘토론토 축복’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멈포드 사모와 검벨 목사를 시작으로 1995년에 영국에서는 4천여 교회들이, 현재까지 1만2천 교회들이 ‘토론토 축복’과 같은 현상을 체험했으며, 오랜 침체를 깨고 영국 교회들이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토론토 축복’의 파도는 홍콩으로 건너갔다. 1994년 홍콩 유니온 교회의 진 프레스톤(Preston) 목사는 영국의 검벨 목사를 초청하여 집회를 가졌다. 이 교회 교인들은 부유한 은행가 형에 쌀쌀하고 무표정한 사람들이었다. 오죽하면 프레스톤 목사는 “우리 교인들은 부흥회 후에도 별로 변화가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검벨 목사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홍콩의 많은 지도급 교인들이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져서 밤잠을 자지 않고 기쁨에 겨워 한없이 웃었으며,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성령의 역사 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프레스톤 목사도 ‘거룩한 웃음’을 마음껏 웃는 축복을 받았다. 홍콩의 영국 국교회 목사들은 검벨 목사의 집회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고, 눈물을 흘리며, 쓰러져서 입신의 체험을 하게 됐다.

활기찬 목회, 예수를 전하고 싶은 마음  - ‘토론토 축복’을 맛본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적인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보게 됐다. 전체적으로 보아, 참석자들은 모두가 하나님과 보다 깊은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개인적인 차원이나 집회적인 차원에서도 많은 참석자들에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고, 사람들은 서로를 용서하게 됐으며, 인간관계가 원만해지고, 또한 가정문제가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간증했다.

특히, 많은 목사들이 토론토 집회에 참석함으로써 은혜를 받게 됐다. 말하자면, 영적으로 메말랐던 목사들이 토론토에 와서 놀라운 ‘갱신’을 체험하게 되었다. 영국 윔블톤의 엘리노어 멈포드 사모도 그런 목회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엘리노어 사모는 잘 해보려다 지친 나머지 주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토론토로 모여온 수많은 남여 목회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토론토를 떠날 무렵 대부분 하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간증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체험한 토론토에서의 일은 그 후 다른 좋은 결과의 열매로 이어졌다. 오랜 세월동안 상처받은 감정의 치유, 주님에 대한 나날이 뜨거워지는 사랑,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려고 심혈을 기울이는 마음가짐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수많은 육체적인 치유에 대한 간증은 물론이고, 예수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에 압도되어 쓰러져버린 많은 이야기들이 계속 보도되었다.

엘리노어 사모는 자신이 직접 갱신의 체험을 한 이후, “이 체험을 반드시 전해야겠다는 다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싶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고, 내 이웃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대각성•성령의물결 운동과 유사 - ‘토론토 축복’은 예전의 미국의 제1, 2차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 때 일어났던 현상과 피터 와그너 박사가 말하는 제1, 2, 3 성령의 물결운동에서 나타난 현상과 아주 현저하게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예를 들면, 1세기 전에 LA의 아주사 거리나 캔사스주의 토페카 시를 뒤흔들었던 오순절운동에서도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웃는다든지, 운다든지, 신음 소리를 내며 떨기도 하고, 쓰러지고 또한 이상한 소리까지 냈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대각성운동이나 오순절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변화된 삶에 대한 보도, 즉 치유 받은 일, 인간 관계가 회복된 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더 한층 증가된 열정 등등의 열매를 맺었다는 점이다.

기독교 부흥 역사학자이며 「20세기 부흥운동」의 저자 리차드 리스(Riss)는 “토론토에서 일나는 일은 1906년에 일어났던 ‘아주사 거리’ 사건과 동등하다”고 말했다. 바로 이 ‘아주사 거리’ 사건이 현대의 오순절 교회를 태동시킨 것이다. 노르웨이 오슬로 침례교회의 스텐 소르넨센(Sornenesen) 목사도 “토론토는 아주사 거리의 새로운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 자신이 런던에 있는 홀리 트리니티 브롬프톤 교회에서 이러한 체험을 직접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야마토에 있는 갈보리성서신학교의 쭈구미찌 오오카와 총장도 이 갱신운동이 일본 전국에 확산되어 오순절과 복음주의 계열의 신자들 사이에 화합을 촉진시켰다고 말했다.

‘토론토 축복’의 특징 중에 하나는, 대각성운동 때처럼 각종 교단이 모두 함께 한다는 것이다. 침례교, 가톨릭, 영국 국교회, 카리스마계, 오순절계, 그리고 사실상 모든 기독교 교단들에 속한 믿는자들이 같은 ‘갱신’의 체험을 하고 왔다.

토론토 운동의 역사에 대한 책 「성령의 불을 붙여라」(Catch the Fire)를 출판한 가이 셰브로(Chevreau)는 여러 교단간에 화합하는 특성으로 보아 토론토의 갱신운동이 성령의 역사임이 확실하다고 했다.

‘사자의 소리’는 성령의 역사인가? - 토론토의 부흥운동이 시작된 후 5개월쯤 지나서 존 아놋 목사는 랜디 클라크 목사와 함께 세인트루이스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토론토 교회에 전화로 별일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집회는 훌륭히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지난밤에 사자와 같은 포효소리를 냈어요”라고 대답했다.

아놋 목사는 아연 실색하여 “주님, 지금까지 정말 잘 해왔는데 이상하게 가도록 내버려두지 마세요”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놋트 목사가 토론토로 급히 돌아 왔을 때, 그 포효하던 목사는 아직 그 집회에 남아 있었다. 강대상 앞에서 그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기드온 치우(Gideon Chiu)라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온 중국 관동 출신의 목회자 일행으로서 존경받는 유명한 지도자였다.

치우 목사는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으로 인해 토론토에 오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갑자기 이 온순하고 부드러운 목사는 다시 한번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사자처럼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는 강대상 앞에서 성난 사자처럼 “내 백성들을 내놔라! 내 백성들을 내놓으란 말이야!”라고 크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치우 목사는 마이크 앞으로 다가오더니, “중국인들은 수백 년 동안 용(마귀를 상징함)에게 속임을 당해 왔지만, 그러나 지금은 유대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님(계5:5)이 중국의 자녀들을 해방시킬 것입니다”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폭발적인 박수갈채를 했다. 그 날 밤 이후, 가끔씩 소위 “동물의 소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들었다.

존 아놋 목사는 필자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천5백명 가량의 사람들이 일주일에 여섯 번씩 매일 밤 집회를 하는데, 일주일 내내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치우 목사님의 영향으로 우리 집회에서 동물들의 소리가 나는 현상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자의 소리를 낸 치우 목사는 자신의 모국인 중국이 용의 나라이고, 사탄을 상징하는 이 용은 유다의 사자이신 예수님만이 이길 수 있으므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 11장 10절의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는 말씀처럼, 상징적으로 사자(예수)의 소리(말씀)를 발(선포)함으로써 중국의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울부짖음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모국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과 기발한 상징적 표현은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시록 4장 7절의 네 동물을 바탕으로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으로, 마가복음을 ‘소’복음으로, 누가복음을 ‘사람’복음으로, 요한복음을 ‘독수리’복음으로 상징성을 사용하는 선례가 있기에 치우 목사님도 그렇게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물의 소리는 상징성에 많은 오해가 있어서, 특히 한국에서 오해가 더 큰 것 같아서 더 이상 그런 상징적인 소리는 절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존 아놋 목사도 “지금은 아무도 그런 상징적인 동물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치우 목사의 중국의 잃어버린 심령들을 향한 애정을 갖고 하나님을 향해 그 민족들을 위해 부르짖은 그 열정을 사람들이 이해했으면 합니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예영수 박사>

제 3 성령의 물결 - 능력 전도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박사는 20세기 성령운동을 3기로 나누어 제 1, 2, 3 성령의 물결로 표현했다. 리차드 리스(Richard M. Riss)는 제1성령의 물결을 주요 재(再)각성운동이라 불렀다. 제 1 물결은 오순절 운동이요, 제 2 물결을 카리스마적 운동이며, 제 3 물결은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적 운동을 합친 것을 말한다.

제3의 성령의 물결은, 피터 와그너 박사에 의하면 1980년대에 시작한 운동으로서 제1의 성령의 물결로 알려진 오순절 운동과 제2의 성령의 물결로 알려진 은사주의 운동과 유사하다. ‘제3의 물결’이라는 말은 피터 와그너 박사가 1983년 「목회갱신」(Ministry Renewal)이란 잡지의 케빈 페로타(Kevin Perrotta)와 인터뷰할 때 처음 사용했다.

제3의 물결은 제1, 2 물결의 내용을 받아들이면서 성령 충만을 통한 성령의 능력(power)을 강조한다. 제1, 2, 3의 물결이 유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역사 하시는 분이 같은 하나님의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제3의 물결에서는 병자가 치유 받으며, 절름발이가 걸으며, 귀신이 쫓겨나며, 신약시대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능력의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에서도 여러 해 동안 나타났다.

제1, 2의 물결과 제3의 물결이 구별되는 중요한 변화는 성령세례의 의미와 성령세례의 표식으로서의 방언의 역할과 성령 충만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하는데 있다.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에서는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보지만 제3의 물결에서는 방언을 은사중의 하나라고 본다. 또한 성령세례는 한 번 받지만 삶 속에서는 계속 성령 충만을 받아야한다고 강조한다. 성령이 충만하면 은사와 능력이 임하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도 임한다고 설명한다. 은사주의에서는 분열이 많이 일어났었지만 제3의 물결의 특징은 분열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분열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은사주의 운동에서는 축사사역과 치유사역은 은사를 가진 사람이나 지도자가 했으나 제3의 물결에서의 축사사역과 치유사역은 어떠한 특정한 층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예수 믿고 교회의 지체된 사람은 누구나 축사사역과 치유사역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을 강조한다. 제3의 물결은 은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오늘날 교회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제 3의 물결은 성령의 임재하심과 기름부으심을 강조한다. 찬양도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하고, 기도도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하고, 말씀도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모든 예배의 시종은 성령의 임재와 기름부으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며, 예배드릴 때 성령이 임재 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치유와 구원의 역사들이 일어남을 강조한다.

제3의 물결이 일어난 것은 존 윔버(John wimber)목사의 빈야드(Vineyard)교회였으며,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물결은 ‘토론토 브레싱(Tornoto Blessing)’으로 알려진 존 아놋(John Arnot) 목사의 토론토에어포트교회로 이어졌으며, 이 물결은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의 브라운스빌교회로 연결된다.

제3의 물결 선두주자 존 윔버 - 존 윔버 목사는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에서 50명으로 빈야드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개척, 6천명으로 부흥시켰다. 그 교회에서 마태복음 10장 1절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약에서 말하는 병자가 치유 받고 귀신이 쫓겨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존 윔버 목사와 그 교회의 교인들을 통해서 나타내기 시작했다.

피터 와그너 박사는 존 윔버 목사와 함께 풀러신학대학에서 MC510 ‘표적, 기사, 교회 성장(Signs, Wonders and Church Growth)’이란 과목을 개설했다(후에 이 과목 명칭은 ‘기적과 교회 성장(The Miraculous and Church Growth)’으로 바뀜). 1982년 1월에 강의를 시작했는데, 강의시간이 끝나면 사역 시간을 갖고 강의내용에 따라 기도시간을 가졌다. 바로 그 강의 시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밤마다 그 자리에서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사실로 증명됐으며, 병자가 즉시 치유함을 받았고, 악령이 쫓겨났으며, 많은 다른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피터 와그너 박사도 진물이 흐르는 목의 종기를 고침 받았다. 피터 와그너 교수와 수백 명의 목사들의 목회에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풀러신학대학에서 4년간 4만 명 이상의 목사들에게 기적과 교회성장 이론을 가르쳤다.

그 당시 세계 신학계에 제일 유명한 강의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스위스 바젤대학 칼 바르트(Karl Barth)의 교의학(dogmatics)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풀러대학 존 윔버의 MC510이었다. 존 윔버의 MC510 강의 내용은 「기독교 생활」(Christian Life) 지의 편집자 로버트 워커(Robert Walker)에 의해 1982년 10월호의 전체 특집으로 다루어졌고, 마침내「오늘날의 표적과 기사」(Signs & Wonders Today)란 책으로 출간돼 전 세계 교회와 기독교 단체와 대학에 소개됐다.

풀러신학대학의 MC510 강의 내용은 풀러신학대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서 기적종료론자들의 반대의 소리에 직면하게 됐다. 기적종료론자들은 사도시대 이후에는 표적과 기적이 종료됐으며, 모든 표적과 기사와 기적은 성경(정경)을 쓰기 위한 증표로 된 것이므로 성경이 주어진 오늘날에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육적• 정서적 치유함을 받았으며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됐고, 1984년 풀러신학대학에서의 존 윔버의 강의는 LA를 넘어 전 세계의 화제가 됐다.

존 윔버 목사가 강조한 것은 ①찬양 ②말씀(선포와 증거) ③기도(치유 강조) ④전도 ⑤구제(예산의 60%) 등이었다. 그 중에도 존 윔버 목사는 말씀 사역을 위해서 예수의 복음 사역 패턴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수의 복음사역은 말씀선포+증거 - 존 윔버 목사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예로 들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표적과 기사와 기적으로 그 말씀을 증거하면 복음은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누가복음 4:18~19(이사야 61:1~2), 마태복음 4:23~25 혹은 9:35~36, 마가복음 16:14~20 등을 예로 들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proclamation) 하실 때 표적과 기사와 기적이 일어나 그 말씀을 확증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효과적으로 전파됐다는 것이다.

존 윔버는 예수의 말씀의 핵심 사상의 하나로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임하는 것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 전체가 말씀 선포(Word, what he said)+실증(works, what he did)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도 마가복음 16:14~20에서 온 천학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고 하셨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 다음에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성경은 분명히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한다고 했다. 모든 기적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전파를 위한 것이지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 1979년 5월 어머니날, 교회창립 2주년 주일 저녁예배는 존 윔버 목사와 빈야드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오래 기억되는 예배가 됐다. 그 날 윔버는 주일 예배를 마치고 로니 프리즈비(Lonnie Frisbee)란 청년의 뒤를 따라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때 주님께서 “오늘 저녁 예배 때 이 젊은 사람이 간증을 하도록 요청하라”고 말씀하셨다. 로니는 갈보리채플교회의 목사였고 부흥사였다. 윔버와 로니는 서로 깊이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날 저녁 간증을 마치고 난 로니는 25세 미만의 젊은이들을 강단 앞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로니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Come, Holy Spirit!)” 라고 외쳤다. 그 기도의 반응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은 문자 그대로 사람들을 바닥에 쓰러지게 했으며, 바보처럼 자기 몸을 떨며 진동하게 했다. 사람들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았다. 쓰러져 넘어지고 뒹구는 모습은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그 후 수많은 중•고등학생들이 성령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존 윔버 목사도 놀라서,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밤새껏 성경책을 뒤적였다.

그 이후에 제3의 물결에서 나타나는 외적인 현상은 ①성령의 권능으로 넘어짐(환상을 봄) ②진동 ③치유 ④거룩한 웃음(holy laughter) ⑤방언 ⑥축귀 등의 현상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은사를 통한 표적과 기사는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표적과 기사를 통한 복음전도를 윔버는 ‘능력전도(Power-Evangelism)’, ‘능력치유(Power-Healing)’라고 명명, 오늘날 새로운 신학적 어휘들로 사용되고 있다. 이 능력전도는 전 세계의 침체된 전통 교회와 비전통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대중전도를 확산시켰다. 미국과 캐나다와 세계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국의 전체 4만2천 교회 중 1만2천 교회가 활성화되고, 전 유럽, 남미, 아프리카, 아세아에 영향을 주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복음전도 - 존 윔버는 열심을 다하는 개인 전도자다. 그는 예수를 전하지 않으면 집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부인과 함께 LA 남부 오렌지카운티의 모든 골목, 모든 상점, 모든 식품점 어디고 다니며 전도하지 않은 골목이 없다. 그는 1963년 회심이후부터 1970년까지 5백명 이상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으며, 한 주간에 11개 성경공부 반을 인도했다. 그는 식품점 시장에 가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했다.

그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어 영국, 호주, 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에서 큰 집회를 무수히 인도했다. LA의 오렌지카운티에 3천2백석의 대형 교회를 짧은 세월에 성장시켰다. 그의 책들이 팔려 인세가 연간 30만 달러가 넘게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는 많은 돈을 복음 전도에 사용하면서 자기의 몫을 챙기지 않았다.

존 윔버 목사는 불신가정에서 자라나 세속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전도를 잘했다. 미국에서 히피(Hippie)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자신도 히피였다. 히피는 퇴폐 풍의 옷차림을 치렁치렁 걸치고, 머리는 길게 늘어뜨리고, 집을 나와 맨발로 거리를 배회하며 반전, 자유, 이상주의에 젖어 평화를 노래할 때였다. 당시 월남전쟁이 한창이어서 젊은이들을 국가가 명령하여 징집할 때였다. 젊은 여자들도 합세하여 머리와 옷에 꽃을 달고 마치 평화의 나라를 향해 가는 이상적 순례자의 모습을 여기서 생겨난 그들의 슬로건은 반대주의(-antism)였다. 반문화, 반전통, 반체제, 반정부의 사상이 그들의 전유물이었다. 히피들의 의식과 문화와 이상은 미국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 부머(Baby boomer)’들의 중심 사상이 됐다. 베이비 부머는 2차대전 이후 태어난 세대들을 지칭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평화가 오자 미국 젊은이들이 아기를 많이 낳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들 히피들은 술과 마약의 밥이 되었다. 그들의 젊은 감정은 부도덕의 탁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존 윔버 목사는 이들을 이해했다. 히피 세대는 사회에 진출하면서 그들의 반대주의(-antism)를 사회 속에 심으려 했다. 훗날 존 윔버 목사는 이상사회 건설에 꿈을 가졌으나 수포로 돌아간 젊은이들의 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존 윔버 목사는 그들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다양한 예배형식을 과감히 실험했다. 그는 베이비 부머 세대를 전도하려면 옛 교회 전통보다는 그들에게 맞는 새로운 교회전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존 윔버 목사는 오늘의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의 언어로, 오늘 우리의 노래로,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랑으로, 오늘 우리의 자유로, 오늘 우리의 악기로, 오늘 우리의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자고 주장했다. 태초 이래 복음은 절대 불변이지만,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 복음을 담는 그릇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으로 태어난 것이 빈야드 교회의 ‘열린 예배’다.

빈야드교회의 예배혁명 ‘열린 예배’ - 열린 예배에서는 주기도문 암송이나 교독문, 사도신경 암송도 축도도 없다. 사도시대 때에도 이런 것은 없었다. 이런 것들은 후에 교회가 발전하면서 교회지도자들이 모범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갖추게 된 순서일 뿐이다. 천주교회에서는 이것이 의식으로 발전되고, 개신교에서는 예배의 필수적 요소가 되기도 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26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권면했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오늘날 전통적 주류교회의 예배와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예배엔 계시도, 방언도, 통역도 없다. 우리가 잘못된 것인가? 사도 바울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의 전통이 잘못된 것인가? 초대교회가 잘못된 것인가?

빈야드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예배순서를 갖는다. 사람들은 빈야드의 예배 형식을 격찬하기도 하고, 또 격렬히 반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빈야드 사람들은 절대로 남을 비판하지 않는다.

‘경배와 찬양’ 몰고 온 빈야드의 찬양 - 존 윔버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악단의 단장으로 라스베가스의 2개 로큰롤 쇼 그룹에서 이름을 날렸다. 재즈 음악에 심취하여 악단에서 색소폰을 불었다. 그는 미국 전역을 다니며 연주하기도 했다. 1976년 10월 어느 날 당시 존 윔버 내외는 함께 모인 10여 명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기타를 치며 복음성가를 불렀다. 그들은 몇 개 안되는 복음 송을 여러 번 반복해서 열심히 부르며 울고 있었다. 이 작은 모임은 훗날 5천명에 이르는 빈야드교회의 초대형 찬양단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모여서 복음 송을 불렀고 변화를 체험했다. 이 모임을 통해 새로운 찬양의 전통이 만들어졌다. 빈야드 교회에서는 소수의 전문가만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찬양대원이다.

1982년부터 빈야드의 찬송 음악이 전 세계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온누리교회(하용조 목사)의 ‘경배와 찬양’을 통해 빈야드 찬양이 소개됐다. 한국의 복음성가는 빈야드 찬양으로부터 약 75%의 영향을 받고 있다.

1982년 윔버는 처음으로 영국 전도여행길에 올랐다. 윔버 목사의 빈야드교회 사역은 잠자던 영국 교회에 불씨를 던졌고, 오늘날 영국 교회를 성령의 불길에 휩싸이게 했다. 그가 영국 교회에 미친 영향은 그에게 ‘제2의 웨슬리’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이 성령의 불이 영국 주류교회를 소생시키고, 다시 더 큰 불이 되어 전 구라파는 물론 미국으로 되 불어오고 있다.

윔버 목사의 사역에 접목된 니키 검블(Nicky Gumble) 목사는 켐부리지대학 출신의 변호사다. 그는 법률을 접어두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됐다. 검블이 개발한 알파(Alpha) 성경공부 교재와 교과과정은 영국은 물론 전 세계로 소개됐다. 지금까지 알파 성경 코스에 참여한 인원은 50만을 넘는다. 미국 교회에도 알파 성경 공부의 바람이 불어와 1998년 한해에 1만 교회 이상이 알파 코스에 참여했다.

한국의 강단과 신학교에서도 존 윔버 목사와 제3의 성령의 물결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져 그가 기독교회에 공헌한 것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예영수 박사>

제 2 성령의 물결 -카리스마 운동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박사는 20세기 성령운동을 3기로 나누어 제 1, 2, 3 성령의 물결로 표현했다. 리차드 리스(Richard M. Riss)는 제1성령의 물결을 주요 재(再)각성운동이라 불렀다. 제 1 물결은 오순절 운동이요, 제 2 물결을 카리스마적 운동이며, 제 3 물결은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적 운동을 합친 것을 말한다.

은사 (카리스마)운동 - 피터 와그너 박사는 제1의 성령의 물결은 오순절운동이라고 하고, 제2의 성령의 물결은 은사(카리스마)운동이라 했다. 은사운동은 1960년 4월 3일 미국 캘리포니아 밴 나이스에 있는 성 마가 성공회 교회(St. Mark's Episcopal Church)의 교구목사로 있는 데니스 베네트(Dennis J. Bennett) 신부(목사라 칭하겠음)가 회중들에게 자신이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고 고백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일어난 모든 것을 「아침 9시」(Nine O'clock in the Morning)란 책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은사운동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급속히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은사운동은 미국과 세계의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루터 교와 다른 많은 교단에서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에서도 강하게 나타났다.

은사운동은 오순절운동의 방언의 은사에 더하여 모든 성령의 은사가 지금도 일어난다고 믿었다. 베네트 목사를 통해 방언 뿐 아니라 성령의 은사운동이 기성교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것을 ‘은사주의 운동 Charismatic Movement’ 혹은 ‘신오순절 운동 Neo-Pentecostal Movement’이라 했다.

은사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보다 복음주의적으로 보게 되고 회심과 중생을 보다 복음주의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대개의 복음주의자들은 은사운동을 환영하지 않았다. 복음주의자들의 보수적인 신학은 기적이란 오늘날의 기독교 경험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기적(은사)종료론 Cessationism’을 믿었기 때문에 방언과 성령세례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복음주의적인 교회에서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 체험을 하게 되면 교회가 그들을 떠나게 하든지, 아니면 그 결과 교회가 분리되었다.

「아침 9시」Nine O'clock in the Morning  - 베네트 목사의 저서 「아침 9시」(Nine O'clock in the Morning)는 사도행전 2장 15절의 “때가 제 삼시니(아침 9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서 취한 것으로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때를 말한다.

16년 목회의 메마름 - 베네트 목사는 교회가 성장하고 가정이 안정되어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행복했다. 그러나 목회한지 16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의 심령은 점점 더 메말라 갔다.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면서도 진정 하나님께서 실생활에 현존하신다는 실감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성령에 대한 강의를 잘 하면서도 그에게 성령은 막연하게 이론적인 존재로서 성경에 나타난 것과 같은 기쁨, 권능, 확신 같은 것을 갖지 못했다. 결국 그는 이러한 영적 기갈을 해소해 줄 무엇인가를 갈망하게 되었다.

방언에 대한 갈망 - 베네트는 신약성경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는 성령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신약에서 성령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무려 2백40 군데나 된다는 사실과,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만 16 차례 성령을 언급한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는 초기 크리스천들이 계속해서 성령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성령은 그들에게 막연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성령의 중요성을 도처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성령을 받아 신비로운 방언으로 말했는데 왜 지금은 방언의 은사가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신학교에서 ‘방언은 사도시대로 끝났으며 무지한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흥분 상태에 빠졌을 때 개 짖듯 내는 소리’라고 배웠다. 문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새 방언을 말하며”(막16:17) 라는 성경의 대목이었다. 바울 역시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라고 하고,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장)며 방언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방언의 은사 체험 -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베네트 목사의 혀가 경쾌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새로운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 그는 정신이 말짱했으며 자의식도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 방언은 심리적인 속임수나 충동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둘째, 그는 어린 아이가 중얼거리는 그런 언어가 아니라 진정한 언어로서 문법도 신택스(구문론 syntext)도 있는 아름다운 언어임을 알았다. 그는 5분 동안 방언을 했으나 별로 신비로운 것은 느끼지 못했다.

그 후 그는 또 방언을 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말씀하고 계심을 알았다. 방언은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것이며, 방언을 계속 하면 할수록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더욱 더 알게 되고,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언어를 창조해내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방언을 하면서 비로소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고 한 바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목회 생활의 메마름이 사라지고 심령가득 차오르는 행복을 경험하게 되었다.

30여명의 목회자들이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친구 목회자가 방언으로 기도했을 때 베네트 목사는 “나의 영은 기뻐 춤을 추고, 주님이 가까이 계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위에 임하심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옛 전통을 따르는 숨 막히는 성공회 목회자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기쁨으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이들은 주님을 찬양하면서 ‘할렐루야!’를 수없이 외쳤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의자에서 일어서지를 못했다.

치유의 은사 - 베네트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장)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고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했다. 그는 후두암에 걸린 친구가 수술을 받기 전에 안수기도를 해 주었다. 의사는 수술 직전에 진찰을 해본 후 “참 이상한데요. 후두암이 분명히 있었는데 완전히 사라졌네요...”라고 말했다. 베네트의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교인 중 도로시라는 여 성도가 교통사고로 엉덩이뼈가 부서지게 되었다. 의사는 그녀가 다시는 고통 없이 평상처럼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베네트와 교인들이 안수기도를 한 결과 그녀는 완전히 치유함을 받고 고통 없이 걸어 다니게 되었다. 베네트는 자신의 딸의 목병도 기도로 고쳤다. 그에게 치유의 역사가 계속 일어났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하신 말씀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

오순절 교단에서의 집회 -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베네트 목사는 교단의 벽을 넘어 오순절 교회 목회자들을 위한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예배의 순서도 형식도 성공회의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와 기도가 진행됨에 따라 모두에게 ‘성령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령의 불의 역사와 기쁨의 역사가 그 집회 가운데 임했다. 오순절교회 목회자들이 성령 가운데 자유하며 기쁨을 누리는 것을 베네트 목사도 경험하게 되었다.

베네트 목사가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 성령의 권능과 기쁨이 갑자기 임하여 새 방언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환상 가운데 “전능자가 하늘의 보좌에서 땅과 하늘의 무수한 무리들에 둘려 쌓여 찬양과 영광을 받는 것을 보았다”라고 증거 했다. 그는 꿈속에서도 주님을 계속 찬양했다.

주일예배 때 방언 받은 사실 고백 - 성령이 베네트 목사에게 ‘너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라. 이 교회는 어쨌든 너의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께 속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베네트 목사는 성령의 지시하심에 따라 1960년 4월 3일 1, 2, 3부 주일예배 때 계획된 설교 대신 자신에게 일어난 일, 곧 방언에 관하여 교인들에게 설명했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어 갔는데, 2부 예배가 끝날 무렵 부목사가 “난 이 사람과는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소”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 말이 뚜껑을 벗긴 듯 반대자들은 3부 예배를 참석하기 위해 오는 교인들을 부여잡고 은사운동에 대한 반대 발언을 시작했다. 한 남자가 의자 위에 올라서서 “저 망할 놈의 방언 하는 자를 박으로 던져 버려요!” 라고 고함을 질렀다. 반대파 지도자 한 남자는 목사를 향해 무뚝뚝하게 “사표를 내요!” 라고 소리쳤다.

베네트 목사는 오전 11시 예배 때 놀라고 당황하는 회중들에게 사임할 것을 공포하고는 7년 동안 섬긴 교회를 떠났다. 반대파는 소수였지만 베네트 목사는 교회가 분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성 마가성공회교회에서 일어났던 소동은 주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 미국에 알려졌다. 주간지 「타임즈」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제 방언은 미국 교회에서 다시 회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방언은 자유분방한 오순절 교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어붙은 백성 Frozen Peaple’이라 불리는 성공회에서도 나타났다.”

성 누가교회로 부임 - 베네트 목사는 시애틀에 있는 성 누가성공회교회(St. Luke Episcopal Church)로 가기로 했다. 그는 시애틀에 가는 이유 네 가지를 말했다. “첫째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 것 같고, 둘째 성령세례를 지방교회에서 공개적으로 받아들이고 가르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고 싶고, 셋째 성공회 교단의 안전한 범위를 떠나고 싶지 않고, 넷째 현재 있는 이 곳에서 빨리 떠나고 싶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가 불쑥 나타나 성령이 주시는 말을 했다. “만일 그대가 나와 함께 가서 나의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지 않으면 내가 그대의 목회를 성장하게 하리라.” 베네트는 조용히 “주님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베네트 목사가 시애틀에 왔을 때 시애틀 지방 성공회 주교는 성 누가교회를 폐쇄할 작정이었다. 베네트로서는 싫든 좋든 자신이 그 교회의 존폐를 결정짓게 될 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이 운행하시는 것을 보았다. 교인들에게 성령 받기를 강조했다. 1960년 8월 15일자「타임」지는 베네트 목사의 반 누이의 성 마가교회와 시애틀의 성 누가교회 사건을 53~55페이지에 상세히 보도했다. 하루아침에 전 세계가 그를 알게 되었다.

카리스마적 은사와 부흥 - 베네트 목사가 이끄는 작은 교회에서 치유의 역사가 크게 나타나자 교인들이 갱신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생활 속에서 감사했고 화합하며 일치의 모습을 보이게 됐으며 그 즈음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많은 병자들이 치유를 받았다. 출혈 병쪾신장 결석쪾맹장쪾횡경막쪾후두암쪾유방암쪾관절염 등 많은 질병이 치유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나고 표적과 기사가 따랐다. 성령 세례를 통해 믿음을 회복하게 되고, 기도의 힘으로 기후가 좋아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목사와 교인들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요 14:12)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베네트 목사는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 루터교 개혁교단 장로교 정통 교단 등 많은 다른 교단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위한 집회에 초청을 받았다. 그의 집회에서는 성령 안에서 자유 함을 누리는 것과 카리스마적 은사가 나타났다. 당시 미국 주류교회의 흐름은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린 교인들의 교회이탈과 이에 따른 교회예산의 축소, 그 결과 목회자들이 옷을 벗고 일반 직종으로 옮겨가는 등 쇠락의 분위기였으나 베네트 목사 집회에 참석한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권능을 체험하고 전도에 전념함으로써 교회가 부흥되고 지역사회가 개혁되기 시작했다.

성 누가교회의 부흥 - 성령의 권능이 나타난 지 10년 만에 폐쇄의 운명을 앞두었던 시애틀의 아주 작은 성 누가교회는 교인 수 2천명에 주일 5부 예배까지 드리는 번듯한 교회로 성장했다. 방언 방언 통역 치유 예언 기적 등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 주중의 집회동안에 다른 많은 교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회와 찬양예배에 참석하지만 베네트 목사는 그들에게 일어난 성령의 역사의 체험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교단의 본교회로 돌아가라고 강하게 권면했다.

성 누가교회의 금요 저녁집회마다 75명~2백 명의 틴에이저들이 참석하여 경배와 찬양을 드렸고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성령세례를 체험했다. 그들은 학교를 위해 기도하고, 찬양 그룹을 형성하고, 다른 학생들에게 예수를 전했다. ‘새로운 사람들?New Men’이란 그룹은 예수를 전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학교 주변의 마약에서 벗어나게 하고 삶의 무의미성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또한 ‘사람들의 어부들?Fishers of Men’이란 그룹은 시애틀과 타 도시의 1백여 개 학교에서 선교함으로써 큰 영향을 끼쳤다. 베네트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요 14:12)라는 성경구절을 철저히 믿고 있다.

맺는 말 - 이렇게 해서 은사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이를 통해 많은 교회들이 개척되었으며 이때부터 부흥회도 많이 열리게 되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유명한 사역자들이 부흥강사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에서도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부흥회가 많이 열리게 되었다. 은사운동을 통해서 모든 기성교단에 오순절 운동이 일어났다.

은사운동에서 두 가지 현상을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은사운동의 장점으로서 어떤 교단이든지 은사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교단과 교파에 상관없이 가깝게 지냈고 교회가 부흥되어 성도들이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 점이다.

특히 1970년대 은사운동에 힘입어 개척된 교회들은 급성장하는 교회들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가지 문제점은 은사 받은 자들 중에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누가 더 크게 받았느냐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한 은사가 아니라 은사 자체가 목적이 되는 오류를 범했다는 점이다.<예영수 박사>

제 1 성령의 물결 -오순절 부흥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박사는 20세기 성령운동을 3기로 나누어 제 1, 2, 3 성령의 물결로 표현했다. 리차드 리스(Richard M. Riss)는 제1성령의 물결을 주요 재(再)각성운동이라 불렀다.

제1 물결은 오순절 운동이오, 제2 물결을 카리스마적 운동이오, 제3 물결은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적 운동을 합친 것을 말한다.

1987년 추산으로 제1,2차 물결의 수는 247백만 명이며 제3물결의 수는 27백만 명이다. 이 세 번의 성령의 물결은 모두 성서의 권위를 최종적인 권위로 보고 있으며 동시에 세계복음화의 긴급성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날에도 세계도처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믿고 있다.

1. 오순절 운동 - "거룩하게 뒹구는 자"
제1 물결은 오순절 운동으로서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번져갔다. 오순절 운동의 주된 특징은 강한 성령사역으로서 기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기적 중에도 두드러진 것은 성령세례로 나타나는 방언이었다. L. A. Times는 1906년 4월 18일자에 아주사 거리의 방언을 첫 페이지에 취급하면서 “이상한 왁자지껄한 소리”라는 머릿기사로 시작했다. 방언과 함께 치유와 축귀 역사도 강하게 나타났다.

예배의식은 자유로운 열린 예배로서 큰 소리로 찬양하며, 두 손들고 기도하며, 감정을 표출하며, 마루에 넘어지며, 영적인 춤을 추는 등 외적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오순절 운동은 2가지 이유로 배척을 받았다.

첫째, 1900년도 초기에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권능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현상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을 취급할 신학도 없었다. 많은 신학자들은 표적과 기사는 신약시대에 있었던 일이며 정경(正經)을 결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한 사도들의 증표로서 방언, 치유, 영 분별 등의 표적이 필요했지 오늘날에는 성령의 은사를 통한 기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기적종료론을 주장했다.

둘째, 여기에 더하여 오순절운동은 일반적으로 지혜와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다. 영적 각성의 자발성 때문에 전통적인 예배 질서가 무너지면서 기성 교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00년대의 오순절 교회의 부흥 운동이 애팔래치아 산맥에 있는 사람들에게 역사 했을 때 그곳의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권능아래 아무런 제한 없이 마루바닥에 쓰러져 소리치며 구르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예의바른 기독교인들은 그 현상을 감정주의나 히스테리로 간단히 취급하여 이들 초기의 오순절 교인들을 “거룩하게 뒹구는 자들”(holy rollers)이라고 별명을 지어 비웃었다.

『타임즈』지는 이런 현상들을 멸시와 조롱에 찬 어조로 “아주사 거리의 허물어진 판자집”에서 모이는 “고삐 풀린 광신자들의 새로운 파당”이라고 혹평을 했다. 1906년 4월 18일의 첫 페이지에 “괴상한 교리의 신봉자들은 가장 광신적인 의식을 행하며, 가장 방종한 이론을 설교하며, 특별한 열정으로 광적인 흥분 상태에 빠져있다”라고 보도했다. 오순절 운동은 1950년까지 많은 멸시를 받았다.

그 이유는 오순절 운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지식층의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성교회에서는 그들은 오순절주의자라고 따돌림을 당하고 오순절주의자라 하면 무식한 사람들로 여겼다. 그 결과 기성교회 지도자들은 오순절 운동을 이단적이라고 하고, 어떤 복음주의적 지도자들은 오순절 교회서 나타나는 현상을 마귀의 역사라고도 하고, 심지어는 사교적인 의식으로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나,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일도 있었다. 오순절 교회가 신교에서 인정받기까지는 반세기나 걸렸다.

2. 제1물결 찰즈 팔헴과 윌리엄 시이무어와 방언의 은사
제1 성령의 물결인 오순절 운동은 감리교회의 목사가 된 찰즈 팔헴(Charles Parham, 1873-1929)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캔사스 주 토페카(Topeka)에서 벧엘 치유소(Bethel Healing Home)를 설립했으며, 1900년 10월 15일에 벧엘 성경학교를 시작했다. 1900년 12월 31일 그는 학생들 개개인에게 성경에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에 대한 것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학생들은 연구 결과를 보고하면서 사도행전에 보면 방언의 은사가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했다. 1901년 1월 1일에 아그네스 오즈만(Agnes N. Ozman, 1870-1937)이란 여학생(30세)은 기도 중에 팔헴에게 안수를 받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으라는 성령의 감동이 왔다. 오즈만은 “그 분이 내 머리에 두 손으로 안수를 하자 성령이 내 위에 임하시고 나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라고 했다. 3일 동안의 기도 후 1월 3일에 몇 명의 다른 학생들도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때 상황을 릴리안 디슬즈외이트 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대한 기쁨이 내 영혼에 쓰며 들었으며 나는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했다. 나의 혀가 둔해 지더니 위대한 웃음의 홍수가 내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그리고서 나의 입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새찬 말들로 가득 찼다...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크게 기뻐하는 것을 들었다...그리고서 우리는 동시에 함께 찬송을 불렀으며 각자는 새 방언으로 완전한 화음으로 찬송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미국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이다. 첫째 방언의 은사가 그 당시 성령세례의 증거로 처음 나타났기 때문이다. 둘째 팔헴 목사가 벧엘 성경학교를 텍사스 주의 휴스톤으로 옮겼는데, 팔헴의 학생인 윌리엄 시이무(William Seymour, 1870-1922)가 다시 휴스톤에서 L.A.로 옮겨 L.A.의 아주사 거리 부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이무어 목사의 아주사 거리 집회를 오순절 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분도 있다.

3. 오순절 부흥 - 운동시이무어의 노스 보니 부레아 거리 집회와 성령의 역사 – 윌리엄 시이무어는 흑인이며 애꾸였다. 그는 1905년 벧엘 성경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했으나 당시의사회적 상황에서 흑인은 백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팔헴 목사의 배려로 강의실 옆에 문을 조금 열고 땅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했다. 오순절 부흥운동은 시이무어가 L.A.의 노스 보니 브레아가(North Bonnie Brea Street) 214 번지의 가정집 기도회에서 시작되었다.

여러 달 동안의 합심 기도 후에 1906년 4월 9일 하나님의 성령이 강하게 임재하신 것은 바로 이 집에서였다. 4월 9일 아침 루시 팔로우 여성에게 에드워드 리 씨의 요청에 따라 성령세례를 받도록 안수하자 에드워드 리에게 방언이 터졌다. 이것은 시이무어가 집회를 인도하기 한시간 반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이무어가 사도행전 2장의 내용을 설교하고 에드워드 리가 간증을 하면서 갑자기 두 손을 번쩍 들고는 방언을 하기시작하자, 집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쓰러져 주저앉자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치던 제니 에반스 여사도 쓰러졌으며 다른 5명의 사람들이 쓰러졌다. 8세의 흑인 소년이 제일 먼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으로 말했다.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마치 번개를 맞은 듯이 의자에서 마루바닥으로 쓰러졌다. 7명이 다양한 방언으로 하나님을 송축했다. 방언 하는 소리가 너무나 크고 열렬해서 건물밖에 사람들이 모여 “도대체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하는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곧 이 소리는 온 L.A. 도시에 퍼졌으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계속 부어주셨다. 백인들은 흑인들 가운데 끼어 들었으며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성령 충만했다. 이런 장면을 목격한 집주인 에즈베리 부부의 딸은 놀라서 부엌으로 도망쳤으며, 사람들은 현관의 대청 마루에까지 가득 차서 예배를 계속 드렸다. 피아니스트인 제니 에반스가 피아노를 치면서 히브리말 같은 말로 찬송을 부르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방언을 하는 것을 듣기 위해 거리에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3주야를 울부짖었다. 부활절이었다. 사람들이 도처에서 몰려들었다. 다음 날 집회 장소에 들어갈 길이 없었다. 사람들이 집회 장소에 들어서자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졌다. 온 도시가 소동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 들어서서 울부짖는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집 마루바닥이 내려앉았다. 다행이 아무도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그 3일 동안에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성령세례를 받았다. 병자들은 치유를 받았으며, 죄인들은 구원을 받았다.

LA의 신문 기자가 성령의 역사를 비판하려다가 혼나다 - 노스 보니 브레아 거리 집회장 마루바닥이 무너지자 시이무어 일행은 그 건물을 버리고 아주사 거리(Azusa Street) 312번지의 버려진 낡은 아프리카-감리교-성공회 교회를 구입하여 집회 장소로 개조했다. 여기서 성령의 강한 기름부음이 계속 일어났다. 아주사 거리 집회를 직접 목격한 성명미상의 사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집회의 소식이 멀리 퍼져 나가자 L.A.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성령 충만한 몇 사람들이 천사의 벤드 소리를 들었다. 성령에 감동된 하늘의 찬송이 들렸다. 집회 광고도 없었고, 교회의 조직적 뒷받침도 없었다.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집회장소에 들어서자 성령이 인도하시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아주사 거리로 들어오자 부흥의 권능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간단하였으나 성령의 권능이 강하게 나타나 사람들은 벤치에 앉은 채 떨었다. 제단 앞으로 나오자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졌으며, 어떤 이들은 방언을 터뜨렸다. 시카고에서 온 윌리엄 덜헴 목사는 영적 갱신을 위한 갈급한 심령으로 LA에 도착했다.

아주사 거리의 집회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았다. 수천명의 참석자들처럼 덜헴 목사도 오순절적인 성령세례 체험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방언)로 인간이 이때까지 듣지 못한 사랑스런 화음으로 찬양을 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때때로 환상을 통해--간증을 했는데, 간증은 주로 구원, 성화, 성령세례 등의 3가지 목적이 담겨있었다.

1906년 4월 18일~19일에 산-프란시스코에 대지진으로 큰 환난을 당했다면, 같은 주 동안 LA에서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일어난 영적 지진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 대 혁명을 가져다 준 행복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켄사스주 토페카의 팔헴 성경학교에서의 방언 사건보다 5년 후 LA에서의 성령 폭발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됨으로서 오순절의 시작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시이무어의 아주사 거리 집회와 성령의 역사 - 그러던 중 어느 날 LA의 신문 기자가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비판하며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모두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시이무어의 집회에 참석했다. 설교가 끝나고 안수가 시작되자 이 기자는 자신을 절름발이로 가장을 하여 시이무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성령님께서 시이무어에게 음성으로 “너는 저 사람을 위하여 기도 할 때에 ‘그대로 되게 하소서’라고 하라”는 것이었다. 시이무어는 그대로 말했다. 그 기자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보며 하나님께 회개한 후 다시 기도를 받고 온전하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기자는 『타임즈』(Times)지에 자신이 체험한 일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특종으로 기사화 했다.

이 일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부흥의 물결 속에 들어가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191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여파로 1914년에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 교단이 생기게 되었다.

오순절 운동의 주역들과 5개 항목의 교리적 가르침 - 아주사 거리 부흥 집회의 중심 인물들은 가르치는 자로서의 찰즈 팔헴, 설교자로서의 윌리엄 시이무어, L.A. 저널리스트로서의 프랭크 바틀만, 아주사 거리 선교회 등이었다. 이들 아주사 거리 오순절 운동 창시자들은 그 당시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성화를 강조하는 신성운동(Holiness movement)의 영향을 받았다. 팔헴은 신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5개 항목의 신조를 발표했다.

(1)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칭하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2)확실한 은총의 역사로 나타나는 성화,

(3)외적인 증거로 방언을 수반하는 성령세례,

(4)구속사역과 같은 하나님의 치유,

(5)예수의 재림 때 성도들의 전천년 휴거 등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오순절 부흥운동의 결과 1914년에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생겨나게 되고, 1981년에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 75주년 기념예배를 가졌는데, 방언으로 시작한 기름부음이 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임을 입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1981년을 기준으로 오순절과 카리스마적 교인 수는 75,000,000명으로 추상되었으며, 지금은 그 수가 장로교를 능가하고 있다. 이것은 1906년 아주사 거리집회 이후 L.A. 오순절 운동을 수용한 수는 매년 1,000,000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을 글로서 남긴 프랭크 바틀만 -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 플라톤이 기록으로 남겼으며, 예수의 천국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4복음서에 기록한 것처럼, 시이무어와 아주사 거리 오순절 운동은 프랭크 바틀만(Frank Bartleman)이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보도 없이는 오순절 운동이 그렇게도 빨리 또 널리 전 세계로 전파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저널리즘은 세계에 오순절 운동에 관한 소식을 전했을 뿐 아니라 오순절 운동을 돕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00년에 외형적으로 고함지르고 뛰는 것과 같은 성령체험을 먼저 했다. 몇 달 이후에 그는 더 많은 신비 체험을 했는데, “전기 충격”과 같은 것을 강하게 받아 쓰러져서 무의식 상태가 되기도 했다.

밤에 사탄이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공격했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냈다. 평생 병약한 몸으로 죽음이 어깨 너머에서 바라보는 느낌을 가졌다고 고백했으나 기적적으로 치유함을 받았다. 그가 설교하던 중 성령의 권능으로 쓰러져 30분간 교인들 앞에서 누워있기도 했다. 그는 성령 충만으로 “하늘나라의 찬양”에 참가하는 놀라운 체험을 했으며 방언으로 주님의 이름을 찬양했다.

맺는말  - 1901년 찰즈 팔헴의 학생인 아그네스 오즈만의 방언과 1906년 흑인 꼽추인 윌리엄 시이무어의 방언으로 시작한 제1성령의 물결은 오순절 운동의 이름으로 미국, 캐나다, 남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오순절 운동은 신교의 각 교단에서는 물론이고 1966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도 강하게 나타났다. 오순절 운동은 1970년대에 카리스마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영수 박사 : 오레곤대 A.D, Ph.D(영문학), 경북대 교육학 박사과정이수, 전 한국외국어대학사범대학장, 한신대학 대학원장, 전국 기독교대학교 대학원장협의회장, 광나루 문인회장, 현 한밀선교 회장, 한국영성 총연합회 대표회장, 카리스월드 편집인 겸 발행인

11/28/2009

아멘의 뜻의 두 방면

요한 계시록 7장은 아버지 집에 살 자들을 말하고 있는데 아버지 집에 함께 살 천사들의 경배를 통해서 나타난 몇 가지 경배 지식 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은 아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경배의 지식들은 아멘과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 이 여덟 가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들은 하나님께 경배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용어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원하는 자들은 마땅히 경배지식을 알아야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아멘이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진실로, 참으로라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예라는 뜻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3장 14절에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아멘은 예수님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진실로나 참으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진리는 참 것, 실제의 것을 말합니다. 진리란 참 것으로서 어느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의 형편없는 모습을 지적 하시면서 아멘이신 예수님 즉 참으로 진실하신 분의 말씀이니 그 말씀에 동의하고 받아들이라, 인정 하라, 예하라, 순종하라는 뜻으로 쓰인 말로서 예를 이끌어 내기 위해 쓰인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1장 19-20절을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언제나 예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니오란 불순종을 뜻하며 예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받아들여 순종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아멘의 뜻은 예하고 받아들이라는 말로서 순종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멘은 두 방면으로 쓰였는데 그 하나는 진실하고 참되신 예수님 그 자체를 말씀하실 때도 쓰였음을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답변으로서 예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 말은 곧 나도 뜻을 같이 합니다. 그 뜻에 순종합니다. 그 말에 동감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아멘이 되시는 예수님! 항상 주님 앞에 순종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아멘! <예수님따라가기>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놀라운 계시(데이빗 윌커슨 목사) - 2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 자비 그리고 보호를 계시하십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을 실망시켰을 때, 즉 우리가 빛을 대적하여 중대하게 범죄 하였을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숨었다고 말하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한 상황에서 꾸물거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우리는 재빨리 예수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반석 안에 숨기 위해서 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우리 조상들이…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이는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기 때문이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느니라”(고린도전서10:1~4)

그 장면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바위 가운데 틈을 내셨고 모세를 그 가운데에 안전하게 두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의 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이 네 옆을 지나가겠노라. 그리고 나는 너에게 나의 마음을 보여주겠노라. 그러면 너는 한 번에 내가 누구인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내 본성의 전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실패의 때에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와 같이, 우리도 바위틈에서 안전하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을 실망시킬 때마다 주님으로부터 도망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안전한 장소에 숨길 뿐만 아니라, 내가 거기서 너를 덮어서 보호해 주겠다. 너는 완전히 안전하다. 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서도 말이다.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알아 온 나의 본성에 또 다른 면이 있음을. “너는 크게 범죄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가 경건한 슬픔으로 나에게 달려오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나의 자비와 은혜의 확실한 계시를 얻을 때까지 너를 내 손으로 지켜주겠다. 나는 네가 내가 누구인지 보고 알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모세와 같이, 너는 이 계시를 구하여야 한다. 너는 ‘주님,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라고 울부짖어야 한다. 여기서 모세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는 것을 지적하겠습니다. 그가 산에서 돌아와 사람들이 금송아지 주위를 벌거벗고 춤추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로 타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써주셨던 돌 판을 들어 땅에 내동댕이쳤습니다. “

모세가 크게 분노하여 자기 손에서 그 판들을 던져 산밑에서 깨뜨리니라”(출애굽기32:19)

이것은 거룩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격노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뜨거운 분노였고 그것은 죄였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종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동일한 종이 사람들의 죄를 보았을 때, 그의 노여움은 난폭하게 터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돌 판을 깨뜨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써, 이것은 저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줍니다. 그것은 나에게 하나님의 집 집에 죄에 대하여 감히 내 자신의 인간적인 분노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하여 육신적인 열정으로 응하려고 할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대신, 저는 반석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 그분의 사랑의 친절에 대한 계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백성들을 그분의 자비와 보호의 자리로 다시 이끌어야 합니다.

그 다음 장면도 모세가 여전히 분노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금송아지를 가루가 되도록 갈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그것을 물과 함께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개적으로 그의 형제인 제사장 아론을 책망하였습니다. 아론은 죄의식과 두려움에 짓눌려 부르짖었습니다. “내 주여, 크게 분노하지 마소서”(32:33)

그 시점에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분노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어떻게 죄를 다루시는지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난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의 그 백성을 향한 마음의 완전한 그림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는 주님을 잘못 전했습니다. 그는 오직 반쪽자리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듯이 말입니다. “사람의 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야보고1:20)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전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주님께서 모세의 분노를 인정해 주셨는지 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행동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말했습니까? 그리고 그 행동들은 불신의 세계를 향해 무엇을 말했습니까? 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범죄 하였을 때의 모습이시구나. 만일 네가 금송아지를 세우면, 그분께서 분노와 진노로 너를 대적하여 오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네게 쓴 물을 마시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너의 가족을 죽이고 너를 버릴 것이다.”

아니요,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개념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두려움을 나을 뿐입니다. 주님의 사역자로써 저는 하나님의 자비 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네, 주님은 의로우시고, 그렇습니다,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고, 인내하시며, 인자하시고, 용서하십니다.

모세는 단지 인간적인 열정으로 행동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계시 없이 행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메시지로 소리질렀습니다. “나는 주님의 편이다. 범죄한 너희 모두 나에게 오라. 나는 주님께 가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너희 죄로 인해 속죄하여야 하리라,”(출애굽기32:20을 보십시오)

성경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로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이유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본성, 그분의 성품, 영광을 잘못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거룩하고 온유하고 귀한 사역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내게 범죄하여 이스라엘 자손 한가운데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네가 네 앞에 있는 땅을 바라다보기는 하려니와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명기32:51-52)

여기에 주님께서 이 그분을 잘못 나타내는 문제를 얼마나 중대하게 여기시는지 나옵니다. 모세는 그의 최선으로, 그분의 자비로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세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 한가운데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음이라”(32:51)

베드로는 이렇게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베드로전서3:15). 베드로는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단순히 말해, “당신 자신의 마음대로 하나님을 잘못 드러내지 마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품의 흐름이 단호하게 자리잡게 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소망의 기초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시다시피,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충실한 때와, 반역의 때에 그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그분을 정확하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그분을 엄격한 판관으로써만 대표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의 아버지로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3:15).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소망의 이유는 여러분이 주님과의 경험을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참할 정도로 그분을 실망시켰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금송아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리고는 반석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보호의 손길을 느꼈던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의 용서, 자비,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여러분을 회복시키셔서 그분 안에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주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심을 압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품에 대한 진실한 계시를 확실히 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 소망의 기초입니다. 여러분이 한번이라도 죄에 의해 놀라거나 압도당한 적이 있다면 알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여러분은 죄책감에 눌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회개로 돌아가 반석 안에 숨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필요한 모든 자비와 사랑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 대해 모세에게 주셨던 커다란 계시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거룩히 구별해야 할 그분에 대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너는 아침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주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시니라.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출애굽기34:1,6-7)

여기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관한 완전한 그림, 더욱 큰 계시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이 바위로 올라오라. 내가 너를 지켜 줄 소망을 주겠노라. 나는 너에게 네가 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나의 마음을 보여주겠노라.”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모세가 주님께 간청했던 그 ‘영광’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에 영광이 있습니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는.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 영광의 완전한 표현이십니다. 정말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아들 안에 구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시기 위하여 땅으로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물론 그리스도는 아직 육체를 입지 않으셨지만 하나님 안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성품에 대해 선포하신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진리로 가득하고, 순수하고 의로우시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묻습니다. “마지막 절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자비롭고 용서하신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그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출애굽기34:7)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나의 영광이 있노라. 나는 너에게 자비와 은혜와 용서를 풍성히 주노라. 그러나 만일 네가 이 영광을 거절한다면 -마음을 강퍅히 하고, 네 죄를 사랑하며, 나에게 되돌아오기를 거부한다면- 빨리 회개하고 너를 지키겠다는 나의 언약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너는 그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악한 죄를 범한 것이다. 너는 나를 거절한 것이다. 너는 나의 사랑의 품에서 뒤돌아 선 것이다.”

사실 예수님 품 밖에는 아무런 치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의 대단한 친밀함을 가진 것에 대해서, 많이 기도한 것에 대해서, 강력한 계시를 받은 것이 대해서 간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에 거룩히 구별하였습니까? 실패와 반역의 때에 그분의 풍성한 자비에 대한 소망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물어볼 때에 이 소망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금송아지에게 절한 이후에 예수님에 의하여 회복된 것을 간증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 있다는 동일한 소망을 건네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의아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풍성한 영광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붙잡는 범죄 하기 일수 인 신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이 그분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회복된다면, 그들이 계속해서 범죄 하겠습니까? 이 풍성한 사랑의 계시가 그들로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놀라운 계시에 대한 모세의 반응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이 행한 것은 나의 영혼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모세가 급히 땅을 향하여 머리 숙이고 경배하며 이르되, 오 주여, 이제 내가 주의 눈 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우리 가운데서 함께 가시옵소서. 이는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기 때문이니이다.”(출애굽기34:8-9)

모세는 경배하며 재빨리 그의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의 강력한 환상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안에서 주님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갈망이 솟아올랐습니다. 갑자기, 그의 마음 속에 용서를 위한 더 큰 울부짖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죄를 마음 놓고 고백하기 시작했고 백성들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무엇이 이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에 대한 강력한 진리의 계시였습니다. 모세는 그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나중에 그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 내가 아론이 그분과 대면하도록 조용히 끌어당기지 않았을가? 왜 나는 그렇게 빨리 칼을 빼 들었던가? 내가 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만 받았었더라면”

여기에 모세의 부르짖음에 주님께서 반응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언약을 맺으리라. 내가 아직 온 땅에서 나 혹은 어떤 민족 중에서도 행하지 아니한 놀라운 일들을 너희 온 백성 앞에서 행하리라.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주의 일을 보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행할 일이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니라”(34:10) 마지막 절의 히브리 원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됩니다. “참으로, 내가 너의 안에 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라.”(Helen Spurrell)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전성기가 앞에 있다, 모세. 나는 내 백성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은 너 뿐만 아니라 네 주위에 있는 자들 안에 나의 거룩한 두려움을 넣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경건한 두려움을 낳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자비의 계시를 여러분의 마음에 거룩히 구별하십시오. 여러분은 모세의 예로 인해 그것이 죄로 이끌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찬양하도록 감동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 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다니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죄 가운데서 나를 찾으시고도, 바위 속 틈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입니까? 오, 제가 섬기는 그 하나님이시라니. 전 세계가 당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놀라운 계시(데이빗 윌커슨 목사) - 1

출애굽기 33장은 모순적입니다.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시니라” 그리고는, 단지 몇 절 뒤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 임이니라”(33:20) 이는 문자적으로,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한 절은 모세가 주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절은 분명히 그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실제로, 모세는 문자 그대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이 절은 모세가 하나님과 나누었던 놀라운 친밀함을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모세 사이의 결속 때문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주었던 통찰력과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든 날들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 알기를 구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주님께서 모세를 친구로 인식하셨다고 말합니다(33:11). 이것은 우리에게 모세가 하나님을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것처럼 보았다고 (또는 알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가 하나님과 함께 보냈던 충실한 시간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친밀한 지식과 이해를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일은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시점에서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은 막 주님을 대적하여 불경스러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보물을 녹여서 우상, 즉 금 송아지로 빚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의 주위를 악마적인 광란 속에서 춤추고 돌며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그 이상이 관련된 것입니다. 사람들 또한 그들의 장막에 작은 우상을 숨기고 그것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신 렘판의 별 곧 너희가 경배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들을 들고 다녔은즉”(사도행전7:43)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분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내가 그들에게 맹렬히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출애굽기32:10)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는 나머지 이스라엘과 함께 범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시간 주님과 함께 산에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여전히 그 백성들의 행동에 책임을 졌습니다.이스라엘의 지도자로써, 그는 이렇게 언명하며 백성들의 죄를 자신과 동일 시 했습니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들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32:31)

모세는 주님께서 모든 진을 소멸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였던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그분의 정해진 사역자들이었고, 주님은 그들과 언약 안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하며 하나님을 설득하려 했던 것입니다. “네, 주님, 이들은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끔찍한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만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당신 얼굴의 큰 빛 앞에서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들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만일 그들을 자르신다면, 우리는 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되돌아갈 사람이나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차라리 스스로 무덤을 파고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이 딜레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우선 이스라엘의 죄 된 본성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확실히 퇴보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날에 모세는 이렇게 그들을 상기시키곤 했습니다.

“네가 이집트 땅을 떠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주를 거역하였으되”(신명기9:7)

그러나 모세는 또한 그 자신의 죄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금송아지에게 절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는 그 자신의 인간적인 의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받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 딜레마에 빠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현장에서 저희를 심판하실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당신이었어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 위기에 대한 어떤 점은 제 스스로도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이름을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나의 모든 움직임, 나의 일어섬과 앉음을 아십니다. 저는 당신과의 친밀함을 나누었고, 당신 앞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이전 어떤 때와도 달리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무엇인가 당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호의를 얻었다면, 제발, 당신의 백성을 죄 가운데서 발견되었을 때, 그들을 향한 당신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십시오. 이 위기에 제가 지금 당신과 함께 어디에 설지 보여주십시오. 제가 여전히 당신의 친구입니까? 여전히 당신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당신의 백성은, 여전히 당신의 선하신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까? 저는 모든 위기를 통해 당신께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것을 봐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위기상황에서는,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장면에서, 모세는 단지 이스라엘의 지도자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는 높은 하늘에까지 죄를 지은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죄도 그를 하나님 앞에서 정죄하였습니다. 성경은 모든 자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결국 모세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사 주를 알게 하시고”(출애굽기33:13).

여기 히브리 원문은 이렇습니다.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시오” 여기서 자신이라는 단어는 “마음”으로 번역됩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계시기 필요합니다. 저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당신은 여기서 뭔가 당신 자신에 관해 저에게 보여주셔야 합니다. 저는 이런 류의 위기에서 당신께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당신의 은혜를 구해야 할지, 심지어 그것을 어떻게 믿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불결한 죄에 사로잡힐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도 모세의 입장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그분께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거나 작게 느껴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죄라도 그분의 심판을 살 만큼 큰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큰 친밀감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친밀감을 부정하고 그분의 우정을 화나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큰 계시로 축복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받은 빛을 대적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큰 사랑을 보았지만 그 면전에서 범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급박한 울부짖음이 솟아오릅니다.

“주님, 이런 위기에 당신은 어떠한지 보여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이러한 면을 알아야겠습니다. 제가 죄 때문에 놀랐다면- 내가 내 마음에 금송아지를 세웠다면- 저에게 어떻게 반응하실 건가요? 우리의 위기에, 우리의 의식은 죄의식에 짓눌립니다. 깊게 침체되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고는 모세가 들었던 그 진노의 음성입니다. 나를 혼자 두어라. 나는 너를 소멸하고 내칠 것이다. 몇 번이고, 나는 너를 내 팔로 끌어안았다. 모든 소망 없는 상황을 통해 나는 너를 안고 건넜다. 나는 너에게 친절하고 사랑 많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너는 자진하여 심각하게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너를 포기한다. 나는 나의 길로 걸을 충실한 종을 찾을 것이다. 나는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바꿀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너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반역하는 양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모세가 마주친 것과 동일한 딜레마에 직면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그의 친구처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회중의 죄와 마주치실 때 어떠할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친한 친구로써 아는 것으로만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시다시피, 이 관계의 인간적인 측면에서, 친구는 친밀함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편 모세는 이렇게 말할 수 도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친구이신 것으로 아는데. 그리고 나는 그분께서 나의 필요에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알아. 그분께서는 어떠한 친구라도 그러는 것처럼 공급해 주시지. 그리고 내가 기도할 때에 그분께서는 자비로 응하시지.”

그러나 이제 모세는 문제에 직면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내 삶에서 금송아지를 발견했을 때 말입니다. 내가 주님과의 친밀함의 신뢰를 배반할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그분께서는 거룩하시고, 순결하신데, 나는 그분과의 언약의 관계를 깨었습니다. 지금 나의 상처 받은 친구의 눈 앞에 어떻게 서겠습니까?

“네, 나는 그분과 함께 직면하여 이야기해왔습니다. 나는 그분과 함께 많은 시간을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친밀감을 나누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실패를 한층 더 나쁘게 만들 뿐입니다. 나는 심각하게 범죄 하였고, 그분의 영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주님,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십시오, 우리 사이가 좋았을 때만이 아닌, 제가 반역하여 죄 지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제가 이 계시를 받지 못한다면, 저는 당신과 함께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주님의 성품을 알기 전에는 그분과 함께 어디에 서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이해하여야 할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범죄 하였을 때 그분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다루실지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파라오의 강퍅함에 무시무시한 심판으로 응하시는 것을 거룩한 두려움 안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군대가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주님께서 어떻게 믿음과 순종에 반응하시는지도 보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너도록 초자연적으로 홍해를 가르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알았습니다. 더구나, 모세는 하나님을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알았습니다. 주님은 불붙는 떨기에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모세, 네 신을 벗어라, 너는 거룩한 땅에 있노라.”

그러나 지금, 현재의 위기에서, 모세는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우의 하나님의 성품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것은 더 이상 친밀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느냐, 그가 얼마나 신실했는가, 또는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봉사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과거는 여기서 상관없었습니다. 이제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죄가 용솟음 칠 때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성품에 관한 무엇인가를 더 알아야만 했습니다. 뭔가 희망을 줄 것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더 깊은 진리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백성들을 그분의 임재로, 그분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그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과 성품에 대한 더욱 큰 계시로 그를 이끌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계시는 우정이나 친밀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그의 상한 백성들이 알기를 원하시는 계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분의 영광을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할 것이요”(출애굽기33:19)

그리고는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 임이니라. 내 옆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반석 위에 설지니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그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가는 동안에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33:20-22)

이 절에서 ‘영광’의 히브리 단어는 ‘내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 자신이 네 가까이에 지나갈 것이다.” Helen Spurrell의 히브리 원어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너를 바위의 움푹한 곳에 숨기겠노라. 그리고 나는 내가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능력의 보호로 지켜 주겠노라.”

주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 너는 나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나는 네가 안전할 장소에 너를 두겠노라. 그 장소는 바위 안이다. 그리고 나는 네가 거기에 머물기를 바란다. 의심을 품거나 두려워 말라. 나는 너에게 내가 누구인지 계시를 주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데이빗 윌커슨 목사)

우리는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매여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 반면에 우리가 전에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보살핌에 우리들의 삶 자체를 의지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에 우리들의 눈을 고정시키며, 새 예루살렘에 합당한 마음 상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생명과 가족들과 미래를 주님의 보살피시는 손안에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성경에 잘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승리하는 교회, 그분의 아들의 신부로 선택하셨습니다. 이 신부는 지명되었고, 선별되었고, 예수님과 결혼하기로 약속되어졌습니다.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

무엇이 이 신부의 초점이 되어야 할까요? 그녀의 초점은 전적으로 혼인식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데 맞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부가 영적으로 쇠퇴한 상태를 마음 아파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프게도 많은 관심사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과 물질을 사랑함으로 그들 자신들을 더럽혔습니다. 지금 그들의 예복은 먼지로 더럽혀져 있고 또 얼룩져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5:25-27)

바울은 알기 쉽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랑을 위해서 단 하나의 티나, 주름, 혹은 흠잡을 것이 없이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 이 세상의 것들에 매달리지 않고 죄로 저주받은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 매일 자신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는 천국의 하나님으로부터 신부로 준비된 거룩한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음을 압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城)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거룩한 도시는 시온이며 인내로 이긴 하나님의 영적 자녀들로 형성된 곳입니다. 그들은 천국에 그리스도와 단둘이 앉혀졌습니다. 그들은 단둘이 시간을 보낸 그곳, 즉 은밀한 기도실에 들어갈 때마다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부" 인 성도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물질적인 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들의 마음은 항상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외에 아무도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임재하심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그분에게 자석처럼 달라붙게 합니다. 매일 아침 그들은 일어나며 생각합니다.

"주님, 저의 가족과 직장. 그리고 당신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지구가 계속 존재 할지 그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저의 마음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날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자신들을 다듬고 있는 성도들은 재앙이 내릴 때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대혼인 잔치를 위해 떠나는 것입니다. 이 신부는 믿음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준비하며 그녀 자신을 가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정돈하고 사랑하는 분에게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녀는 오직 그녀의 신랑과 함께 하기만을 원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신부들이 지상에서 펼치고 있는 사역이 얼마나 멋지고 거룩합니까? 하지만 저는 얼마나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육적인 안녕을 위해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전적인 초점은 경제적 불황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타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양의 속죄물 위에 잔치를 벌이는 대신 직접 불황에 맞서다 기진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이 세상의 불결한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영적인 사람이 아닌 육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이 지상의 운명을 안전하게 넘기기 위해 모든 정력을 다해 갖은 수단을 강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 너의 그러한 정열을 내게 바칠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위해 너의 마음을 그처럼 철저히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탄식하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확신시켜 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마음을 정돈하고, 죄 문제를 청산하고,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찾으며,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며, 믿음을 쌓고, 영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모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황과, 손해와 박탈, 사방의 재난 등에 대응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혼란 상태나 홍수, 훨훨 타는 용광로, 핍박, 흉년, 가뭄, 기근, 질병 등을 극복할 준비도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결합하기 위한 혼인 잔치를 향해 행진할 수 있도록 준비될 것입니다!   
<위기 그곳에 계신 하나님 - 데이빗 윌커슨 목사 저>

에베소, 두아디라,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데이빗 윌커슨 목사) - 2

저는 이렇게 느꼈던 많은 그리스도인의 비극적인 퇴보를 목격해 왔습니다. 그들은 절대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에 앉아 TV로 설교를 보는 것으로 끝냅니다. 그들은 영적 식사로 어떠한 고기도 얻지 못합니다. 그들이 먹는 것들은 가벼운 것들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 냉담함이 들어섭니다. 곧 그들은 교회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그들은 지체들의 모임을 무시하는데,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경고합니다.(히브리서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임재에 완전히 무관심하게 됩니다.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변명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과 개인적 교제를 계속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라도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어떠한 상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귀중한 시간을 성실히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사시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그분의 임재로부터 깊이 마셔야 합니다.

계시록1-3장을 비추어볼 때, 모든 신자는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의 선행- 나의 성경공부와 내 섬김-이 예수님과의 시간을 빼앗았는가? 나는 여전히 한 때 그랬던 것처럼 그분을 갈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뭔가 잃어버렸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어두움을 염려하시며 모든 시대의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계시록2-3장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교회들은 글자 그대로 아시아의 일곱 회중이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교회가 교회역사의 7지역을 대표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단순히 여기 이 메시지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의 그분의 백성들의 마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의 교회에 퍼지는 어떠한 영적 어두움에 관해서도 우려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이 절의 일곱 교회 중 다섯 교회에 거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세 개의 교회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에베소, 두아디라, 그리고 라오디게아.

우리는 이미 에베소의 문제가 그리스도와의 친밀감 부족이었음을 봤습니다. 두아디라의 문제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꿰임의 악마적인 사역자들과의 관련이었습니다. 그 목사가 이 말씀을 읽었을 때의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두아티라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빛나는 놋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일들을 말씀하시느니라. ”(계시록2:18)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를 거룩한 분노의 타오르는 눈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칭찬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네 행위와 사랑과 봉사와 믿음과 네 인내와 네 행위를 아노니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2:19)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행위를 안다. 너의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이들은 너희가 시작했을 때보다 더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 그분께서는 그분과의 친밀함을 잃었다고 그들을 꾸짖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꿰뚫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가 자칭 여선지자 이사벨이란 여자를 용납함으로 그녀가 내 종들을 가르치고 유혹하여 행음하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기 때문이라.”(2:20)

여기서 언급된 이세벨은 정확히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거짓 목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두아디라의 목사에게 그분의 백성을 꿰는 탐욕스러운 사역자들을 허용한 것에 대해 책망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육욕으로 가득 찬 사역자들이 너희 강단에서 마음껏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빛의 천사와 같이 와서는 내 백성을 꿰기 위하여 사악한 속임수들을 쓴다.”

여기의 이세벨의 언급은 단지 탐욕스러운 사역자 그 이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거짓목자들은 실제로 그들의 육욕을 실행하고 이루기 위한 음모를 짜냅니다. 단순히 말해,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눈에 악하고 가증한 모든 자들의 전형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주어진 혼란스러운 상황입니까?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헌신된 하나님의 남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내하고, 신실하며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신자들이 거짓선지자들에게 현혹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께서 멸시하는 사악한 사역자들에게 꿰임 당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은 충격 받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이 나라의 방방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무리를 속여 강탈하려는 여우들이 한때 거룩한 메시지로 알려졌던 교회들 안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에게 왜 이를 허용했는지를 물어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설교자들은 회중을 끌어요. 사람들이 교회로 오지요.” 그러나 그는 사탄 그 자신의 먹이를 대접하기 위하여 거짓선지자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탐욕의 복음 말입니다.

여기의 모순을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두라디아의 목사를 사랑과 경건함의 사람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사람이 언어도단의 죄, 곧 사람들의 육신을 선동하고 그들의 육욕거리를 제공하는 목자들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흥에 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 사악한 발상을 들여왔고 사람들을 악마적 유혹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목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그들의 복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몰려오는 것이 멈추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여우들의 유혹을 관용한다. 그리고 너는 그것이 너희 백성들에게 하는 짓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은 이 설교자들의 집회에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파탄으로 이끌리고 있다. 그들은 간음하며 우상의 제물들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너는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거절하였다. 나는 내 양들에 대해 목자로 너를 불렀다. 그러나 너는 그들을 보호하고 있지 않다. 왜 너는 이와 같은 악을 관용하는 것이냐? 왜 너는 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느냐?”

목사들의 첫째 의무 중 하나는 강단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자가 거기 서서 거짓된 말을 전하도록 허락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억제적인 문제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겠지만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적인 간음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악한 속박, 육욕적인 교제, 즉 거짓 사역자의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경고는 확실합니다. “너희는 육신을 자극하는 것을 먹고 있다. 그것은 육욕을 만족시키는 복음이다. 그리고 너희의 영적 생명은 위기에 처해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자들은 배교하는 신자들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이 가진 무엇이라도 여러분에게 내줄법한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복음에 유혹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속삭이는 교활한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너는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해”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을 멸망시키고 속이러 오는 거짓목자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 거짓 복음을 받는 다수의 분별력 없음에 충격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의 영이 사실은 악마적인 어떤 TV복음을 먹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욕에 호소하며 노인의 마지막 동전마저 취하는 그런 부유한 설교자들로부터의 메시지를 들이키고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들을 보는 게 무슨 해악이람? 그들이 말하는 걸 듣는 게 나를 해할 리가 없어. 게다가, 그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 것 같은걸?” 아니오! 만일 여러분이 사악한 목자와 함께 한다면 여러분은 악마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악과 함께 음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모든 TV복음 설교자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차이를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육에 이끌리는 설교자들의 동기를 간파하는 잘 다져진 성도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깊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자”(계시록2:24) 그리스도께서는 이 돈을 붙잡는 사역자들에 관해 둘러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지옥의 바로 깊은 곳까지 영혼을 끌어 내린다.” 그렇습니다. 이 사역자들은 그리스도를 설교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설교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악마의 교리로 얼룩진 복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악한 목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녀에게 자기의 음행을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녀가 회개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거짓 선지자와 복음전도자들을 인내해 왔다. 나는 그들에게 거듭 경고를 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돌아설 충분한 시간을 받아 왔지만 그들은 거절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의 말씀에 모든 바른 사역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보라, 내가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며, 그녀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자기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대환란에 던지리라. 또 내가 그녀의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이리라. 그러면 모든 교회들은 내가 사람들의 속과 마음을 살피는 자임을 알게 되리라. 또 내가 너희의 행위에 따라 너희 각자에게 주겠노라. ”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단지 거짓 선지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듣고 지지하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고약한 병든 상태와 영적 죽음으로 끝날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러한 신자들이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나가는 모든 자들에게 네 음행을 쏟았으니”. 다른 말로 “너희는 온갖 이런 거짓 사역자들을 쫓아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너희를 팔아먹으며 너희에게 상처와 영적 죽음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세벨의 사역자들에게 대항하여 신실하게 섰던 자들을 칭찬하십니다. “”(2:25)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진리의 분별을 배웠구나, 너희는 온갖 교리의 바람과 물결에 의해 왜곡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붙들 고 있는 것을 지키라. 속지 않게 하여라. 그것이 내가 부탁하는 전부이다. 나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너희에게 아무런 짐도 지우지 않겠다” (2:24를 보십시오)

저는 예수님으로부터의 편지를 여는 라오게디아의 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게디아의 교회에 한마디의 칭찬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이 목사는 다음을 읽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 이 얼마나 주님의 무서운 말씀입니까?

저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전 교회가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을까? 어떻게 모두가 영적으로 눈멀어서 그들 모두가 미지근하게 되었을까? 이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거룩한 남은 자에 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두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3:17) 것으로 묘사하십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비참하고 가련하며 헐벗었으면서도 그걸 모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이 사람들이 지독한 거짓에 의해 눈멀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라오게디아 사람들은 매우 물질적이었고 부유하며 번영하였습니다. (이는 금전적으로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나 영향력적으로 증대하였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만으로도 전적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분별력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교회는 번창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교회를 좋아하고 거기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살피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 보신 것으로 인해 질겁하셨습니다. 이 라오게디아 사람들은 거짓에 의해 속았습니다. 그 거짓은 “나는 괜찮아, 나는 내가 영적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거야, 나는 변하지 않았어, 나는 여전히 동일하게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야. 나는 의롭고, 뜨거운 신자야.”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 이렇게 단언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자이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3:17)

저에게 이 회중은 현대 미국교회의 자본주의적 열광을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단지 계속 증가하는 성장을 뜻하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비즈니스 세계에는 이런 모토가 있습니다. “성장 아니면 죽음” 항상 모든 것은 커져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모든 것이 가장 커지고 최고가 되도록 하기 위한 동인을 가져야 합니다.

그거야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교회에도 침투되었습니다. 미국은 자본주의적 기독교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목표는 영적 성장이 아니라 재정과 자산 그리고 수적인 확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이러한 열광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의 라오게디아인들에 대한 심판은 오늘날의 많은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너는 네게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지. 너희의 눈먼 것이 너희를 미지근해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도 못하지. 너희는 여전히 너희가 나에게 뜨겁다고 생각한다”

에베소에서 교회의 죄는 예수님과의 친밀감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두아디라에서는 분별의 상실이었고, 영적인 간음이었습니다. 이제 라오게디아에서 우리는 그 모든 죄보다 심각한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 상실입니다.

그것은 모두 벌거벗음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벌거벗은 상태에 관해 라오게디아인들을 책망하십니다.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게 하며”(3:18) 여기서 벌거벗은이라는 말의 희랍어는 ‘자원이 고갈된’ 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 곧 그들의 필요에 그분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 그의 자원을 준비해두십니다. 그분의 자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진정한 영적 부요 입니다. 그분의 힘, 그분의 기적적인 사역의 권능, 그분의 초월적 인도하심, 그분의 명백한 임재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스스로를 의지하는 교회에 이렇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서 나의 모든 자원을 치웠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너희는 완전히 피폐해졌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상태를 깨닫지 못한다.”

한 시간짜리 찬양예배 내내 편안하게 앉아있는 회중을 그려보십시오. 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인생의 스트레스를 다루는지에 관한 짧은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재빨리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깨어지거나 뉘우쳐야 할 어떠한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꿰뚫는 말씀으로 죄를 깨닫거나 괴로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 나를 녹여주소서, 나를 깨뜨려 주소서, 오직 당신만이 나의 갈급함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이런 울부짖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에 가졌던 열정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이 신자들은 한때 하나님의 말씀에 열중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영적인 탐조등 아래 내려놓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가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 모든 것에서 자라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일요일 아침으로 제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미지근한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라오게디아의 목사와 그의 회중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분이 과감한 조치를 취하시겠다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그분의 자원을 필요로 하도록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그분의 사랑의 손이 그들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 안에 그분의 권능과 도움을 구해야 할 필요를 만들어내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도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라오게디아 교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식사를 드는 것에 관한 모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문을 두드릴 때 응답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와서 교제하자고 너희를 불러내고 있다. 나는 너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나와 함께 보내는 그 어떠한 시간이라도 너희에게 그 자원들을 살수 있는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이 너희가 나의 자원을 얻는 방법이다. 나와 함께하는 너희의 교제는 너희가 사역을 계속 하는데 필요한 것을 준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마지막 날에 교회의 간증을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아멘!   <원제 : Christ, the Searcher of Men's Hearts 그리스도,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

에베소, 두아디라,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데이빗 윌커슨 목사) -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교회를 위해 그분의 생명을 주셨고, 지옥의 문이 교회를 대적하여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광과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오순절에, 그분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그의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기름부음 받은 종들을- 목사, 교사,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축복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계시록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왜 그렇게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입니까? 요한은 예수님께서 불타는 눈과 천둥 같은 목소리로 교회에 오신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 일곱 촛대 사이로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 … 그의 머리와 머리털은 눈처럼 희어서 양모처럼 하얗고, 그의 눈은 불꽃 같더라.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가졌고 또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가진 칼이 나오며, 용모는 해가 그 맹렬한 기세로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1:13~16)

이제, 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의 집대성한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종말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 책에서 우리가 보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이미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왜 그리 두렵게 나타나시는 걸까요? 그리고 그분은 왜 교회를 향하여 날카롭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요한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칼과 같이 날카로워 골수를 쪼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사도는 예수님의 가슴에 그의 머리를 기대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엎드려져 있는 그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를 보자 죽은 것처럼 그의 발 앞에 엎드려지니”(1:17)

예수님 자신께서 그분의 두려운 모습에 관해 설명하십니다. “모든 교회들은 내가 사람들의 속과 마음을 살피는 자임을 알게 되리라. 또 내가 너희의 행위에 따라 너희 각자에게 주겠노라.”(2:23) 사실 그리스도는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분께서 교회를 살피러 오신 이유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사랑으로 바로잡고 정결케 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나에게 말씀하시니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요”(1:17).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 교회의 모두가 내가 그들의 속 사람을 살피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알기 원한다. 그리고 나는 이를 불 같은 눈과 영혼을 흔드는 천둥으로 행한다. 나는 완곡하게 말하지 않겠다.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은 꿰뚫기도 하면서 치유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자녀 중 누구라도 냉담과 무지 가운데 계속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의 눈과 입이 모든 허울을 꿰뚫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에서 무엇인가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요한에게 그분의 말씀을 받아 적어 교회의 일곱 천사들에게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사역자를 의미하며 그들을 그분의 손에 있는 별들로 부르기도 합니다. (1:16을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종들을 사랑한다. 내가 그들을 부르고 기름 부었다. 그리고 이제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해야 한다.”

목사인 나 자신으로써, 저는 궁금했습니다.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편지를 받아 열게 되는 것은 과연 어땠을까? “뉴욕 교회의 목사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회중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일곱 사역자들이 느꼈을 것을 상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에베소의 목사는 요한의 편지를 읽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로 기뻐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인들이 열심히 일한 것과 인내와 근신을 칭찬하십니다. 그들은 악을 미워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어섭니다. 또 그들은 내내 선한 행실을 멈춘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이 목사는 그가 읽는 것에 놀랍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와~ 주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구나, 이것은 칭찬의 편지로군.”

그러나 그는 계속 읽어가며, 꿰뚫는 말씀에 다가갑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첫 사랑을 저버린 것 때문이라”(2:4). 예수님께서는 그 목사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하며, 너는 처음 일들을 행하라.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너에게 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그 예베소의 목사는 여기서 깜짝 놀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회개? 아니면 우리의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충격적인 말씀이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우리는 언약의 신자들인데, 우리는 믿음으로 의로워 졌는데. 우리는 관대하고, 사랑하며, 돌보았는데. 이제 우리는 돌아가서 처음처럼 되어야 한다고?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일 수 있을까? 내가 이 편지를 어떻게 우리 회중들에게 이 편지를 읽을 수 있을까?”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들은 거룩한 회중들에게 지시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주님의 눈에 깊이 심각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그분께서는 그토록 훌륭한 교회의 본보기에 그렇게도 엄중하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분께서는 그 목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나를 향한 첫 사랑은 예전과 같지 않다. 너희는 나와의 교제를 소홀히 하였다. 이제 회개하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은 그분의 임재와 관련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베소인들은 선한 일에 성실히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주님과 친밀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음 절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곱 교회의 목사들과 회중들을 향한 메시지를 요약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3:20) 너무나도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마음의 문을 예수님께 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두드리실 때, 심지어 그들은 집에 없기까지 합니다. 대신 그 문 위에 이런 표시가 있습니다. “주님, 저는 병원의 사역으로 부재중이오며 다음은 감옥사역입니다. 교회에서 뵈어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자선적인 착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필요를 위한 대부분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중은 깨끗하고 바른 삶을 살며 죄를 피하기 위해 조심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엇인가 바뀌었습니다. 한때, 이 신자들은 예수님과의 교제에 헌신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과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단 하루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드리는 것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러 갈 때 짧게 드리는 인사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의 교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영혼을 잃는 데 이르게 되는 한 가지 요소를 제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임재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나의 교회는 무엇인가 잃어버렸다. 바로 나의 놀라운 임재 말이다. 너희는 다시 비밀한 골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와 다시 식탁을 나누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서 나의 임재를 거두어 가겠다. 너의 모든 선행은- 너의 설교, 전도, 구제- 우리의 시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나의 테이블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다.”

에베소교회는 한때 소유했던 그 무언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들 한 가운데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임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그들의 사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때, 그들은 서로서로 사랑하고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서로서로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선행을 하기 위한 수고에도 비참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 너무나도 바쁜 나머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그들의 행위가 초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분의 강력한 임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변화하지 않으면- 너희가 나를 향한 갈급함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의 증거를 없애겠다. 너희가 선행을 할 때에 더 이상의 어떠한 권위도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헛된 것이 될 것이다.”

저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봅니다. 내가 알았던 어떤 열심의 사람들은 복지부나 사회단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정신병동이나 학대어린이에 관하여 일하는 사람들도 그러합니다. 이 사람들은 성실하고 헌신된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매일 목격하는 것을 직면하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들은 스스로 마음을 무감각하게 해버렸습니다.

동일한 일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목사나 전임 사역자들도 그들이 사역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고통과 죄를 보면서 무감각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에베소의 목사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한때 서로서로에게 너무나도 친절했다. 너희는 사람들을 향한 그러한 사랑이 있었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너희는 그들과 함께 앉아있으면서도 그들의 울부짖음에 대해 너희 자신을 무감각하게 하였다. 너희는 생명 없이 습관적으로 사역하고 있다. 나는 너희로부터 나의 임재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는 잠시 동안 주님께서 그분의 임재를 거두어 가신 교회에 있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두움과 메마름이 거의 만져질 정도였습니다. 모두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 하고 계십니다. “나는 잠시 모든 것이 냉담해지게 하 것이다. 나는 너희를 권태에서 건져내기 원한다. 나는 너희가 나의 임재가 없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 원한다.” 교회가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전적으로 참담한 일입니다. 성령님의 죄를 깨닫게 하심도 없고, 회중을 감동시키는 것도 없고, 젊은이들을 감동시키는 것도 없습니다.

또 다른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이 예수님의 임재가 뚜렷하지 않은 곳에서는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몹시도 그분의 친밀함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할 때, 다른 곳으로 그것을 찾으러 갑니다. 저는 그런 불평이 담긴 많은 편지들을 받습니다. “저는 주님의 임재가 살아계신 교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원제 : Christ, the Searcher of Men's Hearts 그리스도,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까? - 2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한 점 왜곡되지 않고, 타협함 없는, 순전한 말씀을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결코 듣지 못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그들의 교만함이 진리가 닥치는 때를 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면 왕과 왕의 가족 그리고 백성들이 살 것이라 말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도 파멸되지 않을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항복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왕도 죽을 것임을 예레미야는 말했습니다. 시드기야는 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네. 이미 항복한 유대인들이 있지 않은가. 내가 항복한다면 그들이 나를 조롱하고 멸시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나를 괴롭게 할걸세!”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가고 성읍이 무너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의 교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마침내 한 밤을 틈타 도망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왕비들은 겁탈을 당했습니다. 그의 눈은 불태워져 뽑힘을 당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3. 많은 사람들이 정결한 말씀을 큰 소리로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오랜 동안 지속되어 온 그들 마음에 감추어진 우상을 숨기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강력하고 순결한 말씀이 필요합니다.”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적혀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편지를 읽었을 때 저는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시대의 예레미야는 어디 있습니까? 거룩함을 선포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목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저는 주님의 대답에 놀라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 많은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땅의 사악함으로 인해 탄식하며 우는 거룩한 남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갈망하며 나에게 순종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리를 발할 때 듣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즐기는 죄나 우상을 다루는 메시지를 거부할 것이다!”

이 말씀이 예레미야 42장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거룩한 자들만이 남아 있었고 요하난이 그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로 도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들레헴 밖에 진을 치고 예레미야를 불러 주님의 말씀을 받으려 했습니다.

“이에…다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는 우리 중에 진실 무망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예레미야 42:1-6)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듣기 위해 이 보다 더 진지한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는 진심으로 진리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좋아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열흘 동안 주님과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분명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순전한 말씀을 열망하는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옵소서. 당신의 심령에서 나오는 말씀을 내게 주옵소서!”

그러나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나의 말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상숭배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진리를 원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미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에게 왔습니다.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그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하여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 말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복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거하지 아니하리라 하며…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되리라…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예레미야 42:10-16)

지도자들은 예레미야가 거짓을 이야기한다고 그를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예레미야 42:14)

그들은 나팔 소리가 지겨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영적 전쟁에 지친 것입니다! 남은 자들의 지도자들은 말했습니다. “여긴 너무 큰 전쟁이 있는 곳이야. 나팔과 천둥 같은 소리를 듣는 것이 이젠 지겨워!”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고집한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의 나팔소리 듣는 것을 지겨워 하고 영적 전쟁과 삶의 전투에 지친 모습 말입니다. 그들은 “제발, 저를 그냥 내버려두세요! 더 이상 저를 괴롭게 하는 설교나 정죄하는 모임은 싫어요. 저는 단지 고상하고 조용하며 위로하는 예배 처소를 원할 뿐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이야기가 다 지겨우십니까? 너무나 지쳐서 이제는 “그냥 평안했으면 좋겠다. 이런 긴장감 속에서는 참 살기 싫은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진심으로 옳곧은 주의 진리의 말씀을 듣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여러분의 심장에 손가락을 겨누고서 “당신은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심령은 점점 차가와 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우상숭배를 치리하지 않는 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저 역시도 그 질문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나는 진정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원하는가? 저의 정직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아니오, 주님, 저는 진정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 모두를 듣기 원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이 저를 감찰하기를 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것을 다 감당할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임할 하나님의 끔찍한 심판에 대해서 계속해서 듣기를 원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의 은혜만이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최근에 어느 젊은 목사가 제게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요? 그런 건 그냥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기뻐하며 우리의 길을 가면 되지 않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준비시키기 원하십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주님은 준비된 신부를 위해 오십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심판의 불이 떨어질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랑 가운데 우리에게 미리 경고해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베드로후서 3:11-12) 우리는 심판이 닥칠 때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움을 입고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났을 때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안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가 닥쳐오고 있다고 경고했던 그 모든 공포의 사건들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시위대 뜰에 머물렀더라” (예레미야 38:28) 그는 틀림없이 갈대아 인들이 성안으로 밀려들어올 때 감옥 안에서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무려 23년간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피가 흘러 넘치고 있었습니다!

왕의 궁궐도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모든 지도자들이 숨어있는 곳에서 끌려 나왔습니다. 그 광경과 소리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예레미야가 주의 긍휼을 구하며 외쳤을까요! “오 주님, 저는 그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살려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그러나 여기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온 도시가 부숴지는 것을 보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전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건져주었던 에벳멜렉도 안전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두려움 가운데 숨어있는 에벳멜렉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9:17-18)

에벳멜렉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느꼈을 평안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에벳멜렉에게 주어진 것과 똑 같은 메시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신실함과 순종함으로 행하는 자들은 고난의 때에 주님께서 기적적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두려워 말라 네가 나를 신뢰하였은즉 네 생명이 보전되리라!”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 샌디에고 까지 캘리포니아를 지진으로 흔들고 계십니다. 온 나라가 심판을 해산하는 진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보시거든, 뉴욕시가 화염에 휩싸였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거든, 무릎을 꿇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제게 경고해주셨습니다! 저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바로 지금 저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선지자중의 한 분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면서 말씀 위에서 시대를 보는 영적 통찰력이 아주 탁월하신 분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까? - 1

예레미야의 목자들에 대한 경책은 아주 신랄했습니다! 저는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수많은 경건한 목사들을 거느리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삯꾼 목자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예레미야 23: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11절)

예레미야는 이들을 “소돔의 선지자”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보았던 사특함들을 열거했습니다.

1. 그 목록의 맨 위에는 간음이 있었습니다. 즉 정욕으로 가득한 눈을 가지고 있는 목사들 말입니다! 그들은 음란하고, 육적이며 안목의 정욕을 좇습니다.

2. 그들은 거짓을 행합니다. 진리가 그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3. 그들은 악한 자들의 행위를 더욱 굳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름이 나있는 자들의 죄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가 줄어들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4.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비전을 이야기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자아와 명성을 세우기에 합한 육적인 비전을 이야기합니다.

5. 그들은 타협하는 자들을 부추깁니다. 지지와 사랑을 잃을 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6. 그들은 개인적인 꿈을 부추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7.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씀을 빌려옵니다. 그들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습니다.

8. 최악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이야기를 말씀인양 늘어놓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러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예레미야 23:16-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날 이런 메시지를 미국 전역에 있는 강단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미국은 다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유해질 것이며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현재도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언제나 하나님께 특별한 나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슬프게도 이런 부드러운 메시지를 선포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이 죄 가운데 거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목사들, 전도사들 교사들이 성결하지 못함으로 강단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비디오 가게에 몰래 다녀와서는 자신의 서재에서 지옥의 끝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외설스러운 것들을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고통 받는 불쌍한 많은 아내들로부터 수많은 편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과 마음은 각종 나체와 음란한 것들로 언제나 불타고 있습니다. 성결치 못한 이러한 삯꾼 목자들 대부분은 사역이 금지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믿음의 양들에게 저주를 부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동시에 다른 부류의 목사들 “그분의 종, 선지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한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목자들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양들을 위해 세워진 두려움 없는 종들입니다. (예레미야 23:4)

성경은 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였다(stand)”(18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예하였다(stand)는 단어의 의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주고 받는 교제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거듭 거듭 우리는 이러한 특징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악한 왕 아합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왕이여, 내가 당신에게 온 것은 주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예레미야 23:18)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권고를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들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3:22) 그들은 누구의 죄가 드러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집에서 죄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영적 죽음과 타협은 전적으로 타락한 목자들의 탓만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갈급한 회중들이 가장 바라는 목자의 모든 것을 갖춘 자 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의 마음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짓는 죄로 인해 울부짖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인해 투옥되었으며 끔찍한 물웅덩이에 내던져졌습니다!

성경은 거듭 거듭 예레미야가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까지” 주님의 임재를 기다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서에 무려 50번이나 나옵니다.) 당시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주님은 타협과 타락의 시대에도 진정한 선지자와 목사들을 거느리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예레미야에게… 에스겔에게… 임하니라”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요나, 미가,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분명하게 경고해 주셨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으로 가득하였지만 동시에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소망으로 가득 찬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경건치 못한 것들로부터 구별될 것에 대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동시에 끊임없는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보편적으로 진리의 말씀에는 세 종류의 반응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바로 이 세 종류의 반응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1.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을 그냥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이사야 30:9-10)

제가 이 말씀을 처음 접했을 때는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저는 “자기 목사님에게 거짓된 메시지를 요구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 그런 자들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이 강력한 예언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그러한 자들의 반응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납니다. 그들은 “나는 이런 설교를 받아들일 수 없어. 저런 설교는 참 황당해! 나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에 대한 단순한 성경의 가르침이나 들으면 좋을 것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은 바로 이스라엘이 원하던 바로 그 말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사야 30:11)

그들은 죄를 드러내는 말씀을 너무나 경멸한 나머지 그런 말씀을 더 이상 전하지 말도록 요구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 좇았음이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고” (예레미야 9:13-15)

하나님은 “너희가 그런 부드럽고 우유부단하며 쉬운 위로로만 가득찬 설교에 안주하기를 선택할 수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에게 독이 될 것이다! 너희들은 그것을 마시고 죽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2.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만함으로 인해 들을 수 없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큰 능력과 영향력, 권위를 가진 자 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시야 왕도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드기야가 경건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해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좌를 이어받자 그에게는 주님을 위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결국 위기가 닥쳐오고야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이 갑자기 포위되었습니다. 무자비한 갈대아 족속, 강하고 힘있는 군대에 둘러싸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물도 차츰 떨어져 갔습니다. 시드기야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불러서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7:3) 어려운 때를 만나는 많은 자들이 그러하듯이 시드기야도 진리를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온 나라에 기도를 촉구하는 그의 간청은 참으로 진지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왕에게 파멸을 예언했습니다. 이럴 즈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갈대아인들에게 애굽의 바로 왕이 거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다가오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졌습니다. 공포가 갈대아인의 진지에 엄습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5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벽 위에서 대적이 도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 날뛰었을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우리의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 성읍이 불타지 않았다. 이제 예레미야가 말하는 멸망과 어두움도 이와 함께 끝나버렸다!”

저는 그날 밤 이스라엘이 성문을 열어 젖히고 일주일간의 공식적인 잔치를 선포하면서 포도주 잔이 넘치고 양식이 풍성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위기는 끝났다. 축배를 듭시다!” 인간 본성이 그러하듯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위기는 떠나가고 일상 생활로의 복귀가 일어났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신이 국가적인 기도를 요청했었던 것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 선지자 때문에 그렇게 놀라서 두려워했지?”

그날 밤 누가 가장 조롱과 멸시를 받았겠습니까? 멸망을 예언했던 자가 아니겠습니까! 예레미야기 지붕꼭대기에서 홀로 성읍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제게 심판을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갈대아인들이 물러갔습니다. 경제적, 물질적 환란도 끝났습니다. 당신은 제게 여자와 아이들까지도 죽음을 당하고 온 도시가 불탈 것이라고 경고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피흘림도, 양식의 부족함도 없습니다. 제가 받은 말씀이 그게 다 였습니까?” 그러나 갑자기 성경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주님의 말씀이 다시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가서 다시 갈대아인이 돌아올 것과 그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끝낼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안돼요, 주님, 또 하라니요! 누가 저를 믿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왕의 궁전에 들어가 외쳤습니다. “시드기야 왕이여! 갈대아인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이 말을 믿지 않고 고개를 저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전에도 들었던 이야기니까요! 그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즐기는 자리로 다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척후병이 달려들어왔습니다. “갈대아인들이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갈대아인들은 이번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다시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모르게 몰래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 37:17)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이제 진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네!”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대답했습니다. “예, 말씀이 있었습니다. 왕께서 바벨론 왕에게 사로잡히실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여전히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 할 따름이었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던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포위된 성읍의 상황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여자들은 자신의 아기를 삶아 먹었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종말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베옷을 입고 성벽 위를 거닐며 그 파멸의 상황을 다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예레미야를 불렀습니다. 그는 그 선지자를 비밀 입구를 통해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갔습니다. “내가 네게 한 일을 물으리니 일호도 내게 숨기지 말라” (예레미야 38:14) “나에게 진실을 말해주시게. 부드러운 말은 필요 없네. 하나님께서 이번에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를 진심으로 듣고싶네!”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