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박사는 20세기 성령운동을 3기로 나누어 제 1, 2, 3 성령의 물결로 표현했다. 리차드 리스(Richard M. Riss)는 제1성령의 물결을 주요 재(再)각성운동이라 불렀다.
제1 물결은 오순절 운동이오, 제2 물결을 카리스마적 운동이오, 제3 물결은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적 운동을 합친 것을 말한다.
1987년 추산으로 제1,2차 물결의 수는 247백만 명이며 제3물결의 수는 27백만 명이다. 이 세 번의 성령의 물결은 모두 성서의 권위를 최종적인 권위로 보고 있으며 동시에 세계복음화의 긴급성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날에도 세계도처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믿고 있다.
1. 오순절 운동 - "거룩하게 뒹구는 자"
제1 물결은 오순절 운동으로서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번져갔다. 오순절 운동의 주된 특징은 강한 성령사역으로서 기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기적 중에도 두드러진 것은 성령세례로 나타나는 방언이었다. L. A. Times는 1906년 4월 18일자에 아주사 거리의 방언을 첫 페이지에 취급하면서 “이상한 왁자지껄한 소리”라는 머릿기사로 시작했다. 방언과 함께 치유와 축귀 역사도 강하게 나타났다.
예배의식은 자유로운 열린 예배로서 큰 소리로 찬양하며, 두 손들고 기도하며, 감정을 표출하며, 마루에 넘어지며, 영적인 춤을 추는 등 외적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오순절 운동은 2가지 이유로 배척을 받았다.
첫째, 1900년도 초기에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권능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현상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을 취급할 신학도 없었다. 많은 신학자들은 표적과 기사는 신약시대에 있었던 일이며 정경(正經)을 결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한 사도들의 증표로서 방언, 치유, 영 분별 등의 표적이 필요했지 오늘날에는 성령의 은사를 통한 기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기적종료론을 주장했다.
둘째, 여기에 더하여 오순절운동은 일반적으로 지혜와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다. 영적 각성의 자발성 때문에 전통적인 예배 질서가 무너지면서 기성 교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00년대의 오순절 교회의 부흥 운동이 애팔래치아 산맥에 있는 사람들에게 역사 했을 때 그곳의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권능아래 아무런 제한 없이 마루바닥에 쓰러져 소리치며 구르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예의바른 기독교인들은 그 현상을 감정주의나 히스테리로 간단히 취급하여 이들 초기의 오순절 교인들을 “거룩하게 뒹구는 자들”(holy rollers)이라고 별명을 지어 비웃었다.
『타임즈』지는 이런 현상들을 멸시와 조롱에 찬 어조로 “아주사 거리의 허물어진 판자집”에서 모이는 “고삐 풀린 광신자들의 새로운 파당”이라고 혹평을 했다. 1906년 4월 18일의 첫 페이지에 “괴상한 교리의 신봉자들은 가장 광신적인 의식을 행하며, 가장 방종한 이론을 설교하며, 특별한 열정으로 광적인 흥분 상태에 빠져있다”라고 보도했다. 오순절 운동은 1950년까지 많은 멸시를 받았다.
그 이유는 오순절 운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지식층의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성교회에서는 그들은 오순절주의자라고 따돌림을 당하고 오순절주의자라 하면 무식한 사람들로 여겼다. 그 결과 기성교회 지도자들은 오순절 운동을 이단적이라고 하고, 어떤 복음주의적 지도자들은 오순절 교회서 나타나는 현상을 마귀의 역사라고도 하고, 심지어는 사교적인 의식으로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나,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일도 있었다. 오순절 교회가 신교에서 인정받기까지는 반세기나 걸렸다.
2. 제1물결 찰즈 팔헴과 윌리엄 시이무어와 방언의 은사
제1 성령의 물결인 오순절 운동은 감리교회의 목사가 된 찰즈 팔헴(Charles Parham, 1873-1929)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캔사스 주 토페카(Topeka)에서 벧엘 치유소(Bethel Healing Home)를 설립했으며, 1900년 10월 15일에 벧엘 성경학교를 시작했다. 1900년 12월 31일 그는 학생들 개개인에게 성경에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에 대한 것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학생들은 연구 결과를 보고하면서 사도행전에 보면 방언의 은사가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했다. 1901년 1월 1일에 아그네스 오즈만(Agnes N. Ozman, 1870-1937)이란 여학생(30세)은 기도 중에 팔헴에게 안수를 받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으라는 성령의 감동이 왔다. 오즈만은 “그 분이 내 머리에 두 손으로 안수를 하자 성령이 내 위에 임하시고 나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라고 했다. 3일 동안의 기도 후 1월 3일에 몇 명의 다른 학생들도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때 상황을 릴리안 디슬즈외이트 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대한 기쁨이 내 영혼에 쓰며 들었으며 나는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했다. 나의 혀가 둔해 지더니 위대한 웃음의 홍수가 내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그리고서 나의 입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새찬 말들로 가득 찼다...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크게 기뻐하는 것을 들었다...그리고서 우리는 동시에 함께 찬송을 불렀으며 각자는 새 방언으로 완전한 화음으로 찬송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미국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이다. 첫째 방언의 은사가 그 당시 성령세례의 증거로 처음 나타났기 때문이다. 둘째 팔헴 목사가 벧엘 성경학교를 텍사스 주의 휴스톤으로 옮겼는데, 팔헴의 학생인 윌리엄 시이무(William Seymour, 1870-1922)가 다시 휴스톤에서 L.A.로 옮겨 L.A.의 아주사 거리 부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이무어 목사의 아주사 거리 집회를 오순절 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분도 있다.
3. 오순절 부흥 - 운동시이무어의 노스 보니 부레아 거리 집회와 성령의 역사 – 윌리엄 시이무어는 흑인이며 애꾸였다. 그는 1905년 벧엘 성경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했으나 당시의사회적 상황에서 흑인은 백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팔헴 목사의 배려로 강의실 옆에 문을 조금 열고 땅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했다. 오순절 부흥운동은 시이무어가 L.A.의 노스 보니 브레아가(North Bonnie Brea Street) 214 번지의 가정집 기도회에서 시작되었다.
여러 달 동안의 합심 기도 후에 1906년 4월 9일 하나님의 성령이 강하게 임재하신 것은 바로 이 집에서였다. 4월 9일 아침 루시 팔로우 여성에게 에드워드 리 씨의 요청에 따라 성령세례를 받도록 안수하자 에드워드 리에게 방언이 터졌다. 이것은 시이무어가 집회를 인도하기 한시간 반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이무어가 사도행전 2장의 내용을 설교하고 에드워드 리가 간증을 하면서 갑자기 두 손을 번쩍 들고는 방언을 하기시작하자, 집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쓰러져 주저앉자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치던 제니 에반스 여사도 쓰러졌으며 다른 5명의 사람들이 쓰러졌다. 8세의 흑인 소년이 제일 먼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으로 말했다.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마치 번개를 맞은 듯이 의자에서 마루바닥으로 쓰러졌다. 7명이 다양한 방언으로 하나님을 송축했다. 방언 하는 소리가 너무나 크고 열렬해서 건물밖에 사람들이 모여 “도대체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하는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곧 이 소리는 온 L.A. 도시에 퍼졌으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계속 부어주셨다. 백인들은 흑인들 가운데 끼어 들었으며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성령 충만했다. 이런 장면을 목격한 집주인 에즈베리 부부의 딸은 놀라서 부엌으로 도망쳤으며, 사람들은 현관의 대청 마루에까지 가득 차서 예배를 계속 드렸다. 피아니스트인 제니 에반스가 피아노를 치면서 히브리말 같은 말로 찬송을 부르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방언을 하는 것을 듣기 위해 거리에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3주야를 울부짖었다. 부활절이었다. 사람들이 도처에서 몰려들었다. 다음 날 집회 장소에 들어갈 길이 없었다. 사람들이 집회 장소에 들어서자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졌다. 온 도시가 소동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 들어서서 울부짖는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집 마루바닥이 내려앉았다. 다행이 아무도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그 3일 동안에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성령세례를 받았다. 병자들은 치유를 받았으며, 죄인들은 구원을 받았다.
LA의 신문 기자가 성령의 역사를 비판하려다가 혼나다 - 노스 보니 브레아 거리 집회장 마루바닥이 무너지자 시이무어 일행은 그 건물을 버리고 아주사 거리(Azusa Street) 312번지의 버려진 낡은 아프리카-감리교-성공회 교회를 구입하여 집회 장소로 개조했다. 여기서 성령의 강한 기름부음이 계속 일어났다. 아주사 거리 집회를 직접 목격한 성명미상의 사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집회의 소식이 멀리 퍼져 나가자 L.A.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성령 충만한 몇 사람들이 천사의 벤드 소리를 들었다. 성령에 감동된 하늘의 찬송이 들렸다. 집회 광고도 없었고, 교회의 조직적 뒷받침도 없었다.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집회장소에 들어서자 성령이 인도하시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아주사 거리로 들어오자 부흥의 권능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간단하였으나 성령의 권능이 강하게 나타나 사람들은 벤치에 앉은 채 떨었다. 제단 앞으로 나오자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졌으며, 어떤 이들은 방언을 터뜨렸다. 시카고에서 온 윌리엄 덜헴 목사는 영적 갱신을 위한 갈급한 심령으로 LA에 도착했다.
아주사 거리의 집회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았다. 수천명의 참석자들처럼 덜헴 목사도 오순절적인 성령세례 체험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방언)로 인간이 이때까지 듣지 못한 사랑스런 화음으로 찬양을 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때때로 환상을 통해--간증을 했는데, 간증은 주로 구원, 성화, 성령세례 등의 3가지 목적이 담겨있었다.
1906년 4월 18일~19일에 산-프란시스코에 대지진으로 큰 환난을 당했다면, 같은 주 동안 LA에서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일어난 영적 지진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 대 혁명을 가져다 준 행복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켄사스주 토페카의 팔헴 성경학교에서의 방언 사건보다 5년 후 LA에서의 성령 폭발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됨으로서 오순절의 시작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시이무어의 아주사 거리 집회와 성령의 역사 - 그러던 중 어느 날 LA의 신문 기자가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비판하며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모두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시이무어의 집회에 참석했다. 설교가 끝나고 안수가 시작되자 이 기자는 자신을 절름발이로 가장을 하여 시이무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성령님께서 시이무어에게 음성으로 “너는 저 사람을 위하여 기도 할 때에 ‘그대로 되게 하소서’라고 하라”는 것이었다. 시이무어는 그대로 말했다. 그 기자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보며 하나님께 회개한 후 다시 기도를 받고 온전하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기자는 『타임즈』(Times)지에 자신이 체험한 일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특종으로 기사화 했다.
이 일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부흥의 물결 속에 들어가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191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여파로 1914년에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 교단이 생기게 되었다.
오순절 운동의 주역들과 5개 항목의 교리적 가르침 - 아주사 거리 부흥 집회의 중심 인물들은 가르치는 자로서의 찰즈 팔헴, 설교자로서의 윌리엄 시이무어, L.A. 저널리스트로서의 프랭크 바틀만, 아주사 거리 선교회 등이었다. 이들 아주사 거리 오순절 운동 창시자들은 그 당시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성화를 강조하는 신성운동(Holiness movement)의 영향을 받았다. 팔헴은 신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5개 항목의 신조를 발표했다.
(1)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칭하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2)확실한 은총의 역사로 나타나는 성화,
(3)외적인 증거로 방언을 수반하는 성령세례,
(4)구속사역과 같은 하나님의 치유,
(5)예수의 재림 때 성도들의 전천년 휴거 등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오순절 부흥운동의 결과 1914년에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생겨나게 되고, 1981년에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 75주년 기념예배를 가졌는데, 방언으로 시작한 기름부음이 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임을 입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1981년을 기준으로 오순절과 카리스마적 교인 수는 75,000,000명으로 추상되었으며, 지금은 그 수가 장로교를 능가하고 있다. 이것은 1906년 아주사 거리집회 이후 L.A. 오순절 운동을 수용한 수는 매년 1,000,000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을 글로서 남긴 프랭크 바틀만 -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 플라톤이 기록으로 남겼으며, 예수의 천국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4복음서에 기록한 것처럼, 시이무어와 아주사 거리 오순절 운동은 프랭크 바틀만(Frank Bartleman)이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보도 없이는 오순절 운동이 그렇게도 빨리 또 널리 전 세계로 전파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저널리즘은 세계에 오순절 운동에 관한 소식을 전했을 뿐 아니라 오순절 운동을 돕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00년에 외형적으로 고함지르고 뛰는 것과 같은 성령체험을 먼저 했다. 몇 달 이후에 그는 더 많은 신비 체험을 했는데, “전기 충격”과 같은 것을 강하게 받아 쓰러져서 무의식 상태가 되기도 했다.
밤에 사탄이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공격했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냈다. 평생 병약한 몸으로 죽음이 어깨 너머에서 바라보는 느낌을 가졌다고 고백했으나 기적적으로 치유함을 받았다. 그가 설교하던 중 성령의 권능으로 쓰러져 30분간 교인들 앞에서 누워있기도 했다. 그는 성령 충만으로 “하늘나라의 찬양”에 참가하는 놀라운 체험을 했으며 방언으로 주님의 이름을 찬양했다.
맺는말 - 1901년 찰즈 팔헴의 학생인 아그네스 오즈만의 방언과 1906년 흑인 꼽추인 윌리엄 시이무어의 방언으로 시작한 제1성령의 물결은 오순절 운동의 이름으로 미국, 캐나다, 남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오순절 운동은 신교의 각 교단에서는 물론이고 1966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도 강하게 나타났다. 오순절 운동은 1970년대에 카리스마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영수 박사 : 오레곤대 A.D, Ph.D(영문학), 경북대 교육학 박사과정이수, 전 한국외국어대학사범대학장, 한신대학 대학원장, 전국 기독교대학교 대학원장협의회장, 광나루 문인회장, 현 한밀선교 회장, 한국영성 총연합회 대표회장, 카리스월드 편집인 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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