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7장 11-15절을 보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족보가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것만을 말한다면 아담까지만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멜기세덱의 비밀에 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비밀스럽게 감추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으나 우리의 이해가 둔함으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히5:11)
그러나 히브리서 7장 2-3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친 사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복을 빈 사람, 그 이름을 번역하면 의의 왕이요 평강(살렘)의 왕이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 외에 이런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또 다른 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 뿐이요 다른 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사람들 가운데에 권능으로 임하신 하나님이라고 봅니다.
요한복음 8장 56-59절을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볼 때에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 보냄을 받기 전에는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신 말씀이셨습니다(요1:1,18) 신약시대에는 그 말씀이 보냄을 받아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품 속에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적이 두 번 있었다고 봅니다. 그 중에 한 번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고 임재하셨을 때에 심판 전에 먼저 아브라함을 만나 그 심판 계획을 알리실 때에 만났고 또 한 번은 제사장 멜기세덱의 모습으로 만났다고 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 사람과 같은 모습이셨습니다.
창세기 18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세 사람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장 전체를 걸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19장 1절을 보면 그 세 사람 중 두 명이 천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세 사람 중에 둘 사람은 천사이고 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세 사람이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나타난 모습이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공개적인 방면이고 또 한 방면은 멜기세덱을 만난 사건이라고 봅니다.
항상 성경은 두 방면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공개적인 방면은 이해하기 쉽지만 은밀한 방면은 세밀한 영의 안목을 가져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 즉 여호와 하나님과 두 천사는 공개적인 방면이고 멜기세덱은 은밀한 방면입니다.
멜기세덱이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이 말은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멜기세덱이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유일하신 참 신이시며 다른 신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니까 멜기세덱은 사람들 가운데에 권능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비밀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 때에 창세기 18장의 말씀과 멜기세덱에 관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알려주시기를 사람들 가운데에 권능으로 임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주님의 음성을 떠나서 성경으로 분명하게 그 비밀이 밝혀집니다. 자기의 원대로 역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의 다양성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시며 빛이시고 생명이시며 부활이시고 길이 되시며 우리의 집이 되십니다. 그 분은 또 어린 양이시며 유다지파의 사자이십니다. 또 다윗의 뿌리이시고 다윗의 가지이십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안에서 첫 열매가 되시고 승천 안에서 대 제사장이 되십니다. 또 그분은 우리의 신랑이 되시고 심판 주가 되시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영원 안에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며 우리의 등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며 하나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론의 반차를 좇아 레위 계열의 제사장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였던 또 하나의 비밀이 있으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분! 평강의 왕이요 살렘 왕!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속죄하시는 분!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용서의 주님! 우리의 영원하신 살렘 왕!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11/26/2009
열 두 지파에 대한 창세기와 요한 계시록의 비교/갑절의 축복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 대해서는 창세기 49장을 보면 이스라엘(야곱)이 죽기 전에 그의 열 두 아들들을 향해 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나오는 열 두 아들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본문의 기록과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35장 23-26절을 보면 ‘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7장 4-8절에 기록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은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 이렇게 열 두 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의 49장의 기록)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단, 납달리/갓, 아셀/잇사갈, 스불론/요셉, 베냐민
(요한계시록 7장의 기록) 유다, 르우벤/갓, 아셀/납달리, 므낫세/시므온, 레위/잇사갈, 스블론/요셉, 베냐민
이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창세기 35장 25절에 기록된 단 지파가 요한 계시록 7장 4-8절에서는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단 대신에 므낫세 지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는 열 두 지파 중 하나인 요셉의 큰 아들입니다. 야곱의 손자입니다. 그러므로 므낫세는 이스라엘(야곱)의 열 두 아들로 이루어진 열 두 지파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 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 사실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몇 구절 찾아보기로 합시다.
창세기 49장 16-18절을 보면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심판한다는 싸우다, 판결하다, 논쟁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제 아래 글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은 논쟁하는 자요 판단하는 자이며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입니다. 그는 말굽을 물어서 뒤로 떨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단은 육적인 자들이요 형제들의 천국 길의 훼방꾼이라고 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나 변화 받지 못한 육적인 믿는 이들의 정체는 사단의 무리들입니다(계2:9) 그리고 혈육의 관계는 거의 대부분 천국 가는 길에 훼방꾼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또 그렇게 타고난 성품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꼭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기의 아픔을 형제들에게 나눠 주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다 단 지파에 속한다고 봅니다.
세례요한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부모와 처자와 전토를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겨야합니다. 천국이란 우리의 잘남이나 자기 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주님 사랑으로 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의 천국 가는 길에 훼방꾼이 있다면 다 잘라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 버리는 방법은 마음 속에서부터 잘라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4-8절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말할 때에 단 지파가 빠져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자 즉 인정 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육적인 자들을 상징하는 단 지파는 인 맞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음을 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5장 25절이나 창세기 49장의 기록은 야곱의 아들들을 몽땅 기록한 것이므로 그 기록에는 단 지파가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인 요한 계시록 7장 4-8절까지는 하나님의 인정받은 자들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단 지파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은 변화 받지 못한 육적인 자들을 상징하고 신앙의 패배자들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패배자는 이곳에 기록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야곱의 아들이 아니고 손자인데 이곳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을 한 구절 찾아 보겠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 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그의 꿈에 요셉이 그 형제들과 밭에서 일하는데 그 형제들의 단이 요한의 단에 절하는 꿈을 꾸고 그것을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창37:6-7) 그리고 그 후에 또 해, 달, 별이 그에게 절하는 꿈을 꾸고 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창37:9) 그러자 그 형제들이 말하기를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하며 그 말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그 형제들이 기회를 봐서 요셉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죽이지 말자고 형제들을 설득하여 결국 죽이지는 않고 구덩이에 빠뜨리게 되었고 유다가 요셉을 살리기 위해 그 형제들에게 권면하여 미디안의 상인에게 팔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미디안의 상인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아 결국 보디발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 주인이 자기 먹는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고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9장 6-10절을 보면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외모가 준수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여 동침하기를 청하였으나 요셉은 그 주인과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며 그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이 자신을 겁간하려고 했다며 거짓 증거함으로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감옥에서 바로 왕의 꿈 해몽으로 인해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흉년으로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에 요셉의 형제들도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에 내려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요셉은 전에 자신을 죽이려하였고 또 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던 자기 형제들에게 보복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를 용서하였습니다. 이 모든 기록들은 요셉이 장성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 두 지파 중에서 단 지파가 빠진 자리를 요셉 지파의 아들 므낫세가 차지함으로 요셉 지파는 갑절의 축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장자가 받을 갑절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와 반면에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은 자신의 서모 빌하와 통간함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인하여 장자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득죄한 르우벤은 장자권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어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은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지파는 가나안에서 땅을 분배받을 때에도 그는 요셉지파와 그의 큰 아들 므낫세 지파의 분깃을 받음으로서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 지파는 판단하는 자요 논쟁하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믿었으나 변화 받지 못한 육적인 자들을 말하며 육적인 자들은 사단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단 지파에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도장 받은 자들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 지파는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어서 유혹 앞에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켰고 또 자기를 애굽에 팔았던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하더니 그의 의로운 행실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단 지파의 빈자리에 므낫세가 기록 되어 있는 것은 요셉이 갑절의 축복을 받았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장자권이 요셉에게 넘어 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창세기의 49장의 기록)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단, 납달리/갓, 아셀/잇사갈, 스불론/요셉, 베냐민
(요한계시록 7장의 기록) 유다, 르우벤/갓, 아셀/납달리, 므낫세/시므온, 레위/잇사갈, 스블론/요셉, 베냐민
이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창세기 35장 25절에 기록된 단 지파가 요한 계시록 7장 4-8절에서는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단 대신에 므낫세 지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는 열 두 지파 중 하나인 요셉의 큰 아들입니다. 야곱의 손자입니다. 그러므로 므낫세는 이스라엘(야곱)의 열 두 아들로 이루어진 열 두 지파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 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 사실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몇 구절 찾아보기로 합시다.
창세기 49장 16-18절을 보면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심판한다는 싸우다, 판결하다, 논쟁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제 아래 글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은 논쟁하는 자요 판단하는 자이며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입니다. 그는 말굽을 물어서 뒤로 떨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단은 육적인 자들이요 형제들의 천국 길의 훼방꾼이라고 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나 변화 받지 못한 육적인 믿는 이들의 정체는 사단의 무리들입니다(계2:9) 그리고 혈육의 관계는 거의 대부분 천국 가는 길에 훼방꾼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또 그렇게 타고난 성품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꼭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기의 아픔을 형제들에게 나눠 주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다 단 지파에 속한다고 봅니다.
세례요한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부모와 처자와 전토를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겨야합니다. 천국이란 우리의 잘남이나 자기 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주님 사랑으로 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의 천국 가는 길에 훼방꾼이 있다면 다 잘라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 버리는 방법은 마음 속에서부터 잘라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4-8절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말할 때에 단 지파가 빠져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자 즉 인정 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육적인 자들을 상징하는 단 지파는 인 맞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음을 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5장 25절이나 창세기 49장의 기록은 야곱의 아들들을 몽땅 기록한 것이므로 그 기록에는 단 지파가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인 요한 계시록 7장 4-8절까지는 하나님의 인정받은 자들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단 지파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은 변화 받지 못한 육적인 자들을 상징하고 신앙의 패배자들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패배자는 이곳에 기록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야곱의 아들이 아니고 손자인데 이곳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을 한 구절 찾아 보겠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 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그의 꿈에 요셉이 그 형제들과 밭에서 일하는데 그 형제들의 단이 요한의 단에 절하는 꿈을 꾸고 그것을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창37:6-7) 그리고 그 후에 또 해, 달, 별이 그에게 절하는 꿈을 꾸고 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창37:9) 그러자 그 형제들이 말하기를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하며 그 말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그 형제들이 기회를 봐서 요셉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죽이지 말자고 형제들을 설득하여 결국 죽이지는 않고 구덩이에 빠뜨리게 되었고 유다가 요셉을 살리기 위해 그 형제들에게 권면하여 미디안의 상인에게 팔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미디안의 상인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아 결국 보디발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 주인이 자기 먹는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고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9장 6-10절을 보면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외모가 준수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여 동침하기를 청하였으나 요셉은 그 주인과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며 그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이 자신을 겁간하려고 했다며 거짓 증거함으로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감옥에서 바로 왕의 꿈 해몽으로 인해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흉년으로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에 요셉의 형제들도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에 내려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요셉은 전에 자신을 죽이려하였고 또 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던 자기 형제들에게 보복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를 용서하였습니다. 이 모든 기록들은 요셉이 장성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 두 지파 중에서 단 지파가 빠진 자리를 요셉 지파의 아들 므낫세가 차지함으로 요셉 지파는 갑절의 축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장자가 받을 갑절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와 반면에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은 자신의 서모 빌하와 통간함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인하여 장자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득죄한 르우벤은 장자권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어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은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지파는 가나안에서 땅을 분배받을 때에도 그는 요셉지파와 그의 큰 아들 므낫세 지파의 분깃을 받음으로서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 지파는 판단하는 자요 논쟁하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믿었으나 변화 받지 못한 육적인 자들을 말하며 육적인 자들은 사단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단 지파에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도장 받은 자들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 지파는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어서 유혹 앞에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켰고 또 자기를 애굽에 팔았던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하더니 그의 의로운 행실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단 지파의 빈자리에 므낫세가 기록 되어 있는 것은 요셉이 갑절의 축복을 받았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장자권이 요셉에게 넘어 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기는 자의 두 종류/신부들과 순교자들
요한 계시록 7장 1-3절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보호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4절은 인 맞은 자의 수에 대해서 말하고 5-8절에서는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의 수를 말합니다. 그리고 9-17절까지는 흰 옷 입은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3장 5절을 보면 흰 옷 입은 자는 이기는 자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흰 옷 입은 무리란 이기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그 이마에 도장 찍흰 십사만 사천의 소수의 무리가 있고 또 한 무리는 흰 옷 입은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십사만 사천명의 적은 무리는 흠 없게 된 예수님의 신부들을 말하고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흰 옷 입은 큰 무리는 순교자들을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 14장 6-13절까지를 보면 삼년 반 동안 짐승에 의해 세계 여러 나라가 다스림을 받을 큰 환난 시대를 말하고 있고 그 전후로 한번씩 하나님의 추수 즉 휴거가 있다는 것을 봅니다.
큰 환난 전에 있을 휴거는 처음 익은 열매 추수로서 흠 없게 된 어린양의 신부 십사만 사천명만 휴거되고(계14:1-5) 그 이후에는 마흔 두달 동안 적그리스도에 의해 짓밟히게 되고(계13:5-7) 그 적그리스도의 통치 끝 무렵에 익은 곡식 추수 즉 두 번째 휴거가 있습니다(계14:14-16)
이 요한 계시록 14장에 나와 있는 두 번의 휴거는 7장에서 말하는 아버지집에 살 자들인 이기는 자들의 두 무리와 정확히 일치 됩니다.
7장 1-8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도장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은 14장 1-5절에서 말하는 어린양의 신부들을 말하고 9-17절까지에서 말하는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흰 옷 입은 큰 무리는 14장 14-16절에서 말하는 익은 곡식 추수로 추수되는 이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7장에서는 이기는 자들의 두 종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마에 도장 받은 흠 없게 된 어린양의 신부들과 목숨을 내 놓은 순교자들입니다.
그 중에서 어린양의 신부들은 흠 없게 된 자들로서 순교자들보다 더 우월한 자들입니다. 이 두 무리는 모두 아버지 집에 살 자들을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 3장 5절을 보면 흰 옷 입은 자는 이기는 자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흰 옷 입은 무리란 이기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그 이마에 도장 찍흰 십사만 사천의 소수의 무리가 있고 또 한 무리는 흰 옷 입은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십사만 사천명의 적은 무리는 흠 없게 된 예수님의 신부들을 말하고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흰 옷 입은 큰 무리는 순교자들을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 14장 6-13절까지를 보면 삼년 반 동안 짐승에 의해 세계 여러 나라가 다스림을 받을 큰 환난 시대를 말하고 있고 그 전후로 한번씩 하나님의 추수 즉 휴거가 있다는 것을 봅니다.
큰 환난 전에 있을 휴거는 처음 익은 열매 추수로서 흠 없게 된 어린양의 신부 십사만 사천명만 휴거되고(계14:1-5) 그 이후에는 마흔 두달 동안 적그리스도에 의해 짓밟히게 되고(계13:5-7) 그 적그리스도의 통치 끝 무렵에 익은 곡식 추수 즉 두 번째 휴거가 있습니다(계14:14-16)
이 요한 계시록 14장에 나와 있는 두 번의 휴거는 7장에서 말하는 아버지집에 살 자들인 이기는 자들의 두 무리와 정확히 일치 됩니다.
7장 1-8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도장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은 14장 1-5절에서 말하는 어린양의 신부들을 말하고 9-17절까지에서 말하는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흰 옷 입은 큰 무리는 14장 14-16절에서 말하는 익은 곡식 추수로 추수되는 이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7장에서는 이기는 자들의 두 종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마에 도장 받은 흠 없게 된 어린양의 신부들과 목숨을 내 놓은 순교자들입니다.
그 중에서 어린양의 신부들은 흠 없게 된 자들로서 순교자들보다 더 우월한 자들입니다. 이 두 무리는 모두 아버지 집에 살 자들을 말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무엇을...
인간이 모태로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성경의 교훈은 정말 진리인 것 같습니다.
죄가 첫 번째 사람에게 들어온 후 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간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며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기복신앙을 지지하기 위해서 적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병 낫기를 위해서 구하라든지 재물을 많이 모으게 해 달라고 구하고 찾으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설교하신 의도가 정말 그럴까요?
전혀 그렇지 않고 100% 아니라고 못박진 않겠습니다. 광의적 의미에서 해석해보면 분명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신 말씀의 "본의(本意)"는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해석되어 나온, 기복신앙을 지지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받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장 큰 의도이십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영혼에게 있어 성령받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가장 긴급하고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부자인지 가난한 자인지 그가 육체적으로 건강한 자인지 병든자인지엔 관심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성령받지 못한 자는 성령받기 위해서 믿음 없는 자는 믿음 얻기 위해서 심령이 부유한 자는 가난해지기 위해서 회개하지 못한 자는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의 보혈의 피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느끼는 자에게는 그것이 나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악한 자일찌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 속에는 그런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많은 불쌍하고 병든자들의 요청을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육체적인 고통과 질병을 풀어주시고 고쳐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갈급한 마음으로 자신의 벌거벗은 것과 눈먼 것을 구하는 자에게는 좋은 것(성령)을 주신다는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확신이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인자하신 모습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복음이 보석같이 찬란하게 비취고 있는데도 그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자칭 성도라 일컫는 이들조차도 그 광명한 은혜의 맛을 보지 못한채 살아가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구하지 않고 찾지 않고 두드리지도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따라가기>
죄가 첫 번째 사람에게 들어온 후 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간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며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기복신앙을 지지하기 위해서 적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병 낫기를 위해서 구하라든지 재물을 많이 모으게 해 달라고 구하고 찾으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설교하신 의도가 정말 그럴까요?
전혀 그렇지 않고 100% 아니라고 못박진 않겠습니다. 광의적 의미에서 해석해보면 분명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신 말씀의 "본의(本意)"는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해석되어 나온, 기복신앙을 지지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받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장 큰 의도이십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영혼에게 있어 성령받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가장 긴급하고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부자인지 가난한 자인지 그가 육체적으로 건강한 자인지 병든자인지엔 관심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성령받지 못한 자는 성령받기 위해서 믿음 없는 자는 믿음 얻기 위해서 심령이 부유한 자는 가난해지기 위해서 회개하지 못한 자는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의 보혈의 피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느끼는 자에게는 그것이 나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악한 자일찌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 속에는 그런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많은 불쌍하고 병든자들의 요청을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육체적인 고통과 질병을 풀어주시고 고쳐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갈급한 마음으로 자신의 벌거벗은 것과 눈먼 것을 구하는 자에게는 좋은 것(성령)을 주신다는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확신이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인자하신 모습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복음이 보석같이 찬란하게 비취고 있는데도 그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자칭 성도라 일컫는 이들조차도 그 광명한 은혜의 맛을 보지 못한채 살아가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구하지 않고 찾지 않고 두드리지도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따라가기>
성막과 성전의 역사
성경은 성막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주지 않는다. 이는 성경이 자료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사건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막의 건립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언급이 주어진 것은 이것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반면 성막 건립 후 성전으로 대체될 때 까지의 역사가 모호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에 대한 규례를 철저히 지키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모세시대의 성막이 솔로몬 성전으로 대체될 때 까지의 성막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본다.
성막의 역사
1. 성막의 건립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대로 만들어 졌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한 때가 3월이며(출19:1) 성막의 봉헌이 그 이듬해 1월1일에 있었다.(출40:2) 이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보여 주심으로(출40:34) 당신이 성막에 임재하심을 나타내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를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막의 이동 시점을 계시하셨다(출40:37-38)
2. 광야의 성막
이스라엘은 성막 봉헌 후 50일간을 시내산에서 더 머물렀으며 그 해 2월20일에 이동을 시작했다(민10:11). 이 때 레위인은 법궤등 성막의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옮겼으며(민4:5) 성막 본체는 해체하여 주로 수레에 실어 이동했다(민7:1-11). 광야 여행 도중 그들의 이동경로는 부분적으로 확인되나(민33:16-49) 성막을 세운 장소는 불명확하다. 이는 항상 전쟁을 염두에 두며 행군을 준비하는 가운데 정규적으로 희생제사를 드리거나(암5:25) 정상적으러 성막을 세우기 힘들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3. 길갈의 성막
요단강을 건넌 후 가나안 정복이 진행되는 동안 성막이 임시로 안치된 장소는 여리고 근처의 길갈이었다(수4:16; 5:10; 9:6).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았고 땅이 무덤으로 더렵혀 지지도 않았으므로 적당한 장소로 여겨졌을 것이다.
4. 실로의 성막
가나안 정복이 일단락된 후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인 실로로 옮겨졌다(수18:1). 여기서 성막은 '여호와의 전'으로도 불리워 지는데(삼상1:9) 이는 이곳이 고정된 장소였음을 암시한다. 한편 사사 시대에는 성막이 실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에 다른 예배처소를 만들었으며(삿18:31) 실로에서의 제사 역시 형식에 그친 정도였다(삼상2:14). 이러한 배교로 인해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았겼으며(삼상4:11)
실로도 함락되었다(시78:60, 렘7:12). 그러나 성막을 블레셋에게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5. 모호한 시기
실로 함락 후 성막은 다시 길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사무엘과 사울이 길갈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는 기록에서 암시받을 수 있다(삼상10:8). 그러나 이와 별도로 성막의 주요 성물의 하나인 법궤는 블레셋사람의 손에서 반환되어 벧세메스에 잠시 머물렀으며(삼상6:19) 기럇여아림에 20년 동안 있었다(삼상7:1-2).
6. 놉의 성막
놉땅에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었으며 그에게 여호와께 드렸던 거룩한 진설병이 있었다는 기록(삼상21:1-6)을 볼 때 사울 시대에 성막이 놉땅에 있은 적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 기브온의 성막
옛적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다윗 당시 기브온 산당에 있었다(대상21:29).
8. 성막의 병존(竝存)시기
다윗은 기럇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두기 위해(삼하6:11) 시온에 성막을 새로 만들었다(삼하6:17). 따라서 당시는 제단이 있는 기브온의 원래 성막과 법궤가 있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성막이 병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왕상3:1-3).
9. 성전의 건립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립함으로써 성막의 기능은 성전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B.C.1445년에 만들어진 성막은 B.C.959년까지, 즉 487년간 예배의 처소로 존속했다. 그 이후에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적 유물로 보관되었으나(왕상8:4)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에 의한 성전 파괴시(B.C.586)없어진 듯하다
성전의 역사
성전은 성막(Tabernacle)의 발전 형태다.
이스라엘 역사상 성전은 세 번에 걸쳐서 세워졌다. 솔로몬 성전(B.C.959; 왕상6:1-38), 수룹바벨 성전(B.C.516; 스6:15-18), 그리고 신약시대의 헤롯 성전(B.C.20-A.D.63)이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이런 성전들은 다 무너졌다. 하나님의 상징적 임재 처소인 성전이 무너질 때마다 이스라엘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놀랄 일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돌과 쇠로 만든 건물 자체가 하나님이나 아니면 하나님의 처소였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순종할 때만 하나님이 그속을 당신의 처소로 삼아 주신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이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요 우리 주님의 사역의 예표이며 그 흥망의 역사가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이스라엘 성전의 역사를 함께 모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솔로몬 성전
출애굽한지 480년 만인 B.C.966에 착공하여 총공사기간 7년6개월 만인 B.C.959년, 예루살렘의 모리아산(Mount Moriah)위에 이스라엘 역사상 제 1성전이었던 솔로몬 성전이 준공되었다(왕상6:1-38).
그러나 이 성전은 준공된지 373년만인 B.C.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제3차 침공 때 남 왕국 유다의 멸망과 함께 완전히 훼파되었고, 성전의 금, 은, 놋 기명과 보물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졌다.
흥미로운 것은 훗날 헤롯 성전은 이 솔로몬 성전과 같은 달, 같은 날 즉 아빕월(포로 귀환후 니산월로 이름이 바뀜: 태양력 3-4월에 해당됨) 9일에 멸망했다.
2. 스룹바벨 성전
이스라엘 역사상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은 B.C.586년 솔로몬 성전이 함락된 후 B.C. 516년 건축한 것으로서 옛 성전에 비해 크게 초라했다. 또한 포로 귀환 이후 바사(persia) 식민지 상태에서 건축한 것으로서 학개서에도 언급되었듯이 그 과정에 우여 곡절이 많았다. 또한 B.C.167년 중간사 시대에 헬라인들에게 크게 모독 당하기도 했었다.
3. 헤롯 성전
이방인 이두매(Idumea) 출신인 헤롯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화 정책으로 헤롯 성전을 건축하였다.
옛 성전 터전위에 B.C.20년에 착공하여 외형은 9년만에 완성되었으나 세부공사는 A.D.63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한편 예수님은 이같은 헤롯 성전을 가리켜 이것을 헐면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었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 처소의 상징에 불과한 건물 자체를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그 건물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자체이신 당신을 죽이면 삼 일만에 다시 사실 것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었다(요2:19).
아무튼 근 80년이 넘게 걸려 세워진 이 헤롯 성전은 그 성전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의 결과 그저 죽은 건물로 존재하다가 완공된지 불과 수년 후인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저항하던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함락되고 성전을 불타 버렸다.
그런데 성전에 있던 금들이 화재속에서 녹아 돌 사이에 스며들었고 로마 군인들이 이 금을 찾기 위해 모든 돌을 다 해쳐버려 돌 위에 돌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헤롯 당시 성전의 바깥 벽 중 일부 약450M 정도가 아직도 아남아 있는데 이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른다. 이는 유대인들 이 이곳에 와서 성전이 파괴된 것과 나라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여 통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이다. 오스만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곳에 순례차 와서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돌 틈새에 끼워 가며 기도를 한다. 로마 시대에 유대인들은 성전이 파괴된 압비월 9일 하루만 이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 받았다고 한다.
4. 지금의 성전
예수님께서 성전의 원형이 되시며, 감사하게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 된 것이다. 우리 속에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구약 시대의 성전중에서도 지성소에 해당한다. 따라서 지금 한 생명을 실족케 하는 것은 성전훼파의 불충한 죄가 되며, 한 생명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영접토록 하는 것이 참된 성전 건축인 것이다
성막의 역사
1. 성막의 건립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대로 만들어 졌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한 때가 3월이며(출19:1) 성막의 봉헌이 그 이듬해 1월1일에 있었다.(출40:2) 이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보여 주심으로(출40:34) 당신이 성막에 임재하심을 나타내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를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막의 이동 시점을 계시하셨다(출40:37-38)
2. 광야의 성막
이스라엘은 성막 봉헌 후 50일간을 시내산에서 더 머물렀으며 그 해 2월20일에 이동을 시작했다(민10:11). 이 때 레위인은 법궤등 성막의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옮겼으며(민4:5) 성막 본체는 해체하여 주로 수레에 실어 이동했다(민7:1-11). 광야 여행 도중 그들의 이동경로는 부분적으로 확인되나(민33:16-49) 성막을 세운 장소는 불명확하다. 이는 항상 전쟁을 염두에 두며 행군을 준비하는 가운데 정규적으로 희생제사를 드리거나(암5:25) 정상적으러 성막을 세우기 힘들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3. 길갈의 성막
요단강을 건넌 후 가나안 정복이 진행되는 동안 성막이 임시로 안치된 장소는 여리고 근처의 길갈이었다(수4:16; 5:10; 9:6).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았고 땅이 무덤으로 더렵혀 지지도 않았으므로 적당한 장소로 여겨졌을 것이다.
4. 실로의 성막
가나안 정복이 일단락된 후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인 실로로 옮겨졌다(수18:1). 여기서 성막은 '여호와의 전'으로도 불리워 지는데(삼상1:9) 이는 이곳이 고정된 장소였음을 암시한다. 한편 사사 시대에는 성막이 실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에 다른 예배처소를 만들었으며(삿18:31) 실로에서의 제사 역시 형식에 그친 정도였다(삼상2:14). 이러한 배교로 인해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았겼으며(삼상4:11)
실로도 함락되었다(시78:60, 렘7:12). 그러나 성막을 블레셋에게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5. 모호한 시기
실로 함락 후 성막은 다시 길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사무엘과 사울이 길갈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는 기록에서 암시받을 수 있다(삼상10:8). 그러나 이와 별도로 성막의 주요 성물의 하나인 법궤는 블레셋사람의 손에서 반환되어 벧세메스에 잠시 머물렀으며(삼상6:19) 기럇여아림에 20년 동안 있었다(삼상7:1-2).
6. 놉의 성막
놉땅에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었으며 그에게 여호와께 드렸던 거룩한 진설병이 있었다는 기록(삼상21:1-6)을 볼 때 사울 시대에 성막이 놉땅에 있은 적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 기브온의 성막
옛적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다윗 당시 기브온 산당에 있었다(대상21:29).
8. 성막의 병존(竝存)시기
다윗은 기럇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두기 위해(삼하6:11) 시온에 성막을 새로 만들었다(삼하6:17). 따라서 당시는 제단이 있는 기브온의 원래 성막과 법궤가 있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성막이 병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왕상3:1-3).
9. 성전의 건립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립함으로써 성막의 기능은 성전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B.C.1445년에 만들어진 성막은 B.C.959년까지, 즉 487년간 예배의 처소로 존속했다. 그 이후에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적 유물로 보관되었으나(왕상8:4)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에 의한 성전 파괴시(B.C.586)없어진 듯하다
성전의 역사
성전은 성막(Tabernacle)의 발전 형태다.
이스라엘 역사상 성전은 세 번에 걸쳐서 세워졌다. 솔로몬 성전(B.C.959; 왕상6:1-38), 수룹바벨 성전(B.C.516; 스6:15-18), 그리고 신약시대의 헤롯 성전(B.C.20-A.D.63)이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이런 성전들은 다 무너졌다. 하나님의 상징적 임재 처소인 성전이 무너질 때마다 이스라엘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놀랄 일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돌과 쇠로 만든 건물 자체가 하나님이나 아니면 하나님의 처소였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순종할 때만 하나님이 그속을 당신의 처소로 삼아 주신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이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요 우리 주님의 사역의 예표이며 그 흥망의 역사가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이스라엘 성전의 역사를 함께 모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솔로몬 성전
출애굽한지 480년 만인 B.C.966에 착공하여 총공사기간 7년6개월 만인 B.C.959년, 예루살렘의 모리아산(Mount Moriah)위에 이스라엘 역사상 제 1성전이었던 솔로몬 성전이 준공되었다(왕상6:1-38).
그러나 이 성전은 준공된지 373년만인 B.C.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제3차 침공 때 남 왕국 유다의 멸망과 함께 완전히 훼파되었고, 성전의 금, 은, 놋 기명과 보물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졌다.
흥미로운 것은 훗날 헤롯 성전은 이 솔로몬 성전과 같은 달, 같은 날 즉 아빕월(포로 귀환후 니산월로 이름이 바뀜: 태양력 3-4월에 해당됨) 9일에 멸망했다.
2. 스룹바벨 성전
이스라엘 역사상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은 B.C.586년 솔로몬 성전이 함락된 후 B.C. 516년 건축한 것으로서 옛 성전에 비해 크게 초라했다. 또한 포로 귀환 이후 바사(persia) 식민지 상태에서 건축한 것으로서 학개서에도 언급되었듯이 그 과정에 우여 곡절이 많았다. 또한 B.C.167년 중간사 시대에 헬라인들에게 크게 모독 당하기도 했었다.
3. 헤롯 성전
이방인 이두매(Idumea) 출신인 헤롯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화 정책으로 헤롯 성전을 건축하였다.
옛 성전 터전위에 B.C.20년에 착공하여 외형은 9년만에 완성되었으나 세부공사는 A.D.63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한편 예수님은 이같은 헤롯 성전을 가리켜 이것을 헐면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었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 처소의 상징에 불과한 건물 자체를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그 건물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자체이신 당신을 죽이면 삼 일만에 다시 사실 것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었다(요2:19).
아무튼 근 80년이 넘게 걸려 세워진 이 헤롯 성전은 그 성전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의 결과 그저 죽은 건물로 존재하다가 완공된지 불과 수년 후인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저항하던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함락되고 성전을 불타 버렸다.
그런데 성전에 있던 금들이 화재속에서 녹아 돌 사이에 스며들었고 로마 군인들이 이 금을 찾기 위해 모든 돌을 다 해쳐버려 돌 위에 돌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헤롯 당시 성전의 바깥 벽 중 일부 약450M 정도가 아직도 아남아 있는데 이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른다. 이는 유대인들 이 이곳에 와서 성전이 파괴된 것과 나라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여 통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이다. 오스만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곳에 순례차 와서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돌 틈새에 끼워 가며 기도를 한다. 로마 시대에 유대인들은 성전이 파괴된 압비월 9일 하루만 이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 받았다고 한다.
4. 지금의 성전
예수님께서 성전의 원형이 되시며, 감사하게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 된 것이다. 우리 속에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구약 시대의 성전중에서도 지성소에 해당한다. 따라서 지금 한 생명을 실족케 하는 것은 성전훼파의 불충한 죄가 되며, 한 생명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영접토록 하는 것이 참된 성전 건축인 것이다
신사도적 개혁운동(The 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
신사도적 개혁교회 운동이란 ? 에베소서 4장 11~16절은 교회성장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원리와 전략을 계시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1~16)
이것을 간단히 도식화 하면 "5중사역 + 은사들 = 교회성장"이다.
주님은 교회 행정을 위해 5중 직분(five fold ministries :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을 주셨고(11절), 모든 성도들에게는 "봉사의 일"을 할 수 있는 각양 은사들(gifts)을 주셨다 (12절, 롬 12:4~6). 모든 성도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은사들로 봉사하고 사역할 수 있도록 5중 직분자들이 합력하여 성도들을 이끌 때 교회 성장은 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은 교회성장에 대한 하나님의 전략이며,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만인제사장설을 실체화할 수 있는 전략이다.
이러한 원리와 전략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교회성장운동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아프리카의 독립교회운동, 중국의 가정교회운동,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교회운동, 그리고 북미의 독립은사주의교회운동에서 이 같은 패턴이 발견된다. 교회성장학자 피터 와그너 박사는 이러한 패턴을 가진 오늘날의 교회부흥운동을 "신사도적개혁운동(The 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원리와 전략을 따르는 새로운 모습의 교회들을 "신사도적개혁교회(New Apostolic Reform Church)"라고 부른다. 신사도적개혁교회운동은 종교개혁 이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역사상 가장 큰 부흥을 일으키고 있다.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여 교회를 온전케 하며, 모든 평신도를 사역자화하여 세계복음화를 이루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전략이다.
기본원리 - 5중 직분자들이 팀으로 사역한다. 개교회 또는 Network 안에 에베소서 4장 11절에 기록된 5중(팀)사역이 일어날 것을 추구한다. 개교회와 Network 지도자들을 통해서 흘러나가는 팀 정신(team spirit)은 성도들의 생활과 사역의 기본 정신이 된다. 모든 성도가 각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직분과 은사를 시용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단합된 권속(가족)과 팀(공동체)이 된다.
평신도들이 각종 은사로 사역한다. - 모든 성도가 로마서 12장 4~6절과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된 다양한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고 활성화하여 바르게 활용하도록 가르친다. 성도들이 모든 면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성령님의 나타남과 권능으로 전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한다.
셀(소)그룹을 통해 양육하고 전도한다. - 셀을 통해서 교회의 목적들이 성취되게 하며 아울러 성도들이 가진 은사와 지도력을 개발하여 훌륭한 영적 지도자로 세워지게 한다.
신약성경적인 교회 성장 - 신약성경적 원리와 전략이 적용될 때, 어느 정도의 과정을 거쳐서, 결과적으로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되고, 하나님 나라를 효과적으로 확장하게 된다.
특징
신사도적 탈교단성 -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씀과 같이 대부분의 신사도적개혁교회들은 기존의 교단이 아닌 Network에 가입한다. 교회 Network은 각 교회의 은사와 사명과 구조를 인정하면서 서로 돕고, 함께 연합하여 선교하고, 사역하기 위한, 인격적 관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이다.
새로운 영적 권위 - 관료적 권위가 아닌 인격적 권위, 구조적이고 법적 권위가 아닌 관계 중심적 권위, 통제와 조종이 아닌 후원과 격려를 위한 권위, 합리적인 지도력이 아닌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갖춘 담임목사가 세워진다. 담임목사는 교회의 고용원(직원)이 아니라 지도자로, 실제적이고 전폭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물론 교회의 전적인 신뢰를 얻으며 모든 면에서 모범이어야 한다. 담임목사가 교회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청빙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담임목사의 비전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한다.
새로운 지도자 훈련과 임용 방식 - 모든 성도는 교회에서 사역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역을 해야 한다. 신사도적개혁교회에서 인정받고 지도자로 세워지는 성도는 자신의 재능과 은사로 사역하면서 성장하는 사람이다. 신사도적개혁교회의 유급 사역자(스텦)들은 대개 본 교회의 성도 중에서 사역을 통해서 소명과 은사가 인정되고 발탁된 이들이다.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한 요건과 지도자 양성 과정은 정통적 교회와 같지 않다. 기존 신학교 등에서 받은 학식이나 학위보다 일정 기간 사역과 영적 지도자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입증된 은사와 자질과 소명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사역자들과 지도자들을 위한 연장 교육은 교회가 인정한 외부 교육 기관들에 의한 위탁 훈련보다 교회 자체에서 실시하는 세미나, 집회, 수련회 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새로운 예배형식 - 일반적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초청하는 짧은 기도로 예배를 시작한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가능한 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예배가 되도록 한다. 회중이 찬양과 경배, 말씀, 기도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을 예배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목적으로 삼는다. 예배 인도자들이 회중과 동일한 예배자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현대적 음악 스타일로 만들어진 새 노래(경배와 찬양)를 많이 부른다. 하나님에 관한 찬송이나 다른 내용의 노래보다 직접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즐겨 부른다. 회중이 선포된 말씀에 구체적으로 응답할 기회를 주며 원하는 이들은 개인 기도사역을 받을 수 있다.
새로운 소그룹 - 전통 교회의 구역과 성격과 기능이 많이 다른 소그룹(셀)을 통해서 교회의 본래적 목적과 기능이 나타나도록 한다. 프로그램 중심 교회의 문제는 일반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의 보편적이고 본래적 목적을 위해 구체적으로 헌신할 기회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셀교회는 일반 성도들이 셀에서 예배, 교육, 교제, 봉사, 전도 등 교회의 근본적인 목적을 위해 구체적으로 헌신할 뿐 아니라 치유, 축사, 상담, 예언 등 다양한 은사들을 사용함으로 성숙한 사역자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한다.
새로운 형태의 기도 - 신사도적개혁교회 지도자들은 회중으로 하여금 개인과 교회를 위해 미리 정해진 제목을 따라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예언적 중보기도를 하도록 가르친다. 성도들이 모여서 다양한 형태의 기도 합주회를 갖고, 다양하고 폭 넓은 영역을 위해서 기도한다.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선 기도행진, 기도여행 등을 실시한다.
새로운 재정 - 신사도적교회는 십일조 헌금을 강조하며 기쁨으로 헌금하는 성도의 받을 축복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친다. 예배 중에 헌금 순서를 가장 활발하고 즐거운 시간으로 지내도록 한다.
새로운 전도 -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증인으로서 사도적 소명의 삶을 살게 한다. 자기중심적으로 '축복'을 구하는 기복적 신앙이 아니라 선교와 전도를 위한 목적이 있는 축복을 구하도록 한다.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 개척과 해외 선교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도록 권장한다. 아울러 가난한 이웃을 실제적으로 돌보고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갖는다.
새로운 능력사역 - 신약성경의 모든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역사하는 것을 믿으며 언제나 성령님의 역사와 인도하심에 대해 열린 태도를 유지한다. 치유, 내적치유, 축사, 영적 전투, 예언, 영적 도해, 성령의 기름 부으심, 중보기도, 예언적 중보기도, 기도여행 등의 사역이 많이 일어난다. 예배와 기도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그로 인한 초자연적 치유 등을 믿는다.
어떻게 신사도적 개혁교회를 일으킬수 있는가 ?
기존의 전통적 교회를 신사도적개혁교회로 변화하려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사도적개혁교회를 개척을 하는 경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경우가 같지 않지만, 공통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안한다.
신사도적개혁교회를 방문하라. 한국에는 이런 비전을 품고 준비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교회를 방문하여 함께 예배드리고 목회자들과 교제하라. 미국 등 외국에도 많은 모델 교회가 있다. 그런 교회가 주최하는 컨퍼런스, 세미나에 참석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라. 예를 들면, 싱가폴의 Harvest City Church, 미국 파사데나의 Harvest Rock Church, 미국 시애틀의 City Church in Seattle 등이 있다.
신사도적개혁교회에 관한 도서를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라. "신사도교회를 배우라"(피터 와그너, 서로사랑), "사도의 은사"(데이빗 캐니스트러시, 와그너 교회성장연구원), "신학대학에서 배우지 않는 일곱 가지 능력원리"(피터 와그너, 와그너교회 성장연구원),
"신사도적개혁교회 세미나 테잎"(HIM 선교회, 피터 와그너) 등이 있다. 아울러 영적각성(Renewal)운동, 셀 교회에 관한 도서를 읽고 참조하라.
신사도적개혁교회의 비전을 품고 있는 강사로 초청하라. - 교회의 집회 강사로 이런 목회자들을 초청함으로 성도들이 새로운 비전과 인식, 가치, 영성을 받아들이게 하라.
하나님께서 누구와 관계를 갖도록 인도하시는지 살펴 따르라. - 잘 분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 사도적 Network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라. 가능하면 Network에 가입하거나 그런 Network를 시작하라.
성령님을 환영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라. 특히 예배 중에 성령님을 환영하라. 가능하다면 예배 중에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경배 시간으로 할애하라. 예배 후에 원하는 성도들이 안수 기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며, 성도들을 훈련해서 서로 다른 지체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라. 은혜 받은 성도들이 간증하게 하라. 은혜 받은 성도의 간증은 다른 지체에게 영적 갈망과 도전을 일으킬 것이다.
내적치유에 대해서 배우고 사역을 받으라. 내적치유에 관한 서적을 구해서 읽고 세미나에 참석해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막힘이 있는지 살피라.
내적치유의 목적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제거하고 치유할 부분들을 알아내어 해결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내적치유사역을 받으라. 치유를 받고,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부음 받게 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것을 간단히 도식화 하면 "5중사역 + 은사들 = 교회성장"이다.
주님은 교회 행정을 위해 5중 직분(five fold ministries :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을 주셨고(11절), 모든 성도들에게는 "봉사의 일"을 할 수 있는 각양 은사들(gifts)을 주셨다 (12절, 롬 12:4~6). 모든 성도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은사들로 봉사하고 사역할 수 있도록 5중 직분자들이 합력하여 성도들을 이끌 때 교회 성장은 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은 교회성장에 대한 하나님의 전략이며,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만인제사장설을 실체화할 수 있는 전략이다.
이러한 원리와 전략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교회성장운동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아프리카의 독립교회운동, 중국의 가정교회운동,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교회운동, 그리고 북미의 독립은사주의교회운동에서 이 같은 패턴이 발견된다. 교회성장학자 피터 와그너 박사는 이러한 패턴을 가진 오늘날의 교회부흥운동을 "신사도적개혁운동(The 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원리와 전략을 따르는 새로운 모습의 교회들을 "신사도적개혁교회(New Apostolic Reform Church)"라고 부른다. 신사도적개혁교회운동은 종교개혁 이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역사상 가장 큰 부흥을 일으키고 있다.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여 교회를 온전케 하며, 모든 평신도를 사역자화하여 세계복음화를 이루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전략이다.
기본원리 - 5중 직분자들이 팀으로 사역한다. 개교회 또는 Network 안에 에베소서 4장 11절에 기록된 5중(팀)사역이 일어날 것을 추구한다. 개교회와 Network 지도자들을 통해서 흘러나가는 팀 정신(team spirit)은 성도들의 생활과 사역의 기본 정신이 된다. 모든 성도가 각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직분과 은사를 시용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단합된 권속(가족)과 팀(공동체)이 된다.
평신도들이 각종 은사로 사역한다. - 모든 성도가 로마서 12장 4~6절과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된 다양한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고 활성화하여 바르게 활용하도록 가르친다. 성도들이 모든 면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성령님의 나타남과 권능으로 전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한다.
셀(소)그룹을 통해 양육하고 전도한다. - 셀을 통해서 교회의 목적들이 성취되게 하며 아울러 성도들이 가진 은사와 지도력을 개발하여 훌륭한 영적 지도자로 세워지게 한다.
신약성경적인 교회 성장 - 신약성경적 원리와 전략이 적용될 때, 어느 정도의 과정을 거쳐서, 결과적으로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되고, 하나님 나라를 효과적으로 확장하게 된다.
특징
신사도적 탈교단성 -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씀과 같이 대부분의 신사도적개혁교회들은 기존의 교단이 아닌 Network에 가입한다. 교회 Network은 각 교회의 은사와 사명과 구조를 인정하면서 서로 돕고, 함께 연합하여 선교하고, 사역하기 위한, 인격적 관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이다.
새로운 영적 권위 - 관료적 권위가 아닌 인격적 권위, 구조적이고 법적 권위가 아닌 관계 중심적 권위, 통제와 조종이 아닌 후원과 격려를 위한 권위, 합리적인 지도력이 아닌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갖춘 담임목사가 세워진다. 담임목사는 교회의 고용원(직원)이 아니라 지도자로, 실제적이고 전폭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물론 교회의 전적인 신뢰를 얻으며 모든 면에서 모범이어야 한다. 담임목사가 교회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청빙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담임목사의 비전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한다.
새로운 지도자 훈련과 임용 방식 - 모든 성도는 교회에서 사역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역을 해야 한다. 신사도적개혁교회에서 인정받고 지도자로 세워지는 성도는 자신의 재능과 은사로 사역하면서 성장하는 사람이다. 신사도적개혁교회의 유급 사역자(스텦)들은 대개 본 교회의 성도 중에서 사역을 통해서 소명과 은사가 인정되고 발탁된 이들이다.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한 요건과 지도자 양성 과정은 정통적 교회와 같지 않다. 기존 신학교 등에서 받은 학식이나 학위보다 일정 기간 사역과 영적 지도자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입증된 은사와 자질과 소명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사역자들과 지도자들을 위한 연장 교육은 교회가 인정한 외부 교육 기관들에 의한 위탁 훈련보다 교회 자체에서 실시하는 세미나, 집회, 수련회 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새로운 예배형식 - 일반적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초청하는 짧은 기도로 예배를 시작한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가능한 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예배가 되도록 한다. 회중이 찬양과 경배, 말씀, 기도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을 예배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목적으로 삼는다. 예배 인도자들이 회중과 동일한 예배자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현대적 음악 스타일로 만들어진 새 노래(경배와 찬양)를 많이 부른다. 하나님에 관한 찬송이나 다른 내용의 노래보다 직접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즐겨 부른다. 회중이 선포된 말씀에 구체적으로 응답할 기회를 주며 원하는 이들은 개인 기도사역을 받을 수 있다.
새로운 소그룹 - 전통 교회의 구역과 성격과 기능이 많이 다른 소그룹(셀)을 통해서 교회의 본래적 목적과 기능이 나타나도록 한다. 프로그램 중심 교회의 문제는 일반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의 보편적이고 본래적 목적을 위해 구체적으로 헌신할 기회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셀교회는 일반 성도들이 셀에서 예배, 교육, 교제, 봉사, 전도 등 교회의 근본적인 목적을 위해 구체적으로 헌신할 뿐 아니라 치유, 축사, 상담, 예언 등 다양한 은사들을 사용함으로 성숙한 사역자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한다.
새로운 형태의 기도 - 신사도적개혁교회 지도자들은 회중으로 하여금 개인과 교회를 위해 미리 정해진 제목을 따라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예언적 중보기도를 하도록 가르친다. 성도들이 모여서 다양한 형태의 기도 합주회를 갖고, 다양하고 폭 넓은 영역을 위해서 기도한다.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선 기도행진, 기도여행 등을 실시한다.
새로운 재정 - 신사도적교회는 십일조 헌금을 강조하며 기쁨으로 헌금하는 성도의 받을 축복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친다. 예배 중에 헌금 순서를 가장 활발하고 즐거운 시간으로 지내도록 한다.
새로운 전도 -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증인으로서 사도적 소명의 삶을 살게 한다. 자기중심적으로 '축복'을 구하는 기복적 신앙이 아니라 선교와 전도를 위한 목적이 있는 축복을 구하도록 한다.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 개척과 해외 선교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도록 권장한다. 아울러 가난한 이웃을 실제적으로 돌보고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갖는다.
새로운 능력사역 - 신약성경의 모든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역사하는 것을 믿으며 언제나 성령님의 역사와 인도하심에 대해 열린 태도를 유지한다. 치유, 내적치유, 축사, 영적 전투, 예언, 영적 도해, 성령의 기름 부으심, 중보기도, 예언적 중보기도, 기도여행 등의 사역이 많이 일어난다. 예배와 기도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그로 인한 초자연적 치유 등을 믿는다.
어떻게 신사도적 개혁교회를 일으킬수 있는가 ?
기존의 전통적 교회를 신사도적개혁교회로 변화하려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사도적개혁교회를 개척을 하는 경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경우가 같지 않지만, 공통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안한다.
신사도적개혁교회를 방문하라. 한국에는 이런 비전을 품고 준비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교회를 방문하여 함께 예배드리고 목회자들과 교제하라. 미국 등 외국에도 많은 모델 교회가 있다. 그런 교회가 주최하는 컨퍼런스, 세미나에 참석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라. 예를 들면, 싱가폴의 Harvest City Church, 미국 파사데나의 Harvest Rock Church, 미국 시애틀의 City Church in Seattle 등이 있다.
신사도적개혁교회에 관한 도서를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라. "신사도교회를 배우라"(피터 와그너, 서로사랑), "사도의 은사"(데이빗 캐니스트러시, 와그너 교회성장연구원), "신학대학에서 배우지 않는 일곱 가지 능력원리"(피터 와그너, 와그너교회 성장연구원),
"신사도적개혁교회 세미나 테잎"(HIM 선교회, 피터 와그너) 등이 있다. 아울러 영적각성(Renewal)운동, 셀 교회에 관한 도서를 읽고 참조하라.
신사도적개혁교회의 비전을 품고 있는 강사로 초청하라. - 교회의 집회 강사로 이런 목회자들을 초청함으로 성도들이 새로운 비전과 인식, 가치, 영성을 받아들이게 하라.
하나님께서 누구와 관계를 갖도록 인도하시는지 살펴 따르라. - 잘 분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 사도적 Network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라. 가능하면 Network에 가입하거나 그런 Network를 시작하라.
성령님을 환영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라. 특히 예배 중에 성령님을 환영하라. 가능하다면 예배 중에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경배 시간으로 할애하라. 예배 후에 원하는 성도들이 안수 기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며, 성도들을 훈련해서 서로 다른 지체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라. 은혜 받은 성도들이 간증하게 하라. 은혜 받은 성도의 간증은 다른 지체에게 영적 갈망과 도전을 일으킬 것이다.
내적치유에 대해서 배우고 사역을 받으라. 내적치유에 관한 서적을 구해서 읽고 세미나에 참석해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막힘이 있는지 살피라.
내적치유의 목적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제거하고 치유할 부분들을 알아내어 해결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내적치유사역을 받으라. 치유를 받고,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부음 받게 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시기 분별 (릭조이너의 예언적 메시지)
우리들은, 현 시점에서 꼭 질문되어야 할, 다음과 같은 질문들의 일부를 다루고 있습니다 : 만약 국가들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면,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은 시간 낭비인가? 왜 우리가 이미 파멸된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우리의 모든 노력과 시간을 소비해서는 안되고, 그 이미 파멸한 나라를 잊어야 하는가?
만약 우리가 다니엘 2장의 시대와 같이, 모든 인류의 제국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작은 돌이 산 만큼 자라고, 그 산이 전세상을 덮을 때까지 계속 자라나는 이런 상태에 있다면, 왜 우리는 지구상의 정부들과 기관들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라는 것이 분명히 옳습니다. (마태복음 6:33). 우리는 항상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시기의 징조를 기뻐해야 합니다. 거의 2천년 동안 교회들이 기도해 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늘나라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지상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도 응답의 시기가 가까와지고 있습니다.
이 (구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시기의 징조와 같은)모든 것은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기관들이 붕괴될 인간의 욕심, 오만, 인간의 육신적 본성의 형태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은 옳고 좋다고 하지만, 우리의 마음의 공백이 더 악한 영과 무법으로 채워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다니엘 2장에 함축되어있고, 다른 성경 예언에 함축된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멸망이 일어나는 곳을 인수할 때, 이 나라들을 변화시킬 한 빛이 있게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교회에서 명백히 일어나고 있는 빛과 의의 권세는, 이 나라들을 변화시킬 이 빛이 되기 위해 준비가 되었을 까요? 우리 교회들이 이렇게 되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악마의 전략 중 하나는, 이 나라들을 변화시킬 이 빛이 오기 전에, 우리들이 엄청나게 빨리 절망하고 멸망하도록 서두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은 많은 함축된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선거를 해야 하는가, 안 해도 되는가? 우리가 세상의 정치와 경제에 참여해야 하는가? 제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우리의 많은 노력들을 무력화하여 방입하지 않도록,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선을 위한 헌신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위한 헌신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요한계시록과 같은 예언서에 있습니다- 적어도 몇 나라들에 대하여 요한 계시록 11장 15절에 밝혔듯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변화 될 몇 나라들이 있을 것입니다; “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이 말씀은 미국정부 건국헌장에 근거하고 있는 “명백한 숙명” 의 선언에 대한 기초였던,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을 때, 명백히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될 나라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경적 예언들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많은 나라들이 변화되지 않아 멸망할 것입니다. 나라가 멸망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었든 아니 되었든, 각 나라에 있는 교회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해,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광범위한 주님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지난 해 중반에, 주님의 방문은 다가오고 있는 부흥이나 커다란 각성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출산의 고통이나 영적 위축이라고 들었습니다. 여러 번의 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대한 움직임의 탄생의 날이 될 것이라고 받은 날이 8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우리는 선교사들 중 한 사람에게 주어진 한가지 꿈 외에는 그러한 탄생을 징표로 나타낸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후에 다른 형태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같은 계시를 발견했습니다.
이 꿈에서,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있는 8개의 교회의 탄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계시록의 3장에서는 초대 7개의 교회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하튼 특별히 별도로 언급되어있지 않았지만, 요한계시록에는 8개의 교회가 있는데, 이것은 예언 후에 보여질 영광스러운 신부(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미지근한 믿음의 교회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신부를 맞이하게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성장할 때 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1세기 이래로 예전에는 나타나지 않던, 매우 다른 한 새로운 교회가 지구상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교회가 아직 분명하지 않을지라도, 이러한 커다란 변화의 시대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사건들이 세상에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증권시장의 붕괴와 예상치 않은 전세계적 경제 붕괴의 시작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미지근한 믿음의 교회에 대한 혼란으로부터 자유 하도록 우리를 흔드는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국가들의 재산이 신실하게 쓰여지게 될 시기가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여하튼, 국가의 재산이 우리 자신의 욕망들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올바르게 사용되고, 따라서 나라들을 돕기 위한 도움의 밝은 빛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다가올 커다란 흔듦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질병이 이집트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반영하는 이유입니다.
이 거대한 흔듦의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의 그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고, 또한 이집트의 모든 보화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여하튼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산을 가지고 그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까운 쇼핑 몰(매장)로 즉시 가지 않았고 그 보화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장막을 만들 때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지상에 오실 것이고, 가장 위대한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자원으로 이루어드리기로 결심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기로 결심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니엘 2장의 시대와 같이, 모든 인류의 제국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작은 돌이 산 만큼 자라고, 그 산이 전세상을 덮을 때까지 계속 자라나는 이런 상태에 있다면, 왜 우리는 지구상의 정부들과 기관들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라는 것이 분명히 옳습니다. (마태복음 6:33). 우리는 항상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시기의 징조를 기뻐해야 합니다. 거의 2천년 동안 교회들이 기도해 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늘나라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지상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도 응답의 시기가 가까와지고 있습니다.
이 (구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시기의 징조와 같은)모든 것은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기관들이 붕괴될 인간의 욕심, 오만, 인간의 육신적 본성의 형태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은 옳고 좋다고 하지만, 우리의 마음의 공백이 더 악한 영과 무법으로 채워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다니엘 2장에 함축되어있고, 다른 성경 예언에 함축된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멸망이 일어나는 곳을 인수할 때, 이 나라들을 변화시킬 한 빛이 있게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교회에서 명백히 일어나고 있는 빛과 의의 권세는, 이 나라들을 변화시킬 이 빛이 되기 위해 준비가 되었을 까요? 우리 교회들이 이렇게 되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악마의 전략 중 하나는, 이 나라들을 변화시킬 이 빛이 오기 전에, 우리들이 엄청나게 빨리 절망하고 멸망하도록 서두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은 많은 함축된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선거를 해야 하는가, 안 해도 되는가? 우리가 세상의 정치와 경제에 참여해야 하는가? 제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우리의 많은 노력들을 무력화하여 방입하지 않도록,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선을 위한 헌신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위한 헌신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요한계시록과 같은 예언서에 있습니다- 적어도 몇 나라들에 대하여 요한 계시록 11장 15절에 밝혔듯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변화 될 몇 나라들이 있을 것입니다; “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이 말씀은 미국정부 건국헌장에 근거하고 있는 “명백한 숙명” 의 선언에 대한 기초였던,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을 때, 명백히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될 나라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경적 예언들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많은 나라들이 변화되지 않아 멸망할 것입니다. 나라가 멸망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었든 아니 되었든, 각 나라에 있는 교회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해,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광범위한 주님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지난 해 중반에, 주님의 방문은 다가오고 있는 부흥이나 커다란 각성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출산의 고통이나 영적 위축이라고 들었습니다. 여러 번의 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대한 움직임의 탄생의 날이 될 것이라고 받은 날이 8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우리는 선교사들 중 한 사람에게 주어진 한가지 꿈 외에는 그러한 탄생을 징표로 나타낸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후에 다른 형태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같은 계시를 발견했습니다.
이 꿈에서,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있는 8개의 교회의 탄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계시록의 3장에서는 초대 7개의 교회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하튼 특별히 별도로 언급되어있지 않았지만, 요한계시록에는 8개의 교회가 있는데, 이것은 예언 후에 보여질 영광스러운 신부(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미지근한 믿음의 교회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신부를 맞이하게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성장할 때 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1세기 이래로 예전에는 나타나지 않던, 매우 다른 한 새로운 교회가 지구상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교회가 아직 분명하지 않을지라도, 이러한 커다란 변화의 시대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사건들이 세상에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증권시장의 붕괴와 예상치 않은 전세계적 경제 붕괴의 시작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미지근한 믿음의 교회에 대한 혼란으로부터 자유 하도록 우리를 흔드는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국가들의 재산이 신실하게 쓰여지게 될 시기가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여하튼, 국가의 재산이 우리 자신의 욕망들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올바르게 사용되고, 따라서 나라들을 돕기 위한 도움의 밝은 빛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다가올 커다란 흔듦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질병이 이집트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반영하는 이유입니다.
이 거대한 흔듦의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의 그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고, 또한 이집트의 모든 보화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여하튼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산을 가지고 그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까운 쇼핑 몰(매장)로 즉시 가지 않았고 그 보화로 하나님께서 거하실 장막을 만들 때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지상에 오실 것이고, 가장 위대한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자원으로 이루어드리기로 결심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기로 결심해야만 합니다.)
삶의 가장 중요한 확신 – 우선순위, 순종, 겸손
20세기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자로, 위대한 학자인 동시에 설교가인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저서<살아있는 교회>(The Living Church: Convictions of Lifelong Pastor)에서 자신의 오랜 목회 연륜과 인생을 통해 깨달은 지혜를 ‘어느 여든 살 노인의 묵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확신을 통해 전해준다.
첫째, 우선순위(priorities)에 대한 확신이다.
나는 스물아홉,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이에 올소울즈 교회의 교구목사로 임명받았다. 그런 중책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모든 것에 압도돼 버렸다. 하루가 멀다하고 긴급한 일들이 중요한 일들을 밀어냈고, 준비조차 되지 않았던 사건들이 나를 덮쳤다. 거의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회자 일일수련회에서 “한 달에 한 번 조용한 하루를 가져보라”는 권고를 듣게 됐다.
너무나 상식적인 조언이었지만, 나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로 즉시 내 일정표에 그 해의 나머지 기간 중 매월 하루를 정해 ‘조용하다’(quiet)라는 의미로 ‘Q’라고 적어놓았다. 이날이 되면, 나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곳으로 가서 10~12시간 정도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점검하고, 고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기도하고 연구하고 글을 쓰곤 했다. 분명히 ‘Q’데이는 내 삶과 사역에 힘을 불어넣었다. 책임에서 오는 부담이 가벼워졌고, 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버거웠지만 압도당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바쁠 때면 2주에 한 번 심지어 매주 한번 ‘Q’데이를 가지게 되었다.
둘째, 순종(obedience)에 대한 확신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이 약속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본질적인 갈망이자,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의 본질이다. 그분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신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고백하고 삶으로는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순종이야말로 사랑의 참된 시금석이며, 우리가 순종할 때 그리스도는 분명히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이다.
셋째, 겸손(humility)에 대한 확신이다.
자만심으로 이끄는 간교한 유혹보다 더 강력하고 교활한 유혹은 없다. 목회자들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특별히 이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높은 설교단은 누구라도 마음을 끌어들이는 위험한 장소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을 지속적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약학자 맨슨은 이렇게 요약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섬김은 고귀한 지위에 이르는 디딤돌이 아니다. 섬김 자체가 고귀한 것이며, 그것은 인정받을 만한 유일한 고귀함이다.” 겸손이 위선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겸손은 정직에 이르는 또 다른 단어다. 겸손은 우리 자신이 아닌 척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겸손할 수 있을까?
1) 하나님께 자주 그리고 항상 감사하라. 감사는 특권이다. 감사야말로 자만심이 쉽게 자라나지 못할 토양이다.
2) 죄를 고백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라.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판하라. 하나님의 비판에 자신을 맡겨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자기 반성이자 자기 고백이다.
3) 굴욕을 받아들이기로 각오하라. 굴욕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지만, 그만큼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굴욕은 우리를 겸손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게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갈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4) 지위에 대해 염려하지 마라. 우리 주님이 관심을 가지라고 하신 유일한 지위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는 지위이다.
5) 유머감각을 지니라. 우리 자신과 자신의 부조리,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웃어넘기라. 진지해야 하지만 결코 근엄해지지 마라.
결국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순종하게 만들고, 우선순위에 따라 우리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겸손은 자라고, 순종은 깊어지며, 삶의 우선순위는 분명해진다. 사도 바울의 선언을 진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열망이 되기를 소원해본다(갈6:14).
첫째, 우선순위(priorities)에 대한 확신이다.
나는 스물아홉,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이에 올소울즈 교회의 교구목사로 임명받았다. 그런 중책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모든 것에 압도돼 버렸다. 하루가 멀다하고 긴급한 일들이 중요한 일들을 밀어냈고, 준비조차 되지 않았던 사건들이 나를 덮쳤다. 거의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회자 일일수련회에서 “한 달에 한 번 조용한 하루를 가져보라”는 권고를 듣게 됐다.
너무나 상식적인 조언이었지만, 나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로 즉시 내 일정표에 그 해의 나머지 기간 중 매월 하루를 정해 ‘조용하다’(quiet)라는 의미로 ‘Q’라고 적어놓았다. 이날이 되면, 나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곳으로 가서 10~12시간 정도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점검하고, 고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기도하고 연구하고 글을 쓰곤 했다. 분명히 ‘Q’데이는 내 삶과 사역에 힘을 불어넣었다. 책임에서 오는 부담이 가벼워졌고, 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버거웠지만 압도당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바쁠 때면 2주에 한 번 심지어 매주 한번 ‘Q’데이를 가지게 되었다.
둘째, 순종(obedience)에 대한 확신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이 약속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본질적인 갈망이자,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의 본질이다. 그분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신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고백하고 삶으로는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순종이야말로 사랑의 참된 시금석이며, 우리가 순종할 때 그리스도는 분명히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이다.
셋째, 겸손(humility)에 대한 확신이다.
자만심으로 이끄는 간교한 유혹보다 더 강력하고 교활한 유혹은 없다. 목회자들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특별히 이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높은 설교단은 누구라도 마음을 끌어들이는 위험한 장소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을 지속적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약학자 맨슨은 이렇게 요약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섬김은 고귀한 지위에 이르는 디딤돌이 아니다. 섬김 자체가 고귀한 것이며, 그것은 인정받을 만한 유일한 고귀함이다.” 겸손이 위선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겸손은 정직에 이르는 또 다른 단어다. 겸손은 우리 자신이 아닌 척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겸손할 수 있을까?
1) 하나님께 자주 그리고 항상 감사하라. 감사는 특권이다. 감사야말로 자만심이 쉽게 자라나지 못할 토양이다.
2) 죄를 고백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라.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판하라. 하나님의 비판에 자신을 맡겨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자기 반성이자 자기 고백이다.
3) 굴욕을 받아들이기로 각오하라. 굴욕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지만, 그만큼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굴욕은 우리를 겸손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게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갈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4) 지위에 대해 염려하지 마라. 우리 주님이 관심을 가지라고 하신 유일한 지위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는 지위이다.
5) 유머감각을 지니라. 우리 자신과 자신의 부조리,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웃어넘기라. 진지해야 하지만 결코 근엄해지지 마라.
결국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순종하게 만들고, 우선순위에 따라 우리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겸손은 자라고, 순종은 깊어지며, 삶의 우선순위는 분명해진다. 사도 바울의 선언을 진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열망이 되기를 소원해본다(갈6:14).
다니엘 11장으로 본 중간사
1 내가(다니엘) 또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에 일어나 그를 돕고 강하게 한 일이 있었느니라
2 이제 내가 참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 보라 바사에서 또 세 왕(고레스-캄비세스(B.C. 529-522), 스멜디스(B.C. 522-521), 다리오(B.C. 521-486)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의 네째는('아하수에로'로 언급된 크세르크세스(B.C. 486-465))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그가 그 부요함으로 강하여진 후에는 모든 사람을 격동시켜 헬라국을 칠 것이며(BC 480년 9월에 살라미스 전투에서 헬라에게 결정적인 패배)
3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알렉산더 대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임의로 행하리라
4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이 외의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니라(4명의 장군에 의해 분할)
5 남방의 왕(톨레미 1세)은 강할 것이나 그 군들 중에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 그 권세가 심히 클 것이요
6 몇 해 후에 그들이 서로 맹약하리니 곧 남방 왕(톨레미 2세)의 딸(베레네스)이 북방 왕(안티오쿠스 2세인 데오스)에게 나아가서 화친하리라 그러나 이 공주의 힘이 쇠하고 그 왕 은 서지도 못하며 권세가 없어질 뿐 아니라 이 공주와 그를 데리고 온 자와 그를 낳은 자와 그 때에 도와주던 자가 다 버림을 당하리라 (전처인 라오디스(Laodice)가 베레네스와 그녀의 아이를 살해하고 결국에는 안티오쿠스 2세마저 독살시킴)
7 그러나 이 공주의 본족에서 난 자 중에 하나(톨레미 3세)가 그의 위를 이어 북방 왕(셀류쿠스 2세)의 군대를 치러 와서 그의 성에 들어가서 그들을 이기고
8 그 신들과 부어만든 우상들과 그 은과 금의 아름다운 기구를 다 노략하여 애굽으로 가져갈 것이요 몇 해 동안은 그가 북방 왕을 치지 아니하리라
9 북방 왕(셀류쿠스 2세)이 남방 왕(톨레미 3세)의 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나 자기 본국으로 물러가리라
10 그 아들들(셀류쿠스 3세와 안티오쿠스 3세)이 전쟁을 준비하고 심히 많은 군대를 모아서 물의 넘침 같이 나아올 것이며 그가 또 와서 남방 왕(톨레미 4세)의 견고한 성까지 칠 것이요
11 남방 왕(톨레미 4세)은 크게 노하여 나와서 북방 왕(안티오쿠스 3세)과 싸울 것이라 북방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나 그 무리가 그의 손에 붙인바 되리라
12 그가 큰 무리를 사로잡은 후에 그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서 수만 명을 엎드러뜨릴 것이나 그 세력은 더하지 못할 것이요(톨레미 4세는 그 승리의 교만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B.C. 203))
13 북방 왕(안티오쿠스 3세)은 돌아가서 다시 대군을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
14 그 때에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남방 왕(톨레미 5세)을 칠 것이요 네 백성 중에서도 강포한 자(친셀류쿠스파 유대인)가 스스로 높아져서 이상을 이루려 할 것이나 그들이 도리어 넘어지리라
15 이에 북방 왕(안티오쿠스 3세)은 와서 토성을 쌓고 견고한 성읍을 취할 것이요 남방 군대는 그를 당할 힘이 없을 것이므로
16 오직 와서 치는 자가 임의로 행하리니 능히 그 앞에 설 사람이 없겠고 그가 영화로운 땅(유대땅)에 설 것이요 그 손에 멸망이 있으리라
17 그(안티오쿠스 3세)가 결심하고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다가 그와 화친할 것이요 또 여자의 딸(클레오파트라)을 그에게 주어 그 나라를 패망케 하려 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클레오파트라가 남편 톨레미 5세와 결탁하여 그로 하여금 로마와 동맹)
18 그 후에 그가 얼굴을 섬들(지중해 연안 지역)로 돌이켜 많이 취할 것이나 한 대장(루키우스 스키피오)이 있어서 그의 보이는 수욕을 씻고 그 수욕을 그에게로 돌릴 것이므로
19 그가 드디어 그 얼굴을 돌이켜 자기 땅 산성들로 향할 것이나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라(바닥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시도한 엘리마이스의 벨 사원약탈까지 실패)
20 그 위를 이을 자가 토색하는 자(셀류쿠스 4세)로 그 나라의 아름다운 곳유(유대땅)으로 두루 다니게 할 것(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강제적으로 세금을 징수)이나 그는 분노함이나 싸움이 없이 몇 날이 못되어 망할 것이요(독살)
21 또 그 위를 이을 자는 한 비천한 사람(셀류쿠스 동생인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이라 나라 영광을 그에게 주지 아니할 것이나 그가 평안한 때를 타서 궤휼(실질적인 왕위 계승자인 셀류쿠스4세 아들 '데메트리우스' 대신 왕위계승)로 그 나라를 얻을 것이며
22 넘치는 물 같은 군대(셀류쿠스4세 암살자인 헬리오도루스를 추종하는 무리)가 그에게 넘침을 입어 패할 것이요 동맹한 왕(유다의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도 그렇게 될 것이며
23 그와 약조한 후에 그는 거짓을 행하여 올라올 것이요 적은 백성을 거느리고 강하게 될 것이며
24 그가 평안한 때에 그 도의 가장 기름진 곳에 들어와서 그 열조와 열조의 조상이 행하지 못하던 것을 행할 것이요 그는 노략하며 탈취한 재물을 무리에게 흩어주며 모략을 베풀어 얼마 동안 산성들을 칠 것인데 때가 이르기까지 그리하리라
25 그가 그 힘을 떨치며 용맹을 발하여 큰 군대를 거느리고 남방 왕(클레오파트라(17절 주석 참조)의 아들, 곧 조카 톨레미 6세)도 심히 크고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맞아 싸울 것이나 능히 당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략(매수된 측근들의 배신으로 패배)을 베풀어 그를 침이니라
26 자기(톨레미 6세)의 진미를 먹는 자(신임받는 측근)가 그를 멸하리니 그 군대가 흩어질 것이요 많은 자가 엎드러져 죽으리라
27 이 두 왕(톨레미 6세와 톨레미7세)이 마음에 서로 해코자 하여(분열을 통한 세력의 약화유도)한 밥상에 앉았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라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니 이는 작정된 기한에 미쳐서 그 일이 끝날 것임이니라
28 북방 왕(안티오쿠스 4세)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리니 그는 마음으로 거룩한 언약을 거스리며 임의로 행하고('야손' 대신 자신이 지명한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에 복위)본토로 돌아갈 것이며
29 작정된 기한에 그가 다시 나와서 남방에 이를 것이나(2차 애굽 원정)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리니
30 이는 깃딤(로마)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대제사장 메넬라우스와 그의 추종자)를 중히 여길 것이며
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지성소)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하시딤)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33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쇠패하리라
34 그들(유다 마카비家)이 쇠패할 때에 도움을 조금 얻을 것이나 많은 사람은 궤휼로 그들과 친합할 것이며
35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마카비의 군사들)이 쇠패하여 무리로 연단되며 정결케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작정된 기한(요나단에 의해 에피파네스의 군대가 쫓겨나고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강력한 독립 정부인 하스모니아 왕조가 태동되던 때)이 있음이니라
2 이제 내가 참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 보라 바사에서 또 세 왕(고레스-캄비세스(B.C. 529-522), 스멜디스(B.C. 522-521), 다리오(B.C. 521-486)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의 네째는('아하수에로'로 언급된 크세르크세스(B.C. 486-465))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그가 그 부요함으로 강하여진 후에는 모든 사람을 격동시켜 헬라국을 칠 것이며(BC 480년 9월에 살라미스 전투에서 헬라에게 결정적인 패배)
3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알렉산더 대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임의로 행하리라
4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이 외의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니라(4명의 장군에 의해 분할)
5 남방의 왕(톨레미 1세)은 강할 것이나 그 군들 중에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 그 권세가 심히 클 것이요
6 몇 해 후에 그들이 서로 맹약하리니 곧 남방 왕(톨레미 2세)의 딸(베레네스)이 북방 왕(안티오쿠스 2세인 데오스)에게 나아가서 화친하리라 그러나 이 공주의 힘이 쇠하고 그 왕 은 서지도 못하며 권세가 없어질 뿐 아니라 이 공주와 그를 데리고 온 자와 그를 낳은 자와 그 때에 도와주던 자가 다 버림을 당하리라 (전처인 라오디스(Laodice)가 베레네스와 그녀의 아이를 살해하고 결국에는 안티오쿠스 2세마저 독살시킴)
7 그러나 이 공주의 본족에서 난 자 중에 하나(톨레미 3세)가 그의 위를 이어 북방 왕(셀류쿠스 2세)의 군대를 치러 와서 그의 성에 들어가서 그들을 이기고
8 그 신들과 부어만든 우상들과 그 은과 금의 아름다운 기구를 다 노략하여 애굽으로 가져갈 것이요 몇 해 동안은 그가 북방 왕을 치지 아니하리라
9 북방 왕(셀류쿠스 2세)이 남방 왕(톨레미 3세)의 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나 자기 본국으로 물러가리라
10 그 아들들(셀류쿠스 3세와 안티오쿠스 3세)이 전쟁을 준비하고 심히 많은 군대를 모아서 물의 넘침 같이 나아올 것이며 그가 또 와서 남방 왕(톨레미 4세)의 견고한 성까지 칠 것이요
11 남방 왕(톨레미 4세)은 크게 노하여 나와서 북방 왕(안티오쿠스 3세)과 싸울 것이라 북방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나 그 무리가 그의 손에 붙인바 되리라
12 그가 큰 무리를 사로잡은 후에 그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서 수만 명을 엎드러뜨릴 것이나 그 세력은 더하지 못할 것이요(톨레미 4세는 그 승리의 교만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B.C. 203))
13 북방 왕(안티오쿠스 3세)은 돌아가서 다시 대군을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
14 그 때에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남방 왕(톨레미 5세)을 칠 것이요 네 백성 중에서도 강포한 자(친셀류쿠스파 유대인)가 스스로 높아져서 이상을 이루려 할 것이나 그들이 도리어 넘어지리라
15 이에 북방 왕(안티오쿠스 3세)은 와서 토성을 쌓고 견고한 성읍을 취할 것이요 남방 군대는 그를 당할 힘이 없을 것이므로
16 오직 와서 치는 자가 임의로 행하리니 능히 그 앞에 설 사람이 없겠고 그가 영화로운 땅(유대땅)에 설 것이요 그 손에 멸망이 있으리라
17 그(안티오쿠스 3세)가 결심하고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다가 그와 화친할 것이요 또 여자의 딸(클레오파트라)을 그에게 주어 그 나라를 패망케 하려 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클레오파트라가 남편 톨레미 5세와 결탁하여 그로 하여금 로마와 동맹)
18 그 후에 그가 얼굴을 섬들(지중해 연안 지역)로 돌이켜 많이 취할 것이나 한 대장(루키우스 스키피오)이 있어서 그의 보이는 수욕을 씻고 그 수욕을 그에게로 돌릴 것이므로
19 그가 드디어 그 얼굴을 돌이켜 자기 땅 산성들로 향할 것이나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라(바닥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시도한 엘리마이스의 벨 사원약탈까지 실패)
20 그 위를 이을 자가 토색하는 자(셀류쿠스 4세)로 그 나라의 아름다운 곳유(유대땅)으로 두루 다니게 할 것(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강제적으로 세금을 징수)이나 그는 분노함이나 싸움이 없이 몇 날이 못되어 망할 것이요(독살)
21 또 그 위를 이을 자는 한 비천한 사람(셀류쿠스 동생인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이라 나라 영광을 그에게 주지 아니할 것이나 그가 평안한 때를 타서 궤휼(실질적인 왕위 계승자인 셀류쿠스4세 아들 '데메트리우스' 대신 왕위계승)로 그 나라를 얻을 것이며
22 넘치는 물 같은 군대(셀류쿠스4세 암살자인 헬리오도루스를 추종하는 무리)가 그에게 넘침을 입어 패할 것이요 동맹한 왕(유다의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도 그렇게 될 것이며
23 그와 약조한 후에 그는 거짓을 행하여 올라올 것이요 적은 백성을 거느리고 강하게 될 것이며
24 그가 평안한 때에 그 도의 가장 기름진 곳에 들어와서 그 열조와 열조의 조상이 행하지 못하던 것을 행할 것이요 그는 노략하며 탈취한 재물을 무리에게 흩어주며 모략을 베풀어 얼마 동안 산성들을 칠 것인데 때가 이르기까지 그리하리라
25 그가 그 힘을 떨치며 용맹을 발하여 큰 군대를 거느리고 남방 왕(클레오파트라(17절 주석 참조)의 아들, 곧 조카 톨레미 6세)도 심히 크고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맞아 싸울 것이나 능히 당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략(매수된 측근들의 배신으로 패배)을 베풀어 그를 침이니라
26 자기(톨레미 6세)의 진미를 먹는 자(신임받는 측근)가 그를 멸하리니 그 군대가 흩어질 것이요 많은 자가 엎드러져 죽으리라
27 이 두 왕(톨레미 6세와 톨레미7세)이 마음에 서로 해코자 하여(분열을 통한 세력의 약화유도)한 밥상에 앉았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라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니 이는 작정된 기한에 미쳐서 그 일이 끝날 것임이니라
28 북방 왕(안티오쿠스 4세)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리니 그는 마음으로 거룩한 언약을 거스리며 임의로 행하고('야손' 대신 자신이 지명한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에 복위)본토로 돌아갈 것이며
29 작정된 기한에 그가 다시 나와서 남방에 이를 것이나(2차 애굽 원정)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리니
30 이는 깃딤(로마)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대제사장 메넬라우스와 그의 추종자)를 중히 여길 것이며
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지성소)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하시딤)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33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쇠패하리라
34 그들(유다 마카비家)이 쇠패할 때에 도움을 조금 얻을 것이나 많은 사람은 궤휼로 그들과 친합할 것이며
35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마카비의 군사들)이 쇠패하여 무리로 연단되며 정결케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작정된 기한(요나단에 의해 에피파네스의 군대가 쫓겨나고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강력한 독립 정부인 하스모니아 왕조가 태동되던 때)이 있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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