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3/2010

제3강 하나님과 친밀함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시편25:14절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예배의 회복의 필수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거짓된 예배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에 대해서 살피고, 찬양과 경배, 부흥과 예배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지금은 예배회복의 필수성을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예배의 관계를 살펴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 어떻게 예배가 회복되어야할 것인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말씀을 삶의 관점에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삶을 살지 않으면 꽝입니다. 설교를 수십번 들어도 삶을 실제로 살지 않으면 껍데기일 뿐입니다. 따라서 삶의 관점에서 자신을 비추어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과 친밀함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입니다.
그것이 핵심이요 본질이요 가장 중추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이 우리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제 책 십자가의 복음을 복습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아담이 타락한 후에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가족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3 8-10절입니다.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친밀한 교제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수시로 임하셔서 아담과 대화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낯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갔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보면 그처럼 죄를 지어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인간을 찾아나서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피조물을 찾고 계십니다. 어디로?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에로. ?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을지 몰라도 적지 않은 성도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의식은 행할지 모르지만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전혀 거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망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가족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2)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신 가장 주된 목적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입니다. 인류가 이렇게 타락하자 인류를 구원할 한 계획을 세우십니다. 타락이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아시고 그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해 가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만 보아도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계획을 가지시고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신 주된 목적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그를 통해서 열방이 복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기 위한 계획 가운데 세웠는데 그 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세우신 가장 주된 목적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였습니다19 3-4절 이하입니다.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지기 위해 행하신 일들을 압니다. 또한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을 터트려 먹이시고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신 가장 주된 이유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땅을 주기 위함이 우선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게로 인도하셨음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시기 위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할 것입니다. 가장 주된 목적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했다면 가나안 땅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행하면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복은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초점이 가나안에 있고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고 세상적인 것이 될 때 그곳에서 그들은 쫓겨났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합하여 한 백성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기 위해서 10가지 재앙과 광야의 기적을 행하셨지만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고 좌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세우셨는데 교회를 세우신 가장 주된 목적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이 구절이 말해줍니다.

그런데 심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록된 것은 또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저들에 대한 기롟을 우리가 다 알고 저들이 왜 실패했는지도 알고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기록된 줄도 알면서 신약시대의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우리의 온갖 관점과 관심이 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다 잘 살고 성공하고 부자되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수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아니고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주된 목적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 안에 있을 때 가나안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오늘까지도 우리는 그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신 가장 주된 목적도 하나님과 교제를 위해서입니다.

3)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보다 우선입니다.
30:15절입니다.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한쪽에는 생명과 복을 한 쪽에는 사망과 화를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생명과 복을 원하셔도 우리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사망과 화가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다 둔 것입니다.
16절입니다.“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세 가지를 말합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은 신6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주 여호와는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다음에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라. 다음에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여러분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면 우리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 시대건 이사야 시대건 너희가 내 율법을 버렸다 나를 버렸다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내 말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안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는가를 드라ㅓ내지 않고 우리의 행동이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면 교리적으로는 성경말씀을 다 믿지만 우리의 실제 삶에서 사업에서는 직장생활에서는 우리 생활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떠나면.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난 것을 하나님을 법을 버린 것과 연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첫 번째로 가면 문제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 자원으로, 안됩니다. 해보세요. 안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키려고 노력했다가 엎어지고 넘어지고 코 깨지고 합니다. 또 일어나서 노력하다가 넘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적당히 포기하고 타협합니다. 그리고 선별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만 행합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철저히 떠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나 이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의 교제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하는 하나님과 친밀함이 되어야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쉬운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있을 때에도 해결책은 우리의 노력으로 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노력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책은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여기가 먼저 되어야 다음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앞에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두었다 하면서 이 세 가지를 차례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보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보다 우선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의식보다 우선입니다. 호세아6 6절입니다“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원하지 않는 것은 번제와 제사입니다. 여기서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짜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장 원하는 본질적이고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사랑하는 친밀한 사랑의 교제라는 말씀입니다. 의식이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핵심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식은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그분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의 삶속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참된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그 모든 의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그 많은 헌신 예배 제물 기도가 있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호세아 시대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배회복을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원래 예배는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는 행위를 예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주일날 교회에 와서 열한시부터 열두시까지 순서에 따라 진행하는 것을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위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의식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친밀한 교제가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지난 성턴절에 한 자매가 케익을 주었어요. 직접 만들었데요.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케일을 구워서 가져왔는데 만일 겉에는 멋있게 포장했는데 속은 비었다면 제가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놀리는 거야 뭐야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예배가 아무리 화려해도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추구되지 않으면 껍데기 뿐입니다. 쓰레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나 예레미야 시대나 바리새인들의 예배를 헛되게 예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의식보다 우선입니다. 의식은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한 수단입니다. 포장지입니다.

5)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사역보다 우선입니다.
마가복음 3 13-15절입니다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사도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장 귀중하게 사역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많이 섬기고 가장 많이 희생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세우실 때도 주님은 사역을 위해 먼저 세우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사역을 위해서도 세웠지요.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전도와 귀신 쫓아내는 것입니다. 전도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성령의 전반적인 사역을 말합니다

여기를 보아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똑같은 사역을 위해 부르셨어요. 즉 전도와 귀신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보다 우선적인 것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열둘을 세우셔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려고 부르셨어요. 교제가 사역보다 우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역보다 교제를 먼저 힘썼음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5 15절이하입니다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공생애 사역을 할 때 말씀을 선포하시고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왔어요. 말씀을 듣고 치유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수님이 하로 오신 사역을 위해서 왔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16절입니다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영어성경을 보면 항상이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 이 말을 보면 예수님은 사역보다 교제를 먼저 우선시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연말을 지나면서 또 송구영신예배를 지나면서 개인적으로 회개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사역을 위해서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보다 친밀한 교제가 먼저인데 제가 사역에 바빠서 친밀한 교제를 등한시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우리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가장 핵심입니다. 가장 중요하며 근간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그럽니다. 설교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이나 어떤 분을 이 설교를 여러번 들었을 것이고 제 책을 여러번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었고 설교를 할지라도 또 많이 알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얼마나 핵심적이고 중요한가를 보아야 그분을 우선적으로 찾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우선적으로 직장보다 우선적으로 사업보다 우선적으로 심지어 사역보다 우선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모든 오락보다 우선적으로 심지어 우리 자녀나 부모의 일보다 우선적으로 찾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삶에서 그렇게 안한다면 실제로는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아는 것을 가장 고상하다고 했는데, 예수님 안에 있는 보화를 안다면, 우선적으로 무엇보다 찾을 것인데, 이론적으로는 찾아야 한다고 알지만 실제로 그 가치를 못보면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못보면 우리 삶에서 우선적을 주님을 알기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텔레비전 연속극 나오니까 연속극 끝아면 찾아야지 합니다. 그러다가 예들이 와서 숙제도 도와주세요 하면 숙제 도와주다가 밤이 늦었으니까 잡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직장에 가야 하니까 일찍 잡니다. 그리고 교회 와서는 제가 주님을 찾기를 열망합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 행동이 하는 소리는 주님을 아는 것이 연속극보다 못하고요. 주님을 아는 것이 자녀의 숙제보다 못하고요, 직장보다 못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별것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 우리 행동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를 드러내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가치를 안다면, 진실로 안다면 우리는 우선적으로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셔서 보화의 가치를 보게 하시고 우선적으로 주님을 찾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친밀함의 의미
어떤 분이 인터넷으로 제 설교를 들었나봐요. 질문을 보냈어요. 친밀함이라는 말이 도대체 뭡니까? 인격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했어요. 친밀한 교제가 무엇이냐?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 언약을 그에게 보이시겠다고 합니다. 친밀함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쏘드라는 말입니다.

NIV을 보면 하나님이 그런 자들과 상의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친밀함이라는 말 대신에 상의한다고 했어요. KJV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밀한 것들 즉 하나님 자신의 성품, 목적과 길들을 계시하시는 가까운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친한 관계에 있을수록 그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밀한 일들을 자신과 목적과 길들을 계시하시는 친한 관계를 말합니다. 그것을 상의하신다 혹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32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금송아지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이라고 예배합니다. 여호와의 절일의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 한다고 하면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금송아지에게 합니다. 그리고 금송아지의 방법대로 광란의 파티를 엽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예배가 혼합주의가 됩니다. 우리가 예배회복을 살펴보는 이유도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우리의 예배도 혼합주의 신앙, 혼합주의 예배가 됩니다.

자 그런데 이런 상황에 있을 때 모세는 시내산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자 하나님이 멸하시려합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여기를 보면 친밀함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32 9절 이하입니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은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주권자라는 말은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성령님만 해도 바람이 임의로 부른 것처럼 임의로 행하십니다. 그분이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1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 관한 바울의 노래를 보셨지요. 그분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고 상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모세에게 허락을 받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모세에게 하나님의 의중을 알리십니다. 계획을 알리십니다. 상의하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회개하면서.
11-13
절입니다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렇게 회개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약속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14절을 보면 뜻을 돌이키시고 화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런 자리로 부르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저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의식을 행하면 하나님이 복주시겠지 열심히 했으니까 사업 잘되게 하겠지 열심히 했으니까 내 아들이 수능 대박나서 좋은 대학에 가게 하겠지 합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 자체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신앙생활 자체가 불상 앞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비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결국 신이 이 경우에 하나님이 자기들의 세상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해 달라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헌신합니다. 기복주의 율법주의가 짭봉되어 있습니다. 가짜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창조되었어오. 그리고 그 모든 의식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기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만 해도 보세요. 하나님의 목적과 의중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기도했고요. 바울이 그렇게 기도했어요. 모세가 사무엘이 예레미야가 그렇게 기도했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했어요.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금년에 내 사업 두배로 확장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그저 수능 40일 앞두고 아침마다 나와서 기도하지 않았어요.

우리 신앙은 성경이 기준인데 성경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붙잡고 기도했어요. 이것은 친밀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 필리핀 바기오에 가서 집회할 때 하나님이 뚜렷하게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친밀함을 구하면, 하나님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부분적으로 행하시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중보기도입니다.

친밀함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3.
친밀함의 중요성
제가 아까 이 말씀을 들을 때 삶의 관점에서 듣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만 해도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들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 살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열매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를 통해서도 보았지만 우리가 전혀 삶의 영역에서 살고 있지 않음이 드러났잖아요. 이런 것처럼 이 지금 친밀함의 중요성은 다른 말로 하면 친밀함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친밀함이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인데 이런 삶을 살면, 이런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중요성이면서 열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친밀함에 대한 설교를 수많이 들었거나 또 했다고 해도 실제로 이런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매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제는 친밀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세하게 살펴볼 수 없어요. 예배의 관점에서 친밀함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1)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거해야 우리가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당시 신앙생활할 때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 하나님이 안계시면 어떻게 천지가 있겠어. 하면서 당시 전통을 따라 의식을 행하면 복주시겠지 하면서 살았나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실제였어요. 눈에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았어요. 여러분 이삭을 드렸지요. 드릴려고 할 때 말리시고 수염소를 준비하셨어요. 그리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났어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안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안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에게 실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성품과 길을 보이셨어요.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어요. 소돔을 멸망시키려는 비밀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셨어요. 친밀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거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 50명이 있어도 같이 멸하시렵니까? 혹시 40... 그러면서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뜻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이 롯의 식구들을 구원하셨지요. 저는 거기에 아브라함의 기도가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실제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삶 속에서 앞서가시고 인도하셨어요. 그런데 이 하나님의 실제가 언제 있느냐?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거해야 있습니다. 개인이건 교회이건. 이 생명이 걷히면 이론만 남습니다. 이론은 있지만 생명이 없어요. 실제가 없습니다. 모양만 있는 종교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30 19절부터 보면 나옵니다.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다는 것입니다.
146절입니다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바로 곧 그 생명이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부흥회 때에도 이길수 목사님을 통해서 말씀하셨어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복주리라 세상 모든 사람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모든 것이 아브라함이 복주시옵소서 하나님 열방의 근원으로 삼아주세요 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신앙입니다.

15:1절 이하를 보세요.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가 네 상급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네 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그분이 생명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삶에도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상급된 삶을 살아야 우리에게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복주세요 능력주세요 역사해주세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신앙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복이 되는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상급이 되는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유일함 힘이 되고 산성이 되고 피난처가 되는 삶을 살 때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이며 생명입니다.

다윗을 보세요18:1-절입니다.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어요. 다윗은 하나님 그분이 자기의 산선이요 그분만이 자기의 힘이고 반석이요 생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보호함이든지 인도함이든지 지키심이든지.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수단 삼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구절을 가져다가 인용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힘이시고 의지시며 노후보장입니다. 보험이 아니라 자식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설 때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제가 나머지는 제목만 읽겠습니다. 시간이 지나가서. 하나하나가 너무나 중요한 부분인데 시간이 없어서.

2)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있어야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가 나의 아버지시며 나를 하나님의 모든 존재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안식과 만족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안에서 나오는 안식이 있어야 우리의 섬김도 올바로 섬길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을 사랑함도 올바로 사랑할 수 있어요. 부부관계도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대하니까 심지어 기독교인 가정도 수없이 깨지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전적인 순종도 가능합니다.

4)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참다운 믿음도 가능합니다.

5)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올바른 기도도 가능합니다.

6)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진정한 섬김이 가능합니다.

7)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영적인 분별력이 열립니다.

8)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영적전쟁에서 승리합니다.

9)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10)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주의 형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11)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말씀도 올바로 전할 수 있습니다.

12)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올바른 예배도 가능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 아닙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것중에 단 하나도 친밀한 교제 없이는 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나요? 이 하나하나가 다른 한편으로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대한 설교를 수없이 들었다 해도 내 삶속에서 실제로 이런 열매가 없다면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4.
예배와 하나님과의 친밀함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함은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양방향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친밀함이 있어야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나중에 참된 예배를 다룰 때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참된 예배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고취시켜 줍니다. 양분을 공급해준다. 길러줍니다. 배양합니다. 고양시키주고 증진시켜줍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 다음에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립니다.
경외함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오늘말씀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친밀함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보이십니다. 자신의 비밀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이 상의합니다. 같은 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과 친밀함이 부어집니다. 회복됩니다.

포도나무 교회나 저 개인적인 경험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중과 목적과 행하심과 성품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성경에 나와있는데 성경은 이론이고 실제가 우리에게 비추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의 조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추어지는 가장 주된 통로가 무엇이냐면, 예배와 중보기도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중 핵심적인 요소는 예배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배양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만 제가 추가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선순환과 악순환입니다영적분별력에서도 마태13장에 보면, 이런 법칙이 있어요. 보는 자는 저 보게 되고 보지 못하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 빈인빈 부익부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병폐인데 영적으로는 법칙입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선순환 악순환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의 형식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다 갔다고 예배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당만 밟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이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회복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에 와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가면 마당만 밟고 간 예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갔으면 자신이 마당만 밟았음을 알고 껍데기 예배만 할 뿐임을 알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면서 자신의 심각성을 깨닫고 애통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예배인 것처럼 아무런 사모함도 애통함도 없이 예배 잘 드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감각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있어요. 주님을 추구하면 주님이 더 자신을 계시합니다. 주님을 아니까 주님을 더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주님이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더 예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순환입니다.

반대로 신앙을 잘못 이해해서 예배순서만 바치고 돌아가면 예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배드렸으니까 복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단지 순서를 마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만 해도 주님을 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주님을 모릅니다. 그러니 예배가 올바로 드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계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예배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선순환 악순환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으로 전환하는 것은 여러분만이 할 수 있어요. 아무도 할 수 없어요. 여러분만이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예배가 안드려지면, 그래서 하나님과 만남이 안이루어지면, 그저 주일날 예배드리고 왔어도 마당만 밟는 예배라는 것을 인식하면, 내 예배가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껍데기 뿐인 예배임이 인식되면, 이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주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만나고 보고 어떠하든지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도록 애통해하며 주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해야할 일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위해 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기 시작합니다. 그 고리를 여러분이 끊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친밀한 교제를 위해 예배가 핵심이라 말할 때, 예배가 친밀함을 부양시켜 준다고 할 때 한 가지는 마음을 토로하고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친밀함의 한 부분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친해야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하나님과 친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중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친밀함안에 있으면 우리의 속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체면을 차리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의 자녀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마다 여러분의 문 앞에서 서서 ‘아버님 문의 여쭙니다 잘 주무셨습니까?’ 직장에 다녀오면 ‘아버님 오늘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하면서 마음은 전혀 열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않고 격식만 갖추어요. 그러면 친한 관계가 되겠어요. 아이가 징그럽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갈 때 이렇게 대하고 있다니까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속에 갈등 미움 아픔 두려움 상처를 가득안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열지 않고 격식만 갖추고 나갑니다. 오늘도 문의 여쭙나이다. 그런데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오픈하지 않아요.

여러분 다윗을 보세요. 하나님이 친히 마음에 합한 자라로 하신 다윗을 보세요. 다윗의 시편들을 보세요,. 얼마나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털어놓던가요. 아픔, 고민, 낙심, 좌절, 불안 등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되려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린대로 저는 예배로 나갈 때 찬양과 경배시간에는 목사로 나가지 않습니다. 설교할 때나 교회를 인도할 때 목사로 나가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저는 자녀로 나갑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나갈 때 자녀로 나가십시오. 마음을 열어놓고 중심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놓으세요. 마음을 토로하세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모함으로 나오세요. 그럴 때 하나님의 만지심과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도 알고 계획과 의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배회복을 살펴보는데 가장 주된 이유중에 하나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나님과 친밀함이 증진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선순환의 자리로 나가기를 결단하고 나가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제2강 회복의 기초로서의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스가랴 1:7, 12-17 “7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 12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5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지난주부터 예배회복에 대해서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예배와 관련해서 우리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몇주 동안 예배회복의 필수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예배회복이 다른 회복의 기초라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배회복이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예배회복의 교회의 다른 회복의 원동력이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1.
교회의 네 가지 기능
많은 학자들은 교회의 기능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눕니다. 십자가 모양을 그려서 만듭니다.
수직적인 면에서 아래서 위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
위에서 아래로는 양육 혹은 교육.
수평적으로 믿는 성도에 대해서는 교제.
안믿는 세상을 향해서는 전도.
이처럼 네 가지로 나눕니다.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많은 학자들이 예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서 다른 기능을 섬길 수 있는 영적인 능력과 힘을 공급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기능을 다른 기능보다 우선적으로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섬김은 의무감에 의한 메마른 섬김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왜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섬기면서 많은 상처를 받고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을 가지고 거부감을 그 마음 속에 가득하고 사람에 대한 원망, 불신, 미움. 배신감이 가득하고 탈진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져야 그 예배를 통한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되어야 그 마음 속에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삶의 의미가 넘치게 됩니다.

제가 어제 주례하면서도 말했어요. 우리 인생의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만족과 삶의 의미 물론 남편도 소중하고 아내도 소중하고 가정도 소중하지만 왜 하나님 외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때 실망하는가? 어느 무엇도 하나님 자리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부터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기쁨과 감격이 샘솟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해서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고 주님을 향한 열정이 샘솟고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열망과 열정이 우리 속에 샘솟고 이런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다른 기능을 섬길 때에도 그 주를 향한 열정으로 섬길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도 상대방의 반응에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안식하고 인내하며 하나님이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섬김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모든 것들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섬김은 단순한 의무가 되어집니다.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대로 그런 결과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교회의 기능중에서 가장 우선적인 기능을 예배에 두는 것입니다. 이만큼 예배회복이 다른 모든 회복의 원동력입니다.

2.
교회배회복의 길
그림을 봅시다. 교회가 회복되려면 중심에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의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회복과 부흥이라고 자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를 포함해서 모든 기능들이 절실하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회복되어야 성경에 약속된 말세지말에 있을 전 세계에 미치는 하나님의 부흥을 우리가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교회를 향해 부르짖고 있는 부르짖음과 음성도 회복과 부흥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의 놀라운 뒷받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를 섬길 때든지 선교회를 섬길 때든지 회복과 부흥에 관한 하나님의 일을 섬길 때 내 삶을 드릴 때 내 시간과 에너지를 드려 동참할 때 하나님이 강력하게 동참하시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회복과 부흥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는 길은 그림이 보여지는 것처럼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토대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중심에 놓았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고 교회 가운데 복음의 능력이 역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 개개인의 삶속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회복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님이 의도하신 어둠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능력있는 교회가 세워질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의 사역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두 개의 원을 겹치게 그려놓은 이유는 결혼식을 보면 두 개의 반지가 엉켜있지요.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처럼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온전한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온전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사도들의 사역과 초대교회의 삶 속에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삶 속에도 그런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가운데 아무리 큰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고 아무리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 교회가 십자가 복음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성령의 사역이 십자가의 복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 능력이 교회를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 능력은 교회를 분리시키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지라도 그가 십자가의 복음에 서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은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모든 은사가 부족함 없이 나타났습니다.

고전1 7절“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은사는 부족함 없이 나타났는데 고린도교회는 영적으로 어린교회였고 육적인 교회였습니다.

고전3 1-3절입니다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들은 은사가 부족함 없이 나타난 교회였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난 교회였습니다. 동시에 육적인 교회였고 지극히 어린 교회였습니다. 영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인본주의가 가득한 사람 중심적인 교회였습니다.

또 세상의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가 가진 문제를 하나하나 다루는 편지입니다. 거기 보면 시기 질투가 가득했고 음란 사술이 있었고 심지어 자기 의붓어머니와 사는 사람도 있었어요. 성찬식할 때 부자들은 미리 와서 실컷 먹고 취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뒤에 와서 먹을 것도 없는 세상적인 차별이 있었어요

이런 죄악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병들었고 심지어 죽었는데도 그 사실도 모르고 있었어요. 이처럼 그들은 세상의 죄가 가득했어요. 심지어 그들의 이권다툼을 위해서 안믿는 재판장 앞에서 싸우면서 하나님의 명예를 떨어뜨렸어요. 이처럼 성령의 은사와 능력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4장 고후1-4장에서 집중적으로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어요. 그것이 해결책이니까요.

이와같이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의 조화로운 토대 위에서 예배회복, 중보기도의 활성화, 양육이 회복되고 리더십이 회복되고 사랑의 교제와 전도와 섬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의 토대 위에 네 방향의 모든 부분들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이 네 가지 모든 기능들이 회복되어야 교회가 건강하게 자랍니다. 네 부분이 다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가 균형을 잃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다른 모든 기능들을 회복되고 활성화 되었는데 전도가 회복되지 않으면 불구입니다. 꼭 예루살렘 교회와 같지요. 전도가 안되고 끼리끼리만 뭉쳐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핍박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온 세상에 흩었어요. 하나님이 핍박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으로 그들이 핍박 때문에 흩어져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증거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모든 부분이 다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만 해도 그렇지요. 우리가 리더들은 일주일에 세 번이상 참여하라 쓰라 하니까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중보기도로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지속적으로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중을 구하고 하나님의 의중이 있는 곳에 내 삶을 드리고 주님의 영광을 더욱 보기를 원하고 주님의 영광의 빛 앞에 비추어진 자신의 삶을 보고 돌이키기 원하고 특별히 주님으로 인해 내 삶의 목적과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 속에 주를 향한 열정이 없으면 절대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거기에 서야 합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예배회복을 추구했어요. 그런데 보세요. 아무리 귀하게 함께하셨어도 이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비전, 의중을 깨닫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빛 앞에 가려는 열정이 식어지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는 습관이 됩니다. 하나의 습관이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임재는 서서히 걷히게 됩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 만남은 줄어듭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은 껍데기만 남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귀한 일을 해오셨지만 지금 우리 가운데 더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살피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선명하게 비추어져서 감격해서 울었던 적이 언제입니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의중이 선명하게 비추어져서 그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내 삶을 그곳에 드리고자 했던 열망이 부어졌던 때가 언제입니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진 여러분 자신의 모습이 선명히 보여져셔 중심에서부터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주님 앞에 돌이켰던 때가 언제입니까? 이런 것이 없다면 지금 여러분의 예배는 심각한 상태에 처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배가 심각하게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있는데도 심각성도 인식하지 못하고 올바른 예배로 돌이키고자 하는 애통함도 없다면 여러분은 마음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자리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회복되어야할 절실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시면 예배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예배로 회복되도록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의중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내 자신의 삶이 비추어지는 자리로 나가기 위해서 주님 앞에 애통함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안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입니다.

3.
구약의 성전회복을 통해서 본 예배회복의 중요성
오늘 이 부분을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의 성전회복을 보면 성전회복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회복을 위한 핵심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회복에 관한 기록은 예배회복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다른 회복을 위한 핵심이요 원동력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더 나아가 그곳은 오늘날 진정한 성전인 개개인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 비전과 열망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보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공유해야할 비전과 열망입니다.

1)
하나님은 성전의 회복을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으로 이해하십니다.
스가랴 1 7절을 읽었어요.“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스가랴 선지자에게 다리오 왕 제2년에 임했습니다. 그때는 서기전 518년입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자 서기전 586년에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불탔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로 수많은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다가올 심판에 대해 예언하면서 동시에 70년만에 저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5 11절에서 말합니다.“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29 10절에서도 말합니다.“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70년이 차면 회복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당시 세계의 강대국인 바벨론에서 독립해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은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면서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서기전 538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합니다. 그리고 정복해서 본격적인 왕이 된 원년에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성전을 짓도록 칙령을 내립니다.

이사야에 예언된 대로입니다. 그것이 에스라 1:2-4 6:35절에 나옵니다. 그 결과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약 5만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 마자 성전짓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성전이 불타고 나라가 망한지 딱 48년된 해입니다. 그래서 성전 짓는 일을 시작해서 2년째에 성전의 기초가 놓입니다. 유다백성들이 기뻐합니다. 에스라서 3 8-10절입니다. 이때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진지 정확하게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다백성들의 성공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어요. 그래서 성전짓는 일을 방해하고 또 아닥사스다 왕에게 고소합니다. 그래서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짓는 일을 금지시킵니다. 그래서 성전을 짓게 되면 반역입니다. 그래서 성전짓는 일이 중단되었습니다. 이렇게 15년 동안 중단이 됩니다

그러던 중에 서기전 519년에 다리오왕이 즉위합니다. 그리고 2년에 서기전 518년에 하나님이 사가랴와 학개를 통해서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도 518년에 말씀한 내용입니다. 이때가 586년에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 없어졌으니까 그때부터 68년된 해입니다

그때부터 말씀하기 시작합니다그러면서 스가랴 1 7절을 읽었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12-17
절을 봅시다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5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기보면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온지가 정확하게 20년이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돌아와서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까지도 저들이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진노가 저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돌아온지 20년이나 되었는데. 그리고 70년이 되었다는 말 속에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70년만에 회복되라는 말씀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말입니다. 이미 외부적으로는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학개서와 스가랴서를 통해서 성전 짓는 일을 지시하십니다. 스갸랴서를 보면 그래요. 이는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 그러면서 너희 조상을 애굽에서부터 인도해냈던 성령이 너희와 함께한다. 두려워말라 담대하라고 명령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말씀을 따라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반대하던 사람들이 다시 들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다시 조서를 보냅니다. 이것은 반역행위입니다. 그러자 유다 백성들도 조서를 보내지요. 그러던 중에 다리오 왕이 선왕들이 내렸던 칙령들을 보고 있다가 고레스 왕이 내렸던 칙령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는 일을 허락합니다. 그 결과 성전짓는 일이 2년만이 완성됩니다.

2년이 서기전 516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진지 정확하게 70년만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입니다.

이 전체적인 것을 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성전의 회복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14절만 봐도 그럽니다. 성전이 아직 폐허로 남아있을 때, 그리고 돌아온지 2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진노 가운데 있다고 보시면서 14절에서 말합니다.

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상태를 보면서 크게 질투하십니다. 그러면서 16-17절에서 말합니다.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상태를 보시고 하나님이 열심을 가지고 성전을 세우실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상태를 보시고.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성전의 회복의 관점에서 이해하십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있어 예배회복이 그처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우리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이 회복되어 있어도 예배가 회복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관점을 보셔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관점을 보아야 예배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는 것과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이 회복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이해하십니까? 그 이유는 성전이 회복되는 것과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성전 건물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는 첫마디가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인데 내가 지은 이 집에 어떻게 하나님이 거하겠는가 합니다. 그리고 이 전을 향하여 우리가 기도하거든이라고 말합니다.

또 이사야 66 1-2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예레미야서를 보아도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화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말처럼 이사야의 말처럼 정확하게 같습니다.

하나님은 건물에 관심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성전을 귀하게 여기셨습니까? 하나님이 그곳에 영광의 임재로 임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앞으로 자세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 가운데 운행하시기 위한 수단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성전의 회복을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으로 보는 관점에서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이것이 세워지는 것과 하나님이 그들에게 오셔서 거하시는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까 읽은 스가랴 1 16절에서 말하지요.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예루살렘에 돌아왔는즉이라고 합니다.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라라고 합니다.
2 10-13절입니다.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13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보세요. 왜 성전의 관점에서 이해하는가? 성전이 세워지는 것과 하나님이 그 가운데 오셔서 운행하는 일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오시면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보시면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열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하나님은 성전의 회복을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으로 보십니다. ? 하나님이 오셔서 그 가운데 운행하시는 것이 성전의 회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기를 원하시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열망이니까.
또 하나는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넘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스가랴 2장을 읽었는데 다시 한번 보세요. 10절을 보면 내가 와서 그 가운데 머물리라고 하셨어요. 그 결과가 11절을 보면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12절도 하나님이 오셔서 그들 가운데 임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땅에서 소유삼게 되고 택함받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까 1장에서 본문에 16절을 보면, 내가 불쌍히 여김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는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될 것이라고 했어요. 주님의 오신 결과 17절을 보면, 나의 성읍들이 다시 넘치도록 풍부할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며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이 넘칩니다.

여러분 이 부분에 대해 가장 잘 말해주는 부분이 스가랴 8장입니다. 8장 전체가 이 내용을 말합니다. 전체를 다 읽으면 좋을 것인데 1-9, 21-23절을 읽겠습니다.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21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오셔서 성전에 거하시고 운행하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날 것이기 때문에 이방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러 하나님께 나와 그들이 구원받고 복을 얻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예배회복의 중요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중이며 의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성전의 관점에서 이해하십니다. 성전 건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머물며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과 만남 그들과 교제 뿐만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오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거기에 넘치게 됩니다. 여기에 교회회복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의하면 교회와 개개인의 성도가 하나님이 성전삼고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회복의 중요성, 교회회복의 중요성,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회복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예배회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4)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열망입니다. 아까 읽었던 슥8 2-3절을 봅시다.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고 운행하시며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일을 위해 하나님은 질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가 얼마나 큰지 반복해서 말합니다. 심지어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질투는 하나님께 소중한 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을 말합니다. 이 질투에는 심판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질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예배 가운데 더 아가서 우리 삶 가운데 오셔서 운행하시며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망이며 비전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기를 열망하십니다. 하나님의 참된 성전인 우리가 오늘날 이런 하나님의 비전과 열망을 안다면 우리의 예배에 대한 교회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 목적과 의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과 의도를 우리가 안다면 그저 습관적으로 나와서 예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배가 하나님이 의도하는 예배가 되지 못한 것 때문에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예배회복의 중요성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예배회복이 교회의 다른 모든 회복을 위한 원동력인가를 보았습니다. 특히 구약의 성전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예배회복이 어떻게 모든 회복의 핵심이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배회복의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이고 비전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과 열정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예배가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예배회복과 더불어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고 생명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1강 우리의 현실과 예배회복-여주봉 목사

3:14-22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 예배가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임재가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기준을 볼 때 갈 길이 멉니다. 이번 예배회복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는 기초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 번째 시간으로 우리의 현실을 보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교회를 교회사 시대의 일곱시대의 교회의 모습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는 사도들 바로 시대의 교회이고 그리고 다음 교회들이 다음 시대를 대변하고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말세지말의 교회의 모습으로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해석을 받아들이든 안받아들이든지 상관없이 오늘날 교회가 처해있는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보면서 돌이키며 은혜를 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하나님의 임재가 철저하게 걷힌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가장 소중한 것중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실제적으로 거하시며 운행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운행하셔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이 부분을 간단히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는 따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요점만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출애굽기 33장입니다. 32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송아지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하면서 너무나 타락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분노해서 이스라엘을 멸하시려 했지만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분노를 돌이키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출33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겠다. 심지어 내가 천사들을 앞서 보내서 천사의 능력으로 원수들을 몰아내고 너희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그런데 34장에서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곧바로 함께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그런데 여기 보면 중요한 것이 있어요. 내가 친히 가리라 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가겠다는 말입니다. 친히 가리라는 말이 원어를 보면 나의 얼굴이 너희들 앞에서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영어성경들은 다 이 구절을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my presence will go with you

그러면 여기 잘 보세요. 하나님이 내가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했고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과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온 우주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함께 하신다는 말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십니다. 성경의 주인공들을 보면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그들과 함께하셨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그들 가운데서 그들을 통해서 행하셨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광야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불기둥 구름기둥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출14 23-24절을 보면 홍해사건을 말하는 구절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 뒤를 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실 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그러니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똑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아무런 많은 부를 축적했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교회적으로 아무런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프로그램이 진행되더라도 많은 사역과 큰 건물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우리에게는 껍데기만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 그것도 천사의 능력으로 주겠다고 했어도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겠다면 우리를 올려보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세상의 모든 부와 안락과 풍요와 능력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에게는 껍데기만 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걷히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우리 개개인 가운데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으로 친히 임하셔서 거하시고 운행하기 위해서 우리를 성전 삼으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십자가에 예수님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그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3 20절을 보면 예수님이 교회 문 밖에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전도할 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불신자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라는 말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미 예수를 믿어 그 마음에 예수를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지금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문밖에 계십니다. 다시말하면 그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철저하게 걷혀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마음 아픈 사실입니다. 그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인본주의로 가득찬 교회였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가 걷히면 모든 것이 중단되었습니다. ? 모든 것이 성령으로 이루어졌으니까요.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님이 떠나신다고 해도 교회는 90% 이상의 일들을 전혀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그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미국 교회를 두고 하시는 말인데 한국 교회도 전혀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마음 아픈 현실인데, 로이드존스의 부흥이라는 책을 보면 50년 전의 영국 교회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에 와서 보고 쓴 것 같아요

“교회가 부흥을 맞지 않을 때 성가대를 강조하고 성가대를 강조할 뿐아니라 돈을 주어 성가대를 사오기도 합니다. 또 성가대에 있는 독창자들을 돈을 주고 사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합니다. 성가대는 그들을 위해서 노래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생활에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습니다. 어느 한 지점을 향하여 모든 일들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분명히 압니다. ..................복음적인 교회에서마져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처럼 길지 않는 설교가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는냐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성령의 자리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기를 열망하십니다. 특히 우리 예배가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열망하십니다. 예배가 가운데 임하셔서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고 돌이키시고 회개케 하시고 위로하시고 약속을 주시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알리시고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합니까? 하나님이 그곳에 임하셔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까? 혹시 그런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없을 뿐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생명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도 기대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여러분 개인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그만큼 우리는 심각하게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 절대로 라오디게아 교회 못지 않습니다. 심각합니다.

2.하나님의 생명이 걷힌 교회입니다.
10 10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려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11절에 이 일이 가능하도록 자신을 내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실재를 말합니다다윗이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역사하심이 자신의 삶에 넘친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실제를 노래한 것입니다. 단순한 시가 아닙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걷혀 있었습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보낸 편지 중에서 하나님이 칭찬하신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후한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시지만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눈은 매우 후하십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 한 일과 신약의 롯에 대한 평가를 보면 하나님의 안목이 얼마나 후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후한 눈을 가지고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셨는데도 칭찬할 것이 한 마디도 없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그만큼 심각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17절에서 말씀합니다.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지엽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헌금이 부족했다든가 프로그램이 부족했다든가 일꾼이 좀 부족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하나님의 생명 자체가 고갈된 것이었습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고갈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엘리 제사장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눈이 멀었어요.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자기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눈이 가리워져서 무엇이 문제인줄 몰랐기 때문에 해답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렇게 후한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어도 칭찬거리가 하나도 없는 생명 자체가 고갈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 조차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심각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날 교회는 어떠합니까? 오늘날 개개인의 삶 속에 우리 예배 가운데 우리 교회생활에 하나님의 실제로 거하시며 운행하시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들이 철저하게 고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교리에 대한 고백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 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우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줄 믿습니다 등등. 하나님에 관한 교리로 하나님의 실제를 대체한 시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장 근본인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었는데도 그 사실도 모른 것은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였습니다. 그래서 신앙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며 생명인줄을 몰랐어요. 어느 시대건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앙에 대해 왜곡되게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왜곡되게 이해합니다. 신앙이 타락하게 되면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이해합니다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자식이 좋은 학교에 가고 직장에서 남편이 승진하고 사업이 잘되고 등등을 축복으로 이해합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지역이 산업이 발달한 지역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인당 생산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 울산입니다. 4만불이 넘는 답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산업이 발달해서 지역이 부자였고 교회도 부자였습니다. 성도들도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자체가 고갈되어 있는데도 자기들은 부자라 부요하다고 자부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시대를 보면 저들이 돌이키지 않아서 하나님이 심판이 임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불타고 나라가 망한 그 시대에도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잘되었습니다

12 1-2절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것이 우리의 참된 신앙일 뿐아니라 그 하나님의 생명이 가장 많이 넘치는 시간이 우리의 예배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고 있냐는 말입니다.

로이드존스는 생명력이 없는 그 당시의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종교나 예배는 생명력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지만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갑자기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람들 존재 자체가 사로잡힘을 당하고..... 모든 것이 형식적이고 모든 것이 잘되어간다고 자만에 빠져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에 비하면 우리의 예배는 아직 멀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이것은 예배도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얼마나 떠나 있는가를 인식하고 애통함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애통함이 없다면 여러분은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3.주를 향한 열정이 없는 교회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요17 3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교리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해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의중을 알고 그분의 의도를 아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구원, 성화, 순종, 사역. 믿음 영적전쟁에서 가장 핵심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늘 배고파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넘쳤습니다.

27 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42 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고린도전서 2 2절에서 온 세계가 자기 앞에서 열려져가는 그 시점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힌 그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로이드존스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시험하는 시금석은 그 사람이 바쁘고 일의 활동을 많이 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중략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중략 부흥에 이르는 불가피하고 부단한 예비적인 단계는 하나님에 관한 갈망,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갈망하는 생생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며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일어서서 당신의 원수를 훼파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불타는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에 필요한 예비적인 단계였습니다.

이것은 부흥의 예비단계일 뿐아니라 우리가 회복되기 위해서도 필연적인 예비단계이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열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차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있을 바에는 차라리 차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얼마나 신앙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고 돌이킬 가능성이라도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미지근하니까 돌이킬 가능성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돌이키지 않으면 내 입에서 너희를 토하여 내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교회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모든 것이 잘되어간다는 식으로 극심한 안일함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한국교회는 어떠합니까? 저는 단순한 종교적인 열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한 이사야 시대에도 수많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저는 그것을 지금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열망하는 열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배고픈 열망을 말합니다. 믿음이 사람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한 갈망을 말합니다.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원하는 그 갈망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사로잡히기를 원하는 열망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셔서 우리 존재 자체를 압도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고 우리 앞에서 원수를 파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그런 열정이 없으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축복과 종교적인 활동이 있어도 우리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될 수 밖에 없습니다.

4.영적 분별력이 어두워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는 철저하게 눈먼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영적분별력이 철저하게 어두워져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철저하게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너희는 가난하고 헐벗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무엇이 참된 부가 무엇인줄 몰랐으니까.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가 무엇인줄 몰랐으니까. 그런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참된 부인 줄로 알았으니까. 분별력이 가려진 상태에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옳은 것인 줄을 알지 못하니까. 자기가 무엇이 옳은 줄을 모르는데 어떻게 돌이킬 수 있겠어요.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그들은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벌거벗었다고 말씀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몰랐어요. 왜냐면 무엇이 참된 의의 행실인 줄 몰랐으니까.

19장을 보면 세마포가 의의 행실이라고 말하는데 무엇이 참된 의의 행실인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몰랐어요. 그들은 그들의 신앙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무리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 것으로 나머지는 종교적인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외부적인 것만 남는데, 프로그램만 남는데, 순서만 남는데. 그들은 분별력이 없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잘살게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진 상황에서는 올바른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무엇이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 의인지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아는 것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사역인지 거룩인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의식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성경적인 지식이 많아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도 몰랐습니다. ?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예배에 있어서도 참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철저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철저하게 걷히고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걷혀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좋은 옷 입고 와서 많은 수만 나와서 헌금하면 그 예배가 참된 예배인 것처럼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며 자부심이 가득하지만, 얼마나 눈이 멀어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시리즈를 살펴보면서 우리 현실이 얼마나 하나님이 의도하신 예배에서 벗어나 있을 줄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예배가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 예배가 회복되기를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나오기를 바랍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지고 하나님의 생명과 임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