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3/2010

제1강 우리의 현실과 예배회복-여주봉 목사

3:14-22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 예배가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임재가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기준을 볼 때 갈 길이 멉니다. 이번 예배회복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는 기초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 번째 시간으로 우리의 현실을 보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교회를 교회사 시대의 일곱시대의 교회의 모습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는 사도들 바로 시대의 교회이고 그리고 다음 교회들이 다음 시대를 대변하고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말세지말의 교회의 모습으로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해석을 받아들이든 안받아들이든지 상관없이 오늘날 교회가 처해있는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보면서 돌이키며 은혜를 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하나님의 임재가 철저하게 걷힌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가장 소중한 것중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실제적으로 거하시며 운행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운행하셔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이 부분을 간단히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는 따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요점만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출애굽기 33장입니다. 32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송아지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하면서 너무나 타락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분노해서 이스라엘을 멸하시려 했지만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분노를 돌이키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출33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겠다. 심지어 내가 천사들을 앞서 보내서 천사의 능력으로 원수들을 몰아내고 너희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그런데 34장에서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곧바로 함께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그런데 여기 보면 중요한 것이 있어요. 내가 친히 가리라 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가겠다는 말입니다. 친히 가리라는 말이 원어를 보면 나의 얼굴이 너희들 앞에서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영어성경들은 다 이 구절을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my presence will go with you

그러면 여기 잘 보세요. 하나님이 내가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했고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과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온 우주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함께 하신다는 말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십니다. 성경의 주인공들을 보면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그들과 함께하셨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그들 가운데서 그들을 통해서 행하셨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광야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불기둥 구름기둥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출14 23-24절을 보면 홍해사건을 말하는 구절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 뒤를 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실 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그러니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똑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아무런 많은 부를 축적했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교회적으로 아무런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프로그램이 진행되더라도 많은 사역과 큰 건물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우리에게는 껍데기만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 그것도 천사의 능력으로 주겠다고 했어도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겠다면 우리를 올려보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세상의 모든 부와 안락과 풍요와 능력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에게는 껍데기만 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걷히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우리 개개인 가운데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으로 친히 임하셔서 거하시고 운행하기 위해서 우리를 성전 삼으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십자가에 예수님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그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3 20절을 보면 예수님이 교회 문 밖에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전도할 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불신자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라는 말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미 예수를 믿어 그 마음에 예수를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지금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문밖에 계십니다. 다시말하면 그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철저하게 걷혀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마음 아픈 사실입니다. 그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인본주의로 가득찬 교회였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가 걷히면 모든 것이 중단되었습니다. ? 모든 것이 성령으로 이루어졌으니까요.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님이 떠나신다고 해도 교회는 90% 이상의 일들을 전혀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그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미국 교회를 두고 하시는 말인데 한국 교회도 전혀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마음 아픈 현실인데, 로이드존스의 부흥이라는 책을 보면 50년 전의 영국 교회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에 와서 보고 쓴 것 같아요

“교회가 부흥을 맞지 않을 때 성가대를 강조하고 성가대를 강조할 뿐아니라 돈을 주어 성가대를 사오기도 합니다. 또 성가대에 있는 독창자들을 돈을 주고 사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합니다. 성가대는 그들을 위해서 노래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생활에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습니다. 어느 한 지점을 향하여 모든 일들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분명히 압니다. ..................복음적인 교회에서마져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처럼 길지 않는 설교가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는냐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성령의 자리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기를 열망하십니다. 특히 우리 예배가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열망하십니다. 예배가 가운데 임하셔서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고 돌이키시고 회개케 하시고 위로하시고 약속을 주시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알리시고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합니까? 하나님이 그곳에 임하셔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까? 혹시 그런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없을 뿐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생명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도 기대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여러분 개인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그만큼 우리는 심각하게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 절대로 라오디게아 교회 못지 않습니다. 심각합니다.

2.하나님의 생명이 걷힌 교회입니다.
10 10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려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11절에 이 일이 가능하도록 자신을 내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실재를 말합니다다윗이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역사하심이 자신의 삶에 넘친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실제를 노래한 것입니다. 단순한 시가 아닙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걷혀 있었습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보낸 편지 중에서 하나님이 칭찬하신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후한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시지만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눈은 매우 후하십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 한 일과 신약의 롯에 대한 평가를 보면 하나님의 안목이 얼마나 후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후한 눈을 가지고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셨는데도 칭찬할 것이 한 마디도 없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그만큼 심각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17절에서 말씀합니다.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지엽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헌금이 부족했다든가 프로그램이 부족했다든가 일꾼이 좀 부족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하나님의 생명 자체가 고갈된 것이었습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고갈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엘리 제사장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눈이 멀었어요.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자기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눈이 가리워져서 무엇이 문제인줄 몰랐기 때문에 해답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렇게 후한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어도 칭찬거리가 하나도 없는 생명 자체가 고갈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 조차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심각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날 교회는 어떠합니까? 오늘날 개개인의 삶 속에 우리 예배 가운데 우리 교회생활에 하나님의 실제로 거하시며 운행하시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들이 철저하게 고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교리에 대한 고백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 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우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줄 믿습니다 등등. 하나님에 관한 교리로 하나님의 실제를 대체한 시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장 근본인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었는데도 그 사실도 모른 것은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였습니다. 그래서 신앙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며 생명인줄을 몰랐어요. 어느 시대건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앙에 대해 왜곡되게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왜곡되게 이해합니다. 신앙이 타락하게 되면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이해합니다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자식이 좋은 학교에 가고 직장에서 남편이 승진하고 사업이 잘되고 등등을 축복으로 이해합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지역이 산업이 발달한 지역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인당 생산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 울산입니다. 4만불이 넘는 답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산업이 발달해서 지역이 부자였고 교회도 부자였습니다. 성도들도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자체가 고갈되어 있는데도 자기들은 부자라 부요하다고 자부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시대를 보면 저들이 돌이키지 않아서 하나님이 심판이 임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불타고 나라가 망한 그 시대에도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잘되었습니다

12 1-2절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것이 우리의 참된 신앙일 뿐아니라 그 하나님의 생명이 가장 많이 넘치는 시간이 우리의 예배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고 있냐는 말입니다.

로이드존스는 생명력이 없는 그 당시의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종교나 예배는 생명력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지만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갑자기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람들 존재 자체가 사로잡힘을 당하고..... 모든 것이 형식적이고 모든 것이 잘되어간다고 자만에 빠져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에 비하면 우리의 예배는 아직 멀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이것은 예배도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얼마나 떠나 있는가를 인식하고 애통함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애통함이 없다면 여러분은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3.주를 향한 열정이 없는 교회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요17 3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교리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해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의중을 알고 그분의 의도를 아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구원, 성화, 순종, 사역. 믿음 영적전쟁에서 가장 핵심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늘 배고파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넘쳤습니다.

27 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42 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고린도전서 2 2절에서 온 세계가 자기 앞에서 열려져가는 그 시점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힌 그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로이드존스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시험하는 시금석은 그 사람이 바쁘고 일의 활동을 많이 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중략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중략 부흥에 이르는 불가피하고 부단한 예비적인 단계는 하나님에 관한 갈망,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갈망하는 생생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며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일어서서 당신의 원수를 훼파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불타는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에 필요한 예비적인 단계였습니다.

이것은 부흥의 예비단계일 뿐아니라 우리가 회복되기 위해서도 필연적인 예비단계이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열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차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있을 바에는 차라리 차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얼마나 신앙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고 돌이킬 가능성이라도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미지근하니까 돌이킬 가능성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돌이키지 않으면 내 입에서 너희를 토하여 내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교회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모든 것이 잘되어간다는 식으로 극심한 안일함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한국교회는 어떠합니까? 저는 단순한 종교적인 열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한 이사야 시대에도 수많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저는 그것을 지금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열망하는 열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배고픈 열망을 말합니다. 믿음이 사람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한 갈망을 말합니다.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원하는 그 갈망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사로잡히기를 원하는 열망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셔서 우리 존재 자체를 압도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고 우리 앞에서 원수를 파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그런 열정이 없으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축복과 종교적인 활동이 있어도 우리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될 수 밖에 없습니다.

4.영적 분별력이 어두워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는 철저하게 눈먼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영적분별력이 철저하게 어두워져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철저하게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너희는 가난하고 헐벗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무엇이 참된 부가 무엇인줄 몰랐으니까.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가 무엇인줄 몰랐으니까. 그런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참된 부인 줄로 알았으니까. 분별력이 가려진 상태에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옳은 것인 줄을 알지 못하니까. 자기가 무엇이 옳은 줄을 모르는데 어떻게 돌이킬 수 있겠어요.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그들은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벌거벗었다고 말씀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몰랐어요. 왜냐면 무엇이 참된 의의 행실인 줄 몰랐으니까.

19장을 보면 세마포가 의의 행실이라고 말하는데 무엇이 참된 의의 행실인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몰랐어요. 그들은 그들의 신앙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무리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 것으로 나머지는 종교적인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외부적인 것만 남는데, 프로그램만 남는데, 순서만 남는데. 그들은 분별력이 없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잘살게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진 상황에서는 올바른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무엇이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 의인지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아는 것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사역인지 거룩인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의식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성경적인 지식이 많아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도 몰랐습니다. ?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예배에 있어서도 참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철저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철저하게 걷히고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걷혀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좋은 옷 입고 와서 많은 수만 나와서 헌금하면 그 예배가 참된 예배인 것처럼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며 자부심이 가득하지만, 얼마나 눈이 멀어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시리즈를 살펴보면서 우리 현실이 얼마나 하나님이 의도하신 예배에서 벗어나 있을 줄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예배가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 예배가 회복되기를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나오기를 바랍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지고 하나님의 생명과 임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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