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7, 12-17 “7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 12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5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지난주부터 예배회복에 대해서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예배와 관련해서 우리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몇주 동안 예배회복의 필수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예배회복이 다른 회복의 기초라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배회복이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예배회복의 교회의 다른 회복의 원동력이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1.교회의 네 가지 기능
많은 학자들은 교회의 기능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눕니다. 십자가 모양을 그려서 만듭니다.
지난주부터 예배회복에 대해서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예배와 관련해서 우리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몇주 동안 예배회복의 필수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예배회복이 다른 회복의 기초라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배회복이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예배회복의 교회의 다른 회복의 원동력이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1.교회의 네 가지 기능
많은 학자들은 교회의 기능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눕니다. 십자가 모양을 그려서 만듭니다.
수직적인 면에서 아래서 위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
위에서 아래로는 양육 혹은 교육.
수평적으로 믿는 성도에 대해서는 교제.
안믿는 세상을 향해서는 전도.
이처럼 네 가지로 나눕니다.
위에서 아래로는 양육 혹은 교육.
수평적으로 믿는 성도에 대해서는 교제.
안믿는 세상을 향해서는 전도.
이처럼 네 가지로 나눕니다.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많은 학자들이 예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서 다른 기능을 섬길 수 있는 영적인 능력과 힘을 공급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기능을 다른 기능보다 우선적으로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섬김은 의무감에 의한 메마른 섬김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왜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섬기면서 많은 상처를 받고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을 가지고 거부감을 그 마음 속에 가득하고 사람에 대한 원망, 불신, 미움. 배신감이 가득하고 탈진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져야 그 예배를 통한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되어야 그 마음 속에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삶의 의미가 넘치게 됩니다.
제가 어제 주례하면서도 말했어요. 우리 인생의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만족과 삶의 의미 물론 남편도 소중하고 아내도 소중하고 가정도 소중하지만 왜 하나님 외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때 실망하는가? 어느 무엇도 하나님 자리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부터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기쁨과 감격이 샘솟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해서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고 주님을 향한 열정이 샘솟고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열망과 열정이 우리 속에 샘솟고 이런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다른 기능을 섬길 때에도 그 주를 향한 열정으로 섬길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도 상대방의 반응에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안식하고 인내하며 하나님이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섬김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모든 것들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섬김은 단순한 의무가 되어집니다.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대로 그런 결과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교회의 기능중에서 가장 우선적인 기능을 예배에 두는 것입니다. 이만큼 예배회복이 다른 모든 회복의 원동력입니다.
2.교회배회복의 길
그림을 봅시다. 교회가 회복되려면 중심에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의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회복과 부흥이라고 자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를 포함해서 모든 기능들이 절실하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회복되어야 성경에 약속된 말세지말에 있을 전 세계에 미치는 하나님의 부흥을 우리가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교회배회복의 길
그림을 봅시다. 교회가 회복되려면 중심에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의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회복과 부흥이라고 자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를 포함해서 모든 기능들이 절실하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회복되어야 성경에 약속된 말세지말에 있을 전 세계에 미치는 하나님의 부흥을 우리가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교회를 향해 부르짖고 있는 부르짖음과 음성도 회복과 부흥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의 놀라운 뒷받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를 섬길 때든지 선교회를 섬길 때든지 회복과 부흥에 관한 하나님의 일을 섬길 때 내 삶을 드릴 때 내 시간과 에너지를 드려 동참할 때 하나님이 강력하게 동참하시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회복과 부흥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는 길은 그림이 보여지는 것처럼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토대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중심에 놓았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고 교회 가운데 복음의 능력이 역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 개개인의 삶속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회복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님이 의도하신 어둠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능력있는 교회가 세워질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의 사역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두 개의 원을 겹치게 그려놓은 이유는 결혼식을 보면 두 개의 반지가 엉켜있지요.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처럼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온전한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온전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사도들의 사역과 초대교회의 삶 속에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삶 속에도 그런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가운데 아무리 큰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고 아무리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 교회가 십자가 복음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성령의 사역이 십자가의 복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 능력이 교회를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 능력은 교회를 분리시키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지라도 그가 십자가의 복음에 서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은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모든 은사가 부족함 없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지라도 그가 십자가의 복음에 서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은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모든 은사가 부족함 없이 나타났습니다.
고전1장 7절“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 은사는 부족함 없이 나타났는데 고린도교회는 영적으로 어린교회였고 육적인 교회였습니다.
고전3장 1-3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들은 은사가 부족함 없이 나타난 교회였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난 교회였습니다. 동시에 육적인 교회였고 지극히 어린 교회였습니다. 영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인본주의가 가득한 사람 중심적인 교회였습니다.
또 세상의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가 가진 문제를 하나하나 다루는 편지입니다. 거기 보면 시기 질투가 가득했고 음란 사술이 있었고 심지어 자기 의붓어머니와 사는 사람도 있었어요. 성찬식할 때 부자들은 미리 와서 실컷 먹고 취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뒤에 와서 먹을 것도 없는 세상적인 차별이 있었어요.
이런 죄악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병들었고 심지어 죽었는데도 그 사실도 모르고 있었어요. 이처럼 그들은 세상의 죄가 가득했어요. 심지어 그들의 이권다툼을 위해서 안믿는 재판장 앞에서 싸우면서 하나님의 명예를 떨어뜨렸어요. 이처럼 성령의 은사와 능력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4장 고후1-4장에서 집중적으로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어요. 그것이 해결책이니까요.
이와같이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의 조화로운 토대 위에서 예배회복, 중보기도의 활성화, 양육이 회복되고 리더십이 회복되고 사랑의 교제와 전도와 섬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의 토대 위에 네 방향의 모든 부분들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이 네 가지 모든 기능들이 회복되어야 교회가 건강하게 자랍니다. 네 부분이 다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가 균형을 잃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다른 모든 기능들을 회복되고 활성화 되었는데 전도가 회복되지 않으면 불구입니다. 꼭 예루살렘 교회와 같지요. 전도가 안되고 끼리끼리만 뭉쳐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핍박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온 세상에 흩었어요. 하나님이 핍박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으로 그들이 핍박 때문에 흩어져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증거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모든 부분이 다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만 해도 그렇지요. 우리가 리더들은 일주일에 세 번이상 참여하라 쓰라 하니까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중보기도로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지속적으로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중을 구하고 하나님의 의중이 있는 곳에 내 삶을 드리고 주님의 영광을 더욱 보기를 원하고 주님의 영광의 빛 앞에 비추어진 자신의 삶을 보고 돌이키기 원하고 특별히 주님으로 인해 내 삶의 목적과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 속에 주를 향한 열정이 없으면 절대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거기에 서야 합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예배회복을 추구했어요. 그런데 보세요. 아무리 귀하게 함께하셨어도 이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비전, 의중을 깨닫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빛 앞에 가려는 열정이 식어지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는 습관이 됩니다. 하나의 습관이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임재는 서서히 걷히게 됩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 만남은 줄어듭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은 껍데기만 남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귀한 일을 해오셨지만 지금 우리 가운데 더 회복되어야할 절실한 필요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살피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선명하게 비추어져서 감격해서 울었던 적이 언제입니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의중이 선명하게 비추어져서 그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내 삶을 그곳에 드리고자 했던 열망이 부어졌던 때가 언제입니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진 여러분 자신의 모습이 선명히 보여져셔 중심에서부터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주님 앞에 돌이켰던 때가 언제입니까? 이런 것이 없다면 지금 여러분의 예배는 심각한 상태에 처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배가 심각하게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있는데도 심각성도 인식하지 못하고 올바른 예배로 돌이키고자 하는 애통함도 없다면 여러분은 마음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자리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회복되어야할 절실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시면 예배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예배로 회복되도록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의중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내 자신의 삶이 비추어지는 자리로 나가기 위해서 주님 앞에 애통함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안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입니다.
3.구약의 성전회복을 통해서 본 예배회복의 중요성
오늘 이 부분을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의 성전회복을 보면 성전회복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회복을 위한 핵심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회복에 관한 기록은 예배회복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다른 회복을 위한 핵심이요 원동력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3.구약의 성전회복을 통해서 본 예배회복의 중요성
오늘 이 부분을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의 성전회복을 보면 성전회복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회복을 위한 핵심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회복에 관한 기록은 예배회복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다른 회복을 위한 핵심이요 원동력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더 나아가 그곳은 오늘날 진정한 성전인 개개인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 비전과 열망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보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공유해야할 비전과 열망입니다.
1)하나님은 성전의 회복을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으로 이해하십니다.
스가랴 1장 7절을 읽었어요.“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스가랴 선지자에게 다리오 왕 제2년에 임했습니다. 그때는 서기전 518년입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자 서기전 586년에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불탔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로 수많은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다가올 심판에 대해 예언하면서 동시에 70년만에 저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렘25장 11절에서 말합니다.“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렘29장 10절에서도 말합니다.“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70년이 차면 회복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당시 세계의 강대국인 바벨론에서 독립해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은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면서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서기전 538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합니다. 그리고 정복해서 본격적인 왕이 된 원년에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성전을 짓도록 칙령을 내립니다.
이사야에 예언된 대로입니다. 그것이 에스라 1:2-4 6:35절에 나옵니다. 그 결과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약 5만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 마자 성전짓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성전이 불타고 나라가 망한지 딱 48년된 해입니다. 그래서 성전 짓는 일을 시작해서 2년째에 성전의 기초가 놓입니다. 유다백성들이 기뻐합니다. 에스라서 3장 8-10절입니다. 이때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진지 정확하게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다백성들의 성공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어요. 그래서 성전짓는 일을 방해하고 또 아닥사스다 왕에게 고소합니다. 그래서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짓는 일을 금지시킵니다. 그래서 성전을 짓게 되면 반역입니다. 그래서 성전짓는 일이 중단되었습니다. 이렇게 15년 동안 중단이 됩니다.
그러던 중에 서기전 519년에 다리오왕이 즉위합니다. 그리고 2년에 서기전 518년에 하나님이 사가랴와 학개를 통해서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도 518년에 말씀한 내용입니다. 이때가 586년에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 없어졌으니까 그때부터 68년된 해입니다.
그때부터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스가랴 1장 7절을 읽었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12-17절을 봅시다. “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5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12-17절을 봅시다. “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5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기보면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온지가 정확하게 20년이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돌아와서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까지도 저들이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진노가 저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돌아온지 20년이나 되었는데. 그리고 70년이 되었다는 말 속에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70년만에 회복되라는 말씀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말입니다. 이미 외부적으로는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학개서와 스가랴서를 통해서 성전 짓는 일을 지시하십니다. 스갸랴서를 보면 그래요. 이는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 그러면서 너희 조상을 애굽에서부터 인도해냈던 성령이 너희와 함께한다. 두려워말라 담대하라고 명령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말씀을 따라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반대하던 사람들이 다시 들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다시 조서를 보냅니다. 이것은 반역행위입니다. 그러자 유다 백성들도 조서를 보내지요. 그러던 중에 다리오 왕이 선왕들이 내렸던 칙령들을 보고 있다가 고레스 왕이 내렸던 칙령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는 일을 허락합니다. 그 결과 성전짓는 일이 2년만이 완성됩니다.
그 2년이 서기전 516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진지 정확하게 70년만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입니다.
이 전체적인 것을 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성전의 회복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14절만 봐도 그럽니다. 성전이 아직 폐허로 남아있을 때, 그리고 돌아온지 2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진노 가운데 있다고 보시면서 14절에서 말합니다.
이 전체적인 것을 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성전의 회복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14절만 봐도 그럽니다. 성전이 아직 폐허로 남아있을 때, 그리고 돌아온지 2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진노 가운데 있다고 보시면서 14절에서 말합니다.
“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상태를 보면서 크게 질투하십니다. 그러면서 16-17절에서 말합니다.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상태를 보시고 하나님이 열심을 가지고 성전을 세우실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상태를 보시고.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성전의 회복의 관점에서 이해하십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있어 예배회복이 그처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우리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이 회복되어 있어도 예배가 회복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관점을 보셔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관점을 보아야 예배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2)하나님께서 돌아오시는 것과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이 회복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이해하십니까? 그 이유는 성전이 회복되는 것과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성전 건물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는 첫마디가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인데 내가 지은 이 집에 어떻게 하나님이 거하겠는가 합니다. 그리고 이 전을 향하여 우리가 기도하거든이라고 말합니다.
또 이사야 66장 1-2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예레미야서를 보아도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화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말처럼 이사야의 말처럼 정확하게 같습니다.
하나님은 건물에 관심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성전을 귀하게 여기셨습니까? 하나님이 그곳에 영광의 임재로 임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앞으로 자세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 가운데 운행하시기 위한 수단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성전의 회복을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으로 보는 관점에서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이것이 세워지는 것과 하나님이 그들에게 오셔서 거하시는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까 읽은 스가랴 1장 16절에서 말하지요.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예루살렘에 돌아왔는즉이라고 합니다.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라라고 합니다.
슥2장 10-13절입니다.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13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보세요. 왜 성전의 관점에서 이해하는가? 성전이 세워지는 것과 하나님이 그 가운데 오셔서 운행하는 일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이 오시면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보시면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열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하나님은 성전의 회복을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으로 보십니다. 왜? 하나님이 오셔서 그 가운데 운행하시는 것이 성전의 회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기를 원하시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열망이니까.
또 하나는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넘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스가랴 2장을 읽었는데 다시 한번 보세요. 10절을 보면 내가 와서 그 가운데 머물리라고 하셨어요. 그 결과가 11절을 보면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12절도 하나님이 오셔서 그들 가운데 임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땅에서 소유삼게 되고 택함받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까 1장에서 본문에 16절을 보면, 내가 불쌍히 여김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는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될 것이라고 했어요. 주님의 오신 결과 17절을 보면, 나의 성읍들이 다시 넘치도록 풍부할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며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이 넘칩니다.
여러분 이 부분에 대해 가장 잘 말해주는 부분이 스가랴 8장입니다. 8장 전체가 이 내용을 말합니다. 전체를 다 읽으면 좋을 것인데 1-9절, 21-23절을 읽겠습니다.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21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오셔서 성전에 거하시고 운행하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날 것이기 때문에 이방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러 하나님께 나와 그들이 구원받고 복을 얻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예배회복의 중요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중이며 의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성전의 관점에서 이해하십니다. 성전 건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머물며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과 만남 그들과 교제 뿐만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오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거기에 넘치게 됩니다. 여기에 교회회복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의하면 교회와 개개인의 성도가 하나님이 성전삼고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회복의 중요성, 교회회복의 중요성,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회복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예배회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4)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열망입니다. 아까 읽었던 슥8장 2-3절을 봅시다.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고 운행하시며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일을 위해 하나님은 질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가 얼마나 큰지 반복해서 말합니다. 심지어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질투는 하나님께 소중한 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을 말합니다. 이 질투에는 심판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질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예배 가운데 더 아가서 우리 삶 가운데 오셔서 운행하시며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망이며 비전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기를 열망하십니다. 하나님의 참된 성전인 우리가 오늘날 이런 하나님의 비전과 열망을 안다면 우리의 예배에 대한 교회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 목적과 의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과 의도를 우리가 안다면 그저 습관적으로 나와서 예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배가 하나님이 의도하는 예배가 되지 못한 것 때문에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예배회복의 중요성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예배회복이 교회의 다른 모든 회복을 위한 원동력인가를 보았습니다. 특히 구약의 성전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예배회복이 어떻게 모든 회복의 핵심이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배회복의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이고 비전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과 열정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예배가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예배회복과 더불어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고 생명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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