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8/2010

그대 선 자리는...


주인님의 사랑받는 아들 이삭을 위해, 가나안 땅에서, 주인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가야만 하는 그 광야 길은 멀고도 험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메마른 광야, 불 붙듯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사막의 햇볕은 모래를 핥으며 그 열기를 더해 마치 찜통처럼 후끈거린다. 쏟아져 내리는 햇볕을 가려 줄 것 하나 없는데, 낙타 등에 뎅그러니 올라앉은 늙은 종의 얼굴은 쏟아지는 불볕에 벌겋게 타들어가고 덴 자국은 화끈거리다 못해 쓰리고 따겁다. (그 옛날 무슨 썬스크린이나 챙 달린모자가  있었으랴.)

집을 나설 때 가지고 온 몇 통의 물마저도 그 많은 날을 광야에서 지나는 동안 약대 열 필과 함께 모두 마셔버리고 바닥이 난지 이미 오래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야 말겠다는 듯 이글거리는 햇볕에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건만, 물을 구할 수 있는 동네를 언제쯤이면 만나게 될지 아득하기만 하다. 늙은 종은 흐르는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터벅거리는 낙타 등에 올라앉아 꾸벅거리는데, 어느 듯, 광야의 붉은 바위산이 더욱 붉어진다 싶더니, 휘몰아치는 모랫바람이 해를 서산으로 폴작 밀어붙인 듯, 갑자기 주위가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털석 잠겨버린다.

광야의 밤기온은 낮과는 달리 무섭도록 춥다. 들판에 돌을 베개 삼고 누워 반짝이는 별들을 멀건히 바라보고 있자니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주머니에는 주인의 집 재산 중, 제일 좋은 것들, 금 은보화가 그득하다. 이것만 가지면 어디에 가서도 한평생 잘 먹고 잘 지낼 수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 보석을 가지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다면 하는 유혹도 들었지만, 주인의 그 신임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천신만고 끝에 주인님의 고향인 나홀 성에 닿았다. 나홀 성에 도착하긴 했는데, 이제 어딜 가야 주인님의 친척을 만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기막히다. 성 밖 우물 곁에 낙타를 꿇어 앉혀놓고 맥없이 앉았자니 주인님이 다급할 때면 언제나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그리고 여차여차히 해주십사 빌었다.

기도가 끝나자 그 기도대로 한 소녀가 물을 길으려 동이를 들고 나오는데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따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소녀가 그의 기도 한 그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주인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란 것이다. 그 소녀에게 건넨, 금고리와 금손목고리를 증표로 보게 된 소녀의 가족은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그 늙은 종을 믿고 맡긴다. 늙은 종은, 엄청나게 많은 보석과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낙타 열 필과 함께 광야 길을 지나 주인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광야 길, 천하절색(天下絶色)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모든 금은보화를 훔쳐서 달아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충성했고, 수많은 날들과 밤을 광야에서 그토록 아릿따운 소녀와 함께 지내야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눈동자처럼 잘 지키고 보호하여 끝내 주인 집 아들 이삭에게 정결한 신부로서 무사히 넘겨주었다. 이 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창 24장,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의 이야기이다.

이쯤해서, 우리에게 그 어떤 느낌이 오지 않는가? 이 정도에서 우리는 그 어떤 느낌이 와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그 주인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 자신의 설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것이 그가 종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그는 분명히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주인의 진실한 종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대거나, 자기 눈에 보기 좋다 하여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취하려고 하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과연 어떤 자리인가? 우리가 선 이 자리는 바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서 있는 영광의 자리이다! 주인 아들의 신부감을 데리고 와야하는 사명이 종에게 주어졌다는 뜻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영적으로 현대 우리들, 성도들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 행하여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모두 자기가 설 자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리라. 자기가 설 자리를 모르는 사람은 사명을 망각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신분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도덕적이고 정직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공인으로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에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를 무리하게 지키고 있다가 그 시기를 놓치고 자기 의사와 반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도 허다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 후세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반대로 깨끗이 물러나야 할 자리를 내어놓지 못하고 그 자리를 연연하여 더 있겠다 고집하다가 강제로 쫓겨나는 어리석은 폐단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뿐이랴, 맡겨진 양떼를 잘 목양하고 기르는 대신, 학대하고 발로 차서 쫓아 내기도 하고, 그 양떼 중에서 토실토실 살찌고 마음에 드는 양이 있으면 염치도 없이 잡아먹어버리기도 한다. 자신이 주인이요, 자기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비록 종이긴 하나 우리가 선 자리는 종으로서만이 아닌, 주인을 대신하는 자리란 점, 이런 우리들에게는 자율성과 타율성이 함께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창조주)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너무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율성은 언젠가는 거두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주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목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원수들로부터 심하게 훼방을 받고 있다. 현대 기독교가 x독 교라고까지 손가락질 받고, 모든 교회, 그 자체가 잘못된 듯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드높고, 교회의 존속 그 자체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도 다른 이들로부터가 아닌, 우리들 내부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크고, 자중지란 (自中之亂),  좌충우돌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설 자리를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고 해도 그 선 자리의 귀중 성을 망각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남용하는 악한 종들에 의해서 비롯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 아멘넷에도 한 젊은 목사님이 자신이 당한 불이익과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보는 많은 독자들의 의견이 설왕설래이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는 필자는 가슴이 아프다 못해 쓰리다. 누가 저토록 순수한 한 젊은 목사님을 저렇게까지 몰아갔다는 말인가? 그 원인제공자가 미워지려고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된데는 그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원인 제공자들끼리 믿음으로, 기도로, 사랑으로, 대화로, 서로 아름다운 해결을 보아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 “너희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절 말씀)."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절 말씀).”말씀하고 계신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실천실행해야 할 때이다. 선(善)은 무엇을 상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빛이 어두움을 상대해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빛은 빛의 선 자리를 굳게 지키기만 하면, 어둠은 그 빛 앞에서 맥없이 물러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상대해서 싸우지 않는다. 사랑은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힘이 없어서 잠잠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돌이켜 회개하기 원하셔서 오래도록 참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벧후 3:10절 하 참조)
그대가 선 자리는 만왕의 왕을 대신하는 자리다. 왕의 이름에 합당한 예절과 품위로 그 이름을 명예롭게 빛내야 하리라. 내가 행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왕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실추시키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왕께 부끄러움을 끼칠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하고, 내가 지금 비록, 조금 어렵고 힘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신임하여 내게 직분을 맡기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자리에 굳게 서 있는 것인지…되돌아 보아야 한다.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금 그대 선 자리는 왕을 대신한 거룩한 자리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리라…

"아무 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 17-21절 말씀)."


별똥별/최송연

지식 속에 갇힌 믿음


인도의 성자라 불리우며 사상가이자 민족 운동 지도자였고, 위대한 정치인이었던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 그는 인종 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 자기실현을 위한 인격 수양, 무저항, 이 세 가지를 가르치며 진리 구현을 평생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인도의 문호 ‘타고르’는 그런 그를 가리켜서 ‘마하트마’라 불렀습니다. ‘마하트마’란 이름이 아니라,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서 간디의 호칭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아는 간디입니다.

이런 그가 매일의 일상에서 예수님의 산상 보훈을 읽고 묵상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회자 되고 있습니다. 간디가 그렇게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란 칭호를 들을 만큼 성숙한 인격을 소유하게 된 동기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인 산상 보훈을 매일 같이 읽고 그의 삶에 적용시켰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한 기자가 찾아가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대답은 “No!”였습니다. 그 이유로는 “자신이 만난 크리스쳔들의 행위가 그 말씀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위선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먼저 믿는 우리들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만약 진정한 크리스쳔으로 개종 되었더라면, 지금의 인도는 그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영어에서 말하는 know 와 knowledge의 차이를 잠시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know는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 하며 knowledge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요17: 3절 말씀)”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know’입니다. 그러니까,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뜻은 하나로 합해진다 그런 뜻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영생을 얻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믿는다는 것이 막연한 어떤 추상적 개념이나, 지식적(Knowledge)으로,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 이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속에서 만나고 체험으로 아는 상태, 이 상태가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 똑같이 사도 바울처럼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요1: 1). 이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실히 알고(know), 가슴으로부터 확실히 믿어져야 합니다.

지식(knowledge)은 벽(wall)과 같습니다. 벽이란 적당히 높으면 자기 방어에도 도움되고, 바깥세상도 내다볼 수 있어 좋지만, 그 벽이 너무 높으면 역으로 자신이 그 벽 속에 갇혀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바깥세상을 내다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종교적 지식의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벽 속에 갇혀 버리게 되고, 그런 사람은 더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게 되는 우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몰라서 실패를 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성경 지식(knowledge)은 가졌으나 그 말씀(율법)도, 그 하나님도 가슴으로 알지(know)도, 믿지도 않았기에 문제가 되었습니다(막7:6절 참조). 사도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적으로 알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미 지식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 말씀에 대해서 너무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종교 지도자였지만,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자리에 기꺼이 합류했던 것입니다. 체험 없이 지식으로만 아는 종교인은 최악의 경우 살인까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무서운 대목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벽 속에 갇힌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지식 속에 갇힌 믿음이란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이 열심을 내면 낼수록 주위는 더 황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성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도 많고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이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상태, 가슴 속에 참 빛을 품지 않은 상태에서 빛의 아들의 삶을 살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는 종교적 열심은 자칫 위선으로 포장하기 때문에 그만큼 문제가 더 커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라 자처하기 전에,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는(know)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Arthur Burns라는 경제학자는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워싱턴 DC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었고,1970년대에는Fed Chairman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유태인이었던 그에게어느 정치인들의 모임에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그 자리에 앉은 참석자들을 엄청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여기에 옮겨 봅니다.
Lord, I pray that Jew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주님, 유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And I pray that Buddhist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주님, 불교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And I pray that Muslim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주님, 무슬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And Lord, I pray that Christians would come to know Jesus Christ.
그리고 주님,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번역/최송연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절 말씀).”

별똥별/최송연 

죄책감․마귀․우리2

적자 마귀는 우리를 정죄한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過去)에 사로잡혀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절망에 빠뜨린다.
마귀가 우리를 정죄하는 모든 근거는 예수님으로 인해 무너졌다.
마귀는 과거를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참소하지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모든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는 자유할 수 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참소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의 허물을 들추어낸다.
마귀는 밤낮으로 우리를 참소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도록 온갖 궤계를 부리고 있다.
마귀는 비난과 정죄를 통해서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만든다.
마귀는 쉬지 않고 우리를 욕하고 참소한다.
마귀는 양심의 소리를 가장한 참소로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착각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게 만든다.
마귀는 예수님의 피로 해방된 우리를 죄의 쇠사슬 아래로 끌고 가서 묶어놓고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 속에 시달리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가 범한 죄를 들추어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한 모든 죄(罪)를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고백하지 못하게 하거나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 계속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고 열등의식, 좌절감, 죄책감을 갖게 한다.
마귀는 우리를 불구로 만들기 위해 즐겨 쓰는 무기는 고소(告訴)와 정죄와 수치감, 질병과 자포자기이다.
마귀는 우리를 비방하고, 중상하고, 헐뜯는다.
마귀는 우리를 속여서 죄악과 가책 속에 빠뜨린다.
마귀는 우리를 죄짓게 하며, 또 우리를 정죄한다. 이러한 정죄(定罪)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믿음으로 극복 할 수 있다.
마귀는 우리를 중상모략하고 헐뜯는다.
마귀는 우리를 참소하는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마귀는 우리를 참소하여 우리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상상하게 하며, 우리로 마귀와 전쟁할 위치를 상실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한다.
마귀는 우리를 참소한다. 우리를 참소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滅亡)시킬 뿐 아니라, 좌절케 하고 파멸되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에게 실패를 기억하게 하고, 죄책감에 빠지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에게 정죄의식과 불안과 근심을 준다.
마귀는 우리에게 죄를 지적한다. 우리를 조롱하고 참소하며 정죄한다.
마귀는 우리에게 죄책감을 주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에게 지난날의 실수와 잘못을 계속 기억나도록 하여 송사하고 참소한다.
마귀는 우리의 못난 것, 우리가 회개(悔改)한 죄를 생각나게 하고 정죄(定罪)하고 참소하여 비참하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의 죄를 일깨움으로 우리를 무기력(無氣力)하게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참소함으로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한다.
마귀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들추어 참소하고 음해하고 고소하는 일을 하며 거짓말을 만들어서 우리를 죽이고 매장시키는 일을 한다.
마귀는 죄 지은 우리를 고소하여 절망감을 느끼게 만든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하며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비방한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뿐 아니라, 우리 속에서 우리를 참소한다.
마귀는 항상 우리를 참소하여,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유혹하고 죄짓고 넘어지게 만든다.
마귀로부터 오는 죄책감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우리의 사악함과 부족함을 고백할 때 주변의 분위기가 우울하고 침침해진다.
마귀의 참소가 아무리 격렬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에서 마귀의 궤계와 참소를 격파시키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할 수 있다.
마귀의 참소는 모든 거짓말을 동원하여 우리를 헐뜯고 용서받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것처럼 꾸며 우리를 망하게 만든다.
참소는 마귀의 가장 흉악하고 효력 있는 무기이다. 우리가 마귀의 참소(讒訴)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넘어진다.

제공 : 김광선
2010년 10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