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2010

성령으로 회개한 자들의 특징 ㅡ 조셉 얼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돌이켜(회개, 회심)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 : 3 ) , 누구든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 없다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요한3 : 3, 마태7 : 21 )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르시기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령(하나님, 예수님 또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고 성령으로 회개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이루어진 회개가 참된 회개이고, 진정한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참된 회개가 전제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는 머리나 지식으로 하나님을 믿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의 감동으로 참된 회개를 하고 진정으로 믿게됩니다.

, 회개는 전정한 믿음의 첫 발걸음입니다. 따라서, 참된 회개가 없는 믿음은 앵무새처럼 "나는 믿습니다"라고 반복적으로 외치는 신앙고백과 흡사합니다. 이들은 고난과 환난이 닥치면 곧바로 믿음을 저버리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변화 됩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을때 비로서 영적으로 눈이 뜨이게 되면서 복음 말씀이 꿀처럼 달고 깨달아지며, 자신의 본성이 심히 부패해 있음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이 온전히 예수님께로 돌아서면서 마음과 행동의 철저한 변화를 일으켜 주님 뜻대로 행함을 실천하는 삶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베푸신 두가지 큰 은혜는 바로 "회개와 믿음"입니다. 이 둘은 성도가 하나님 나라로 날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두 날개입니다. 성도는 회개와 믿음이란 양 날개를 달고 성령의 엔진으로 힘과 능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해 결코 쉬지않고 날아가야 마침내 천국문으로 입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디도서 3 5절에 의하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의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 주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여 죄 씻김을 받게하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없게 하여 마침내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회개의 은혜"는 예수님의 공로와 중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모든 고통은 죄인이었던 우리를 새롭게 낳으시려는 해산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겠습니까 ? 예수님은 삼위일체 성자 하나님으로써 우주 만물의 창조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본체 하나님이시나, 인간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위에 오신 우리의 구원자, 즉 구세주이시며 만인의 심판주이십니다. 바로 그 분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스스로 대속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바로 "당신", "나의 죄" 때문에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분의 십자가 보혈의 피 공로에 의지해서 진실로 회개하고 그 분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모든 공로가 다 헛것이 됩니다.왜냐하면,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회개란 모든 믿음의 크리스천들에게는 반드시 절체절명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17세기 유럽의 대각성 목회자였던 조셉 얼라인이 들려주는 "성령으로 회개한 자들의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으로 회개한 자들의 특징 -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고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고 마음과 행동의 철저한 변화를 일으켜 새 사람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취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세상적인 관심사보다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에 더 비중을 두게 합니다. 회개는 사람을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게 만듭니다. 그리하여,전에는 죄를 짓고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으나, 이제는 죄가 모든 악의 주범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죄라면 진절머리 나고 죄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며 죄가 혐오스럽고 저주스럽게 느껴집니다. 심지어 죄를 짓는 자신을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죄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항상 살피고 죄짓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전에는 스스로 무결하고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자신의 본성이 심히 부패해 있고 전체가 절망적으로 오염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를 정결케 하시고 나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내 속에 정결한 마음을 갖도록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전에는 자기의 처지에서 아무런 위험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자기가 상실된 사람이며, 은혜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지 아니하면 자신은 결국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임을 깨닫습니다.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흠모할 만한 아무런 것도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예수님을 자기가 찾는 진주, 감춰진 보화로 여깁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자기의 전부 입니다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그 분을 진정으로 더 사랑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세상 것들에 미련을 두거나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섬기고 그 분께 영광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매사에 순종하며 억지로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그분께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들을 굴레로 생각하지 않고 유업으로 생각 합니다. 그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멜뿐 아니라 이를 스스로 원합니다그는 거룩한 생활을 좋아하고 거룩함을 실천하는 것이 그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그의 가장 큰 욕구는 은혜입니다. 그는 은혜를 목말라 하고 위대해 지기 보다는 은혜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것을 기뻐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교인들과 교제를 나누고 그들이 번영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전에는 세상에 몰두하다가 시간이 남아야 자기 영혼을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이제는 자기 영혼을 구하는 것이 큰 관심사가 됩니다. 전에는 재산이나 명성같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까봐 두려워 합니다. 하나님이 등돌릴때 가장 슬퍼하고 예수님과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괴로워 못견딥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 증오심을 갖고 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과거에 그는 한때 죄 속에서 살고 쾌락을 즐겼지만, 이제 그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생각만 해도 심히 메스꺼움을 느낍니다. 전에는 육체가 죄의 도구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성전이 됩니다이제 그는 거룩함과 영예, 절제와 정절, 그리고 근신함을 간직하며 주님께 온전히 드립니다.

전에는 사탄 마귀의 소리에 열려 있었고 부도덕한 말로 시시덕 거리며 남을 즐겨 판단했지만, 이제는 마음과 행동과 말을 항상 조심합니다전에는 세상적인 계획으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의 생각과 관심은 온통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에서 떠날 것인가에 몰두 합니다전에는 마음이 더러운 정욕의 소굴이었지만, 이제는 향기로운 제단으로 바뀌었습니다거기서 항상 거룩한 사랑의 불이 타오르고 매일 기도와 찬미를 드리며 감사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립니다.

전에는 그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었으나, 이제는 거룩하고 순결한 숨결을 내뿜습니다이제 그의 입은 지혜를 내고, 그의 혀는 하나님의 덕과 영광을 찬미하는 금나팔입니다그는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철저하게 변환된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는 선한행위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매사에 정직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양심을 가집니다.  성령으로 회개한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죄에 항거합니다. 죄와 투쟁하고 날마다 죄와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는 동안 때로는 죄에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죄와 타협하지도 않고 죄를 대적하며 성령의 능령으로 죄를 이기고 이기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날마다 알고 모르게 짓는 죄를 진심으로 회개합니다습관적인 죄는 모두 다 끊어버리고 죄에 대해서 만큼은 무자비하며 반드시 그 끝을 보고야 맙니다. 죄짓지 않는 고귀한  삶을 추구합니다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세상의 즐거움들을 헛되고 귀찮은 것들로 여기며, 인간의 모든 탁월한 것들을 쓰레기와 배설물로 간주합니다.

그는 은혜를 갈망하며 썩지않을 면류관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기로 온 마음을 다해 정합니다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생명과 불멸의 영생을 추구합니다전에는 세상에 끌려다니며 돈과 명예를 중요시했지만, 이제는 예수님만을 바라 보며 좁은 문, 좁은 길로 기꺼히 나아 갑니다. 또한,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자리에 둡니다전에는 예수님을 쓰레기 더미 옆에 놓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자기 앞에 내세웁니다전에는 자기 멋대로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면서 그 분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 뜻대로 행함을 실천합니다.

삶 속에서 자신의 자랑은 생각지도 않고 오로지 주님의 영광과 영화만을 사모합니다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자신의 공로감에서 돌이킵니다전에는 자기를 신뢰하며, 자기 의를 세우고, 돈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치 아니했으나, 이제는 자기의 의를 냄새나는 누더기로 여기고 오물통에 벗어 던져 버립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의로 덧입혀지기를 간구합니다이제 그는 심령이 가난하고 비천하며 불쌍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의에 높은 가치를 두기 시작합니다. 매사에 자기를 의롭게 해 주시고 거룩하게 해 주실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이제 그는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 분 없이는 한 순간도 숨을 못쉬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항상 그 분께 꼭 달라붙어 있고 싶어하며 늘 그 분과 함께 호흡하기를 갈망합니다.  이제 그는 자기를 낮추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 소리높여 기쁨의 복음을 전합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해서, 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 사람이 위의 내용과 같이 변화될려면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과 의지로 회개(회심) 할려고 하면 양심의 가책으로 죄를 단지 후회하거나 뉘우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저지릅니다.

위의 내용과 같이 우리가 철저히 변화 될려면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우리는 성령으로 참된 회개를 하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어서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도록 이끄시어야 우리가 새 사람으로 철저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영으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서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수전제 조건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과 의지를 믿고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만하거나 교만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아무런 은혜도 베풀지 않습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절대로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면 예수님께서 각 사람의 자질, 기질과 삶의 방식에 따라 적당한 때와 시기에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찾고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우리의 머리털 숫자까지 다 아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주여 주여, 예수님 예수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회개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반드시 예수님이 당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인내 또한 필요함을 잊지 마십시요.

아멘 주 예수여 우리에게 임하시어 우리 모두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 주소서.

거룩한 땅 : 거룩하게 되는 유일한 길(Holy Ground : The Only Way to Become Holy!) By David Wilkerson

구약은 신약에 드러난 진리의 그림자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신약의 진리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구약의 예시를 돌아봅니다. 사실 저는 신약을 믿는 이들을 위한 꼭 맞는 진리로 가득 차지 않은 구약의 이야기나 사건은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이셨던 저의 할아버지는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데이빗, 인격에 대해 가르치고자 한다면 구약을 보거라. 인격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거기 있거든." 저는 그가 옳았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예가 되는 것이 불타는 떨기나무 가의 모세에 관한 구절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다소 깊이 조사해보고 싶습니다. 그 구절이 거룩이라는 주제에 관한 심오한 신약의 진리로 가득 차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하게 되는가?"라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신약에 의하면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도록 지음을 받았다고 쓰여지고 기록되었고 영원히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4) 바울은 "창조 시부터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이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고전 1:2) 여기에 쓰인 "성도"라는 뜻의 그리스어는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거룩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 4:7)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 천국, 죄 용서를 받으라고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부르신 진실한 부르심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것- 의 유익한 점들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 한 사람 한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도록 즉 하나님 보시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약 거듭났다면 거룩은 반드시 여러분의 마음의 외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예수님처럼 거룩해지기 원합니다. 저는 제 평생 동안 당신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 신약의 말씀들을 읽을 때 여러분은 놀랄지도 모릅니다. "제가 예수님처럼 거룩해져야 한다고요? 불가능해요! 그분은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완벽한 분이셨어요. 어떤 사람이 그 수준에 맞게 살 수 있겠어요? 게다가 성경도 이르기를 '주밖에는 거룩한 이가 없다'고 쓰여 있지 않나요?" 그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의 기준에 다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의지력이 강하고 힘과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밖에 거룩한 이가 없다면 우리가 거룩해 질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의 거룩하심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로마서 11:16) 바울은 뿌리이신 예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가지인 우리도 또한 거룩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기록하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한복음 15:5)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거룩하심의 공로로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만을 거룩하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야에는 역사를 통틀어 두 명의 대표적인 사람들만 존재해 왔습니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의 아담이요 둘째는 둘째 아담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전 인류는 첫째 아담에 휩싸였습니다. 그가 범죄 했을 때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새로운 인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분의 순종을 통해 모든 인류는 잠정적으로 그분 안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이 한 사람 예수님만을 거룩하다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정 거룩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부터 멀어진 아담과 같이 우리는 결코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한다고 해도 아무리 자주 성경말씀을 읽는다 해도 아무리 많은 정욕을 다스린다 해도 우리는 결코 완전히 거룩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못했다면, 단 한 번의 악한 생각을 했다면 우리는 전 율법을 범한 것이 될 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은 뛰어나십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아들이셨다면 그 사람은 분명 그리스도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다른 사람을 인식하지 않으십니다. (감사하게도 그분의 그러한 성품은 우리의 "옛사람", 우리 안에 죽은 죄인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공로나 자격 없이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그것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비밀스런 골방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주님, 그리스도 외에는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가져올 것, 나 자신의 공로도 거룩함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당신께 나아옵니다. 나는 주님의 거룩하심을 구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당신 앞에 죄 없이 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흠 없고 거룩한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한 몸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몸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분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의 일부로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로마서 12:5)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무덤에서 새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때부터 회개하고 이 새사람을 믿는 모든 자들은 그분 안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 뿐 아니요 여럿이라"(고린도전서 12:13-14) 흑인, 백인, 황색인, 유대인, 회교도 또는 이방인은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몸에서 났습니다. 한 새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간은 더 이상 율법이나 계명을 지킴으로 거룩해 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행, 의로운 행위 그리고 인간의 노력이나 육체의 열심으로 인간은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에베소서 2:15-16)
 
하나님 아버지는 단 한 사람만을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새로운, 부활한 사람 말입니다! 그리고 이 새사람이 아버지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을 올려드렸을 때 아버지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나는 너희 모두를 거룩하다고 인정한다. 너희들이 거룩한 내 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1:6) 게다가 우리는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1:10, 13)

그러므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거룩은 우리가 행하거나 획득하거나 차차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이란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가지고 그분 안에 머무를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다 인정하십니다. 거룩으로 인도하는 길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을까를 갈망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갈급한 외침에 대한 하나님의 훌륭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을 의지할 때에만 우리는 거룩합니다! 우리의 거룩은 그분의 거룩입니다. 그 거룩은 뿌리로부터 가지인 우리에게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거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교회가 항상 그대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사람들은 거룩을 외적인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목사였던 나의 할아버지가 좋은 예가 되십니다. 그는 초기 거룩운동이 있던 때 나자렛 교파의 목사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자에 새의 깃털을 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작은 금으로 된 가위를 늘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제단 앞에 나와 고개를 숙이면 그 깃털을 싹둑 잘라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담배를 씹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는 금기사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심지어 강대상 옆에 조그만 통을 놓고는 설교를 하다가도 고개를 돌려 담배를 씹으면 나온 즙을 뱃어내곤 했습니다.
 
립스틱을 바른 여자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설교를 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거룩'교파의 목사들은 화장을 하거나 어떤 특정한 종류의 옷을 입거나 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들을 꾸짖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거룩의 문제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 목사들은 그 누구보다도 악한 험담꾼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시는 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매우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외적인 인간을 다루실 것입니다. 검소하게 그리고 단정하게 꾸밀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회개를 통해서 그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는 법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서 있는 모세의 이야기 구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이 이야기를 읽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상한 광경에 모세가 그의 모든 신경을 빼앗겼을 때 모세는 장인의 양을 치면서 호렙산에 완전히 혼자 있었습니다. 떨기나무가 환하게 타고 있었습니다. 그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음에도 그것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더 가까이 가서 자세히 관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 발을 내디뎠을 때 하나님께서 그 덤불 속에서 그에게 외치셨습니다.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출애굽기 3:3-4)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나무가 타고 있었지만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시각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정말로 어느 곳이든 그분이 계시면 그곳은 거룩합니다. 그때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우리 대부분은 이 구절의 엄청나게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구절을 넘어가 버립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 "네 신을 벗으라"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수많은 상반되는 견해를 들어왔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너의 자존심을 버리라"는 뜻이라 하고 다른 사람들은 "너의 오만함을 버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이 구절이 이러한 두 가지 견해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분명 오늘 메시지의 주제 즉 거룩해지는 법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즉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는 부르심을 지금 받으려고 하는 순간에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어떠한 땅, 기초 위에서 하나님께 접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땅이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는 교제가운데로 부르심을 받고 있었으며 그는 그것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을 때 두려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6)
 
그러나 성경은 이 사람이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모세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그를 하나님의 존전에서 두려워 얼굴을 숨겼던 사람에서 자유롭게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후 얼굴이 밝게 빛났던 사람으로 변화시켰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접근해야하는 바로 그 땅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과 일치하는 신약의 진리는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신약의 진리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세 시대에도 진리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지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철저하게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보다 의지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내게 다가올 수 있는 유일한 땅이 있다. 그것은 거룩한 땅이다. 너희는 너희 육체를 믿지 말아라. 나의 존전 앞에 설 육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 하나님은 이 이야기에서 신발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 걸까요? 그것이 육체를 제어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의 발은 우리 신체의 가장 예민한 부분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발을 보호하는 것 외에 신발을 쓸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발은 우리를 폭풍우, , 뱀 그리고 오물과 흙, 뜨거운 포장된 도로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나중에 동전, 진주, 낙타, 겨자씨 등을 사용하시며 가르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너의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복을 입고 있다. 그러나 내가 너를 보내려고 하는 곳에서는 아무리 네가 육적으로 방어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너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너는 구원의 기적을 필요로 할 것이다." "나는 너를 죄의 소굴 애굽으로 보내겠다. 너는 마음이 굳어진 독재자와 맞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오로지 나만이 구원할 수 있는 상황가운데 놓여지게 될 것이다. 네가 너의 모든 육체를 의뢰하는 것, 너의 온유함, 열망, 겸손 등을 버리지 아니하면 너는 내가 너를 불러 시키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거룩하게 하지 않는 한 너의 모든 능력은 소용없는 것이 될 것이다. 너는 완전히 나의 이름과 능력만을 신뢰해야 할 것이다."
 
정말로 모세는 각종 시험과 고난을 겪을 것이었습니다. 그는 약 3백만 명의 사람들을 식품점도, 백화점도 심지어는 샘물도 없는 사막으로 인도할 것이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해야만 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가 이미 육체의 힘으로 구원자가 되려고 했었던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40년 전 그는 손에 칼을 들고 노예들을 학대하는 잔학한 이집트인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야, 너의 열정은 거룩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그 열정으로 너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제 기꺼이 너의 칼을 내려놓고 나의 칼을 신뢰하겠느냐? 이제 너의 능과 힘으로 구원자가 되려고 하는 모든 너의 희망을 버리겠느냐? 내 뜻을 행하겠다는 네 육체의 모든 자신감을 버리겠느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은 완전히 하늘에 속한 것이며 모든 인간의 힘으로 성취함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누구도 우리 자신의 힘이나 의지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시는 거룩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룩해지는데는 단 하나의 길밖에 없으며 그리스도인의 예배가운데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는 하나의 원칙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다가가 말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드릴게 없습니다. 당신께서 그 모든 것을 행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정욕과 악한 열망으로부터 자유하면서 여전히 거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훌륭한 사람, 사랑스러운 배우자, 곧고 정직한 사람이면서도 여전히 거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리어 이러한 모든 인간의 선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쓰레기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만약 나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한다면 나는 거룩하게 살 수 있을거야" 그래서 우리는 손에 칼을 듭니다. 의지의 칼, 약속의 칼, 선한 의도의 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리를 얻으려고 우리 마음에 있는 적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자기 의의 기초 위에서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육체의 신은 벗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내가 아주 싫어하는 복음성가를 불렀습니다. 그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를 용서하소서 주님,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소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사는 신학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그렇게 큰 위험가운데 처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만일 그런 시행착오에 달려있다면 우리들 중 아무도 천국에 이를 자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모세가 직면했던 바로 그 떨기나무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거룩한 것으로 가장하여 하나님의 존전 앞에 가져오는 모든 육체적인 것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불같은 열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런 육체적인 땅위에서, 육체적인 기반을 가지고 내 앞에 설 수 없다. 거룩한 땅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아들과 십자가에서의 그의 공로를 믿는 믿음이다."
 
이것이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구원하시고 화목케 하셨던 유일한 길입니다. 만약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면 몇몇의 수만이 구원을 위한 후보로 선택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무제한적인 속죄의 원리를 믿습니다. 조지 오웬과 같이 내가 좋아하는 많은 청교도 작가들은 저와 반대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원리에 따르면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그의 나라를 위해 택하시고 모든 다른 사람들은 저주를 받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가르침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도리어 저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공로를 통하여 전 세계는 잠재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드는 자, 회개하는 자, 그리고 믿음으로 돌이키는 자마다 그 안에 거하고 그의 몸의 일부와 지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중 가장 악한 자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장 악한 절도자, 강간범, 살인자, 마약중독자 또는 알콜중독자들 등 선한 행위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을 보고도 "회개와 믿음으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행위가 충분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심판의 날에 그들은 육체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서서 말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한 모든 일을 보십시오, 주님. 나는 언제나 깨끗하고 거룩하기 위해 수고해 왔습니다. 나는 예언하였고, 가난한 자를 먹였으며, 병든 자를 고쳐주었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를 알지 못하노라. 너는 올바른 땅위에 서 있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결코 너의 신발을 벗고 육체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너는 이러한 일 중 어느 것도 나의 성령의 힘으로 행하지 않았다. 너는 그 모든 것을 네 힘으로 행하였다. 그러한 것들은 내 코에는 악취와 같은 것이다. 나는 단 한 사람 내 아들의 의만을 인정한다. 네 안에는 나의 아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없구나. 너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 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0-31)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어떤 사람도 내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겠다. 그들은 매일 그들의 지혜와 의와 거룩이 되는 나의 아들을 통해서만 나를 영화롭게 하고 자랑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데는 하나의 근거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하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의 구원의 능력을 신뢰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능력을 언제나 유지하고 계신다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삶과 일치하도록 만드실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지키실 것이라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고 악한 행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겼습니다. 그래서 그분과의 관계를 바로 잡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선한 일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믿음으로, "네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가 거룩한 것처럼 너도 거룩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의 거룩 가운데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믿음의 행보에 합당한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믿음의 행보를 걷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그렇게 행하기 위해서도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게 하시는 성령을 주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1:21-23)
 
"만일 여러분이 믿음에 굳게 서서..."라는 구절에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나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기만 하거라. 나는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깨끗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능력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육체의 행실을 억제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실 때 그분의 확신과 위로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 말입니다.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그분보다 더 거룩할" 수 없습니다. 거룩에는 급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아기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여러분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기준에 의해 측정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의 거룩은 똑같이 우리의 거룩이 됩니다. 결코 다른 그리스도인 리더나 평신도를 보고 "아 나도 저사람 처럼 거룩해졌으면 좋겠어."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사람들이 받았던 훈련을 못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과 같은 기도생활을 하고 있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는데도 더 많은 실수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하나님께 그 사람들과 똑같이 인정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여러분보다 더 사랑스러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을 벗으십시오. 육체를 신뢰하기를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땅은 이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 나는 그 분의 몸의 지체요 일부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께서 나를 거룩하게 보신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와 마귀의 미혹을 분별하라

주님을 구주로 믿으면서 마음이 새롭게 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며 그 일하시는 방법이 어떠한지를 바르게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크리스천들이 마귀의 미혹인줄 분별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성령의 은혜인줄 착각하여 자기도 멸망에 빠지지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더불어 미혹을 받게 만들어 버린다. 성도들의 신앙과 삶 속에서 나타나고 이루어지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마귀의 미혹을 분별하여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령님은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시지만, 반면에 마귀들은 제한된 피조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지식과 지능이 인간에 비하면 훨씬 우수하다 할지라도 역시 제한된 것에 불과하다.
 
둘째, 성령님은 성도의 개성을 존중하셔서 어떤 식으로든 개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려 하시지 않으나, 반면에 마귀들은 개인의 인격을 강탈하여 자기의 인격으로 바꿔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귀신들림의 전형적인 방법이 신을 받아야만 네가 부자 되고 가정이 편안하고 건강해지며 너희 자녀가 잘된다고 말하지만, 무당과 점치는 자의 가정이 잘되는 법이 없고 또한 그 자녀들까지 참으로 비참한 지경에 빠져 귀신의 대물림으로 살아야 할 정도로 귀신이 그 집안을 장악한다.
 
셋째, 성령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관리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길 원 하신다.그분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 ) 반면에 마귀들은 통제를 원한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통제하여 이용한다.
 
넷째, 성령님은 온화한 분이시다. 성령은 온유하시며 겸손한 분이시기에 성령을 충만히 받은 자의 모습 또한 온화하며 겸손하지만 반면에 마귀들은 매우 거칠다. 자신들이 점거한 사람들의 모든 것을 탈취하려는 마귀들의 욕망 때문에 누구라도 조금만 살펴보면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대체로 마귀들은 점령한 사람의 생각 속에 자기를 따르면 좋을 것이라는 어떤 "상담자" 같은 존재처럼 자신을 과시하면서 자기를 받아드리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은 물론 가족과 주변사람을 괴롭히고 협박하여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억압하는 전형적인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마귀는 항상 피해자의 의식과 분리된, 또 다른 "하나의 실체" 이므로 더럽고 추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악한 영임을 온전히 알아야 한다.
 
다섯째, 성령님은 거룩하고 정결하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속에 정결함을 가져오시며 또한 우리에게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히 부정하며 사람들을 항상 죄 속으로 깊이 이끌어간다. 신 내림 받은 무당의 생활은 문란 그 자체이며 성적 부도덕은 물론 돈만 주면 남을 죽이고 망하게 하고 괴롭히는 저주의식도 양심에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하게 된다. 심지어 자기하고 잠을 자야 저주가 풀리고 복을 받는다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이다. 무당이 하는 저주의식을 무꾸리방술이라고 하는데 만약 상대가 하나님의 백성이면 그 베푼 방술이 자기머리위로 돌아가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저주의식에 피해를 받는다. 요즘 한창 뜨는 새 시대 운동(뉴에이지 운동)의 마귀들이 음악을 빙자하여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선한 존재로 나타내려고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죄 가운데로 빠르게 인도해 가는 악한 존재들이다. 뉴 에이지 운동의 내면에는 프리섹스, 유니섹스의 성적 부도덕,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들고자 하는 욕망, 마약, 그리고 영계와의 접촉 증가 즉 점술, 타로점, 영매양산 등을 들 수 있다.
 
여섯째, 성령님은 항상 예수님을 높이고 찬미하여 자신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의 삶속에 겸손을 가져온다. 반면에 마귀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나 마술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거나, 또 자기들이 점령하고 있는 사람을 높여 신처럼 만들어 그를 찬미하도록 한다. 이단사이비 교주들의 특징이며, 이런 자의 마음에는 스스로 높은체하는 교만이 들어차 있다.
일곱째, 성령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잃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과 뜻을 우리의 마음속에 제시해 주시지만 결코 우리의 마음을 흐릿하게 만들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가 항상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고후 )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 원하신다. 또한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과 협력하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비울 필요가 없다. 즉 정신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의식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전능하신 분이므로 우리의 의식이 활발할 때도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실 수 있다. 성령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거나 혹은 운행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신을 하여 정신을 잃거나 무의식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데 너무나 악하고 미혹 받은 집단이다. 이런 잘못된 속임수에 빠지는 크리스천들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요, 증산도, 요가, 명상, 만트라 등의 뉴에이지 운동에 속한 기법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한편 마귀들은 자주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한다. 그들은 사람이 제 정신을 잃고 피동적으로 만들어 그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무당이 한창 신이 올랐을 때는 귀신이 그를 완전히 점령한 상태이다. 이것은 마치 명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긴장이완의 기법을 도입하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이글을 읽으면 명상이니 요가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멀리하기 바란다. 사실 마귀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완전히 비우고 무효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심적으로 수동적 상태에 있으라고 격려하면서 맞는 소리 한두 마디씩 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여덟째,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케 하시는 일은 결코 파괴적이 아니며, 항상 사람들을 회개, 용서, 구속 그리고 평화 가운데로 인도 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행한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 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나 구속에 대한 소망이 없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죄의식을 가져다준다. 마귀는 항상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 너를 대적하는 자를 죽여라"등등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가져다준다.
 
아홉째,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모순이 되는 메시지를 주시지 않는다. 성령님이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성경을 비틀고 변경하고 붙이고 늘이거나 줄여서 무슨 새로운 비밀을 깨달은 것처럼 선전 한다.
 
열째,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것과 감정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환상 등을 일상적으로 혹은 자주 주시지 않는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는 것"(sight)이 아닌 "보지 않고"(insight)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인간의 감정을 교묘히 다루기를 좋아 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의 극치 즉 황홀경을 줌으로써 그들을 통제한다. 마귀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그 결과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 자꾸 보게 되면 자연히 믿음이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혹 받은 집단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현상을 추구한다. 자주 환상을 보거나 입신을 조장하고 직통계시니 예언이니, 천사가 내려온다느니 귀신의 소리를 하게 된다.
 
결론,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신 한 권의 책, 즉 성경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 안에 있는 대로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신다. 성령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분을 탄식하게 만들지 말라. 성령의 세례<밥티스마>를 받으면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는 영원불변하며,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막히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은혜의 성령을 거부한다면

( 11) 1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2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지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3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4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 떼를 먹이라 5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6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7 내가 이 잡힐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8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9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11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지니라 16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17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이 시간에 “은혜의 성령을 거부한다면”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참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거짓 목자를 따른 이스라엘의 비극을 잘 예언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은 A. D.70년 로마의 침략으로 그대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이스라엘 역사상 비극 중의 비극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는 교훈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배척한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결코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거부한 모든 불신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좀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앞의 10장의 봄비와 같이 임하시는 성령과 연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에 무관심하고 배척하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배척했듯이 오늘날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성령님을 배척하고 무관심한 죄가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죄나 성령을 배척하는 죄나 모두 큰 죄입니다. 그래서 히10:29에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했습니다. 그럼 은혜의 성령을 거부하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1. 은혜의 성령을 거부하면 아름다운 형상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1-3)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지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여기 나무들은 침략을 당할 시 모두 작벌될 것을 가리킵니다. 아끼는 나무이건만 침략자들은 그것을 참고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무는 인성을 곧잘 비유합니다. 성막에서도 나무는 인성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마가복음 8장에 소경의 눈이 조금 열렸을 때 사람을 나무 같은 것이 보인다고 한 말씀입니다. 이처럼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성경에서 진리를 보지 못하고 나무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나무는 인성인데 그 인성의 아름다움이란 곧 인격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성령을 거부하면 이 인격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불과 같은 시험이 오면 그럴듯하게 착한 마음은 다 불타버립니다. 불타지 않는 완전한 인격은 오직 성령의 은혜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갈5:16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먼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가능합니다.
 
2. 은혜의 성령을 거부하면 유리방황하며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  (4-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 떼를 먹이라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메시야를 배척한 이스라엘은 마치 잡아먹힐 양 떼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생가해 보세요. 참된 목자 예수님을 죽였으니 스스로 목자 없는 양이 된 것입니다. 들판에 버려진 주인 없는 양떼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잡아먹어도 누구나 잡아다가 팔아도 죄도 안 되는 보살핌을 받지 못한 가련한 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가 칠지라도 건져내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의 성령에 무관심한 죄가 바로 그렇습니다. 마치 버려진 양떼와 같습니다. 그래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유리방황합니다. 하나님의 붙들어 주시는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치고 저것이 쳐도 하나님께서 신원해 주시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해도 주시는 위로도 없습니다. 성경의 약속이 나에게 해당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 같고 사랑해 주시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수도 믿어지지 않고 천국도 믿어지지 않고 영생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가련한 모습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다르겠지만 우리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성령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3. 은혜의 성령을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줄래야 줄 수가 없게 됩니다.  (7-14) “내가 이 잡힐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이 양이 과연 어떤 양인지 이 양들을 한 번 먹여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스가랴는 가장 좋은 마음 가지고 은총과 연락의 지팡이로 먹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마음을 좋게 써도 어찌나 악하게 대항하는지 한 달 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양들을 치던 목자들이 어찌나 악한지 관계를 끓을 수밖에 없었고, 그 소속된 양들도 똑 같아서 죽든지 말든지 버려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 은총은 하나님의 은혜요, 연락은 백성들 간의 유대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불신이란 존재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나타나신 최선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사랑이 무엇인지 능력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이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지도자는 물론이고 백성들도 똑 같이 야합하여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본문 12절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은 삼십에 살 것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이처럼 은혜의 성령을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시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은총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은혜라면 연락은 성도의 교통입니다. 성령을 거부하면 이 두 가지가 다 끊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적용해 주시는 분을 멀리하고 어찌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령의 은혜가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4. 은혜의 성령을 거부하면 거짓에 속아 헛된 것을 섬기게 됩니다. (15-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지니라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여기 한 목자는 바로 악한 목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참 목자 예수님을 거부한 결과 악한 목자에게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악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잡아먹고 발굽까지 찢어 도망할 수 없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악한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악했는지 마 23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렇게 진리에 우매함이란 비참한 것입니다. 오늘 날도 사이비 교주를 따르는 사람들, 교주에게 자기 영혼과 몸과 재물과 시간과 인생의 목표와 자식과 미래와 천국과 모든 것을 다 유린당하고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교주는 자기를 떠남이 영원한 멸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을까요? 그들에게 성령이 계셨다면 그 마음에 이건 아니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 30:20-21)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라"
 
은혜의 성령을 멀리한 죄로 도움 받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은혜 받지 못하면 헛되고 헛된 죄악과 세상 것을 위해 그것이 행복인양 인생의 목적인양 일생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1:2-3) 그랬습니다. 그런데 은혜 받지 못하면 가치의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의 상을 위해 살지 않고 땅에 썩어질 것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헛된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성령 없이 하는 일들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봄비로 임하시는 성령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전의 삶은 부끄러움이요 실패요 무가치하고 헛되며 방황입니다. 성령을 사모하십시다.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고 하나님을 날마다 경외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언어 [빌 존슨]

성경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은 그분의 뜻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아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분의 모국어는 영어가 아니다. 실은, 그분의 모국어가 히브리어가 아니라는 주장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성경의 말씀의 언어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듣는 것의 기초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어기지는 않지만, 종종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바를 깨뜨리신다. 하나님이 그분의 책보다 크시다는 것을 기억하자, 성경이 하나님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밝혀준다.

이 진리는 말씀을 가리키는 헬라어의 두 단어 로고스레마를 통해 밝혀준다. 로고스는 자주, 씌어진 말씀, 즉 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읽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고 훈계를 받기 위해 가장 자주 쓰이는 방법이다. 한 장 한 장이 삶의 실제적인 교훈으로 가득차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이 배우는 것은 우리 안에 진리를  세움으로써 그 분의 음성을 알아듣도록 알아듣도록 배우는 것을 도와준다.

시편 기자는 이 목적을 뒷받침하며, 이와 같이 말했다. 내가 주께 법죄치 아니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19:11).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법칙을 배우는 구절이다. 말씀은 누구든지 적용하는 자에게 유익하다.

레마는 새롭게 선포하시는 말씀이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직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숨을 불어넣으셔서 씌어진 것에 현재적 생명력을 주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씌어진 말씀을 결코 대체하지는 못한다.

우리 심령 안에 씌어진 말씀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더욱 많이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쌓인 것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것들을 일깨우시기 때문이다.

들을 수 있는 음성의 언어
주님의 음성은 우리가 어떤 언어인지 찾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 직접적인 의사소통이다. 우리가 자거나 깨어있을 때, 육성은 우리의 육적인 귀에 들릴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영적인 귀에 들릴 수도 있다(내가 이 둘을 구별짓는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난 후에는 그것이 실제로 육성으로 들렸는지, 아니면 내면에 들렸는지 항상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처럼 분명한 것이다.)

최소한 두번, 나는 주님의 육성을 듣고 잠에서 깬 적이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볼 때, 나는 내 아내가 들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아내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요한복음 12장처럼 음성이 육적인 귀에 들릴 수도 있고, 또 영으로 들릴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음성으로 나를 깨우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의 지켜봄을 그분께서 돌보아 주신다. 이 말씀은 남은 밤 동안 내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왔다갔다 했다. 내가 그분만을 바라보는 것을 배우도록 나의 관심 전체를 원하셨다. 그렇게 하는 동안 그분은 내게 중요한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실 것이었다.

미세한 목소리의 언어
이것이 조용한 목소리 또는 마음의 인상이다. 이것이 아마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흔한 방법일 것이다. 때로 이것이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아이디어나 내적 음성이라고 생각되지도 한다. 우리가 내적 음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분의 작은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한결같이 알아 듣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조용해져야 한다.

누군가 내게 그분의 목소리를 분별하는 데 도움되는 열쇠를 하나 주었다. 그는 당신 스스로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왔다고 알 수 있죠.라고 말했다

믿음 없음이 지혜로 가장하다 [빌 존슨]

요한복음 12장의 이야기는 서구의 교회 안에서 가장 큰 근심거리이다. 널리 퍼져 있는 불신앙의 문제. 그것은 오랫동안 지혜로 가장해 행세했고, 그것이 엄청난 죄악이라는 것이 밝혀져야만 한다. 믿음 없음은 삶에 있어서 보수주의라는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 자신을 사람들의 지적인 능력과 제한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공급을 삼으며, 다른 이들이 넘어져 버린 그 극단적인 것들에 넘어지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종교적 덫에 걸려 있는 사람들은, 믿음 없는 생각이 그분의 권능과 영광안에서 예수님을 결코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보았다고 하는 것을 마치 성경이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하기라고 하듯 하나님께서 진짜 하신다는 걸 증명하기 원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어떤 찬양을 드리기 전에 의사의 진단과 엑스레이 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휠체어에 앉았던 사람이 걷게 되고, 우울증에 빠졌던 사람이 기뻐하며, 귀가 멀었던 사람이 귀가 열려 찬양하지만, 그래도 방관자들이 이것들이 정말 기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원한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나는 사기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속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는 것은 속임수로부터 보호하려는 지혜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없음이 표시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불신앙이 오랫동안 지배했을 경우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만든다”(고전13:7). 하나님의 사랑과 좀더 깊이 만나는 것은 비논리적인 경계함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성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리고, “믿음이 사랑을 통해 일하는 것” (5:6)을 볼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조차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의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이불신앙을 상당히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속 보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기적에 노출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도와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무언가 보여 달라는 것은 하나님은 향한 굶주림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것이다.

그분은 시험을 받지 않으신다. 우리가 받는다. 새로움을 입지 못한 마음은 하나님과 전쟁을 하며, 그분에게 무언가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한 건장하지 못한 태도가 우리를 재판관의 위치에 놓게 한다. 이러한 교만은 불신앙의 아버지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적인 무리들과의 만남에서 이러한 태도를 많이 대적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