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2011

생명의 언어를 사용하라!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체구가 몹시 작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마을의 어른들은 자기 자녀들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벤 후퍼와 함께 노는 것을 원치 않았고, 친구들도 그를 놀리며 멸시하였습니다.

 벤 후퍼가 12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벤 후퍼는 그때까지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 젊은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교회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 시간에 좀 늦게 예배당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오곤 했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 벤 후퍼는 목사님의 설교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잠시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에 예배가 끝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벤 후퍼도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벤 후퍼를 보고,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하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벤 후퍼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당황하여 빠져 나가는 벤 후퍼의 등을 향해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주지사 벤 후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윤영준, <신발 한 켤레의 사랑>-

'오늘 우리 자녀의 모습은 부모의 말이 빚어낸 작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땅에는 두 개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의 공동체이며, 또 하나는 선악과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치 창조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 생명나무의 공동체인 가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생명나무의 공동체는 생명의 언어를 먹고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탄은 생명나무의 공동체를 선악과의 공동체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사탄이 생명나무의 공동체를 선악과의 공동체로 바꾸는데 사용한 방법은 강한 힘이나 무기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묘한 방법으로 언어의 세계를 흐트러뜨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셨고,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유일하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세계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언어의 세계를 흐트러뜨림으로써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도록 유혹하는 데 성공하고, 하와는 그것을 또 아담에게도 먹게 함으로써 인간은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생명의 공동체는 선악과의 공동체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들어 자신에게 이끌어 온 하와를 보는 순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했던 아담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고 물으시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먹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언어는 사랑과 감사의 고백이라는 생명의 언어에서 불평불만, 비난, 책임전가라는 죽음의 언어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생명의 언어를 죽음의 언어로 바꾸라 !' 이것이 바로 사탄의 계략입니다. 

고대 전쟁에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유언을 퍼뜨림으로써 민심을 동요시킵니다. 현대전에서는 통신시스템을 제일 먼저 공격함으로써 상대방의 의사소통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가정에서 어떤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한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너진 언어의 세계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죽음의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면 하루 빨리 생명의 언어로 바꿔야 합니다. 자녀들이 싫어하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자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입니다. '너 때문에 우리 집이 이 모양 이 꼴인 거 알아 ?' '너 때문에 엄마 아빠가 이혼한 거야 알겠어?' '너 때문에 우리는 되는 게 없다.' 

둘째는 자녀를 비하하는 말입니다. '이 바보 멍충아!' '넌 이 다음에 깡통차기에 똑 알맞아.' '넌 밥만 축내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니?' '이 게으름뱅이야 뭘 또 꾸물대!' '너한테 이젠 지쳤다.' '어쩌다 너 같은 게 태어났니?'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저리가!' '이 원수야!' 

셋째는 비교하는 말입니다. '너는 왜 그 모양이니? 네 언니 반만 좀 닮아봐라.' '너 죽었다 깨어나도 형 따라 갈래면 멀었다.' '넌 어째 네 동생보다 생각이 모자라니?' 

넷째는 자녀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말입니다. '넌 왜 태어났니?' '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전생에 무슨 원수였기에 태어나서 이 어미를 이렇게 괴롭히니?' '어떻게 너 같은 애가 우리 집에 태어났니?' ' 넌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네 엄마 찾아가!' 

다섯째는 자녀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말입니다. '이 엄마는 너 하나 믿고 산다.' '엄만 너 하나 바라보고 산다. 그런데 네가 이러면 어떻게 하니?' '너는 우리 집 기둥이야. 우리 집이 일어서느냐 내려앉느냐는 전적으로 네 어깨에 달렸다. 알았니?''옛다. 책 값. 이 엄마가 뼈 빠지게 번 돈이 이게 다다. 알았으면 열심히 공부해 알았어!' '넌 죽어도 서울대에 가야해!' 

여섯째는 이중구속의 언어, 즉 표현은 해놓고 막상 자녀가 그런 행동을 하면 또 그렇게 했다고 화를 내는 언어입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화가 나서 자녀에게 '나가!'했을 때, 자녀가 나가면 '야! 가긴 또 어딜 가? 공부 안하고!'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것이 이중구속의 언어입니다. 이와 같이 이중구속의 언어로 사용되는 것은, '공부하지 마!' '밥 먹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을자아(looking-glass self)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거울 자아란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 가에 대한 스스로의 상상에 의해 얻어진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처음에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가 예쁘다는 말을 들음으로써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마침내 그녀는 자기가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아란 자신의 특성보다는 주변 환경, 즉 중요한 타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생명의 언어를 말하십시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아들이다.' 얼마나 멋지고 감동적인 생명의 언어입니까? 예수님은 그 생명의 언어를 붙잡고 광야에 나가 40일간 금식하시면서 마귀와 싸워 이기셨고, 그 힘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3년간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똑같은 소리를 다시 한 번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결국 예수님은 그 생명의 언어를 붙잡고 죽음의 십자가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고, 생명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선악과의 공동체를 생명나무의 공동체로 바꾸시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그러나 내 안에 생명이 넘쳐야 합니다. 그 생명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생명은 바로 복음입니다. 생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생명은 바로 진리입니다. 생명은 바로 은혜입니다. '너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자랑이란다.' '너는 보석이란다.' '너는 아빠의 가장 귀한 보배 중의 보배란다.' '너는 내 딸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네가 내 아들이란 것이 자랑스럽다.' '고맙다. 딸아 이렇게 잘 자라줘서' '아빤 네 생각만 해도 기쁘단다.' '난 너만 보면 힘이 솟는단다.' 생명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생명의 언어는 생명의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