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2010

조직신학 요약 4 - 성령에 대하여

1.삼위일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란 용어에는 아직 익숙치 않습니다. 알 것 같으면서도 그 개념이 명확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이란 무슨 개념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성부이신 하나님과 또한 성자인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3가지 위격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제 일 위는 아버지 하나님이며, 제 이 위는 아들이신 하나님이며, 제 삼위는 성령이신 하나님입니다. 이 세위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하나님이 3분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성령은 삼위 하나님으로 계시지만 항상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입니다. 여기에서 나오신다는 뜻은 서열, 우열, 순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신 것입니다.

2.성령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성령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게 닿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무엇인가를 성경에 소개된 성령께서 가진 특성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령은 전지하신 분입니다. 성령은 영원하신 영이시기에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둘째, 성령은 전재하신 분입니다. 성령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에나 계십니다.

셋째, 성령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동격이시기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십니다.

넷째,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아십니다.

다섯째, 성령은 우리의 잘못을 근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여섯째, 성령은 복음을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일곱째, 성령은 우리 속에 오시기로 약속된 분입니다.

3.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성령은 부르십니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인을 부르십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귀에 들리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고집스럽고 교만하던 중심이 무너져 내리며 회개하게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이루게 합니다.

둘째, 성령은 가르치십니다. 제한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노력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에게 영적인 빛을 비추시며 영원한 진리를 배우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일고, 성경의 가르치심으로 설교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은 거룩하게 하십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께 죄로 부패하여진 인간이 결코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회개한 심령에 성령님이 오셔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일을 하십니다.

넷째,성령은 인도하십니다.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인생은 만경창파에 항해하면서 수많은 외적인 문제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은혜와 진리와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다섯째, 성령은 기도를 도와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이 대화하는 일이므로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더욱 간절하게 도와주십니다.

여섯째, 성령은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십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의무요 본분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성도는 행실을 보아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별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령이 우리에게 가능하게 하여 주십니다.

일곱째, 성령은 보증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믿는 자의 보증인이 되십니다.

4.성령 충만한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이상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성령충만이란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12장 1-2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구원으로 택함 받은 성도들의 몸과 마음은 이미 하나님께로 향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의 모든 생활과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즉, 성령 충만한 생활이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5.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성령충만한 생활이란 구분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지껏 생활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예수를 몰랐을때 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그리고 내가 매일 몸의 건강을 위해서 밥을 먹듯이 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신 약속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알고 모르고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여야 합니다. 내가 짊어지고 있어야 할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어주시기 때문에 나는 그 분께 고백하여야 합니다.

넷째,성령 충만한 생활은 한순간의 변화가 아닙니다. 늘 꾸준히 날마다 충만함을 얻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생활이기에 중단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조직신학 요약 3 -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1.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어떠하였습니까?
예수그리스도는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지중해 동편 해변에 자리잡고 있는 유대 -오늘의 팔레스타인 혹은 이스라엘 -나라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방 약13km, 해발 775km 지점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중앙 산맥지대에 속하는 산간 거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습니다. 이것은 의학상으로는 불합리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초자연적인 방법입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으므로 로마 군대의 갖은 행패를 다 받았고, 식민지를 다스리는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식민지 정책 밑에서 사는 나라와 국민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유대인들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대나라의 작은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이란 동리에서 자라나셨습니다.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의 아들로서 목수    일을 배우면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성하여 33세가 되시기까지 유대 나라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기는 하셨지만 다른 나라를 방문하거나 먼 여행을 하신 일은 없으셨습니다.

2.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서 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말은 '구조자' 또는 '구원자'란 뜻으로 어떤 국가나 개인이 위기에 처하여 있을 때 거기서 구하여 낸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아'란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으로 제사장과 왕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두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의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신적인 본성과 인격적인 본성을 둘다 갖추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은 신이신 분이 인간의 고난을 대신 지시고 죽으신 참 신이시자 참 인간이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당시의 선지자들의 역할이었던 설교와 예언을 하셨으며, 오직 제사장만이 할 수 있었던 하나님과의 중재 역할을 하셨으며,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한 왕의 직책도 가지셨습니다.

3.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된 자리를 떠나 친히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오시어 여려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받으였습니다. 심한 오해와 질투와 시기 속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셨고 심지어는 가장 혹독한 형벌인 십자가형에 처해져서 육신 적 , 정신적 피로등 모든 어려움을 친히 체험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후 장사지내졌고 그 후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은 실패가 아니라 완전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사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 분은 오직 인간이 죄악 가운데 헤매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모든 업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셋째, 우리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 향한 통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이후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인간들의 죄악 됨을 손수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구원의 열쇠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4.예수 그리스도는 왜 수난을 당하셨습니까?
참 신이시지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왜 수난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 분이 그 수난을 물리치고 이겨낼 힘이 없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인간에게 있는 병의 뿌리를 알아내야 합니다.

병의 근본적인 치료를 위하여서는 그 병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의 병은 죽음의 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인간이 지고 있는 죽음을 담당할 수 있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라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병에 걸린 인간을 대신하여 죽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분만이 인간의 참다운 구주인 것입니다.

물속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내기 위하여는 물로 뛰어들어야 하고, 또한 그를 구하지도 못하고 같이 물속에서 허우적 대다가 죽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사 인간의 근원적인 병인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적인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5.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이십니까?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 정리를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십니다. 그분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우주의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으로 탄생하셔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두루 체험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참 인간으로서의 모델을 제시하여 주신 분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로 인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구원으로 이끄신 분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인간들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물리칠 수는 없지만 오직 죽음보다 강한 그 분만이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영광속에 계시며, 장차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심판하시러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주어(主語)와 동사(動詞)

중세의 명언 중 “모든 선택은 포기다”는 말이 있답니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소위<기회비용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천원을 가지고 빵 한 조각을 샀다면, 그것은 천원으로 살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흔히 인생은 선택의 연속 곧, 포기의 연속이라고 합니다,선택 전의 모든 것은 가능성으로 남아있으나, 선택 후 다른 모든 것은 불가능의 영역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는 선택에 있어 신중함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의 선택이 있는바, 그것은 영원한 삶이냐 영원한 멸망이냐 라는 양자택일의 극단적 선택인 믿음의 결단, 즉 중생(거듭남)입니다, 그러나 이 중생은 믿음의 완성이 아니요 시작일 뿐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답니다,
 
인간과 공유된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 <자유의지>를 갖게 된 첫 인간 아담의 첫 선택은 아쉽게도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으로, 이는 선택의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 선택권을 행사한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막상 금지의 벽을 깨고 나간 곳은 악으로 치닫는 내리막 고속도로 위였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의 능력과 자유를 존중하시나, 존중하시는 그 만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으십니다, 아담의 이 선택의 결과는 죄요 그 대가는 사망이랍니다,
 
<성 어거스틴>은 창조된 인간에겐 죄를 범 할 수 있는 능력도, 범치 않을 능력도 가지고 있었으나,  아담의 타락 후에는,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무능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 타락한 인간에겐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있지만 의()를 선택할 자유(自由)는 상실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선택(3)외에도,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가인>의 선택(4),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에서>의 선택(26;34),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진 10명의 가나안 정탐꾼을 따른 이스라엘의 선택(13),  그리고 죄수<바라바>를 대신 살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선택(27;11이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과 뜻이 제한되고 포기되는 그곳에는, 단지 빗나간 우리 인생의 곤고와 나의 탄식뿐만 아니라, 내 후손과 나아가 인류역사와 운명을 바꾸는 대 사건들로 비화되는 모종의<나비효과>가 나타납니다,
 
누군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단어는 “만약(if)이라고 했습니다(요일1;9)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람의 선택은(16) 오늘날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인종 종교 영토분쟁의 불씨요, 911사태와 같은 희대의 비극적인 사건의 동인(動因)이 되어 역사의 핏줄을 타고 흐릅니다, 만약<>이 시어머니<나오미>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면(2;14이하) 보아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의 후손인 다윗도 예수님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요, 십자가의 사건도 부활도 그리고 우리의 천국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복된 삶이라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위대한 장인(匠人)인 하나님의 수제품이요(139;13) 개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지음받은 피조물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나를 조성하신 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마치 해바라기가 언제나 해를 향하듯, 삶의 순간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과 뜻을 따라 삶의 발걸음을 옮기면 됩니다,
 
가장 순전한 예배의 형태는 <예수! 그분을 바라보고 따라 사는 것>이랍니다. ,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우리 인생의 간고(艱苦)와 질고(疾苦)를 몸소 겪으신 분으로 누구보다도 우리 인생을 잘 아십니다,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예수의 이 땅에서의 삶의 기록인 바, 그 내용은 예수의 <행하심> <가르치심> <명하심>으로 승천하신 날까지의 기록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1;1~2)따라서 이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과 명하심을 본받고 따라 지키며 사는 삶이 바로 주님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참된 교회의 모습을 예수그리스도가 주어(主語)가 되고 성도들은 동사(動詞)가 되는 교회라고 갈파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우리 삶에 적용하면 결론적으로 참된 믿음의 삶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主語)가 되고 나는 동사(動詞)가 되는 그런 삶이 아닐까 합니다,  그 의미는 바로 우리의 일상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투영하는 것이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28;20) 말씀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을 교훈하시고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오, 내 인생의 주인이시오,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그렇기에 피조물은 조물주의 조성 목적과 뜻에 맞게, 그리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고 착한 자식은 매사 부모님의 뜻을 묻고 살펴 행함이 옳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나 문제도 제 뜻과 생각대로 행한 후 변명하는 것과는 그 결과와 책임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 이것은 우리 삶을 분초마다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 요구하시는 믿는 자의 반응일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거짓된 확실성에서 참된 불확실성으로 나아가는 바, 만유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 입니다,  나도 내 것이 아니요,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하심 역시 나의 삶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끊임없이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역사와 우리 삶의 모든 것에 대한 결정과 선택은 전적으로 그 분에 주권(主權)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일상의 삶은 하나님의 범우주적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사는 삶, 닮아가는 삶이 의미 하는 바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신분 변화를 위한 성화(聖化)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앞세우는 삶의 선택은, 바로 우리 몸과 마음과 삶의 성화를 의미합니다,예수를 닮아가는 것, 곧 그와 같은 믿음의 자세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길은 바로 <성화의 길>입니다, 설마 하나님이 우리가 지뢰 밟고 터져 죽는 꼴 보시려고 우리에게 걸음마를 가르쳤겠습니까?오직 주님의 발자욱을 따라 걸음마 하면 이 인생살이 곳곳에 깔린 지뢰밭을 무사히 빠져나와 하늘 본향집에 갈 수 있답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