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2010

주어(主語)와 동사(動詞)

중세의 명언 중 “모든 선택은 포기다”는 말이 있답니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소위<기회비용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천원을 가지고 빵 한 조각을 샀다면, 그것은 천원으로 살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흔히 인생은 선택의 연속 곧, 포기의 연속이라고 합니다,선택 전의 모든 것은 가능성으로 남아있으나, 선택 후 다른 모든 것은 불가능의 영역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는 선택에 있어 신중함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의 선택이 있는바, 그것은 영원한 삶이냐 영원한 멸망이냐 라는 양자택일의 극단적 선택인 믿음의 결단, 즉 중생(거듭남)입니다, 그러나 이 중생은 믿음의 완성이 아니요 시작일 뿐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답니다,
 
인간과 공유된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 <자유의지>를 갖게 된 첫 인간 아담의 첫 선택은 아쉽게도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으로, 이는 선택의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 선택권을 행사한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막상 금지의 벽을 깨고 나간 곳은 악으로 치닫는 내리막 고속도로 위였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의 능력과 자유를 존중하시나, 존중하시는 그 만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으십니다, 아담의 이 선택의 결과는 죄요 그 대가는 사망이랍니다,
 
<성 어거스틴>은 창조된 인간에겐 죄를 범 할 수 있는 능력도, 범치 않을 능력도 가지고 있었으나,  아담의 타락 후에는,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무능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 타락한 인간에겐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있지만 의()를 선택할 자유(自由)는 상실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선택(3)외에도,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가인>의 선택(4),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에서>의 선택(26;34),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진 10명의 가나안 정탐꾼을 따른 이스라엘의 선택(13),  그리고 죄수<바라바>를 대신 살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선택(27;11이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과 뜻이 제한되고 포기되는 그곳에는, 단지 빗나간 우리 인생의 곤고와 나의 탄식뿐만 아니라, 내 후손과 나아가 인류역사와 운명을 바꾸는 대 사건들로 비화되는 모종의<나비효과>가 나타납니다,
 
누군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단어는 “만약(if)이라고 했습니다(요일1;9)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람의 선택은(16) 오늘날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인종 종교 영토분쟁의 불씨요, 911사태와 같은 희대의 비극적인 사건의 동인(動因)이 되어 역사의 핏줄을 타고 흐릅니다, 만약<>이 시어머니<나오미>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면(2;14이하) 보아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의 후손인 다윗도 예수님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요, 십자가의 사건도 부활도 그리고 우리의 천국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복된 삶이라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위대한 장인(匠人)인 하나님의 수제품이요(139;13) 개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지음받은 피조물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나를 조성하신 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마치 해바라기가 언제나 해를 향하듯, 삶의 순간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과 뜻을 따라 삶의 발걸음을 옮기면 됩니다,
 
가장 순전한 예배의 형태는 <예수! 그분을 바라보고 따라 사는 것>이랍니다. ,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우리 인생의 간고(艱苦)와 질고(疾苦)를 몸소 겪으신 분으로 누구보다도 우리 인생을 잘 아십니다,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예수의 이 땅에서의 삶의 기록인 바, 그 내용은 예수의 <행하심> <가르치심> <명하심>으로 승천하신 날까지의 기록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1;1~2)따라서 이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과 명하심을 본받고 따라 지키며 사는 삶이 바로 주님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참된 교회의 모습을 예수그리스도가 주어(主語)가 되고 성도들은 동사(動詞)가 되는 교회라고 갈파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우리 삶에 적용하면 결론적으로 참된 믿음의 삶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主語)가 되고 나는 동사(動詞)가 되는 그런 삶이 아닐까 합니다,  그 의미는 바로 우리의 일상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투영하는 것이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28;20) 말씀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을 교훈하시고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오, 내 인생의 주인이시오,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그렇기에 피조물은 조물주의 조성 목적과 뜻에 맞게, 그리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고 착한 자식은 매사 부모님의 뜻을 묻고 살펴 행함이 옳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나 문제도 제 뜻과 생각대로 행한 후 변명하는 것과는 그 결과와 책임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 이것은 우리 삶을 분초마다 간섭하시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 요구하시는 믿는 자의 반응일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거짓된 확실성에서 참된 불확실성으로 나아가는 바, 만유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 입니다,  나도 내 것이 아니요,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하심 역시 나의 삶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끊임없이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역사와 우리 삶의 모든 것에 대한 결정과 선택은 전적으로 그 분에 주권(主權)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일상의 삶은 하나님의 범우주적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사는 삶, 닮아가는 삶이 의미 하는 바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신분 변화를 위한 성화(聖化)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앞세우는 삶의 선택은, 바로 우리 몸과 마음과 삶의 성화를 의미합니다,예수를 닮아가는 것, 곧 그와 같은 믿음의 자세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길은 바로 <성화의 길>입니다, 설마 하나님이 우리가 지뢰 밟고 터져 죽는 꼴 보시려고 우리에게 걸음마를 가르쳤겠습니까?오직 주님의 발자욱을 따라 걸음마 하면 이 인생살이 곳곳에 깔린 지뢰밭을 무사히 빠져나와 하늘 본향집에 갈 수 있답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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