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6/2009

성경을 통한 구체적인 인도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어거스틴은 어느 날 수도원에서 참회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웃의 어린 아이가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는 가사의 노래를 하였는데 그는 그 음성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는 음성을 알았다. 그는 그 음성에 순종하여 옆에 두었던 성경을 펴서 제일 먼저 자기의 눈길이 닿는 부분을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

그는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고 믿음에 대한 의심을 물리치고 이전의 정욕적인 삶을 청산하고 회심하여 평생 주님께 헌신하는 위대한 주의 사자가 되었다.

5만번 기도응답을 받은 조지 뮐러는 어느 날 성경을 묵상 하던 중,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라는 말씀이 마음에 너무나 와 닿았다. 그래서 그는 영국에 고아원을 차려서 기도 하나만으로 평생에 걸쳐 수천명의 고아를 먹여 살리는 사역을 감당했다.

그러면 이런 것과 5-1의 서두에서 예를 든 것-‘가서 행하라’-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처음 예는 성령의 감동이 없는 ‘나의 결정’이고 지금의 예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말씀에 의한 결정’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성경 말씀은 인도나 안내의 일반적인 원칙은 제공하지만 구체적인 지침은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때로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구체적인 인도나 안내를 하시기도 한다.

5-1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여기서 그 의미를 충분하게 설명한 후에야, 때로는 성경 말씀도 '구체적인 인도'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구분하여 기록된 객관적인 말씀은 로고스이고 기록된 말씀을 바탕으로 성령이 마음에 감동을 준 말씀을 레마로 이해한다.

로고스가 우물이라면 레마는 우물에서 퍼올린 말씀이다. 로고스 말씀이 비록 하나님의 말이지만 당사자에게 ‘그 말씀 자체’가 능력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로고스 말씀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읽거나 듣는 사람에게 개인적, 구체적으로 부딪칠 때 능력의 말씀, 믿음의 말씀, 인도적인 말씀이 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로고스와 레마는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레마라는 물은 로고스의 우물에서 필요할 때 퍼올려지는 것이므로 평소에 객관적인 로고스를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물론 성경에는 말씀을 의미하는 헬라어로 로고스와 레마라는 두 가지 헬라어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혼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을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글로리아넷의 신앙변증 시리즈 ‘로고스와 레마’를 보기 바란다. 여기서는 간단한 구분에 그친다).

물론 성경에 사용된 로고스와 레마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예도 있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된 예도 있다. 단어의 의미는 수학 공식처럼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다른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로고스와 레마를 전혀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구분하는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만일 우리가 단어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구원하다’는 말에도 문제가 있다. 우리는 ‘구원’이라면 얼른 영혼 구원을 떠올리지만 성경에서 구원을 말하는 헬라어 ‘소조’는 영혼 구원은 물론 몸의 치유, 고난에서 건내낸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왜 ‘구원’이라면 금방 영혼 구원을 떠올릴까? 그렇다고 이것이 성경적으로 틀리는 주장일까?

로고스와 레마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시시비비를 하기 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다 다양하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의 내적 증거
자유주의자들은 아예 성경은 인간의 기록으로 단정해 버리고. 또한 소위 말하는 신정통주의자들은 그 말씀이 읽는 자에게 개별적으로 역사할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감동을 주실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면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증거되는가? 물론 보수주의의 입장에서는 기록의 특징, 일관성 등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것은 ‘성령이 내적으로 증거’하기 때문이라고 개혁 신학은 말한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Internal testimony of the Holy Spirit)라고 한다.

비록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각자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이 그 사람의 심령 속에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말씀의 객관성과 주관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이나 신정통주의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 내적으로 그들에게 증거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보수신학은, 기록된 성경 말씀은 사람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객관성), 성령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개개인에게 개별적, 구체적으로도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후자를 흔히 “성령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The Holy Spirit speaks in the Scripture)고 표현한다. 필자가 알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뜻으로 레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 말씀을 많이 읽어도 모든 말씀이 항상 뜨겁게 감동을 주거나 강한 믿음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구절이 마음에 감동을 주거나 또는 위기나 필요한 순간에 성령님이 어떤 구절을 생각나게 해주시면 그 말씀이 믿음을 더해주고 또 실제로 인도, 보호해 주는 경우가 많다.

누가 이런 체험을 부인할 것인가? 이런 체험은 일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것이다. 물론 비판자들의 지적과 같이 로고스와 레마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신학자들이 어떤 교리를 도출하기 위해 단어의 뜻을 제한적이고 좁은 의미로 사용하듯 ‘레마’를 제한적이고 좁은 의미로 사용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부인하는 저명한 설교학 교수인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도 Decision Making by the Book(성경책에 의한 의사결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공부하고 암기한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그 말씀들을 우리의 특정한 상황에 적용하게 하신다.”

필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전임 사역자로의 부르심을 받고 다른 사람의 증거, 기도를 통한 확신을 가졌지만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어서 주님이 좀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기를 원했었다. 요즈음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결국은 성경 말씀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눈 감고 몇 페이지를 펴서 눈에 들어오는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해 주실 것을 기대하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주님을 위한 열정과 헌신이 식어지지 않는 것을 고백한 구절(고후 11:22-33)을 보고 내 마음이 뜨거워졌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서 주춤하고 망설인 사실을 울부짖으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문자 그대로 “아골 골짜기라도 가겠다”는 다짐이 섰다. 더 이상 망설이고 의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말씀은 나의 결정에 대한 레마로 닥아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로고스와 레마의 구분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구분으로 인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보다 풍성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성경 말씀을 읽는 중에, 책을 읽는 중에,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그 사람을 통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설교 말씀을 전한 후에 어떤 교인이 다가와서 “목사님, 오늘 설교는 바로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더러 있다. 비록 전 교인을 대상으로 전한 설교이지만 특정한 사람의 특정한 상태에 직접 부합되는 말씀이 되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해 성령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목회자들 중에서는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이처럼 성경은 설교 말씀, 말씀 묵상을 할 때 레마가 되어 위로, 안위, 약속, 권면, 책망은 물론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특정한 일에 대한 비전, 인도, 안내, 지침이 되기도 한다. 어거스틴이나 조지 뮐러 처럼 성경 말씀을 통해 구체적인 비전, 인도, 지침을 주시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성경은 어떤 비술이나 점치는 것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지만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거나 생각나게 해주시는 일에 폐쇄적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구요한 목사>

성경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라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한 사람은 항상 상사의 뜻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야단을 맞았고 다른 사람은 항상 ‘상사의 뜻’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하였기 때문에 번번히 칭찬을 받았다. 둘 다 업무 수행 능력은 비슷했지만 어떤 관점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일을 하느냐의 차이로 인해 유능한 사원과 무능한 사원으로 구분된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내 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라는 구분만 분명히 하여도 우리는 많은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 성장은 이런 죄, 저런 죄 한 두 가지를 회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 방식, 가치관, 세계관이 성경적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전혀 성경과는 상관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이것은 사고가 아직도 세상적인 가치관에 젖어있다는 증거이다. 결혼, 자녀 교육, 재정 등 등. 이런 주제에 대해 성경적인 견해나 가치관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가진 신자들이 많지 않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 다니고, 성경 공부, 말씀 공부, 이런 훈련, 저런 훈련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 인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말씀 묵상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는 훈련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적 가치관은 소유, 군림, 눈에 보이는 것, 물량, 업적, 과시를 중시한다. 그러나 성경적 가치관은 소유 보다는 관계, 군림 보다는 섬김, 눈에 보이는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 물량이나 업적 보다는 마음의 동기, 과시 보다는 은밀하게 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교회도 세속화 되다 보니 세상적인 성공을 영적 부요로 착각하여 신자들도 자연스럽게 물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적 가치관에 의해 '자기 뜻'을 정해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왜 하나님이 기도 응답하지 않느냐고 의아해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말씀 묵상을 통해 끊임 없이 자신의 사고방식을 하나님의 그것으로 바꾸어 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또한 잘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이 내용은 ‘묵상 기도’에 있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자신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생각보다 깊고 높다. 개인의 직접적인 필요 위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놓치기 쉽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말씀 묵상을 통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항상 개방적인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높은 뜻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인도와 안내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 내 방법으로 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기 쉽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각은 추리와 경험에 의해 얻어진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면 과거의 경험과 논리를 바탕으로 일을 처리하기 쉽다. “아, 과거에 이런 예가 있었죠. 그때 이렇게 처리했으니 지금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죠” “그렇지, 지난 번에 이런 일이 있었지. 난 그때 이렇게 처리했지. 이번에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군” 이처럼 사람은 전례에 따라 생각하고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전통이 생기고 소위 말하는 교단의 “법”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이와 다른 경우가 많다. 가능하면 전례를 따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율과 전례에 지나치게 매이다 보면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놓치기 쉽다는 말이다.

-믿음이 자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말씀을 그냥 많이 읽더라도 믿음이 자란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숲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듯 중요한 구절 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서 먹을 때 우리의 신앙이 균형 있게 건강하게 성장한다. <구요한 목사>

성경 - 잘 결정하는 기술보다는 잘 결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성경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로 하고 성경 책을 펼쳤더니 “가룟 유다가 가서 목 매어 죽으니라”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것은 잘못된 것일거야’라면서 다시 한 번 책을 펼쳤더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구절이 들어왔다. ‘그럴 리가 있나? 삼 세 번이다’라면서 성경을 펼쳤더니 “속히 행하라”는 구절이 눈에들어왔다.

지어낸 이야기인지 사실인지 모르지만 성경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점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인도하고 안내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리가 좋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성경은 도덕적인 뜻의 범위를 정하기는 하지만 두 가지 선 중에서 어떤 것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은 없다. 성경은 ‘결정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현명한 결정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잘 결정하는 기술’보다는 ‘잘 결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경은 우리가, 결혼할 것이냐 독신으로 지낼 것이냐, 어느 학교에 다닐 것인가, 어느 직장에 다닐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나 지침은 없다. 성경은 그런 것을 분별하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을 분별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또 현명한 결정을 잘 내릴 수 있을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산 제사란;  나의 옛 자아가 죽고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을 말한다. 제물은 죽인 후에 드려진다. 그러므로 산 제사를 드리는 자는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통째로 주님께 드려지는 것을 말한다. 예배란 교회의 예배 시간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드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

영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켄은 원래는 ‘합당한’이란 뜻인데, 신자가 드리는 ‘산 제사’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제사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제사가 곧 신령한 예배 즉 ‘영적 예배’임을 말하고 있다. (벧전 2:2에서는 이 말이 ‘신령한’ 젖으로 번역되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대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세대는 음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육신의 정욕을 부추기는 세대이다.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내세운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러한 세대의 풍습, 사고방식, 생활습관을 본 받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되어 있다.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계획, 더러운 것들 뿐이다. 신자는 보혈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매일 마음을 새롭게 하는 회개를 하고 믿음을 더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변해야 한다.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서로 다른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의 성격을 다른 국면에서 강조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분별하다’는 말인 도키마조는 ‘시험하다,’ ‘입증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다는 말은 신자들 자신의 삶을 시험대에 올려놓아서 그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고, 악한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끊임 없이 변화를 받아가면서, 실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는 삶을 살고 그렇게 되면 좋고 현명한 결정을 잘 내릴 수 있다.

에베소서 5:15-1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기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라’고 명령한다. 주의 뜻을 이해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와 대조된다. 주의 뜻을 행하는 자는 지혜 있는 자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15절).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혜 있는 자, 주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본문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세상 술에 취하는 자들이지만 지혜 있는 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행하는 자는 새 술인 성령의 충만을 받는 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받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사도행전에 나오고 다른 하나는 여기에 나온다.

사도행전에 사용된 ‘충만하다’는 단어는 헬라어 핌플레미의 부정과거형으로서,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충만을 말하며 그 결과 방언과 같은 외적 능력이나 은사가 나타나는 성령충만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충만하다’는 단어는 헬라어 플레로의 현재형으로서 계속적이고 습관적인 충만을 말하는데 그 결과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리스도를 복종함으로써 피차 복종하는 인간관계의 성숙을 말한다.

즉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은 은사적인 사역을 위한 외적 충만이고 에베소의 성령 충만은 사람의 품성이나 윤리적 성숙과 관계된 성령충만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를 구분하기 위해 전자를 능력성령충만 후자를 생활성령충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국 신자들은 생활성령충만을 계속적으로 받아서 그리스도에 복종함으로써 찬미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피차 복종하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행하는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요 7:17과 마 13:14-15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 7:17)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이 두 구절을 한꺼번에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렇지 못한 자,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보고 듣기는 하지만 무엇이 하나님 뜻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살수록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어떤 중요한 일이나 미래의 일에 대한 뜻을 물으면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경우가 많다. 성경을 통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된 뜻, 도덕적인 뜻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에게 다른 뜻을 드러내 주셔도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순종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나도 실제로 이런 체험을 많이 했다. 내가 성경에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한 걸음 때로는 열 걸음씩 인도해주시지만 내가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이전에 주신 말씀에 멈추어서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다시 새로운 길을 알려주셨다.

내가 죄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그런 간구조차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증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물론 예수님 외에 완전한 사람은 없고 우리 중에 죄 짓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된 명령과 금지의 말씀, 자기가 알고 있는 죄 정도는 철저하게 회개한 후에 하나님의 지혜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잠 3:5-8).
악에서 멀어지는 것이다(잠 8:13).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다(잠 14;2).

그로 인한 축복의 약속은?
-지혜와 지식을 얻는다(잠 1:7).
-견고한 의뢰가 있고 피난처가 제공된다(잠 14;26).
-생명의 샘이며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난다(잠 14:27)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얻는다(잠 22:4).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지만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진다(잠 28;14).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다(전 8:13)

요셉은 노예 생활을 하던 중에서도 정조를 지켜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다.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그것은 심판이나 징계가 아니라 더 큰 그릇으로 빚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다. 하나님은 노예 생활 중은 물론 감옥 생활 중에서도 그와 함께 하셔서 그가 하는 일을 형통하게 해주셨고(창 39:3, 5, 21, 23), 마침내는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주셔서 애굽의 총리에 오르게 하셨다(창 41:38-39).

그러나 악한 왕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 임하여 나름대로 꾀를 내어 병사의 옷을 입었지만 하나님이 이미 멸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적국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왕상 22:34).

결국 악인의 결정은 아무리 잘 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벗어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또한 악인은 재앙을 만나고 넘어져도 왜 넘어지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오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기 때문이다(잠 16:1, 9).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시 1:1; 수 1:7-8; 잠 1:1-5; 마 7:24-28-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잠 1:1-5).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8).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형통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결정을 위한 방법보다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좋은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구요한 목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얼마 전 뉴스을 보니, 일반 은행은 소액대출은 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이자가 비싼 사채를 빌려 써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은행도 저리에 소액 대출을 해준다는 사실을 밝혔다. 물론 은행의 홍보가 미흡했지만, 차용자들이 선입견으로 알아볼 생각도 않고 나름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신자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지만 내심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여러 가지 편견이나 오해를 하거나, 그 결과 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내 소원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본다).

-사소한 결정도 하나님의 확인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소한 경우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기대하면서 본인 자신의 자유 의사로 결정하면 된다.

-하나님의 뜻에는 논리성이 없다.
변증학에서는 하나님의 논리가 ‘궁극적인 논리’라고 말한다. 내 논리가 잘못된 것이지 하나님의 논리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사람은 내 시각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엉뚱하고 괴기하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하나님은 당장 나에게 고난이나 질병을 주시고, 오지의 선교사로 가라고 하실거야’

‘하나님은 졸졸 따라다니면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나하나 방해하는 분이야’라면서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가 이전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축복을 주시기 위한 연단이었다. 하나님은 나의 그릇을 키우시기 위해 내가 생각하지 못한 훈련을 시키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길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주셔서 오늘에 이르게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이것은 위의 경우의 반대 입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뜻대로 사는 것이 힘들 때도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힘들어서 타협하고 양보하고 절충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결국에는 승리하여 더 많은 축복을 누리기도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혼자서도 일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사람의 협력을 통해서 일하신다. 일반적으로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당사자의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따라 성취의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내가 뒷짐 지고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한 이스라엘은 여리고성, 아이성 등 한 성, 한 성 전쟁을치르면서 점령해 나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남녀노소를 진멸하라 했지만 그들이 소위 말하는 3 D 직종으로 일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유익을 주었다고 해서 같이 데리고거주하다가, 결국은 그들이 섬기는 신들로 인해 하나님을 버리는 배교의 길로 들어서서 주변 민족들의 침략을 당하는 고난을 수시로 겪었다. 또한 단 지파 족속들은 그들에게 할당된 땅을 정복하지 않아서 결국은 12 지파의 이름에도 끼이지 못하고 말았다(삿 18:1; 계 7장).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순종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무효화 되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나의 육신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특히 ‘은사주의적 신자’들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멘,’ ‘할렐루야’하면서 은혜 체험하고 능력 체험하면 만사가 다 된 줄 알고 실제 생활을 챙기지 않거나 규모가 없이 생활하여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신령한 것을 채워주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다. 은혜 충만 성령 충만하다면서 시간 약속 제대로 안 지키고, 소속 단체나 관공서의 행정 요구를 무시하거나,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면서 계획 없이 돈을 함부로 지출하거나, 하나님이 돌보아 주신다면서 비상 대책이나 노후 대핵을 세우지 않거나, 집안이나 일터가 잘 정리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 보다 많다.

최봉석(권능) 목사가 평양신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학기말 시험을 치루는데 전날 밤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고 기도만 하였다. 다음날 시험을 치루는데 문제를 받아놓고 보니 도무지 답안이 생각나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시험지를 놓고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는 공허하기만 했다. 당황한 최봉석 학생, "시험은 성령께서도 쩔쩔 매시는 것을 몰랐었군!"이라고 하더라고.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다.

어느 교포 목회자가 개척 교회에 초기에 영어을 못하여 청년부를 인도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삼일 금식을 했더니 응답은 “네가 하라”였다. 이후 그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들의 영어 설교를 듣기 위해 시간이 나는 대로 귀에 이어 폰을 꽂고 다니면서 영어 공부에 전렴했다. 이렇게 하기를 일년 정도가 지니자 그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서 이제는 유창하게 영어 설교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외국 사람들의 성령, 영성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감탄한 적이 많다. 우리는 흔히 영성사역, 성령 사역하면 사람이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고, 성령님의 역사하심만 기다리는 것으로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이나 서양은 세미나나 컨벤션 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비록 성령사역 세미나이지만 참가자 등록부터 관리 및 진행까지 모든 것을 철저한 사전 계획을 통해 진행하고, 참가자들에 대한 주의사항, 필요한 사항을 미리 준비하기 때문에 오히려 실제 세미나에서는 성령께서 마음 대로 사역하시도록 개방해 놓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최대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때 심한 심판이 임할 것이다.
심한 심판이라기 보다는 내가 누릴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은 ‘혹시나, 혹시나’하면서 하나님의 뜻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정도 벗어나면 어떻게 하실까,’ ‘저 정도 벗어나면 어떻게 하실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7-9).

필자도 한 때는 너무나 피곤했다. 아무리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행한다고 했지만 열매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피곤하지 아니하고 때가 되니 신령한 축복의 열매들을 거두게 하셨다.
한 두 개가 아니라 우후죽순-비온 후에 대나무 순이 많이 솟아나는 것-처럼 무더기로 거두게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잠시 피곤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서 잠시 낙을 누리는 것보다 100배 낫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1).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구요한 목사>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결정 - 결정의 동기



결정의 동기
비록 성경에 계시된 뜻, 도덕인 뜻의 범위 내에서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선택하더라도 결정의 동기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신자라면 누구나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결정이나 선택의 주된 동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각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해 놓고 하나님께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면 “야, 하나님이 내 기도 응답하셨다”고 기뻐하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왜, 기도해도 응답하시지 않습니까?’라면서 원망한다.

물론 신앙의 초보자라면 이렇게 밖에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 응답하셔서 초보자가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서 더욱 큰 신앙으로 자라가도록 장려하신다. 그러나 이런 기도에만 재미를 붙인 사람은 무엇이든지 정해 놓고 이렇게 구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미-----ㄷ 셥니다”라고 간구하고 울부짖는 기도, 강청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는 것을 본인도 잘 안다. 그렇지만 달리 기도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계속 이렇게 기도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 아니고 내 뜻, 내 생각이 우선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기도라도 들어주시는 벤딩 머신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또한 우리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도 하지만 내심으로는 내 영광,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일을 선택하거나 결정할 때 내 마음 상태가 어떠하며 동기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미혹되기 쉽다.

둘째 사랑의 동기로 결정하고 선택하라.
나의 결정이나 선택으로 인해 나의 배우자, 가족, 친구 더 나아가서 주안의 형제 자매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감안하여 형제-자매 사랑의 동기로 결정하고 선택하라.

사실 신자들 중에서도 이런 점을 감안하여 결정하고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배우자나 가족은 본인의 결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므로 무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주안의 다른 형제-자매에 대한 배려는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도 바울은 형제가 실족한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다(롬 14장, 고전 8-10장). 성경에는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아디아포라’라고 한다. 아디아포라란 그 자체로는 선악이 될 수 없는 것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행위들, 신자 각자의 판단과 양식에 따라 자유롭게 행하는 일들을 말한다.

교회 내에서는 신앙이 연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 같은 행위에 대해서도 사람에 따라 취향, 견해 등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초 문제, 복장 문제, 소비생활, 가제 도구나 자동차, 각종 문화 생활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개성을 중시한다고 하여 이런 것들을 잘 다루지 않으면 서로가 많은 어려움을 당한다.

이런 것들은 어떤 기준으로 다루어야 하나?

*아디아포라를 위한 원칙들
-나의 유익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성경 시대에는 예배의 날이나 절기, 우상숭배를 하고 난 후 시장에서 판 고기를 먹는 경우가 문제가 되었다 (롬 14장; 고전 8-10장).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선악의 기준이 되지 않지만
믿음의 정도에 따라,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 서로의 의견이 달라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직접적인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런 성격을 가진 다른 것들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기나 고기 먹는 문제를 다룬 그 원칙으로 오늘날의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 . .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9, 12-1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3-24).

-내 행동으로 인해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롬 14:13-16).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내 자신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19-22).

이런 기준에 따라, 신자는 공동생활, 취미생활, 여가생활, 문화생활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
-부자라고 사치하거나 화려하게 차려 입고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교회에 오는 경우.
-가난한 이웃은 배려하지 않고 호화판 생활을 누리는 것 등등.

만일 나의 그런 행위로 인해 없는 자들이 받는 상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득세하면 가난한 자들은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어려울 것이다.

위의 기준에 따라 당신의 결정이나 선택을 점검해 보라.
*나의 일방적인 선택이나 결정으로 인해 형제 자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형제-자매를 이용하거나 형제-자매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

언젠가 어느 형제가 이런 상담을 한 적이 있다. 자기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기독교적인 홈페이지를 예쁘게 만들었는데 유명 교회의 어느 전도사 사모가 자기 홈페이지를 거의 대부분 모방해 놓고, ‘왜 모방했느냐’고 했더니,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 사랑이 없다’면서
오히려 책망 하드란다.

또한 어떤 자매는 찬양 사역을 잘 하기 위해서 같은 교회 내의 라이벌 격인 어느 형제를 ‘왕따’ 시키고 자기 말 잘 듣는 팀들로 구성하여 찬양과 경배를 잘 인도하여 매스컴도 타고 사람들의 칭찬도 받았다. 과연 이런 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일까? 하나님 나라 일을 한다면서도 하나님 나라 일에 비정상적인 열심과 자기 영광을 위해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일은 목적도 성경적이어야 하지만 과정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 일을 열심히 한다는 전제 아래 형제를 시기 질투하고, 음해하고 피해를 끼치는 것은 세상의 방법이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영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은 한 마디로 헛수고 하는 일이다.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하여 주님의 저주를 받은 무화과 나무 같은 격이다. 좋은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주님 일을 열심히 한들 심판 날에 주님으로부터 불법자로 인정되어 버림을 받을 것이다.

특히 사역 욕심이 많은 전임 사역자는 물론 평신도 사역자들이 새겨 들을 말이다.

셋째 순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축복을 약속 받았지만 눈 앞의 시련과 고난을 이기지 못해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받은 축복을 까먹고 말았다. 그러므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보다 알려진 뜻을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생각 보다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

실컷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안 후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순종하지 않거나, 얼마 정도 순종하다가 시험과 환란이 생기면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포기하여 쉬운 길을 택하여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고 고난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기도하여 받은 하나님의 뜻, 거듭 반복하여 확인한 하나님의 뜻, 환경이 풀리지 않고,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오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마귀의 시험-유혹-일수도 있고 하나님의 시험-TEST-일수도 있다.

정리하면,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동기는, 첫째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 둘째 이웃 사랑의 동기로 해야 한다. 셋째 순종하려는 자세로 구해야 한다. 이럴 때 하나님도 영광 받고 내 앞 길도 형통할 것이다.

참고: 회색 지대
실제 사회 생활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대로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 조직 내에 학연, 지연, 혈연으로 인한 관계가 끈끈하고 떡값인지 뇌물인지 구분이 불분명한 한국적인 상황에서 매사를 흑백 논리로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다른 주제가 되므로 여기서는 관련 저서를 소개하는 것에 그친다.

-김동호, [깨끗한 부자](구장, 2001).
-김동윤, [솔직히말해서예수님다음으로돈이좋아요](교회성장연구소, 1997).
-리차드 포스터, [돈, 섹스, 권력](두란노, 1989).
-래리 버켓, [하나님의 돈을 어떻게 쓸까요?](CUP, 1993).
-래리 피바디, [직업과 하나님](두란노, 1990).
-마이런 러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면서 훌륭한 사업가가 되는 방법](나침반, 1993).
-원 베네딕트, [돈벌어서 남주는 인생이 되자](상상북스, 2001).
-윌리암 투르하드, [기독교인의 경제 원리](교회교육연구원, 1988).
-잭 하트만, [성경은 경영학 교과서입니다](베다니, 1994).
-Ed Silvoso, Anointed for Business, Regal, 2002.

<구요한 목사>

하나님의 뜻의 종류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창조자이자 주관자이시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의 운행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해가 지고 뜨는 것,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의 운행, 사람의 탄생과 활동과 죽음 등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뜻 안에서 움직인다. 이것을 하나님의 작정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성경에 의하면, 땅의 온 세계, 땅의 모든 거민,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처리되며 이를 금하거나 돌이킬 자가 없다(사 14:26, 27; 단 4:35; 엡 1:11). 즉 하나님의 도모는 영영히 서며(시 33:11). 그 경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사 46;11). 이는 또한 생명의 길이나(욥 14;5), 죽음의 양식(요 21:19) 및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의 배후에도 작용한다(창50:20; 사44:28; 엡2:10). 이것을 하나님의 작정 또는 하나님의 뜻, 도모, 지혜, 경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이에 대한 이해가 확실할 때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져서 “나의 결정”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권적인 뜻과 소원적인 뜻
(1)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사람이 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의 종말과 마지막 심판과 같은 것은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다. 우리의 순종이나 불순종과는 상관이 없다(계2:1 참조). 또한 피조물을 섭리하는 자연 법칙을 우리는 거스릴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중력의 법칙을 부정하더라도 높은 데서 떨어지면 다치거나 죽기 마련이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도덕적인 뜻을 초월하는 경우도 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사건이나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물론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당사자인 아브라함은 실제로 받아들였다-등이다. 이런 것은 예외에 속하지만 하나님은 기쁘신 뜻대로 주권적인 뜻을 행하신다.

(2)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 또는 사람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조건적인 뜻은 사람이 거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이지만 강제하시지 않고 사람의 자발적인 순종에 맡기시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전임 사역자로의 소명에 대한 뜻은 강제하시는 경우가 많지만 개인이나 단체의 축복과 관련된 것은 순종하면 이루어지고 불순종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이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이며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그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물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정화시키고 신앙적으로 성숙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 성숙은 모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드러난 뜻과 숨겨진 뜻
(1). 드러난 뜻, 계시된 뜻
성경 기록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 성경의 명령과 금지, 분명한 가르침은 모든 신자들을 향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들은 윤리, 도덕과 상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신자에게 전도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거룩하고, 말씀을 잃고 묵상하라고 기록한다. 모든 신자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신앙 성장을 이루어가야 한다. 이것은 모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또한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되며,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해서도 안 되고,
-동업이나 동역을 하지 말라는 뜻
- 악하고 더러운 일은 하지 말라고 기록한다
-직업 선택의 범위.

그러므로 성경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이냐 불순종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2) 숨겨진 뜻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부모와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비전을 주셨지만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히는 사실은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무런 사전 통고 없이 욥에게 끔찍한 고난을 허락하셨다. 일어나거나 당하고 난 후에야 아는 것, 이것을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라고 한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왜 하나님은 고난과 어려움을 미리 알려주시지 않을까?
첫째 겁을 먹을까봐 미리 알려주시지 않은 경우이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요셉에게 “요셉아, 비록 내가 너에게 큰 비전을 주었지만 너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고 감옥살이도할 것이다”라고 말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요셉은 큰 비전보다는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느라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미리 아시면서도 알려주시지 않고 실제로 시험이나 고난을 당할 때
감당할 힘을 주시거나 피할 길을 주셔서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릇으로 빗어가신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앞날의 모든 것을 시시콜콜하게 다 알려주시지는 않는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모른 체 정든 고향을 떠났다. 특히 전임 목회자로 부르실 경우, “철수야, 너 내 일 좀 해라. 너는 어느 신학교에 갈 것이고, 네가 공부하는 동안 재정 지원을 얼마 해주겠다”면서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

소명자의 마음 속에 “나는 네가 내일 하기를 원한다”는 강한 확신만 주신다. 나머지는 믿음으로 따라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렇게 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의 범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주권적인 뜻은 알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고 숨겨진 뜻은 미리 알 수가 없다. 계시된 뜻은 신자 모두가 지키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범위 안에서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란 것은 없고, 신자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사람의 이성을 사용하고, 본인의 능력과 환경을 감안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바탕으로 본인이 자유롭게 결정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결혼, 직장, 진학 및 사역에 관한 결정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저촉되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의 선 중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을 면치 못한다.
첫째 이런 주장은 우리의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경시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도덕적인 뜻이라는 범위를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 범위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결정해도 좋다는 주장은 우리의 결정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다.

둘째 이런 주장은 초자연적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를 부인한다. 음성이나 환상과 같은 초자연적 계시를 통한 인도는 성경의 인물에 국한된 것이고 오늘날의 우리는 기대하거나 구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 대부분은 초자연적 계시를 믿는 사람들이므로 이에 대한 변증은 생략한다).

셋째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나를 지으시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내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도 나의 주인이 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주장하신다. 도덕적인 범위만 정해 놓고 나머지는 나의 결정에 맡긴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신 후 자연의 운행을 섭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운행은 자연 법칙에 맡기셨다는 소위 말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 과 다를 바가 없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말하는 ‘지혜’는 결국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지혜가 어떤 방법으로 오는가?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성적인 생각의 형태로 온다고 한다. 지극히 이성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성적인 생각은 물론 음성, 환상과 같은 초자연적 계시로도 온다. 자기들이 체험이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온전하신 뜻과 허용하신 뜻 
그러나 개인적인 뜻 중에도 온전하신 뜻과 허용하신 뜻이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온전하신 뜻이지만 이쉬마엘을 낳은 것은 아브라함의 자의에 의한 것이다. 전자를 온전하신 뜻, 후자를 허용적인 뜻이라고 한다.

원래 허용적인 뜻은 사람의 죄에 대해 사용된 용어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짓도록 방관적으로 허용은 하셨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의 죄값을 치러야 한다.

아브라함이 이쉬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는 상관 없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므로 그 열매는 자기가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우리가 불순종하거나 연약하여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여 다른 선택을 할 때 그 결과는 선택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단히 신앙 정진에 매진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행하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구속적인 뜻과 일반적인 뜻
내가 주의 종이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외지 선교사로 갈 것인가, 내지 목회자가 될 것인가는 하나님의 사역과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구속적인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공을 법학으로 할까 경제학으로 할까? 공대에 갈까 상대에 갈까 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물론 특별하게 인도하시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본인의 재능과 적성, 마음의 소원, 주변 여건에 맡기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여러 종류의 사람을 골고루 들어쓰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속적인 뜻의 경우는 간섭을 많이 하시지만 일반적인 뜻의 경우는 계시된 뜻의 범위 내에서 당사자의 자유 결정에 맡기시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전혀 간섭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구속적인 뜻의 경우보다 간섭하시는 강도나 빈도가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결정과 사소한 결정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나 결정에는 결혼이냐 독신이냐, 대학 진학이냐 아니냐, 어떤 직장을 얻을 것인가, 어디서 어떤 사역을 할 것인가 와 같은 기본적이고 중요한 결정과, 기본적이고 중요한 결정에 부수하는 결정이나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소한 결정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내가 어떤 색, 어떤 종류의 자동차를 살 것인가와 같은 결정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결정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상식과 습관, 여건과 능력, 기호와 환경을 고려하여 결정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사소한 결정에도 때로는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개방적이 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필자는 이런 경우에는 그날의 전체적인 기도를 통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보호, 지혜, 인도를 구한다. “하나님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깁니다. 저를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매사에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실례로, 내가 사는 지역에서 뉴욕 시로 가는 것은 강북 지역에서 한강을 통과하여 강남 지역으로 가는 것과 같다.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교통 체증에 걸리느냐 아니냐가 결정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주님, 교통 체증에 걸리지 않게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후 출발하면 편하게 통과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편하게 통과하면 기도해서 그랬는지 마치 그 시간에는 다른 통로도 뚫려 있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깜박 잊고 기도하지 않고 갔다가는 교통 체증에 밀려 몇 시간을 허비하거나 아는 길도 헷갈려서 헤맬 때가 있다.

또한 교인들을 전화로 심방할 때 이전에는 내가 편한 시간에 전화를 한 결과 그들이 좋지 않은 시간에 전화하여 별 효과를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전화하기 전에 하나님께 문의하여 허락을 받고 하면 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받는 경우가 많은데, 허락하지 않음에도 불고하고 내 생각으로 전화를 한 경우 좋지 않은 시간에 전화하여 별 효과가 없거나,
괜히 전화한 결과 긁어 부스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비록 이런 것들은 사소한 결정의 범주에 속하지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면 형통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결정인 결혼, 진학, 사역 등에 관한 결정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 안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자신의 은사나 능력과 기호,
-마음의 소원,
-주변의 환경,
-여러 사람의 조언을 감안하여
-결국은 자기가 결정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구요한 목사>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결정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학, 결혼, 직장, 사역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일 궁금한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도대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어떤 대학의 어느 학과를 전공해야 하는가?
과연 결혼해야 하는가?
결혼한다면 어떤 사람과 언제 결혼해야 하는가?
어떤 직장을 가져야 하는가?
어떤 사역을 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방황하고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것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성경이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아무리 눈을 닦고 봐도 너는 어느 학교에 진학하고, 너는 어떤 직장을 갖고, 너는 언제 누구와 결혼하라는 말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진학, 결혼, 직장 및 사역에 대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궁금해 하고 조바심을 낸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일까?
이런 일은 그저 본인이 알아서 하는 일일까?
아니다.

우리가 복중에 있을 때부터 아시고,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아시고 앉고 서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드는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멋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며,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마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뜻을 갖고 계신다.

그렇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필자는 여러분과 함께 이 여정을 걸어가고자 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질까?
그러면 먼저 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는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나 궁금증 때문이다.
특히 진학, 직장, 결혼 및 사역과 같은 중요한 결정을 한꺼번에 많이 내려야 하는 20대 청년들에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사실 신자가 아니라면 결정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내 생각이나 능력, 주변의 환경, 여러 사람의 조언을 통해 결정하면 된다. 인간적 가치관에 의해 결정하면 되므로 심각한 갈등이나 따져야 할 것들이 적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신자는 한 가지 중요한 결정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잠시 말겠지만 이런 것들을 결정하는 구체적인 지침들이 성경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뢰하고 느긋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심 반, 불안 반의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둘째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 때문이다
만사가 순조롭게 형통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고통스럽고 힘들게 구하지 않은 경향이 짙다. 주어진 환경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예측 가능한 일들보다 돌발적인 일이 자주 일어나고 내 생각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기대와 소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낙심과 좌절로 인해 과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셋째 오늘날에는 결정할 일이 너무 많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결혼은 부모가 짝지어 주는 것이다. 또한 부모의 가업을 물러 받으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서 이것저것 비교하면서 사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정도로 종류가 많고 선택의 폭이 넓다.

공산 치하에서 민주 국가로 온 사람들이 제일 고심하는 것이 바로 이 분야라고 한다. 공산 치하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을 결정해 주기 때문에 쉬웠는데 민주 국가에서는 무엇을 하든 수많은 것들 중에서 내게 맞는 것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되는데 이것이 말과 같이 쉽지 않다. 제대로 결정하여 선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의견이란 것도 이 사람 다르고 저 사람 달라서 오히려 헷갈릴 때가 많다. 그러므로 결국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혹시나 잘못 결정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으로 인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는 사람도 있다.

혼자만의 부담을 줄이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다른 사람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매스컴에서 강조하거나 남들이 좋아하고 실제로 행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현대 사회를 타인지향형의 사회라고 한다. 남들 따라 하면 최악은 면할 수 있고 마음의 안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도 있다.
혹시나 하나님이 내가 두려워 하는 최악의 것을 하라고 하시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시지 않을까? 혹시나 나를 심하게 책망하시지나 않을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생각보다는 많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은 내버려 두고 자기 열심, 자기 좋아하는 일이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자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수고는 많이 했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수고를 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모른 체 당장 내 손에 있는 ‘사탕’이 아까워서 발발 떨거나, 마치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가 고난 받고 고통 받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내 대신 죽게 하신 분이란 사실을.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풍성한 축복을 예비하고 있는 분이란 사실을.

또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이전부터 그렇게 해왔으니까, 남들도 그렇게 하니까, 성경적으로 옳으니까 라고 생각하여 자기 뜻대로 그럴 듯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하나님의 뜻은 문의하지 않고 자기 열심을 내어 놓고 하나님 일 많이 한다고 뽐내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칭찬을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구요한 목사>

하나님의 뜻6 -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2)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2)
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마 26:42; 마 6:10, 33).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 26:42-43)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그럴 때 하나님의 늘 함께 하셔서 형통한다(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나.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4:13; 벧전 4:11).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벧전 4:11).

내 열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늘 자신의 속을 살펴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욕심, 교만, 시기, 증오, 분노, 거부감의 쓴뿌리를 늘 제거해야 한다.

다. 온전하신 뜻을 행할 때 기쁨과 평강이 임한다(롬 2:9-10; 8:5-6)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9).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불안, 초조, 답답함,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 온전하신 뜻을 행할 때 영적, 신앙적으로 성숙한다(히 5:13-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그러므로 진정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 의지를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여 내 뜻, 내 소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섬기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더 나아가서 지역이나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성숙한 신앙인은 기도 제목조차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예언적 기도라고 한다. 예언해 주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 제목을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적으로 받는다는 말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더하여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성을 들을 때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허용하는 뜻을 구분하는 영적 안목이 필요하다.

마. 온전하신 뜻을 행할 때,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늘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고, 첫 사랑을 유지하고, 열심을 낸다(요 15:6-7, 10; 요일 4:16-17; 계 2:4; 3:19).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요 15:6-7).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은, 신앙을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자발적인 순종이 아니라 딱딱하고 비인격적인 규정과 행동의 준수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는 신랑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불꽃 튀는 인격적인 교제가 아니라 규정과 고백과 행동 강력으로 전락시킨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요일 4:16-17).
 <구요한 목사>

하나님의 뜻5 -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1)|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1)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문의-특히 예언 기도--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지만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마음의 위로를 구하기 위한 요식 행위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확인되면 순종하여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음이 필요하다.
가. 신자라야 한다.

나. 지혜로워야 한다(엡 5:15-16).
하나님의 모략을 구하라. 조나단 에드워즈 처럼,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것을 위해 한 시도 놓치지 않고 나 자신을 개선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 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 6:5-6).

라. 기꺼이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마 7:7-8).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겔 36:37).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절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하나님의 뜻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뜻을 알았다고 해서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연단하고 기도해야 한다.

마.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육적인 안락과 편안함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구요한 목사>

하나님의 뜻4 - 무조건적인 뜻과 조건적인 뜻

무조건적인 뜻과 조건적인 뜻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떻게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뜻이 아닌 모양이다.”

“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적인 뜻 중에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될 일이 있고 사람의 협력 여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 일도 있다.

가. 무조건적인 뜻  - 이제 곧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모든 사람이 백보좌에서 심판을 받은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들이다. 성경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에 대해 기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계 1:1).

나. 조건적인 뜻 - 그러나 어떤 개인이나 단체에 대한 축복과 재앙의 약속은 받는 사람의 순종과 회개 여부에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성경을 보면 비록 하나님의 뜻이지만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었다.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출 3:17).

그러나 계속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출애굽 제1세대 중에서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죽어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 소망이 100%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벧전 3:9).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경우, 개인이나 단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 사람의 순종 여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더라도 마음밭이 옥토가 되어 계속 키워나가지 않으면 열매를 맺기 어렵다.

물론 은혜가 풍성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가 한 두 번 불순종했다고 해서 약속을 쉽게 거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것은 한 두 번의 불순종 때문이 아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는커녕 번번이 자기들의 육신적인 요구가 채워지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원망했을 때 하나님은 단호하게 그들을 버리셨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의심하고 시험한 결과 하나님의 혐오감을 자아내어 일주일이면 통과할 광야를 40년 동안이나 빙빙 돌다가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95:9-10; 민14:21-23 참조). 



한편, 하나님은 선지자 요나를 통해 니느웨성의 멸망을 선포하셨다.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그랬더니 그들은 왕으로부터 전 백성에 이르기까지 회개한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였다. 

이처럼 개인, 단체 또는 국가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은 대부분이 '조건적'이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순종 여부에 따라 성취 여부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속의 말씀에 계속 불순종하면 축복의 약속을 거두시고 또한 불순종하였더라도 회개하면 그 약속을 다시 돌이키기도 하신다.

*소명에 대한 부르심은 취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임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거역하는 자는 늦어도 하나님이 반드시 부르시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니느웨 성에 복음 전하는 것이 싫어 도망갔다가 다시 불려온 요나처럼, 어떤 사람은 삼십대 후반에 소명을 받았는데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오십 대가 넘어서야 코가 끼여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르심은 거역해도 부르시는 경우가 많지만 축복의 약속은 순종 여부에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우리 중에 순종하지 못하여 축복을 놓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구요한 목사> 

하나님의 뜻 3 - 온전하신 뜻과 허용하신 뜻

온전하신 뜻과 허용하신 뜻
최근에 재미 있는 글을 하나 읽었다.
어떤 사람이 퇴근 후 저녁 간식으로 빵을 사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밤참으로 빵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래 사 가지고 가자. 내가 잘못 들었을거야. 식빵을 밤참으로 먹겠다고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어서 그분이 반대하시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다시 여쭈어 보았더니 이번에는 “그렇게 먹고 싶으면 사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 맞아 주님께서도 허락하신 것 같은데 이제 사러 가자.”
이 사람은 큰 마음 먹고 이틀 분의 빵을 샀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듯한 음성이 또렷이 들려왔다.
“빵 하나도 못 이기는 사람이 무슨 순교를 한다고!”
“오, 나의 사랑하는 주님, 어찌 하오리까. 이 죄인을! 먹고 싶은 생각이 주님의 음성도 지어내고 말았으니 어찌 하오리까. 주님을 위한 길이라면 순교인들 감사하며 기쁨으로 받지 못하리이까 하며 늘 주님 앞에 자랑스레 가지고 있는 마음인데 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스런 일인고! ”

이 사람은 그래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금방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응답 받아놓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흐믓해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도 어떤 경우에는 내가 그 뜻을 순종하기에 너무나 힘들어서 내가 생각하는 다른 길을 허락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이 처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perfect will)이고 내가 떼를 쓴 것은 허용하신 뜻(permissive will)이다.

1. 온전하신 뜻(롬 12:2; 사 55:8-9)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전하신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많이 따른다.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평소의 생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온전하신 뜻인지 확실히 모르는 경우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보다 쉬운 허용하신 뜻을 행하는 경우가 많다.

2. 허용하신 뜻

온전하신 뜻에서 벗어나 내 뜻대로 하려는 경우
-육적인 편안함과 안락함에서 안주하려는 경향.
-희생을 치르기 싫은 경우. 감당하기 힘든 경우.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상식과 지혜에 의지하는 경우.
-그러나 결국은 더 많은 희생, 더 많은 변화, 더 많은 고통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예)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 출애굽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나중에 마귀의 놀림을 받아 예수를 부정함, 등

-특히 소명에 관해 계속 거부하거나 불순종하면 징계하신다(출 4:10-14).
도망가다 붙잡힌 요나.

내가 떼를 쓰면 하나님은 허락하시지만 그 열매는 내가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잠 1;31). 우리가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에 들어가면 원수의 공격에 노출되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을 온전하신 뜻인 줄 착각하여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분명히 허락하셨는데 왜 결과가 이 모양일까?"
"기도를 통해 응답 받은 것인데 왜 이렇게 일이 잘 되지 않을까?"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시 106:15).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요구한 결과, 비록 그 기도가 응답되어 메추라기도 먹고 물도 마셨지만, 그들의 영혼은 오히려 삭막해졌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맡기는 것이 진정한 순종
우리도 마찬가지다. 많은 경우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가 기도 제목을 정해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쓴다.

그리고 응답 받으면 "야, 하나님이 우리 기도 응답해주셨다"고 기뻐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령이 공허하고 답답하거나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것은 온전하신 뜻이지만 이스마엘은 낳는 것은 허용하신 뜻이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은 골치를 앓았으며 오늘날까지 이스라엘과 아랍 제국이 대치되는 비극을 낳지 않았는가?

또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행하기 어려워서 내가 편한 대로 내 생각의 '물'을 탈 때,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 행하도록 방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역자에게 하나님은 A라는 사역을 하라고 하셨지만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미루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름대로 열과 성을 바쳐 B라는 사역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러 가지 재앙이 따랐다.

당연히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주님, 저는 이렇게 주님 일을 열심히 하는데 왜 이런 재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까?” 필자는 기도 중 그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름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염려와 두려움으로 인해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어떤 경우,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만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할 때 좀 막아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만일 그럴 수 있으셨다면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열매를 따먹는 순간 "잠깐만! 너희가 그 열매를 따먹으면 죽으리라"라고 하셨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을 그들의 자유 의지에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 의지를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여 내 뜻, 내 소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섬기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더 나아가서 지역이나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된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즉 온전하신 뜻을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기도 제목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하라
성숙한 신앙인은 기도 제목조차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더하여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허용하는 뜻을 구분하는 영적 안목이 필요하다. 영이 주는 평강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마음이 편하고 심각한 도전이나 결단이 없이도 행하기 쉬운 것은 많은 경우 허용하신 뜻인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급진적이고 뜻밖의 일을 행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구요한 목사>

하나님의 뜻 2 - 보편적인 뜻과 개별적인 뜻

보편적인 뜻과 개별적인 뜻

1. 보편적인 뜻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궁금해 하고 답답해 한다. 그러나 성경 자체가 신자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 말씀의 약속, 위로, 권면, 책망, 인도, 보호가 모두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벧전).
-거룩과 성화에 힘쓰는 것(살전 4;3).
-주안에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살전 5:16-18).
-부모를 공경하는 것(엡 6:1).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피차 복종하는 것(엡 5:21).
-말씀 읽기와 묵상(시 1:2).
-전도와 선교(행 1:8).
-신자는 천국에 불신자는 지옥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들이 모두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2.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하나님의 뜻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전도하고 선교하라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오지의 선교사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말씀을 전파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전임 목회자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개인, 가정, 교회,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다.

3.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그러면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에 의해(출 28:30; 신 33:8)(구약에서),

-제비 뽑기(수 14;2 15:1; 행 1:26)(신, 구약에서).
오늘날 교회나 교단의 임원 선거의 부정으로 인해 제비 뽑기를 하는 교파도 있다.

-선지자를 통해서(삼상 23:2; 왕하 8:8; 행 21:10).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문의(창 25:2; 대상 14:14).

-성경 말씀

-성령의 인도하심이나 내적 확신

-마음의 부담

-환경—좋은 환경 나쁜 재앙 등을 통해 복을 주시거나 징계하신다.

-다른 사람

-꿈, 환상

-내적 음성, 들리는 음성

-은사의 개발과 사용

-천사의 방문 등.

이는 하나님의 음성의 종류와 비슷하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아는 것이다.<구요한 목사>

하나님의 뜻 1

하나님의 뜻이란? 
오늘날 내 생각, 내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렇지 않고 내 생각, 내 뜻대로 한 것은 모두가 열매는 없고 무성한 잎사귀와 같이 쓸모가 없다. 공력을 시험할 때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는 나무나 풀이나 짚에 불과하다(고전 3:12-15).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한 때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 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 않게 작정해 놓으셨다. 하나님은 장래에 일어날 무엇이든지 영원부터 주권적으로 결정하시고 자연적 정신적 전 피조계에 자기의 주권적 의지를 행사하시되 자기가 선정하신 계획에 의해 행하신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 또는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세분하면 하나님의 지혜(지성적 측면)와 하나님의 작정(의지적 측면)이 있다.

1.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란 사물을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경영, 모략, 도모를 말한다.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사14: 26).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사 11:2).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불레)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6-27).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이 보기에 미련한 것 같지만 구원을 이룬다(고전 1:25). 사람의 지혜는 뛰어난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허사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시 2:1).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당시 로마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로마의 관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것이 바로 죄인을 영원한 진노에서 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였다. 지금도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한 전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고전 1:21).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2.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작정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나 주권적인 의지를 말한다. 신약에서는 뜻(델레마), 기뻐하시는 뜻(유도키아), 원하시다(불로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유도키아)이니이다"(마 11:26).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델레마)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모든 일을 그 마음(델레마)의 원(불레)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불로마이)"(벧전 3:9).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되고 구원 받았다(엡 2:10).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행할 수 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행13:2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란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인생 최고의 보람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구요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