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6/2009

성경을 통한 구체적인 인도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어거스틴은 어느 날 수도원에서 참회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웃의 어린 아이가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는 가사의 노래를 하였는데 그는 그 음성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는 음성을 알았다. 그는 그 음성에 순종하여 옆에 두었던 성경을 펴서 제일 먼저 자기의 눈길이 닿는 부분을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

그는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고 믿음에 대한 의심을 물리치고 이전의 정욕적인 삶을 청산하고 회심하여 평생 주님께 헌신하는 위대한 주의 사자가 되었다.

5만번 기도응답을 받은 조지 뮐러는 어느 날 성경을 묵상 하던 중,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라는 말씀이 마음에 너무나 와 닿았다. 그래서 그는 영국에 고아원을 차려서 기도 하나만으로 평생에 걸쳐 수천명의 고아를 먹여 살리는 사역을 감당했다.

그러면 이런 것과 5-1의 서두에서 예를 든 것-‘가서 행하라’-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처음 예는 성령의 감동이 없는 ‘나의 결정’이고 지금의 예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말씀에 의한 결정’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성경 말씀은 인도나 안내의 일반적인 원칙은 제공하지만 구체적인 지침은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때로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구체적인 인도나 안내를 하시기도 한다.

5-1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여기서 그 의미를 충분하게 설명한 후에야, 때로는 성경 말씀도 '구체적인 인도'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구분하여 기록된 객관적인 말씀은 로고스이고 기록된 말씀을 바탕으로 성령이 마음에 감동을 준 말씀을 레마로 이해한다.

로고스가 우물이라면 레마는 우물에서 퍼올린 말씀이다. 로고스 말씀이 비록 하나님의 말이지만 당사자에게 ‘그 말씀 자체’가 능력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로고스 말씀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읽거나 듣는 사람에게 개인적, 구체적으로 부딪칠 때 능력의 말씀, 믿음의 말씀, 인도적인 말씀이 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로고스와 레마는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레마라는 물은 로고스의 우물에서 필요할 때 퍼올려지는 것이므로 평소에 객관적인 로고스를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물론 성경에는 말씀을 의미하는 헬라어로 로고스와 레마라는 두 가지 헬라어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혼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을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글로리아넷의 신앙변증 시리즈 ‘로고스와 레마’를 보기 바란다. 여기서는 간단한 구분에 그친다).

물론 성경에 사용된 로고스와 레마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예도 있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된 예도 있다. 단어의 의미는 수학 공식처럼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다른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로고스와 레마를 전혀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구분하는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만일 우리가 단어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구원하다’는 말에도 문제가 있다. 우리는 ‘구원’이라면 얼른 영혼 구원을 떠올리지만 성경에서 구원을 말하는 헬라어 ‘소조’는 영혼 구원은 물론 몸의 치유, 고난에서 건내낸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왜 ‘구원’이라면 금방 영혼 구원을 떠올릴까? 그렇다고 이것이 성경적으로 틀리는 주장일까?

로고스와 레마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시시비비를 하기 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다 다양하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의 내적 증거
자유주의자들은 아예 성경은 인간의 기록으로 단정해 버리고. 또한 소위 말하는 신정통주의자들은 그 말씀이 읽는 자에게 개별적으로 역사할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감동을 주실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면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증거되는가? 물론 보수주의의 입장에서는 기록의 특징, 일관성 등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것은 ‘성령이 내적으로 증거’하기 때문이라고 개혁 신학은 말한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Internal testimony of the Holy Spirit)라고 한다.

비록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각자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이 그 사람의 심령 속에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말씀의 객관성과 주관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이나 신정통주의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 내적으로 그들에게 증거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보수신학은, 기록된 성경 말씀은 사람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객관성), 성령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개개인에게 개별적, 구체적으로도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후자를 흔히 “성령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The Holy Spirit speaks in the Scripture)고 표현한다. 필자가 알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뜻으로 레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 말씀을 많이 읽어도 모든 말씀이 항상 뜨겁게 감동을 주거나 강한 믿음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구절이 마음에 감동을 주거나 또는 위기나 필요한 순간에 성령님이 어떤 구절을 생각나게 해주시면 그 말씀이 믿음을 더해주고 또 실제로 인도, 보호해 주는 경우가 많다.

누가 이런 체험을 부인할 것인가? 이런 체험은 일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것이다. 물론 비판자들의 지적과 같이 로고스와 레마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신학자들이 어떤 교리를 도출하기 위해 단어의 뜻을 제한적이고 좁은 의미로 사용하듯 ‘레마’를 제한적이고 좁은 의미로 사용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부인하는 저명한 설교학 교수인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도 Decision Making by the Book(성경책에 의한 의사결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공부하고 암기한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그 말씀들을 우리의 특정한 상황에 적용하게 하신다.”

필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전임 사역자로의 부르심을 받고 다른 사람의 증거, 기도를 통한 확신을 가졌지만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어서 주님이 좀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기를 원했었다. 요즈음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결국은 성경 말씀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눈 감고 몇 페이지를 펴서 눈에 들어오는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해 주실 것을 기대하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주님을 위한 열정과 헌신이 식어지지 않는 것을 고백한 구절(고후 11:22-33)을 보고 내 마음이 뜨거워졌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서 주춤하고 망설인 사실을 울부짖으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문자 그대로 “아골 골짜기라도 가겠다”는 다짐이 섰다. 더 이상 망설이고 의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말씀은 나의 결정에 대한 레마로 닥아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로고스와 레마의 구분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구분으로 인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보다 풍성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성경 말씀을 읽는 중에, 책을 읽는 중에,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그 사람을 통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설교 말씀을 전한 후에 어떤 교인이 다가와서 “목사님, 오늘 설교는 바로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더러 있다. 비록 전 교인을 대상으로 전한 설교이지만 특정한 사람의 특정한 상태에 직접 부합되는 말씀이 되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해 성령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목회자들 중에서는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이처럼 성경은 설교 말씀, 말씀 묵상을 할 때 레마가 되어 위로, 안위, 약속, 권면, 책망은 물론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특정한 일에 대한 비전, 인도, 안내, 지침이 되기도 한다. 어거스틴이나 조지 뮐러 처럼 성경 말씀을 통해 구체적인 비전, 인도, 지침을 주시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성경은 어떤 비술이나 점치는 것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지만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거나 생각나게 해주시는 일에 폐쇄적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구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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