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6/2009

성경 - 잘 결정하는 기술보다는 잘 결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성경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로 하고 성경 책을 펼쳤더니 “가룟 유다가 가서 목 매어 죽으니라”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것은 잘못된 것일거야’라면서 다시 한 번 책을 펼쳤더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구절이 들어왔다. ‘그럴 리가 있나? 삼 세 번이다’라면서 성경을 펼쳤더니 “속히 행하라”는 구절이 눈에들어왔다.

지어낸 이야기인지 사실인지 모르지만 성경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점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인도하고 안내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리가 좋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성경은 도덕적인 뜻의 범위를 정하기는 하지만 두 가지 선 중에서 어떤 것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은 없다. 성경은 ‘결정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현명한 결정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잘 결정하는 기술’보다는 ‘잘 결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경은 우리가, 결혼할 것이냐 독신으로 지낼 것이냐, 어느 학교에 다닐 것인가, 어느 직장에 다닐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나 지침은 없다. 성경은 그런 것을 분별하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을 분별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또 현명한 결정을 잘 내릴 수 있을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산 제사란;  나의 옛 자아가 죽고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을 말한다. 제물은 죽인 후에 드려진다. 그러므로 산 제사를 드리는 자는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통째로 주님께 드려지는 것을 말한다. 예배란 교회의 예배 시간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드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

영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켄은 원래는 ‘합당한’이란 뜻인데, 신자가 드리는 ‘산 제사’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제사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제사가 곧 신령한 예배 즉 ‘영적 예배’임을 말하고 있다. (벧전 2:2에서는 이 말이 ‘신령한’ 젖으로 번역되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대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세대는 음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육신의 정욕을 부추기는 세대이다.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내세운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러한 세대의 풍습, 사고방식, 생활습관을 본 받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되어 있다.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계획, 더러운 것들 뿐이다. 신자는 보혈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매일 마음을 새롭게 하는 회개를 하고 믿음을 더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변해야 한다.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서로 다른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의 성격을 다른 국면에서 강조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분별하다’는 말인 도키마조는 ‘시험하다,’ ‘입증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다는 말은 신자들 자신의 삶을 시험대에 올려놓아서 그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고, 악한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끊임 없이 변화를 받아가면서, 실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는 삶을 살고 그렇게 되면 좋고 현명한 결정을 잘 내릴 수 있다.

에베소서 5:15-1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기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라’고 명령한다. 주의 뜻을 이해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와 대조된다. 주의 뜻을 행하는 자는 지혜 있는 자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15절).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혜 있는 자, 주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본문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세상 술에 취하는 자들이지만 지혜 있는 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행하는 자는 새 술인 성령의 충만을 받는 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받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사도행전에 나오고 다른 하나는 여기에 나온다.

사도행전에 사용된 ‘충만하다’는 단어는 헬라어 핌플레미의 부정과거형으로서,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충만을 말하며 그 결과 방언과 같은 외적 능력이나 은사가 나타나는 성령충만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충만하다’는 단어는 헬라어 플레로의 현재형으로서 계속적이고 습관적인 충만을 말하는데 그 결과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리스도를 복종함으로써 피차 복종하는 인간관계의 성숙을 말한다.

즉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은 은사적인 사역을 위한 외적 충만이고 에베소의 성령 충만은 사람의 품성이나 윤리적 성숙과 관계된 성령충만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를 구분하기 위해 전자를 능력성령충만 후자를 생활성령충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국 신자들은 생활성령충만을 계속적으로 받아서 그리스도에 복종함으로써 찬미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피차 복종하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행하는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요 7:17과 마 13:14-15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 7:17)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이 두 구절을 한꺼번에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렇지 못한 자,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보고 듣기는 하지만 무엇이 하나님 뜻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살수록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어떤 중요한 일이나 미래의 일에 대한 뜻을 물으면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경우가 많다. 성경을 통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된 뜻, 도덕적인 뜻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에게 다른 뜻을 드러내 주셔도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순종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나도 실제로 이런 체험을 많이 했다. 내가 성경에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한 걸음 때로는 열 걸음씩 인도해주시지만 내가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이전에 주신 말씀에 멈추어서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다시 새로운 길을 알려주셨다.

내가 죄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그런 간구조차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증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물론 예수님 외에 완전한 사람은 없고 우리 중에 죄 짓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된 명령과 금지의 말씀, 자기가 알고 있는 죄 정도는 철저하게 회개한 후에 하나님의 지혜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잠 3:5-8).
악에서 멀어지는 것이다(잠 8:13).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다(잠 14;2).

그로 인한 축복의 약속은?
-지혜와 지식을 얻는다(잠 1:7).
-견고한 의뢰가 있고 피난처가 제공된다(잠 14;26).
-생명의 샘이며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난다(잠 14:27)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얻는다(잠 22:4).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지만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진다(잠 28;14).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다(전 8:13)

요셉은 노예 생활을 하던 중에서도 정조를 지켜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다.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그것은 심판이나 징계가 아니라 더 큰 그릇으로 빚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다. 하나님은 노예 생활 중은 물론 감옥 생활 중에서도 그와 함께 하셔서 그가 하는 일을 형통하게 해주셨고(창 39:3, 5, 21, 23), 마침내는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주셔서 애굽의 총리에 오르게 하셨다(창 41:38-39).

그러나 악한 왕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 임하여 나름대로 꾀를 내어 병사의 옷을 입었지만 하나님이 이미 멸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적국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왕상 22:34).

결국 악인의 결정은 아무리 잘 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벗어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또한 악인은 재앙을 만나고 넘어져도 왜 넘어지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오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기 때문이다(잠 16:1, 9).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시 1:1; 수 1:7-8; 잠 1:1-5; 마 7:24-28-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잠 1:1-5).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8).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형통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결정을 위한 방법보다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좋은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구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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