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하신 뜻과 허용하신 뜻
최근에 재미 있는 글을 하나 읽었다.
어떤 사람이 퇴근 후 저녁 간식으로 빵을 사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밤참으로 빵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래 사 가지고 가자. 내가 잘못 들었을거야. 식빵을 밤참으로 먹겠다고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어서 그분이 반대하시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다시 여쭈어 보았더니 이번에는 “그렇게 먹고 싶으면 사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 맞아 주님께서도 허락하신 것 같은데 이제 사러 가자.”
이 사람은 큰 마음 먹고 이틀 분의 빵을 샀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듯한 음성이 또렷이 들려왔다.
“빵 하나도 못 이기는 사람이 무슨 순교를 한다고!”
“오, 나의 사랑하는 주님, 어찌 하오리까. 이 죄인을! 먹고 싶은 생각이 주님의 음성도 지어내고 말았으니 어찌 하오리까. 주님을 위한 길이라면 순교인들 감사하며 기쁨으로 받지 못하리이까 하며 늘 주님 앞에 자랑스레 가지고 있는 마음인데 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스런 일인고! ”
이 사람은 그래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금방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응답 받아놓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흐믓해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도 어떤 경우에는 내가 그 뜻을 순종하기에 너무나 힘들어서 내가 생각하는 다른 길을 허락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이 처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perfect will)이고 내가 떼를 쓴 것은 허용하신 뜻(permissive will)이다.
1. 온전하신 뜻(롬 12:2; 사 55:8-9)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온전하신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많이 따른다.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평소의 생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온전하신 뜻인지 확실히 모르는 경우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보다 쉬운 허용하신 뜻을 행하는 경우가 많다.
2. 허용하신 뜻
온전하신 뜻에서 벗어나 내 뜻대로 하려는 경우
-육적인 편안함과 안락함에서 안주하려는 경향.
-희생을 치르기 싫은 경우. 감당하기 힘든 경우.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상식과 지혜에 의지하는 경우.
-그러나 결국은 더 많은 희생, 더 많은 변화, 더 많은 고통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예)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 출애굽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나중에 마귀의 놀림을 받아 예수를 부정함, 등
-특히 소명에 관해 계속 거부하거나 불순종하면 징계하신다(출 4:10-14).
도망가다 붙잡힌 요나.
내가 떼를 쓰면 하나님은 허락하시지만 그 열매는 내가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잠 1;31). 우리가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에 들어가면 원수의 공격에 노출되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을 온전하신 뜻인 줄 착각하여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분명히 허락하셨는데 왜 결과가 이 모양일까?"
"기도를 통해 응답 받은 것인데 왜 이렇게 일이 잘 되지 않을까?"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시 106:15).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요구한 결과, 비록 그 기도가 응답되어 메추라기도 먹고 물도 마셨지만, 그들의 영혼은 오히려 삭막해졌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맡기는 것이 진정한 순종
우리도 마찬가지다. 많은 경우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가 기도 제목을 정해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쓴다.
그리고 응답 받으면 "야, 하나님이 우리 기도 응답해주셨다"고 기뻐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령이 공허하고 답답하거나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것은 온전하신 뜻이지만 이스마엘은 낳는 것은 허용하신 뜻이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은 골치를 앓았으며 오늘날까지 이스라엘과 아랍 제국이 대치되는 비극을 낳지 않았는가?
또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행하기 어려워서 내가 편한 대로 내 생각의 '물'을 탈 때,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 행하도록 방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역자에게 하나님은 A라는 사역을 하라고 하셨지만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미루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름대로 열과 성을 바쳐 B라는 사역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러 가지 재앙이 따랐다.
당연히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주님, 저는 이렇게 주님 일을 열심히 하는데 왜 이런 재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까?” 필자는 기도 중 그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름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염려와 두려움으로 인해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어떤 경우,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만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할 때 좀 막아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만일 그럴 수 있으셨다면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열매를 따먹는 순간 "잠깐만! 너희가 그 열매를 따먹으면 죽으리라"라고 하셨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을 그들의 자유 의지에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 의지를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여 내 뜻, 내 소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섬기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더 나아가서 지역이나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된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즉 온전하신 뜻을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기도 제목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하라
성숙한 신앙인은 기도 제목조차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더하여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허용하는 뜻을 구분하는 영적 안목이 필요하다. 영이 주는 평강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마음이 편하고 심각한 도전이나 결단이 없이도 행하기 쉬운 것은 많은 경우 허용하신 뜻인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급진적이고 뜻밖의 일을 행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구요한 목사>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