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끝'은 막연(漠然)하게 추상적(抽象的)이거나 관념적(觀念的), 또는 영적(靈的)으로 이해하지 않고 사실적(寫實的)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바르게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지켜질 수 있다. 모든 '시작'이나 '처음'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끝'을 막연한 이해로 간과(看過)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뜻을 만홀(漫忽)히 여기는 것이 될 수 있다.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땅끝'은 어디인가? 지구는 둥글다. 둥근 지구의 땅을 어디가 '시작'과 '처음'이고, 어디가 '끝'이라고 할 수 있으랴. 자칫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 끝'의 사실적 이해가 무척 난해(難解)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을 단순하게 바꾸면 결코 난해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둥근 것에도 '시작'이나 '처음', 그리고 '끝'이 분명히 있고, 그것은 '같은 곳'이 되기 때문이다. 마차가지다. 지구는 둥글기에 '시작'이나 '처음', 그리고 '끝'은 '같은 곳'이다. 이것은 애매(曖昧)한 궤변(詭辯)이 아니라 진실(眞實)이다.
그렇다. 예루살렘이 복음이 전파된 '시작'이요 '처음'이라면, 복음이 마지막으로 전파되어야 할 곳도 '예루살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意圖)는 무엇이었을까? 이동성(移動性)을 마음에 두신 까닭이다. 복음을 전파하려면 한 곳에 머물러 정착(定着)하지 않고, 자꾸만 움직여 사방(四方)으로 흩어져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전파는 역동적(力動的)으로 이동하면서 일어나야 한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기 시작한 예루살렘에 안주(安住)하여 정착되지 않고, 온 유대지방과 사마리아와 온 세상을 향하여 역동적으로 흩어져 전파되어야 한다. 그리고 복음 전파가 처음 시작한 곳인 예루살렘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글/ 불꽃 石一進
8/27/2011
아빠의 마음.
“그리하여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58:8)
브랜든이라는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빠가 거실에서 초콜릿 과자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브랜든은 '아빠는 초콜릿을 우유와 함께 드시는 것을 좋아해. 우유 한 잔을 아빠에게 갖다 드릴 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의자에 올라가 찬장 문을 끌어당겼습니다.
"와장창~" 찬장 문이 열리며 다른 쪽 찬장을 쳐서 손잡이에 흠 자국을 냈고, 유리잔을 꺼내다가 옆 잔을 건드리는 바람에 잔 두 개가 떨어져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브랜든의 눈에는 그것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가 생각하는 것은 아빠에게 우유 한 잔을 갖다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브랜든의 아빠는 아들을 막아야 되나 어쩌나를 생각하다가 좀더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브랜든은 의자에서 내려와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는 우유통을 꺼냈습니다.
그는 뚜껑을 벗겨내고 유리잔 주변에 쏟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잔에도 얼마는 들어갔지요. 그러나 대부분은 마룻바닥에 쏟아졌습니다. 드디어 잔이 차자 브랜든은 우유잔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습니다.
"아빠, 나 아빠께 드릴 것이 있어요."
그는 뛰어 오다가 발을 헛디뎌서 우유를 마루와 소파에, 심지어 아빠에게까지 엎질렀습니다. 브랜든은 그렇게 하고 나서야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깨어진 유리, 온 마루에 엎지른 우유, 열린 찬장들, 그리고 우유를 뒤집어 쓴 아빠를 보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젖은 눈물 사이로 아빠를 바라보았는데 아빠는 곧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빠는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꼬마를 보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사랑하는 예쁜 꼬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브랜든의 아빠는 팔을 펴서 그의 어린 꼬마를 꼭 껴안고 말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야." -화끈한 예화 / 웨인 라이스 (200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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