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3/2009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무엇인가?


1. <로고스> <레마>를 구분하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로고스>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은 <로고스> <레마>는 ‘말씀’에 대한 두 가지 헬라어로 번역이라고 하면서, 의미면에서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로고스>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레마> <로고스>되는 말씀이 청자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로고스>는 객관적, 합리적, 이성적인 말씀인데 반해, <레마>는 주관적, 감정적, 개인적인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고스>로서의 말씀의 기능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레마>로서의 말씀입니다. <로고스>의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인간에게 임하게 될 때, 실제적으로 그에게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합니다. 이러한 <로고스>에서 <레마>로의 변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역사나 은사를 매우 강조합니다.

2. 이들의 <로고스> <레마> 구분은 과연 성경적인가?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사용된 두 단어의 용례와 구문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신약 언어에 정통한 성경 사전만큼 도움이 되는 자료는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소유하고 있는 두 가지 성경 사전(「킷텔 신약 원어 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by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콜린 브라운 신약 사전(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by Colin Brown): 참고, 이 두 권의 사전은 신약 원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기술하는데 정평이 나 있는 좋은 사전임」의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로고스>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정당화 할만한 원어적 근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로고스> <레마>의 용법이 성경에서 전혀 차이가 없는 형태로 사용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로고스>의 경우, 헬라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사용한 것과 또한 구약과 신약(그중에서도 요한복음서의 경우는 매우 특별함)에서 언급된 범례가 신학적으로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고스>에 대한 일반적인 용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로고스> <레마>를 전적으로 구분하여 하나는 기록된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되어진 말씀이라는 식의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한편 신약 성경의 헬라어<로고스> <레마>는 구약 성경의<다바르(rb'D'))>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70인경(LXX)의 경우, <로고스> <레마>의 차이를 두지 않고서 상호 교환적으로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예레미야 1:1,2에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1절에서는 <레마>, 2절에서는 <로고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 부지기수입니다. <로고스> <레마>가 사용된 용례가 전혀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두 단어가 앞서 말씀드린 그러한 방식의 구분을 입증하는 사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두 단어를 임의로 구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성경의 본의를 왜곡하는 비신앙적 행위입니다.

3. 그렇다면 누가, <로고스> <레마>를 구분하는가?
이미 앞서 ‘누가’에 해당하는 범주의 사람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성경 해석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1) 오순절식 성령 운동주의자(순복음 교회, 피터와그너 계열), (2)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 (3) 워치만니 계열에속한 자(지방교회 혹은 형제교회), (4)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 <알파 운동> 옹호론자(이단), (5)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주창자

혹자들 중에는 (5)의 예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정통주의의 내면을 알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정통신학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자들의 세속적인 성경 이해에 맞서 하나님 말씀 중심의 신학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3가지 형태로, 즉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이런 성경 이해는 성경과 하나님 말씀과의 차별을 인정하게 되면서, 성경은 인간에게 말씀으로 다가올 경우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희한한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과 말씀과의 구별 혹은 차별은 결국 성경이 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지의 여부는 성경을 읽거나 혹은 성경을 통해 느끼거나 하는 체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배태하였습니다. 흔히 Q.T라고 불리는 <말씀 묵상>이라는 성경 이해 방식이 신정통주의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근거로 보편화되었다는 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하지만 <로고스> <레마>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신학 이론을 만든 사람이라면, 찰스 파라(Charles Farah, 1926-2001)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의 은사주의 신학의 요람인 오랄 로버츠 대학(Oral Roberts University)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고전적 은사주의 운동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 신앙 운동’(the Word Faith movement)의 주창자였습니다. 이 운동은 신학적으로 오순절적 은사 운동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내용면에서 훨씬 더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세속적인 은사주의 운동입니다. 그런데 이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찰스 파라가 고안해 낸, <로고스> <레마>의 구별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로고스>의 법적 성격의 말씀이 삶의 체험과 경험(대부분이 초자연적인 은사나 세속적 번영과 축복과 관련된 것이지만)으로서 <레마>의 말씀으로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 혹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는 반면, 말씀은 오직 체험이라는 구호를 부르짖습니다. 그러한 영적 체험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주관화가 중요한데,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성령의 신비적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 내용으로 취급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행태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듯이, 오늘날 <로고스> <레마>를 구별짓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체험중심, 물질중심, 세속중심의 신앙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하려는 수작일 따름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로고스>, <레마>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가 그 능력을 체험했건 그렇지 않건 관계 없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개인의 수준이나, 경험같은 어떤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영적 권위와 능력이 발휘되는 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개입에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아셔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성도에게 역사하실때에는 성경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질서없이 무분별하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말은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수단으로서 역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 은혜를 끼치게 하시는 주체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은혜의 수단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은혜의 방도’(메디아 그라티아에, media gratiae)라는 신학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정리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서 입증하는데 신비적 경험이나 인간적 사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성경을 은혜의 방도 삼으셔서 깨닫게 해 주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권면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4-17)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지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착념하여 바르게 배우며, 익히며, 깨달아 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혼미한 세상에서 참된 구원의 도리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말씀으로 영적 분별력을 기르며,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태양을 멈춘 사건이 과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사례


오늘날에는 과학이 발달하다보니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이 세상을 섭리하심이 과학에 의해 밝혀진 사례가 몇몇 있습니다. 미국의 메릴랜드 주에 있는 우주 관계 과학자들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위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과거 10만년의 태양과 달에 대한 궤도를 조사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우주 과학자들이 궤도 조사를 하던 중 기계가 정지하였고 경고등이 켜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계장치를 관리하는 기사의 조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주 과학자들은 그 적신호의 원인을 면밀히 살펴보니 과거 중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면밀히 살펴 다시 확인해 보아도 하루가 모자랐다고 합니다.

이것을 과학자들 머리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는데 며칠 후 전에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던 한 청년이 일어나서 선생님 전에 저가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여호수아가 해를 중천에 멈춘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모두가 웃었으나 이 사실을 해결할 별 다른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의견을 모아 성경을 가져다가 자세히 조사해 보니 여호수아 10 12-14절에서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 거의 종일토록 내려오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수아 10: 12-14절을 보니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아모리 족속의 전쟁은 치열한 전투였으며 날이 어두워지면 이스라엘이 불리하였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태양이 멈추기를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셔서 거의 하루 동안 해가 멈춘 사실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컴퓨터를 다시 돌려서 여호수아 시대의 궤도를 면밀히 조사해 보니 23시간 20분이 정지되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40분이 모자랐답니다. 40분이라는 시차 또한 설명 가능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설명할 과학적 근거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전에 여호수아 사건을 말했던 바로 그 청년이 다시 말했답니다. 선생님 성경 어디엔가 해가 뒤로 물러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 과학자들은 성경을 다시 조사하여 이 사건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열왕기하 20 8-11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이사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서 왕에게 한 징조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물러갈 것이니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 십도를 시간으로 계산하면 40분에 해당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기도하여 해를 중천에 멈춘 23시간 20분과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가 회개하니 다시 살고 삼일 만에 성전에 올라갈 증표로서 일영표의 그림자가 10도를 뒤로 물러가도록 하나님께서    해(시간)를 뒤로 되돌렸던 40분을 합하여 잃어버린 하루의 행방을 성경에서 찾아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는 과학이 발달하다 보니 과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능치 못함이 없어서 때로는 해와 달을 멈추기도 하시고 날을 거꾸로 돌리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기사는 성경은 사실이다 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께서 만물을 섭리하시고 경영하신다는 증거가 되며 또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출처: 예수님따라가기>

우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신이심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너를 위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고(20:3-4) 이사야 46 5-10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4 6-7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내가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이사야 45 21-22절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의 주인이 되시며 천지와 만물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경영자이십니다. 그 증거는 바로 그 종 선지자들을 통해서 장래 일을 미리 말씀하시고 그것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42 8절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 못할 우상을 만들며 그것들을 섬기는 자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44: 10-11) 누가 하나님을 비기며 누구를 하나님과 짝하여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만물을 조성하시고 만물을 섭리하시는 주 하나님, 그 증거로서 장래 일을 미리 말씀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그 전능자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누가 하나님과 같은 자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과 비길 자 있겠습니까? 전능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깨달았다면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아 주인을 잊어버린 인생들아 우리의 죄를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니 그것은 바로 나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내 자신이 주인이 된 것이 타락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 보려고 어떤 계획을 갖거나 부를 축척하고  명예를 탐낸 것이 타락이며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생각이 타락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시대엔 가족 간의 우상이 최고의 우상이랍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처자와 전토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숭배를 하고 맙니다. 다 내어 버리십시오. 그 내어 버리는 방법은 마음에서 끊어 내십시오. 사람들아 여호와를 귀히 여기며 인생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 하나님께서도 존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경멸히 여기실 것이라. 천지와 만물을 조성하시고 천사와 사람을 지으신 크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누가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자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과 비길 자 있겠습니까? 주는 만군의 여호와시니 회개치 않는 자는 누구든지 그 앞에서 초개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마음을 빼앗길만한 모든 우상을 버리고 중심으로 회개하며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과 천사와 사람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의 빼어나심과 놀라우심을 바로 안다면 우리는 다른 우상이 필요치 않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며 모든 우상은 사단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높이시니 사단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의 욕심으로 인해 자기의 보좌를 높이며 하나님과 비기려하다가 그는 땅의 맨 밑 뿌리에 찍힌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은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이며 하나님 외에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모든 것은 다 우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세상을 향하는 정을 못 박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똥으로 여긴 것도 하나님께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려는 그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똥으로 여겨야 합니다. 부모와 처자와 재산과 자기 목숨까지도 다 똥으로 여기십시오. 이것을 실행한 자만 우상숭배의 죄에서 벗어나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모시고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의 주인 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창조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과 천사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만물이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물과 우리를 지으신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신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유일하신 참 신이라는 말은 여호와 외에 참 신은 없으며 만약 다른 신이 있다면 그것은 다 가짜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신격화 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유일하신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같은 분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우상이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요 다른 어떤 것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하나님만을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출처: 예수님따라가기>

(고전14장) 방언은 끝났는가? - 이요나목사


*서론*
오늘은 방언은 과연 끝났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방언이 뭐 대단한 것이기에 이처럼 왈가불가 할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에 왈가불가 길게 할애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방언은 성도의 믿음 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크고 교회 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크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성도들이 모두 방언 말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준 것이 아니라고 전재되었지만 합당한 자에게 즉 주실 자에게는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교회사 속에서 '방언은 끝났다'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내려왔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들어서 그렇게 주장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 8절에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2장 뒷부분부터 문맥을 따라서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지금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을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영원히 계속될 것과 끝날 것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따라서 8절에서 말하는 것은 영원히 지속될 것과 일시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우리의 믿음생활은 한계의 삶 속에서 영원의 세계로 전환됨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아니 벌써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영원의 세계로 출발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육체의 장막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에게 범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은 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 새로운 영의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이 이르는 법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죽음이라는 한계 속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 즉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이며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아직 한계 속에 살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이 육체의 한계를 벗는 날 우리에게 방언이나 예언이나 지식이나 신유나 모든 것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육체의 삶 속에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벗어나 영원의 세계에 들어가면 우리에게는 더 큰 믿음, 소망, 그리고 무한의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끝나지 않는 영원 속에 속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

*방언은 끝나지 않았다! *
'방언이 끝났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13장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리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8,9)는 말씀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는 부분을 살펴볼 때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구분되어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9절에서 "우리가 부분적을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방언은 예언과 지식과 또 다른 은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이 부분에 혼동을 하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예언하고 방언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방언으로 예언하고 방언으로 가르친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예언과 지식은 사람이나 교회를 향하여 하는 것이고 방언은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나 교회 속에서 방언으로 예언하고 방언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방언을 예언의 도구나 가르치는 도구로 사용한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14:2)고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가르치는 도구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이나 계획을 전하는 도구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성경은 완전한 계시인가? *
방언은 초대교회 시대에 국한된 은사라는 주장은 10절의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요한 계시록까지 완성된 성경이라고 해석하는 데서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근거가 아니고 그들의 추론일 뿐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완전한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방언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계시록까지 완성된 성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의혹의 부분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면밀히 말하여 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를 완결한 책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알아야 할 지식과 이해해야 할 것들을 기록하여 주신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우리 성도들이 필요란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모든 계시를 다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0장을 보면 일곱 천둥이 발한 소리를 요한이 기록하려 하였을 때 기록치 말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또 요한복음 16 12절에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말하노라"(고전3:1)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있을 일들을 모두 계시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한 것입니다.

* 알고 있는 것만큼 무지이다! *
초기 신학자들은 '완전한 것의 나타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나는 이러한 해석이 문맥의 흐름상 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은 계시적인 은사에 해당되지마는 방언은 그렇지 않음을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만 그러면 과연 우리는 완전한 지식을 알고 있는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 12절에서 "우리가 이에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하였습니다. 나는 다른 부분에 비하여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말하여 성경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섹스피어도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무지다"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특정 분야에 대하여 연구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그 일부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이 오면 모든 것을 얼굴을 대면하고 보는 것과 같이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완전한" 이란 단어는 그리스어로 중성이므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니고 말씀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만 그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 이 모두가 중성으로서 제3위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아멘으로 끝날 때 *
또 방언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임을 증명하는 말씀은 사도행전 2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 제자들이 기도 중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할 때 사람들이 놀라며 의혹하여 새 술에 취한 것으로 생각하고 조롱하였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2:17-20)고 예언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엘의 예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엘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세는 언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또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나는 우리가 사는 시대도 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언된 "말세"는 대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증거된 대환난 시대의 징조 중 하나는 태양이 빛을 잃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대환난에 대한 예고나 계시록에 나타난 대환난에도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것과 동일한 태양과 달의 징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대환난 중에도 성령의 은사, 즉 예언과 가르침과 방언을 계속될까요?

요엘을 그에 대하여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예언도 페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와 연관하여 생각할 때 예언이 지속되고 있는 동안 방언도 지식의 가르침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며 예언이 끝날 때 방언과 지식도 함께 끝나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방언의 은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의 믿음 생활 속에서 떨어질 수 없는 할 중요한 은사로서 개인적인 기도생활 속에서 믿음을 굳건히 세우기 위한 중요한 은사로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나 회중 가운데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규제를 따라 질서를 갖어야 하는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알아듣는자가 없고(고전14:2)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사가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행2장에 나오는 방언과 다른것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고전14장) 방언과 통역에 대한 증언 (이요나 목사님)


*서론*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방언통역은사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신약성경 속에서도 방언통역의 은사가 사용된 것이 소개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오순절 날 교회에 성령이 강림할 때 각 나라말로 방언이 주어졌지만 그 방언은 각 나라 사람들에 의하여 방언이 저절로 깨달아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하여 서술하였지만 방언에 대하여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방언과 함께 사용되었을 터인데 실제의 상황에 대하여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G. 킴벌 몰간의 사도행전 주해서를 보면 오순절 날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세례를 간구하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할 때 그들은 모두 자기의 언어로 말하였으나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나라의 언어로 듣게 된 것이라고 서술하였습니다. 킴벌몰간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가 분명히 별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척 스미스 목사의 증언을 들으면 이에 대한 확실한 의문이 풀리게 됩니다 

*프랑스말을 못하는 사람이 프랑스 귀족어를?! *
1969년 경 척 스미스 목사님께서 뉴포트 비치의 루터교회를 빌려쓰고 있었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루터교회가 오전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척 스미스 목사님은 오후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갈보리채플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자 갈보리채플의 성도들이 루터교회 성도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결국 갈보리채플은 그 옆에 새 건물을 짓게 되었습니만, 그 무렵 오순절 기념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척 목사님은 그 날 저녁 50여명의 성도와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성경공부에 새로운 맛이 들었을 때여서 성도들과 함께 성경을 통독한 후 강해를 통하여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성경강해는 사실 개인적으로 내적인 은혜는 있어도 충동적인 외적 흥분은 좀처럼 일어나기 힘듭니다.

그 날 성경공부 후 척 스미스 목사는 교회의 탄생의 기념일인 오순절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각 사람들 위에 임하였음을 설명하였습니다. 그 속에는 방언 은사를 받은 바 있는 린이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자매에게 "오늘은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한 오순절로서 이 날 성령의 방언이 있었습니다. 린 자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방언을 받았으므로 오순절 기념일이므로 함께 주를 경배하십시다. 린 자매에게 하나님의 은사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린 자매가 일어나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매는 프랑스어로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는 프랑스어를 조금 할 줄 알기 때문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척 목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하여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통역의 은사가 주어졌다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이 알아듣는 것이 하나님의 방언의 통역의 선물이었다면 자신의 지성과는 관계없이 초자연적으로 자신의 입을 통하여 전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척 목사님은 그 시간은 자연의 감각과 초자연의 감각이 교차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 갑자기 척 스미스 목사 부인 케이 여사가 일어나서 린의 프랑스 방언을 통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여인의 구원을 위해! *
척 스미스 목사 부인은 프랑스 말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녀의 통역은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녀는 과거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하던 가수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회가 끝날 무렵 팜 스프링스에 골프랜드를 경영하고 있던 어느 남자가 그 집회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는 사업상의 문제를 상담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집회가 끝난 후 상담을 하기로 척 목사님과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상의 문제가 된 어느 유대계 여자와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계 여인은 척 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내 문제를 말하기 전에 오늘 집회에서 있었던 불가사의한 이야기에 대하여 묻고 싶습니다. 오늘 어느 여성이 일어나 프랑스어로 말을 하자 당신의 부인께서 일어나 통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모두 프랑스에서 살던 분들입니까?" 척 목사는 "아니요 두 여인은 프랑스어를 조금도 모릅니다"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 그것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군요. 나는 파리에서 5년 간을 살았습니다. 오늘 밤 집회에서 프랑스어를 말한 그 여인은 프랑스 귀족들이 쓰는 최고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인은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통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프랑스어를 전혀 모른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이에 척 스미스 목사는 그 자리에서 사도행전 1장을 펴놓고 그녀에게 성령의 선물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척 스미스 목사는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은 주의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믿는 자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주십니다" 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그 날의 목적은 한 유대인 여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의 두 방면/가르침과 복음전파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명하심을 따라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혜사 성령님의 역할의 두 방면에 대해서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그 영을 받은 자들에 대한 역할
요한복음 14 26절을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속대로 보냄을 받은 보혜사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 속에사시면서 하실 보혜사의 역할을 말하되 영을 받은 자신에 대한 역할을 말합니다. 그 역할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그 영을 받은 자를 통하여 타인에게 하는 역할
요한복음 15 2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보혜사의 정체와 그 역할을 말하되 타인에 대한 역할을 말합니다. 그 보혜사의 정체는 아들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고 아버지께로서 나오는 진리의 영을 말합니다. 그 보냄을 받고 우리 속에 오신 진리의 영의 타인에 대한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보혜사 성령님의 하시는 일의 두 방면을 말합니다. 그 하나는 영을 받은 자에게 하시는 일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위해 하시는 역할입니다. 개인에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며 타인을 위해서는 복음을 전파하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기 원합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아멘!


'성령을 받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령을 받는 것’이라는 주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하여 많은 오해들과 엇갈린 주장들이 난무하는 것이 현실이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성령을 받는가, 어떻게 받는가, 그리고 성령을 받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여러 견해들이 엇갈린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언급하는 맥락은 서로 다르다.사도 바울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8:15)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만들어주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언급한다. 한편, 누가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행 1:8)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해놓았다.

그는 ‘성령을 받는 것’ 또는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것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언급한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그의 문맥에서 사용한 ‘받다’라는 말의 개념을 누가의 글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누가가 말하려고 하는 본래의 의미가 왜곡될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성령님이 누가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독특한 강조점을 놓치게 된다.

‘성령을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동일한 것인가?
이 두 가지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 바울의 기본적 시각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은사적 능력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성령을 받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3:2,5)라고 묻는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님의 능력이 은사적으로 임하는 것을 경험했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이런 경험에 주목하라고 상기시키면서 “너희에게 이런 경험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너희의 신앙이 구원의 참신앙이라는 증거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바울은 은사적 성령의 임재를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성령을 받는다”는 기본적시각을 갖고 있다. 한편, 누가는 강조점을 조금 달리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성령을 받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그분을 더 잘 섬기도록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소간 자기도 모르게 성령을 받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주 의도적이며 의식적으로 성령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극적인 나타나심을 체험하며,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 성령의 나타나심이 다소 차분하다.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방식은 상황이나 개인의 성격, 연령, 환경 및 교회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은 후에 어떻게 행하느냐이다. 

결혼에 비유하여 설명해보자. 큰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도 있고, 가족끼리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르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결혼식을 치렀느냐가 그 후의 결혼 생활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식 후에 어떻게 결혼 생활을 영위하느냐이다.


날마다 성령 충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누가의 메시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을 받는 것’은 단 한 번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고 평생에 걸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날마다 필요하다. 어떤 경우들은 특히 성령 충만을 필요로 한다( 4:31 ; 7:55). 

성령 충만은 극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초자연적 표적을 동반할 수도 있다. 그것은 복음 증거와 복음 사역을 위한 새로운 영역을 열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성령의 열매의 조용한 성장으로 나타날 수 있다. 성령님이 우리를 통제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움직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30억의 사람들이 아직도 복음에 대해 듣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엄청난 선교적 도전 앞에 처한 오늘날의 교회 현실을 볼 때, 누가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능력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성령을 받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에 관한 과거의 오해들을 바로잡고 복음 증거의 사역을 계속적으로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신 것을 알고, 그분에 관해 완전히 정통적인 교리를 믿는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내 안에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이런 지식과 믿음은 의미가 없다. 성령님의 사역의 결과, 내 안에는 두 가지 본질이 존재한다. ,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임재와 나의 인성(人性)이 연합되어 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 즉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임재가 내게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적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권세를 갖고 그리스도는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법, 즉 내 안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활성화시키는 법은 무엇인가?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먼저 성령님께 “예”라고 말씀드려야 한다.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날마다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할수록 그분은 더욱 우리를 위해 활동하신다. 그러면서 성령님을 날마다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은 내 안에서 더욱 더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저는 저의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합니다. 저의 행동이 주변 사람들의 삶과 저의 내적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하오니 주님이 저의 행동을 통하여 주님의 영원한 뜻을 이루시옵소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활동하시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육신을 단호히 이기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자기의 잃어버린 권세를 되찾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에게 그런 기회를 주면 안 된다.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5:16)고 가르친다.

바울은 “육체의 욕심을 갖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육체의 욕심이 있다. 그러므로 육체의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선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육신에게 내 삶의 운전대를 내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에게 “너는 내 생활의 운전석에 앉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육신적 욕구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따라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육신에게 “노”(No라고 말할 때 우리는 성령님께 선택권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논할 때 우리는 그분이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고 깨끗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에 대해 강조한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그분의 필수적인 사역들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이 담당하시게 될 특정한 사역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첫째,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은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 16:13) 라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우리 각 사람의 삶 가운데 인격적 관계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분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개입하시는데, 그분의 개입은 우리의 영적 성장에 필수적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은 우리가 그 진리대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단지 한 가지 영역에만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들에 개입하신다. 그리하여 그분의 사역은 우리의 삶이 온전한 삶이 되도록 만드신다. 온전한 삶에 도달할 때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둘째, 성령님은 우리를 책망하신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그가(성령님이) 와서 죄에 대하여, ()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8)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 그분은 이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하나하나 설명하신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16:9-11).

먼저 성령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신다. 성령님은 찌르는 막대기처럼 우리의 양심을 찔러서 죄를 깨닫게 하신다. 세속적 의미에서든 영적 의미에서든 간에 인간의 죄의 본질을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누구나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나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깨닫게 하신다.


성령님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늘 우리에게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성령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가 발견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을 우리에게 늘 제시하신다.

예를 들면 우리가 윤리적 문제나 직업 선택의 문제에서 고민할 때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생각나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그리스도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생각하도록 도우신다또한 성령님은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고 깨닫게 하신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자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구원이 우리 손에 달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항상 성령님의 통제 아래서 해야 한다.

셋째, 성령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
 “
그가(성령님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16:13)는 말씀에 나와 있듯이, 성령님은 가르치고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일들을 알려주신다.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이 세대의 가장 큰 죄는 인생을 자기중심적인 근시안(近視眼)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세대 사람들은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행동 기준에 따라서 산다.그리스도인들은 낙천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 29:11).

그분은 우리의 삶을 온전한 단계로 끌어올리신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보여주시며, 이 세상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신다. 이렇게 그분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인 분이시다. 그분은 생각하고 느끼며 의지를 갖고 행동하신다. 그분은 지성적 존재로서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며 지시하는 독립적 존재이시다. 성경은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어 슬퍼하시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은사들을 주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인격적 존재의 모든 속성들, 즉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진 분임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은 성경에 영감을 불어넣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그 말씀을 깨닫도록 빛을 비추어주신다. 또한 우리가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도록 도우신다.

그분은 삼위일체의 한 위(位)이시며,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시다. 삼위의 사역은 구별되는데, 성부는 계획하시고 성자는 성취하시며 성령은 적용하신다. 세 분이 각각 자기의 사역을 감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신다.

예수님은 그가(성령님이) 와서 죄에 대하여, ()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8)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우리가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난다는 말이다. 거듭난 사람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신다.우리가 그분께 순종할 때 그분은 가르치고 지시하며 충만케 하신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몸을 가지시지만, 성령님은 몸을 갖지 않으신다.
성령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성만을 가지신다. 우리는 그분을 만지거나 볼 수 없으며, 느낄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감(五感)을 통해 그분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을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성경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 8:16)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적 흥분이나 몸의 떨림을 성령님의 임재라고 믿지만, 이런 것들은 그분의 임재의 결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요한일서 4 1절의 교훈에 따라 우리는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야한다. 때때로, 성령님 임재의 결과가 아닌 것들이 그분 임재의 결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분별력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들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5:18)고 가르친다. 술을 마시면 술에 취하게 된다. 사람들은 술의 유혹에 넘어가 의지적으로 술을 마신다. 알코올이든 아니면 어떤 종류의 약물이든 간에 그것을 마시거나 먹으면 그것들의 통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리면 우리는 그분으로 충만하여 그분의 통제를 받게 된다. 누군가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갖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분이 우리를 더 많이 갖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분의 한 부분을 소유할 수 없다.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작은 조각들로 나뉠 수 없다.

에베소서 5 18절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는 현재 시제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이다. 성령 충만은 한 번 충만해지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그분께 넘겨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 노만 가이슬러, 기독교 교양

‘성화’란 무엇인가?


거룩함(성결)은 중요하고 또한 실제적이다. 거룩함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실제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함이 무엇인지 모른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한다“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은 맨 밑바닥에 있다. 평균적인 사람들은 중간쯤에 있다. 선한 사람들은 기근처의 상위권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100퍼센트 거룩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도덕성이 ‘성결’에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성결의 본질은 아니다. 성결의 본질은 ‘구되는 것’이다하나님은 유일무이한 분이시다. 그분은 다른 모든 존재들과 무한히 구별된다. 거룩한 하나님 같은 존재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거룩함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다. 빛은 하나이지만 그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동시에 많은 빛들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은 하나이지만 기에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거룩함의 네 요소
첫 번째 요소는 ‘위엄’이다.
왕좌에 앉아 있는 왕처럼 하나님은 위엄이 있으시다.
‘영광’이라는 말은 거룩함의 바로 ‘위엄’의 요소를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분은 위대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분은 거룩하시지만 우리는 죄인들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은 ‘거룩하다’는 말을 세 번 사용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6:3). 


두 번째 요소는 그분의 ‘의지’이다.
그분은 추상적 개념이나 수학적 공식 같은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의지를 갖고 계신데, 그 의지에 따라 일들을 성취하신다. 무엇보다 그분은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시고, 하나님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신다

세 번째 요소는 ‘진노’이다.
그분의 진노는 변덕스러운 분노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보이시는 정당한 반응이다

네 번째 요소는 ‘의’()이다.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이 실현될 때 그분의 의가 이루어진다. 그분은 이 세상이 그분의 도덕적 성품에 따라서 살도록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도덕적 의()의 훌륭한 표현이다하나님의 거룩함의 네 요소들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9: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그분의 위엄과 영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말씀은 “내가 도덕적으로 의로운 만큼 너희도 도덕적으로 의로운 존재가 되라”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만큼’ 거룩하게 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될 수 있다. 그분이 거룩하시듯이 우리도 거룩해야 하고, 그분이 ‘구별되시듯이’ 우리도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聖化)이다. ‘성인’(saint)이나 ‘거룩하게 하다’(sanctify)라는 영어 단어들은 로망스어(라틴어에서 유래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거룩한’을 뜻하는 ‘홀리’(holy)라는 영어 단어는 고대 게르만어(독일어, 영어, 네덜란드어, 스웨덴어 등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어원적 배경이 어떻든 간에 이 단어들에 담긴 의미는 모두 동일하다.

‘거룩함’과 마찬가지로 ‘성화’도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뜻한다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가지고 다녔던 성막을 모세가 하나님께 바칠 때 그는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했다”( 7:1).


다시 말해 그는 그것들을 거룩하게 했다. 그가 단()의 돌이나 금속의 성질을 신비롭게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것들이 거룩한 목적에 사용되도록 구별했을 뿐이다


구별되는 세 단계
‘거룩하다는 것’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구별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처럼 구별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셨다“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17:19).


구별되는 데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우리의 죄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의식하게 된다. ,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을 깨닫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남’이 없이는 누구도 구별될 수 없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3)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 단계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 3:8),
즉 ‘죄에서 돌이켜서 믿음을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을 떠서 그분의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 속에서 활동하신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처음으로 죄를 회개할 수 있다.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고, 결국 믿음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향하게 한다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인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니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리를 구별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그분을 위하여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결(거룩함)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