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2010

"기도를 통한 영적 전쟁의 승리"

우리의 삶은 매일이 영적인 전쟁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지만 사실 보이는 전쟁보다 더 치열한 전쟁입니다. 이론전이 아닙니다. 실전입니다. 실제적인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이 되었건 육적인 전쟁이 되었건 싸움에서 이기려면 용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어야 됩니다. 깊은 생각이 있어야 됩니다. 지적인 책략, “지략”이 있어야 합니다.

이순신의 전략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의 주요무기는 ‘조총’이었습니다. 이 조총은 정확성이 무척 뛰어났습니다. 활로 쏘는 것보다 몇 배의 정확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점이 있었는데, 사거리가 백 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걸음을 일 미터로 잡는다고 하면 백미터 밖에 날아가지 못합니다. 반면에 조선에는 ‘총통’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대포인데 오백 보 정도가 나갔습니다. 특별히 그 중에 ‘천자총통’이라는 것은 신무기였는데 구백 보 정도가 나갔습니다. 한 일 킬로 정도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무기학자들은 한국 최초의 미사일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대포가 굉장히 강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고려 말 최무선 이후에 대포 쪽으로 한국무기가 발달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 초기에 이순신은 이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접근전을 금지했습니다. 원거리 포격전만 했습니다. 붙으면 진다. 멀리 떨어져서 우리는 계속해서 포만 쏘면 된다.

그런데 당시 원균같은 파이터들은 이러한 전술을 싫어했습니다. 왜냐면 전쟁이라 하면 남자답게 접근전을 펼쳐서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적의 목을 베어오는 것이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귀나 코를 베어가는 그런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접근의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목 따위엔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오로지 배만 부수어라, 나는 배를 부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공(戰功)이라고 인정해주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23전 23승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적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도 아군에게는 거의 피해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순신의 해군은 그렇게 많은 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정유재란 포함해서 7년 동안 왜구를 잘 막아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적의 약점을 헤집고 들어갔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패배없이 승리하는 것, 참 매력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패배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하고 실수했을 때 많은 것을 배웁니다. 배우지 않습니까? 우리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맞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징계하듯이 혼내시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또 실수를 통해서도 배웁니다. 실수를 통해서 이렇게 하면 않되는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고난을 통해서 많이 배웁니다.

특별히 성경 상의 인물을 보면 야곱이 그랬습니다. 불순종하고 잔머리 굴리고 그러다가 긴 고난의 시간을 갖습니다. 20년 동안긴 고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삼손이 그랬습니다. 불순종하다가 평생의 삶, 쓰임 받지 못하다가 죽기 직전에 한 번 쓰임받는 안타까운 인생을 삽니다. 깨닫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댓가를 치루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많은 좋은 기회를 놓치고,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인생을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피해 없이 승리하는 길이 영적인 세계에는 없는가? 내 아군의 피해 없이 승리만을 이루는 길은 없는가?혹시 성경에 그런 길이 있다면 그런 길로 가는 것이 지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짖는 기도의 능력에 그러한 숨겨진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고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했더니, 기도했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과 기도의 능력을 연결시킨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음 18:18-20절에 나와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메면 하늘에서도 메일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러니까 기도는 땅에서 메면 하늘에서도 메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풀고 메는 능력이 기도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면 합심 기도하라는 겁니다. 중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루게 되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약속이지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항상 함께 하겠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는 반드시 승리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100%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마귀와의 싸움에서 원거리 포격전을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도, 기도입니다.

기도하다가 피해 입은 거 보신 적 있으십니까? 기도하다가 공격당하는 것 보았습니까? 제가 볼 때 거의 없습니다. 기도에 의한 피해라봐야 금식 기도할 때 약간 배가 고픈 것 정도, 또 강하게 기도하면 목이 좀 쉬는 정도, 철야기도하면 조금 졸린 것. 그러나 이런 것들을 피해라고 볼 수 있습니까? 피해라기보다는 그저 피곤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의 피해는 없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영적인 포격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에도 우 선 순위가 있는데, 먼저 상대를 제압하고 난 다음에 일을 해야 합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기도로 마귀를 묶어놓고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시퍼렇게 마귀가 살아서 날뛰는데 남자답게 싸워서 남자답게 깨진다고 하면 그게 뭡니까? 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저돌적으로 돌격 앞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지 상 그렇지 않습니까? 남성답다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 남성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왠지 치사하게 앉아서 기도만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행동하지 않는답니까? 행동하기 이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충분한 기도입니다. 충분한 기도로 완전히 적을 섬멸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비상구로 투입해야 합니다. 그러면 별 싸움 없이 점령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싸움 벌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너무나도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아군이 거의 상하지 아니하고 쉽게 승리했던 대표적인 이야기들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19장에 나오는 앗수르의 사람들이 히스기야가 왕으로 있을 때 예루살렘을 포위해 버렸습니다. 당시 포위라는 것은 보급이 모두 끊겼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강도 없습니다.

굉장한 굶주림, 식수의 고갈, 보급차단 등 최악의 완전히 죽는 길이었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했던 일이 벽을 향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그 강력한 기도를 들으시고 ‘내가 네 기도를 듣고 눈물을 보았다.’ 그러셨잖아요.

그리고 이 앗수르 군도 안에서 자중진란(自中之亂)이 일어나서 18만이 모두 멸해지지 않았습니까? 아군의 피해 제로, 적군의 섬멸, 기도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이러한 앗수르의 공격이 있습니까? 기도로 섬멸하십시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서 6장에 보면 다니엘도 충분히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자 굴에 끌려들어 갑니다. 사자 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기도는 사자의 입을 막았습니다. 안전하게 아무 피해 없이 승리하며 나오잖아요.

또 사도행전 12장에 보니까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12장 5절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절히 기도했을 때 옥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그것을 풀어버렸습니다. 아군에게 아무 피해 없이 승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금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호하면서 승리만을 맛볼 수 있는 영적인 이순신 전략은 기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충분히 해야합니다. 더 깊은 기도, 더 많은 기도, 더 충분한 기도가 있을 때 이런 완전한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를 할 것인가? 기도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패배를 가르치는 것과 똑같습니다. 승리를 배우기 위해선 기도를 배워야합니다. 어떻게 기도해야할 것인가?

첫째는 제일 센 사령부를 공격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마귀의 사령부는 사단입니다. 사단이라는 최고의 사령부를 공격하라, 마귀를 제어하라, 마귀를 멸하라.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영적분위기에서의 악한 마귀를 깨부수어야 합니다. 교회를 괴롭히는 무리들, 직장을 잡고 있는 악한 세력들 그 분위기를 깨어야합니다. 전체적인 세력을 놓고 기도해야합니다. 장난치는 전체적인 악한 세력들의 결탁들이 무너지게 해주십시오. 답답함같은 전체적 분위기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단의 사령부를 공격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개별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우리가 리더나 간사나 같은 동역자들, 양떼들을 섬기는 영혼들이 있지 않습니까? 한영혼 영혼을 모두 만나보면 나름대로의 하나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압박감, 환경의 문제, 구조적인 문제, 죄악의 문제, 함정의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눌려있는 영혼들을 찾아가서 구체적으로 한사람 한사람 중보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건전하게 해방시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귀에게 묶여있는 자들을 풀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귀신들도 항복하게 만드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개별적인 중보자들이 있습니까? 개별적으로 중보함으로 해방시키는 명단들이 있습니까? 그 일들을 해야 합니다. 전체적인 구조를 놓고 싸우기도 해야 하지만 한사람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시키는 해방사역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세 번째는 마귀의 패배만이 아니라 생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21세기 언어로 표현하면 새로 얻은 영혼을 양육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 가운데 날마다 승리하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길 바라고, 삶이 찰랑찰랑하고 간신히 유지하는 삶이 아니라 풍~성한 데까지 나아가는 승리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는 한 분 한  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출처:Love and Truth Church(사랑과진리교회)

여리고의 바디메오 이야기

여리고의 바디메오 이야기를 할려고 합니다. 바디메오는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것이 없는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고난의 밑바닥까지 다 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바디메오가 어떤 사람인지 묘사하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즉 소경이요 거지였습니다.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축약되어 있습니다. 먼저 소경이었습니다.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힘든 장애 가운데 하나가 시각 장애입니다. 또 바디메오는 거지였습니다. 일상에서 쓰는 수식어가 아닌 진짜 거지였습니다. 감정상의 거지가 아닌 실제 삶이 거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보통 인간적인 방법으로 판단할 때에 이런 사람에게 소망이 있겠습니까? 소망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 바디메오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회복되고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떠한 사람도 절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데 나는 완전히 고난의 시련 가운데 떨어졌다, 나락같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성도님들, 나에겐 남아있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소경 바디메오를 보십시오. 이 사람보다 더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디메오도 회복되고 구원받았는데 예수 안에서 회복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붙드십시오. 절망이 아닌 소망 가운데 서십시오.

가수 태진아 씨의 회심기를 읽었습니다. 본명이 조방헌 이더라구요. 그런데 예명을 짓게 된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데뷔를 할 당시 최고의 미모의 여배우가 태현실 씨였답니다. 그래서 성을 ‘태’ 자를 썼고 가수로서의 최고의 스타가 남 진과 나 훈아씨를 이어서 그 이름 끝자리를 하나씩 써서 ‘태진아’라는 예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해서 무일푼으로 미국에 왔습니다. 여기서 잘 되지 않았는데, 잘 되리라는 것도 없이 어렵게 어렵게 매일을 살다가 아내 이옥경 씨를 만났습니다.

결혼을 해서 주로 부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환락과 도박의 라스베거스에 가서 도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도박은 마약보다도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완전히 탕진해 버리고 풍요로운 미국에서 끼니걱정을 할 정도로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있는 상황에서 집에만 들어오면 밤마다 부인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더니 ‘예수바람 났다.’면서 밤마다 기도하러 나간다고 했답니다.

장모님께서 나을 수 없는 병에 걸려서 기도 외에는 나을 길이 없다고 하여 기도하러 나간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본인도 궁금하길래 교회를 한 번 찾아갔답니다. 처음 갔을 때 불렀던 찬양이 33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를 듣는데, 꼭 자기를 부르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그 찬양 하나에 눈물이 나고 가식이 사라지고 마음이 열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장모님은 치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다고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가정도 무너지고 최악의 상황가운데 떨어졌던 사람, 겉으로 본다면야 술독에 빠진 사람, 도박에 빠진 사람, 암에 걸린 가족이 있는 사람. 이런 가정에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찾아가셔서 그를 복음으로 변화시키시니까 지금의 모습과 하늘과 땅 차이로 보일 겁니다. 외적인 출세가 아니라 그의 심령을 치유하고 삶과 환경 등 모든 것을 치유하신 능력이 복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든지 결코 절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붙들고 내 삶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삶들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일어서는 힘은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일으키실 때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안 사안마다 그 사안에 맞게 믿음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그 들은 말씀을 붙들고, 그 불씨를 가지고 그것을 놓고 기도할 때 그 믿음이 더 자라나게 될 것이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닙니다. 믿음을 받으면 이미 이긴 것입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잘난 것도 노력도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니까 변화받고 기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나와 내 주변도 마찬가지로 이런 기적적인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만나는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힘을 다해서 예배드리고 우리 주변에 많은 영혼들을 생명과의 접촉으로 인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배의 자리로 이끌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필요할 때 어떠한 말씀을 사용하시든 그의 마음을 열어서 그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바디메오가 경험했던 기적의 체험을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분의 삶과 주변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출처: Love and Truth Church(사랑과진리교회)

하늘을 여는 기도

기도는 우리가 친구에게 마음을 열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펼쳐 놓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분에게로 올라가게 만드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더욱 더 잘 알게 된다.

예수께서는 매우 자주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그분의 필요는 우리의 필요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 매일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힘을 달라고 간구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약점을 나누신 분이셨다. 그분은“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분이셨다(히브리서 4:15).

그분은 죄악 세상에서 고통과 고난을 견디셨다. 구세주이셨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기도의 필요를 느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기도에 대하여 그토록 절실한 필요를 느끼셨다면, 우리처럼 약하고 죄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올라가야 할 필요를 얼마나 깊이 느껴야 할 것인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축복과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고자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이처럼 적게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더디게 기도하고 있다. 죄를 짓도록 유혹받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도움을 구하지 않고 있는 가련하고 속절없는 인생들을 하늘의 천사들은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무한하신 사랑을 가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주시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적게 기도하며, 너무나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스스로 계획할 수 있고, 스스로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없이, 성령 없이, 그리고 진리 없이도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단은 기도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의 주변에 진치고 있다. 기도로서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기 때문에 원수는 쉽게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들 수 있다. 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기도하기를 지체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 자신이 반드시 먼저 이행해야 할 분명한 조건들이 있다. 그 조건들 중에서 가장 첫번째로 우선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도우심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분께서는,“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리라고 약속하였다(이사야 44:3).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충족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죄를 계속 품고 있는 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수 없다. 그러나 죄를 슬퍼하고 버리는 사람의 기도는 가납된다. 우리가 죄와 잘못을 버리고 그것을 교정할 때, 우리는 우리의 비이기적인 기도가 그분께 상달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있다.

물론, 우리 자신의 선함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공로가 될 수는 없다.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비와 보배로운 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납하심을 받기 위한 조건들이 있음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성실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열심히 간구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리가 구하는 바를 즉시로 응답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장래의 일을 알 수 없으며, 극히 제한된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종 우리 자신에게 축복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구하게 된다.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을 것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우리가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의 구하는 바가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응답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때에 축복을 받게 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바 그대로 응답되기를 요구해서는 않된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기도는 무지하고 이기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데에 있어서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에게 선이 되는 간구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라.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최선을 믿어야 한다. 특히, 죄의 용서를 간구하는 기도와 사단이 주는 유혹으로부터 건져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는 즉시로 응답받는다를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을 구할 때, 우리는“우리에게 죄지는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해야 한다(마태복음 6:12).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지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용서는 잘못을 범한 죄인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며,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를 얻게 해준다.

가정에서 가족들이 함께 기도해야 하지만, 조용한 곳에서 혼자 기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과 함께 홀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 있게 될 것이다. 가족 기도와 공중 기도로는 부족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들을 수 있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은밀한 소원을 아뢰는 기도는 다른 사람들의 귀가 없는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홀로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은밀한 중에서 보시는 그분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신선한 감화력을 받게 될 것이다. 조용하고 단순한 믿음으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생각과 사상을 나눌 때, 그분의 귀는 우리의 기도를 듣기 위해서 열린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매일의 일을 시작할 때에, 먼저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향하여야 한다. 이러한 생활이야말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였던 에녹의 생활이다!

사단은 소리없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는 영혼들을 결코 정복할 수 없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올리워 간다. 우리는 번화한 거리를 걸을 때나, 업무를 보고 있을 때에도 기도할 수 있다. “항상 기도하라”바울의 충고는 실제적으로 가능한 권고이다.

우리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너무나 사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늘의 공기를 호흡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하늘의 분위기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을 받아서, 가족과 직장인들에게 그분의 거룩한 감화력을 나누어 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기쁨과 슬픔을 언제나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다. 우리는 걱정과 근심을 그분과 나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당신께 아뢰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모든 것을 그분께 가지고 갈 수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분께 주목거리가 되지 못할 만큼 작은 것은 없다. 그분께서 이해하실 수 없는 슬픔과 걱정은 없다. 그분께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어렵거나 큰 문제도 없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기쁨과 슬픔과 염려에 동참하길 원하시며, 진실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것들에 응답할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 도다.”시편 147:3. 하나님께서는 마치 이 세상에 그대 혼자만 있는 것처럼 그대를 돌보고 계신다. 이 세상에 오직 그대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대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주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시작과 끝에 그분의 이름을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모본으로 삼아야 한다.

불쌍한 자들을 돕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할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날마다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기도는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기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간구하는 기도가 날마다 우리의 가정에서 드려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 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욱 적게 말하고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인데, 바로 그러한 때에 우리의 기도는 큰 능력이 될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구하는 것만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들은 자신의 소원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셨던 축복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감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에 대해서 얼마나 적게 찬송하는가!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섬길 때에, 어려움보다는 큰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예배드릴 때에 그분의 사랑과 보호에 대하여 깊이 돌아보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기도는 그분의 뜻과 조화되어야 하며, 그분의 진리와도 일치되어야 한다. 성경의 진리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이 감정과 열심으로만 기도드릴 경우,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