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2012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롬16: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7~9)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약속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약속을 믿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행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모두 십자가 밑의 가나안 땅을 약속 받은 사람입니다. 이 약속에서 제외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 밑의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먼저,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약속을 받은 사람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해야 합니다. 그 땅은 믿음의 싸움을 통해서 점령 할 수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적을 이기고 그 땅을 점령할 수 없습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 얼마나 담대했습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담대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지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말씀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의심하거나 행하기를 두려워하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능력이 없는 죽은 말씀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말씀, 능력 있는 복된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읽고 묵상하며 지켜 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게 됩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영광을 바라보고 고난을 감당하라(롬8:12~27)

신자들의 성화에 가장 큰 장애물은 고난입니다.
고난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여 아주 작은 것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날 피조물들도 본래의 상태대로 회복될 것입니다. 이렇게 소망가운데 기다리는 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육체가 새로운 몸을 얻고 타락한 본성이 완전히 소멸하여 해방되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책과 속박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확고하게 해방되었지만, ‘아직’ 우리의 죄된 본성은 소멸되지 않았고 육체는 영화롭게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이미’와 ‘아직’의 중간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받을 영광을 열렬히 소망해야 하며, 현재의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견디면서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 기도하시며 도와주십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2/27/2012

♡♣중년을 즐기는 아홉 가지 생각♣♡

첫째. 학생으로 계속 남아 있어라.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폭삭 늙기 시작한다
둘째. 과거를 자랑 마라.옛날이야기밖에 가진 것이 없을 때 당신은 처량해진다. 삶을 사는 지혜는 지금 가진 것을 즐기는 것이다

셋째. 젊은 사람과 경쟁하지 마라. 대신 그들의 성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과 함께 즐겨라.

넷째. 부탁받지 않은 충고는 굳이 하려고 마라. 늙은이의 기우와 잔소리로 오해받는다.
다섯째. 삶을 철학으로 대체 하지 마라. 로미오가 한 말을 기억하라.
"철학이 줄리엣을 만들 수 없다면 그런 철학은 꺼져라"


여섯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겨라. 약간의 심미적 추구를 게을리하지 마라. 그림과 음악을 감상하며 책을 즐기고 자연을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이 좋다.

일곱째. 늙어 가는 것을 불평하지 마라.가엾어 보인다. 몇 번 들어주다 당신을 피하기 시작할 것이다.

여덟째. 젊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다 넘겨주지 마라. 그들에게 다 주는 순간 천덕꾸러기가 될 것이다. 두 딸에게 배신당한 리어왕처럼 춥고 배고픈 노년을 보내며 두 딸에게 죽게 될 것이다.

아홉째. 죽음에 대해 자주 말하지 마라.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인류의 역사상 어떤 예외도 없었다. 확실히 오는 것을 일부러 맞으러 갈 필요는 없다. 그때까지는 삶을 탐닉하라. 우리는 살기 위해 여기에 왔노라.

- 작자 미상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라(롬8:12~27)

로마서 8 : 12 ~ 2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빚진 자로서 더 이상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삽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라(롬8:12~27)
성령의 인도함 받는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의미는 타락한 본성을 그 모든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갈 5:24)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막8:34).

우리가 부정과 불법이라고 하는 모든 습관에 대한 냉정한 거부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매일의 회개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죄스러운 습관, 버릇, 교제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대하여 택해야할 유일한 태도는 그것을 죽이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질 때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두려움을 자유로 바꾸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와 그분의 상속자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받은 유업의 첫 열매로서 우리가 장차 받을 영광에 대해 증거해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육신을 좇아 살 수 없고 몸의 행실을 죽이며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여리고에서의 승리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신11:16~17)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수6:1~5)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려면 먼저 여리고 성을 함락해야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여리고 성을 점령할 것인가를 자세히 지시하였습니다.

우선 제사장 일곱 명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하고, 그 앞에는 무장한 백성이 따르며 언약궤 뒤에는 백성들이 행하게 했습니다. 또 여리고 성 주위를 돌 때, 절대로 외치거나 음성을 발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수6:10)

이것은 성을 돌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치된 마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어도 3백만 명에 이르는 큰 무리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 주위를 돌면서 ‘과연 이 견고하고 높은 성이 단지 성 주위를 돈다고 해서 무너질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여리고 성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욕하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칠 일째 되는 날 여섯 번을 돌아도 끄덕 없이 서 있는 여리고 성을 보았을 때, 그들은 ‘우리가 지금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회의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한 사람도 불평이나 의심하는 말을 하지 않고 순종하고 돌았습니다. 그 결과 여리고 성은 무너지고 그들의 손에 점령된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26/2012

양떼의 강건과 충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3 : 14 ~ 21]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화해와 재창조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독자들의 체험 가운데서 더욱 완전하게 성취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의 기도제목이 무엇이며 어떤 하나님을 바라봅니까?

먼저 양떼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도록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의지는 약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은 강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의 왕좌에 계시며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통치하실 때 그의 강력함으로 우리가 강하게 됩니다. 그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 능력과 강건함으로 우리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강건은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인류에게는 사랑이 가장 탁월한 덕이요 가장 강한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도의 삶을 견고하게 세워가는 중요한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알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사랑은 내 삶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갑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궁하신 그 사랑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날마다 자라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합니다. 충만함은 모자람과 결핍이 없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종말에 우리를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강함과 사랑과 지식과 거룩과 완전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넘치도록 응답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간구하는 강건하고 충만한 삶은 악하고 연약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랑 위에 든든히 세워져, 하나님의 충만함에까지 이르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신적인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능력만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충만하신 곳에까지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힘 있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저 멀리서 졸거나 주무시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다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형편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시고 내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미처 구하지 못했고 상상력의 한계로 기대하지 못했던 것들까지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기도, 생각, 꿈을 넘어 역사하시는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응답하심이 가득한 오늘 하루되기를 바랍니다.

2/25/2012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해야(갈5:13~26)

16절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사는 삶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며,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 삶의 동인이요, 표준과 목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신자의 삶을 추진하고, 안정시키며, 인도하십니다.

또한 육체의 소원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은 타락한 본성에 기뻐하지 않으며, 매이거나 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는 우리의 삶을 위한 쾌락과 의존과 굴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육체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소원하는 것은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에 원수가 되며, 성령이 원하시는 것은 항상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될 뿐입니다.

신자가 육체를 따르면서 성령을 따른다거나, 성령을 따르면서 육체를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을 동시에 성취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며, 오직 신자는 성령으로 행해야만 육체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에 매이고, 성령을 좆아 행하는 분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소망을 갖게 됨.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놀라운 소망을 갖게 됩니다.
신자의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하나님께 등을 돌렸으며,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뵈옵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깁니다.

더 나아가 신자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은 고난을 인내하게 하고 더욱 성숙한 신자로 연단받게 하여 어떤 고난도 이기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망은 헛된 소망이 아니라, 근거 있는 소망입니다. 그 근거는 성령님과 십자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아직 되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장차 완전한 구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근거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더욱 확신하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이 죄인을 완전케 하시옵고...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1:10)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솔로몬에게도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잠언 30장 아굴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6∼10절)

솔로몬은 그의 소원에서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도 천국에 대한 환상을 소개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보아서 솔로몬의 소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소원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피기 전 먼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특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며 회개합니다.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입니다.

둘째는 남을 원망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밧세바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범죄 가운데 상황을 비추어 밧세바를 원망하려고 했다면 할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밧세바를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남을 원망함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는 정직하지 못함을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고백합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와 같은 의미입니다. 내 속에는 정직이 없지만 하나님께 정직함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윗의 이름이 800번 이상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표현하는 많은 말 중에 다윗은 정직한 자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직함이 바로 다윗이 가진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블랙가비 목사님의 책 ‘영적 리더십’을 보면 성품이 리더십의 핵심인데 그 성품의 힘은 깨끗함에서부터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깨끗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큰 집에는 금 그릇, 은 그릇 등 많은 그릇이 있지만 주인은 깨끗한 그릇을 사용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넘어지는 경우가 등장합니다. 이 역시 정직을 잃어버리고 정결함을 잃어버릴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정직으로 채워져야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만일 비워지면 그곳에 콤플렉스로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콤플렉스로 채워지지 않게 정직으로 채워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정직이 신발을 신는 동안 거짓말은 세계를 반 바퀴 돈다”고 했습니다. 정직하게 살 긴 해야겠는데 생각하면서 미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적어도 오늘부터는 정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직함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2/23/2012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리게 하심]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복음의 일꾼이 되기에는 너무나 작은 자라고 겸손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일꾼됨에 대한 분명한 자기인식과 사명의식이 있었습니다(7절). 복음의 일꾼이 감당해야할 사명은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을 전하고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이루실 놀라운 지혜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며,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에게까지 알리는 것이었습니다(10절).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당당히 나아가 말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12절).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신을 걱정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면서 자신에게 닥친 여러 환난으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영광으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3절). 바울의 열정과 헌신은 복음의 놀라운 영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자이며 동시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은 충성된 자세로 이 직분을 수행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고난조차도 영광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하심]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로 비밀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비밀은 인간의 지식이나 이해력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도 알려진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하며, 함께 언약의 후사가 되고 한 지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혈연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지역과 인종을 초월한 국제적인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지혜를 천사들에게까지 알려지게 하는 것입니다(10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비밀은 곧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치유되고 개선되어져야할 많은 문제점과 고질적인 병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영원부터 하나님께서 목표하신 인류 구원과 새 창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11절).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 뜻에 맞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갈5:22)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야훼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야훼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야훼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야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수14:9~12)

유다 지파의 갈렙은 하나님께서 45년 전에 자신에게 약속하신 산지를 얻기 위해 여호수아에게 허락을 받고자 나아갑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 그 날에 야훼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야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12절).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45년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꿈으로 받아들이고, 그 꿈을 품고서 45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이루어질 때가 왔다!'는 확신이 들자, 여호수아에게 그 땅을 달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꿈을 가진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좋은 기회가 와도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만이 기회를 잡고, 그 기회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갈렙은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85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11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점령하려고 하는 산지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아낙 자손들의 거주지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 아무도 점령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을 믿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그 산지를 정복하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갈렙과 같이 꿈이 있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꿈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꿈이 간절한 사람은 그만큼 믿음도 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꿈과 믿음을 가진 사람과 동행하십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16/2012

먼저 할 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4~1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야훼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삿18:5~7)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에게 땅을 할당해 주셨고, 그들에게 그곳에 사는 자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19:40~46). 그러나 단 지파는 저항에 부딪쳐 땅을 차지하는 일이 지체되었습니다.(삿 1:34) 그러자 단 지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계획을 모의했습니다. 그들 임의로 땅을 찾아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과연 그들이 하는 일을 원하고 계시는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그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그들은 견고한 신앙도 없었고 신앙의 분별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용맹 있는 다섯 사람을 뽑아 정탐을 보냈습니다. 다섯 정탐꾼들이 라기스에 이르러서 보니 그곳 사람들은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단 지파가 쉽게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은 비옥하였고 물도 풍부한 땅이었습니다. 단 지파는 라이스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곳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때,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으로 우리의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생각하고 성급하게 모든 일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본 후에 일을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15/2012

서로 짐을 지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자(갈6:1~10)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짐을 지는 것은 매우 포괄적입니다. 범죄한 사람을 바로잡는 일(1절), 겸손할 것(3,4절), 자기 짐을 질 것(5절),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르치는 자와 교제하는 것(6절) 등입니다. 바울은 범죄를 비롯하여 인생의 다양한 어려움들을 포괄하여 짐을 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짐을 지는 것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법은 구약의 율법(레19:18),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마22:37~49), 사도들의 교훈(갈5:14) 등이 모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짐을 지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위대한 행위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분담하는 것의 가치를 절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의 짐을 지는 것, 공동체 안에서의 연약한 지체를 섬기는 것, 어려움을 나누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강조하신 형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서로 짐을 지면서 낙심하지 말자.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짐을 지면서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심음과 거둠의 원리를 통하여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심음과 거둠의 원리에서 최대의 적은 낙심과 피곤입니다(9절). 결실하기를 기다리기까지는 뿌리기에 낙심하기 쉽고, 추수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피곤하기 쉽습니다. 모든 곡식과 열매는 제 때가 되어야 결실한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시1:3).

그러므로 심음과 거둠의 원리는 우리에게 낙심과 피곤 중에서도 소망과 인내를 가르쳐줍니다(시126:5~6).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우리의 선한 행위를 알고 계십니다. 형제 자매의 짐을 지기 위해서 고군 분투하는 아름다운 행위를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양들을 향하여 흘리는 목자의 눈물과 공동체의 리더들의 수고를 주님께서 갚아주실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것들은 하나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드시 적실한 때에 그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2/14/2012

♥ 놀라운 말씀의 역사가 있게 하셨습니다[행전4:1-12]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며 복음역사를 감당했던 사도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역사를 감당하던 사도들에게 공개적인 핍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지만 말씀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놀라운 말씀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은 남자의 수가 약 5,000이나 되었습니다(4절).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한 사도들을 도우시기 위해 놀라운 말씀의 역사가 있게 하셨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도들은 놀라운 말씀의 역사를 경험하였기에 핍박에 결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이 나고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그러기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은 선포되고 증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갇힌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갇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동력이 있으며 날카롭고 예리합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때일수록 더욱 말씀의 역사를 이루고자 힘써야 합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게 하셨습니다[행전4:1-12].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심문을 받았던 사도들은 담대하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고압적인 공회의 심문에 답변을 하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를 하나님이 살리셨고,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이를 걷게 한 것이며,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고( 118:22~23), 이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한 사도들을 도우시기 위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담대함을 갖게 하였고 더욱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하셨습니다. 위기는 오히려 정면 돌파로 헤쳐 나갈 때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강력하게 대적할 때 도망을 갑니다(4:7).

무서워 피하려고만 하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에 때일수록 더욱 주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서원기도의 능력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잠12:20)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야훼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야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1:9~11, 17,18)

우리가 응답을 간절히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서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서원기도는 결정적인 기도가 됩니다. 본문에 보면, 한나는 아들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서원을 했습니다. 그녀는 만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 전에 바쳐서 성전에서 야훼를 섬기게 하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이 서원 기도를 받으셨고, 한나는 자기의 서원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마음의 평안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 얼굴에 수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18절) 이전에도 많은 기도를 드려도 마음에 평화가 없었는데, 강력한 서원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서원 기도를 하여 응답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사사 입다 입니다. 암몬 족속의 침략을 받아 동족이 위경에 처했을 때, 입다는 군사적 지도자로서 암몬과 싸워 달라는 부탁을 받고 승리를 위해 하나님께 강한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물리치고 개선하여 집에 돌아오게 해 주신다면 제일 먼저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서원 기도를 들어주셨고, 입다는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를 제일 먼저 영접한 사람은 그의 무남독녀였습니다. 입다는 극한 슬픔을 안고 그 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 서원을 이행하였습니다.(삿11:29-40)

이와 같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드리는 서원 기도는 하나님 보좌를 움직여 개인과 나라의 운명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입다와 같이 무모하게 서원 기도를 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서원 기도가 응답된 후에도 그 서원을 갚지 않거나 더디 갚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가 따른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13/2012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고, 또 채움 받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제대로 된 건물이나 조직, 교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의 필요를 돌볼 줄 알고, 채워줄 줄 아는 헌신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마 초대 교회 성도들 중에는 예루살렘 본토박이보다는 명절에 예루살렘 순례를 왔다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에 눌러 앉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행이 장기화됨으로 삶의 제반 여건이 열악해지는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생활비도 부족했을 것이고, 숙소나 식사, 의복 등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필요들을 보면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기쁨으로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일일이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섬김 속에서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하나님이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켜보는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서도 성도들을 칭송하며 주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게 하셨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금 이 시간, 나의 채움이 필요한 이웃이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사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첫 번째 반응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가르치는 것을 듣고, 연구하고, 배웠습니다. 메시아적 관점에서 구약을 탁월하게 해석해 낸 베드로 사도를 통해 구약 성경을 새롭게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도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과 그 생애,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도 샅샅이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말씀을 따라서 실제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런 말씀을 배우기 힘쓰는 공동체의 영향 가운데서 훗날 스데반과 같은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성경 선생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 기쁨이 충만한 신자가 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는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말씀의 옹달샘에 두레박을 내리고, 과연 이 말씀이 그러한가 생각하며 주야로 묵상하고 다 지켜 행하려 노력한 만큼 삶에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 지혜와 총명의 영이신 성령님

한 목사님이 도자기 공장 근처에 사는 어떤 사람을 심방했습니다. 목사님은 유리상자 속에 든 두개의 아름다운 꽃병을 보고 사겠다고 했지만, 주인은 절대로 팔 수 없다면서 꽃병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저는 지독한 술 주정뱅이에다 노름꾼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권유를 받고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도자기 공장 옆에 진흙 한 무더기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집에 가져와서 반죽하여 모형을 만들어 녹로에 가져갔습니다. 그 결과 쓸모없던 흙에서 저 두 개의 꽃병이 나온 것입니다. 저는 그날 생각했습니다. ‘내가 흙으로 꽃병을 만든 것처럼 예수님은 아무 쓸모 없는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든 것이라고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또한 그 사람에게는 지혜와 총명의 영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의 지혜를 얻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자기 자신의 문제도 지혜롭게 잘 해결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의인은 존경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를 가져오는 미스바 회개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37:11)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야훼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야훼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야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야훼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야훼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야훼께 부르짖으매 야훼께서 응답하셨더라”(삼상7:5~9)

이스라엘 민족은 블레셋의 침략으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는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소집하고 금식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힘입어 블레셋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철저한 회개와 온전한 믿음의 헌신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구약 4천년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우상 숭배였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너희가 전심으로 야훼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야훼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삼상7:3)고 촉구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먼저 회개를 통해 영적무장을 시켰던 것입니다.

또한 사무엘은 하나님께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히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 사람을 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으로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한 가정이나 한 사회, 나아가서 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개인과 나라안에 있는 우상을 멸하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11/2012

변화된 새사람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 왕위를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 (대하2:1)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야훼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야훼께 부르짖으매 야훼께서 응답하셨더라”(삼상10:6~9)

이스라엘 민족은 블레셋의 침략으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는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소집하고 금식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힘입어 블레셋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철저한 회개와 온전한 믿음의 헌신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구약 4천년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우상 숭배였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너희가 전심으로 야훼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야훼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삼상7:3)고 촉구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먼저 회개를 통해 영적무장을 시켰던 것입니다.

또한 사무엘은 하나님께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히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 사람을 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으로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한 가정이나 한 사회, 나아가서 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개인과 나라안에 있는 우상을 멸하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행전2:22~41)

베드로의 설교는 무리들에게 큰 찔림을 주었습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하고 자신들이 그렇게 기다려왔던 바로 그 메시아요, 마른 뼈들 같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군대가 되게 해주실 분이었음을 깨닫자 그들의 심령에는 예리한 칼로 찢겨 나가는 것과 같은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탄식과 절규가 있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변화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파하는 그들을 향해 베드로는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그렇게 하면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도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어 주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 무엇보다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주실 때, 핑계대지 말고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철저하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속죄와 성령충만의 기쁨을 풍성하게 받아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행전2:22~41)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심으로 무죄한 피를 흘리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고난의 공생애, 대속의 십자가만 해도 우리에겐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장 놀라운 사역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음에서 부활 승천하신 것과 성령을 보내 주신 사건입니다. 다윗은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을 예견하고, 생명의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인생의 절대적 절망의 끝이었던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생명의 주로 부활하셨으며,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은 생명의 기쁨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마음과 소망을 삶의 환경에만 두지 말고, 보좌 우편에 계셔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께 둘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권세로 담대하게 승리를 선포함으로 마음으로 기뻐하고, 입술로 즐거워하며, 희망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

한 상인에게 늦잠 꾸러기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태에 대한 아버지의 거듭되는 훈례에도 불구하고 그 게으른 아들은 여전히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는 좀처럼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 상인은 아들을 일찍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이익 동기를 이용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돈 좀 벌고 싶지 않나?”라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사람이 잃어버린 금 단지를 줍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니!

이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금 단지를 잃어버린 사람은 더 일찍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어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는 집안 일을 게을리 하고 가족들에게 해를 끼치며 고통을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가정은 평화가 없고 항상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으며 황폐케 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소득이 많아도 가족을 돌보는 데 쓰지 않고 허랑 방탕하게 낭비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배짱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0~22)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5~47)

본문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대치하여 싸움을 돋우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담대하게 나가서 골리앗을 맞서 싸워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외적인 조건으로 볼 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그야말로 뻔한 싸움이었습니다. 골리앗은 백전노장이요, 갑옷과 투구와 칼과 단창으로 무장한 절벽같은 용장인 데 비해 다윗은 군사 훈련 한번 받아 보지 못한 풋내기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골리앗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물매와 돌맹이 다섯 개만을 가지고 그 앞에 당당히 섰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골리앗이 이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린 나이의 초립둥이 다윗이 어떻게 블레셋의 막강한 장수인 골리앗을 단번에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 주는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면서 종종 사자나 곰에 새끼 양을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쫓아가서 사자와 곰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습니다. 그리고 사자와 곰이 자기를 해하려 하면 다윗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다윗은 ‘야훼께서 함께 하신다’ 굳센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군의 야훼의 이름으로 곰과 사자를 쳐 죽였던 다윗은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골리앗을 향하여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또 야훼의 구원하심과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45,47절)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하여 싸워 주신다’는 믿음의 배짱은 어떠한 두려운 환경도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09/2012

♥믿음의 부자

어느 전도자가 길을 지나다가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 앞에 섰습니다주머니를 뒤졌습니다만 마침 그에게는 한 푼의 돈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차마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속 깊은 연민 때문에 전도자는 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면서 말했습니다. “형제여마침 내게 준비된 것이 없군요그러나 당신의 너무 춥게 보이는 손을 잡아 드리고 싶소부디 용기를 내서 일어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 생활을 시작해 보십시오. 걸인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적선한 모든 이들보다 더욱 값진 선물을 주셨습니다.

남에게 소망을 주면 자기도 소망을 얻게 되고
남을 사랑하면 자기도 사랑을 받게 되고남을 성공시키면 자기도 성공하게 되고남을 축복하면 자기도 복을 받게 됩니다그러나 남을 실패하게 만들면 자기도 실패하게 되고남에게 고통을 주면 자기도 고통을 당하게 되고남을 저주하면 자기도 저주받게 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에 서서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고 구제하며 성공시키는 ‘믿음의 부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입니다(행전2:14-21)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시대를 여셨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활발한 성령의 부어 주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백성에게 성령을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그 부어주심은 남녀, 노소, 주종 관계 등 모든 사회적 구분과 인위적 한계를 초월하게 됩니다.

그때에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아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을 기쁨으로 예배하게 될 것이고, 온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그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으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게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은 후에는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지금 소리를 높여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폭우를 쏟아 붓듯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향해 편견을 버리고,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힘든 삶에서 항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비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하박국3:17-19/참고:벧후1:3-4))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1:3-4)

주님 함께하시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마음과 입술의 고백이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매일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게 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멘!

사랑의 약속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고후6:16)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야훼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야훼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야훼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20:14~17)

요나단은 사울의 본심을 파악해 달라는 다윗의 요청을 수락하고, 다윗에게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사울의 속마음을 알아낼 방도와 그 알아낸 내용을 다윗에게 알릴 견책을 구체적으로 합의했습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는 왕자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며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부탁하는 요나단은 실로 진정한 우정을 알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순종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희생도 불사한 요나단의 우정에서 맺어진 이 사랑의 약속으로 결국 다윗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약속]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어떤 비행기 조종사가 한 여성과 펜팔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주는 허무함, 출격 때마다 느끼는 불안, 긴장...이 모든 것들 속에서도 그는 그 여자가 보내는 편지에서 위로를 얻고 삶의 의욕을 느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두 사람은 만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기차를 타고 지정된 역에서 내렸습니다. 그녀는 꽃 송이를 들고 있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합실에는 한 뚱뚱한 여자가 꽃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줌마라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렸습니다. 그는 크게 실망하여 잠시 망설였습니다. 모르는 척하고 지나갈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 어떤 멋쟁이 아가씨가 내 손에 이 꽃을 쥐어 주면서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건너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우리가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려고 하다 보면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이 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이상으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신실함으로 끝까지 사랑의 책임을 이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07/2012

♥교회를 통해 인류의 하나됨이 일어나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온 세상, 각 나라들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깜짝 놀랄만큼 신기하고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바벨탑 사건으로 인한 인류의 죄악과 실패, 상처를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치 계시록에서 어린양의 보좌를 둘러싸고 각 나라와 열방이 한 목소리로 주를 찬양하는 것과 같이 장차 성령께서 교회를 통해 인종적, 국가적, 언어적 죄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됨과 궁극적 승리를 이루어 주실 것을 보여주시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인류의 진정한 회복은 오직 하나님의 교회를 통한 불같고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미움과 시기, 다툼과 분열로 나날이 황폐화되어가는 이 나라와 이 민족, 우리 가정과 나의 삶에 불의 바람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이 시간 간구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순간부터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모든 힘든 것들과 답답한 것들이 물러가고 우리 자신과 교회 공동체,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불과 연기가운데 율법을 받음으로 노예백성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듯이 하나님께서는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을 통해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로운 이스라엘, 하나님의 교회로 태어났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께서 믿는 제자들에게 강하게 임재하여 역사하고 계심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나타내 보이시고,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놀랍게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주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는 주님의 몸이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믿는 우리들 가운데는 불과 같고,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주님의 성령이 놀랍게 임재하셔서 강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신앙 공동체 교회에 친히 부어주셨고, 부어주고 계시고, 앞으로 부어 주실 그 성령 하나님을 통한 삼위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믿음의 직분들과 신앙 공동체 그리고 삶의 현장 속에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분투하여 오늘도 승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현숙한 여인 아비가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중략--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야훼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25:23~26)

아비가일은 오만 불손한 그녀의 남편 나발과는 달리 온유하고 겸손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남편과 자기 집의 모든 남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윗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다윗에게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피 흘려 보수하는 죄악’을 행하지 않도록 막고 계심을 느끼고 이를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근거로 한 아비가일의 호소는 강력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의 요청을 수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아비가일의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인정한 데 있었습니다.

나발은 신앙이 없고 난폭하며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남성인데 반하여,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신앙이 뛰어난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비가일이 못된 부자 청년 나발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여자는 남자를 선택할 권리가 없었고, 가난한 집안의 여자는 부유한 집의 남자에게 마치 팔려 가듯이 시집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 아비가일의 경우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남편에게 많은 고통을 받고 결혼생활에 갈등이 많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이 있는 여자가 신앙을 갖지 않는 남편을 만났을 때 겪는 환난과 고통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비록 못된 남편 밑에서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신앙을 지키며 집안을 성실하게 잘 돌보았습니다. 또한 다윗이 나발에게 먹을 것을 조금 청구하였을 때 남편이 거절함으로 인하여 집안이 멸망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녀는 다윗을 찾아가서 지혜로운 말과 상냥한 태도로 간곡히 간구하여 남편과 집안을 살리기도 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을 통해서, 오늘날 신앙을 가진 여자가 믿지 않거나 믿음이 약하여 자기를 핍박하는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모범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자신의 남편이 대단히 어리석고 난폭하며 고집이 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기의 주(主)로 섬기고 그의 핍박을 아름다운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가정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섬기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그와 같이 성실하게 행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06/2012

의인의 집과 악인의 집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12:6)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다윗을 집요하게 추격하면서 핍박하던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의 전투 중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삼상28:19,31:1-6)
따라서 이제 사울의 집에 남자라고는 그의 아들 이스보셋과 요나단의 아들 절름발이 므비보셋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보셋마저 자기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하4:5-8)

반면, 사울의 핍박과 계속적인 추격으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고생하던 다윗은 유다 족속의 추대로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즉위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제 막 강한 군사와 백성을 거느린 군주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조차도 다윗 왕에게 복속하여 바야흐로 다윗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다가 결국 망하게 되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성하게 되었을까요? 사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고 대신 다윗을 택하셨음을 알게 되자 다윗을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된 광포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보다 뛰어난 다윗을 인정하지 않고 시기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사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끝없는 추격과 공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울을 용서하고 대적하지 않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스스로 복수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추적을 피해 십 황무지에 몸을 숨겼을 때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때 그의 부하인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고자 했지만 다윗은 말렸습니다.

사무엘상 26장9절로 10절에 보면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야훼께서 사시거니와 야훼께서 그를 치리시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온유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왕이 되어 결국 온 이스라엘 땅을 기업으로 받아 다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05/2012

복음의 변화시키는 힘

쉬운 인생을 구하지 말라. 
더 강해지기를 기도하라. 
너희들의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라. 
너희가 맡은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하는 일에는 기적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너희들이 기적이 될 것이다.


 Do not pray for easy lives. Pray to be stronger men. Do not pray for tasks equal to your powers. Pray for powers equal to your tasks. Then the doing of your work shall be no miracle, but you shall be the miracle.
-Phillips Brooks

+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보이시는 변화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그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시거나 불편한 것들을 없애시기 보다는 우리의 인격을 계발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세우시는 데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히6:1-2 문맥보기)

주권적으로 그 역사를 이루고자 하심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도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의 충만을 통해 온전하게 세워진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성령 공동체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힘든 중에도 제자들에게 먼저 기도하면서 기다리며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를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여쭙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합니다. 하루 중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정해놓고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분주한 척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주님을 앙망하며 주님과 교제하려는 시간이야말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역사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갈3:1~14).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할례를 받기 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창 15:6). 의롭다함을 받은 후 14년이 지나서 구원받음의 표징으로 이방인들과의 구별을 위해 할례를 행했습니다(창 17:26).

그리고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아브라함의 전통을 따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7, 8절). 이러한 사실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바울은 메시아가 나무에 달려서 저주를 받았다는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유대주의자들이 설 자리가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의 시작은 바로 그 저주받은 십자가입니다(13, 14절). 이 십자가에서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이 결정됩니다. 믿음으로 십자가 구속의 능력을 덧입는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성령의 경험은 믿음으로부터 왔다(갈3:1~14).

바울은 마치 강렬한 폭포가 쉴 틈을 주지 않고 쏟아져 내리듯 다섯 개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인가를 지적합니다. 특히 성령의 경험을 중심으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4장에서 1차 선교여행시에 갈라디아교회를 선교할 때 그들과 공유하였던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권능이 ‘율법을 행함으로인가?’, ‘믿음으로인가?’를 반복하여 질문함으로써 바울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필요충분조건임을 보여줍니다.

5절에서 결론적으로 묻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그 답은 ‘믿음으로’입니다.

2/04/2012

제자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뜨거웠을 것입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제자들을 기다리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 공동체를 먼저 바르게 세우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빠르게' 이루는 것보다 '바르게'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직전에는 ‘누가 크냐?’는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고, 십자가 앞에서는 서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며 앞 다투어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들이 많이 상실되고 공동체는 많이 침체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합심하여 기도하고, 맛디아를 사도로 뽑아 사도의 빈 자리를 채우는 시간은 이런 상처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부터 바르게 세우는 역사입니다.

밖으로 역사를 감당하기에 앞서 안으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더 우선적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 동지들과 함께 마음을 같이 하여 공동체를 위한 기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역사가 꼭 있길 바랍니다

♤ 수고하지 않고 얻는 기쁨이란 없습니다 ♤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두기 위한 것으로만 열매가 맺지는 않습니다.
길쌈과 각종 수고가 있을 때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평화를 가져오는 평안의 가치는 전쟁의 비참함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죽음이 우리 곁에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장마는 햇볕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가뭄의 목마름은 단비의 소중함을 잊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미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불청객들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달콤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장과 성실한 일상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고단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해도 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에 고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압니다.

기쁨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우리 자신의 수고는 반드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오늘 발걸음이 가벼울 것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 -

할례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롬4:1-12)

유대인들이 얼마나 할례를 중시했습니까? 
할례는 유대교의 절대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할례의 유무로 하나님의 백성의 가부를 결정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창17:14). 그러나 바울은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물리적이고 표면적인 할례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여기셨다면 구원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모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을 때는 할례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합니다. 우리의 조상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 행한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비결은 찬양에 있다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6:12~13)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야훼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야훼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삼하6:12~14)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메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궤를 자기 성으로 메어 오려고 했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래에 싣고 오는 도중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갑자기 뛰었습니다. 그래서 웃사가 당황하여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는데,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일로 다윗은 낙심하고 절망하여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메어 가기를 두려워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하나님의 궤를 메어 갔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에게 복을 내리셨다는 말을 들을 다윗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지 않고 율법에 기록된 대로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그리고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할 때마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야훼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즐거이 찬양했습니다.


다윗이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극한 위험 속에서도 다윗은 항상 자기를 돌보시고 지키시며 원수의 목적에서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과 열정이 있었으므로 가장 낙심되고 어려울 때에도 절망에 빠져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평생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FGTV’말씀으로 여는 하루’ 중에서-)



2/02/2012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면 얼마나 이상할까요?

"존귀하신 나의 아버지시여! 당신은 저를 이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의 생사화복을 좌지우지 하십니다. 당신은 사랑이 많으십니다. 그러니 저에게 돈 10,000원만 주십시오. 제가 지금 급하게 필요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이처럼 아버지에게 말을 하는 아들이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기도가 이러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격식이 없는 자연스러운 기도를 원하십니다.
일하면서 순간 순간 나의 마음을 들어 올려 주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나의 필요를 그분께 겸손하게 어린이와같이 말씀해 보세요..

분명하고도 틀림없이 주님은 당신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식으로든... 하나님 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방법으로 오실지 모르기에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열린 생각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꿈을 통해서 환상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모임을 통해서 친구를 통해서 어린 아 이를 통해서 시장의 분주한 환경 속에서 자연을 통해서 우리가 미물이라 여기는 곤충(파리 모기 개미 등)을 통해서 나뭇잎을 통해서 먼 하늘 노을지는 석양을 통해서 가을 하늘의 맑고 깨끗한 구름을 통해서 아무튼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이용해 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2/01/2012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대상17:12)



한번은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주셨다. 주변의 사람들은 놀랐으나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단이 만일 사단을 내어 쫓으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라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들이 범한 죄의 무서운 본질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 죄는 성령을 거스리는 죄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마귀와 연결’시키려고 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우두머리의 도움을 받아서 주님께서 기적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님께 대한 직접적인 모독이요 훼방이었던 것이다.


주님 자신을 대항하는 말과 그 밖의 모든 죄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거짓말, 살인, 간음, 우상숭배, 시기, 다툼, 어떤 죄라도 고백하여 용서를 구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 다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성령 훼방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잘 몰라서, 진리를 몰라서, 무지 때문에 지은 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주님의 초라한 외모와 비천한 생활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주님이 나사렛 사람이니 것을 조롱했다. 또 주님이 갈릴리 사람으로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온 일이 없다고 빈정댔다(요 7:52). 예수님은 이러한 비방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가 마귀와 연합하여 능력을 행한다고 비방하는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성령 훼방 죄는 명백히 거룩하신 분을 대적하는 죄이며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마귀의 역사로 돌리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도움을 받아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고 말함으로써 ‘성령님을 더럽히고 추하게’ 만드는 성령모독 죄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요하겠느냐”(히 10:29).


그렇다면 진정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성령 훼방 죄와는 어떤 상관이 있는가?


주님의 생명과 이적과 기사를 믿는 믿음의 사람은 성령 훼방 죄를 짓지 않는다. 그 죄와는 멀다. 그러나 만일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죄악 가운데 산 다면 성령님의 마음이 아프시다. 죄와 타협한다는 것은 성령님을 실망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 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성령님의 탄원을 소멸하고 억누르고 제지하고 숨 막히게 하지 말라. 우리가 만일 우리의 생애 가운데 불이 꺼지도록 한다면 재만 남을 것이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오히려 성령의 불을 사모하라. 성령 충만을 늘 갈망하라. 성령님의 손에 붙들려 인도함을 받으라. (큐티일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