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2010

과연 무엇이 성경적인 교회인가? 6

저희가 과연 성경적인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에 대해서 저희가 계속해서 연재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오늘이 그 마지막회 입니다. 여섯번째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실은 여러분 제가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죠. 제가 사실 이 말씀을 자꾸 미루어 왔어요. 제가 오늘 전할려고 하는 말씀을 처음부터 제가 전하여야 했을 것 같아요. 제 마음에. 그런데 제가 자꾸 미루어 온 이유는 첫째 제가 자신이 없었어요. 제가 전할 자신이 없었고 둘째는 이런 교회가 없어요. 지구상에. 그런데 성경에는 있어요. 그런데 고민되는 것은 성경에는 있는데 이런 교회는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런 교회는 없기 때문에 더이상 성경에 있는 내용을 우리가 무시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이런 교회가 존재하지 않지만은 성경에 기록되어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교회를 주님이 세우실 것이라고 믿고 기도해야될 것인가. 이것이 저의 고민이었기 때문에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마지막 날 더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성경적인 교회가 왜  그토록 중요한가 하면은요 여러분 성경적인  교회가 회복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만물을  회복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지 주님이  다시 오세요. 만물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은 교회를 회복하셔야되요. 그래서 교회가 변화되어야 되요.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로 바뀌지 않으면 이땅에는 결코 소망이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 말씀이 뭐냐하면 여러분, 성경적인 교회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지못하는 어느 지역에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제가 지금까지 찾아본 결과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요 이 세상보다 더 더러운 곳입니다. 교회는요 이 세상보다 더 기본이 안 된 곳입니다. 교회는요 누구 말대로 귀신들의 소굴입니다. 

귀신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손가락질 합니다. 서로 잘했다 잘못했다고 싸웁니다. 누워서 침뱉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조금 더 낫다는거죠. 이런 모습들을 볼 때 이게 무슨 교회인가, 정말 이런 모습보면은요 교회, 집어치웠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주님이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어떤 값을 지불하셨는데, 주님은 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으셨는데. 주님은 그의 피를 흘려주셨는데. 그렇다면 주님은 결코 교회를 헛되게 하시지 않을거라는거죠. 주님은 반드시 교회를 정말로 영광스러운 교회로 회복시킬 겁니다. 저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합니다. 제가 죽기 전이 아니라면 죽은 다음에라도 올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요.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성경적인 교회는 네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되요. 저는 지난 5주에 걸쳐서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성경적인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요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오시는 분, 여러분 시험에 들지 말고 들으세요. 여러분은 성경적인 크리스쳔이 아니에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이 조금 과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마지막이고 다시는 이 말씀을 못 전할것 같은데 오늘 그냥 끝장을 봐야되겠다. 이런 마음입니다. 또 성경적인 교회는요 모이긴 모이는데 모여서 고스톱 치는 교회가 아니에요. 모여서 게모임 하는데가 아니에요. 물론 교제, 친교 중요합니다. 성경적인 교회는 모여서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어요. 성경을 보세요. 성경을..., 성경적인 교회는 모이면 네가지가 있었는데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어요. 

오늘 42절 말씀에. 그 다음에 교제가 있었어요. Fellowship, 코이노니아가 있었어요. 그 다음에 떡을 떼었어요. 서로 음식을 나눠 먹었어요. 두가지, 이건 성찬식을 말할 수도 있고 음식을 먹으며 우리가 삶의 나눔을 말할 수도 있고, 그 다음에 기도가 있었어요. 자 이 네가지가 사도행전 2장 42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자, 이와같은 초대교회의 모임에 이와같은 네가지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오늘 여러분이 눈을 똑바로 뜨고 성경을 분명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43절에 보세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우리말 성경이 번역이 너무나 제가 마음에 안들어서 영어로 옮겨드립니다. ‘Everyone was filled with awe’  초대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충만했다.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충만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희 교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하고 거리가 먼 교회에요. 우리가 오늘 심각하게 이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사람마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성경에 Everyone was filled the fear of God.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가득했다. 뿐만아니라and many wonders and miraculous signs were done by the apostles. 사도들로 인해서 표적과 기사와 기적이 일어났다. 이게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표적과 기사가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는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교회는 제가 아직까지 못봤어요. 그런데요 여기까지는 아직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아마 이제부터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결정할 것입니다. 이 교회는 아니다. 아니면 진짜 이 교회가 진리를 선표하는 성경적인 교회인가, 44절에 한번 보세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All the believers were together,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and had everything in common.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말은 자기의 것이 없었다는 말이에요. 45절에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Selling their possessions and goods, they gave to anyone as he had need. 순간 우리는 문제에 부딛혔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그걸 왜 팔아요?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이게 무슨 공산주의지 교회입니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짜 교회입니다. 오늘날 어느 교회에 이런 일이 있어요? 없어요. 

이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4장 3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4절에 계속 나옵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야..좋다.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 그 다음에 ‘이건 안돼, 이건 말도 안돼’ 이건 가진것이 많은 사람들. 그런데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시든지간에 그건 자유입니다. 

진리는 여러분이 처한 환경때문에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 성경말씀이 이루어져야되고 내가 부자이기 때문에 이 성경말씀을 보류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말씀은 성경말씀이에요.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는 분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오늘날 어떤 성도가 자기 집을 팔아서 교회 갖다내면, 그걸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교회가 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교회를 사이비 집단이라고 정죄할 거에요. 틀림없이 그럴거에요. 그게 무슨 교회냐고, 성경에 엄연히 있는데도, 우리는 그런 위선적인 발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왠지 아세요? 내가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니까. 여러분, 또 오해하지 마세요. 목사님, 교회가 어려우신가? 그래서 그런 말씀 하셨나? 아니에요. 이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것이 사도행전 2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4장 끝부분에 나오는데요. 사도행전 4장 끝부분에 제가 생각할 때에는 이 말씀을 왜 성경에 기록했을까, 이 말씀이 왜 이토록 중요해서 성경 66권 그것도 사도행전 4장 끝절에 기록된 이해가 안되는 두 구절이 있어요. 그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4장 36절, 37절이에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앞에 두니라 저는요 이 말씀이 왜 여기에 기록되어있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여러분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다는 것은 여러분의 가문의 영광입니다. 아멘. 그런데 이 66권 가운데 이 천년 동안 성경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읽혀지는 성경구절에 한 사람의 이름이 이유가 없이, 아무런 이유가 없이 추가된 이름이 있는데 바나바래요. 그런데 바나바를 왜 기록했나 보니까 다른 것은 없어요. 

그가 밭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밭을 팔아가지고 그 값을 사도들 발 앞에 두었다. 저는 질문이 그거에요. So what?  아니 그 사람이 그 일을 한 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길래 그것을 성경에 기록해 놨냐는 거에요. 왜 누가가 이걸 여기다 기록했냐는 거에요. 왜. 그거는요 그 다음 구절을 봐야 이해가 되요. 그 다음 구절이 5장 1절이에요. 그런데 바나바도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발 앞에 두었는데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5장 1절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내가 삽비라닙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요 다른거는 모르는데요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일치가 되었어요. 할렐루야. 참 히얀해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도 아나니아랑 삽비라도 그래요. 한번 보겠습니다.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나바도 밭을 팔아다가 바쳤데, 그러면 우리도 해야되지 않겠어? 왜냐하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초대교회 속에 부자가 얼마나 있었겠어요? 집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밭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팔아서 사도들의 발앞에 두면 사도들이 필요에 따라 나눠주니까 모르긴해도 그 사람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겠어요? 누가가 이것 때문에 바나바를 기록한거에요. 바나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밭을 팔아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런데 바나바가 하니까 아나니아가 나라고 질소냐, 않하지 않겠다는 거에요. 이해가 되시나요? 그래서 아나니아도 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두 부부가 짰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네도 좀 들어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거에요. 아니 바나바도 지금 인정 받는 판국에 그래서요 이 동기가 잘못된거에요. 잘 들어보세요. 아나니아 삽비라도 용감하게 집을 팔았는데 돈을 다 갖다 바치자니 아깝지요. 아깝지 않겠어요? 그래서 짰어요. 이거 다 드리지 말자. 일부만 드리고 그리고 인정은 받고 그러니까 꿩먹고 알먹고. 그렇게 하자 그래가지고 둘이 짜가지고, 부부가. 제가 말했잖아요 꼭 죄지을 때는 부부가 하나가 된다고. 짜가지고 그 돈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뒀어요. 저 같으면 딱 속았을 거에요. 저 같으면. ‘아이구 집사님, 아나니아 집사님, 요즈음 경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집도 안팔리는데 그 집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다니…축복을 받을지어다. 백 배 천 배로 받을지어다.’ 그런 큰 죄를 저질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베드로는 안그랬어요. 베드로는 성령충만하잖아요. 베드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잖아요. 베드로는 즉각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서 알았어요.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냐하면은요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그랬어요. 아나니아 마음에 사단이 가득했다. 그래서 성령을 속이고 땅 값을 감추고 일부를 마치 전체인것 처럼 가져다 두었을 때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어요.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 네 땅이 아니냐? 판 다음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하나님을 속이느냐 어찌하여 네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느냐 이렇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5절 말씀,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다시 영어로 읽겠습니다. And great fear seized all who heard what had happened. 오늘날 교회에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두가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경회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자기 것을 자기것이라고 여기지 아니하고 그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이 일은 오늘날 교회에 없습니다. 부분적으로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와같이 성경적인 예를 없습니다. 그런데요 이 두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어요. 

동시에, 같은 문맥에서. 조금 더 지났어요. 한 세 시간이 지났어요. 세 시간이 지나서 아나니아의 부인 삽비라가 너무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왔어요. 이제.. 나도 이제 한자리 해보지 않을까. 나도 이제 일곱집사에 포함되지 않을까. 나도 이제 누가 좀 알아주지 않을까. 왜요? 집을 팔아서 우리 남편이 갖다 드렸거든요. 아주 기대하는 마음으로 목에 힘주고 교회를 딱 나타났어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 돈이 다냐?’ 라고 물어보니까 삽비라는 남편과 짰으니까 짠대로 얘기해야 되잖아요. ‘아니 당연하죠’ 그 말을 하자 또 죽었어요.

 그 자리에서.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냐하면 한번 들어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시험하려 하느냐 주의 영이 그걸 모를 것 같으냐? 성령이 너희 마음에 속임수를 모를것 같으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너도 메어갈 것이다. 곧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져 혼이 떠나는지라.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메어다가 그 남편곁에 장사하니 5장11절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두려워하니라. Great fear seized the whole church and all who heard about these events. 여러분 한번 잘 들어보세요.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만약에 성령을 속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죄를 지을 때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이것은 구약보다도 더 무서운 즉결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이 초대교회에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얼마든지 필요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진리라고 믿으십니까? 이것이 진짜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사랑과 진리교회는 이것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주석을 달고 해석을 했는데 마음에 안들어요 다. 전부다 지식적이고 다 이론적이고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게 그런 교회가 없으니까 이거 이해가 안되잖아요 사실. 성경해석이 너무 어려운거에요, 이 부분이. 그런데 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한 분을 제가 만났어요. 

그 분이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이에요. 이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은 여러분이 구글에 들어가서 search해 보면 요즈음에 가장 널리 인정받고 존경받는 참 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연세가 많이 드셨는데. 이 목사님이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셨어요. 한번 들어보세요. ‘무엇이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유를 팔아서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채우는데 전념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날마다 음식을 나누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기쁨과 관대함으로 충만하게 하여 찬양과 기도드리게하는 원동력이 되었을까? 무엇이냐? 그것은 43절에 열쇠가 있다’라고 생각을 한답니다. 43절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임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너무나 약해요. 번역이 너무 약해서 이건 전달이 잘 안되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그 뜻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임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들을 가득 채웠다. 그 말이에요. 이것은 여러분이 하찮게, 여러분이 가볍게, 우습게 여길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 그로 인해서 떨리는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해 볼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쳔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또 그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또 하나의 얘기 거리입니다. 하나님은 또 하난의 논쟁거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집안 대대로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나도 지켜야되는 전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완전하신 분입니다. 여전히 두려운 분입니다. 여전히 놀라운 분입니다. 여전히 경외감에 충만하며 그 분을 섬기는 것은 충격적인 현실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본다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오늘날 교회들에게 바로 이 사도행전처럼 모이는 장소에 경외함과 두려움과 놀라움과 떨림의 모든 하나님을 경외함이 성도들에게 임했다고 하는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Where is the church? 그 교회가 어디있냐라고 물어볼 때 우리의 대답은 그런 교회 없습니다 에요. 그런 교회 없습니다. 계속해서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의 부재, 이러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며 성도간의 교제를 하찮게 여기며 기도하기 보다는 놀기를 좋아하게 된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저는 이 분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안에 이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아주 우습게 보죠. 우습게 보는 정도가 아니죠. 제가 계속해서 여러분 사도행전을 보면서 왜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을까? 제가 너무 고민하면서 성경을 다시 봤어요. 제가 그 성경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좀 찾아드려 보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성경적인 교회의 특징은 뭐냐하면 믿는 자 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 그랬죠. 자 그 말씀인데 그 말씀을 우리가 자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한 번  펴 보십시다. 우리가 성경을 찾는 것이 조금 불편하지만 사도행전 19장을 한 번 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6절 부터 보면요 네, ‘악귀 들린 사람이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우리가 이것은 지난 주에 했습니다. 그죠? 이 마술하는 유대인이 바울이 말하는 예수이름으로 쫓아내려다가 봉변당한 얘기죠? 예, 이것은 지난 주의 설교를 여러분이 들으시면 잘 나와있어요.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은 아직 이 사람들이 크리스쳔인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이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다. 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는지 아세요? 사도들의 손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이해가 되시나요? 오늘날 교회에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지 아시겠어요? 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계속해서 사도행전 9장에 보면요 사도행전 9장은, 그냥 듣기만 하세요. 사울이 회심한 장면이에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런다음에 그가 성령세례를 받고 즉시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하니까 밤에 사울을 몰래 성에서 내려가지고 도망치게 하는 장면이에요. 네, 그것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요 9장 3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수가 더 많아지니라’ 제가 정말 죄송하지만 이 말씀도 우리 말이 도무지 clear하지 않아서 영어로 좀더 여러분에게 설명을 해드립니다. 

So the church throughout all Judea and Galilee and Samaria enjoyed peace, being built up,  교회가 세워져갔다는 거에요. and going on in the fearof the Lord and in the comfort of the Holy Spirit, it continued to increase. 세워지고 또 계속해서 세워지고 계속해서 증가됬다. 어떻게요? 잘 들어보세요. in the fear of the Lord,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and in the comfort of the Holy Spirit, 성령의 위로하심으로. 두 가지가 같이 있다는 거에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교회가 충만하기 때문에 교회가 계속해서 세워져 갔으며 성령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져 갔다. 오늘날 교회는요 성령의 위로는 있습니다. 성령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언제 필요합니까? 우리가 절망할 때, 우리가 낙심할 때, 우리가 포기하고 싶을 때 우리가 성령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죄 지었을 때 우리가 성령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정말 우리가 교회생활할 때 너무나 힘든일이 많습니다. 성령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위로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충만했다는 거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빠지면 교회는요 엄청난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여러분,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보시면 고넬료  가정이 나와요. 고넬료 가정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다고  나옵니다. 모두가 다. 그러면서 사도들이  ‘아 그렇구나, 유대인이요 이방인이요 헬라인요 자유인이요 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받으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이유중에 한가지는 오늘날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에요. 그동안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동안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성경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직무유기 한거죠. 그러니까 책임은 다 목회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왜곡시킨다는 거에요. 도저히 내가 이대로 살 자신이 없으니까 그리고 이대로 설교하면 교인들이 싫어할 것을 뻔히 아니까 이걸 설교를 안하거나 약간 희석시켜가지고 대충설교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기 때문에 도무지 교인들이 진리를 들을 기회가 없는 거에요. 또 한가지는요 아예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한번 들어보세요. 제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대해서 얘기하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그것은요 초신자일 때에 초보자일 때 이야기 아닙니까? 장성했을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다죠.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그랬는데 무슨 두려움 얘길 하세요. 사랑이면 다 해결되지.’ 그럴듯 하죠? 그러면서 이런 성경을 인용합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봐요, 목사님 우리는 이제 성숙한 교회이기 때문에 두려움 같은 것 얘기 안해요. 사랑이면 다 되요.’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여러분 오늘 설교를 다 듣고나시면 여러분이 얼마나 속았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진짜로 이 말이 그 말입니까? 더 나아가서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봐요, 목사님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마음 안 주신데요.’ 그러면 성경이 서로 역설적이네요? 성경이 서로 다른 말 하고 있네요? 이게 문제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고 성경을 이 구절을 하나 떼어가지고 마치 그것이 모든 진리인것 처럼. 성경에는 두려움이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Godly fear, 경건한 두려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두려움. 정말 우리가 없어서는 안되는 두려움이 있구요. 또 하나는요 두려워하면 안되는 두려움이 있어요. 

Ungodly fear에요. 성경은 이 두가지를 말하고 있어요. 여러분 다시 아까 그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의 이 두려움은 경건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두려움, 그런데 이 말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이렇게 번역해야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것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Spirit of fear, 두려움은 영적인 존재에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어요. 뭘 두려워하게 만들어요? 장래에 대해서 두렵게 하죠, 내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게 하죠, 내 경제가 나빠질까 두려워하죠, 직장에서 짤릴까봐 두려워하죠, 내 남편이 떠날까봐 두려워하죠, 자식들이 잘못된 길로 갈까봐 두려워하죠, 건강이 나빠질까봐 두려워하죠, 높은데 올라가면 두렵죠, 물에 빠질까봐 두렵죠, 사고가 날까봐 두렵죠, 요즈음에는 비행기도 자주 떨어지니까 비행기 떨어질까봐 두렵죠. 

이 온같 두려움은요 성경이 말하는 Spirit of fear를 말하는 거에요. 두려움의 영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환경을 두려워하게 하고 이런 잘못된 것들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것을 두려워하게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이걸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주셨는데요? 오히려 하나님은요 우리에게 The Spirit of the Lord를 주셨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을 주셨어요. 그러니까요 이게 엄청난 창이인데요. The spirit of fear하고요The Spirit of the Lord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에요. 천국과 지옥 차이입니다. The spirit of fear 는 Ungodly fear. 잘못된 두려움이요, The Spirit of the Lord 는 경건한 두려움이요 정말로 우리에게 있어야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령입니다. 바로 이 영이 예수님 위에 임했던 거에요. 어, 그런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이사야 말씀에 보면은요 이사야가 잘 설명해 줍니다. 그냥 듣기만 해보세요. 

이사야 11장 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누구 이야기에요? 예수님 이야기. 그러면서 2절에 ‘여호와의 신’ ‘The Spirit of the Lord’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 신은 6가지이다.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The Spirit of fear of the Lord’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 예수님 위에 임할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은 계속 말하기를 3절에 ‘그가(예수님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다’ ‘He will delight fear of the Lord’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것이다. 이해가 안되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어떻게 기쁨을 삼을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이제 앞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뭔지 우리가 함께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기쁨이에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즐거움이에요. 그게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이 임했던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없어요. 교회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요? 없어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좀 더 요약을 해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하고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더  요약을 해서 말씀 드릴께요. 여러분이  구약을 다 찾으실려면 밤새 다 찾으실래도  다 못찾으세요. 그래서 제가 요약을  해드리는 거에요. 구약에서 제일 중요한 concept이 이겁니다. 구약에서의 가장 중요한 concept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악에서 떠나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항상 같이 가요. 항상 같이. 한 번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0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두려워말라 그러죠? ‘하나님의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심이라’ 여러분 똑같은 말이에요. 두려워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두 가지가 있어요. 

쓸데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죠.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해라. 하나님을 두려워해라. 그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여 너희로 하여금 범죄치 않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죄를 짓지 않는 것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죄를 짓게된다 그 말이에요. 욥기 1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악에서 떠나는 것은 같이 간다는 거에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악을 행하게 된다느 거에요. 

잠언 16장 6절은 이 말씀을 더 정확하게 말합니다. ‘인자와 진리로 죄악을 속하게되며’ 그 말은요 인자와 진리로 죄사함을 받게되지만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죄를 짓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악에서 떠나게 되는데 오늘날 교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죄 짓는 것을 우습게 아는 거에요. 그리고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우리가 뭐 구약에 사나? 우리는 신약이에요. 목사님. 우리는 은혜의 시대에 있어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죄 좀 지었다고 그러지 마세요.’ 자기 죄를 정당화 하고 자기 양심을 점점 무뎌지게 만들어서 결국 죄를 지어도 조금도 찔림이 없는 화인맞는 양심이 되어서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예수님 말씀처럼 지옥자식 만드는 일이 오늘날 교회에서 얼마나 자주 행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를 다 하나님이 들어주셨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한 구절이 한구절도 없어요. 오히려 성경은 히브리서 5장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할 이시이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he was heard because of his reverent submission.’  이게 이런 뜻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죄에서 떠나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는 거에요. 여러분 기도 아무리 많이 해 보세요 응답 안됩니다. 그거 시간낭비에요. 죄에서 떠나야되요. 회개해야되요.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가 없는거에요.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가 없는 거에요.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고 히브리서는 기록하고 있어요.

계속해서 여러분  제가 신약을 요약해 드립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얘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 아세요? 제가 이 말씀을 보면서  내 가슴을 칠 수 밖에 없고 정말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저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거에요. 저부터 부족한데 교인들은 어떻겠어요?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서 제 자신에 대한 심한 가책을 느끼게 된거에요. 한번 들어보세요. 신약이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했는지 한번 보자구요. 빌립보서 2장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내가 있으나 없으나 항상 순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라’ 영어 성경에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 그러니까 어떤 분이 그래요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요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구원의 확신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러면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까? 바울이 지금 뭐라고 말하냐 하면은요 내가 분명히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지만 내가 끝까지 내 구원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구원이 절대로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 얼마든지 나는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내 구원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거에요. 

그런데 두려움이 없어요. 잘못된 교리, 잘못 배운 성경구절들 때문에 교회가 망조가 들었어요 지금. 그게 잘못된 교리로 세뇌교육을 받으면 그렇게 되요. 여러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이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어요. 바울은요 자기도 버림이 될까봐 두려워한다고 그랬어요. 여러분 뭘 두려워해야 되는지 아시겠어요? 여러분 내일 경기가 나빠질까봐 두려워할게 아니고요 먹을것 입을것 쓸것이 없을까봐 두려워할게 아니고 정말로 여러분이 구원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것인가, 구원을 끝까지 이룰 수 있을것인가 두려워하라는 거에요 성경이. 엉뚱한 것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고요 성경은 계속해서요 신약성경은 얼마나 분명하게 말하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약속이 뭔데요? 6장 끝절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는 약속.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게 끝까지 보장되라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받을 것이라는 이 약속을 우리가 가졌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되냐,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한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게 해야된다 그랬어요. 이건 뭘 말하냐하면은요 구원을 얻었다고 끝나지 말고 완전한 거룩함을 이루어 가라는 거에요. 완전한 성화를 이루어가라는 거에요. 어떻게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할때만 거룩함을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성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하자. 깨끗하게 하자.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요 내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안들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내가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안들어요.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바울은 계속해서 ‘뱀이 간계로 이브를 유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깨끗함과 진실함에서 떠나서 오염될까봐 두려워하노라. 이거를 두려워하라는 거에요. 이거를 두려워해야 되요. 우리 가운데 누가 이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처음 예수님 믿을 때는 너무 진실했는데, 너무나 순수했는데 나는 끝까지 이 진실함과 순수함을 지킬줄 알았는데 살다보니까 더러워지고 오염이 되고 죄를 짓게되고 내 마음이 무뎌지는 것 이것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주님 내가 주님앞에 기도한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더 나아가서 고린도후서 12장 20, 21절에 보면은요 바울이 무엇을 두려워했냐 하면은요 초대교회, 고린도교회에 바울이 제일 두려워한 것이 이건데요 교회에 이런 것들이 있을까봐 두렵다고 그랬어요. 

한번 들어보세요.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과 수근수근하는 것과 거만한 것과 어지러운 것이 교회안에 있을까 두렵다’ 그랬어요 바울이. 여러분 안에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까? 정말 사랑과 진리교회 안에 다툼이 있으면 안된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요. 시기가 있어서는 안되요. 분냄이 있어서는 안되요. 당짓는 것이 있어서는 안되요. 중상모략하는 것, 수근수근하는 것, 이런 것이 있으면 안됩니다. 주님. 절대로 이런 것들이 우리 교회에 없도록 주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더 나아가서 21절에 바울이 뭐라고 그런지 아세요? 너희안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있는데 그 죄지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을까봐 두렵다 그랬어요. 이게 진짜 두려워해야 될 것들이에요 여러분. 왜냐하면은요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가는데요 뭐. 그 대상이 누구이던지 간에. 저도 마찬가지이고. 바울은 정말 두려워해야되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았어요. 이게 바로 Godly fear에요. 

이게 경건한 두려움이요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될 두려움이에요. 히브리서 4장 1절에도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온전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 못 들어갈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라. 이걸 두려워한다는 거죠. 골로새서 3장 22절에는 또 종들이 상전을 섬길 때에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을 섬기라는 말도 있어요. 이건 다 바울의 얘기에요. 그러니까 바울만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아니구요 베드로도 그랬어요.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 보면은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른즉’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 믿음대로가 아니라 행위대로 판단하신다. ‘그 분을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로 있을 때, 이 세상을 살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요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행위가 하나님께 심판받을 행위가 될까봐 두려워해라 이 말이죠.

이건 베드로의 말이에요. 여러분 바울과 베드로가 믿음의 단계가 낮아서 이런 얘기를 했나요? 바울과 베드로가 어떤 사람들처럼 신앙의 초신자여서 이런 얘기를 했나요? 아니요 이들은 주님의 깊은 마음을 안 사람들이에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면 더 알수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깊게 깨달아 집니다. 그게 없는게 초신자에요. 지금까지 우리는 아주 거꾸로 배워왔어요. 처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많이 성장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성화에요.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이 가능하게 하는거에요. 그래서 바울이 그토록 외치는 거에요. 베드로가 이렇게 신신당부하는 거에요. 

너희가 이 세상에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지내야된다. 히브리서 12장 28절 29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이심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기쁨으로 섬기래요. 아멘. 그런데 기쁨으로만 섬기면 꼭 방자히 행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기쁨으로만 섬기지 말고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섬겨라. 여러분 이해가 안되시죠? 이게 두개가 어떻게 공존합니까? 목사님. 두려움과 기쁨이 어떻게 공존합니까? 이게 바로 신앙의 성숙한 단계라는 거에요.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면은 두려움과 기쁨이 공존하게 되는 것을 알게되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던 것처럼. 내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느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지를 깨닫게 되는 거에요.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모양이라도 과감하게 버리는 그 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며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하는지 그 기쁨을 아십니까? 그 기쁨을 모른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는거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죄짓는 것을 쉽게 생각하고 그것 즈음이야 목사님 장로님 너도 나도 다 짓는 죄를 갖고 목사님 그러십니까? 하나님이 그러셨어요.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Fear God’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초보단계의 신앙이 아니고 아주 성숙한 단계의 신앙이에요. 여러분이 거기까지 자라야되요.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이룰 수가 있고 거룩함에 이룰 수가 있고 우리 자신을 더럽게 하는 육과 영의 모든 것으로 부터 우리 자신을 정결하고 깨끗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굉장히 유명한, 그리고 존경할만한  목사님이 몇 분 계시는데 그 중이  한 분이 데이빗 포슨이라는 목사님이에요. 관심있는 분은 한번 serch해 보세요. 데이빗  포슨. 이분은 영국사람입니다. 이분은 대단한  분입니다. 이 분의 할아버지가 존 포슨이라고  요한 웨슬레랑 같이 사역했던 분이구요  그 아버지 씨슬 포슨은 교수님이시고  이 데이빗 포슨 이 분도 아주  참 그 가문의 흐름을 이어받아서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는데요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이 분 설교를 목사님들이아 선교사님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요. 그런데 이 데이빗 포슨 목사님이 70대가 되셔서 할아버지가 되셨는데 이 목사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1985년에 이렇게 물었답니다. ‘주님, 영국교회에 무엇이 빠져있나요?’라고 물어봤답니다. 물었더니 주님이 가르쳐주겠다. ‘영국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 그랬데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비단 영국교회만일까요? 미국교회가 더 심하면 더 심했죠. 한국교회는요? 여러분 혹시 짐 베이커라고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짐 베이커. 네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이 짐 베이커라는 분은 참 하나님께서 대단한 은사를 준 분인데 이 방송에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분이에요. 그런데 이 짐 베이커가 펫 로버슨 혹시 아시나요? 리즌트 유니버시티의 총장이시고 전에 대통령에 출마했던 분이죠. 이 펫 로버슨이 700클럽 이라는 것을 하는데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가장 많이 시청하는 그런 프로였어요. 기독교TV 프로. 제가 오늘 1부 예배때 700클럽 아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더군요. 그래서 제가 래리킹쇼는 아냐고 물었더니 다 알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700클럽이 래리킹쇼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유명했던 프로에요. 지금도 유명하지만 그 때는 대단했어요. 시청율 뭐 수백만명이 시청했으니까. 그런데 이 700클럽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분이 바로 이 짐 베이커에요. 그리고 그 분이 TY에 브로드케스팅 네트워크라고요 미국의 가장 큰 기독교방송을 시작했는데 ‘크라우치’ 그 분이랑 같이해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에요. 

이분이 아주 탁월한 분입니다. 이 분이 손만 대면 뭐든지. 방송쪽은 이 분이 손대면 순식간에 성공하는 거에요. 그런 은사가 있어요. 이 분이. 그런데 이 분이 성공하고 유명해지니까 죄를 지었어요. 타락하게 되었어요. 유명해지면 타락합니다. 성공하면 타락합니다. 안그랬으면 좋겠는데 꼭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이 분도 결국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징역 46년형을 받았어요. 그러면 그 분이 감옥에서 평생 사기다가 가야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인생을 그렇게 끝내지 않고 그 분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46년을 5년으로 감형을 해요. 그런데 이 짐 베이커 목사님이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요. 감옥안에서 화장실청소를 했데요. 그런데 자기는 감옥에 있는 시간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였다. 자기가 감옥 들어가기 전에는요, 자기가 고백하더라구요. 

성경을 한 번도 안봤데요. 감옥에 들어가니까 할 일이 없더래요. 그래서 성경을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외울 때 까지 보게되었다고. 그게 하나님의 역사에요. 여러분 감옥에 보내기 전에 성경 보세요. 그런데 이 분이 성경을 다시 보고 한 말이에요. 내가 지금까지 성경을 모르고 죄를 지었다는 거에요. 나는 성경에 이런 말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거에요. 그리고 다시 이 분이 회복해가지고 새롭게 브랜슨 미조리에서 ‘짐 베이커 쇼’라는 것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연세가 많이 드셔가지고 옛날갖지 않더라구요. 그런데요 이 짐 베이커가 감옥에 있었을 때, 또 미국에 유명한 목사님이 한 분 계세요. 존 비비어라는 목사님이 있어요. 존 비비어라는 목사님도 대단한 목사님이에요. 이 분이 참 귀한 책들을 많이 쓰셔서 베스트셀러가 되셨는데 이 목사님이 짐 베이커 목사님을 찾아갔어요. 감옥에. 너무나 궁금했어요. 짐 베이커가 참 좋은 분이고 자기가 알기로는 참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왜 타락했을까? 도대체 타락한 이유가 뭘까? 이게 알고싶어서 찾아간거에요. 

그래서 이 존 비비어 목사님이 짐 베이커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짐,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 내가 알기로 당신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즈음에 가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져가지고 이렇게 됐어?’라고 물었더니 짐 베이커가 충격적인 말을 하더래요. ‘John, I never stopped loving Jesus.  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멈춘적이 없었다. I love Jesus all the way through. 나는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했다. 그런데 그 다음말이 충격적이에요. But I didn’t fear Him. 나는 그 분을 경외하지 않았다. 내가 그 분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요 오늘날 교회는 도저히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임재가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해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한 사람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다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집이 있는 사람은 집을 팔아서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재산을 팔아서 밭이 있는 사람은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두면 사도들이 그걸가지고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없는 교인들을 먼저 도왔고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도왔던 것이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포기해야 됩니까? 아니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교회를 세우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되요. 우리가 모일 때마다 우리 모임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으로 충만해야되요. 그래서 함부로 죄짓지 말아야되요. 죄짓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되요.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악에서 떠나야되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육과 영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정결케 되어야 되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기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되요. 여러분 그거 아세요? 여기있는 어느 누구도 끝까지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할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두려움이 필요한거에요. 두렵고 떨림으로. 기쁨과 감사함으로가 아니라. 믿음과 봉사로가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라.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새겨지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과 진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한 마음으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제발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사랑과 진리교회에 사람들이 오면 그 교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임재가 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으로 충만하다. 그 성도들은 자기것을 자기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모두 하나님께 드려서 그 교회는 핍절한 사람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없고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가장 성경적인 교회라고 우리 교회가 인정받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출처:LTC/벤자민 오 목사>

과연 무엇이 성경적인 교회인가? 5

사도행전 16장 볼까요, 사도행전 16장, 16절, 17절, 18절 제가 한 절 읽고  여러분이 한 절 읽고 그리고 세번  째 절은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여러분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는 얘기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이 그가 말한데로 내가 복음을 전할 때 내가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 내가 아는 지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마다 그 곳에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가는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해주셔서. 그래서 여전히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마다 항상 하나님께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메세지가 하나님께로 온 메세지라는 것을 Confirm해 주셨습니다. 어떻해요? 표적과 기사로.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을 이 점하는 귀신들리 여종이 보았습니다. 이 성경말씀을 여러분들에게 풀어드리면 이런 뜻입니다. 점쟁이도 귀신들려야 제대로 점쟁이를 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귀신 가운데 점하는 귀신이 있다는 거에요. 성경에 나와있잖아요. 점하는 귀신, 이 점하는 귀신이 사람에게 들려서 그 사람이 아주 쪽집개 같이 맞추는거에요. 점하는 귀신은 다른 말로 쪽집개 귀신이라고 합니다. 네, 그래서 너무 감쪽같이 잘 알아 맞추니까 사람들이 그냥 혹 하는거죠. 

그래서 돈 보따리를 들고 가지고 찾아가는거죠. 그런데 이 여종은 점하는 귀신이 들려가지고 사람들에게 점을 봐줬어요. 귀신이 들렸기 때문에 점을 잘 본단 말이에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뭔가 하려면요 뭔가 들어야되요. 우리가 신들려야되요. 귀신 들리던가, 성신 드리던가...그래야지 우리가 이 땅에서 뭘 하든지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은 참 어려운 신앙생활이에요. 어찌되었건 간에 이 점하는 귀신 들린 여자가 하도 점을 잘보니까, 하도 돈을 잘 벌어오니까 누가 돈을 벌어요? 그 주인이. 그 주인이 아주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이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을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게 도저히 게임이 안되는거에요. 

자기가 점보는 거하고 비교가 안될만큼 바울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바울을 졸졸 따라다니게 된 거에요. 바울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하는 말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하는 말이 이 귀신이 하는 말이, 귀신이 귀신같이 알아맞춘 말 좀 들어보세요. 귀신이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다. 바울을 보고 너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은 종이다. 너는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다 이렇게 말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귀신도 알아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지 아니면 양다리 걸치는지, 아니면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헤매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귀신과 친구삼아 하는지 그거 다 알거든요. 네 그래서 우리가 속담에 귀신같이 안다고 그러잖아요. 네 진짜로 알아요. 안다니까요. 귀신이 바울을 알아보잖아요.

사랑과 진리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귀신이 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귀신이 바울을 알아본거에요. 그런데 그것도 하루이틀이죠. 몇 일을 쫓아다니면서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당신네들은 구원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계속해서 괴롭히니까 참다 참다 못해서 바울이 18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러니까 귀신이 어떻게 해요? 즉시 나왔어요. 자 이 스토리를 여러분이 성경에서 읽어보면 잘 알겠지만 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가니까 이 여종이 점을 쳐요? 못쳐요? 그러니까 누가 돈을 못벌어요. 그래서 그 주인이 나중에 바울을 죽이려고 난리를 일으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 우리가 거기까지 보고 사도행전 1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 오늘  저희가 성경적인 교회 5번째입니다.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도행전 19장 13절  부터 보겠습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귀 들린 자들에게 여기서 악귀라는 말은 evil spirit, 악한 영, 다른 말로 귀신이라는 말이에요. 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영어성경에 상하여는 두둘겨맞아 피를 흘리며라는 말이에요.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요 In this way, 이와 같이 the word of Lord,하나님의 말씀이 spread widely  하나님의 말씀이 넓게 퍼져나가며and grew in power, 능력으로 계속해서 증가되어갔다.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도 잘 압니다. 이 말씀은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마술도 귀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보니까 자기네들의 마술보다 바울이 예수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능력과 기술이 훨씬 탁월한 것을 보고 바울의 그 능력을 배워보려고, 그런데 그 마술하는 사람들은 주로 주술을 외우쟎아요.

 자기가 외우는 주술을 통해서 마술을 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겉으로 관찰을 해보니까 바울이 주술을 외우기는 외우는데 간단하게 외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네들은 한참 외워야 되거든요. 그런데 바울은 간단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얘들이 생각할 때 저 주술은 찬 간단해서 좋다. 우리도 한 번 해볼까? 자기네들끼리 시험적으로 테스트를 해 본거에요.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뭐라고 그랬냐하면 바울이 쓰는 예수 이름으로, 그러니까 그 사람속에서 말을 하기 시작하는거에요. 여러분 귀신들도 말 합니다. 못 믿으시는군요. 

진짜로 말해요. 성경에 나와요. ‘내가 바울도 알고’ 귀신은 바울을 알아요. 바울은 귀신이 인정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예수도 안다. 그런데 넌 뭐야. 문제가 심각해지는거에요. 이제. 이게 무슨 뜻이냐하면은요 바울은 내가 누군지 알아서 바울이 예수이름으로 명할 때 나는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예수 내가 잘안다. 그 이름에 우리 모든 귀신들이 떤다. 너는 내 종이야. 너는 내 밥이야. 그런데 네가 감히 나한테 명령을 해? 귀신들이 열받은거에요. 여러분 귀신들 열 받게 하지 마세요. 귀신들이 열받으니까 진짜로 귀신들이 이 사람들에게 뛰어올라와가지고 죽도록 두둘겨 팼어요. 

성경에 보면, 그래서 피를 흘리면서 옷을 벗겨가지고 완전히 알몸으로 피를 흘리면서 시퍼렇게 멍들어서 도망갔다. 이게 스토리입니다. 이게 무슨 우세입니까? 이게. 이거 우세 아니에요? 여러분, 다시는 이 사람들이 챙피해서 거리에나 나왔겠어요? 이런 우세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크리스쳔들 안에도 있습니다. 소위 명목상의 크리스쳔들, 본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본인들이 말씀을 많이 알고있다고 생각하고 본인들이 예수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어 쫒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 케이스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왜그런가하면은요 영적인 세계는 속일 수가 없기 때문에,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여러분, 성경적인 교회는 말로만 예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권세가 정말로 나타나는 교회. 말로만 예수,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거에요. 정말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나타나야되지 않겠느냐. 너희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다오라고 야고보가 말한 것 처럼 , Show me your faith 라고 말하는 거에요. 네가 정말 믿는자라면 믿음을 보여다오. 그래서 오늘 저희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과 이 유대인 마술사의 차이. 무엇이 이토록 비참한 차이를 가져왔는가. 왜 바울이 말하면 꼼짝없이 귀신이 듣고, 예수 이름으로 능력이 나타나고 왜 이 유대인 마술사가 하면 오히려 두둘겨 맞아가지고 이런 망신을 당하는가. 그 이유를 여러분들이 정확하게 아셔야 됩니다.

첫번 째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는자의 권세가 있습니다. 믿는자의 권세, Authority가 있어요. 어디 나와요? 요한복음 1장 12절. 요한복음 1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한다는 뜻은 그 이름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 이름을 믿는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다. 그런말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을 믿는다. 그랬어요.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 이름이 도대체 어떤 이름인가, 내가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인지 알고 믿는가, 아니면 그 이름은 그 이름이나 내 이름이나 철수나 순이나 그 이름인가. 아니라는 거에요. 

여기서 말하는 그 이름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름이라는 거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그 이름을 믿는자,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이며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것인가를 알아야되지 않겠어요. 그 이름이 어떤 이름입니까? 빌립보서 2장 9절 말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name that is above all names,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이름이라는 말이 항상 carry하고 있는 것은, 이름이라는 것이 항상 의미하고 있는 것은 권세라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말은 가장 뛰어난 권세를 그 이름위에 주셨다 그 말이죠. 10절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 이 이름이 바로 그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어떤 이름이냐하면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이 이름위에 어떤 이름도 없다. 
이 말은 이 이름보다 높은 권세가 없다 그 말이에요. 가장 최고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예수님이다. 이것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하늘에 있는 모든 자들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과 땅 아래의 모든 자들이 예수 이름에 무릎을 꿇게 되어있다. 

그런데 하늘에 있는 모든 자들이 어떤 자들이냐 하면은요 하늘에 누가 있어요? heaven에는 천군 천사들이 있어요 2nd heaven에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 악한 영들이 2nd heaven에 있어요. 그리고 그 이 땅에는 누가 있어요? 정사와 권세가 있어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 여러분이 구약과 신약을 총동원해서 보면 땅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면 다 항상 지옥에 있는 악한 영들을 말해요. 그러면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하늘에 있는 것들, 천군천사들, 둘째하늘의 모든 악의 영들, 땅에 있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피조물들, 그리고 땅 아래에 있는 저 지옥에 있는 모든 어둠의 권세들이 이 예수 이름앞에 무릎 꿇게 되어있다는 거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여러분이 믿는 이름이 바로 그 이름이에요. 여러분이 믿는 그 이름이 오바마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믿는 이름은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이름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이에요. 여러분이 그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의 의미 그대로 믿으십니까? 여러분, 우리 각자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믿습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이 있다고 성경은 말해요. 그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하면 내가 감당할 수 있고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그 분량만큼 내가  믿을 수 있다 그 말이죠. 

그런데 예수 이름의 권세와 예수 이름의 능력은 무한한 것이지만 그 엄청난 이름이 여러분의 안에 있는 믿음의 분량만큼 제한을 받게 되어있어요. 여러분이 정말로 예수 이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믿으면 그대로 되는 것이요, 여러분이 믿는 예수 이름은 내가 감기정도 고칠 수 있다 그러면 감기 정도 고치는 거에요. 여러분이 믿는 예수 이름의 권세가 죽은자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으면 죽은자를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 이름의 권세는 무한한 것이지만 철저하게 여러분의 믿음의 제한을 받는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의 믿음 만큼만 주님은 역사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그 이름을 얼만큼 믿느냐 그 이름을 얼마나 인정하느냐, 그리고 그 이름의 얼마만큼의 분량을 내가 소화할 수 있느냐. 믿는다고 다 믿는자가 아니에요

 여러분. 여러분 예수님 믿는다고 다 믿는자가 아니에요. 지난번에 Bon Jones목사님께서 하나님께서 한번은 접시를 뒤집어보라고 해서 뒤집어보니까 거기에 수표가 있더래요. 그 수표의 번호가 341인데 거기에 싸인하는 곳에 예수님의 보혈로 싸인이 되어있고 그리고 액수가 안적어 있더래요. 이걸 blank check이라고 그러잖아요. 이걸 백지수표라고 한국말로 그런데요. 그 말은 우리가 여기다 쓰는데로 된다 그 말이죠. 그렇죠?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백지수표를 받아보려나. 사실은 우리가 한 번 백지수표를 받은 적이 있어요. 교회 역사상. 진짜로 있었습니다. 오래된 얘기이지만 저희가 찬양 CD를 처음 만들었을 때 아주 오래된 얘기인데 찬양 CD를 만들었을 때 그 찬양 CD를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드렸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우리 찬양CD를 듣고 너무 은혜를 받으셔가지고 CD를 건내주신 분에게 공수표를 주셨데요. 기회는 왔지 않습니까? 교회 사는거 문제겠어요? 그런데 그 받으신 분이 $00이라고 썼답니다. 지금도 제가 그 생각만 하면 원통하고 아니, 그 백지로 수표를 주는 사람은 뭔가 아니, 백지수표를 그냥 주겠어요? 뭔가 감이 있었잫지 안겠습니까? 뭐 그냥 이미 지나가버린 기회를 어떻게 하겠어요. 제발 부탁입니다. 여러분 백지수표를 받거든 저랑 상의해서 액수를 써주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그런데 어찌되었건 간에 Bob Jones 목사님이 받으신 수표가 백지인데 주님께서 네가 무엇을 믿든지 그 액수를 쓰면 그것은 그대로 될 것이다. 이것은 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엇을 믿던지 예수 이름의 권세로 믿는 그대로 될것이다. 그 말이죠. 아멘, 그런데요 문제는 그 분처럼 $100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그 사람은 평생 $100만큼만 권세를 사용하는 거에요. 저 같으면 저는 20miliion을 쓸거에요. 이 호텔이 20million이래요. 여러분 check 이 bounce되서 돌아오겠죠... 하하하... 거기다가 벌금까지 물어가지고.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bounce내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에는 무한한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는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각자마다 이 예수 이름의 엄청난 권세를 자기 믿음의 분량만큼 믿고 사용하고 사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평생 100불짜리 쓰고 살다가 가고 어떤 사람은 천 불짜리, 어떤 사람은 만 불짜리, 어떤 사람은 십만불 짜리, 저같으면 당연히 million 단위로 나가죠. 왜냐하면 그게 얼마나 큰지 모르니까. 어차피 모르는건 마찬가지 이니까. 나한테는 million이나 천불이나 똑같이 보이니까.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께서 깊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 속에는 엄청난 말씀이 들어있는 거에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 그 이름을 믿는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 속에 그 권세가 들어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나 이 권세를 얼만큼 쓸 수 있는가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달려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을 여떻게 해야되요? 늘려야되고 키워야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제가 이 세상을 살아보니까요 사람마다 그릇이 있더라구요. 그릇. 참 이 말씀 드리기가 죄송한데요 어떤 사람은 진짜 째째한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쫀쫀한 사람이 있습니다. 말하기 부끄러운 정도로. 식당에 가면 절대 돈 안냅니다. 내는 척하고 시간끌고 먼저 내기를 기다리고. 옛날에 제 친구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그리고 굉장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인색하고 하이튼 뭐든지 쫀쫀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나중에 보면 믿음도 쫀쫀해요. 여러분 스케일을 크게 가지세요. 좀 넓게 가지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져주시는 것 팍팍 쓰세요. 어차피 우리가 다 가진것 주님이 다 주신 것 아닌가요? 아멘을 큰소리로 하시는 분들에게 축복이 백 배로 임할 지어다. 아멘, 그렇게 될 겁니다. 뿐만아니라 에베소서 1장 21절에 보면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예수의 이름이 최고에요. 그런데 이 이름을 우리가 믿는가, 우리가 믿는 이름이 바로 이 이름인가, 아니면 여러분이 믿는 이름이 또 따로 있는가, 요즈음에는 참 제가 그런 생각 할 때가 많아요. 분명히 교회가 교회같지 않는 교회가 너무 많기 때문에 도대체 그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교회인가 궁금할 때가 있어요. 정말 그 교회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저 교회도 믿고 있는가. 

너무 말도 안되는 얘기들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의 믿음을 증거하는 증거를 보여드리려고 그래요. 여러분이 정말 믿는가 그 이름을,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를 믿습니까? 뭐 부흥회하면 부흥회하러 오신 분들이 믿습니까 한다고 믿어지는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정말로 믿으면 그 믿음의 증거가 나타나요. 성경은 그 증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한 번 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6장, 여러분이 정말로 예수를 믿는 자 입니까? 그 이름을 믿는자 입니까?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표적이 나타난다는 거에요. 

우리가 정말 믿는다면 믿는자에게는 표적이 나타난다. 싸인이 나타난다. 마가복음 16장 다같이 폈습니까? 네, 17절 18절, 두 벌을 우리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믿는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잠깐만 여러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를 것이다. 그랬죠? 여러분. 자 그럼 일제부터 나오는 표적이 따르면 믿는자요 이제부터 나오는 표적이 안따르면 여러분은 입으로는 믿는자인데 아직 실제로는 믿는자가 될까 말까 하노라. 그럴 수도 있도 진짜 여러분이 가짜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신중하게 한 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잠깐 스탑해보겠습니다. 자 여기 계시는 분 가운데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네 몇 분 계시군요 다행히...그 다음에 계속 읽겠습니다.

 새 방언을 말하며여기서 새 방언이라는 뜻을 먼저 설명할께요. 이것도 방언이에요. 이것도 말이에요. 평상시에 쓰는 말 말고 성령을 받을 때 새로받는 new tongue, 방언, 그러니까 새 방언은 내가 이미 방언하고 있는데 새 방은을 받는다 그 뜻이 아니고 여기서 새 방언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말미암아 말하는 그 방언을 말해요. 그러니까 새방언을 말하며, 방언을 하시는 분 손들어보세요. 이거 하나라도 건져야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렇게 심각한 판중에 이거하나라도 건져야죠. 

그 다음에 뱀을 집으며 예수 이름으로 뱀을 집어보신 분? 오늘 아침에 1부예배 때 어떤 분이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분명히 같이 아프리카 가서 뱀을 앞에 보고있었거든요. 저는 뱀을 집었습니다. 손으로. 그 사진 보셨어요? 우리 와이프가 봤을 거에요. 못봤어? 아프리카 갔다온 증인. 봤죠? 내가 뱀 손으로 잡은거, 내가 뱀을 손으로 집었어요. 그런데 그 뱀은 독이 없는 뱀이에요. 하하하...네 그런데 뱀을 집으며 그 다음에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그 다음에 독을 아직 마실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건 그냥 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이렇게 착각하고 계시는 분 계세요? 내가 자살하려고 수면제를 많이 마셨는데도 살아났다. 그건 그 케이스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정말 나를 믿으면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

 이 표적이 너희가 믿는자라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것이 뭐죠? 첫째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으며 여러분 교회는 예수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아야되요. 그 다음에 뭐에요? 새방언을 말하며 우리는 성령의 말하게하심을 따라 성령으로 방언을 말하는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믿는자의 표적중에 하나입니다. 그 누가 뭐래도 성경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어요. If you are a beliver, this is the sign must follow. 이게 싸인이다. 그 싸인이 어떤거에요? 새 방은으로 말하며, 그러므로 여러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 담대하게 말하세요. 담대하게. 뱀을 집으며, 뱀을 집을일이 오면 집어야죠. 아멘, 그러나 또 한가지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진짜 뱀을 말하기도 하지만 Bob Jones 목사님은 뱀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죠? 예수님께서 뱀과 전갈을 밟으며 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것은 무슨 얘기에요? 이긴다는 것 아니에요? 뱀을 밟고 전갈을 밟고, 뱀은 죽음이요, 전갈은 질병이라고 그랬어요. 예수님은 질병과 죽음을 제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고 그랬어요. 그게 예수 이름의 권세에요. 그래서 뱀을 집으며 드 다음에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아멘 여러분 병든자에게 손을 얹으면 낫나요? 그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믿는 자들의 표적이에요. 

나는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말로 하지말라는 얘기에요. 이제. 여러분이 정말 예수를 믿는자면 성경말씀대로 보여주시라는 거죠. 세상 사람들도 이제 말 뿐인 크리스챤은 이제 질렸다는 거에요. ‘Show me your faith’ ‘Show me and prove you are a true beliver.’ 당신이 정말로 예수를 믿는 진정한 믿는 자라는 것을 보여달라는 거에요. 어떻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표적으로. 여러분 우리가 이 일을 행해야만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행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는 모일 때마다 이 일을 하기로 했어요. 모일 때 마다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난 금요일부터 우리가 아픈 사람 나와서 우리가 같이 기도했는데요 진짜 나았죠? 또 못믿는 분들이 계세요. 일어나 주세요. 그 때 나으신 분. 지난 금요일날 기도 받고 나으신 분 빨리 빨리 일어나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빨리 빨리 일어나 주세요. 더 있는데요, 네 감사합니다. 더 있었는데요, 이 분 말고 감기 몸살도 굉장히 시달리셨던 분..., 이런 때는 겸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가뭄에 콩나듯이 일어나면 안된다는 거에요. 모일 때 마다 나타나야 된다는 거에요. 왜요? 우리가 믿는자 이기 때문에, 믿는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를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일 때마다 이 일을 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자에게  왜 이런 표적이 따르는가. 왜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게 하셨냐 하면은요 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계속해서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20절 두 말씀. 찾으셨나요?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confirmed his word by the signs that accompanied it.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우리가 증거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Confirm해주신다는 거에요. 

어떻게요? 따라오는 표적을 통해서 정말로 우리가 증거하는 증거가 하나님의 복음이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에는 반드시 표적이 따라오며 그 표적이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것을 하나님이 confirm해주신다는 거죠. 증거해 주신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 표적은 뭐에요, 이 싸인은 뭐에요, 이건 내 말을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내가 증명한다 도장 찍는 거에요. I sign.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사역 가운데 우리 복음전도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back up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증거하신다는 것은 표적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거에요.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때에 그것이 표적을 통해서 confirm됩니까? 아니면 말만 무성합니까, 도대체 성경적인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성경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직접 믿는자에게 보여주시는 표적으로 confirm, sign하는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은 교회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 않은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라고 생각하잖아요. 왜요? 성경적인 교회가 너무나 부재하기 때문에. 성경적인 교회를 찾아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성경적인 교회와 그렇게 거리가 먼 교회도 성경적인 교회라고 우리는 착각하는 거에요. 여러분, 정말 교회다운 교회는 이제 앞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정말 영광스러운 교회, 예수님 앞에 흠도 점도 없는 교회,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한없이 이 땅에 나타낼 수 있는 그런 교회가 앞으로 이 땅에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를 세우고 계시는 거에요. 저는 그것을 위해서 삽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래서 제가 참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한 것은 목회하다가 낙심될 때가 있어요. 

실망할 때가 있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여전히 실망시키는 사람은 실망시키고 여전히 참..., 그런 고민이 있어요. 도대체 사람은 안변하는 걸까? 십년이 지나도 않변하고 20년이 지나도 않변하고 이게 우리가 믿는 복음인가,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인가, 그런 기독교 같으면 우리가 왜 믿는가 도대체.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겠어요?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잘못된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야만 합니다. 그 말은 여러분이 정말 믿는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되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런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교회를 세우는 것에 저의 인생을 다 드렸어요. 그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만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저의 일생을 기꺼이 드릴꺼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가치있는 일이니까. 도대체 이 땅에 교회다운 교회가 있는가, 성경적인 교회가 있는가,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말이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고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표적과 기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바울이 예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알고 그 이름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삶 가운데 예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좀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21장 말씀입니다. 21장 13절 말씀,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여러분, 이 바울에게 왜 예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이 제한없이 나타났냐 하면은요 바울은 예수 이름의 능력도 알고 권세도 알고 그 예수 이름을 정말로 믿음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또한 동시에 바울은 그 예수 이름을 위해서 결박 받을 각오를 하고 그가 사용하는 이름 때문에 죽을 각오를 했다는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바울은 그 예수 이름에 목숨을 걸었다는 말이에요. 예수 이름에 목숨을 건 사람이니까 예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에요. 

왜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이름의 권세가 않나타나는 줄 아세요? 예수님이 내게는 목숨을 걸만한 대상이 아니에요. 그냥 내가 적당히 주일날 주일예배 잘 드리고 그냥 천국에만 가신히 가면 되는 이름, 구원의 이름, 예수의 이름은 구원의 이름 맞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만을 원한다면 그것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그 이상은 내가 될 수가 없는거에요. 그러나 바울은 예수 이름에 자기 모든 것을 걸었어요. ‘내 목숨을 나는 이미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있다.’ 그 이름을 위해서 I’m willing to die. 왜요? 그 이름이 가장 값진 이름이요 최고의 이름이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이 알기 때문이잖아요. 그 가치를 알기 때문에 그 가치를 위해서 자기를 과감하게 내어 던진거에요. 

그러니까 예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제한 없는 역사가 나타나는 거에요. 여러분의 삶 가운에 이런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울보다 더 큰 능력도 나타날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그것을 증거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시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못 속여요. 주님은요 정말 내가 그 일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자인지 그 이름을 내가 이용하는 자인지 주님은 다 아신다구요. 우리는 정말 예수 이름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이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의 스토리가 나오죠. 베드로가 기도시간이 되어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The beauty gate,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미문을 통과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문 앞에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거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그가 앉은뱅이라는 것을, 그런데 베드로가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얘기인데요. 사도행전 3장 6절에 고백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과 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베드로가 ‘나는 돈이 없다. 나는 가진게 없다. 나는 부유한 것도 없다. 그런데 내게 가진게 딱 하나 있는데 전 재산이다. 내 가진 전부가 이것이다. 내 가진 전부가 이것인데 이것은 내게 있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줄 수있다. 내가 가진 전 재산으로 너에게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에게는요 예수 이름이 전부에요. 그에게는 돈은 없지만 그에게는 부는 없지만 그에게는 명예를 없지만 그러나 예수 이름을 가졌는데 예수 이름의 전부를 가지다 보니까 예수 이름으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신거에요. 예수 이름이 전부인 자에게 예수님이 전부가 되어주시는 거에요. 그 분을 전부 나타내 주시는 거에요. 왜요? 그 사람에게 예수가 전부니까. 그 분이 예수 이름을 말할 때 예수님은 전부 나타내시는 거에요. 내가 가진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가? 그런데 우리는 예수 외에 가진게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예수 이름이 전부가 될 수 없는거에요. 주님은 주님의 이름이 전부인 그런 세대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새 부류의 사람들, 제가 금요일에 제가 말씀을 드렸죠. New Breed. New generation,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가 전부인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들을 한국말로 신종 크리스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신종보다 더 나은게 있다고 특종, 여러분 우리는 신종 크리스챤이 되어야만 합니다. 

정말 이제 하나님이 새로 일으키시는 크런 New breed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제 사도행전 4장 5절에 보면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느냐. 라고 말했을 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서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교회는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를 이 세상에 나타낼 때가 됬습니다. 저는 그 때가 이제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올해부터 그 일이 나타날 것이고 나타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올 해부터 많은 어려운 일이 있을텐데 많은 전염병이 일어날텐데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고통으로 시달리게 될텐데 더 나가서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는데 누구에게 하나님이 권세를 주셨습니까? 믿는 자들에게. 교회다운 교회들에게, 성경적인 교회들에게 주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사도행전 4장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4장을 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 29절 말씀, 이제 이 예수님의 제자들로 너무나 큰 이적과 기사들이 나타나니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예수 이름으로 아무것도 못하게 협박하고 채찍질하고 내어보냈죠. 그런 다음에 이제 제자들이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2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말씀이 이 천년 전에 제자들에게 이루어졌다면 오늘날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거룩한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운데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소서. 귀신을 내어쫓는 역사가 있게 하시옵소서. 이미 이 일은 예수 이름안에 다 있습니다. 그 권세 안에 다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용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사랑과 진리교회가 새로운 시즌,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더이상 사소한 일에 신경을 뺏기지 말고 우리가 더이상 원수 마귀와 놀지말고 이제는 이 복음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되요. 담대하게 나가야되요. 

하나님께서 사랑과 진리교회 성도들에게 능력전도의 기름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정말 여러분들이 밖에 나가서 병든자들에게 손을 얹은즉 나은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귀신을 내어쫓게 될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예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하나님은 이 표적을 통해서 증거해 주실 것입니다. Confirm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교회 성도 여러분, 일어나서 빛을 발할 때에요. 아멘.

<출처:LTC/벤자민 오>

과연 무엇이 성경적인 교회인가? 4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나눌려고 하는 내용은요  핍박에 관한 얘기에요. 핍박. 어 사실 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핍박. 혹시 핍박을 좋아하시는 분 계세요? 혹시 핍박을 생각하면 너무 기쁘신 분 계세요? 전 핍박을 싫어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고 아마 핍박을 좋아할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을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성경을 보고 또 봤습니다. 보면서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요즘 교회들 말구요. 요즘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와 너무 거리가 멀다고 제가 누차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즘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와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정말 성경적인 교회를 찾는것은 정말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성경적인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전심으로 힘을 합하고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며 그 교회를 회복하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연약하기 때문에 그러나 주님은 우리 안에 능히 그 일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경을 보면서 정말 성경적인 교회, 지금까지 제가 세차례에 걸쳐서 성경적인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렸는데 오늘 네번째 성경적인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이 교회를 말씀드리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이해가 되실까? 우리 성도들이 핍박에 대해서 말씀을 전할 때에 과연 그것이 마음에 와 닿을까? 그렇지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미국에서 신앙생활하는 한은 이 피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데 핍박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오늘 여러분들이 교회를 가겠다고 하는데 못가게 하는 사람들이 없잖아요? 그리고 이 핍박이라고 하는 단어가 결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도행전을 다 보면서 1장부터 28장까지 읽으면서 매 장마다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한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교회는 진리를 타협하지않고 선포하는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교회는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는 정말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교회는 반드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정말 성경적인 교회는 핍박을 받게 되어있다. 그러면 바꾸어서 말하겠습니다. 핍박을 받지 않는 교회는 어쩌면 성경적인 교회가 아닐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가 타협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가 진리를 선포하고 있지 않는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가 세상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핍박을 피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가 교회같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핍박을 모르는지도 몰라요. 어찌하였거나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서 성경적인 교회는 반드시 핍박을 받는 교회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입니다. 목사님, 핍박 말고요. 다른거 있잖아요. 좋은 주제 있잖아요. 그런데 핍박은 성경적인 교회에서 뺄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꼭 전하에 되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 다 끝나고 에이 기분나쁘다. 왜 하필이면 오늘같이 좋은 날 꼭 핍박에 대한 얘기를 들어야되? 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얼마나 이것이 필요한 내용이면 저도 싫어하는 주제인데 여러분에게 나눌지 한번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본성은요  뺨 맞으면 우리도 때려야되요. 우리의 본성은요 누가 나를 핍박하면 나도 한마디 해 주고 싶고 나도 갚아주고 싶고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죠. 그죠? 여러분은 아닌 것 알고요. 제가 그래요. 제가. 그게 제 본성인데요. 제가 핍박을 오죽 싫어하겠습니까. 얼마나 싫어하겠어요. 그런데 제가 성경을 보면서 제가 다시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초대교회는 정말 예수님이 살아있던 그 교회는 성령이 살아 역사하던 그 교회는 매일 핍박속에서 살았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 교회들은 핍박에 굴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핍박에 무릎꿇지 않았어요. 그들은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했어요. 예수를 증거했어요. 그러다가 죽기도하고 그러다가 돌에 맞아 죽기도하고 그러다가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굴욕을 받기도 하고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거짓증인을 세워서 법정에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별일을 다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을 지켰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그게 진짜 성경적인 교회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우리가 무슨 핍박을 당합니까? 오늘날 교회가 무슨 모함을 당합니까? 어쩌면 우리는요 성경적인 교회와 거리가 멀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가 진리와 타협했을 수도 있어요. 

어쩌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욕 안먹을 만큼 그런 미지근한 신앙을 가졌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적인 교회는 핍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사도행전 말씀 전체를 쭈욱 진행하면서 어떤 종류의 핍박이 있었는지만 간단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거 다 읽으려면 오늘 하루종일 해도 다 못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짧게 할게요. 

여러분.  여러분이 사도행전 4장에 보면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싫어했다고 나와요. 복음을 듣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싫어하니까 어떻게 해요? 그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어요. 누가 그랬냐하면은요 제사장들이 그랬구요. 사두개인들이 그랬구요. 성전을 맡았던 책임자들이 그랬어요. 이 사람들은 유대교인들입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죠.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를 전파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 분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고 전할 때 그것을 듣기를 싫어했어요 여러분, 잘 들으세요. 

진리는 듣기 싫습니다. 옳은말 하는 것 우리가 알지만 듣기 싫습니다. 여러분 우리 솔직하게 얘기하자구요. 솔직하게. 저도 우리 와이프가 옳은말하면 옳은말인지 알아요. 그런데 듣기 싫어요. 여러분은 너무 듣기 좋으시죠? 얼굴보니까 그런것 같아요. 너무 행복해 하세요. 그런분들은 더 해주세요. 옳은말인것 아는데 이상하게 듣기싫어. 그죠 여러분. 본래 진리는요 귀에 거슬리게 되어있어요. 우리 본성에 거슬리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정말 예수님의 제자들이 진리를 전하니까 유대인들이 그걸 듣고 듣기 싫은거에요. 듣기 싫으니까 어떻게 해요? 잡아 옥에 가두어버린거에요. 

이런 일은 보통 있었던 일입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 4장에 보시면 나오잖아요. 그러다가 어떻게 합니까? 나중에 이 사람들이 뭐라고요? 협박하죠. 위협하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말 하지 말아라.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말아라. 다시는 진리를 선포하지 말아라. 그리고 내어보내죠. 그런데 제자들이 그 말을 들었나요? 아니요. 제자들이 뭐라고 말했어요? 내가 하나님의 말을 듣는것이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옳은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말을 하게되다가 어떻게 되죠? 또 잡혀서 옥에 갇히게되고 그런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은요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해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다 오게 가두었다고 나옵니다. 시기가 일어났다. 왜 시기가 일어났을까요? 여러분 어떨 때 시기가 일어나요? 남이 잘될 때. 사돈이 땅 살 때. 우리교회 집사님이 나는 셋방 사는데 집을 샀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되요? 시기로 충만해야되요. 어떻게 해야되요 그럴 때는? 축복해줘야죠. 아멘. 역시 사랑과 진리교회는 달라요. 다른 교회 같으면 벌써 시기가 충만했을 거에요. 지금. 여러분들은 보니까 기쁨으로 충만해요. 아멘. 그러니까 왜 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시기가 가득했냐하면은요 간단하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설교를 하면 몇 천명씩 모이는데 자기들이 설교하면 안모여요. 이런 얘기죠. 맞은 편에 식당이 있어요. 

거기는 갈비집이에요. 우리집도 식당이에요. 우리도 갈비 만들어요. 그런데 손님이 다 그 집으로만 가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되요? 할렐루야? 아니죠. 시기로 가득하게 되죠. 그래서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야되요? 그 집 앞에 서서 ‘이 집 갈비 맛없어요. 우리집으로 오세요.’ 그래야되지 않겠냐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그랬다는 거에요. 사람들을 시기해서 어떻게 해요? 또 옥에 가두고. 그런데 옥에 가두면 천사가 풀어주고, 옥에 가두면 또 풀어주고. 그런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이제 옥에 가두는 것갖고 안되니까 어떻게 해요? 이제 죽여버려야 되겠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 33절 보니까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죽여버릴려고 했다는 거에요. 여러분 맞아요. 사람은요 시기와 질투가 절정에 달하면요 살인하게되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제가 여러분 옛날에 전설의 고향인가 이런거 보면은 여러분 나오잖아요. 뭣 나와요? 옛날에 와이프가 여럿이 있었는데 첩이 본부인을 너무 미워하거나 본부인이 첩을 너무 미워하거나 그러면 어떻게 해요? 무당을 사가지고 모형을 만들어놓고 바늘로 막 쑤시잖아요. 죽어라, 죽어라, 그러면서. 그러면 어떻게 되요? 진짜 실실 아파가지고 죽잖아요. 이 시기가 굉장히 무서운거에요. 그런가하면 사도행전 5장에 계속 보면은요 사람들이 무서워서 죽이지는 못하니까 어떻게 해요? 실컷 채찍질하는 거에요. 여러분 옛날에는 곤장이에요. 이 제자들이 무지하게 맞았어요.

그런가하면  사도행전 7장에 보면요. 이를 갈고 돌로  처죽이는 장면이 나오죠. 그런가하면 사도행전 8장에 보면은요 8장 1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 이건 그냥 핍박이 아니라 큰 핍박이 나서 사도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지니라. 이 핍박이 얼마나 크면 사도들 외에는 견디지 못한거에요. 사도들은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니까 죽일테면 죽여라 있지만 다른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어요.

 그래서 사울이 어떻게 했는가 보면 8장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세 ‘Saul began to destroy the church’ Destroy란 단어를 썼죠? 아예 교회를 없애버릴려고 했다는 거에요. 아예 교회의 씨를 말려버릴려고 작정한거에요. 그래서 교회를 아주 잔멸시키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는 사람 다 끌어내가지고 옥에다 가두고 죽이고 그런 일을 사울이 했어요. 사울이. 그 못된 사울이. 그러니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울이 얼마나 미웠겠어요? 그러니까 사울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사울이 얼마나 미웠겠어요? 하나님 저 사울 안때려 잡으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랬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는 안 나와요. 

나중에 어떻게 했는지 우리가 보겠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예수님 믿는 사람 핍박하더니 나중에 어떻게해요? 말로 받아요. 말로…, 예수님께서 그러잖아요. 사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요? 얘가 어찌나 나를 핍박하던지 얘는 나중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텐데 자기가 심은데로 무지하게 핍박을 당할 것이다. 그러잖아요. 그렇죠? 나중에 정말로 얼마나 핍박받는지 몰라요. 사울이. 핍박 받을 때마다 자기가 핍박했던 것을 생각했을 거에요. 자기가 모함했던 것을 생각했을 거에요. 자기가 돌로 쳐 죽일 때 그 장면을 보면서 돌에 맞아 싸다 그 생각했던 장면을 생각하면서 자기도 돌에 맞았을 거에요. 돌에 맞으면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장면을 상기했을 거에요. 어찌되었던 간에 사울이 그렇게 핍박을 했습니다. 교회를. 그랬는데요. 그렇게 핍박을 했는데도 교회가 없어지기는 커녕 교회가 더 커지는 거에요. 어떻게 잡아 죽이면 교회가 더 생기는 거에요. 이게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성경적인 교회는요 핍박을 받을 수록 더 크는 것이 성경적인 교회에요.

그런가하면  사도행전 12장에 보니까 헤롯왕이 나오죠. 이 헤롯왕이요. 가만히 보니까 이 졸개들을 잡아가지고는 안되겠어요. 그래서 이 두목을 잡아야겠다.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두목 중에서 야고보를 잡아서 칼로 쳐 죽였어요. 헤롯왕이 야고보를 죽이니까 유대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거에요. 성경에 유대인들이 너무 좋아한다는 거에요. 헤롯이 보니까 유대인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아 애들이 너무 좋아하네, 또 죽여야겠다. 이번에는 누구 죽일까? 베드로를 죽여야겠다. 그래가지고 베드로를 죽이려고 잡아다 옥에다 가두었죠. 그 다음날 칼에 목이 베여 죽을 판인데 그 전날 누가 왔어요? 천사가 와서 베드로를 풀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아직 죽을 때가 안되었다는 거에요. 여러분 죽을 때가 안되면 천사가 풀어줘요. 여러분 죽을 때가 되면 과감하게 죽으세요. 아멘 담대하게 죽으세요. 예목사님에게 한가지 배운거 뭐요? 생명 내놓고….네. 예수님 믿을려면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된다 그 말이죠?  

그런가하면  사도행전 13장에 보면은요 유대인들이 예수믿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것을 변박하고 비방했다. 여러분, 우리는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남이 비방하는 말 듣고싶지 않죠? 그렇죠? 그런데 비방하는 말을 들으면요 우리 사람은요 참 열을 받게 되요. 남이 나를 비방하는 말을 하면 열을 받게 되요. 그렇죠? 제가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윈 형제 아시죠? 그 Win 형제는 중국에서 그 핍박받는 교회, 예수를 믿으면 죽이는 교회에서 예수를 믿다가 죽음의 고비를 셀 수 없이 넘기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체험을 하고 그리고 총에 맞아도 살고 제가 안봐서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가지고 살아나왔잖아요.

서방세계에 나와서 사는데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했다고 그래요. 전해들을 이야기인데 서방세계에 나오니까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자기가 그 대상이 되어가지고 몇 일을 잠을 못자고, 차라리 내가 중국에 가가지고 육체적으로 핍박당하고 차라리 고난당하는게 낫다 그랬데요. 이 서방세계 사람들 말로 남을 비방하고 말로 안하는것 했다고 그러고 그게 너무 고통스러운거에요. 윈 형제가. 몇 일 잠을 못이루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여러분. 예목사님도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차라리 북한에서 핍박받는게 낫데요. 차라리 채찍 맞고 고난 당하고 고문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게 낫데요. 남한에 와보니까 미국에 와보니까 왠 사람들이 이렇게 말이 많냐는거에요. 

왠 남의 말을 그렇게 많이 하냐는 거에요. 여러분 그러지 마세요. 우리는 안그러죠. 그건 뭘 말해요? 육체적인 핍박 못지않게 비방당하는 것도 고통스럽다는 거에요. 내가 고통스러운 만큼 남도 고통스러운 거에요. 그렇지 않겠어요? 여러분? 그런데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당하는 일이 맨날 있는 일이었어요. 그런가하면 여러분이 사도행전 14장에 보면은요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요. 선동한다는 말은 사람들을 부추기고 선동해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게 하고 고소하게 하고 핍박하고 결국 돌로 쳐죽이는 장면이 사도행전 14장에 나옵니다. 그런가하면은요 사도행전 16장에 가면은요 옷을 찢겨요. 그리고 매로 치고요 그리고 옥에 가두어요. 

이런 일은 그냥 보통 있는 일이에요.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또 유대인들이 시기해서 떼를 지어가지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소동하게 하고 소요하게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고발하게 하고 옥에 가두게 하고 핍박하는 장면이 또 나오죠. 17장 13절에도 무리를 선동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런가하면 사도행전 18장에도 대적하고 훼방하죠. 대적하고 훼방한다는 말은 말로 대적한다. 나쁜 말을 한다 그런 뜻이죠. 그런 일들이 사도행전 18장에 나오죠. 사도행전 19장에도 보면은 비방하는 내용이 나오죠. 예수 믿는 사람들, 제자들, 비방하죠. 또 19장에 23절 이후에 보면 그들이 분이 가득해가지고 소란을 피우고 사람들끼리 모여가지고 그 원형극장에 모여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야유를 보내고 그리고 이 말 저 말 했다고 나와요. 

성경에 보면은 이 말 저 말을 했다. 그런데 이 말 저 말을 하면서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고 그래요. 20장에 결국 유대인들이 헤하려고 공모하니까 그 곳에서 떠나서 마게도냐로 가서 또 예수를 전하죠. 가는 곳마다 예수를 전하죠. 그래도 결코 굴하지 않고 진리를 선포합니다. 결국 이 모든 내용을 바울은 20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바울이 본인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면서 본인이 당했던 핍박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0장 17절에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그 장로들이 오니까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너희가 보고 들었지 않냐. 그러면서 19절에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대인들의 간계, 유대인들이 비방하고 고소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고 거짓증인을 세워서 고소하고 그랬던 그 유대인의 간계로 인해서 내가 어떠한 시험을 당했고 그것을 참고 내가 끝까지 주님을 변치않고 섬긴것을 너희가 알지않냐. 저는 고린도후서 4장 말씀에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바울이 얼마나 심정이 고통스러웠을까 한번 생각해 봤어요. 한번 들어보세요. 4장 8절부터.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바울을 고소하려고, 바울을 옥에 가두려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였다고 그랬어요.

그래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답답한 일을 당하였다는 거에요. 답답한 일을. 바울이 오죽 답답했겠어요. 답답한 일이 한 두가지 였겠어요? 여러분, 여러분 답답할 때 있잖아요? 답답할 때는 어디를 쳐요? 여러분. 가슴, 답답하니까.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아도. 그 때 누가 알아줘요? 주님이 알아줘요. 그러니까 바울이 내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 아멘. 핍박을 받아도, 바울이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였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돌에 맞을 때마다 바울은 뭐를 생각해요? 내가 십자가에 못박여 죽인 예수를 생각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을 때, 바로 내가 그 채찍질의 장본인이다. 예수님이 고통을 당할 때,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나도 묵묵히 그 길을 가야지. 그것을 통해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랬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건 놀라운 사실인데요. 

바울은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한 것이죠. 그러니까 핍박은요 예수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를 다듬어주는 하나님의 귀한 통로가 된다는 것이죠. 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이것이 성경에 이렇게 엄연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저한테 ‘목사님, 핍박을 받는 것을 원하세요? 받지 않는 것을 원하세요? 그러면 아직도 저는 핍박을 받지 않는것이 좋다고 선택하고 싶어요. 저의 본능은 핍박받는 것을 싫어해요. 욕먹는것 싫어요. 비방당하는 것 싫어요. 옥에 갇히는 것 싫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성경을 보면서 깜짝 놀래는 것은요 예수님께서 아예 너희가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못을 밖아놓으셨더군요. 

아예 예수님께서, 그래서 이 핍박은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거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요한복음 15장 20절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내가 너희에게 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다. 나를 핍박했는데 나의 몸인 너희를 어떻게 핍박하지 않겠느냐? 반드시 핍박할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아예 그렇게 예언하셨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는 핍박을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정상입니다. 여러분 이제 자세히 한번 들어보세요. 죄송해요. 핍박 얘기해서. 그런데 어떻게 해요. 

그게 사실인데. 진리인데 어떻게해요. 한 번 들어보세요. 우리가 핍박을 받게 되어있나, 않받게 되어있나. 마태복음 5장11절부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한 말을 할 때에는’ 그 때는 우리가 분연히 일어나서 그들을 때려잡자 그래야되는 거에요. 왜 우리를 핍박하는거야 왜?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또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 그 때는 어떻게 해야되요? 고소해야되요...고소. 법으로 따져야되요. 법으로. 그런데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했냐하면 그런데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나를 인하여 너희를 핍박하고 너희를 거슬러 모든 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그랬다는 거에요. 

그런데요, 여러분 저는 정직하게 그런 복은 싫거든요. 저는 그런 복은 안받아도 좋으니까 안당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요 예수님은 한 술 더뜨셨어요. 12절에 ‘기뻐하고 즐거하라’ 아니 지금 기뻐하게 생겼어요? 우리 솔직하게 얘기하자구요. 여러분 그거 당하면 기뻐해요? 앓아눕죠? 앓아눕죠. 앓아누웠어요. 몇일간. 그런가하면은요. 즐거워하래요. 세상에...., 어떻게 즐거워해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하냐하면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이 땅에서 너희가 나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나를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나를 인하여 욕을 당하고 나를 인하여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듣게 될 때, 하늘에서 상이 크다. 제가 전에 같으면요 이거 읽을 때 그랬어요. 

‘주님, 저는 이런 상 필요없어요. 다른 사람 많이 주세요. 주님,’ 그런데요 너희가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으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핍박을 받게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거짓으로 모함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죠? 그런가하면 누가복음 6장 22절에 ‘인자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아멘. 사람들이 미워한데요...사람들이 저를 안미워하는데요. 그러면 뭔가 잘못된거에요. 예수님께서 그랬잖아요. 나를 인하여, 예수님 때문에..너희를 미워하며, 너희를 멀리하며, 너희 이름을 욕하며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며 너희를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수님 때문에 미워함을 당하고 예수님 때문에 멀리함을 당하고 욕을 당하고 악하다고 비방을 당하고, 심지어 버릴 때, 예수 믿을려면 가, 나랑 바이 바이야, 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런데 주님, 이런 복 말고 다른 복 없나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23절에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이제 한 술 더 떳어요. 뛰놀래요. 주님 어떻게 뛰어 놉니까. 말씀이라도 되는 말씀을 하셔야 아멘이라도 하죠 주님. 그런데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 그리고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지 보세요. 

누가복음 21장에 10절 부터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은요 마지막 때에 나라와 나라가 일어나서 전쟁을 할 것이다. 민족이 민족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 지진이 일어날 거에요. 기근이 있을 것이다.

온역이 있을 것이다. 전염병이 있을 것이다. 레오니아에 돼지독감 환자가 한 명 발생이 되었다고 어떤 분이 저한테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레오니아 하이스쿨에서 학교를 클로즈 하느냐 마느냐, 그러고 있다고 제가 금요일날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릭조이너 목사님이 올 가을에 그것이 다시 컴백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하늘에서 큰 징조가 있을 것이다. 무서운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에게 징조가 될 것이다. 싸인이 될 것이다. 

어떤 싸인요? 주님이 곧 오시겠구나. 왜냐하면 이런 일이 있기전에 우리가 반드시 피박을 당한데요. 여러분, 교회는 반드시 핍박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핍박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미국에 사는 한 여러분은 핍박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이미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미국은 이제 기독교를 핍박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제 우리가 핍박을 당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런가하면 마가복음 10장 29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께서 중요한 얘기를 말하실 때는 이렇게 말하죠. 뭐라고요? 여러분도 그러잖아요. 중요한 얘기할 때 뭐라고 말해요? 진짜 내 말 좀 들어봐. 이거 진짜거든. 예수께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이거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이런 자는 인간도 아니에요. 어떻게 형제를 버리고, 어떻게 자매를 버리고 어떻게 부모를 버려요? 아주 나쁜..., 자식을 버려? 그게 부모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요.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 형제, 어미, 자식, 전토를 버린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백배나 받아요. 백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하면은요 백 배나 받기는 받는데 핍박을 겸하여 받고 핍박을 받는다고 말했어요.

 같이. 핍박을 겸하여 받고 네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복음을 위해서 이것을 버리는 자는 예수님께서 약속을 해주셨어요. 이 세상에서도 받지만 핍박을 겸하여 받고, 그 다음에 주님 나라에서 영생을 못받을자가 없다. 반드시 받는다. 그랬다는 거에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핍박을 받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또 그런다음에 성경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핍박을 받는다고 말해요. 여러분 성경에 네가지 마음밭 나오잖아요. 그렇죠? 길가와 같은 밭, 자갈밭, 그 다음에 가시밭, 그리고 좋은 옥토. 길가의 밭같이 마음이 단단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도 새들이 다 물어가 버리니까 아무런 열매를 못맺는다. 기억나시죠? 자갈밭, 돌밭같은 사람은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으니까 어떻해요? 금방 말라서 없어져 버린다.

가시밭은 말씀을 받아서 자라려고 하는데 누가 막아요? 가시가 막아요. 자꾸 찔러요. 가시가. 그래서 열매를 못맺어요. 그런데 마음이 옥토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받으면 그 말씀이 즉시 심어지고 즉시 자라고 즉시 열매를 맺어서 30배 60배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그 두번째 밭, 마음밭이 돌짝밭같은 사람, 이건 감정의 요동이 심한 사람이에요. 언제 금방 아멘하고 언제 금방 울고 언제 금방 할렐루야 그랬다 본인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돌아서는 말씀을 들을 때는 금방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것 같다가도 딴 얘기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이 참 주님 보시기도 속상하실 것 같아요. 

어쨌거나 마태복음 13장에 보니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자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고 능력의 말씀이고 이 말씀은 능치못함이 없지만 우리가 이 말씀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거에요.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하.면 고난이 오는거에요. 말씀대로 살려고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오는거에요. 그런데 말씀대로 살려고하는데 핍박이 오니까 내가 어떻게 해요? 말씀을 저버리는거에요. 우리는 의리는 지켜야됩니다. 여러분, 사람이 기본 의리는 있어야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의리는 있어야되요. 의리는 지켜야될 것 아니에요. 아멘도 않하시고, 제가 아멘하면 빨리하고 짧게 한다고 했는데요 여러분, 아멘이 굉장히 저조하거든요. 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5장 18절에 한 번 들어보세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여러분 세상이 좋아하는 분들 여기 계시죠? 세상에서 인기있는 분,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하면 진짜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자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세상이 아직도 우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요? 여러분이 아시겠죠. 세상에 가서는 감쪽같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살고 교회와서는 감쪽같이,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할렐루야. 그런데 이럴 수는 없다는거죠. 여러분 주님 앞에 인정을 받으면 세상에서 미음을 받게 되어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 밖에 없다. 나를 미워했잖냐. 나를 미워했는데 어떻게 몸된 너희를 미워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나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게 되어있다. 

여러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때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내가 이제 진짜 예수님을 믿나보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런가하면은요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무릇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제대로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핍박을 받으리라. 여러분 정말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사람처럼 경건하게 살려고하면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어찌된게 우리에게 핍박이 없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제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가 잘못해가지고 자기가 죄지어서 핍박을 받으면서 ‘오 주님 제가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서 핍박을 받습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또 있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늦어가지고 막 밟다가 경찰에게 붙잡혀서 티켓을 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예수를 이렇게 제대로 믿으려고 하니까 핍박을 당한다’ 제발 착각하지 마십시요. 그건 여러분이 잘못해서 핍박을 받는것이고 여러분이 집안일 안해놓고 그냥 쫓아 다니다가 남편이 ‘집안일도 제대로 못하고 교회갈려거든 가지마’ 그러니까 ‘오 주님 이것이 핍박이오니까, 주여’ 천만의 말씀이요. 

그게 무슨 핍박이에요?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거지. 자기 죄 때문에. 분명히 성경에는 뭐라고 나와있어요? 남편의 말에 순종하고 남편을 하늘같이 여기라. 남편을 봉양하고 남편이 말하면 죽는 시늉까지 해라... 그건 성경에 없지만. 아무튼. 그러면 그렇게 해야지 남편이 보기에도 이 사람 제대로 믿는구나 그러고 믿을 것 아니에요.. 남편이 말하면 듣는척도 않하고 말대꾸나 하고 그렇게하면 안되요 여러분. 속이 다 시원하네...하하하... 그쵸 여러분? 성경은 성경이잖아요. 진리는 진리잖아요. 그러니까 또 어떤 분은 그러더라구요. 

목사님, 저희 남편이랑 살아봤어요? 아니요.. 살아보면 그런 말씀 안하실걸요. 제가 그랬어요. 성경에 예수님이 살아보고 그래라 그랬어요? 제가 Youth 청소년 수련회를 매년 했을 때 제가 청소년들에게 늘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해야된다. No matter waht you respect your parents. 그러면요 좀 똑똑한 애들은 따지는 애들이 있어요. ‘Oh...Pastor Oh, you don’t know about my dad. He’s jerk’ 그래요.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네 부모를 공경해야된다.’ 그렇게 말해요. 여러분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목숨 걸어야되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왜 예수 믿어요? 왜? 그러니까 맨날 욕이나 먹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저것들 예수 믿는다면서 죄는 지을것 다 짓고, 우리보다 나을께 없는데 왜 예수를 믿겠어요?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 성경에 베드로전서 2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애매히라는 말은 억울하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고난을 받아도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여러분 우리 착각 그만하구요 여러분 내가 정말로 올바로 믿을려고 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말씀대로 순종할려고 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건지 아니면 내 연약함 때문에 재가 잘못하기 때문에, 죄의 결과로 핍박을 받는건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됩니다. 

아멘,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까?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면, 내가 옳은 일을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랬어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는 거에요. 내가 옳은 일을 행하려고 하는데 누가 욕하고 누가 핍박해요 누가 따지고 대들어요. 내가 지금 옳은일 하려고 그러는데 왜 그러느냐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지 않은데 내가 묵묵히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제가 이거 제일 못했던 것이거든요. 전 정말 따지고 싶어요. 누가 도대체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지. 밝혀내가지고 온 천하에 들어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잖아요. 주님은 그건 나에게 맡겨라. 공정하신 재판장이신 주님이 해결하실 일이지 우리가 따질 일이 아니라는거죠. 그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하면 정말로 주님 보시기에 옳은것을 행하려고 하면 핍박을 받게 된다. 아멘

그런가하면 또 성경에는요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이스마엘이구요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이삭을 말하고 있어요. 갈라디아서를 보시면,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이 육신을 따라서 하갈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이 니왔어요. 육신을 따라 나온 아이에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못참고 육신을 따라서 애가 생겼어요. 그런데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그 약속을 성취함으로 나 자가 이삭이에요.

 성령을 따라 난자에요. 그런데 그 때 육신을 따라 난 이스마엘이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을 핍박한 것 처럼 이제도 그러하다. 그 말이에요. 오늘날에도 육신을따라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한다 그 말이에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하면 오늘날에도 육신으로 난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신으로 난 자는 성령에 속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판단할 수 밖에 없고 핍박할 수 밖에 없다는 거에요. 여러분 교회사를 보면 언제나 성령의 역사를 비방하고 핍박했어요. 그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알잖아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사람들이 얼마나 조용기 목사님을 핍박했어요.

핍박한 이유가 방언한다고 핍박했거든요. 방언한다고 이단이라고 그러고 방언한다고 잘못했다고 그러더니 나중에 그 핍박했던 사람들이 다 자기도 방언달라고 다니잖아요 지금. 왜그래요? 육신에 속한자는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다는 거죠. 그래서 핍박하게 되어있다는 거에요. 오늘도 마찬가지에요. 오늘날도, 여러분 제가 볼 때에는 많은 부분들이 육신에 속한 부분들이 있어요. 교회안에. 사실이니까요. 그러니까 성령에 속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성령에 속한 것을 우리가 핍박하는 거에요. 그러나 우리는 성령에 속한 자가 되어야 됩니다.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야만 합니다.

그러면  어찌되었건 간에 안 반가운 얘기이지만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고하면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어있습니다. 진리를 수호하려고하면 핍박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하면 핍박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경건하게 살려고하면 핍박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됩니까? 그러면 성경은 우리가 이 핍박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라고 하는가? 첫째 핍박을 당하거든 무조건 고소해야된다. 둘째 핍박을 당하면 손해배상을 청구해서 끝까지 받아내어야된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성경은. 우리는 그러니까 법정에 가면 안돼요 여러분. 안돼요. 주님이 가지 말라고 그랬어요. 법정에 가기전에 화해해라. 주님이 그러셨어요. 그죠? 법정에 가면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그러겠냐? 저 사람들 예수 믿으면서 법정에 나와서 싸운다고 그러지 않겠냐?

 그거 주님의 얼굴에 먹칠하는거 아니에요? 먹칠이 뭐에요? 똥칠하는거죠. 똥칠. 여러분 우리는 차라리 우리가 손해보고 말지. 차라리 우리가 그냥 뜯기고, 당하고 말지. 그런일은 하지 않아야된다고 성경말씀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여러분 속상해도 할 수 없어요.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으면 끝까지 믿어야죠 그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하면 마태복음 5장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거 정말 말도 안돼요. 말도. 사실 핍박하는 자, 이를 악물고 참고요. 

내가 다시는 안보지 안보는게 속이 편하지. 그것만으로도 내가 큰 일 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거에요. 기도. 기도가 나와요? 솔직하게. 여러분 기도가 나오던가요? 저는 핍박당하면 기도가 안나와요. 기도가 막혀요. 속상해서.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하래요.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세요. 어떻게요? 그 다음에 두번 째요.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보니까 아까 마태복음에도 그러셨는데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그가 곧 강함이라. 이게 뭔 말이에요? 도대체? 아니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저 기뻐 못해요. 저, 못해요. 인상 안쓰는 것만해도 다행입니다. 주님. 그죠? 속이 뒤집어지죠. 뒤집어지고 그냥 죄 없는 주위에 있는 사람만 화풀이 하죠. 

그게 우리의 본성이잖아요. 죄송합니다. 저의 본성입니다. 저의 본성. 제가 그래요. 제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하면 너의 약할 그 때에 바로 그가 강함이니라. 우리는 핍박을 당할 때에 우릴 본 모습을 보게되요. 아…, 나의 이런 연약함이 드러나게 되는구나. 여러분 잘 나갈 때 연약함이 잘 안드러나죠. 그죠? 그런데 이유없이 한 대 때려봐요. 왜 때려? 대들죠 그죠? 이유없이 한 대 때려봐요. 그게 우리의 본성이라니까요. 그런데 나의 그 연약함을 보고 아직도 나는 덜 되었구나 아직도 나는 멀었구나. 그 나의 연약함을 보면서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거죠. 내가 연약할수록 더 주님을 의지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내 연약함 가운데 주님의 강함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거에요.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면 주님은 일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이런 핍박을 당할 때 그 때 오히려 기뻐하는데 그 이유는 그 때 주님의 강함이 나타나신다는 거에요. 그런가하면은요 로마서 12장 14절에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아요. 기도까지는 내가 하겠어요. 기도까지는. 축복은 못하겠습니다. 축복이 잘 안나오죠. 그죠? 솔직히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주님 저 사람 저렇게 못살게 구는데 주님 저 사람 좀 어떻게 정리해주세요. 주님’ 그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그러면요 주님이 절대로 정리 안해주세요. 그건 왜 그러냐하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이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이렇게 말했다는거죠. 그런데요 여러분 제가 결론을 말씀드리자면은요 이걸요 제가 이를 악물로 해볼려고 해봤는데요 안 되더라구요. 입으로 흉내는 내는데 그 다음에 또, 속상하게 또 이를 악물고 ‘축복… 합니다’ 그러고 나면 속에서 못해, 못해. 이러는 거에요. 네. 어떻해요, 어떻해요. 그게 제 모양인데. 그러고 나니까 나는 절대로 할 수 없구나를 알았어요. 인간으로 나는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할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밖에 없었어요. 주님, 나는 못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이 주세요. 도저히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니까 주님이 그 때 그 마음을 주시니까 가능하더라는 거죠. 내 마음은 절대 가능하지 않은데. 주님의 마음이 부어지니까 진짜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되고 축복하게 되더라는 거에요. 아 그렇군요 주님. 이것이 비결이군요.

여러분,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반드시 핍박을 받는 교회입니다. 정말로 진리를 선포하고 정말로 성경대로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핍박을 받으리라. 그리고 그 핍박을 받을 때 어떻게 대항해요?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축복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는 거에요. 그 교회가 진짜 성경적인 교회가 되는 거에요. 그게 진짜 예수를 섬기는 교회가 되는 거에요. 그 사람이 바로 예수의 사람이 되는 거에요. 바로 그것을 가르켜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정하신 내가 세운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운 교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님께서 My Church라고 그랬어요. 

너희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교회가 아니라 It’s my church. 내가 내 이 교회를 반석위에 이 반석위에 바로 나를 믿는 믿음위에 세울텐데 그렇게 될 때에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 예수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가 되는 거에요. 그 교회가 바로 성경적인 교회가 되는 거에요. 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에요. 그 교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거에요.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과 진리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정말 주님이 얼마나  그것을 원하시는지. 여러분이 그 마음을  아시나요? 주님이 얼마나 이 땅에 마지막에  주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내 교회를  세우기 원하시는지. 그래서 음부의 권세가  넘보지 못하는 그런 교회를 세우기를  주님은 그토록 원하십니다. 누가 그  일을 해 드릴 수가 있어요? 우리밖에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해드려야되지 않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핍박을 이겨내는 교회가 되어야되요. 핍박이 오면 오히려 더 강해지는 교회가 되어야되요. 

핍박이 오면 우리가 더 하나되는 모습을 보여야되요. 핍박이 오면 우리가 더 뭉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되요. 핍박이 올 때 우리가 더 주님을 높이 선포하고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된다는 거에요. 다른 일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그 때 우리 주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실까요. 얼마나 영광을 받으실까요. 여러분 죄송합니다. 아직 저도 그렇게 못하지만 그렇게 할려고 저도 몸부림을 치고 최선을 다해요. 만약에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이지 제가 잘나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을 제가 너무나 잘 압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주님이 그런 마음을 부어주실 때만 우리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되요. 주님 사랑과 진리교회가 핍박을 이겨내는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 여러분 미국땅에도 반드시 핍박이 옵니다. 이제. 그러나 그런 핍박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고 할 때 주위에서 듣는 비방, 모함, 거짓의 소리를 들을 때에 여러분, 주님이 다 아시잖아요. 주님이 다 보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다 듣고 계시잖아요. 제가 금요일날 말씀드렸는데요 너무 은혜가되요. 예수님이 내 오른편에 계시고 죄송합니다. 벤자민 오 목사님이 왼편에 계시다고 생각하시고 말하라고 어떤 분이 가르켜 주셨어요. 그런데 저는 옆에 못 있으니까 바울은 신령해서 영으로 있다는데 저는 아직 못 신령해서 못 있으니까 여러분 오른편에 예수님이 계시고 왼편에 성령님이 계시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말도하고 행동도 해야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어찌 됬던지 간에 우리는 정말로  성경이 말하는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도, 우리의  고집도, 우리의 판단도, 우리의 경험도,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것 마져도 다 주님앞에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그럴 때 만이 우리는 성경적인 교회르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쉬운일이 아니고 어려운 일이고 너무나 댓가를 지불할 일인 것을 너무나 잘알아요.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본성에 역행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금요일날 말씀 드렸듯이 ‘너희가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신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쫓아 행할 때 주님은 우리안에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출처:LTC/벤자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