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과연 성경적인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에 대해서 저희가 계속해서 연재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오늘이 그 마지막회 입니다. 여섯번째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실은 여러분 제가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죠. 제가 사실 이 말씀을 자꾸 미루어 왔어요. 제가 오늘 전할려고 하는 말씀을 처음부터 제가 전하여야 했을 것 같아요. 제 마음에. 그런데 제가 자꾸 미루어 온 이유는 첫째 제가 자신이 없었어요. 제가 전할 자신이 없었고 둘째는 이런 교회가 없어요. 지구상에. 그런데 성경에는 있어요. 그런데 고민되는 것은 성경에는 있는데 이런 교회는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런 교회는 없기 때문에 더이상 성경에 있는 내용을 우리가 무시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이런 교회가 존재하지 않지만은 성경에 기록되어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교회를 주님이 세우실 것이라고 믿고 기도해야될 것인가. 이것이 저의 고민이었기 때문에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마지막 날 더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성경적인 교회가 왜 그토록 중요한가 하면은요 여러분 성경적인 교회가 회복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만물을 회복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지 주님이 다시 오세요. 만물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은 교회를 회복하셔야되요. 그래서 교회가 변화되어야 되요.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로 바뀌지 않으면 이땅에는 결코 소망이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 말씀이 뭐냐하면 여러분, 성경적인 교회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지못하는 어느 지역에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제가 지금까지 찾아본 결과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요 이 세상보다 더 더러운 곳입니다. 교회는요 이 세상보다 더 기본이 안 된 곳입니다. 교회는요 누구 말대로 귀신들의 소굴입니다.
귀신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손가락질 합니다. 서로 잘했다 잘못했다고 싸웁니다. 누워서 침뱉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조금 더 낫다는거죠. 이런 모습들을 볼 때 이게 무슨 교회인가, 정말 이런 모습보면은요 교회, 집어치웠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주님이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어떤 값을 지불하셨는데, 주님은 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으셨는데. 주님은 그의 피를 흘려주셨는데. 그렇다면 주님은 결코 교회를 헛되게 하시지 않을거라는거죠. 주님은 반드시 교회를 정말로 영광스러운 교회로 회복시킬 겁니다. 저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합니다. 제가 죽기 전이 아니라면 죽은 다음에라도 올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요.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성경적인 교회는 네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되요. 저는 지난 5주에 걸쳐서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성경적인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요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오시는 분, 여러분 시험에 들지 말고 들으세요. 여러분은 성경적인 크리스쳔이 아니에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이 조금 과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마지막이고 다시는 이 말씀을 못 전할것 같은데 오늘 그냥 끝장을 봐야되겠다. 이런 마음입니다. 또 성경적인 교회는요 모이긴 모이는데 모여서 고스톱 치는 교회가 아니에요. 모여서 게모임 하는데가 아니에요. 물론 교제, 친교 중요합니다. 성경적인 교회는 모여서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어요. 성경을 보세요. 성경을..., 성경적인 교회는 모이면 네가지가 있었는데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어요.
오늘 42절 말씀에. 그 다음에 교제가 있었어요. Fellowship, 코이노니아가 있었어요. 그 다음에 떡을 떼었어요. 서로 음식을 나눠 먹었어요. 두가지, 이건 성찬식을 말할 수도 있고 음식을 먹으며 우리가 삶의 나눔을 말할 수도 있고, 그 다음에 기도가 있었어요. 자 이 네가지가 사도행전 2장 42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자, 이와같은 초대교회의 모임에 이와같은 네가지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오늘 여러분이 눈을 똑바로 뜨고 성경을 분명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43절에 보세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우리말 성경이 번역이 너무나 제가 마음에 안들어서 영어로 옮겨드립니다. ‘Everyone was filled with awe’ 초대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충만했다.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충만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희 교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하고 거리가 먼 교회에요. 우리가 오늘 심각하게 이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사람마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성경에 Everyone was filled the fear of God.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가득했다. 뿐만아니라and many wonders and miraculous signs were done by the apostles. 사도들로 인해서 표적과 기사와 기적이 일어났다. 이게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표적과 기사가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는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교회는 제가 아직까지 못봤어요. 그런데요 여기까지는 아직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아마 이제부터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결정할 것입니다. 이 교회는 아니다. 아니면 진짜 이 교회가 진리를 선표하는 성경적인 교회인가, 44절에 한번 보세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All the believers were together,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and had everything in common.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말은 자기의 것이 없었다는 말이에요. 45절에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Selling their possessions and goods, they gave to anyone as he had need. 순간 우리는 문제에 부딛혔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그걸 왜 팔아요?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이게 무슨 공산주의지 교회입니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짜 교회입니다. 오늘날 어느 교회에 이런 일이 있어요? 없어요.
이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4장 3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4절에 계속 나옵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야..좋다.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 그 다음에 ‘이건 안돼, 이건 말도 안돼’ 이건 가진것이 많은 사람들. 그런데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시든지간에 그건 자유입니다.
진리는 여러분이 처한 환경때문에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 성경말씀이 이루어져야되고 내가 부자이기 때문에 이 성경말씀을 보류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말씀은 성경말씀이에요.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는 분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오늘날 어떤 성도가 자기 집을 팔아서 교회 갖다내면, 그걸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교회가 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교회를 사이비 집단이라고 정죄할 거에요. 틀림없이 그럴거에요. 그게 무슨 교회냐고, 성경에 엄연히 있는데도, 우리는 그런 위선적인 발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왠지 아세요? 내가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니까. 여러분, 또 오해하지 마세요. 목사님, 교회가 어려우신가? 그래서 그런 말씀 하셨나? 아니에요. 이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것이 사도행전 2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4장 끝부분에 나오는데요. 사도행전 4장 끝부분에 제가 생각할 때에는 이 말씀을 왜 성경에 기록했을까, 이 말씀이 왜 이토록 중요해서 성경 66권 그것도 사도행전 4장 끝절에 기록된 이해가 안되는 두 구절이 있어요. 그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4장 36절, 37절이에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저는요 이 말씀이 왜 여기에 기록되어있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여러분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다는 것은 여러분의 가문의 영광입니다. 아멘. 그런데 이 66권 가운데 이 천년 동안 성경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읽혀지는 성경구절에 한 사람의 이름이 이유가 없이, 아무런 이유가 없이 추가된 이름이 있는데 바나바래요. 그런데 바나바를 왜 기록했나 보니까 다른 것은 없어요.
그가 밭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밭을 팔아가지고 그 값을 사도들 발 앞에 두었다. 저는 질문이 그거에요. So what? 아니 그 사람이 그 일을 한 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길래 그것을 성경에 기록해 놨냐는 거에요. 왜 누가가 이걸 여기다 기록했냐는 거에요. 왜. 그거는요 그 다음 구절을 봐야 이해가 되요. 그 다음 구절이 5장 1절이에요. 그런데 바나바도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발 앞에 두었는데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5장 1절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내가 삽비라닙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요 다른거는 모르는데요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일치가 되었어요. 할렐루야. 참 히얀해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도 아나니아랑 삽비라도 그래요. 한번 보겠습니다.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나바도 밭을 팔아다가 바쳤데, 그러면 우리도 해야되지 않겠어? 왜냐하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초대교회 속에 부자가 얼마나 있었겠어요? 집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밭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팔아서 사도들의 발앞에 두면 사도들이 필요에 따라 나눠주니까 모르긴해도 그 사람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겠어요? 누가가 이것 때문에 바나바를 기록한거에요. 바나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밭을 팔아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런데 바나바가 하니까 아나니아가 나라고 질소냐, 않하지 않겠다는 거에요. 이해가 되시나요? 그래서 아나니아도 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두 부부가 짰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네도 좀 들어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거에요. 아니 바나바도 지금 인정 받는 판국에 그래서요 이 동기가 잘못된거에요. 잘 들어보세요. 아나니아 삽비라도 용감하게 집을 팔았는데 돈을 다 갖다 바치자니 아깝지요. 아깝지 않겠어요? 그래서 짰어요. 이거 다 드리지 말자. 일부만 드리고 그리고 인정은 받고 그러니까 꿩먹고 알먹고. 그렇게 하자 그래가지고 둘이 짜가지고, 부부가. 제가 말했잖아요 꼭 죄지을 때는 부부가 하나가 된다고. 짜가지고 그 돈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뒀어요. 저 같으면 딱 속았을 거에요. 저 같으면. ‘아이구 집사님, 아나니아 집사님, 요즈음 경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집도 안팔리는데 그 집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다니…축복을 받을지어다. 백 배 천 배로 받을지어다.’ 그런 큰 죄를 저질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베드로는 안그랬어요. 베드로는 성령충만하잖아요. 베드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잖아요. 베드로는 즉각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서 알았어요.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냐하면은요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그랬어요. 아나니아 마음에 사단이 가득했다. 그래서 성령을 속이고 땅 값을 감추고 일부를 마치 전체인것 처럼 가져다 두었을 때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어요.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 네 땅이 아니냐? 판 다음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하나님을 속이느냐 어찌하여 네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느냐 이렇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5절 말씀,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다시 영어로 읽겠습니다. And great fear seized all who heard what had happened. 오늘날 교회에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두가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경회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자기 것을 자기것이라고 여기지 아니하고 그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이 일은 오늘날 교회에 없습니다. 부분적으로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와같이 성경적인 예를 없습니다. 그런데요 이 두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어요.
동시에, 같은 문맥에서. 조금 더 지났어요. 한 세 시간이 지났어요. 세 시간이 지나서 아나니아의 부인 삽비라가 너무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왔어요. 이제.. 나도 이제 한자리 해보지 않을까. 나도 이제 일곱집사에 포함되지 않을까. 나도 이제 누가 좀 알아주지 않을까. 왜요? 집을 팔아서 우리 남편이 갖다 드렸거든요. 아주 기대하는 마음으로 목에 힘주고 교회를 딱 나타났어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 돈이 다냐?’ 라고 물어보니까 삽비라는 남편과 짰으니까 짠대로 얘기해야 되잖아요. ‘아니 당연하죠’ 그 말을 하자 또 죽었어요.
그 자리에서.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냐하면 한번 들어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시험하려 하느냐 주의 영이 그걸 모를 것 같으냐? 성령이 너희 마음에 속임수를 모를것 같으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너도 메어갈 것이다. 곧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져 혼이 떠나는지라.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메어다가 그 남편곁에 장사하니 5장11절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두려워하니라. Great fear seized the whole church and all who heard about these events. 여러분 한번 잘 들어보세요.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만약에 성령을 속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죄를 지을 때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이것은 구약보다도 더 무서운 즉결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이 초대교회에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얼마든지 필요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진리라고 믿으십니까? 이것이 진짜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사랑과 진리교회는 이것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주석을 달고 해석을 했는데 마음에 안들어요 다. 전부다 지식적이고 다 이론적이고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게 그런 교회가 없으니까 이거 이해가 안되잖아요 사실. 성경해석이 너무 어려운거에요, 이 부분이. 그런데 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한 분을 제가 만났어요.
그 분이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이에요. 이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은 여러분이 구글에 들어가서 search해 보면 요즈음에 가장 널리 인정받고 존경받는 참 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연세가 많이 드셨는데. 이 목사님이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셨어요. 한번 들어보세요. ‘무엇이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유를 팔아서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채우는데 전념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날마다 음식을 나누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기쁨과 관대함으로 충만하게 하여 찬양과 기도드리게하는 원동력이 되었을까? 무엇이냐? 그것은 43절에 열쇠가 있다’라고 생각을 한답니다. 43절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임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너무나 약해요. 번역이 너무 약해서 이건 전달이 잘 안되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그 뜻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임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들을 가득 채웠다. 그 말이에요. 이것은 여러분이 하찮게, 여러분이 가볍게, 우습게 여길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 그로 인해서 떨리는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해 볼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쳔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또 그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또 하나의 얘기 거리입니다. 하나님은 또 하난의 논쟁거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집안 대대로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나도 지켜야되는 전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완전하신 분입니다. 여전히 두려운 분입니다. 여전히 놀라운 분입니다. 여전히 경외감에 충만하며 그 분을 섬기는 것은 충격적인 현실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본다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오늘날 교회들에게 바로 이 사도행전처럼 모이는 장소에 경외함과 두려움과 놀라움과 떨림의 모든 하나님을 경외함이 성도들에게 임했다고 하는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Where is the church? 그 교회가 어디있냐라고 물어볼 때 우리의 대답은 그런 교회 없습니다 에요. 그런 교회 없습니다. 계속해서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의 부재, 이러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며 성도간의 교제를 하찮게 여기며 기도하기 보다는 놀기를 좋아하게 된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저는 이 분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안에 이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아주 우습게 보죠. 우습게 보는 정도가 아니죠. 제가 계속해서 여러분 사도행전을 보면서 왜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을까? 제가 너무 고민하면서 성경을 다시 봤어요. 제가 그 성경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좀 찾아드려 보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성경적인 교회의 특징은 뭐냐하면 믿는 자 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 그랬죠. 자 그 말씀인데 그 말씀을 우리가 자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한 번 펴 보십시다. 우리가 성경을 찾는 것이 조금 불편하지만 사도행전 19장을 한 번 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6절 부터 보면요 네, ‘악귀 들린 사람이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우리가 이것은 지난 주에 했습니다. 그죠? 이 마술하는 유대인이 바울이 말하는 예수이름으로 쫓아내려다가 봉변당한 얘기죠? 예, 이것은 지난 주의 설교를 여러분이 들으시면 잘 나와있어요.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은 아직 이 사람들이 크리스쳔인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이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다. 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는지 아세요? 사도들의 손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이해가 되시나요? 오늘날 교회에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지 아시겠어요? 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계속해서 사도행전 9장에 보면요 사도행전 9장은, 그냥 듣기만 하세요. 사울이 회심한 장면이에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런다음에 그가 성령세례를 받고 즉시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하니까 밤에 사울을 몰래 성에서 내려가지고 도망치게 하는 장면이에요. 네, 그것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요 9장 3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수가 더 많아지니라’ 제가 정말 죄송하지만 이 말씀도 우리 말이 도무지 clear하지 않아서 영어로 좀더 여러분에게 설명을 해드립니다.
So the church throughout all Judea and Galilee and Samaria enjoyed peace, being built up, 교회가 세워져갔다는 거에요. and going on in the fearof the Lord and in the comfort of the Holy Spirit, it continued to increase. 세워지고 또 계속해서 세워지고 계속해서 증가됬다. 어떻게요? 잘 들어보세요. in the fear of the Lord,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and in the comfort of the Holy Spirit, 성령의 위로하심으로. 두 가지가 같이 있다는 거에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교회가 충만하기 때문에 교회가 계속해서 세워져 갔으며 성령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져 갔다. 오늘날 교회는요 성령의 위로는 있습니다. 성령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언제 필요합니까? 우리가 절망할 때, 우리가 낙심할 때, 우리가 포기하고 싶을 때 우리가 성령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죄 지었을 때 우리가 성령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정말 우리가 교회생활할 때 너무나 힘든일이 많습니다. 성령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위로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충만했다는 거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빠지면 교회는요 엄청난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여러분,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보시면 고넬료 가정이 나와요. 고넬료 가정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다고 나옵니다. 모두가 다. 그러면서 사도들이 ‘아 그렇구나, 유대인이요 이방인이요 헬라인요 자유인이요 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받으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이유중에 한가지는 오늘날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에요. 그동안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동안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성경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직무유기 한거죠. 그러니까 책임은 다 목회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왜곡시킨다는 거에요. 도저히 내가 이대로 살 자신이 없으니까 그리고 이대로 설교하면 교인들이 싫어할 것을 뻔히 아니까 이걸 설교를 안하거나 약간 희석시켜가지고 대충설교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기 때문에 도무지 교인들이 진리를 들을 기회가 없는 거에요. 또 한가지는요 아예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한번 들어보세요. 제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대해서 얘기하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그것은요 초신자일 때에 초보자일 때 이야기 아닙니까? 장성했을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다죠.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그랬는데 무슨 두려움 얘길 하세요. 사랑이면 다 해결되지.’ 그럴듯 하죠? 그러면서 이런 성경을 인용합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봐요, 목사님 우리는 이제 성숙한 교회이기 때문에 두려움 같은 것 얘기 안해요. 사랑이면 다 되요.’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여러분 오늘 설교를 다 듣고나시면 여러분이 얼마나 속았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진짜로 이 말이 그 말입니까? 더 나아가서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봐요, 목사님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마음 안 주신데요.’ 그러면 성경이 서로 역설적이네요? 성경이 서로 다른 말 하고 있네요? 이게 문제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고 성경을 이 구절을 하나 떼어가지고 마치 그것이 모든 진리인것 처럼. 성경에는 두려움이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Godly fear, 경건한 두려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두려움. 정말 우리가 없어서는 안되는 두려움이 있구요. 또 하나는요 두려워하면 안되는 두려움이 있어요.
Ungodly fear에요. 성경은 이 두가지를 말하고 있어요. 여러분 다시 아까 그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의 이 두려움은 경건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두려움, 그런데 이 말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이렇게 번역해야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것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Spirit of fear, 두려움은 영적인 존재에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어요. 뭘 두려워하게 만들어요? 장래에 대해서 두렵게 하죠, 내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게 하죠, 내 경제가 나빠질까 두려워하죠, 직장에서 짤릴까봐 두려워하죠, 내 남편이 떠날까봐 두려워하죠, 자식들이 잘못된 길로 갈까봐 두려워하죠, 건강이 나빠질까봐 두려워하죠, 높은데 올라가면 두렵죠, 물에 빠질까봐 두렵죠, 사고가 날까봐 두렵죠, 요즈음에는 비행기도 자주 떨어지니까 비행기 떨어질까봐 두렵죠.
이 온같 두려움은요 성경이 말하는 Spirit of fear를 말하는 거에요. 두려움의 영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환경을 두려워하게 하고 이런 잘못된 것들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것을 두려워하게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이걸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주셨는데요? 오히려 하나님은요 우리에게 The Spirit of the Lord를 주셨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을 주셨어요. 그러니까요 이게 엄청난 창이인데요. The spirit of fear하고요The Spirit of the Lord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에요. 천국과 지옥 차이입니다. The spirit of fear 는 Ungodly fear. 잘못된 두려움이요, The Spirit of the Lord 는 경건한 두려움이요 정말로 우리에게 있어야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령입니다. 바로 이 영이 예수님 위에 임했던 거에요. 어, 그런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이사야 말씀에 보면은요 이사야가 잘 설명해 줍니다. 그냥 듣기만 해보세요.
이사야 11장 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누구 이야기에요? 예수님 이야기. 그러면서 2절에 ‘여호와의 신’ ‘The Spirit of the Lord’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 신은 6가지이다.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The Spirit of fear of the Lord’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 예수님 위에 임할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은 계속 말하기를 3절에 ‘그가(예수님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다’ ‘He will delight fear of the Lord’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것이다. 이해가 안되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어떻게 기쁨을 삼을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이제 앞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뭔지 우리가 함께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기쁨이에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즐거움이에요. 그게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이 임했던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없어요. 교회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요? 없어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좀 더 요약을 해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하고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더 요약을 해서 말씀 드릴께요. 여러분이 구약을 다 찾으실려면 밤새 다 찾으실래도 다 못찾으세요. 그래서 제가 요약을 해드리는 거에요. 구약에서 제일 중요한 concept이 이겁니다. 구약에서의 가장 중요한 concept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악에서 떠나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항상 같이 가요. 항상 같이. 한 번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0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두려워말라 그러죠? ‘하나님의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심이라’ 여러분 똑같은 말이에요. 두려워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두 가지가 있어요.
쓸데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죠.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해라. 하나님을 두려워해라. 그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여 너희로 하여금 범죄치 않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죄를 짓지 않는 것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죄를 짓게된다 그 말이에요. 욥기 1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악에서 떠나는 것은 같이 간다는 거에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악을 행하게 된다느 거에요.
잠언 16장 6절은 이 말씀을 더 정확하게 말합니다. ‘인자와 진리로 죄악을 속하게되며’ 그 말은요 인자와 진리로 죄사함을 받게되지만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죄를 짓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악에서 떠나게 되는데 오늘날 교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죄 짓는 것을 우습게 아는 거에요. 그리고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우리가 뭐 구약에 사나? 우리는 신약이에요. 목사님. 우리는 은혜의 시대에 있어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죄 좀 지었다고 그러지 마세요.’ 자기 죄를 정당화 하고 자기 양심을 점점 무뎌지게 만들어서 결국 죄를 지어도 조금도 찔림이 없는 화인맞는 양심이 되어서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예수님 말씀처럼 지옥자식 만드는 일이 오늘날 교회에서 얼마나 자주 행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를 다 하나님이 들어주셨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한 구절이 한구절도 없어요. 오히려 성경은 히브리서 5장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할 이시이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he was heard because of his reverent submission.’ 이게 이런 뜻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죄에서 떠나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는 거에요. 여러분 기도 아무리 많이 해 보세요 응답 안됩니다. 그거 시간낭비에요. 죄에서 떠나야되요. 회개해야되요.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가 없는거에요.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가 없는 거에요.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고 히브리서는 기록하고 있어요.
계속해서 여러분 제가 신약을 요약해 드립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얘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 아세요? 제가 이 말씀을 보면서 내 가슴을 칠 수 밖에 없고 정말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저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거에요. 저부터 부족한데 교인들은 어떻겠어요?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서 제 자신에 대한 심한 가책을 느끼게 된거에요. 한번 들어보세요. 신약이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했는지 한번 보자구요. 빌립보서 2장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내가 있으나 없으나 항상 순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라’ 영어 성경에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 그러니까 어떤 분이 그래요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요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구원의 확신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러면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까? 바울이 지금 뭐라고 말하냐 하면은요 내가 분명히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지만 내가 끝까지 내 구원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구원이 절대로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 얼마든지 나는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내 구원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거에요.
그런데 두려움이 없어요. 잘못된 교리, 잘못 배운 성경구절들 때문에 교회가 망조가 들었어요 지금. 그게 잘못된 교리로 세뇌교육을 받으면 그렇게 되요. 여러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이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어요. 바울은요 자기도 버림이 될까봐 두려워한다고 그랬어요. 여러분 뭘 두려워해야 되는지 아시겠어요? 여러분 내일 경기가 나빠질까봐 두려워할게 아니고요 먹을것 입을것 쓸것이 없을까봐 두려워할게 아니고 정말로 여러분이 구원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것인가, 구원을 끝까지 이룰 수 있을것인가 두려워하라는 거에요 성경이. 엉뚱한 것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고요 성경은 계속해서요 신약성경은 얼마나 분명하게 말하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약속이 뭔데요? 6장 끝절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는 약속.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게 끝까지 보장되라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받을 것이라는 이 약속을 우리가 가졌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되냐,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한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게 해야된다 그랬어요. 이건 뭘 말하냐하면은요 구원을 얻었다고 끝나지 말고 완전한 거룩함을 이루어 가라는 거에요. 완전한 성화를 이루어가라는 거에요. 어떻게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할때만 거룩함을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성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하자. 깨끗하게 하자.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요 내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안들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내가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안들어요.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바울은 계속해서 ‘뱀이 간계로 이브를 유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깨끗함과 진실함에서 떠나서 오염될까봐 두려워하노라. 이거를 두려워하라는 거에요. 이거를 두려워해야 되요. 우리 가운데 누가 이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처음 예수님 믿을 때는 너무 진실했는데, 너무나 순수했는데 나는 끝까지 이 진실함과 순수함을 지킬줄 알았는데 살다보니까 더러워지고 오염이 되고 죄를 짓게되고 내 마음이 무뎌지는 것 이것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주님 내가 주님앞에 기도한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더 나아가서 고린도후서 12장 20, 21절에 보면은요 바울이 무엇을 두려워했냐 하면은요 초대교회, 고린도교회에 바울이 제일 두려워한 것이 이건데요 교회에 이런 것들이 있을까봐 두렵다고 그랬어요.
한번 들어보세요.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과 수근수근하는 것과 거만한 것과 어지러운 것이 교회안에 있을까 두렵다’ 그랬어요 바울이. 여러분 안에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까? 정말 사랑과 진리교회 안에 다툼이 있으면 안된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요. 시기가 있어서는 안되요. 분냄이 있어서는 안되요. 당짓는 것이 있어서는 안되요. 중상모략하는 것, 수근수근하는 것, 이런 것이 있으면 안됩니다. 주님. 절대로 이런 것들이 우리 교회에 없도록 주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더 나아가서 21절에 바울이 뭐라고 그런지 아세요? 너희안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있는데 그 죄지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을까봐 두렵다 그랬어요. 이게 진짜 두려워해야 될 것들이에요 여러분. 왜냐하면은요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가는데요 뭐. 그 대상이 누구이던지 간에. 저도 마찬가지이고. 바울은 정말 두려워해야되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았어요. 이게 바로 Godly fear에요.
이게 경건한 두려움이요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될 두려움이에요. 히브리서 4장 1절에도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온전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 못 들어갈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라. 이걸 두려워한다는 거죠. 골로새서 3장 22절에는 또 종들이 상전을 섬길 때에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을 섬기라는 말도 있어요. 이건 다 바울의 얘기에요. 그러니까 바울만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아니구요 베드로도 그랬어요.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 보면은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른즉’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 믿음대로가 아니라 행위대로 판단하신다. ‘그 분을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로 있을 때, 이 세상을 살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요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행위가 하나님께 심판받을 행위가 될까봐 두려워해라 이 말이죠.
이건 베드로의 말이에요. 여러분 바울과 베드로가 믿음의 단계가 낮아서 이런 얘기를 했나요? 바울과 베드로가 어떤 사람들처럼 신앙의 초신자여서 이런 얘기를 했나요? 아니요 이들은 주님의 깊은 마음을 안 사람들이에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면 더 알수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깊게 깨달아 집니다. 그게 없는게 초신자에요. 지금까지 우리는 아주 거꾸로 배워왔어요. 처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많이 성장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성화에요.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이 가능하게 하는거에요. 그래서 바울이 그토록 외치는 거에요. 베드로가 이렇게 신신당부하는 거에요.
너희가 이 세상에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지내야된다. 히브리서 12장 28절 29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기쁨으로 섬기래요. 아멘. 그런데 기쁨으로만 섬기면 꼭 방자히 행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기쁨으로만 섬기지 말고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섬겨라. 여러분 이해가 안되시죠? 이게 두개가 어떻게 공존합니까? 목사님. 두려움과 기쁨이 어떻게 공존합니까? 이게 바로 신앙의 성숙한 단계라는 거에요.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면은 두려움과 기쁨이 공존하게 되는 것을 알게되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던 것처럼. 내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느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지를 깨닫게 되는 거에요.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모양이라도 과감하게 버리는 그 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며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하는지 그 기쁨을 아십니까? 그 기쁨을 모른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는거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죄짓는 것을 쉽게 생각하고 그것 즈음이야 목사님 장로님 너도 나도 다 짓는 죄를 갖고 목사님 그러십니까? 하나님이 그러셨어요.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Fear God’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초보단계의 신앙이 아니고 아주 성숙한 단계의 신앙이에요. 여러분이 거기까지 자라야되요.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이룰 수가 있고 거룩함에 이룰 수가 있고 우리 자신을 더럽게 하는 육과 영의 모든 것으로 부터 우리 자신을 정결하고 깨끗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굉장히 유명한, 그리고 존경할만한 목사님이 몇 분 계시는데 그 중이 한 분이 데이빗 포슨이라는 목사님이에요. 관심있는 분은 한번 serch해 보세요. 데이빗 포슨. 이분은 영국사람입니다. 이분은 대단한 분입니다. 이 분의 할아버지가 존 포슨이라고 요한 웨슬레랑 같이 사역했던 분이구요 그 아버지 씨슬 포슨은 교수님이시고 이 데이빗 포슨 이 분도 아주 참 그 가문의 흐름을 이어받아서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는데요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이 분 설교를 목사님들이아 선교사님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요. 그런데 이 데이빗 포슨 목사님이 70대가 되셔서 할아버지가 되셨는데 이 목사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1985년에 이렇게 물었답니다. ‘주님, 영국교회에 무엇이 빠져있나요?’라고 물어봤답니다. 물었더니 주님이 가르쳐주겠다. ‘영국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 그랬데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비단 영국교회만일까요? 미국교회가 더 심하면 더 심했죠. 한국교회는요? 여러분 혹시 짐 베이커라고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짐 베이커. 네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이 짐 베이커라는 분은 참 하나님께서 대단한 은사를 준 분인데 이 방송에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분이에요. 그런데 이 짐 베이커가 펫 로버슨 혹시 아시나요? 리즌트 유니버시티의 총장이시고 전에 대통령에 출마했던 분이죠. 이 펫 로버슨이 700클럽 이라는 것을 하는데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가장 많이 시청하는 그런 프로였어요. 기독교TV 프로. 제가 오늘 1부 예배때 700클럽 아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더군요. 그래서 제가 래리킹쇼는 아냐고 물었더니 다 알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700클럽이 래리킹쇼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유명했던 프로에요. 지금도 유명하지만 그 때는 대단했어요. 시청율 뭐 수백만명이 시청했으니까. 그런데 이 700클럽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분이 바로 이 짐 베이커에요. 그리고 그 분이 TY에 브로드케스팅 네트워크라고요 미국의 가장 큰 기독교방송을 시작했는데 ‘크라우치’ 그 분이랑 같이해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에요.
이분이 아주 탁월한 분입니다. 이 분이 손만 대면 뭐든지. 방송쪽은 이 분이 손대면 순식간에 성공하는 거에요. 그런 은사가 있어요. 이 분이. 그런데 이 분이 성공하고 유명해지니까 죄를 지었어요. 타락하게 되었어요. 유명해지면 타락합니다. 성공하면 타락합니다. 안그랬으면 좋겠는데 꼭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이 분도 결국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징역 46년형을 받았어요. 그러면 그 분이 감옥에서 평생 사기다가 가야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인생을 그렇게 끝내지 않고 그 분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46년을 5년으로 감형을 해요. 그런데 이 짐 베이커 목사님이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요. 감옥안에서 화장실청소를 했데요. 그런데 자기는 감옥에 있는 시간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였다. 자기가 감옥 들어가기 전에는요, 자기가 고백하더라구요.
성경을 한 번도 안봤데요. 감옥에 들어가니까 할 일이 없더래요. 그래서 성경을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외울 때 까지 보게되었다고. 그게 하나님의 역사에요. 여러분 감옥에 보내기 전에 성경 보세요. 그런데 이 분이 성경을 다시 보고 한 말이에요. 내가 지금까지 성경을 모르고 죄를 지었다는 거에요. 나는 성경에 이런 말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거에요. 그리고 다시 이 분이 회복해가지고 새롭게 브랜슨 미조리에서 ‘짐 베이커 쇼’라는 것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연세가 많이 드셔가지고 옛날갖지 않더라구요. 그런데요 이 짐 베이커가 감옥에 있었을 때, 또 미국에 유명한 목사님이 한 분 계세요. 존 비비어라는 목사님이 있어요. 존 비비어라는 목사님도 대단한 목사님이에요. 이 분이 참 귀한 책들을 많이 쓰셔서 베스트셀러가 되셨는데 이 목사님이 짐 베이커 목사님을 찾아갔어요. 감옥에. 너무나 궁금했어요. 짐 베이커가 참 좋은 분이고 자기가 알기로는 참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왜 타락했을까? 도대체 타락한 이유가 뭘까? 이게 알고싶어서 찾아간거에요.
그래서 이 존 비비어 목사님이 짐 베이커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짐,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 내가 알기로 당신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즈음에 가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져가지고 이렇게 됐어?’라고 물었더니 짐 베이커가 충격적인 말을 하더래요. ‘John, I never stopped loving Jesus. 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멈춘적이 없었다. I love Jesus all the way through. 나는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했다. 그런데 그 다음말이 충격적이에요. But I didn’t fear Him. 나는 그 분을 경외하지 않았다. 내가 그 분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요 오늘날 교회는 도저히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임재가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해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한 사람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다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집이 있는 사람은 집을 팔아서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재산을 팔아서 밭이 있는 사람은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두면 사도들이 그걸가지고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없는 교인들을 먼저 도왔고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도왔던 것이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포기해야 됩니까? 아니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교회를 세우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되요. 우리가 모일 때마다 우리 모임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으로 충만해야되요. 그래서 함부로 죄짓지 말아야되요. 죄짓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되요.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악에서 떠나야되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육과 영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정결케 되어야 되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기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되요. 여러분 그거 아세요? 여기있는 어느 누구도 끝까지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할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두려움이 필요한거에요. 두렵고 떨림으로. 기쁨과 감사함으로가 아니라. 믿음과 봉사로가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라.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새겨지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과 진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한 마음으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제발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사랑과 진리교회에 사람들이 오면 그 교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임재가 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으로 충만하다. 그 성도들은 자기것을 자기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모두 하나님께 드려서 그 교회는 핍절한 사람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없고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가장 성경적인 교회라고 우리 교회가 인정받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출처:LTC/벤자민 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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