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신부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 : 예수님의 유업이 됨
A. 하나님 나라에서 기반이 되는 전제는 아버지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한가지 유업으로써, 예수님이 굉장히 갈망한다는 걸 아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유업은 어떤 면에서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께 의무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 이상을 원하십니다. 자발적으로 사랑 안에서 예수님과 같은 멍에를 지기로 선택하는 영원한 동반자, 혹은 신부를 갈망하십니다(엡5:31-32;계19:7-9).
B. 예수님의 신부는 모든 세대 중에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최고의 상급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애정은 하나님의 가장 귀중한 소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려 죽으셨고, 그리하여 사람들의 애정을 소유하십니다. 우리가 창조되고 구속된 이유는 온 맘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에 예수님의 유업으로서 살 수 없다고 우리의 마음을 공격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C. 성령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첫 계명을 첫 번째 위치로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첫 계명은 하나님께 가장 첫 번째 우선순위를 갖기에 첫 계명인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옵션"이라 불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우리가 살 수 있는 가장 높은 삶의 방식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까지)에 영향력을 강하게 주기에 이것은 위대한 계명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7-38)
D.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이 세대에 그의 신부로서 준비 되어 질 것입니다. 마지막 세대로서 교회가 갖는 능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름부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서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계15:2-4).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그 사랑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초자연적인 능력을 포함합니다.
...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19:7)
E. 신부는 아름다운 장미(샤론의 수선화)와 순결한 백합(골짜기의 백합화)으로 묘사되는데, 삶의 주된 목적과 정체성은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장미)하며, 순종(백합)하려고 간구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장미는 그 아름다움과 향기로 꽃들 중 최고로 꼽힙니다. 백합은 순결을 의미합니다. 골짜기는 이 타락한 세상의 낮고 어두운 곳을 가리킵니다. 신부는 타락한 세상의 어두운 골짜기의 중심에서 순결함으로 살아갑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아2:1)
F. 시적인 언어로 신부는 자신의 삶의 주목적과 정체성이 예수님의 유업이 되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장미와 백합은 아가서 2:2에서 신부로 불리어진 자들과 같은 사람들 입니다. 왕은 그녀를, 죄를 지칭하는 골짜기와 가시나무들 사이의 백합화로 봅니다. 가시나무는 아담의 죄로 인한 저주의 결과로서 자라난 것입니다(창3:17-18;히6:8).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아2:2)
G. 우리는 예수님을 매혹시키는 사랑과 순종의 향기가 피어나는 장미이며 백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갈망하시는 단 하나의 상급입니다. 우리가 창조되고 구속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유업으로써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장미), 순종하는(백합)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쁨과 즐거움을 드리는 것입니다.
H. 신부의 첫 번째 고백은 마음속에 어둠이 있지만 자신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는 아름답다는 것이었습니다(아1:5). 신부는 "나는 예수님이 갈망하시는 유업이다,"라는 고백 안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이 계시는 아가서 1:12-17 안에 있는 진리들을 본 후에만 옵니다.
I. 우리는 "하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약속한 유업이 바로 우리"라는 계시를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엡1:17,18)
J. 우리는 사랑과 순종을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유업은 순결함으로 살아가는 일단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선택들은, 아들을 높이고 상주실 아버지 계획의 실제적인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키우는 장미와 백합으로 우리를 선택하심으로 우릴 위해 많은 것을 지불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고난의 보상입니다. 많은 믿는 자들이 순결함으로의 부르심을 율법주의라 치부함으로 경시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사랑하는 자니...(요14:21)
K.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가치를 두고 성공을 가늠하는 방법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는 누구이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지?" 우리의 기능적 면(사역)은 중요하긴 하지만, 정체성이 먼저입니다.
L. 우리의 주된 정체성(가치/성공)은 우리가 하나님과 갖는 친밀감- 즉 하나님께 사랑 받으며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안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랑 받으며(하나님께), 또 사랑하는 자(하나님/다른 사람들을)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M. 우리가 얼마나 성취하는지로 혹은 우리가 끼치는 영향력으로 우리의 주된 가치를 찾는 대신에, 하나님의 갈망하시는 존재이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우리의 정체성, 혹은 성공을 찾습니다. 우리는 가장 성공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 갈망하시는 바이며,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N. 우리의 주된 정체성은 우리 손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무엇을 따르느냐 입니다. 우리가 그의 장미이자 백합인 것을 보는 것은 무의미함과 실패감, 그리고 열등감을 부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그와의 친밀감 안에서 얼마나 자라고 있는지를 가지고 우리의 성공을 가늠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귀함과 그 사랑이 얼마나 하나님께 중요한지를 보는 계시를 갖게 해줍니다.
O. 우리는 반드시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에 동의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무엇이 성공인지에 대한 거짓말에 동의함으로써, 실패했다고 느끼고, 목적 없이 삽니다. 그들은 대부분 내적인 것-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도록 되어있는지-대신에 외적인 것-무엇을 하고, 소유하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신의 삶을 분투와 영향력의 부족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의 사역을 앞세운 사람들을 교정하셨습니다.
또 네가...내 이름을 위하여...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2:3-5)
P.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과 약혼한 상태이고 헌신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칠 때 아가서 2:1절의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이 시대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은 그의 유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2,3)
II. 신부의 계시: 오직 예수님만이 신부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다 (아 2:3a)
A. 신부는 오직 예수님 만이 자신의 마음을 시원케 할 (완전히 만족시킬) 사과나무인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아 2:3a)
B. 사과나무는 시원케(refreshing)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아 2:5)
C. 가장 높은 수준에서 사람의 영을 새롭게 하는 단 한 분이 여기 계십니다. 예수님이 사과나무인 것, 즉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만족시키는 주된 근원이 되시는 것에 대한 계시를 받고 나서야 우리는 모든 마음을 다해 그분을 찾게 됩니다. 이것은결혼, 사업, 그리고 사역의 영역에서 기초가 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구세주나 치료자, 공급자 그 이상이 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족을 주시는 사과나무이십니다. 어떤 이들은 기쁨의 주된 근원을 사역, 돈, 그리고 관계로 헛되이 바꾸어 버립니다.
D. 예수님은 이 지구상의 모든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과나무 같은 분이십니다. 숲들(수풀)의 나무들은 상징적으로 이 지구상의 위대한 사람들 즉, 우뚝 솟은 나무들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이들을 말합니다. (단 4:10-14)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 (사2:12,13)
III. 신부는 하나님의 임재를 즐깁니다. : 왕 앞에 앉기 (아2:3b-4)
A.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아래 앉아 있을 때, 예수님은 마리아 삶의 지혜를 선포해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성경에 세 번 묘사되는 데, 매번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있습니다 (눅10:39, 요11:32, 요12:3). 예수님은 그의 발 아래 앉는 것을 "필요한 한가지" 또, 살아갈 "좋은" 길을 택하는 것이라고 (눅10:42) 부르시면서 그 중요성에 대한 논란을 영원히 끝내 버리셨습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헌신으로 사는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구도 우릴 위해 선택해주지 못합니다. 이 좋은 편은 아무도 마리아에게서 빼앗아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선택은 예수님에게 영원히 기억하심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10:39-42)
B. 예수님 발 아래 앉았던 베다니의 마리아와 같이 우리도 반드시 예수님 앞에 앉아 그의 시원케 하는 그늘, 즉 이 타락한 시대의 내리쬐는 열기로부터 우릴 보호할 그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의 말씀으로 먹여지고 그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영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들 중 하나입니다. 말씀은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 끊임없이 영과 진리로 예수님을 마음껏 즐길 모든 자들에게 달콤합니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아2:3b)
C. "당신이 양떼를 먹이는 곳이 어디입니까?"(아1:7) 라고 신부는 물었었는데, 그녀는 아가서 1장 12-17절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왕의 잔칫상에서 마음껏 즐기며 먹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의 내리쬐는 열기를 가리워주는 유일한 나무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그늘 안에서 쉬는 것만이 우리로 하나님 말씀의 그늘을 즐길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의 성숙함에 기초해 얼마나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고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에는 안식이란 없습니다.
D. 우리는 기도-읽기(묵상)의 방법으로 말씀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마음이 새롭게 될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유업은 하나님 말씀의 달콤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몇 명만이 아닌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이 달콤함은 모든 믿는 자의 손이 쉽게 닿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의 말씀으로 먹여지는 것, 즉, 사과나무 그늘에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 없이는, 절대 그 즐거움과 사과나무인 예수님이 우릴 시원케 하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E. 우리는 말씀 안에서 그를 찾는 것으로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하나님 임재의 횃불 아래 내려놓습니다. 심지어 원수(죄, 좌절, 어려움 등등..) 앞에서도 말씀으로 우릴 먹이실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시23:5)
F. 만약 견실히 성숙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겨야 합니다. 만약 그의 임재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면 굉장히 큰 어려움을 통과 할 때도 인내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일하는 자보다 항상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일하는 자가 사랑하는 자가 될 때, 일에 대해 생각하는 틀에 굉장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즐기는 것 없이 수 십 년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IV. 신부의 삶 위에 예수님의 깃발 : 사랑으로 지도하심 (아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아2:4)
A. 고대의 세계에서는, 군대는 특별한 깃발 혹은 현수막 아래 대군으로 행진했었습니다. 각 부대는 명확하게 그들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고유한 깃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정체성을 보여주는 우리 삶 위의 깃발은 예수님의 선하신 지도력(지혜롭고, 사랑으로 하며, 능력이 많은)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유업(신부)으로써의 정체성과 사랑 안에서 자라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B. 우리는 하나님의 베푸신 잔칫상에서 마음껏 즐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 부르심은 어린양의 혼인잔치(계19:7)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말씀의 능력으로 "혼인 잔칫상"의 의미와 유익을 이 시대의 우리가 누리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포도주의 집(유대인이 결혼하고 피로연을 하는 장소)"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축하하는 의식에 관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C. 예수님은 믿는 자들 하나 하나를 위해 선하시고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의 잔칫집, 즉 그의 사랑을 축하하는 장소로 우릴 데려가시려 합니다.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시는 그의 지도력의 주된 목표는 우릴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축하할 잔칫집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이 우리의 사역을 어디로 이끄시는지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를 "혼인 잔칫상"에서 먹이시려, 즉 그리스도의 신부로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로 먹이시기 위해 조금의 실수도 없이, 먼저 이끌고 계십니다.
D.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님의 지도력은 우릴 향한 그의 사랑이 계시되는 동시에 예수님 사랑이 우리 안에 나누어지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우리가 사랑, 온유함, 그리고 계시 안에서 자라게 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 삶에 첫 번째 우선순위는 안락함 혹은 사역에서의 역할 같은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들 삶 위에 하나님의 깃발이 안락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한 혼란 속에 있습니다.
E. 하나님의 연인인 우리의 주된 정체성과 함께 우리가 그의 유업이라는 계시로 우리가 힘을 얻게 되기를 예수님은 원하십니다. 이 일은 "혼인 잔칫상"에서 우리가 그의 말씀으로 먹을 때 일어납니다. 꿈과 환상을 주셔서 우리 마음을 그의 사랑으로 뒤흔드심으로 "우릴 인도하여 잔칫집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생명으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친구관계의 기쁨도 주십니다.
F. 예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릴 인도하시는 그의 깃발을 나타내십니다.
첫째로, 우리 위에 깃발은 그의 인자하심(긍휼)입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우리 삶 위에 깃발은 하나님께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긍휼하심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내가 실패했을 때에도 내 위에 그의 깃발은 사랑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둘째로, 우리 위에 그의 깃발은 합력하여 선을 이룸으로(롬8:28) 우리 삶 속의 부정적인 환경들을 넘어서는 그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우리 위에 깃발은 소홀히 여기시지 않는 그의 선하심입니다.
셋째로, 우리 위에 깃발은 죄의 잘못된 안락함에 속는 것 대신에 하나님 사랑 안에서 즐겁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G. 그는 긍정적인, 그리고 부정적인 방법 모두를 이용해 우리를 잔칫상으로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로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질투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의 말씀으로 먹여지고, 순종함으로 자발적으로 그의 지도력을 따라 잔칫집으로 들어가는 긍정적인 방법입니다.
둘째로 부정적인 방법은 그가 잔칫집으로 인도하려 찾으시는데 우리가 그의 지도력에 저항할 때 보여집니다.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우리에게서 어떤 것을 가져가시며, 이리 저리 문을 닫아 좌절함으로 훈계 받도록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V. 사랑의 병이 난 신부는 하나님과의 더 큰 만남을 위해 부르짖는다 (아2:5)
A. "혼인잔칫상"에서의 경험은 하나님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신부의 더 강한 갈망이 일어나게 합니다. 이 경험들은 신부로 하여금 사랑으로 병이나 하나님께 부르짖게 합니다. 더 많은 그의 임재와 말씀을 주셔서 힘을 주시며 시원케 하시길 간구합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아2:5)
B. 사과가 예수님의 시원케 하심을 의미한다면(아2:3), 건포도는 말린 포도로, 성령님의 사역을 말해줍니다. 포도는 상징적으로 성령님의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의 더 많은 것으로 내 힘을 돕고 예수님의 더 많은 것으로 나를 시원케 해주세요" 라고 신부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C.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병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깊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사랑의 감정과 예수님에 대한 더 많은 갈망을 소유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이것에 접촉될 때, 하나님과 함께 행할 때에 "일상적인 일"의 모습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신부는 황폐케 됩니다. 영적인 상사병(lovesickness)의 두 가지 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첫째로, "사랑의 감정들"은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을 사랑합니다.
2. 두 번째로, "영적인 배고픔의 고통"은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실 하나님의 그 모든 것으로 살고 싶은 비전 때문에 생깁니다. 하나님은 즉시 우리를 채워 만족시키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몹시 괴로운 배고픔으로 고통스러워 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병이 난 것은 적어도 인내하는 것 같은 어떤 것으로도 충족되지 않습니다. 이 절망적인 배고픔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지시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VI. 하나님의 이중의 포옹을 경험함 (아2:6)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아2:6)
A. 신부는 그녀의 삶에 하나님이 2가지 활동 - 그의 오른손과 왼손으로 역사하심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왼손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 머리 밑에 있기에 가리워져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우릴 위해 행하십니다. 주님은 우릴 복주고, 공급하고, 보호하시기 위해 많은 것들을 막고 또, 푸십니다. 우리가이 시대에는 깨달을 수 없는 여러 문제들로부터 우릴 보호하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여러 사고들(accidents)로부터 구해져 왔으나 우리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오른손은 볼 수 있는 혹은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해줍니다. 솔로몬이 신부를 안으려고 그녀 앞에 서 있는데, 신부는 이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달콤한" 하나님의 임재가 느낄 수 있고 인식할 수 있게 명백히 나타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오른손의 역사로 부드러워 지는 것을 느낍니다.
VII. 성령은 전략적인 영적 계절(season)에 우리를 보호하십니다(아2:7)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아2:7)
A. 성령은 이 부분에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각 사람의 영적 삶 가운데 전략적인 계절을 정해 오셨습니다. 이런 계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그의 심장에 대한 새롭고 깊은 계시 안에 세워가길 간절히 원하시는 때입니다. 이 계절에 성령님이 신부를 향해 가지시는 계획은, 잔칫집에서 사과의 건포도로 먹여주실 때처럼 신부가 말씀으로 깊숙이 들어갈 때, 그녀 안에 있는 사랑으로 애타는 마음이 깨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아2:3-5)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과 그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므로 헌신하는 계절이 필요함을 보지 못합니다.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음성, 즉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계10:9-11).
B. 예루살렘의 딸들은 믿는 자들 중, 다양한 성령의 운행하심과 하나님 안에서 각기 다른 계절이 있음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전략적인 계절에 성령님은 다른 믿는 자들이 신부의 마음으로 헌신된 자들을 자신의 의견과 판단으로 흔들어 혼란스럽게 하지 말 것을 엄중하게 부탁하십니다. 아가서 2:8에서 분명하게 보여 지는 것 같이 예수님이 계절이 바뀔 때(때가 되었을 때) 우릴 흔드실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분의 방법에 둔감한 자들에게 신부를 이 특별한 계절-말씀과 성령이 잔칫상에 앉은 신부의 힘을 돕고, 시원케 하는 이 때-에 방해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덜 찾고, 사역의 활동을 늘리라는 권면 한가지만을 갖고 이들을 바라봅니다.
C. 솔로몬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그들에게 부탁했습니다.(아2:7)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라는 것은 이러한 계절에 어린 신부와 관련해서 온화함과 민감함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노루와 들 사슴은 민감한 본성을 가졌고, 쉽게 깜짝 놀라 달아납니다. 많은 이들이 말씀에 잘 집중하지 못하고 쉽게 산만케 됩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계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민감함을 가져야만 합니다.
D. "원하기 전에(영어로 Until it pleases)"라는 이 구절을 보면, 그 히브리어는 it, he, she 모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NAS(New American Standard) 번역에서는 정확하게 이 절을 "그것(it)이 원하기 전에는 사랑을 깨우지 말라" 대신에 "그녀(she)가 원하기 전에는 사랑을 깨우지 말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히브리어가 "그가(He)"로 번역되었다면 예루살렘 딸들에 의해 흔들리는 사람으로 주님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흔들리실 필요가 없는 분이며, 노루로 묘사된 온화함으로 보호받으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흔드는 것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이는 바로 신부입니다. 예수님은 세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원할 때까지 내 사랑을 흔들거나 깨우지 말아라." (아2:7, 3:5, 8:4) 8장 4절에서 예수님은 "(그녀를) 흔들지 말며" 라는 같은 구절을 이용하십니다. 그는 다른 두 구절(2:7, 3:5)에서와 같이 그녀를 안고 있지만, 이 세 번째 구절에서는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라는 말을 빠뜨리십니다. 이제는 신부가 성숙하여 쉽게 요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엡 4:14)
VIII. 요약 : 아가서 2:1-7에서의 7가지 믿음의 고백
A. 우리가 예배할 때이던지, 유혹 속에 있는 때이던지 우리는 아가서 2장 1-7절에 있는 7가지 신부의 고백을 선포합니다. : 나는 샤론의 장미입니다(2:1);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입니다 (2:1); 사람들 중에 예수님은 사과나무 같습니다 (2:3a); 나는 큰 기쁨으로 그의 그늘에 앉았고, 그의 열매는 내 입에 달콤합니다 (2:3b); 예수님이 나를 인도해 잔칫집에 들어가시며 내 위에 그의 깃발은 사랑입니다 (2:4);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습니다 (2:5);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그의 오른팔로 나를 안으십니다 (2:6)
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아2:1)
2.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아2:1)
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아2:3a)
4.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아2:3b)
5.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아2:4)
6.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아2:5)
7.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아2:6)
<출처: 카페선두주자/마이크 비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