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2010

제12강 신부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 (아2:1-7)

I. 신부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 : 예수님의 유업이 됨
A. 하나님 나라에서 기반이 되는 전제는 아버지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한가지 유업으로써, 예수님이 굉장히 갈망한다는 걸 아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유업은 어떤 면에서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께 의무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 이상을 원하십니다. 자발적으로 사랑 안에서 예수님과 같은 멍에를 지기로 선택하는 영원한 동반자, 혹은 신부를 갈망하십니다(5:31-32;19:7-9).

B. 예수님의 신부는 모든 세대 중에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최고의 상급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애정은 하나님의 가장 귀중한 소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려 죽으셨고, 그리하여 사람들의 애정을 소유하십니다. 우리가 창조되고 구속된 이유는 온 맘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에 예수님의 유업으로서 살 수 없다고 우리의 마음을 공격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4:23)

C. 성령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첫 계명을 첫 번째 위치로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첫 계명은 하나님께 가장 첫 번째 우선순위를 갖기에 첫 계명인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옵션"이라 불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우리가 살 수 있는 가장 높은 삶의 방식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까지)에 영향력을 강하게 주기에 이것은 위대한 계명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22:37-38)

D.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이 세대에 그의 신부로서 준비 되어 질 것입니다. 마지막 세대로서 교회가 갖는 능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름부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서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15:2-4).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그 사랑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초자연적인 능력을 포함합니다.

...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19:7)

E. 신부는 아름다운 장미(샤론의 수선화)와 순결한 백합(골짜기의 백합화)으로 묘사되는데, 삶의 주된 목적과 정체성은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장미)하며, 순종(백합)하려고 간구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장미는 그 아름다움과 향기로 꽃들 중 최고로 꼽힙니다. 백합은 순결을 의미합니다. 골짜기는 이 타락한 세상의 낮고 어두운 곳을 가리킵니다. 신부는 타락한 세상의 어두운 골짜기의 중심에서 순결함으로 살아갑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2:1)

F. 시적인 언어로 신부는 자신의 삶의 주목적과 정체성이 예수님의 유업이 되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장미와 백합은 아가서 2:2에서 신부로 불리어진 자들과 같은 사람들 입니다. 왕은 그녀를, 죄를 지칭하는 골짜기와 가시나무들 사이의 백합화로 봅니다. 가시나무는 아담의 죄로 인한 저주의 결과로서 자라난 것입니다(3:17-18;6:8).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2:2)

G. 우리는 예수님을 매혹시키는 사랑과 순종의 향기가 피어나는 장미이며 백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갈망하시는 단 하나의 상급입니다. 우리가 창조되고 구속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유업으로써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장미), 순종하는(백합)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쁨과 즐거움을 드리는 것입니다.

H. 신부의 첫 번째 고백은 마음속에 어둠이 있지만 자신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는 아름답다는 것이었습니다(1:5). 신부는 "나는 예수님이 갈망하시는 유업이다,"라는 고백 안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이 계시는 아가서 1:12-17 안에 있는 진리들을 본 후에만 옵니다.

I. 우리는 "하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약속한 유업이 바로 우리"라는 계시를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17,18)

J. 우리는 사랑과 순종을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유업은 순결함으로 살아가는 일단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선택들은, 아들을 높이고 상주실 아버지 계획의 실제적인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키우는 장미와 백합으로 우리를 선택하심으로 우릴 위해 많은 것을 지불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고난의 보상입니다. 많은 믿는 자들이 순결함으로의 부르심을 율법주의라 치부함으로 경시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사랑하는 자니...(14:21)

K.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가치를 두고 성공을 가늠하는 방법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는 누구이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지?" 우리의 기능적 면(사역)은 중요하긴 하지만, 정체성이 먼저입니다.

L. 우리의 주된 정체성(가치/성공)은 우리가 하나님과 갖는 친밀감- 즉 하나님께 사랑 받으며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안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랑 받으며(하나님께), 또 사랑하는 자(하나님/다른 사람들을)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M. 우리가 얼마나 성취하는지로 혹은 우리가 끼치는 영향력으로 우리의 주된 가치를 찾는 대신에, 하나님의 갈망하시는 존재이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우리의 정체성, 혹은 성공을 찾습니다. 우리는 가장 성공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 갈망하시는 바이며,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N. 우리의 주된 정체성은 우리 손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무엇을 따르느냐 입니다. 우리가 그의 장미이자 백합인 것을 보는 것은 무의미함과 실패감, 그리고 열등감을 부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그와의 친밀감 안에서 얼마나 자라고 있는지를 가지고 우리의 성공을 가늠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귀함과 그 사랑이 얼마나 하나님께 중요한지를 보는 계시를 갖게 해줍니다.

O. 우리는 반드시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에 동의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무엇이 성공인지에 대한 거짓말에 동의함으로써, 실패했다고 느끼고, 목적 없이 삽니다. 그들은 대부분 내적인 것-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도록 되어있는지-대신에 외적인 것-무엇을 하고, 소유하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신의 삶을 분투와 영향력의 부족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의 사역을 앞세운 사람들을 교정하셨습니다.

또 네가...내 이름을 위하여...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2:3-5)

P.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과 약혼한 상태이고 헌신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칠 때 아가서 2:1절의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이 시대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은 그의 유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2,3)

II. 신부의 계시: 오직 예수님만이 신부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다 ( 2:3a)
A. 신부는 오직 예수님 만이 자신의 마음을 시원케 할 (완전히 만족시킬) 사과나무인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 2:3a)

B. 사과나무는 시원케(refreshing)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 2:5)

C. 가장 높은 수준에서 사람의 영을 새롭게 하는 단 한 분이 여기 계십니다. 예수님이 사과나무인 것, 즉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만족시키는 주된 근원이 되시는 것에 대한 계시를 받고 나서야 우리는 모든 마음을 다해 그분을 찾게 됩니다. 이것은결혼, 사업, 그리고 사역의 영역에서 기초가 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구세주나 치료자, 공급자 그 이상이 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족을 주시는 사과나무이십니다. 어떤 이들은 기쁨의 주된 근원을 사역, , 그리고 관계로 헛되이 바꾸어 버립니다.

D. 예수님은 이 지구상의 모든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과나무 같은 분이십니다. 숲들(수풀)의 나무들은 상징적으로 이 지구상의 위대한 사람들 즉, 우뚝 솟은 나무들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이들을 말합니다. ( 4:10-14)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 ... (2:12,13)

III. 신부는 하나님의 임재를 즐깁니다. : 왕 앞에 앉기 (2:3b-4)
A.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아래 앉아 있을 때, 예수님은 마리아 삶의 지혜를 선포해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성경에 세 번 묘사되는 데, 매번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있습니다 (10:39, 11:32, 12:3). 예수님은 그의 발 아래 앉는 것을 "필요한 한가지" , 살아갈 "좋은" 길을 택하는 것이라고 (10:42) 부르시면서 그 중요성에 대한 논란을 영원히 끝내 버리셨습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헌신으로 사는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구도 우릴 위해 선택해주지 못합니다. 이 좋은 편은 아무도 마리아에게서 빼앗아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선택은 예수님에게 영원히 기억하심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0:39-42)
   
B. 예수님 발 아래 앉았던 베다니의 마리아와 같이 우리도 반드시 예수님 앞에 앉아 그의 시원케 하는 그늘, 즉 이 타락한 시대의 내리쬐는 열기로부터 우릴 보호할 그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의 말씀으로 먹여지고 그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영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들 중 하나입니다. 말씀은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 끊임없이 영과 진리로 예수님을 마음껏 즐길 모든 자들에게 달콤합니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2:3b)

C. "당신이 양떼를 먹이는 곳이 어디입니까?"(1:7) 라고 신부는 물었었는데, 그녀는 아가서 1 12-17절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왕의 잔칫상에서 마음껏 즐기며 먹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의 내리쬐는 열기를 가리워주는 유일한 나무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그늘 안에서 쉬는 것만이 우리로 하나님 말씀의 그늘을 즐길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의 성숙함에 기초해 얼마나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고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에는 안식이란 없습니다.

D. 우리는 기도-읽기(묵상)의 방법으로 말씀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마음이 새롭게 될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유업은 하나님 말씀의 달콤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몇 명만이 아닌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이 달콤함은 모든 믿는 자의 손이 쉽게 닿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의 말씀으로 먹여지는 것, , 사과나무 그늘에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 없이는, 절대 그 즐거움과 사과나무인 예수님이 우릴 시원케 하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E. 우리는 말씀 안에서 그를 찾는 것으로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하나님 임재의 횃불 아래 내려놓습니다. 심지어 원수(, 좌절, 어려움 등등..) 앞에서도 말씀으로 우릴 먹이실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23:5)

F. 만약 견실히 성숙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겨야 합니다. 만약 그의 임재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면 굉장히 큰 어려움을 통과 할 때도 인내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일하는 자보다 항상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일하는 자가 사랑하는 자가 될 때, 일에 대해 생각하는 틀에 굉장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즐기는 것 없이 수 십 년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IV. 신부의 삶 위에 예수님의 깃발 : 사랑으로 지도하심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2:4)

A. 고대의 세계에서는, 군대는 특별한 깃발 혹은 현수막 아래 대군으로 행진했었습니다. 각 부대는 명확하게 그들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고유한 깃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정체성을 보여주는 우리 삶 위의 깃발은 예수님의 선하신 지도력(지혜롭고, 사랑으로 하며, 능력이 많은)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유업(신부)으로써의 정체성과 사랑 안에서 자라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B. 우리는 하나님의 베푸신 잔칫상에서 마음껏 즐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 부르심은 어린양의 혼인잔치(19:7)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말씀의 능력으로 "혼인 잔칫상"의 의미와 유익을 이 시대의 우리가 누리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포도주의 집(유대인이 결혼하고 피로연을 하는 장소)"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축하하는 의식에 관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C. 예수님은 믿는 자들 하나 하나를 위해 선하시고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의 잔칫집, 즉 그의 사랑을 축하하는 장소로 우릴 데려가시려 합니다.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시는 그의 지도력의 주된 목표는 우릴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축하할 잔칫집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이 우리의 사역을 어디로 이끄시는지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를 "혼인 잔칫상"에서 먹이시려, 즉 그리스도의 신부로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로 먹이시기 위해 조금의 실수도 없이, 먼저 이끌고 계십니다.

D.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님의 지도력은 우릴 향한 그의 사랑이 계시되는 동시에 예수님 사랑이 우리 안에 나누어지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우리가 사랑, 온유함, 그리고 계시 안에서 자라게 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 삶에 첫 번째 우선순위는 안락함 혹은 사역에서의 역할 같은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들 삶 위에 하나님의 깃발이 안락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한 혼란 속에 있습니다.

E. 하나님의 연인인 우리의 주된 정체성과 함께 우리가 그의 유업이라는 계시로 우리가 힘을 얻게 되기를 예수님은 원하십니다. 이 일은 "혼인 잔칫상"에서 우리가 그의 말씀으로 먹을 때 일어납니다. 꿈과 환상을 주셔서 우리 마음을 그의 사랑으로 뒤흔드심으로 "우릴 인도하여 잔칫집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생명으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친구관계의 기쁨도 주십니다.

F. 예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릴 인도하시는 그의 깃발을 나타내십니다.
첫째로, 우리 위에 깃발은 그의 인자하심(긍휼)입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우리 삶 위에 깃발은 하나님께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긍휼하심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내가 실패했을 때에도 내 위에 그의 깃발은 사랑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둘째로, 우리 위에 그의 깃발은 합력하여 선을 이룸으로(8:28) 우리 삶 속의 부정적인 환경들을 넘어서는 그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우리 위에 깃발은 소홀히 여기시지 않는 그의 선하심입니다.

셋째로, 우리 위에 깃발은 죄의 잘못된 안락함에 속는 것 대신에 하나님 사랑 안에서 즐겁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G. 그는 긍정적인, 그리고 부정적인 방법 모두를 이용해 우리를 잔칫상으로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로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질투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의 말씀으로 먹여지고, 순종함으로 자발적으로 그의 지도력을 따라 잔칫집으로 들어가는 긍정적인 방법입니다.

둘째로 부정적인 방법은 그가 잔칫집으로 인도하려 찾으시는데 우리가 그의 지도력에 저항할 때 보여집니다.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우리에게서 어떤 것을 가져가시며, 이리 저리 문을 닫아 좌절함으로 훈계 받도록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V.  사랑의 병이 난 신부는 하나님과의 더 큰 만남을 위해 부르짖는다 (2:5)
A. "혼인잔칫상"에서의 경험은 하나님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신부의 더 강한 갈망이 일어나게 합니다. 이 경험들은 신부로 하여금 사랑으로 병이나 하나님께 부르짖게 합니다. 더 많은 그의 임재와 말씀을 주셔서 힘을 주시며 시원케 하시길 간구합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2:5)

B. 사과가 예수님의 시원케 하심을 의미한다면(2:3), 건포도는 말린 포도로, 성령님의 사역을 말해줍니다. 포도는 상징적으로 성령님의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의 더 많은 것으로 내 힘을 돕고 예수님의 더 많은 것으로 나를 시원케 해주세요" 라고 신부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C.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병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깊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사랑의 감정과 예수님에 대한 더 많은 갈망을 소유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이것에 접촉될 때, 하나님과 함께 행할 때에 "일상적인 일"의 모습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신부는 황폐케 됩니다. 영적인 상사병(lovesickness)의 두 가지 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첫째로, "사랑의 감정들"은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을 사랑합니다.

2. 두 번째로, "영적인 배고픔의 고통"은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실 하나님의 그 모든 것으로 살고 싶은 비전 때문에 생깁니다. 하나님은 즉시 우리를 채워 만족시키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몹시 괴로운 배고픔으로 고통스러워 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병이 난 것은 적어도 인내하는 것 같은 어떤 것으로도 충족되지 않습니다. 이 절망적인 배고픔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지시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4)

VI. 하나님의 이중의 포옹을 경험함 (2:6)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2:6)

A. 신부는 그녀의 삶에 하나님이 2가지 활동 - 그의 오른손과 왼손으로 역사하심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왼손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 머리 밑에 있기에 가리워져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우릴 위해 행하십니다. 주님은 우릴 복주고, 공급하고, 보호하시기 위해 많은 것들을 막고 또, 푸십니다. 우리가이 시대에는 깨달을 수 없는 여러 문제들로부터 우릴 보호하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여러 사고들(accidents)로부터 구해져 왔으나 우리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오른손은 볼 수 있는 혹은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해줍니다. 솔로몬이 신부를 안으려고 그녀 앞에 서 있는데, 신부는 이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달콤한" 하나님의 임재가 느낄 수 있고 인식할 수 있게 명백히 나타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오른손의 역사로 부드러워 지는 것을 느낍니다.

VII. 성령은 전략적인 영적 계절(season)에 우리를 보호하십니다(2:7)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2:7)

A. 성령은 이 부분에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각 사람의 영적 삶 가운데 전략적인 계절을 정해 오셨습니다. 이런 계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그의 심장에 대한 새롭고 깊은 계시 안에 세워가길 간절히 원하시는 때입니다. 이 계절에 성령님이 신부를 향해 가지시는 계획은, 잔칫집에서 사과의 건포도로 먹여주실 때처럼 신부가 말씀으로 깊숙이 들어갈 때, 그녀 안에 있는 사랑으로 애타는 마음이 깨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2:3-5)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과 그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므로 헌신하는 계절이 필요함을 보지 못합니다.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음성, 즉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10:9-11).

B. 예루살렘의 딸들은 믿는 자들 중, 다양한 성령의 운행하심과 하나님 안에서 각기 다른 계절이 있음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전략적인 계절에 성령님은 다른 믿는 자들이 신부의 마음으로 헌신된 자들을 자신의 의견과 판단으로 흔들어 혼란스럽게 하지 말 것을 엄중하게 부탁하십니다. 아가서 2:8에서 분명하게 보여 지는 것 같이 예수님이 계절이 바뀔 때(때가 되었을 때) 우릴 흔드실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분의 방법에 둔감한 자들에게 신부를 이 특별한 계절-말씀과 성령이 잔칫상에 앉은 신부의 힘을 돕고, 시원케 하는 이 때-에 방해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덜 찾고, 사역의 활동을 늘리라는 권면 한가지만을 갖고 이들을 바라봅니다.

C. 솔로몬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그들에게 부탁했습니다.(2:7)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라는 것은 이러한 계절에 어린 신부와 관련해서 온화함과 민감함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노루와 들 사슴은 민감한 본성을 가졌고, 쉽게 깜짝 놀라 달아납니다. 많은 이들이 말씀에 잘 집중하지 못하고 쉽게 산만케 됩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계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민감함을 가져야만 합니다.

D. "원하기 전에(영어로 Until it pleases)"라는 이 구절을 보면, 그 히브리어는 it, he, she 모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NAS(New American Standard) 번역에서는 정확하게 이 절을 "그것(it)이 원하기 전에는 사랑을 깨우지 말라" 대신에 "그녀(she)가 원하기 전에는 사랑을 깨우지 말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히브리어가 "그가(He)"로 번역되었다면 예루살렘 딸들에 의해 흔들리는 사람으로 주님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흔들리실 필요가 없는 분이며, 노루로 묘사된 온화함으로 보호받으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흔드는 것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이는 바로 신부입니다. 예수님은 세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원할 때까지 내 사랑을 흔들거나 깨우지 말아라." (2:7, 3:5, 8:4) 8 4절에서 예수님은 "(그녀를) 흔들지 말며" 라는 같은 구절을 이용하십니다. 그는 다른 두 구절(2:7, 3:5)에서와 같이 그녀를 안고 있지만, 이 세 번째 구절에서는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라는 말을 빠뜨리십니다. 이제는 신부가 성숙하여 쉽게 요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4:14)

VIII.  요약 : 아가서 2:1-7에서의 7가지 믿음의 고백
A. 우리가 예배할 때이던지, 유혹 속에 있는 때이던지 우리는 아가서 2 1-7절에 있는 7가지 신부의 고백을 선포합니다. : 나는 샤론의 장미입니다(2:1);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입니다 (2:1); 사람들 중에 예수님은 사과나무 같습니다 (2:3a); 나는 큰 기쁨으로 그의 그늘에 앉았고, 그의 열매는 내 입에 달콤합니다 (2:3b); 예수님이 나를 인도해 잔칫집에 들어가시며 내 위에 그의 깃발은 사랑입니다 (2:4);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습니다 (2:5);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그의 오른팔로 나를 안으십니다 (2:6)

  1. 나는 사론의 수선화 (2:1)
  2.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2:1)
  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2:3a)
  4.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2:3b)
  5.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2:4)
  6.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2:5)
  7.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2:6)

<출처: 카페선두주자/마이크 비클>

제 11 강 신부의 패러다임 : 기초적 진리들 (아 1:12-17)

I. 1:5-17 개관
A. 신부는 예수님에게 “당신이 저를 어디서 먹여 주시나요?( 1:7)라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그녀에게 7가지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선언하는 것(1:8a), 그녀에게 3가지 가르침을 주는 것(1:8b,c,d), 그리고 3가지 확증(1:9-11)을 주는 것입니다.

B. 그녀가 예수님의 탁자에서 먹으면서 3가지 반응을 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어둡고 포도원처럼 지켜지지 못했다는 연약함 가운데서도 그녀는 예수님의 사랑을 신뢰합니다(1:5-7).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14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 1:12-14)

C. 그 때 그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에게 그녀가 아름답다는 계시는 더욱 증가되었습니다. 신부는 5가지 반응을 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잘 생긴(handsome; beautiful God) 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분(my Beloved)으로, 화창한(pleasant) 으로서, 그래서 현재적으로는 그녀의 사랑을 안식으로 인도하며, 언젠가는 그녀를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알게 됩니다(v.16-17).

II. 십자가 묵상 :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유익 ( 1: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 1:13)

A. 그녀는 예수님의 사랑과 그분이 십자가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공급에 대한 계시를 받습니다.

B. 몰약은 인도, 아라비아, 동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종류의 나무나 관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향기로운 진액입니다. 그것은 매우 값지고 향유를 만들 때 사용되며(7:17), 향을 태우는 거룩한 기름이며( 30:23), 사람을 장사지낼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19:39-40). 그것은 쓴 맛이 납니다. 세 명의 왕(동방박사)이 예수님의 탄생 때에 그분의 예언적인 죽음의 상징으로 몰약을 가져옵니다(2:11).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몰약을 제공받습니다(15:23).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합니다( 45:8).

C. 몰약은 우리의 육신적인 방식이 죽음을 직면할 때, 향기롭지만 비통한 실상을 말합니다.

D. 에스더의 아름다움을 위한 준비는 몰약과 다른 향품으로 목욕하는 것을 포함합니다(2:12). 몰약은 아가서에서 8번 언급됩니다( 1:13; 3:6; 4:6, 14; 5:1, 5, 13).

E. 고대의 어떤 부유한 여인들은 밤새도록 향기가 공급되기 위해서 몰약 한 묶음이나 목걸이를 착용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이 사치스럽고 값비싼 선물을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F. 신부는 예수님이 밤 동안 그녀의 품에 놓여진 한 묶음의 몰약과 같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왕 되신 예수님이 신부에게 주신 사치스럽고 값진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풍부한 헌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그분이 겪어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우리의 가치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견뎌내신 것 안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실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우리와 영원한 관계를 갖기 위한 길을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입니다

G. 몰약은 우리의 마음에 밤새도록 놓여 있습니다. 밤이라는 것은 그녀의 유혹과 시련의 어두운 시간을 의미할 뿐 아니라, 견디어 내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녀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H.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임 당하신 어린 양에게 영원히 놀랄 것입니다( 5:8-12). 우리가 그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실제로 볼 때, 영원토록 우리의 마음은 놀라고 감사로 압도될 것입니다. 끝없는 세대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놓여 있는 “한 묶음의 몰약”으로 볼 것입니다.

I. 우리는 밤낮으로 그것을 우리 마음에 가져 와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십자가를 묵상함으로 그분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1:4d). 가장 많이 순종하고 예배하는 성도일수록 십자가를 가장 많이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항상 묵상하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묵상하는 것을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지루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III.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대한 계시 ( 1:14)
A. 예수님은 그녀에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활짝 핀 고벨화 송이와 같습니다. 고벨화는 향기로운 꽃을 가진 관목이거나 작은 나무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마음의 계시를 가진 사람들에게 고벨화 송이와 같습니다. 그분은 종교에 의해 잘못 말해지는 그런 부담스럽고 지루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14)

B. 진리안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게 될 때, 그분의 계명은 부담스럽지 않고 그분의 멍에는 쉽습니다.

...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 11:30)

C. 예수님의 성품은 꽃들의 다발(송이)과 같습니다. 그분은 하나의 꽃이 아니라 다발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소유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강조합니다. 엔게디의 포도원들은 풍부한 향기로 유명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난 향기를 소유하셨습니다.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 5:16)

D. 우리는 예수님의 진리 즉 그분이 “고벨화 송이”와 같다는 것을 온 땅에 말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 진리를 이해하게 될 때 더욱 쉽게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친절이 가득하신 아름다운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해야 합니다. 그분은 복음으로 우리를 흥분시키시는 향기롭고 부드러운 하나님이십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약화)하느냐 ( 2:4)

IV. 신부가 왕의 식탁에서 잔치함 : 그녀의 예배가 일어남 ( 1:12)
A.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식탁을 제공하셨고(고전10:21), 그 곳에서 십자가와 우리가 의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오는 유익(고후5:21)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신부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그녀의 구원과 관련된 진리들을 먹습니다. 이 진리들은 그녀에게 향기가 올라가는 것과 같은 예배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탕자가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식탁에 앉을 때에 발견했던 진리들에 해당됩니다(15:20-28). 예수님의 두 번째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 1:12)

B. 그녀의 예배는 순전한 나드의 향기와 같이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순전한 나드는 문자적으로 “끝이 뾰족한 나드”를 말합니다. 나드는 값비싼 향유를 만들어 내는 인도에서 자라는 동양 식물입니다

C. 예수님이 우리를 먹이시는 것은 향유와 같이 우리 영으로부터 즉각적으로 올라가는 예배를 생산해 냅니다.

D.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것은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E. 누가복음 7장에서 한 창녀가 바리새인 시몬의 집으로 달려들어 옵니다. 그녀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발 위에 붓습니다. 방에 가득한 향기는 그녀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이 보셨던 향기를 말합니다.

F. 우리 영혼의 원수들의 목전에서 우리가 주님의 식탁 위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왕의 식탁에서 우리 영을 먹이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수치와 죄책감의 압력으로 인해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23:5-6)

G.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예수님이 소유하신 의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로서 간주하거나 알아야 합니다(고후5:21).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 자요, 죄의 심판에서 자유케 된 자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자로 드리면서 “당신의 의를 내게 주셔서 나를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정죄로 가득한 거지로 오지 마세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 하나님께 드리라 ( 6:11-13)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8:1)

H.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영으로부터 어떤 향기가 나옵니까? 하나님이 확신과 감사의 향기를 맡으시나요? “나는 마음이 어둡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나는 하나님께 사랑스럽다”라고 말하는 이해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향기로운 예배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하루 종일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I.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대적들을 위에 승리하신 위대한 왕이십니다. 왕은 우리에게 감정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왕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계획이 편만하게 될 것을 신뢰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모든 창조된 질서 위에 왕으로 다스리는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사랑이 결정하는 것을 건설하시는 권위를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위대한 왕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계획은 편만하게 될 것입니다.

J. 그녀의 3가지 반응의 요약( 1:12-14) : 첫 번째, 그녀가 왕의 식탁에서 먹을 때( 1:12) 그녀의 삶은 순전한 나드와 같이 올라가는 즉각적인 예배와 경배로 가득하게 채워집니다. 두 번째, 그녀는 항상 그녀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그분이 십자가의 몰약을 견디실 때 그녀를 위해 성취하신 것을 묵상하거나 먹이로 삼습니다(1:13). 세 번째, 그녀는 그분의 아름다움과 가득한 기쁨을 봅니다(1:14).
  
V.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계시 (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 1:15)

A. 이 단락에서 우리는 신부의 패러다임 안에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진리들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은혜와, 그 분이 “나의 사랑”이라고 부르시는 자로서의 그녀를 향한 그분의 감정에 대한 계시 안에서 그녀는 그분에게 아름답습니다. 그녀는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1:12-14). 이 기본적인 진리는 하나님에게 우리가 아름답다는 진리를 더 많이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구비시킵니다.

B. 우리가 연약함에도 하나님에게 아름다운 이유는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 우리의 사랑스러움은 의의 선물을 받음으로부터 나옵니다(고후 5:17-21).

두 번째, 거듭날 때 성령님이 우리 영 안에 하나님께 대한 “예”를 심어 놓습니다. 하나님에게 대한 우리 마음의 모든 움직임은 자원하는 영이라고 불리는 그분의 사역입니다( 51:12; 26:41).

세 번째, 우리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정서적인 성격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부드러운 감정들과 열정들은, 그분이 우리를 향해 어떻게 느끼시는가를 결정합니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이의 눈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물들을 사람이 보는 것과 매우 다르게 보십니다(삼상 16:7; 55:7-9).

네 번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의 렌즈를 통하여 우리를 보십니다.

C. 모든 신자들은 예수님이 “나의 사랑”이라고 부르시는 사람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각자를 사랑하고 추구하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나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요 그분이 사랑하시는 자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 15:9)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주님의 품에 의지하여...( 21:20)

D. 우리가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랑받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리의 마음은 흥분됩니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내가 연약할 때에도 예수님 때문에 나는 하나님에게 아름답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더 빠르고 깊게 성장할 것입니다. 신부는 처녀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We will remember Your love more than wine. (Song 1:4)
포도주보다 더 좋은 당신의 사랑을 기억할 것입니다 ( 1:4 의역)

E. 신부의 영적인 여정은 2가지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1:5). 나는 그녀가 그녀의 죄를 발견함과 동시에 그녀가 하나님께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은혜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값 없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더럽고 수치스럽다고 느낄 뿐입니다. 우리가 수치를 느끼는 동안 우리는 수치스러운 일을 계속 하게 될 것입니다. 더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더럽게 삽니다. 예수님에게 아름답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미성숙한 신자는 그분에게 달려가게 되고 멀어져 가지 않을 것입니다.

F.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알게 될수록 우리는 다른 이들을 향한 그분의 빼앗긴 마음을 더욱 더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합된 교회의 아름다움도 보기를 원하십니다. 관계의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이 모든 크리스천을 향하여 마음이 빼앗기신다는 지식 안에서( 4:9)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1:4d).

G. 개관 : 소개하는 방식으로 그녀는 “나는 마음이 어둡지만 하나님께는 사랑스럽다”라고 고백합니다(1:5).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너는 아름답고, 너는 나의 사랑이며, 너의 뺨은 사랑스럽다”라고 말하셨습니다(1:8a, 1:9b, 10). 그리고 나서 그녀는 예수님을 아름다운 분으로 보게 됩니다(1:12-14). 이제 그분은 “너는 아름답다”라고 강조하십니다(1:15).

VI. 신부는 비둘기 같은 눈을 가졌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 1:15)

A. 성경에서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것에 대한 내포된 몇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B. 한 마음(Single-minded) : 비둘기는 주변을 보는 시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앞만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좌우에서 일어나는 일에 쏠리지 않습니다. 비둘기의 눈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눈(Single-minded)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6:22)

C. 충성 : 비둘기는 그들의 생애에서 한번만 짝짓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짝이 죽으면 그들은 다시 짝짓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충성심을 말합니다. (: 만일 배우자가 죽었을 때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불충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D. 15절에서 그녀 자신을 하나님에게 아름다운 자로 보는 것의 결과는 더욱 더 하나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E. 성령님은 원래부터 비둘기의 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에게 한 마음이시고 충성스러우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에게 우리에게 비둘기의 눈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F. 관점 :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 삶에 대한 성령님의 관점을 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고벨화나 향기롭고 아름다운 분으로 보아야 하고, 우리의 순종에 있어서와, 모든 정죄를 거절함으로 확신을 갖게 되는 은혜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VII. 신부의 예배와 믿음 : 그녀의 5가지 반응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 1:16-17)

A. 하나님에게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는 계시에 대한 5가지 반응은 비둘기의 눈으로 보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잘 생긴(handsome) 분으로 보고, 그녀가 사랑하는 분 (Beloved) 으로 보고, 유쾌한 분으로 보는데, 그분은 그녀의 삶을 현재적으로 안식과 안정감으로 인도하고, 오는 세대에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합니다.

B. 그녀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잘 생기고 나의 사랑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아름다운 하나님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더욱 더 보게 되고 그분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될수록 그녀가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에 갖는 영적인 기쁨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16). 이것은 아가서 2:3-5절에서 더욱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름답고 유쾌한 분으로 볼 때 충만한 순종이 더욱 합당하게 여겨집니다.

C.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갖게 되거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기쁘고 즐겁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속적인 대화를 계속할 때(1:12-17) 우리는 이렇게 하게 됩니다. 상황이 어려울 때에도 우리의 영은 이러한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 15:9-11)

VIII.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 안식, 신뢰와 영광 ( 1:16-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 1:16-17)

A.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그녀에게 풍부한 안식과 그녀의 삶에 대한 확신을 가져옵니다(1:16). 신부는 “풍성한 안락 의자”에서나 푸른 침대에서 안식하고 있습니다. 푸른 들판은 때때로 풍부한 들판이나 넘치게 성장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주님의 안락 의자는 편안하고 푸르고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은 사막(황무지)이 아닙니다. 우리의 확신은 풍성한 안락 의자와 같이 풍부한 것입니다.

B. 주님의 안락 의자는 두 가지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안식과 확신입니다.

  1. 용서의 안식 :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의 은혜로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때 이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인해 용서를 받을 때 안식합니다.

  2. 친밀감의 안식 :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추구할 때 이러한 안식을 경험합니다. 우리 삶의 최고의 목적이 하나님과의 친밀감이라고 결론내리기 전까지는 안식이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과의 친밀감은 예수님의 지도력에 순종하는 지혜를 포함합니다. 어거스틴은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그가 안식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안식할 수 없다”라고 썼습니다.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용서의 확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적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거리낌 없이 나아가는 위대함을 거의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C. 우리가 정죄에 대한 두려움이나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설 때에 거리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신부의 패러다임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대한 확신과, 교회가 우리를 종교적이라고 부르고 세상이 우리를 어리석다고 할 때에도 우리가 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D.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혹은 아름다움과 능력으로 가득한 집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녀가 “우리의 침대나 안락 의자”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깊은 구원의 연합 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고전 6:17).

E. 그녀는 그들의 집의 들보는 백향목이며, 그들의 서까래는 잣나무라고 말했습니다(1:17). 들보와 서까래는 집을 위한 구조를 만듭니다. 집의 구조들은 숨겨져 있습니다. 백향목과 잣나무는 솔로몬 시대에 나무로 만들어진 가장 훌륭하고 값비싸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건축 자재입니다. 백향목과 잣나무는 성전을 건축하는데 사용되어졌고 그래서 그것의 구조는 부패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성전 안에 나무는 인성의 상징입니다.

F. 하나님은 견고한 집을 건축하십니다. 주님과의 거처는 강하고 탁월하고 견고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신부를 위한 훌륭한 집을 주실 수 있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집은 강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과 능력 안에서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그 집을 영원히 함께 하는 “우리의 집”으로 또는 그들의 거처로 봅니다.

너희는 ...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느니라 ( 2:19-22) 

너희도 ...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벧전 2:5)

<출처: 카페선두주자/마이크 비클>

제10강 영적인 위기와 함께 시작되는 신부의 여정 (아1:5-11)

I. 신부의 여정이 시작됨 : 은혜의 역설 : “검지만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비록 (마음이) 검으나 (하나님에게) 아름다우니(사랑스러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 ( 1:5-6)

A. 신부의 영적인 여정은 그녀의 2가지 믿음의 고백( 1:5)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진실한 신자에게 공통적입니다. 나는 이것을 “은혜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녀의 죄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녀가 하나님께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의 죄를 보게 할 뿐 아니라 그녀가 하나님께 사랑스러움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진실하지만 아직 약한 신자들을 지칭합니다.

B. 우리는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조차 하나님에게 아름답습니다첫 번째, 우리의 사랑스러움은 의의 선물입니다(고후 5:17-21). 두 번째, 거듭날 때 성령님은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에게 “예!(Yes!)”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에게 대한 우리 마음의 모든 움직임은, 자원하는 영이라고 부르는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51:12;  26:41). 세 번째, 우리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감정들과 열망들은, 그분이 우리를 향하여 어떻게 느끼는가를 결정합니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분의 눈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르게 사물을 보십니다(삼상 16:7; 55:7-9). 네 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영원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것이라는 부르심의 렌즈를 통하여 보십니다.

C.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승리의 3단계를 이해해야 합니다첫 번째,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우리의 진정한 의도는 우리의 승리가 시작되는 곳입니다두 번째, 우리는 아직 지속적인 투쟁을 하는 가운데 부분적인 돌파를 갖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에서는 승리하시만, 우리 삶의 특별한 영역 안에서 아직도 우리의 육신과 아직은 지속되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5:16-17). 세 번째, 욕망의 변화를 갖는 근본적인 돌파가 있습니다( 6:14-23).

II. 신부의 영적 위기 : 거절과 수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응시하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마음)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예수님)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 1:6-7)

A. 그녀는 아가서 1:6-7절에서 영적인 위기와 관련된 5가지 압력을 묘사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실패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낍니다. 그녀의 성난 형제들에 의해 거절 당합니다; 다른 포도원을 지키도록 요구되어서 과도하게 일하였습니다; 그녀의 포도원(마음)을 예수님을 위한 새로운 사랑을 가지고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예수님을 섬기는 일에서 멀어졌습니다.

B. 그녀는 그녀의 형제들을 “어머니의 아들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아가서 전반에 걸쳐(1, 6, 3:4; 11; 8:2,5) 어머니는 교회를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교회라는 대리자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다른 사람들은 교회와 그 지도자들과 새 예루살렘을 “어머니”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4:19, 26; 살전 2:6-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12:46-50).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로 말해집니다. 교회의 기초이신 예수님은 한 여인의 씨로부터 태어나셨습니다 ( 3:15). 속량된 이스라엘은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님을 출산한 “어머니”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2:5).

C. 아들들은 젊음이 넘치는 그녀의 열심에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열정적인 젊은 신자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영적으로 무감각한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왜 그들이 화가 났을까요?
첫째, 열심 있는 신자들은 영적으로 무감각한 신자들(단순하고 빈번하게 진정한 영적 열심을 율법주의로 빈번하게 오해하는)에게 정죄 받게 됩니다둘째, 훈련되지 않은 열심과 열심 있는 신자들의 교만은 종종 영적으로 무딘 지도자들을 화나게 합니다. 우리의 열심은 지혜와 겸손의 계절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새로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는 자들로 불려지는 방법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자만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높이고 그들이 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헌신을 표현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D. 그녀의 열심을 이용해 다른 포도원들(복수형)에서 그녀에게 많은 책임들을 부과함으로서, 그녀가 과도하게 일하게 하는 성난 아들들로부터 그녀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영적으로 탈진되었습니다. 탈진은 열심히 일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멍에로부터 오는데, 그것은 사역 안에서 성령과 함께 연결되지 않고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인해 지나치게 많은 책임을 떠맡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탈진에 이르게 됩니다.

E. 그녀는 다른 포도원들을 지켰으나 그녀 자신의 포도원(혹은 마음)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녀가 가장 많이 원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의 입맞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녀의 포도원이나 그녀의 마음의 정원은, 영적인 냉냉함, , 수치심의 잡초들로 숨막하게 되었습니다. 그녀 자신의 포도원을 돌보는 것은 그녀의 하나님과의 교제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성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마음)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 1:6)

F. 그녀는 멀리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에 고통을 느낍니다. 우리가 성령께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가 섬길 때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녀는 멀리서 목자를 섬기는, 얼굴을 가린 여인 같이 느낍니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 1:7)

  1. 고대의 사람들은 친근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에 베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왜 내가 길 바닥에서 일하면서,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당신과 가까이 있지 못하나요?” 이 두 가지 초점들은 그녀가 그렇게 사랑하는 목자로부터 멀리서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2. 그녀는 그분이 어디에 있든지 그분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의 달콤함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그분의 말씀의 입맞춤과 주님과의 침실 경험을 그리워합니다.

III. 예수님을 더욱 얻기를 열망하는 그녀의 부르짖음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예수님)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 1:6-7)
 
A. 위기 중에 그녀는 간절한 기도로 부르짖습니다. 그녀는 말씀의 입맞춤과 침실 경험을 기억합니다. 그녀는 위대한 목자의 충고를 요구하며 “당신이 어디에서 당신의 양떼들을 먹이시는지 나에게 말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사랑스럽다는 확신을 갖는다면, 우리가 이러한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요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그녀는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면서 “나의 사랑하는 당신이여, 나에게 말해 주세요.”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한 사랑에 그녀가 실패했음을 압니다. 연약한 사랑이 거짓된 사랑은 아닙니다.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실한 연인입니다. 그녀는 원수가 그녀에게 믿게 하는 것과 같이, 가망성 없는 위선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심지어 그녀의 위기와 영적인 단조로움 중에서도 자신의 사랑은 진실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2. 그녀는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위선자이기 때문에 나에게 말해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나는 내가 하나님의 연인이라는 것을 압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 내가 당신을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부르짖을 때와 같습니다.

B. 그녀는 예수님과 만나기에 간절했습니다. 사역적 활동과 심지어 승진도 충분한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당신의 양떼를 먹이시는 곳을 알기 원합니다. 이것은 “나를 이끌어 주세요”라는 그녀의 기도의 하나의 표현입니다.

C. 정오에 대낮의 햇볕 속에서, 배가 부를 때, 양들은 누워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위해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낮의 햇볕이나 이러한 삶의 압력들 중에서 우리가 쉬기를 원하십니다. 양들은 배부를 때 정오에 누워 있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워 있게 하시며... ( 23:2)

D. 그녀는 목자의 언어로 그녀의 기도를 드립니다. “낮의 햇빛의 압력 아래서 당신이 나를 어디서 만족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양들이 정오에 쉬는 것처럼, 그녀는 예수님으로 더불어 만족스럽게 되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먹이고 있지만, 이제 나는 당신이 저를 먹이시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나의 영의 부르짖음을 만족케 하시는 곳은 어디인가요?

E.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기를 열망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포기하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무미건조한 삶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자신을 가망성 없는 위선자처럼 기록해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신이 이전과 같이 나를 먹여주세요. 나는 얼굴을 가린 여인입니다. 나는 멀리서 당신을 섬깁니다. 나의 포도원은 잡초가 무성합니다.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나는 실패했고 사람들은 내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만나기 원합니다”라고 부르짖을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녀는 어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그녀를 다시금 타오르게 할 하나님과의 친밀감의 불을 원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부르짖습니다.

IV.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응답 : 7가지 본질적인 진술
여인 중에 어여쁜(너무 아름다운)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 1:8)

A. 예수님은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고( 1:7), 인격적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1:8-11). 주님은 그녀가 그분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7가지 진술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그녀가 그분의 눈에 아름답다는 것을 확증해 주셨고, 그 다음에 3가지 응답(1:8b,c,d)을 주셨고, 그런 다음 3가지 확증(1:9-11)을 주셨습니다. 그녀는 커다란 감사로 반응합니다( 1:12). 거룩한 열정의 신학의 필수적인 부분이 예수님의 응답에서 발견되어집니다. 이것은 신부의 여정에서 예수님이 그녀에게 주시는 첫 번째 계시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놀라운 모사(상담자)”나 목자로서, 연약함 안에서 어떻게 전진해 가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을 주시는 분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B. 그분은 신부를 “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십니다. "어여쁘다"(fair)는 단어는 대부분의 다른 성경번역(NAS/NIV)에서는 “아름답다”(beautiful)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너의 동산에 잡초들이 있고 너는 나를 멀리서 섬기고 있으나 나는 나를 사랑하는 네 마음의 부르짖음을 보고 있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분 안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그녀의 마음을 열렬히 구하고 있습니다.

C. 예수님은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시작하십니다. 그의 대답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우리는 책망을 기대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정원이 지켜지지 못하였음과 우리가 멀리서 그분을 섬기는 것, 그러나 우리는 그분에게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갈피를 잡지 못하거나 실패할 때에도 우리를 아름답다고 말해 주십니다. 우리가 성난 아들들에게는 아름답지 못할 것입니다만 우리는 그분에게 매우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경멸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분에게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분은 그녀의 수치와 거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D. 예수님은 그녀를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러 주십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여인들이나 예수님을 경멸하는 잘못된 종교의 빛입니다. 그분은 그녀를 성숙한 사도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는 이 땅의 5-6십억의 사람들의 빛 안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매우 사랑하고 의의 선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E. 1:4e에서 신부는 딸들에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함 중에도 그녀를 어떻게 보시는지 말씀하시면서, 그녀로 하여금 그분의 사랑을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를 부르시면서 “너무 아름답다”라고 하시고, 위기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F. 어디서 그분이 양떼를 치시는지 그리고 어디서 하나님과의 친밀감 가운데 우리를 채우시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3가지 대답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살아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3가지 가장 강력한 유혹에 대한 응답과 같이 3가지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살아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 1:8)

1. 몸에로의 삶에 헌신 (8c) : 불경건한 격리에 대한 거절
2. 섬기는 사역에로 헌신 (8d) : 불경건한 게으름에 대한 거절
3. 영적 권위에 헌신 (8e) : 불경건한 독립에 대한 거절

G. 이끄시는 것(drawing)은 친밀감(intimacy)이기 때문에 단수(singular)입니다. 달려가는 것(running)은 사역이기 때문에 복수(plural)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립이나 게으름 또는 독립의 영을 가지고 사역하면서 달려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H. 첫 번째, 불경건한 고립을 거절하면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의 삶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1:8c). 그분은 그녀에게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오라고 또는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양떼의 발자취’는 모든 양들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장소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이 걸어가는 곳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교제 가운데로 돌아오라. 너를 판단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는 성난 아들들에게 과도하게 반응 하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너무 고립되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갈망이 아니라, 거절, 쓴 뿌리, 수치로부터 기인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고립되어 자신을 파괴하기를 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 ( 10:25)

I. 두 번째, 불경건한 게으름을 거절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1:8d).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신 어린 양 떼를 먹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내 주신 어린 양 떼 즉 어린 이들을 먹여야 하는 책임을 받아들일 때, 그분 자신에 대해서 보다 많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J. 세 번째, 불경건한 독립성을 거절함으로써 영적 권위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진정한 목자의 장막 옆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섬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 아래 두신 목자(지도자)들에게 열린 영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불법의 영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24:12). 하나님은 현재 당신 위에 두셨거나 앞으로 두실 모든 지도자들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지도자와 관계하면서 예수님을 깊은 방식으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지도자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다루시며 우리 마음에 정리되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위에 세워두신 불완전한 지도자의 잘못을 볼 때, 우리는 가르침을 잘 받는 영으로 그들의 장막에 거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순복은 겸손과 관련되며, 권위에 대해 열린 영을 갖는 것입니다.

K. 요약 : 예수님의 3가지 대답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3가지 주된 유혹을 다루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우리가 자신의 죄로 인해 수치를 느낀다거나 성난 아들들에 의해 부당하게 대우받고 거절 당할 때, 고립과 쓴 뿌리의 유혹입니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기심과 두려움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자를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섬기는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잘 만날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영적 권위에 저항하려는 유혹입니다.

V. 그녀의 진실함이 주님에 의해서 확인되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 1:9-11)

A. 1:9-10에서 그분은 그녀가 지닌 하나님 앞에서 진실됨과 자원하는 영의 사랑스러움을 재확인 하시는 3가지 것으로 그녀를 비교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아 1:11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첫 번째 일은 그녀를 “내 사랑”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녀의 마음에 확증을 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녀의 마음에 사랑을 가지고 다시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B. 의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그녀의 진실되고 강한 열망을 보십니다. 그녀는 바로의 병거 안에 있는 준마와 같습니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 1:9)

  1. 준마는 말입니다. 말은 힘과 능력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의 안에서 그녀의 힘을 말합니다. 바로의 병거는 세상에서 가장 잘 훈련되고 준비된 말입니다. 그분은 그녀의 힘을 그렇게 비유하십니다.

  2. 바로의 병거는 세상에서 가장 잘 준비되고 강력한 전쟁 말입니다. 이집트의 말은 당시 전 세계에 그렇게 알려졌습니다. 바로는 세상에서 최고로 훈련되고 준비된 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병거를 끌기 위해 이집트의 모든 말들 가운데 최고를 선택했습니다. 바로에게는 자신의 마구간에 수천의 말들이 있었고 자신의 병거를 끄는 것은 그 가운데 최고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던 솔로몬은 바로의 말들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만 한 여유가 있었던 소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C. 우리의 감정은 그분에게 매력적입니다. 그분은 성령님으로 우리의 감정을 만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감정적인 차원을 예수님에 대한 신실한 그녀의 헌신으로 만지십니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 1:10)

  1. 뺨은 아가서 가운데 감정을 의미합니다. 뺨은 분노, 기쁨 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뺨을 볼 때, 우리는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는지 혹은 분노나 슬픔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감정은 빰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2. 장신구(땋은 머리털로 번역됨)는 그 대상을 아름답게 하려는 예술가의 좋은 손 재주에 의해 창조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려고 일하고 계신 예술가이십니다( 61:3). 비록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음욕과 분노를 보시지만, 우리 안에 그분을 향해 자라가는 열정 또한 보십니다. 하나님은 “너의 감정은 사랑스럽구나. 내가 네 안에 솜씨 좋게 일하면서 나의 아들에게 “예!”가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D. 하나님은 그녀가 그분의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것과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단호한 그녀의 의지를 보십니다.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 1:10-11)

  1. 목은 상징적으로 의지를 나타냅니다. 성경은 목이 곧은 사람들 즉 강퍅하고 반항적인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목은 또한 거룩한 순종을 말하기도 합니다. 목은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어느 길로 갈 것인지 선택하면서 머리를 돌리게 하는 부분입니다. 왕이 다른 나라를 이겼다면, 정복한 장군은 순복을 나타내기 위해 패배한 나라의 왕이 목을 밟습니다.

  2. 금 사슬은 왕적인 권위를 말합니다. 오직 왕만이 금 사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왕 곁에서 금 사슬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금 사슬은 왕권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진귀하고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왕의 상징이 새겨진 금 사슬은 오직 왕자만이 도시를 거닐면서 걸칠 수 있었습니다.

VI. 그분이 시작하신 것을 마치기 위한 주님의 약속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 1:11)

A. 금으로 만든 장신구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합니다. 금과 그녀의 성품은 그리스도와 같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불로 연단된 성도를 뜻합니다( 3:1-4). 은이 박히는 것은 속량을 뜻합니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속량을 전합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B. “우리가 만들리라”라는 것은 그녀 안에서 그분의 일을 마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당신은 나를 어디서 먹이실 것인가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온전히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은으로 준비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넘어지는 부분에 승리를 약속하셨고, 우리가 다른 이들의 속량에 관여하는 자들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출처: 카페선두주자/마이크 비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