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2010

제9강 마음은 검지만 하나님에게 사랑스럽다 (아가서1:5)




I. 우리의 여정은 은혜의 역설로 시작된다 : 검지만 사랑스러움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1:5)

A. 신부의 영적인 여정은 믿음의 2가지 고백에서 보여 지는 것과 같은 영적인 위기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은 모든 진지한 신자들에게 공통적인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은혜의 역설”이라고 지칭합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신의 죄를 발견하면서, 동시에 그녀가 하나님에게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그녀의 죄성을 보게 하심과 동시에 그녀가 하나님에게 사랑스러움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진실하나 아직 연약한 신자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B.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더욱 알게 되면서,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진리의 결합은 우리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신뢰와 감사 안에서 성장하게 합니다.

  1.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어떤 흐름들은, 우리의 마음이 검고 우리가 죄가 매우 많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강조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확신을 파괴하고, 신자들을 수치로 몰아가게 합니다. 그들은 회개함에 신실하지만, 수치로 인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정서적으로 마비됩니다.

  2. 우리가 행하는 빛의 정도가 각자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소유하고 계신 빛의 충만함 안에서 사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갖고 있는 빛의 충만함 안에서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걸어갈 때, 하나님은 그것을 증가시키셔서 우리로 우리 마음 안에 어두움의 더 많은 것들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우리의 가장 진실된 노력 조차도 흠이 많고 깨지기 쉽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하기를 진실하게 추구하는사람들도 그들의 연약함 때문에 그들의 부르심으로부터 실격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조차 하나님에게 사랑스럽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적인 미성숙함 안에서 우리를 향하여 친절하십니다.

C. 예레미야는 인간의 마음 안에 죄의 깊이와 기만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욱 커다란 죄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표면 아래 이미 숨겨진 단층이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 17:9)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4:22)

D. 성숙한 사도 바울도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묘사했습니다. 이것은 그릇된 겸손으로 사치스럽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 많은 빛을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 안에 더 많은 어두움을 보게 됩니다.

...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 (딤전 1:15)

E. 연약한 육신에 대한 지식은,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진리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중요한 진리의 측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 죄의 깊이에 대해서 아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발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죄를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선포하시는 그 순간에 그것(우리의 죄의 깊이)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에 전념하시느라, 우리 죄의 중대함을 나중에 이해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F.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죄지을 때 놀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슬픔에 압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우리가 놀랐기 때문에, 하나님도 놀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동기는 그분의 마음 안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어떤 영역 안에서 실패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전제들을 제시함으로 하나님을 유도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과 관련되시려 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단지 자기 마음의 어두움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회개에 대해 극단적으로 진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느끼시는 즐거움과 기쁨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H. 그들은 “포도주보다 더 좋은 사랑”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실한 마음이지만 하나님 앞에 닫쳐진 영을 가집니다. 닫쳐진 영은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지만 제발 나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내가 이 죄를 다시는 짓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들은 지속적으로 그분과의 관계를 협상합니다. 요점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이 은혜 안에서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나누어 주는 방식을 이해할 때, 우리는 “나는 검지만 사랑스럽습니다. 나는 죄지은 것을 알지만 당신은 나에게 마음이 빼앗기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이것은 견고한 확신의 위치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달려가게 하는 능력을 주며, 우리가 실패하여 넘어질 때 그분으로부터 도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II. 왜 우리는 연약할 때에도 하나님께 아름다운가? : 4가지 이유
A. 우리는 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사랑스러움은 의의 선물 즉 예수님이 소유하신 것과 같은 아름다운 흰 옷으로부터 나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랑스럽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 때문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측정하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17-21)

B. 우리는 자원하는 영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중생할 때, 성령님은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 영 안에서 예!(Yes!)”를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행동의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그것에 동의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 영안에서의 예!(Yes!)”는 그분께 아릅답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 마음의 모든 움직임들은 자원하는 영이라고 불리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다윗은 자원하는 영을 주셔서 붙들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 51:12)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 26:41)

C. 하나님 성품의 성격. 우리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감정적인 특성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감정들과 열망들에 의해,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느끼시는가가 결정됩니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분의 눈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름다운 이유는, 바라보시는 그분의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원하는 영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이 매우 화가 나셨다면, 그분이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사람들을 보시는 방식은, 그분의 마음 안에 있는 것으로부터 흘러 나옵니다. 그분의 관점에 의해 누가 그리고 무엇이 아름다운가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셨던 것과 같은 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들은 우리를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물을 보시는 관점은 사람들과 다릅니다.
 
...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55:7-9)

D. 예수님의 신부로서의 우리의 영원한 부르심. 예수님과 보좌에 함께 앉은 신부로서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수십 억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의 관점(렌즈)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III. 베드로는 처음에는 갈등했음 : 검지만 사랑스러움, 약하지만 자원함
A.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22:31-34).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늦은 저녁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속량 받은 자(the redeemed)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어떻게 작용되는지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서술을 주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 26:41)

B. 베드로는 “연약한 육신” 때문에 실패하여 넘어졌으나, “자원하는 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열망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 번역들은 “육신이 약하다”라는 구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NIV 성경 번역본은 이 구절을 “몸이 약하다”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 안에 작동하는 죄의 원리를 언급하는 것이지, 밤이 늦었기 때문에 그가 피곤한 것을 언급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C.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시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위기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IV.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그의 실패로 인해 절망함
A. 왜 베드로는 물고기 잡으러 갔을까요? 예수님이 죽으신 직후 사도적인 팀에 돈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가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이 아닙니다(이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지 단지 8일 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유다가 돈궤에서 훔쳐서 사용했던 것 외에 충분한 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베드로는 재미 삼아 물고기를 잡지 않았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 21:3)

B. 베드로는 사도로서의 지도력을 주신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물러나, 물고기 잡는 가족들의 직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변하여 이전의 직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사도적인 지도력으로 부르시기 전에 그 직업은 그에게 성공적이었습니다. 왜 그가 돌아갔을까요? 그가 젊은 여종 앞에서 예수님에게 신실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일생동안 신실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는 “나는 사도로서 신실해야 하는 가중된 압력을 없다면, 어부로서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C. 그는 사도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면서, 그의 마음은 자신의 실패에 의해 상처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을 실망시켜 드렸다고 느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을 대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대신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D. 우리의 죄 많은 육신을 발견하는 위기의 때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항상 실패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높은 것에 접근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럽다고 단정 짓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높은 비전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여러 번 부족하게 되는 것을 직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번 실패를 직면하는 것보다, 한번에 뒤로 물러가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실패의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비전을 낮춥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높은 비전을 계속 견지하면서 실패의 고통을 직면하는 것보다, 2차적인 관계”로 살아가는 안주함이 더욱 쉬울 것입니다.

E. 그런 사람들은 주님과의 2차적인 관계에 익숙해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수치스러워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을 직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런 수치심을 가지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F. 사람들은 하나님이 화가 나 있으시고, 실망스러워 하시고 슬퍼하시고 심지어 그들에게 분통 터져 하신다고 상상합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는 순종과 헌신으로 행하는 것을 포기하고 정죄 안에서 살아갑니다.

G.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습니다. 그분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 21:15-17)

H.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이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분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진실된 사랑이 있음을 확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에 베드로가 가졌던 똑같은 예수님과의 관계와 질적으로 똑같은 관계로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나타내고 계셨습니다.

I. 주님은 본질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8일 전에 동산에서 나는 너에게, 네가 약하지만 자원하는 영을 가졌다고 말했단다. 너는 네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너는 네가 자원하는(기꺼이 하고자 하는) 영을 가졌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너는 나를 향해 영 안에서 예(Yes!)를 갖고 있다. 나는 네가 실패하여 넘어지기 전에 네 안에 있는 그것을 보았단다. 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나는 너의 자원하는 영을 보았고, 지금도 여전히 네 안에서 그것을 보고 있단다.

J. 예수님은 우리가 행동하는 것보다 우리의 자원하는 영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신실함에 있어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다는 것 때문에 그의 마음에 있는 수치심을 깨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을 세 번의 질문으로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을 때, 수치심은 베드로로부터 깨어졌습니다.

V. 승리의 3단계
A. 첫 번째,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우리의 진실한 의도. 영적 승리로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진실로 열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의도는 성숙하게 순종을 달성하게 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의도들은 우리의 승리의 시작점입니다. 성령님은 그러한 진실한 열망들(악령도 아니고 육신도 아닙니다)을 일으키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측정하고 정의하시는 방식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의도에 의해서입니다. 그분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삶의 척도를 자신의 성취에만 두면서 결국 정죄에 이르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B. 두 번째, 아직 지속적인 갈등 가운데 있는 부분적인 돌파. 우리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에서는 승리하시만, 우리 삶의 특별한 영역 안에서 아직도 우리의 육신과 지속되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8:2-13; 5:16-17).

C. 세 번째, 변화된 열망들을 갖는 근본적인 돌파. 우리의 욕망이 극적으로 변화되어서, 우리는 죄의 중요한 영역 안에서 심지어 거의 갈등하지도 않게 됩니다( 6:14-23).

VI. 거룩한 열정을 향한 여정은 이 두 가지 계시와 함께 시작된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 1:5-6)

A. 아가서 1:5에서 젊은 신부가 직면하는 위기는 베드로가 만난 위기와 같은 것입니다.

  1. 검은 마음(죄의 욕망) : 우리의 약한 육신은 하나님에게 검습니다.
2. 하나님께 사랑스러움(예수님께 순종하려는 진실된 의도): 우리의 자원하는 영은 하나님께 사랑스럽습니다.

B. 아가서 전반에 걸쳐 신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성장시키는 영적인 윈리들을 가르칩니다. 그 딸들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C. 게달의 검은 장막은 육신의 어두움을 말합니다. 그것들은 야생염소의 검은 가죽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검은 장막이었습니다. 이 비유는 그 당시에 쉽게 이해되었습니다.

D. 솔로몬의 휘장은 성전 안에 성소 안에 있는 하얀 휘장이었습니다. 그것들은 그녀의 삶에서 은혜의 내적 역사를 말합니다. 이러한 휘장의 아름다움은 바깥 마당에 있는 어떤 사람들도 볼 수 없고단지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만이 볼 수 있습니다.

E. 그녀는 “나는 외적으로는 검은 장막과 같지만, 내적으로는 성소 안에 있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 사람들은 그녀를 게달의 검은 장막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솔로몬의 하얀 휘장과 같이 사랑스럽게 봅니다.

F. 그녀는 “햇볕에 그슬렀다”고 외칩니다. 전도서에서는 솔로몬은 “해 아래 살아있는 생명”에 대해서 여러번 서술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영역에서 살아가는 삶들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해 아래 태어난 즉 자연적인 죄의 약함 안에서 태어난 영향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삶은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녀를 검게 했고, 그것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G. 그녀는 사람들에게, 그녀를 보면서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려고 머리를 흔들면서 “너는 마음이 어둡다.”라고 말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그래, 나는 인간이고 나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나의 삶 속에서 크게 죄지었다.”고 말합니다.

H. 그녀는 그들에게 그녀를 응시하지(흘겨보지) 말라고 요구합니다(6). 그녀는 그녀의 마음의 어두음으로 압도되었습니다.

VII.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A.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회개하곤 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성령님이 그들에게 자원하는 영을 주셨음으로 그들이 하나님에게 사랑스럽다는 것에 대해 확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B.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스럽다는 진리를 보면서도 진실한 회개와 마음을 다하여 살기를 추구하지 않고, 때때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요구하는 뻔뻔스러운 삶을 사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C. 그녀가 자신의 죄성을 발견했을 때, 하나님과 어떻게 계속 관계하느냐는 것이 중요한 초점입니다. 당신이 약한 육신과 어두운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과 계속 관계를 갖습니까? 이러한 위기 가운데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우리의 영적인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D.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위기 가운데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오해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달려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합니다. 그들은 포기하고 단념하고 수치(수치의 견고한 진) 안에서 포위됩니다.

E. 수치의 삶은 죄악의 삶으로 이끌어집니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더럽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더럽게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뒤로 물러가 2차적인 삶을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깨끗하다는 느낌과 충만한 존귀함을 가지고 사랑을 느끼는 한 여인보다 이 땅에 더욱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여인은 사랑 안에서 견고할 것입니다. 그녀는 강합니다. 하나님은 깨끗함을 느끼고 열망하고 존귀하고 추구하고 기뻐함을 느끼는 동역자로서의 신부를 세우고 계십니다.

<출처: 카페선두주자/마이크 비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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