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18장 22-23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장막을 지나 소돔 쪽으로 걸어가실 때, 아브라함이 다시 하나님 곁에 머무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소돔을 멸망시키겠다는 계획을 숨기지 않으시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친구였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의 궁금증은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을 멸망시킨다는 계시를 받을 이후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충만한 아브라함이 ‘감히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는 계획’을 갖게 된 것입니다. 얼핏 그의 계획은 터무니 없거나, 자칫 뻔뻔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으며, 누가 감히 하나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상상인들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로 인해 확실히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겐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똑 같은 수준의 권위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평케 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시요 맏형 되신 예수님과 함께 그분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르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중재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었을 때,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이 임마누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예수님과 달리 하나님의 독생자도 아닐 뿐더러, 삼위일제 하나님의 일부도 아닌 단지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 안에 있는 자비와 은혜와 긍휼과 능력을 풀어놓을 권위를 위임하셨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위해 힘쓴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난 후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위대하신 왕, 여호와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감히 던진 첫 두 마디는 매우 충격적일 뿐 아니라, 별로 신중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말은 “제발, 하나님. 진정 좀 하세요. 소돔 사람들한테 지금 너무 과민반응하시는 거 아녜요?”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다음에 한 말을 보면 그가 겸손함과 경외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 가운데 있지 않다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를 바른 관점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 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에도 아브라함에게 있어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나 주일학교 교사들이 성경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과 친밀함이 넘치는 관계속에 있지 않다면, 성경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충분히 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과 나누는 하나님의 모든 대화는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지 않은 채로 진리이신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전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설교자나 교사들이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져 그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성경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교훈과 율법들만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이라고 썼습니다. 초대 교회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계획은 윤리적이고 의로운 사람을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예배자이자 제자이면서 하나님의 연인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의 멸망에 대한 결정을 한 번만 더 생각해 달라고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였던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고 그 마음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도 역시 아브라함의 반응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비슷한 예로 예수님 역시 두 제자와 함께 엠마오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과 함께 더 머무르기 원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지나쳐 가시려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며 교제를 나누기로 이미 마음 먹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스스로 예수님과 함께 더 머무를 것을 청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역시 아브라함을 스쳐 지나갈 듯 보였지만, 사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마옵소서.’하고 아브라함이 청하길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갈망함으로 반응하기 기다리고 계십니다!
솔로몬이 쓴 아가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부들에게 구애하는 비유적인 이야기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5장은 사랑하는 연인들 간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신랑은 신부가 나오길 기다리며 계속 문을 두드리지만 전혀 반응이 없는 신부 때문에 점점 지쳐갑니다. 이 모습은 마치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오늘날 교회들의 문을 계속 두드리시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전혀 반응하지 않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슬프고 아프게 하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 같습니다.
아가서의 신랑은 끝내 좌절감을 느끼며 그곳을 떠납니다. 그 후 신부는 자기만족이라는 침대에서 일어니 문을 열어 보지만 그때는 이미 연인이 떠난 후였습니다. 신부는 절망감에 휩싸여 도시의 거리를 배회하다 성 안을 순찰하는 무리들에게 폭행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이 장면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은 이런 비극을 허용하셨을까요? 같은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할 때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는 것을(눅22:31-34) 허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베드로가 배 안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경외감을 다시 회복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마치 무도회장에 입고 갈 옷이라고는 누더기 같은 옷 밖에 없는 가련한 신데렐라가 받은 것과 같은 초대장이 바로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초대에 응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갈망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생활에 안주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보다 높은 부르심으로 초대하는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기 원하십니까? 신앙생황이라는 여정에서는 우리가 안주하는 순간, 어제는 정사이라고 여겨졌던 곳이 오늘은 비교적 안정적인 평원으로 느껴지다가도, 내일이면 눈물의 골짜기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성숙의 길을 가다가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결정권을 가만히 올려놓으십니다. 다윗의 오직 한 가지 소망은 그의 평생에 여호와의 전에 거하며 오직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앞만 보고 달려간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는 뻔뻔스러움(Presumption)과 담대함(Boldness)을 구분이라는 명백한 기준이 있습니다. 뻔뻔스러움은 자기의 이익이나 소원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반면 담대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길과 뜻을 아는 지식으로 인해, 담대한 믿음을 감추지 못하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분에 넘치는 사치스러운 차를 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인 동기로 뻔뻔스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모습을 보고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기도는 단순히 육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기도일 뿐 아니라 아주 뻔뻔스러운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담대한 기도는 하늘나라에 속한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원하는 기도라든지 축사기도 혹은 치유기도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담대함이 지나쳐 뻔뻔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부족하고 하나님의 길을 잘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7절에 따르면, 모세는 하나님의 길을 알았던 반면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만 알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적어도 한 번은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를 통해 보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무 진노하신 나머지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하여 큰 나라를 새롭게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거두시길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기 위한 시도를 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고는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며 계획한 모든 일을 실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시듯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지만 동시에 위대한 사랑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의도하고 계획한 일 조차 마음대로 행치 못하실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라는 수단을 통하여, 사랑이 하나님의 일에 개입하여 중재하도록 허락하신 일은 기도를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친구들과 그의 자녀들이,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으로 가득한 죄인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셨던 것과 같이 행하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절대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하나의 사건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뜻과 계획 가운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하신지 잘 알게 된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주셨던 계시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만약 ‘예. 하나님 말씀이 맞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집은 알아준다니까요. 그러니 어서 그들을 싹 쓸어버리세요!’라고 반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이것이 복음주의 교회가 70~80년대 후반에 등장한 동성애자들에게 반응했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긍휼의 마음이 없는 자신들의 모습을 거룩한 분노로 포장하였습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에이즈 동성애에 대해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명백한 증거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외치는데 그칠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경솔하고 거만한 행동에는 자비하시고 긍휼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우리는 어쩌면 열릴 수도 있었던 문을 스스로 닫아 버렸습니다. 그 문은 바로 이 사회에서 상처받고 유리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만지기 위한 사랑의 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이 소돔을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소돔과 사람들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즉결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도 빌라도 법정에서 소리치며 소란을 피웠던 군중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극한 아픔과 고통을 느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순간에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마지막 숨을 몰아 쉬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로서 하나님의 깊은 속마음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라 사도 바울 역시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성도들을 회개로 이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위험하지만, 사랑 없는 진리는 영혼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애와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게 됩니다.
죄는 죄를 낳습니다. 교회가 회개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게 되면 주님의 신뢰를 잃어버려 심지어는 주님과 무관한 상태에 이릅니다. 만일 교회가 숨겨진 죄를 계속 방치하거나 숨기면 성령이 권능으로 임했을 때 성도들이 그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 때 무기력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성경에 쓰여 졌던 일들에 대하여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로서 대화하고 중보하는 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것은 온종일 무릎 꿇고 종교적인 기도만 하는 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알고 중보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되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영으로 아는 자는 하나님과 친구로서 대화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시점은 하나님이 소돔을 멸망시키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왕되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친분 관계 안에서도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훈과 생각으로 우리 영의 기초를 쌓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얻고 악으로부터 해방되며 질병으로부터 치유되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아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기까지 하는 친구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친구되기/마크 듀퐁/큰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