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
여기에 많은 독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만한 탁월한 간증이 있습니다. 간증이라는 성격상 다분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필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도록 부탁했습니다. 이 간증문과 함께 보낸 서신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바르게 기도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궁구한 결과입니다.
저는 이방법이 단시일 내에 놀라운 결과를 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지난 20년 넘게 아무런 열매도 없는 기도를 드려왔는데, 그러한 기도로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돌아온 실제적인 열매가 아무 것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몇 주 동안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기도 방법대로 해보니, 그들이 성경 공부에 출석하고 매주 교회 예배에도 참석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태도도 바뀌었고, 거부하고 저항하던 것이 다 사라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권위의 자리에 앉아, 그 권위를 대적에게 대항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저는 제가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생각하며 제 자신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제 위치에 앉아 성령님께서 죄를 각성시켜주시는 역사를 하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 몸의 각 지체, 또는 모든 지체들이 이렇게 기도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빨리 변화가 될까요!”
신자라면 누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 혹은 침륜에 빠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믿음으로 시도하기 보다는 염려와 걱정하는 마음으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채 그저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저로 하여금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간절히 구하도록 했으며, 어떻게 기도해야 합당한 기도인지, 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나의 믿음의 근거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나 말씀에 두러야 하는 필요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도움을 구하는 자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전혀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같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제제 마가복음 10장27절의 말씀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다음 성경 구절은 잠시 동안 제 마음을 사로잡았고,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4-5)
이 구절은 우리가 가진 영적인 무기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대상에게 이루어지고 성취되도록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즉 대적의 역사가 완전히 파괴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기도에 대한 견고한 토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구속의 역사를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구속은 온 인류를 구속하고도 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비록 그 사람이 현재 사단에 매여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하나님의 사신바 된 소유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이 합법적으로 주님의 소유임을 주장하며, 하나님이 당신의 소유를 취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의 근거 위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단지 그러한 의미가 있음을 아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신바 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복음을 믿고, 또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중보기도가 이러한 역사를 이루도록 그들을 돕게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증된 것을 구하고, 또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이 되는 각 개인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또한 그분의 흘리신 피를 그거로 이미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었음을 그 이름을 거론하면서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모든 역사, 곧 대적이 사람들의 생각 속에 견고하게 확립시킨 거짓된 가르침, 불신앙, 무신론, 그리고 원한 등이 파괴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든 생각이 사로잡힌 바 되어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우리는 그들이 악한 자의 세력과 설득당한 데로부터, 세상을 사랑하는 데로부터,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의 양심이 각성이 되고, 하나님이 그들을 회개하는 데까지 이끄시며,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말 읽거나 들음으로써,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그들 속에서, 또는 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지속적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는 구속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을 납득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납득시키는데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어두움의 세상의 주관자이며 두려운 권세를 가지고 있는 원수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영혼을 위하여 영적인 싸움을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진 의무입니다. 이것은 누군가 구속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그들을 위해 어둠의 권세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다만 가진 바를 내어놓게 되고, 자신이 그러해야만 할 때, 사단은 교활한 방법으로 자신의 공격을 새롭게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구체적이 되어야 하며, 또한 구체적인 결과가 보일지라도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 믿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신앙이 어느 정도 자란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게 될 때, 성령님은 새로운 기도의 방향을 보여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저는 한 영혼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있었는데, 저의 기도가 거의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성령님은 그 사람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하도록 제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제가 이러한 방향을 순종하여, “이 사람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기도했을 때, 저는 제 기도가 점차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그 사람을 사단의 깊은 곳에서 끌어낸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 후에야 평소처럼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었고, 대적을 향해 어린양의 피의 권세를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그 삶의 모든 세부사항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 펼쳐지는 진정한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우리의 영적인 무기는 강력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권세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는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국내외 선교사들은 자신이 맡고 있는 구역과 지역 사회와 학교에서 어두움의 권세와 죄와 불신앙에 대항하여 예수님의 피의 권세를 사용함으로써 사단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우리는 원수로 하여금 물러가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는 말씀과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고후3:6)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마음과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기도와 그리고 우리의 간증(증거)속에 성령님이 역사하시도록 드려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원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우리의 중보기도를 멈추도록 할 것이며, 우리가 행하는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원수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권세를 이해하고, 우리의 영적인 무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잘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해두신 전신갑주를 입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잘 무장되고, 잘 보호될 때,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외에는 어떠한 힘도, 권세도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는]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4)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그러므로 영혼 구령에 힘쓰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형제들의 집 소책자 시리즈5]
10/01/2009
제 4장 영성적 대인관계
제 4장 영성적 대인관계
1. 본능단계 사회생활(가정사회, 교회사회, 세상사회)속에서 사람을 대할 때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 즉 감각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 여과없이 그대로 나타나거나 또는 사회의 일반적 윤리개념이 묻어 나오는 삶의 단계를 말한다. “윤리개념”을 이해할 때 본능단계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윤리개념은 어디까지나 “사회 일반적인 윤리개념”을 말하는 것이지 “기독교의 윤리개념”이 아니다.
(1) 본능단계에서의 선결(先決)과제: 본능적인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딤후3:1-5). 본능적인 가치관의 실상을 이해하고 거기서 벗어나기를 기도하라.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배운 바를 실천하라.
(2) 속히 윤리단계로 나아가자: (고전3:1-3; 엡4:13-14; 히5:11-6:2).
2. 윤리단계 이 단계의 윤리는 “기독교 윤리 개념”으로 말하는 단계로써 자기 중심적이던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윤리 관계로 발전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이 윤리단계는 여전히 나의 혼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지키려고 하는 단계로써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1) 기독교 운리와 일반 윤리를 혼동하는 이유: 유교적 전통의 윤리적 생활습관에 젖어온 사람의 사고는 유교적 윤리 사고의 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바라보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여 신앙생활을 하면 기독교 윤리를 유교적 전통 윤리와 구분하지 못하여 보편적인 예의 범절을 지키는 것이 기독교 윤리인 것으로 착각을 한다.
(2) 일반 윤리 사고에서 기독교 윤리 사고로의 점진적 변화: 영성적 대인관계에서 말하는 윤리는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가 설정되어 있는 연장성상에서의 윤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율법을 주시고 그 다음에 복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셨다면, 또한 우리에게는 일반 보편적인 윤리를 허락하시고 거기에서 기독교적인 윤리로 전환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것이다.
(3) 윤리(기독교 윤리)단계의 특성 - 혼(魂)이 주체가 된 삶: * 하나니을 인식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 이웃을 위해 나름대로의 물질과 노력, 시간을 허비한다. * 열심을 내어 전도하고 교회에 충성 봉사한다. * 기본적인 헌금생활에 대하여 구속력을 갖고 생활한다 – 의무적 차원. * 그러나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육신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다. *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자신이 없어 갈등 한다. 곧 자신의 사랑이 감정적이고 육신적인데서 기인된 것을 깨닫는다. * 육신적인 감정이 배제되지는 않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쓴다. *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 욕망 (마10:34-36).
(4) 윤리단계 훈련: 이유가 어떻든간에 우리가 사건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훈련이라고 깨달아지면,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구체적으로 물어서 말씀하시는 그 방법대로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힘쓰고 애써야 한다(눅6:27-28).
(5) 성경적 대인관계: 마22:37-30; 1요4:20-21; 눅23:33-34.
(6) 성경의 인물사례: 요셉(창37장 ~…). 다웃(삼하 1:19 ~…)
3. 진리단계 영혼이 주체가 되어 대인관계를 맺게 되는 시점으로써 상대방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이다. 단지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말씀대로 지켜 살 때도 있고, 인식은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도 있다. 여태껏 진리로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힘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께 묻고 응답받아 행하는 영 중심의 생활을 반복적으로 경험하여 숙달되면 하나님의 말씀의 법대로 사는 사람이 쉬어지고 평범하게 이루어진다.
(1) 진리화되는 과정과 사랑의 방법: 영성적으로 진리화되는 단계에 이르기 시작하면, 대인관계에 있어서 누구를 대하든지 어떠한 상황을 만나든지간에 감정적이나 윤리적인 차원에서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이나 그 상황의 내면으로 들어가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구하기 위하여 갈등을 하게 되는데, 성도들은 거듭되는 이러한 대인관계 훈련을 통하여 더 깊은 차원의 은혜에 이르러 결국 삶의 전부가 생명이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화되는 과정에서는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어야만 한다(갈5:13-15; 엡5:21-6:9; 벧전3:1-9).
(2) 진리단계 훈련: 이 단계에서는 윤리단계와는 다르게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지시와 인도를 받아 순종하게 되면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을 주는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하여 오히려 사랑이 흘러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롬12:14-21).
(3) 성경적 인물사례: 다윗 ① 다윗은 이웃을 높이며 사랑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 광야 도피생활 중 다위이 이끌었던 400명의 군대 요원들을 불법자요, 불평분자들이며, 범법자들이었으나 다윗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그들을 훈련시킨 결과 당시 주변국들중 최고으 정예군대로 양성되었다(삼상22장). 시글락에서의 싸움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12지파 족속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부녀자들에게도 분배해 주었다. 이것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규범과 법으로 제도화되는 근거가 되었다(삼상30장). ② 대적자와 핍박자를 사랑하며 평화하는 대인관계를 갖추었다. 자신의 목숨을 해하려 하였던 사울왕을 평화와 성실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관용하게 대하였다(엔겐디 동굴에서의 옷자락 베었던 사건. 삼상 24장). 적장 아브넬과 북 이스라엘 왕 이스보셋이 죽었을 때도 전심으로 슬퍼하였다(삼하 3장).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도 살려 주었다(삼하 15장). ③ 희생적인 사랑과 겸손함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자신을 여섯 번씩이나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살려주는 용기와 희생적인 사랑이 있었다. 원수가 죽었을 때에도 진정한 마음으로 통곡하였다(삼하1장). 사울왕과 친구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윗… 범죄하고 회개한 후 더욱 겸손함으로 백성을 다스렸다(삼하22장). 죽음에 임하여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배하였다(왕상2:1-4).
4. 생명단계 본능적으로이루어지던 대인관계가 혼 중심의 윤리단계를 거쳐 영 중심의 풍성한 대인관계의 삶이 흘러 넘치는 단계로써,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 신분에 맞게 삶으로서의 대인관계를 맺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상대를 육신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바라보게 된다. 단지 자아의 찌꺼기 부분이 남아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육신적으로 행할 때는 그 부분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동시에 초보단계를 걷고 있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상처를 주게 되는 위험을 함께 갖고 있는데 이것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생명단계에서 말하는 사랑의 두 가지 차원: ① 일대 일 관계에서의 생명적 사랑(요15:9-14). ② 사고의 폭이 확대되는 생명적 사랑(롬9:1-3).
(2) 생명단계의 두 가지 특징: ① 본능단계나 윤리단계에서 다가왔던 큰 문제들이 크게여겨지지 않는다. ② 초보단계에서 나를 괴롭히던 원수들이 내게 굴복하고 떠나간다.
(3) 생명단계 훈련: 훈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까다로운 가족이나 이웃들을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을 만한 조건이 내게는 갖추어져 있다. 주의할 것은 풍성한 생명적 대인관계를 이루고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육신 중심으로 살 소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4) 성경의 인물사례: 요셉(창 45:1-8), 다윗(시119:65-71, 18:1-3, 23편, 84:10; 삼하1:19-27).
(5) 참 사랑의 근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1. 본능단계 사회생활(가정사회, 교회사회, 세상사회)속에서 사람을 대할 때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 즉 감각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 여과없이 그대로 나타나거나 또는 사회의 일반적 윤리개념이 묻어 나오는 삶의 단계를 말한다. “윤리개념”을 이해할 때 본능단계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윤리개념은 어디까지나 “사회 일반적인 윤리개념”을 말하는 것이지 “기독교의 윤리개념”이 아니다.
(1) 본능단계에서의 선결(先決)과제: 본능적인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딤후3:1-5). 본능적인 가치관의 실상을 이해하고 거기서 벗어나기를 기도하라.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배운 바를 실천하라.
(2) 속히 윤리단계로 나아가자: (고전3:1-3; 엡4:13-14; 히5:11-6:2).
2. 윤리단계 이 단계의 윤리는 “기독교 윤리 개념”으로 말하는 단계로써 자기 중심적이던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윤리 관계로 발전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이 윤리단계는 여전히 나의 혼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지키려고 하는 단계로써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1) 기독교 운리와 일반 윤리를 혼동하는 이유: 유교적 전통의 윤리적 생활습관에 젖어온 사람의 사고는 유교적 윤리 사고의 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바라보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여 신앙생활을 하면 기독교 윤리를 유교적 전통 윤리와 구분하지 못하여 보편적인 예의 범절을 지키는 것이 기독교 윤리인 것으로 착각을 한다.
(2) 일반 윤리 사고에서 기독교 윤리 사고로의 점진적 변화: 영성적 대인관계에서 말하는 윤리는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가 설정되어 있는 연장성상에서의 윤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율법을 주시고 그 다음에 복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셨다면, 또한 우리에게는 일반 보편적인 윤리를 허락하시고 거기에서 기독교적인 윤리로 전환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것이다.
(3) 윤리(기독교 윤리)단계의 특성 - 혼(魂)이 주체가 된 삶: * 하나니을 인식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 이웃을 위해 나름대로의 물질과 노력, 시간을 허비한다. * 열심을 내어 전도하고 교회에 충성 봉사한다. * 기본적인 헌금생활에 대하여 구속력을 갖고 생활한다 – 의무적 차원. * 그러나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육신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다. *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자신이 없어 갈등 한다. 곧 자신의 사랑이 감정적이고 육신적인데서 기인된 것을 깨닫는다. * 육신적인 감정이 배제되지는 않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쓴다. *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 욕망 (마10:34-36).
(4) 윤리단계 훈련: 이유가 어떻든간에 우리가 사건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훈련이라고 깨달아지면,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구체적으로 물어서 말씀하시는 그 방법대로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힘쓰고 애써야 한다(눅6:27-28).
(5) 성경적 대인관계: 마22:37-30; 1요4:20-21; 눅23:33-34.
(6) 성경의 인물사례: 요셉(창37장 ~…). 다웃(삼하 1:19 ~…)
3. 진리단계 영혼이 주체가 되어 대인관계를 맺게 되는 시점으로써 상대방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이다. 단지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말씀대로 지켜 살 때도 있고, 인식은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도 있다. 여태껏 진리로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힘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께 묻고 응답받아 행하는 영 중심의 생활을 반복적으로 경험하여 숙달되면 하나님의 말씀의 법대로 사는 사람이 쉬어지고 평범하게 이루어진다.
(1) 진리화되는 과정과 사랑의 방법: 영성적으로 진리화되는 단계에 이르기 시작하면, 대인관계에 있어서 누구를 대하든지 어떠한 상황을 만나든지간에 감정적이나 윤리적인 차원에서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이나 그 상황의 내면으로 들어가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구하기 위하여 갈등을 하게 되는데, 성도들은 거듭되는 이러한 대인관계 훈련을 통하여 더 깊은 차원의 은혜에 이르러 결국 삶의 전부가 생명이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화되는 과정에서는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어야만 한다(갈5:13-15; 엡5:21-6:9; 벧전3:1-9).
(2) 진리단계 훈련: 이 단계에서는 윤리단계와는 다르게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지시와 인도를 받아 순종하게 되면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을 주는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하여 오히려 사랑이 흘러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롬12:14-21).
(3) 성경적 인물사례: 다윗 ① 다윗은 이웃을 높이며 사랑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 광야 도피생활 중 다위이 이끌었던 400명의 군대 요원들을 불법자요, 불평분자들이며, 범법자들이었으나 다윗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그들을 훈련시킨 결과 당시 주변국들중 최고으 정예군대로 양성되었다(삼상22장). 시글락에서의 싸움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12지파 족속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부녀자들에게도 분배해 주었다. 이것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규범과 법으로 제도화되는 근거가 되었다(삼상30장). ② 대적자와 핍박자를 사랑하며 평화하는 대인관계를 갖추었다. 자신의 목숨을 해하려 하였던 사울왕을 평화와 성실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관용하게 대하였다(엔겐디 동굴에서의 옷자락 베었던 사건. 삼상 24장). 적장 아브넬과 북 이스라엘 왕 이스보셋이 죽었을 때도 전심으로 슬퍼하였다(삼하 3장).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도 살려 주었다(삼하 15장). ③ 희생적인 사랑과 겸손함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자신을 여섯 번씩이나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살려주는 용기와 희생적인 사랑이 있었다. 원수가 죽었을 때에도 진정한 마음으로 통곡하였다(삼하1장). 사울왕과 친구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윗… 범죄하고 회개한 후 더욱 겸손함으로 백성을 다스렸다(삼하22장). 죽음에 임하여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배하였다(왕상2:1-4).
4. 생명단계 본능적으로이루어지던 대인관계가 혼 중심의 윤리단계를 거쳐 영 중심의 풍성한 대인관계의 삶이 흘러 넘치는 단계로써,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 신분에 맞게 삶으로서의 대인관계를 맺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상대를 육신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바라보게 된다. 단지 자아의 찌꺼기 부분이 남아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육신적으로 행할 때는 그 부분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동시에 초보단계를 걷고 있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상처를 주게 되는 위험을 함께 갖고 있는데 이것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생명단계에서 말하는 사랑의 두 가지 차원: ① 일대 일 관계에서의 생명적 사랑(요15:9-14). ② 사고의 폭이 확대되는 생명적 사랑(롬9:1-3).
(2) 생명단계의 두 가지 특징: ① 본능단계나 윤리단계에서 다가왔던 큰 문제들이 크게여겨지지 않는다. ② 초보단계에서 나를 괴롭히던 원수들이 내게 굴복하고 떠나간다.
(3) 생명단계 훈련: 훈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까다로운 가족이나 이웃들을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을 만한 조건이 내게는 갖추어져 있다. 주의할 것은 풍성한 생명적 대인관계를 이루고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육신 중심으로 살 소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4) 성경의 인물사례: 요셉(창 45:1-8), 다윗(시119:65-71, 18:1-3, 23편, 84:10; 삼하1:19-27).
(5) 참 사랑의 근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제 3장 영성적 물질관계
제 3장 영성적 물질관계
1. 의무와 책임단계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헌금이나 이웃에게 하는 구제행위를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가지고 하게 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드리기는 하여도 억지로 하는 경향이 짙고 아까워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한다.
(1) 의무와 책임단계에 있는 사람의 특징: 재물의 주인이 자신이다(대상29:11-14).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다(고후9:7). 사람에게 인정 받기를 원한다(마6:3-4).
(2) 의무와 책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의 실천 과제: 물질에 관한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부귀영화를 좇는 탐욕을 버려야 한다(눅12:15, 16-21, 28-34).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물질의 축복을 부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는 실용단계로 발전하기 위하여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계3:17-19).
(3) 의무와 책임단계에서의 두가지 실천적 삶: 훈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훈련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구제하는 살을 살아야 한다(말3:8-10; 잠11:24-26).
2. 실용단계 ‘실용단계’는 헌금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헌금은 단순한 기부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방편이요, 비결로 이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그 복을 받는 것이 목적이 되어 열심을 내어 헌금을 하고, 구제에도 관심을 갖고 어떻게 하면 많이 할 수 있을까 방법을 도모하는 단계이다. 즉 하나님을 의식하고 헌금을 하거나 이웃을 구제한 행위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단계이다.
(1) 실용단계의 함정: 부분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물질적인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 더욱 더 발전하여 진리적인 차원에서 물질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물질의 축복에 관심이 고정되어 더 이상의 성장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2) 실용단계의 특징: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육시적이기는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드린다. 물질중심의 신앙적 가치관이 형성된다. 실용적으로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심고(헌금과 구제), 이익이 될 것같지 않으면 심지 않는다.
(3) 실용단계 훈련: 육신 중심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진리적으로 심고 거두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 어떻게 행할 것을 묻고 심고 거두는 훈련을 쌓아야만 한다(갈6:7-10).
(4) 세속 재물과 신령한 재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금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구제가 세속 재물에서 신령한 재물로 바귀려면 먼저 우리의 가치관이 영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3. 진리단계 성도의 물질관이 진리단계로 들어서면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과 심을 씨앗으로 구분되어 지면서 소유개념이 내 것에서 하나님 것으로 확신되어지고, 진리로 심어 의으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특히 진리단계에서는 물질을 심고 거두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된다(고후9:9-15).
(1) 심고 거두는 삶의 법칙: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아 진리로 심는 자에게만이 다시금 풍성하게 열매맺는 역사가 나타나고, 그맺혀지는 열매 속에 또 다시 내가 먹을 것과 진리로 심을 씨앗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늘어나는 기쁨이 함께 한다.
(2) 진리단계의 특징: 진리적으로 심고 의의 열매로 거두는 역사가 나타난다. 이제껏 심은 것이 영혼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고난이 축복인 것을 깨닫는다(시119:67-71; 욥42:5-6). 하늘에 상급이 쌓인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을 경험한다(고전15:42-44).
(3) 진리단계 훈련: 진리로(영 중심으로) 심으라(고후12:15).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알도록 노력하라(창1장/다스리고 누리게 함, 출36:3-7/자원하는 예물이 넉넉히 남음, 출25:2, 35:29; 대상29:9; 시110:3; 고후8:2; 창42:49). 이기적인 요소(육신적 행위와 고정관념) 를 철저히 물리치라. 반복적으로 훈련하라(딤전6:17-19; 눅6:38; 막10:29-30).
☆ 다윗의 재물관과 감사의 고백(역대상 29장, 10-16; 사5:1-4).
4. 생명단계 성도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아 물질을 심을 때, 하늘에는 상급이 쌓이고 이 땅에서는 여러배로 거두게 되는 생명적인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는 단계이다.
(1)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 빌립보서 4:14-20.
(2) 새롭게 시작되는 훈련: 생명단계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비로서 정상적인 물질관계의 훈련다운 훈련이 시작됨을 말하는 것이다.
(3) 생명단계의 특징: 육신적인 차원에서으 이익을 초월한다. 청지기 의식이 확고해 진다(눅12:42-44). 말씀이 실제가 되는 것을 풍성하게 경험한다. 모든 것이 생명으로 바뀐다(요6:63; 롬8:5-6)
(4) 생명단계 훈련: 하나님께 하듯 이웃에게도 동일한 분량(量과 質)으로 심어야 한다(마22:37-40)
(5) 결론: 물길관계에 있어서 생명단계에 깊숙히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소유물의 많고 적음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하나님 원하시는 뜻에 따라 사용한다(고후 8:1-15).
1. 의무와 책임단계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헌금이나 이웃에게 하는 구제행위를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가지고 하게 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드리기는 하여도 억지로 하는 경향이 짙고 아까워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한다.
(1) 의무와 책임단계에 있는 사람의 특징: 재물의 주인이 자신이다(대상29:11-14).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다(고후9:7). 사람에게 인정 받기를 원한다(마6:3-4).
(2) 의무와 책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의 실천 과제: 물질에 관한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부귀영화를 좇는 탐욕을 버려야 한다(눅12:15, 16-21, 28-34).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물질의 축복을 부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는 실용단계로 발전하기 위하여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계3:17-19).
(3) 의무와 책임단계에서의 두가지 실천적 삶: 훈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훈련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구제하는 살을 살아야 한다(말3:8-10; 잠11:24-26).
2. 실용단계 ‘실용단계’는 헌금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헌금은 단순한 기부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방편이요, 비결로 이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그 복을 받는 것이 목적이 되어 열심을 내어 헌금을 하고, 구제에도 관심을 갖고 어떻게 하면 많이 할 수 있을까 방법을 도모하는 단계이다. 즉 하나님을 의식하고 헌금을 하거나 이웃을 구제한 행위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단계이다.
(1) 실용단계의 함정: 부분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물질적인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 더욱 더 발전하여 진리적인 차원에서 물질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물질의 축복에 관심이 고정되어 더 이상의 성장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2) 실용단계의 특징: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육시적이기는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드린다. 물질중심의 신앙적 가치관이 형성된다. 실용적으로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심고(헌금과 구제), 이익이 될 것같지 않으면 심지 않는다.
(3) 실용단계 훈련: 육신 중심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진리적으로 심고 거두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 어떻게 행할 것을 묻고 심고 거두는 훈련을 쌓아야만 한다(갈6:7-10).
(4) 세속 재물과 신령한 재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금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구제가 세속 재물에서 신령한 재물로 바귀려면 먼저 우리의 가치관이 영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3. 진리단계 성도의 물질관이 진리단계로 들어서면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과 심을 씨앗으로 구분되어 지면서 소유개념이 내 것에서 하나님 것으로 확신되어지고, 진리로 심어 의으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특히 진리단계에서는 물질을 심고 거두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된다(고후9:9-15).
(1) 심고 거두는 삶의 법칙: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아 진리로 심는 자에게만이 다시금 풍성하게 열매맺는 역사가 나타나고, 그맺혀지는 열매 속에 또 다시 내가 먹을 것과 진리로 심을 씨앗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늘어나는 기쁨이 함께 한다.
(2) 진리단계의 특징: 진리적으로 심고 의의 열매로 거두는 역사가 나타난다. 이제껏 심은 것이 영혼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고난이 축복인 것을 깨닫는다(시119:67-71; 욥42:5-6). 하늘에 상급이 쌓인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을 경험한다(고전15:42-44).
(3) 진리단계 훈련: 진리로(영 중심으로) 심으라(고후12:15).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알도록 노력하라(창1장/다스리고 누리게 함, 출36:3-7/자원하는 예물이 넉넉히 남음, 출25:2, 35:29; 대상29:9; 시110:3; 고후8:2; 창42:49). 이기적인 요소(육신적 행위와 고정관념) 를 철저히 물리치라. 반복적으로 훈련하라(딤전6:17-19; 눅6:38; 막10:29-30).
☆ 다윗의 재물관과 감사의 고백(역대상 29장, 10-16; 사5:1-4).
4. 생명단계 성도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아 물질을 심을 때, 하늘에는 상급이 쌓이고 이 땅에서는 여러배로 거두게 되는 생명적인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는 단계이다.
(1)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 빌립보서 4:14-20.
(2) 새롭게 시작되는 훈련: 생명단계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비로서 정상적인 물질관계의 훈련다운 훈련이 시작됨을 말하는 것이다.
(3) 생명단계의 특징: 육신적인 차원에서으 이익을 초월한다. 청지기 의식이 확고해 진다(눅12:42-44). 말씀이 실제가 되는 것을 풍성하게 경험한다. 모든 것이 생명으로 바뀐다(요6:63; 롬8:5-6)
(4) 생명단계 훈련: 하나님께 하듯 이웃에게도 동일한 분량(量과 質)으로 심어야 한다(마22:37-40)
(5) 결론: 물길관계에 있어서 생명단계에 깊숙히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소유물의 많고 적음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하나님 원하시는 뜻에 따라 사용한다(고후 8:1-15).
제 2장 육체와 영성
1. 은사체험 단계 -성령님의 권능적 차원에서의 견해(9가지), 성령님의 권을적 차원과 직분적 차원, 그리고 달란트적 개념을 통틀어서 보는 견해(32가지).
(1) 철저히 타락한 존재: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 죄성, 악성, 독성, 부패성 등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철저하게 나를 부인하고, 육신의 자아를 파쇄시킴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2) 육체에 영성을 입혀주시려는 이유: 사람의 육체와 육체가 하는 모든 일은 근원적 타락으로 인하여 모두 죽고 썩을 것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에 영성을 입혀 주심으로 ‘썩을 것’과 ‘영원할 것’에 대하여 알게 하시고, 죽고 석을 육신을 가지고 진리적이며 생명적으로 살게 하여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것으로 바꾸어 주시려는데 있다.
(3) 초보수준에서 발전하여 깊은 경지로 들어가야 한다: 깊이있게 은사를 체험 하게되면 은사에 대한 가치관이 새롭게 바귀게 되고, 그래서 은사를 잘 사용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더 깊은 경지로 달려가는 것이다
(4) 아홉가지 은사를 개인에게 모두 주시려는 이유: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온전한 말씀 신앙을 자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5)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방언: 그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함. 기초방언, 나라방언, 만국방언(사도행전적 방언), 대신방언, 대인방언, 대물방언, 천국방언.
방언통역: 영으로 듣는 것과 육체에 허락하신 방언, 통역, 예언의 은사로 듣는 경우가 있다 예언: 생활 속에서의 적용(죄를 지적/사명, 소명제시/ 순종할 내용을 깨달음), 나타나는 형 태의 실제적인 예, 육신적인 활용은 피해야 함.
병 고침(신유은사): 병고침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질병에서 자유함, 하나님의 말씀을 믿 게 함, 복음전도에 효과적임,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확신부여와 가치관의 변화, 신유 은사가 임한 징후, 신유역사의 다양한 적용을 이해함(회개, 능력행함 등), 역사하심에 대한 겸손한 자세.
능력 행함: 악령들을 쫓아내고 육신의 볍을 쫓아내는 것을 가리킨다(행8:6-9, 13, 19:11- 12). 영 분별: 기본적으로 어떤 상태오 현상에 대하여 성령의 역사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분별 을 할 수 있게 된다. 예언의 은사와의 관련성이 있으며,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허 락하신 은사이다.
믿음: 하나님께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예언을 주셨을 때, 인간적, 논리적으로는 전혀 믿어 지지않는데, 성령님께서 우리속에서 믿게 하시며 큰 확신을 주시는 경우가 믿음의 은사이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 어느 개인이나 단체에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원 뜻을 알게 해 주 시는 은사이다. 구속사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 지식의 은사와 다르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하여 어느 개인이나 단체에 특별히 어떠한 말씀을 주시는 이유를 몰라서 묻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때로 환상을 통하여 또는 말 씀을 통하여 그의 형편과 사정을 알게 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떠한 의도 로 그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6) 은사 체험과 활용에 요구되는 기본적 태도: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몇 가지의 은사를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는 무엇이 되었든지 모두 귀하게 여겨야 한다. 때문에 주신 은사를 적극적으로 감사하며 의지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추구하면, 성령님께서 은사적인 자각을 열어주시고 때를 따라 은혜를 입혀주실 것이다.
2. 실용단계 은사 활용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도보다는 애 입장에서 판단하고 혼이 중심이 되어 육신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단계이다. 순종하는 만큼 체험하게 하신다.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만사가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인식한다.
(1) 육체와 영성, 그 고유한 영역: 영혼과 영성에 종속되어 있는 영역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영혼과 영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은사의 활용적 차원에서 영혼과 영성과의 유기적 관계이다
(2) 육체와 영성의 세부적 이해: 생명단계로 진행됨에 따라 놀랍게 변화받는 가치관, 단계별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이 필요하며, 자기과장을 경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모해야 한다.
(3) 영혼과 은사의 혼합과 종합을 분별해야 한다: 은사에 대한 이해는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육신적인 판단과 주관적인 시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역사는 하셔도 자기 자신은 진리와 생명에서 멀어지는 심각한 오류에 바지게 될 것이다. (4) 은사경험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경험하게 하셔서 목회현장에서나 삶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환자를 치료하게 하시는 등 실용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신다. 베드로의 앉은뱅이 일으킨 사건과 치유사역(행 3장, 9:32-42), 바울의 성령세례 받은 사건 이후전도 여행중 일으킨 사건(행 9:17, 13:11, 19:22)은 실용단계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5) 방언기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 나의 영이냐?, 성령이냐?. 두 종류의 성령충만과 관계, 은사적인 것과 영적 현상으로 개닫는 하나님의 응답.
(6) 성령님의 조명계시(Illumination): 기록된 성경 말씀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알게 하신다. 은사적인 차원에서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고전14:6, 25)으로써 생활상담에 관계된 예언적 계시와는 다르다.
(7) 은사 체험과 훈련: 하나님께서 약속 하신것 –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 심(욜2:28-32).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실 것을 약속(눅24:49),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음(행1:4-5)-복합적인면(내적,외적)으로 말씀하심,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겠음-(욜2:28) 인용한 구절. 회개와 간구를 통해서 맛보게 하심 – 오순절 사건, 성령체험(행2장), 은사충만(행4:31), 이방인의 은사충만(행8:16-17), 바울의 은사체험(행9:17), 고넬료의 은사체험(행10:2-7), 성령충만(행10:44-46).
(8) 아홉가지 은사를 모두 받아야함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아홉가지 은사를 입어야만이 실제적인 훈련이 될 수 있고, 기본적으로 은사를 경험함에 따라 성경을 볼 수 있는 신령한 눈이 열리기 때문이다.
(9) 은사에 대한 바른 인식:모든 은사는 덕을 세우는데에 사용하여야 한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헬라어 οικοδομε(오이코도메)로 “집을 짓는다”는 뜻이다. 즉 οίκος(오이코스,집)와 δομε(도메, 짓는다)의 합성어이다. 영어 성경은 덕을 세운다는 것을 직역하여 ‘edifies’(덕성을 함양하다 ; 명사형은 edifice, 건축물) 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또한 의역하여 ‘builds,집을 짓다’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즉 그리스도인은 영, 혼, 몸에 신령한 집을 지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은사를 활용하면 실제적인 경험을 하고 신앙생활에 유익을 얻어 우리의 믿음이 점점 더 풍성하게 나타나게 된다.
(10)실용단계에 머무르지 말고 진리단계에 나아갈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실용단계를 거쳐더 깊은 영적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11) 실용단계를 소홀히 하는데서 오는 위험: 개인의 간증과 주장에 지나치게 빠지며, 진리와 생명단계로 넘어가는데 지장을 초래한다.
(12) 선험(先驗)된 영적지식과 주의사항을 가르침 받았을 때의 장단점:
단점 = 지나친 경계로 인해 소극적인 태도가 나타날 수 잇고 그것 때문에 깊은 체험을 하지 못하 는 경우가 많아서 은사적인 경험에 대한 왁신이 부족하다.
장점 = 실수가 드물고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보다 빨리 생명단계에 이르게 한다.
(13) 은사적인 실수는 바른 신앙으로 돌이키게 하는 보호장치: 육신적 욕망이 작용하면 실수하게 하신다. 은사적인 실수는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필수 과정이다.
3. 진리단계 진리단계에서는 은사체험단계, 실용단계에서 경험했던 사건들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지기 시 작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건을 주실 때 그 사건속에 실용적 체험을 통해서 육신에게 말씀대로 된다는 확신부여와, 만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법대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인식한다.
(1) 삶 속에서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아 순종으로 행할 때 신령한 집이 지어져 감: (고전14:4; 엡4:29). 참고=건물(엡2:21), 덕을 세우기(롬15:2; 고전14:3, 12, 26; 고후12:19), 세움(엡4:12, 16, 29).
(2) 진리단계에서는 신령한 집을 짓는 일과 신부단장하는 일이 병행된다: 진리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옳은 삶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신부단장하는 생활이 시작된다.
(3) 신령한 집을 건축하는 방법과 목적: 재료는 하나님 말씀, 도구와 방법은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아 사는 삶, 목적은 하나님께서 기버하시는 산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함.
(4)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지 않는 삶은 곧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5) 은사와 영성적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불가분의 관계: 은사를 활용하지 안으면 영성적 대인 관계에 있어서 구체넉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6) 하나님께서 문제를 주시는 이유: 진리단계로 이끄시려는 데 있으며, 슬무없는 육신적 가치관을 벗어버리도록 하시는데 있다. ::::::: 고난은 축복이다 :::::::
(7)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도가 되려는 거룩한 욕망을 가져야 한다.
(8)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된다”는 표현에 대하여: 영성적 은사체험, 실용, 진리, 생명단계가 복합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말한다. 진리가 설계도면이면, 생명은 실제이고, 진리는 건축되어가는 단계이면, 생명은 성전으로서의 역활을 하는 단계이다.
(9) 진리단계를 풍성하게 경험하면 생명단계에 이른다: 진리가 풍성해지면 그것이 곧 생명이며, 생명화는 반드시 진리에 입각하여 나타난다. 즉 진리에 입각하지 않고 생명이 나타난다면 그것은기적에 불과하다.
4. 생명단계 신령한 집을 건축하는 마무리 과정을 거쳐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고, 아울러 성령님의 지도와 인 도(레마)를 받아 생명적인 삶을 살게 되는 단계로써 말씀을 지켜 행하면 행하는 데로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생명으로 바뀌는 단계이다(요14:23; 고전3:16-17; 고후5:1-4, 9:10; 빌4:18; 롬12:1-3).
(1) 생명단계에서 은사의 역할(役割): 영적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적 삶을 가능케 한다(요4:23-24), 흰 세마포를 입어가는 삶(영적으로 옳은 행실)을 가능케 한다(계19:7-8), 버릴 것이 없는 생명적 삶을 살게 한다(고후5:4-5).
(2) “은사가 생명이 되었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까?: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묻고 응답받은데로 행하는 삶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 신분에 맞는 삶을 살고 이 다섯가지 신분의 삶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살아질 때를 말하는 것이다.
(3) 은사가 생명단계에 들어가면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는 범위가 넓게 확대된다.
(4) 은사에 대한 바른 구분: * 사명(使命)을 뜻하는 은사(엡4:11-12) = 직임. * 소명(召命)을 뜻하는 은사(롬12:3-8). * 달란트 개념의 은사(고전12:7-12)와 총체적인 개념의 은사(롬8:32). (5) 개인상담을 통하여 영적, 은사적인 상태를 알게됨: 성경은 유기적, 만전영감으로 되었음(고전2:10-11; 빌4:3).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통하여 상대방의 영적상태를 알 수 있다.
*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 하나님과 영적 진리에 대해 분명히 전달해 주는 계시.
* 영감(Inspiration): 성경 저자들이 그 원본을 기록할 때 저들의 인품과 문체로써 저술하였으되 성령님께서 보호 인도하심으로 성경이 오류 없이 권위있고 진실한 기록이 되게 하셨다는 것.
* 축자 영감(逐字靈感): 성경이 축자적으로 영감되었다는 말. 원본의 각 단어와 문자들이 성경 저자들의 성격과 특징들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성령의 감동으로 오류없이 영감되어진 것.
* 만전 영감(萬全靈感): 말씀이 계시될 때 역사적으로 그 당시에 실제로 효력이 있었던 것과 똑 같은 효력이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1) 철저히 타락한 존재: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 죄성, 악성, 독성, 부패성 등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철저하게 나를 부인하고, 육신의 자아를 파쇄시킴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2) 육체에 영성을 입혀주시려는 이유: 사람의 육체와 육체가 하는 모든 일은 근원적 타락으로 인하여 모두 죽고 썩을 것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에 영성을 입혀 주심으로 ‘썩을 것’과 ‘영원할 것’에 대하여 알게 하시고, 죽고 석을 육신을 가지고 진리적이며 생명적으로 살게 하여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것으로 바꾸어 주시려는데 있다.
(3) 초보수준에서 발전하여 깊은 경지로 들어가야 한다: 깊이있게 은사를 체험 하게되면 은사에 대한 가치관이 새롭게 바귀게 되고, 그래서 은사를 잘 사용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더 깊은 경지로 달려가는 것이다
(4) 아홉가지 은사를 개인에게 모두 주시려는 이유: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온전한 말씀 신앙을 자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5)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방언: 그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함. 기초방언, 나라방언, 만국방언(사도행전적 방언), 대신방언, 대인방언, 대물방언, 천국방언.
방언통역: 영으로 듣는 것과 육체에 허락하신 방언, 통역, 예언의 은사로 듣는 경우가 있다 예언: 생활 속에서의 적용(죄를 지적/사명, 소명제시/ 순종할 내용을 깨달음), 나타나는 형 태의 실제적인 예, 육신적인 활용은 피해야 함.
병 고침(신유은사): 병고침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질병에서 자유함, 하나님의 말씀을 믿 게 함, 복음전도에 효과적임,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확신부여와 가치관의 변화, 신유 은사가 임한 징후, 신유역사의 다양한 적용을 이해함(회개, 능력행함 등), 역사하심에 대한 겸손한 자세.
능력 행함: 악령들을 쫓아내고 육신의 볍을 쫓아내는 것을 가리킨다(행8:6-9, 13, 19:11- 12). 영 분별: 기본적으로 어떤 상태오 현상에 대하여 성령의 역사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분별 을 할 수 있게 된다. 예언의 은사와의 관련성이 있으며,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허 락하신 은사이다.
믿음: 하나님께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예언을 주셨을 때, 인간적, 논리적으로는 전혀 믿어 지지않는데, 성령님께서 우리속에서 믿게 하시며 큰 확신을 주시는 경우가 믿음의 은사이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 어느 개인이나 단체에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원 뜻을 알게 해 주 시는 은사이다. 구속사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 지식의 은사와 다르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하여 어느 개인이나 단체에 특별히 어떠한 말씀을 주시는 이유를 몰라서 묻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때로 환상을 통하여 또는 말 씀을 통하여 그의 형편과 사정을 알게 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떠한 의도 로 그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6) 은사 체험과 활용에 요구되는 기본적 태도: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몇 가지의 은사를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는 무엇이 되었든지 모두 귀하게 여겨야 한다. 때문에 주신 은사를 적극적으로 감사하며 의지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추구하면, 성령님께서 은사적인 자각을 열어주시고 때를 따라 은혜를 입혀주실 것이다.
2. 실용단계 은사 활용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도보다는 애 입장에서 판단하고 혼이 중심이 되어 육신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단계이다. 순종하는 만큼 체험하게 하신다.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만사가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인식한다.
(1) 육체와 영성, 그 고유한 영역: 영혼과 영성에 종속되어 있는 영역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영혼과 영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은사의 활용적 차원에서 영혼과 영성과의 유기적 관계이다
(2) 육체와 영성의 세부적 이해: 생명단계로 진행됨에 따라 놀랍게 변화받는 가치관, 단계별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이 필요하며, 자기과장을 경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모해야 한다.
(3) 영혼과 은사의 혼합과 종합을 분별해야 한다: 은사에 대한 이해는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육신적인 판단과 주관적인 시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역사는 하셔도 자기 자신은 진리와 생명에서 멀어지는 심각한 오류에 바지게 될 것이다. (4) 은사경험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경험하게 하셔서 목회현장에서나 삶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환자를 치료하게 하시는 등 실용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신다. 베드로의 앉은뱅이 일으킨 사건과 치유사역(행 3장, 9:32-42), 바울의 성령세례 받은 사건 이후전도 여행중 일으킨 사건(행 9:17, 13:11, 19:22)은 실용단계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5) 방언기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 나의 영이냐?, 성령이냐?. 두 종류의 성령충만과 관계, 은사적인 것과 영적 현상으로 개닫는 하나님의 응답.
(6) 성령님의 조명계시(Illumination): 기록된 성경 말씀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알게 하신다. 은사적인 차원에서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고전14:6, 25)으로써 생활상담에 관계된 예언적 계시와는 다르다.
(7) 은사 체험과 훈련: 하나님께서 약속 하신것 –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 심(욜2:28-32).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실 것을 약속(눅24:49),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음(행1:4-5)-복합적인면(내적,외적)으로 말씀하심,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겠음-(욜2:28) 인용한 구절. 회개와 간구를 통해서 맛보게 하심 – 오순절 사건, 성령체험(행2장), 은사충만(행4:31), 이방인의 은사충만(행8:16-17), 바울의 은사체험(행9:17), 고넬료의 은사체험(행10:2-7), 성령충만(행10:44-46).
(8) 아홉가지 은사를 모두 받아야함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아홉가지 은사를 입어야만이 실제적인 훈련이 될 수 있고, 기본적으로 은사를 경험함에 따라 성경을 볼 수 있는 신령한 눈이 열리기 때문이다.
(9) 은사에 대한 바른 인식:모든 은사는 덕을 세우는데에 사용하여야 한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헬라어 οικοδομε(오이코도메)로 “집을 짓는다”는 뜻이다. 즉 οίκος(오이코스,집)와 δομε(도메, 짓는다)의 합성어이다. 영어 성경은 덕을 세운다는 것을 직역하여 ‘edifies’(덕성을 함양하다 ; 명사형은 edifice, 건축물) 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또한 의역하여 ‘builds,집을 짓다’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즉 그리스도인은 영, 혼, 몸에 신령한 집을 지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은사를 활용하면 실제적인 경험을 하고 신앙생활에 유익을 얻어 우리의 믿음이 점점 더 풍성하게 나타나게 된다.
(10)실용단계에 머무르지 말고 진리단계에 나아갈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실용단계를 거쳐더 깊은 영적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11) 실용단계를 소홀히 하는데서 오는 위험: 개인의 간증과 주장에 지나치게 빠지며, 진리와 생명단계로 넘어가는데 지장을 초래한다.
(12) 선험(先驗)된 영적지식과 주의사항을 가르침 받았을 때의 장단점:
단점 = 지나친 경계로 인해 소극적인 태도가 나타날 수 잇고 그것 때문에 깊은 체험을 하지 못하 는 경우가 많아서 은사적인 경험에 대한 왁신이 부족하다.
장점 = 실수가 드물고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보다 빨리 생명단계에 이르게 한다.
(13) 은사적인 실수는 바른 신앙으로 돌이키게 하는 보호장치: 육신적 욕망이 작용하면 실수하게 하신다. 은사적인 실수는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필수 과정이다.
3. 진리단계 진리단계에서는 은사체험단계, 실용단계에서 경험했던 사건들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지기 시 작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건을 주실 때 그 사건속에 실용적 체험을 통해서 육신에게 말씀대로 된다는 확신부여와, 만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법대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인식한다.
(1) 삶 속에서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아 순종으로 행할 때 신령한 집이 지어져 감: (고전14:4; 엡4:29). 참고=건물(엡2:21), 덕을 세우기(롬15:2; 고전14:3, 12, 26; 고후12:19), 세움(엡4:12, 16, 29).
(2) 진리단계에서는 신령한 집을 짓는 일과 신부단장하는 일이 병행된다: 진리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옳은 삶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신부단장하는 생활이 시작된다.
(3) 신령한 집을 건축하는 방법과 목적: 재료는 하나님 말씀, 도구와 방법은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아 사는 삶, 목적은 하나님께서 기버하시는 산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함.
(4)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지 않는 삶은 곧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5) 은사와 영성적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불가분의 관계: 은사를 활용하지 안으면 영성적 대인 관계에 있어서 구체넉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6) 하나님께서 문제를 주시는 이유: 진리단계로 이끄시려는 데 있으며, 슬무없는 육신적 가치관을 벗어버리도록 하시는데 있다. ::::::: 고난은 축복이다 :::::::
(7)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도가 되려는 거룩한 욕망을 가져야 한다.
(8)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된다”는 표현에 대하여: 영성적 은사체험, 실용, 진리, 생명단계가 복합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말한다. 진리가 설계도면이면, 생명은 실제이고, 진리는 건축되어가는 단계이면, 생명은 성전으로서의 역활을 하는 단계이다.
(9) 진리단계를 풍성하게 경험하면 생명단계에 이른다: 진리가 풍성해지면 그것이 곧 생명이며, 생명화는 반드시 진리에 입각하여 나타난다. 즉 진리에 입각하지 않고 생명이 나타난다면 그것은기적에 불과하다.
4. 생명단계 신령한 집을 건축하는 마무리 과정을 거쳐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고, 아울러 성령님의 지도와 인 도(레마)를 받아 생명적인 삶을 살게 되는 단계로써 말씀을 지켜 행하면 행하는 데로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생명으로 바뀌는 단계이다(요14:23; 고전3:16-17; 고후5:1-4, 9:10; 빌4:18; 롬12:1-3).
(1) 생명단계에서 은사의 역할(役割): 영적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적 삶을 가능케 한다(요4:23-24), 흰 세마포를 입어가는 삶(영적으로 옳은 행실)을 가능케 한다(계19:7-8), 버릴 것이 없는 생명적 삶을 살게 한다(고후5:4-5).
(2) “은사가 생명이 되었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까?: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묻고 응답받은데로 행하는 삶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 신분에 맞는 삶을 살고 이 다섯가지 신분의 삶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살아질 때를 말하는 것이다.
(3) 은사가 생명단계에 들어가면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는 범위가 넓게 확대된다.
(4) 은사에 대한 바른 구분: * 사명(使命)을 뜻하는 은사(엡4:11-12) = 직임. * 소명(召命)을 뜻하는 은사(롬12:3-8). * 달란트 개념의 은사(고전12:7-12)와 총체적인 개념의 은사(롬8:32). (5) 개인상담을 통하여 영적, 은사적인 상태를 알게됨: 성경은 유기적, 만전영감으로 되었음(고전2:10-11; 빌4:3).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통하여 상대방의 영적상태를 알 수 있다.
*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 하나님과 영적 진리에 대해 분명히 전달해 주는 계시.
* 영감(Inspiration): 성경 저자들이 그 원본을 기록할 때 저들의 인품과 문체로써 저술하였으되 성령님께서 보호 인도하심으로 성경이 오류 없이 권위있고 진실한 기록이 되게 하셨다는 것.
* 축자 영감(逐字靈感): 성경이 축자적으로 영감되었다는 말. 원본의 각 단어와 문자들이 성경 저자들의 성격과 특징들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성령의 감동으로 오류없이 영감되어진 것.
* 만전 영감(萬全靈感): 말씀이 계시될 때 역사적으로 그 당시에 실제로 효력이 있었던 것과 똑 같은 효력이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제 1장 영혼과 영성
1. 자연상태:
영혼과 영성에 있어서 ‘자연상태’란 영혼의 “자기존재”을 발견하고 인식하는 단계이다. 영혼의
자기 발견단계, 혹은 영혼의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 또는 영, 혼
육으로 포괄적인 안목을 가지고 바라보면서도 그 영혼의 존재에 관하여 인식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1) 영성적 삶의 부재: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며, 영혼의 미성숙한 이유 때문이다.
(2)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과제들: 영혼에 대한 인식과 자기 발견을 위한 갈망 (전12:6-7; 눅16:19-31; 고후12:1-4; 계1:10-20).
(3) 내적 경험의 사례와 그 유익
(4) 실재하는 영혼 발견: 본체적 분리- 입신, 엘리바스. 인격적 분리-내적분리,
(5) 진리와 생명된 자의 삶의 능력: 다섯가지 신분의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실제
(6) 영의 능력: 영혼에 대한 고도의 지능적인 현상과 그 사례.
(7) 영성형성의 두 가지 방법: 장시간에 걸쳐 주관적으로 깊은 것을 체험시키는 방법과 단시간 동안 부분적인 경험을 동반하고 영성적 지식고 복함시키는 방법.
(8) 영혼에 관한 잘못된 고정관념의 교정: 자기가 체험하고 있는 육신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윤리적으로 고상한 것을 영적인 것이라고 오해한다.(롬8:5-7; 요4:24) (9) 영성 형성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변화, 훈련, 성장, 성숙되어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 신분에 맞게 살아가게 하는데 있다.
(10) 단계별 기본체험과 계속체험.
(11) 영, 혼, 몸의 개체와 연합체로서의 종합적 이해(히4:12; 살전5:23).
(12)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별함: 영적인 것은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육적이라는 말은 육신적인, 즉 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13) 영과 영혼: “영”은 사람의 ‘영’을 말한다. ‘영혼’은 영과 혼을 통칭해서 말한다.
(14)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타락전에는 영혼이 온 몸을 주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사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조금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었다(롬3:10-12; 렘31:31-34, 36:26-27).
(15) 영혼의 거듭남(重生):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영교 기능), 영 안에서 일 어나는 하나님의 생명의 실제.
(16) 영에 대한 다양한 인식: 영은 혼의 속된 속성을 사랑으로 품으며, 혼은 영혼에게 본연의 종속적 관계로 되돌아가 영혼에게 의탁함으로 영 중심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약1:2-4)
(17) 영혼의 기능적인 면, 인격적인 면: 영의 기능- 양심(良心Conscience). 양심이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능, 직관(直觀,Intuition), 직관이란 영적 실제를 감지(感知)할 수 있는 기능. 영교(靈交,Communion), 영교란 우리의 영(속사람)에서 행하여지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은 이 기능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영의 인격요소: 지성(知性,Intellect), 감정(感精,feeling, emotion), 의지(意志,will,volition). 영혼은 독자적인 지성, 감정, 의지의 인격적 요소(눅16:19-31)를 가지고 있다.
혼(魂)의 기능: 인간의 혼은 흙에 속하고 세상적이며 유한하고 보이기 좋아하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민감한 반응을 보여도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혼의 지각을 통해서는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혼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환경을 선택하고 개척해 나가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사람과 개체적인 인격체로서 구별되어지며, 영의 소욕은 혼을 거치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일 수 없다.
혼의 인격요소: 지성(사고 할 수 있는 능력), 감정(좋아하고 싫어하는 기능), 의지(내 외적 의사를 결정,선택)
(18) 타락한 후 영의 통제를 벗어나 사단의 노예가 된 혼: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범죄 한 이후로는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인류전체가 사단의 영향권아래 놓이게 되었다. (19) 혼의 범죄는 영혼을 포함한 전인적인 범죄로 간주된다: 사람이 일단 죄를 범하면 영, 혼, 몸이 총체적으로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 된다.
(20) 미성숙한 영혼의 허약한 제어능력(制御能力): 혼은 세상적이고, 계산적이며, 이기적이기 때문에 영혼이 미성숙할 때는 제어능력이 없다.
(21) 성숙한 영혼이 누리는 안식과 자기의 일을 쉬는 혼: 장선한 영혼은 성령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영으로 행하면 온전한 행함이 되고, 그 품격(品格)도 높은 것이라는 것을 혼의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경험을 하게 되고, 혼이 영의 판단을 수용하고 결정에 따르게 된다.
(22) 성령님께 길들여 지는 삶: 그리스도인은 자아 파쇄의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로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혼과 몸도 더불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삶에 익숙해져 간다.
(23) 영적 삶의 흐름과 혼의 역활: 영이 전(全)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면 반드시 혼의 찬성과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 혼의 동의가 없으면 영은 혼과 몸을 이끌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24) 자유의지와 영성 형성의 함수관계: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자신의 뜻을 스스로 펼치고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혼의 한계상황을 우리가 바로 알아서 의지를 동원하여 성령님께 붙잡힌바되기를 사모함으로 나아가, 즉 영성이 형성이 되면 혼의 지유의지는 영의 것으로 돌이킬 수 있는 주요한 기점이 된다.
(25) 혼과 자아의식(自我意識): 사람은 세사에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길들여지고 궁극적으로 파쇄 해야할 왜곡된 자아의식을 형성하면서 삶을 살아간다. 즉, ‘혼’과 ‘자아의식’을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혼은 성숙되어져야 하고, 자아는 파쇄되어야 하며, 영은 강화되어야 한다.
(26) 영의 인격과 혼의 인격:사람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는 혼에 있지 않고, 영의 성향을 이해하는 데 있다. 영성적인 변화와 성장을 거치지 않은 영의 인격은 혼의 인격과 유사하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영성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느껴지고, 체험하여 분별하는 능력을 가짐으로, 내면적인 인격적 분리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27) 혼의 연구 업적에 대한 영성적 평가: 성령의 다루심이 없는 혼은 무가치하다는 것. (28) 육신 중심의 삶의 결과: 육신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마7:24-27; 합1:11; 딤후2:5 마24:1-2; 고전3:10-17; 참고 = 요14:23).
(29) 영 중심의 생활을 가능케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은 육신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영 중심으로 돌려놓는 중요한 역활을 한다(롬8:2, 6-8, 10, 14; 시119:56; 엡4:13-24). (30) 영적성장의 단계별 체험: 신앙은 내면적인 문제이기 대문에 어떠한 실증적 자료를 제시 한다는 것을 상당히 어렵고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임상적 자료= 애굽- 광야단계: 육신중심, 주종관계. 가나안 1-1/2-5단계: 부부관계-신혼생활. 가나안 2-6/3-5 단계: 영혼의 사고가 발전해가며 영혼 주체가 되어간다. 가나안 3-6/4-10 단계: 부부관계-사랑의 절정단계
(31) 영혼과 육체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속되었던 인류의 공동관심사는 인간의 본질이었다. 인간은 저마다의 종교와 철학을 통하여 육체와 영혼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다라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스철학적인 해석과 유대교, 기독교적인 해석이 오늘날도 변함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잇다.
결론 :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으로서 자신을 통제(統制)하고 제어(制御)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입장에서 볼 때 혹 하나님께 합한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이 가득 차 있더라도, 우리의 영,혼, 몸이 종합적인 영성적 체질로 바뀌어지지 않는다면 생활속에서 구체적인 영성적 삶을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과정이 중요하다. 과정을 무시한 좋은 결과란 있을 수 없다.
2. 윤리단계 “윤리단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의 인격이 자연상태에서 윤리적으로 발전한 단계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말씀을 영혼의 지성과 이성을 통하여 윤리적 차원에서 지켜 행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1) 윤리단계의 특징:
① 영혼의 흥분으로 인하여 삶의 자세가 적극적인 태도로 변한다.
② 윤리와 단계의 흠 – 조건부적 기대심리.
③ 하나님께 대하여 첫사랑을 느끼게 된다 - *가족보다 진정으로 더 가까이 해야 할 하나님. *가족에 대한 사랑도 진리적, 생명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2) 윤리단계의 구체적 양태: * 많은 경험 속에 영혼과 육체의 의식을 구분짓는 능력을 가진다. * 의식이 분리된 후 독립적이고도 복합적인 사고를 가진다.
(3) 많은 체험 과정 속에서의 윤리단계에 대한 다양한 인식: * 단계별 영적 수준에 맞는 원활한 삶을 위한 적당한 긴장의 필요성. * 성장해도 모든 단계를 복합적으로 경험하는 것임: 확대된 이해. * 윤리단계에 대한 풍성한 이해가 필요.
(4) 윤리단계에서의 말씀 이해: 윤리적 차원은 어디까지나 성경말씀을 윤리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진리적이며 생명적인 차원으로 빨리 발전되어야 한다.
(5)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농도 점검: 지극히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던 우리들이 더욱 깊이 있고 다양하게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하여 자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 진리단계 * 영혼이 중심이 되어 말씀을 지키는 초기단계. * 신령한 짐으로 지어지기 시작하는 초기단계. * 그리스도인의 다섯가지 신분으로 살아드리기 시작하는 초기단계.
(1) 진리단계의 자아파쇄: 성령님께서 환경, 조건, 사건을 조성하셔서 우리 혼에 붙어있는 육적 자아를 파쇄하시므로 속사람(영혼)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준다.
2) 겉사람과 속사람의 인격분리: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에 번갈아 순종하면서 점차적으로 영 중심으로 바뀌어져가는 가운데, 육체의 인격(겉사람)고 영혼의 인격(속사람)이 분명하게 분리되어 쉽게 영혼의 의도를 따라 행할 수 있게 된다.
(3) 성경말씀을 진리적 차원으로 경험한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깨닫는다(욥40:3-5, 42:1-6; 시119:103-105, 162).
(4) 신령한 집으로 지어진다는 것: 우리가 영 중심으로 가치관을 바꾸고(지속적인 영적 성장) 순종하여 열심히 달려가면 과거에 지식적으로만 이해되어지던 신령한 집을 짓는 생활이 나의 삶 가운데 영적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성숙하고 장성하여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바(요14:23) 신령한 집이 지어지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주내재하심으로 그리스도인의 다석가지 신분에 맞게 당당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5) 다섯 가지 신분을 가지고 사는 삶: 하나님의 자녀(요1:12), 왕, 제사장(벧전 2:9), 예수님의 신부(계19:7-8, 21:9), 거룩한 성전(엡2:21-22).
(6) 진리 단계에서 힘써야 할 부분: 자기자신과 죄에 대한 싸움의 반복훈련, 말씀대로 살기를 사모함,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철저히 받음.
(7) 육신의 욕망을 취할 때 영적 분별이 흐려진다: 한결같이 신령한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욕망이라는 복병이 늘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육신의 욕망을 부추기는 사탄의 궤계를 물리쳐야 한다.
(8) 생명적 삶에 대한 도전과 인내: 예수님의 삶 전체는 영이요 생명이었다(요6:63). 우리의 모든 삶이 영성을 덧입고 예수님을 닮을 때 예수님처럼 생명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9) 영성훈련은 방법론이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이다:
(10) 신련한 집: 학개서와 히브리서에 나타난 성경의 근거(학1:1-11; 히6:9, 19-20) 지성소 / 하늘보좌 – 영 – 대제사장 / 예수 그리스도 성 소 / 현세천국 – 혼 – 제사장. 성전뜰 / 세상나라 – 몸 – 이방인, 유대인.
(11) 신령한 집을 건축하는 방법: 구약에서는 그 재료가 나무나 돌이었으며, 기술적으로는 성령님의 조명을 통하여 건축하였다. 신약시대의 재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재료가 되어(벧전2:2)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듣고 먹음으로(영적으로) 신령한 집이 지어져 가는 것이다.
(12) 구약 성경의 다섯 가지 해석 방법과 실제 생활에서의 적용하는 삶(신령한 집을 건축하는 방법에 대하여): 역사적, 문자적, 문법적 성경해석, 구속사적, 신학적, 영적 비유, 영적 실제.
4. 생명단계 생명단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약속대로 우리안에 신령한 집이 지어져서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 신분, 즉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의 왕으로,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룩한 성전으로 다양하게 삶을 살아가는 단계로써 영적으로 옳은 행실(계19:8)을 통해 신부단장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영 중심으로 하는 모든 것이 진리와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지는 단계이다. 또한 진리단계에서 시작되 stlsfudgks 집을 건축하는 삶이 완성되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주내재(內住內在)”하시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1) 생명단계에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 신령적 측면에서 윤리도덕을 평가하게 된다. 모든일을 성령님께 철저히 의탁하게 된다. 모든 삶을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안목이 열린다.
(2) 영적 실제의 살이란? :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 영 중심으로 행할 때 진리와 생명이 되는 삶, 은사적으로는 레마를 받아(성령님의 지도와 인도) 살아가는 삶.
(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영원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데 있다(요14:23, 17:11).
(4) 개인의 영적 성장사례: (개인적 …)
(5) 영성목회 현장에서의 소고(小鼓): 영성적인 것을 육신적인 것으로 이해하려함, 영성훈련의 대중화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 영성적인 것만 사역으리 목표를 삼고 진행, 풍성한 경험은 개인의 열심 여하에 있다.
(1) 영성적 삶의 부재: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며, 영혼의 미성숙한 이유 때문이다.
(2)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과제들: 영혼에 대한 인식과 자기 발견을 위한 갈망 (전12:6-7; 눅16:19-31; 고후12:1-4; 계1:10-20).
(3) 내적 경험의 사례와 그 유익
(4) 실재하는 영혼 발견: 본체적 분리- 입신, 엘리바스. 인격적 분리-내적분리,
(5) 진리와 생명된 자의 삶의 능력: 다섯가지 신분의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실제
(6) 영의 능력: 영혼에 대한 고도의 지능적인 현상과 그 사례.
(7) 영성형성의 두 가지 방법: 장시간에 걸쳐 주관적으로 깊은 것을 체험시키는 방법과 단시간 동안 부분적인 경험을 동반하고 영성적 지식고 복함시키는 방법.
(8) 영혼에 관한 잘못된 고정관념의 교정: 자기가 체험하고 있는 육신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윤리적으로 고상한 것을 영적인 것이라고 오해한다.(롬8:5-7; 요4:24) (9) 영성 형성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변화, 훈련, 성장, 성숙되어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 신분에 맞게 살아가게 하는데 있다.
(10) 단계별 기본체험과 계속체험.
(11) 영, 혼, 몸의 개체와 연합체로서의 종합적 이해(히4:12; 살전5:23).
(12)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별함: 영적인 것은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육적이라는 말은 육신적인, 즉 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13) 영과 영혼: “영”은 사람의 ‘영’을 말한다. ‘영혼’은 영과 혼을 통칭해서 말한다.
(14)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타락전에는 영혼이 온 몸을 주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사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조금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었다(롬3:10-12; 렘31:31-34, 36:26-27).
(15) 영혼의 거듭남(重生):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영교 기능), 영 안에서 일 어나는 하나님의 생명의 실제.
(16) 영에 대한 다양한 인식: 영은 혼의 속된 속성을 사랑으로 품으며, 혼은 영혼에게 본연의 종속적 관계로 되돌아가 영혼에게 의탁함으로 영 중심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약1:2-4)
(17) 영혼의 기능적인 면, 인격적인 면: 영의 기능- 양심(良心Conscience). 양심이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능, 직관(直觀,Intuition), 직관이란 영적 실제를 감지(感知)할 수 있는 기능. 영교(靈交,Communion), 영교란 우리의 영(속사람)에서 행하여지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은 이 기능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영의 인격요소: 지성(知性,Intellect), 감정(感精,feeling, emotion), 의지(意志,will,volition). 영혼은 독자적인 지성, 감정, 의지의 인격적 요소(눅16:19-31)를 가지고 있다.
혼(魂)의 기능: 인간의 혼은 흙에 속하고 세상적이며 유한하고 보이기 좋아하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민감한 반응을 보여도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혼의 지각을 통해서는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혼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환경을 선택하고 개척해 나가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사람과 개체적인 인격체로서 구별되어지며, 영의 소욕은 혼을 거치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일 수 없다.
혼의 인격요소: 지성(사고 할 수 있는 능력), 감정(좋아하고 싫어하는 기능), 의지(내 외적 의사를 결정,선택)
(18) 타락한 후 영의 통제를 벗어나 사단의 노예가 된 혼: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범죄 한 이후로는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인류전체가 사단의 영향권아래 놓이게 되었다. (19) 혼의 범죄는 영혼을 포함한 전인적인 범죄로 간주된다: 사람이 일단 죄를 범하면 영, 혼, 몸이 총체적으로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 된다.
(20) 미성숙한 영혼의 허약한 제어능력(制御能力): 혼은 세상적이고, 계산적이며, 이기적이기 때문에 영혼이 미성숙할 때는 제어능력이 없다.
(21) 성숙한 영혼이 누리는 안식과 자기의 일을 쉬는 혼: 장선한 영혼은 성령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영으로 행하면 온전한 행함이 되고, 그 품격(品格)도 높은 것이라는 것을 혼의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경험을 하게 되고, 혼이 영의 판단을 수용하고 결정에 따르게 된다.
(22) 성령님께 길들여 지는 삶: 그리스도인은 자아 파쇄의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로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혼과 몸도 더불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삶에 익숙해져 간다.
(23) 영적 삶의 흐름과 혼의 역활: 영이 전(全)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면 반드시 혼의 찬성과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 혼의 동의가 없으면 영은 혼과 몸을 이끌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24) 자유의지와 영성 형성의 함수관계: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자신의 뜻을 스스로 펼치고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혼의 한계상황을 우리가 바로 알아서 의지를 동원하여 성령님께 붙잡힌바되기를 사모함으로 나아가, 즉 영성이 형성이 되면 혼의 지유의지는 영의 것으로 돌이킬 수 있는 주요한 기점이 된다.
(25) 혼과 자아의식(自我意識): 사람은 세사에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길들여지고 궁극적으로 파쇄 해야할 왜곡된 자아의식을 형성하면서 삶을 살아간다. 즉, ‘혼’과 ‘자아의식’을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혼은 성숙되어져야 하고, 자아는 파쇄되어야 하며, 영은 강화되어야 한다.
(26) 영의 인격과 혼의 인격:사람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는 혼에 있지 않고, 영의 성향을 이해하는 데 있다. 영성적인 변화와 성장을 거치지 않은 영의 인격은 혼의 인격과 유사하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영성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느껴지고, 체험하여 분별하는 능력을 가짐으로, 내면적인 인격적 분리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27) 혼의 연구 업적에 대한 영성적 평가: 성령의 다루심이 없는 혼은 무가치하다는 것. (28) 육신 중심의 삶의 결과: 육신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마7:24-27; 합1:11; 딤후2:5 마24:1-2; 고전3:10-17; 참고 = 요14:23).
(29) 영 중심의 생활을 가능케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은 육신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영 중심으로 돌려놓는 중요한 역활을 한다(롬8:2, 6-8, 10, 14; 시119:56; 엡4:13-24). (30) 영적성장의 단계별 체험: 신앙은 내면적인 문제이기 대문에 어떠한 실증적 자료를 제시 한다는 것을 상당히 어렵고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임상적 자료= 애굽- 광야단계: 육신중심, 주종관계. 가나안 1-1/2-5단계: 부부관계-신혼생활. 가나안 2-6/3-5 단계: 영혼의 사고가 발전해가며 영혼 주체가 되어간다. 가나안 3-6/4-10 단계: 부부관계-사랑의 절정단계
(31) 영혼과 육체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속되었던 인류의 공동관심사는 인간의 본질이었다. 인간은 저마다의 종교와 철학을 통하여 육체와 영혼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다라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스철학적인 해석과 유대교, 기독교적인 해석이 오늘날도 변함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잇다.
결론 :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으로서 자신을 통제(統制)하고 제어(制御)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입장에서 볼 때 혹 하나님께 합한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이 가득 차 있더라도, 우리의 영,혼, 몸이 종합적인 영성적 체질로 바뀌어지지 않는다면 생활속에서 구체적인 영성적 삶을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과정이 중요하다. 과정을 무시한 좋은 결과란 있을 수 없다.
2. 윤리단계 “윤리단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의 인격이 자연상태에서 윤리적으로 발전한 단계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말씀을 영혼의 지성과 이성을 통하여 윤리적 차원에서 지켜 행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1) 윤리단계의 특징:
① 영혼의 흥분으로 인하여 삶의 자세가 적극적인 태도로 변한다.
② 윤리와 단계의 흠 – 조건부적 기대심리.
③ 하나님께 대하여 첫사랑을 느끼게 된다 - *가족보다 진정으로 더 가까이 해야 할 하나님. *가족에 대한 사랑도 진리적, 생명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2) 윤리단계의 구체적 양태: * 많은 경험 속에 영혼과 육체의 의식을 구분짓는 능력을 가진다. * 의식이 분리된 후 독립적이고도 복합적인 사고를 가진다.
(3) 많은 체험 과정 속에서의 윤리단계에 대한 다양한 인식: * 단계별 영적 수준에 맞는 원활한 삶을 위한 적당한 긴장의 필요성. * 성장해도 모든 단계를 복합적으로 경험하는 것임: 확대된 이해. * 윤리단계에 대한 풍성한 이해가 필요.
(4) 윤리단계에서의 말씀 이해: 윤리적 차원은 어디까지나 성경말씀을 윤리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진리적이며 생명적인 차원으로 빨리 발전되어야 한다.
(5)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농도 점검: 지극히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던 우리들이 더욱 깊이 있고 다양하게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하여 자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 진리단계 * 영혼이 중심이 되어 말씀을 지키는 초기단계. * 신령한 짐으로 지어지기 시작하는 초기단계. * 그리스도인의 다섯가지 신분으로 살아드리기 시작하는 초기단계.
(1) 진리단계의 자아파쇄: 성령님께서 환경, 조건, 사건을 조성하셔서 우리 혼에 붙어있는 육적 자아를 파쇄하시므로 속사람(영혼)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준다.
2) 겉사람과 속사람의 인격분리: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에 번갈아 순종하면서 점차적으로 영 중심으로 바뀌어져가는 가운데, 육체의 인격(겉사람)고 영혼의 인격(속사람)이 분명하게 분리되어 쉽게 영혼의 의도를 따라 행할 수 있게 된다.
(3) 성경말씀을 진리적 차원으로 경험한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깨닫는다(욥40:3-5, 42:1-6; 시119:103-105, 162).
(4) 신령한 집으로 지어진다는 것: 우리가 영 중심으로 가치관을 바꾸고(지속적인 영적 성장) 순종하여 열심히 달려가면 과거에 지식적으로만 이해되어지던 신령한 집을 짓는 생활이 나의 삶 가운데 영적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성숙하고 장성하여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바(요14:23) 신령한 집이 지어지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주내재하심으로 그리스도인의 다석가지 신분에 맞게 당당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5) 다섯 가지 신분을 가지고 사는 삶: 하나님의 자녀(요1:12), 왕, 제사장(벧전 2:9), 예수님의 신부(계19:7-8, 21:9), 거룩한 성전(엡2:21-22).
(6) 진리 단계에서 힘써야 할 부분: 자기자신과 죄에 대한 싸움의 반복훈련, 말씀대로 살기를 사모함,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철저히 받음.
(7) 육신의 욕망을 취할 때 영적 분별이 흐려진다: 한결같이 신령한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욕망이라는 복병이 늘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육신의 욕망을 부추기는 사탄의 궤계를 물리쳐야 한다.
(8) 생명적 삶에 대한 도전과 인내: 예수님의 삶 전체는 영이요 생명이었다(요6:63). 우리의 모든 삶이 영성을 덧입고 예수님을 닮을 때 예수님처럼 생명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9) 영성훈련은 방법론이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이다:
(10) 신련한 집: 학개서와 히브리서에 나타난 성경의 근거(학1:1-11; 히6:9, 19-20) 지성소 / 하늘보좌 – 영 – 대제사장 / 예수 그리스도 성 소 / 현세천국 – 혼 – 제사장. 성전뜰 / 세상나라 – 몸 – 이방인, 유대인.
(11) 신령한 집을 건축하는 방법: 구약에서는 그 재료가 나무나 돌이었으며, 기술적으로는 성령님의 조명을 통하여 건축하였다. 신약시대의 재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재료가 되어(벧전2:2)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듣고 먹음으로(영적으로) 신령한 집이 지어져 가는 것이다.
(12) 구약 성경의 다섯 가지 해석 방법과 실제 생활에서의 적용하는 삶(신령한 집을 건축하는 방법에 대하여): 역사적, 문자적, 문법적 성경해석, 구속사적, 신학적, 영적 비유, 영적 실제.
4. 생명단계 생명단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약속대로 우리안에 신령한 집이 지어져서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 신분, 즉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의 왕으로,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룩한 성전으로 다양하게 삶을 살아가는 단계로써 영적으로 옳은 행실(계19:8)을 통해 신부단장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영 중심으로 하는 모든 것이 진리와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지는 단계이다. 또한 진리단계에서 시작되 stlsfudgks 집을 건축하는 삶이 완성되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주내재(內住內在)”하시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1) 생명단계에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 신령적 측면에서 윤리도덕을 평가하게 된다. 모든일을 성령님께 철저히 의탁하게 된다. 모든 삶을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안목이 열린다.
(2) 영적 실제의 살이란? :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 영 중심으로 행할 때 진리와 생명이 되는 삶, 은사적으로는 레마를 받아(성령님의 지도와 인도) 살아가는 삶.
(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영원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데 있다(요14:23, 17:11).
(4) 개인의 영적 성장사례: (개인적 …)
(5) 영성목회 현장에서의 소고(小鼓): 영성적인 것을 육신적인 것으로 이해하려함, 영성훈련의 대중화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 영성적인 것만 사역으리 목표를 삼고 진행, 풍성한 경험은 개인의 열심 여하에 있다.
변화되는 삶을 경험하라
기독교 영성은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영성을 재현(再現)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길은 “제자의 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감”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에게 기독교적 영성을 바로 깨우쳐 주고 계발시키며 그길로 인도하여줌과 동시에 변화 성장시키게 되므로써 우리 가운데 내주내재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성과 은사를 계발하고 경험하고 그분의 인도함을 받아서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게 된다는 차원을 넘어서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 심고 거두는 법칙이 어떠한 것 인가를 깨우쳐주는 믿음의 본질을 가르치는데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그 중점을 영혼에 영성을 비롯하여 육체에 대한 영성(은사적를 통한), 영성적 물질관계,영성적 대인관계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영적 수준을 단계별로 다루어 성도 개개인이 자신의 영적 단계를 스스로 체크하면서 훈련에 임하여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지도하심으로 변화되는 삶을 경험하라.
기독교 영성
기독교 영성이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맺게 하시는 성령님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1. 성경적 영성 이해
(1) 구약성경의 영성 이해 - 구약성경의 영성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전기는 모세오경과 여호수아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영성은 역사 초월적이거나 탈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족속(애굽)의 땅에서 박해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며, 광야의 훈련을 통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다. 또한 그 일련의 사건들은 그저 한 민족의 역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영적으로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창조하신 전능자, 하나님을 깨닫게 되고, 그 분과의 더욱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각고의 훈련을 거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비유(고전10:1-11) 라는 사실이다.
(2) 신약성경의 영성 이해 - 기독교 영성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재로 인류역사 현장에 나타나심으로 신약이 시작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으로, 또한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영성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모델로서의 삶을 완전하게 제시하셨다. ① 예수님의 자기 비움(요 5:30-32, 13:1-11). ② 예수님의 순종하심(히 5:7-10) ③ 예수님의 기도 생활(요 11:41-44)
2. 기독교 영성사(인물 중심)
(1) 초대교회의 영성 - 12사도와 바울의 영성 = 종말론적 영성,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복음전파에 전력을
(2) 고대 교부(1-2세기) - 영지주의, 마르시온(가현설), 몬타누스(신한부 종말론) 이단 발생 =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서머나의 폴캅, 저스틴(기독교 변증가)- 신앙의 수호자
(3) 교부(2세기말 이후) - 이레니우스 – 이단에 대한 논박자. 터툴리안 – 라틴식학의 아버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 지적인 정통. 오리겐 – 대중적 기독교.
(4) 제국 교회 시대(3-6세기) - 기독교 공인(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니케아 공의회 = 안토니우스 – 개인적 수도. 파코미우스- 공동체 수도원의 아버지, 대 바질 – 동방 수도원의 아버지, 닛사의 그레고리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수도원 신학의 정리. 요한 크리소스톰- ‘황금의 입’이라 불림. 베네딕트-서방 수도원의 아버지/수도규칙. 제롬-라틴어 성서 번역(벌게이트), 어거스틴-고대 신학의 완성자/”고백론’,’신의 도성’,’삼위일체’. 위(僞)디오니시우스-‘정화’, ’조명’, ‘연합’의 교리 정립
(5) 중세교회(~12-13세기~) - 교회의 부패, 타락 – 수도원 운동 = 프란치스코-청빈과의 결혼/탁발 수도, 보나벤츄라 –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행, 안셀름-스콜라 신학으 창시자/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토마스 아퀴나스 - 스콜라 신학의 절정/’신학대전’.
(6) 종교 개혁(16세기-)- 기독교의 분리 /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 마틴 루터-‘이신칭의’, 쯔빙글리-오직 말씀, 죤 칼빈-‘기독교 강요’, 존 웨슬리-중생 이후 온전한 성화.
(7) 성 어거스틴과 프란시스의 영성 -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
중심사상 : 인간 영혼의 자각, 영혼의 기능고 성장, 신적 지혜.
성 프란시스(St. Francis, 1182-1226)
중심 사상 : 그리스도의 고난에의 동참, 청빈, 하나님 사랑의 체험, 자연에 대한 사랑.
3. 영성 훈련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디모데전서 4:7-8).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을 훈련하는 삶이다.
(1)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인성 교육 포함).
불신자 = ‘하면된다’는 신념으로 세상적인 삶에 대하여 훈련 함.
그리스도인 = “영원”에 대한 준비적 차원의 훈련을 함.
(2)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요 1:12-13; 엡 3:16; 갈 2:20, 4:6; 벧전 2:2-5.
(3)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를 물리쳐야 한다. ① 무서운 죄의 얽매임과 고통의 삶에서 해방되고 자유하여야 한다(롬 7:24). ②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롬 12:2; 약 4:4). ③ 세상의 정신 문화(타락한 문화)를 경계하고 물리쳐야 한다. 인간 중심, 이기주의, 인간정욕이 지배하는, 무속신앙, 유교의 제례문화, 서구 문화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특히 흑암의 세력의 틀징은 이기주의, 쾌락주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자기 애, 돈을 사랑. ④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인간을 향한 사탄의 주요전략 = 믿는 자를 시험하며, 유혹하고 넘어뜨림, 하나님의 말씀 을 의심, 거역하게하고 사탄에 순종하게 함,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게 함.
(4) 평범하게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자의 수준까지 훈련되어야 한다.
(5)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의 삶을 살아감
(순종과 섬김의 삶의 단계로…)
4. 기독교 영성의 본질 기독교 영성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창조될 때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되었던 하나님의 형상(Imago Die)을 다시 회복하는데 있다.
(1) 영적 성장의 세 단계
① 거듭남(Born agine) – 구원(Salvation). 요한복음 3:3-5.
② 영적 조명(Illumination):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내면 세계가 이루어질 때 찬란한 신적 조명(神的照明)과 신적 지혜(神的智慧)를 얻게 되며, 그 영혼이 광 명을 얻게 된다
③ 합일의 삶(the life of unity)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2)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형성하는 네 가지 요소
①영혼과 영성: 인간이 영혼의 자기 존재를 발견하고 인식하는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변화를 받고, 훈련, 성장 성숙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 영원하신 하나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②육제와 영성: 하나님께서 육체에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아홉 가지 은사를 입히셔서
본질적으로 죽고 썩을 것들을 죽지 않고, 썩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 주신다.
③영성적 물질 관계: 하나님께서 복으로 내려주시는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기를 원하시며 하늘의 상급을 쌓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역에 쓰시도록 하신다.
④영성적 대인 관계:본능적으로 타고나는 습성을 따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표현하는 단계로부터 출발하여, 기독교 윤리적 차원의 대인관계로 발전하게 하셔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신다.
몸(소마 - σŵμα )과 육신(사르크스 - σάρξ )
몸(소마 - σŵμα )과 육신(사르크스 - σάρξ )
바울은 그의 영이 기운을 낸다든지 안심 한다고 말했을 때, 자신의 내적인 평안을 발견하였음을 의미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영(프뉴마 - πνεύμα)을 소유하는지 아니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소유하게 된 독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볼트만(Bultmann)은 인간이 구분되거나 분리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며, 몸 (소마–σώμα), 영(프뉴마), 그리고 혼(프쉬케 - ψυχὴ)은 인간 전체를 여러 방식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몸(소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몸(소마)이다”라고 주장한다.
인간, 그의 인격 전체는 소마로 지칭될 수 있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는 것은 나의 인격, 나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 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관련 구절들을 출발점으로 삼는 불트만은 몸이란 “자신을 자신의 행위의 대상으로 삼거나 또는 자신을 어떤 상태의 주체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부장했다. 소마적인 존재는 표준적이며 고유한 존재양식으로 생각된다.
소마는 인간존재의 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인 요소이다 혼 또는 영의 생명은 참되고 본질적인 생명이지만, 외적이며 우연적인 몸의 생명은 마치 인간의 참된 생명을 실현하는데 방해거리나 되는 것처럼 서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다. 구속사역은 단순히 혼 또는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의 구속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고안한 궁극적이며 완전한 삶의 양식은 소마적인 존재이다. 몸에 대해서 취하여야 할 태도를 가르친 바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1. 몸은 비록 인간존재의 완전한 부분이지만 육의 몸은 부패하고 죽는 사망의 몸(롬7:24).
2. 죄는 죽을 몸에 왕노릇 할 수 있기 때문에(롬6:31), 죄의 도구인 몸은 죄의 몸으로 불리울 수 있으며, 따라서 영이 거주하는 인간은 몸의 죄된 행실을 죽여야 한다(롬8:14)[본문 롬8:13의 사르크스를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육신(flesh)으로 번역하였다. 영어성경에서도 육신으로 번역한 경우가 많다. NIV에서는 죄의 본성(sinful nature)으로, GNB(TEV)에서는 인간본성(human nature)으로 번역하였다.]
3. 몸은 굴복되어야 한다. 사람의 영적인 생활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인간 존재의 최고 목적은 영의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따라서 몸은 영, 참된 자아의 종이 되어야 한다. 몸 그 자체는 참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 행세를 할 수 없다. 몸이 훈련받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목적들을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4. 몸에 대한 자기 통제는 그것이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롬12:1).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 안에 성령이 내주(內住)하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고전6:19). 그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고전6:15).
5. 몸 자체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에 구속될 것이다(롬8:23). 육신(사르크스-σὰρξ)은 몸의 조직들이다. 육신은 흔히 몸을 구성하며 따라서 뼈와 피에 대조되는 조직들을 묘사 할 때 사용된다. 사르크스는 몸 자체이다. 자연적인 변화를 거치는 동안 부분은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고, 여러 구절에서 사르크스는 몸의 육적인 부분을 가리키기보다는 몸 전체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몸으로 떠나 있다”고 말하든지(고전5:3), 아니면 “육신은 떠나 있다”(골2:5)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르크스는 혈통과 관계를 맺은 인간이다. 구약의 용법에 따르면, 사르크스는 몸의 요소 또는 몸 자체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육으로 구성된 인간을 구체적으로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러한 용법에서 보면 사르크스는 특별히 인간적인 관계들,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묶어 두는 육신적인 가문과 자연적인 인연들을 지칭할 수 있다. 사르크스는 외적인 모습과 조건에서 본 인간이다.
사르크스의 뜻은 인간의 육신적인 생명 너머로 확대되어 인간 존재에 있어서 불가분리적인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빌3:3)은 몸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외부 영역에 속하는 복합적인 모든 것들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유대적인 혈통, 그의 엄격한 종교교육, 유대 종교단체들 가운데서 뛰어난 그의 열심과 그의 탁월성 등을 포함한다. 사르크스의 윤리적 용법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육이 영과 대조되는 것처럼 인간은 악하며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육에 속한’ 자들과 ‘영에 속한’ 자들을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 하고 영에 있나니…”(롬8:9) 로마서 8:8절에 ‘육신에’ 라는 말은 9절에 의하면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자, 즉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의 영이 기운을 낸다든지 안심 한다고 말했을 때, 자신의 내적인 평안을 발견하였음을 의미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영(프뉴마 - πνεύμα)을 소유하는지 아니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소유하게 된 독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볼트만(Bultmann)은 인간이 구분되거나 분리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며, 몸 (소마–σώμα), 영(프뉴마), 그리고 혼(프쉬케 - ψυχὴ)은 인간 전체를 여러 방식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몸(소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몸(소마)이다”라고 주장한다.
인간, 그의 인격 전체는 소마로 지칭될 수 있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는 것은 나의 인격, 나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 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관련 구절들을 출발점으로 삼는 불트만은 몸이란 “자신을 자신의 행위의 대상으로 삼거나 또는 자신을 어떤 상태의 주체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부장했다. 소마적인 존재는 표준적이며 고유한 존재양식으로 생각된다.
소마는 인간존재의 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인 요소이다 혼 또는 영의 생명은 참되고 본질적인 생명이지만, 외적이며 우연적인 몸의 생명은 마치 인간의 참된 생명을 실현하는데 방해거리나 되는 것처럼 서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다. 구속사역은 단순히 혼 또는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의 구속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고안한 궁극적이며 완전한 삶의 양식은 소마적인 존재이다. 몸에 대해서 취하여야 할 태도를 가르친 바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1. 몸은 비록 인간존재의 완전한 부분이지만 육의 몸은 부패하고 죽는 사망의 몸(롬7:24).
2. 죄는 죽을 몸에 왕노릇 할 수 있기 때문에(롬6:31), 죄의 도구인 몸은 죄의 몸으로 불리울 수 있으며, 따라서 영이 거주하는 인간은 몸의 죄된 행실을 죽여야 한다(롬8:14)[본문 롬8:13의 사르크스를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육신(flesh)으로 번역하였다. 영어성경에서도 육신으로 번역한 경우가 많다. NIV에서는 죄의 본성(sinful nature)으로, GNB(TEV)에서는 인간본성(human nature)으로 번역하였다.]
3. 몸은 굴복되어야 한다. 사람의 영적인 생활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인간 존재의 최고 목적은 영의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따라서 몸은 영, 참된 자아의 종이 되어야 한다. 몸 그 자체는 참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 행세를 할 수 없다. 몸이 훈련받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목적들을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4. 몸에 대한 자기 통제는 그것이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롬12:1).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 안에 성령이 내주(內住)하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고전6:19). 그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고전6:15).
5. 몸 자체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에 구속될 것이다(롬8:23). 육신(사르크스-σὰρξ)은 몸의 조직들이다. 육신은 흔히 몸을 구성하며 따라서 뼈와 피에 대조되는 조직들을 묘사 할 때 사용된다. 사르크스는 몸 자체이다. 자연적인 변화를 거치는 동안 부분은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고, 여러 구절에서 사르크스는 몸의 육적인 부분을 가리키기보다는 몸 전체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몸으로 떠나 있다”고 말하든지(고전5:3), 아니면 “육신은 떠나 있다”(골2:5)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르크스는 혈통과 관계를 맺은 인간이다. 구약의 용법에 따르면, 사르크스는 몸의 요소 또는 몸 자체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육으로 구성된 인간을 구체적으로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러한 용법에서 보면 사르크스는 특별히 인간적인 관계들,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묶어 두는 육신적인 가문과 자연적인 인연들을 지칭할 수 있다. 사르크스는 외적인 모습과 조건에서 본 인간이다.
사르크스의 뜻은 인간의 육신적인 생명 너머로 확대되어 인간 존재에 있어서 불가분리적인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빌3:3)은 몸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외부 영역에 속하는 복합적인 모든 것들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유대적인 혈통, 그의 엄격한 종교교육, 유대 종교단체들 가운데서 뛰어난 그의 열심과 그의 탁월성 등을 포함한다. 사르크스의 윤리적 용법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육이 영과 대조되는 것처럼 인간은 악하며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육에 속한’ 자들과 ‘영에 속한’ 자들을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 하고 영에 있나니…”(롬8:9) 로마서 8:8절에 ‘육신에’ 라는 말은 9절에 의하면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자, 즉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로고스와 레마
로고스와 레마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의 말씀, 주의 말씀과 같이 말씀을 가리킬 때 헬라어로는 로고스나 레마로 표현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다바르”가 칠십인역에서는 로고스와 레마로 번역되었으나 구별없이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레마는 오경, 욥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에서 흔히 사용되지만 로고스는 그외의 역사서와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예언서에서는 로고스가 레마보다 8회 더 나타나고 있다.
1. 로고스(λόγος) 로고스는 신약성서에서 330회 나타난다. 이 단어가 헬라 세계에서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발전해 오면서 다양한 뜻을 가진 단어로 발전해 왔다. 예를 들면 로고스는 ‘계산하다, 설명하다’와 같은 기본적인 의미에서 시작되어 ‘이야기, 연설, 설명, 원리, 주장, 결과, 비례, 관계, 계측, 순서, 인간의 이성, 정신, 표현, 정의(定義)’ 등 많은 뜻의 단어로 발전하였다.
로고스는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창조적인 힘을 지닌 말이나 연설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 곳은 없다. 로고스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보내주는 것, 그것을 향해 지향된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1~3절에 나타난 로고스는 전(全) 복음의 기초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의 단일성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로고스를 주시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이 로고스이다. 이러한 사실이 이 단어의 용법을 결정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서두 이후에는 예수를 결코 로고스라고 부르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선재하셨던 그 로고스가 이제는 육신, 즉 몸을 가진 예수로 되었기 때문이다(요1:14). 예수와 로고스를 동일시하는 것이 여기에서는 로고스를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모든 신약 말씀들의 핵으로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것은 로고스가 선재했다는 것과 그것이 역사화되었다는 것이다.
로고스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의미한다. 선포함이 없이는 어떤 말씀도 들을 수 없으며, 말씀을 받음도, 믿음도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없다(로마서 10:17).
2. 레마(ρ̀ήμα)
레마의어근은 말씀을 계속 간직하고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 단어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게 말해진 어떤 것, 즉 ‘진술’(선포, 성명)과 같은 것이다. 행동 자체와는 구분이 되지만 행동고 관련된 단어이기도 하다. 언행(言行)이란 말을 사용할 때 말(言)과 행동(行)은 구별되지만 레마는 행동을 요구하는 뉘앙스를 가진다.
레마는 선포된 말씀, 즉 기록된 말씀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레마는 감정적이며 의지적인 강조점이 있다. 레마는 말과 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레마는 신약성서에 68회 나타난다. 이 가운데 사도행전에 33회, 요한복음에 12회 나타난다. 마태복음에는 5회, 마가복음에 2회, 바울서신에 16회 나온다. 계시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태복음 4:4절에 언급된 ‘모든 말씀’의 “말씀”이 레마이다.
3. 창세기 1장 1절에 대한 암시 요한복음 1;1-3절의 로고스(λόγος)는 태초까지 소급되기 때문에 만물의 기원인 태초시의 창조의 말씀과 자연스러운 연결이 이루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볼 때, 말씀은 태초(ένάρχη,엔아르케) 에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함께 있었다. 창세기 1: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된 그분의 인격과 동일하다는 진리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로고스는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4.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말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마르’와 ‘다마르’와 같은 어근들이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 로기온(λόγιον), 레마(ρ̀ήμα)와 레시스(ρ̀ήσις)의 주된 용어들이다. 아마르는 말함(saying)을 의미하는 데 사용될 때에는 보다 시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바르는 역사, 율법, 예언등에 있어서 “말씀”(word)을 의미하는 고전적인 용어들을 지시한다.
5. 신약에서의 말씀(Word)과 말함(Speech)
로고스는 일상생활의 의미로부터 가장 의미 심장한 것까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악한 말, 헛된 말, 거짓말까지 포함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함에 있어서 로고스(λόγος)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고전 14:19).
6. 신약에서 개인들을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
시므온과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레마(ρ̀ήμα)가 임했다는 언급을 볼 때, 시므온과 세례 요한은 모두 구약 선지자의 범주에 속한다(누가 2:29; 3:2). 사도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와 레마)이 나타나지만 특별한 하나님의 지시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 이 말씀들은 성령, 그리스도, 천사 또는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주어진다. 이러한 변화는 성육신된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께 대하여는 예수 자신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고 말씀 자체이기 때문에 예수에게 말씀이 임했다는 언급이 없다. 예수 수세시에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는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다.
7.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인용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말씀의 기록은 항상 그분이 말씀하셨다는 것, 또는 예수님의 말씀(λόγοι 또는 ρ̀ήματα)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은 한 가지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며(마가 10:42) 일군(一群)의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고(마태 26:1) 또는 예수의 메시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마태 24:35).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의 말씀, 주의 말씀과 같이 말씀을 가리킬 때 헬라어로는 로고스나 레마로 표현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다바르”가 칠십인역에서는 로고스와 레마로 번역되었으나 구별없이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레마는 오경, 욥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에서 흔히 사용되지만 로고스는 그외의 역사서와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예언서에서는 로고스가 레마보다 8회 더 나타나고 있다.
1. 로고스(λόγος) 로고스는 신약성서에서 330회 나타난다. 이 단어가 헬라 세계에서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발전해 오면서 다양한 뜻을 가진 단어로 발전해 왔다. 예를 들면 로고스는 ‘계산하다, 설명하다’와 같은 기본적인 의미에서 시작되어 ‘이야기, 연설, 설명, 원리, 주장, 결과, 비례, 관계, 계측, 순서, 인간의 이성, 정신, 표현, 정의(定義)’ 등 많은 뜻의 단어로 발전하였다.
로고스는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창조적인 힘을 지닌 말이나 연설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 곳은 없다. 로고스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보내주는 것, 그것을 향해 지향된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1~3절에 나타난 로고스는 전(全) 복음의 기초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의 단일성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로고스를 주시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이 로고스이다. 이러한 사실이 이 단어의 용법을 결정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서두 이후에는 예수를 결코 로고스라고 부르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선재하셨던 그 로고스가 이제는 육신, 즉 몸을 가진 예수로 되었기 때문이다(요1:14). 예수와 로고스를 동일시하는 것이 여기에서는 로고스를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모든 신약 말씀들의 핵으로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것은 로고스가 선재했다는 것과 그것이 역사화되었다는 것이다.
로고스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의미한다. 선포함이 없이는 어떤 말씀도 들을 수 없으며, 말씀을 받음도, 믿음도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없다(로마서 10:17).
2. 레마(ρ̀ήμα)
레마의어근은 말씀을 계속 간직하고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 단어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게 말해진 어떤 것, 즉 ‘진술’(선포, 성명)과 같은 것이다. 행동 자체와는 구분이 되지만 행동고 관련된 단어이기도 하다. 언행(言行)이란 말을 사용할 때 말(言)과 행동(行)은 구별되지만 레마는 행동을 요구하는 뉘앙스를 가진다.
레마는 선포된 말씀, 즉 기록된 말씀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레마는 감정적이며 의지적인 강조점이 있다. 레마는 말과 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레마는 신약성서에 68회 나타난다. 이 가운데 사도행전에 33회, 요한복음에 12회 나타난다. 마태복음에는 5회, 마가복음에 2회, 바울서신에 16회 나온다. 계시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태복음 4:4절에 언급된 ‘모든 말씀’의 “말씀”이 레마이다.
3. 창세기 1장 1절에 대한 암시 요한복음 1;1-3절의 로고스(λόγος)는 태초까지 소급되기 때문에 만물의 기원인 태초시의 창조의 말씀과 자연스러운 연결이 이루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볼 때, 말씀은 태초(ένάρχη,엔아르케) 에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함께 있었다. 창세기 1: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된 그분의 인격과 동일하다는 진리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로고스는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4.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말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마르’와 ‘다마르’와 같은 어근들이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 로기온(λόγιον), 레마(ρ̀ήμα)와 레시스(ρ̀ήσις)의 주된 용어들이다. 아마르는 말함(saying)을 의미하는 데 사용될 때에는 보다 시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바르는 역사, 율법, 예언등에 있어서 “말씀”(word)을 의미하는 고전적인 용어들을 지시한다.
5. 신약에서의 말씀(Word)과 말함(Speech)
로고스는 일상생활의 의미로부터 가장 의미 심장한 것까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악한 말, 헛된 말, 거짓말까지 포함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함에 있어서 로고스(λόγος)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고전 14:19).
6. 신약에서 개인들을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
시므온과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레마(ρ̀ήμα)가 임했다는 언급을 볼 때, 시므온과 세례 요한은 모두 구약 선지자의 범주에 속한다(누가 2:29; 3:2). 사도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와 레마)이 나타나지만 특별한 하나님의 지시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 이 말씀들은 성령, 그리스도, 천사 또는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주어진다. 이러한 변화는 성육신된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께 대하여는 예수 자신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고 말씀 자체이기 때문에 예수에게 말씀이 임했다는 언급이 없다. 예수 수세시에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는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다.
7.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인용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말씀의 기록은 항상 그분이 말씀하셨다는 것, 또는 예수님의 말씀(λόγοι 또는 ρ̀ήματα)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은 한 가지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며(마가 10:42) 일군(一群)의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고(마태 26:1) 또는 예수의 메시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마태 24:35).
꿈 해석과 영성
일반적 접근
꿈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상적인 경험이다. 인간이 꿈을 꾸지 않고 잠을 자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개의 경우 밤잠을 자면서 수 차례의 꿈을 꾸게 된다. 무의식 속에서 경험된 꿈들은 깊은 충격이나 인상이 남는 꿈을 제외하고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의식적 꿈의 활동이 현재의식 속에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시 잊혀지게 되며, 결과적으로 마치 꿈을 꾸지 않고 잠을 잔 것으로 느끼게 된다. 꿈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필자는 크게 일반적인 꿈과 특별한 꿈으로 구분하려 한다.
일반적인 것으로는 하루 동안에 겪었던 신체적, 심리적 경험에 따라 무의식 속에서 주제와 자료들이 형성되어 꿈으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격렬한 신체적, 심리적 경험을 하게 된 날은 꿈도 역시 강렬하게 표현될 때가 많다. 이렇게 볼 때 일반적인 꿈은 신체와 영혼의 리듬과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치유와 회복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일반적인 꿈의 기능과는 별도로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표현되는 꿈도 있다.
불길한 악몽, 태몽,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투시적인 차원의 꿈, 그리고 과거나 미래에 대한 예시적인 차원의 꿈도 있다. 이러한 꿈은 단순한 신체와 심리 현상보다는 꿈꾸는 당사자나 타인들을 향한 좀더 깊은 인간 내면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꿈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꿈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꿈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무의식 속에서 여러 상징들과 느낌 등으로 표현되는 꿈의 언어들은 현재의식에 곧바로 그 의미가 깨달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전문적인 이해와 훈련의 과정이 요구된다. 꿈 해석이 잘못될 경우 자신에게는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도 크고 작은 해악(害惡)을 일으키는 불씨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타인의 꿈에 대한 해석을 전문적으로 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편견과 욕심과 비난의 정신에 기울어진 잘못된 해석을 일삼기도 한다. 그러자 현대인들중에는 꿈에 대한 해석을 추구하는 일을 아예 잘못된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꿈이란 그저 단순한 일상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를 간과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심리학적 접근 꿈에 대한 해석이라 하면 누구든지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융(Karl G. Jüng)이 끼친 학문적 공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프로이드 이전까지는 인간의 정신을 단순히 의식으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인간의 의식을 현재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류하고 무의식 세계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하게 되었다. 프로이드는 특히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함에 있어서 그들이 경험한 꿈에 대한 해석을 활용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는 꿈과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별히 인간의 꿈은 성욕과 생활력의 근원으로서의 리비도(libido)의 작용에 기인한다는 점을 세상에 발표하였다. 프로이드의 제자인 융은 프로이드가 주로 성적인 리비도에 관련시켜 꿈을 해석한 것과는 달리, 꿈에는 인간 심층 내부의 정신적인 에너지와의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인간 무의식 속의 깊은 영역에는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집단무의식이란 개인의 무의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개인과 관계되는 집단의 공동 의식 세계를 의미한다. 융은 이 집단무의식을 통해서 마침내 인간 정신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가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르는 인격 완성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위와 같은 학문적 전통에 서있는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인간 내면의 무의식의 활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들은 무의식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상징적인 언어를 통하여 언제나 현재의식과 만나고 또 이를 돕기 원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꿈에 나타난 무의식적 원리를 잘 이해하고 또 올바른 해석을 통해 현재의식에 적용하게 될 때, 인간은 자신과 또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해 강력한 내적 안내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강조하고 있다.
성경적 접근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체적, 심리적 원인으로 발생하는 꿈의 일반적인 기능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이타적(利他的) 목적의 꿈에 대한 소개가 성경에서 매우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꿈은 대개 투시적이거나 예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야곱은 벧엘의 꿈(창 28:10-22)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하시면서 후손들을 인도하며 축복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우리는 꿈의 사람 요셉, 선지자 다니엘 등을 통해 그들의 꿈이 올바른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것을 본다. 그런가 하면 구약 예언서들의 많은 부분이 꿈과 환상의 기록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신약성경에도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 등을 막론하고 꿈과 환상에 대한 기록들이 많다. 마리아는 꿈에 천사가 이르는 대로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다(눅 1:36-40). 요셉은 꿈의 경고를 받아 가족을 이집트로 피신함으로서 큰 화를 면하게 되었다(마 2:13-22). 구약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바, 말세에 부어지는 성령으로 인한 예언과 환상과 꿈에 대한 언급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해설에 나타난다(행 2:17).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에는 꿈과 환상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한 사도들의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에 나타난 꿈들이 대부분 이타적인 목적을 지닌 특별한 꿈이라고 해서,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꾸는 꿈도 다 이같이 이타적인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투시적이거나 예시적인 꿈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인 꿈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을 해석하고자 한다면, 먼저 꿈을 꾼 당사자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치유와 회복의 관점에서 꿈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이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타적인 목적의 특별한 꿈도 있다. 이럴 경우, 주께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사역 속에서 꿈은 여전히 복음전파와 교회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사적 접근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예언과 꿈과 환상 등의 직감적인 기능들을 통해 많이 나타났다는 점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인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에 있어서도 꿈 해석의 전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직접적인 계시 주장과 극단적인 예언 활동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몬타누스주의 (Montanism)가 주후 200년경에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리고 3-4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대교회는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성령의 인도를 추구하기보다는 교권제도의 발전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고, 성례전적 영성이 개인적 영성을 압도하게 되었다.
제롬(Jerome)은 이단사설을 억제하고 교권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가르치기를, 개인적인 꿈과 환상보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강조하였다. 결과적으로 도심과 형식적인 교회 의식을 떠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영교(靈交)를 추구하기 원하는 자들이 사막과 산 속에 수도원들을 설립하게 되었다. 중세교회는 오랜 동안 프라토-어거스틴(Plato-Augustine) 유형의 실재론적인 영성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을 다시 도입하게 되자, 꿈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서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견해가 학문적으로 우세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스콜라철학의 후기의 경향으로서, 르네상스의 영향을 힘입어 유명론(Nominalism)이 크게 부상하게 되자 신앙과 이성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신비롭고 반이성적으로만 여겨지던 꿈에 대한 해석 문제는 신앙을 다루는 주제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을 정통적 신앙의 권위로 인정하던 16세기 종교개혁교회들은 자연히 꿈에 대한 해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17세기 유럽의 개신교회들은 교리 논쟁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때마침 불어닥친 계몽주의의 소용돌이는 교회와 전통적 신앙을 합리주의적 비판으로 거의 질식시키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18세기에 경건주의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경건의 능력을 강조하여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의 영향이 가시지 않아, 꿈과 같은 신비적이며 비합리적인 주제는 신학의 냉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영향으로 인해, 꿈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꿈에 대해 부정적인 전통적 신학의 흐름에 도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적 접근 그러면 꿈에 대한 연구가 과연 신학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융의 심리학적 이론은 신학적으로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쉴라이엘마허(Schleiermacher)의 종교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쉴라이엘마허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이란 신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absolute dependance feeling)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의식과 인간의 자아의식의 구분은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해지는데, 여기서 신의 존엄성과 인간의 부족함이 비교되어 죄(罪)라는 관념이 생기게 된다.
마찬가지로 융의 심리학적 표현에 의하면, 죄성이란 무의식의 심연(深淵)으로부터 분리된 현재의식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융은 집단무의식의 차원을 넘는 곳에 인간의 현재의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 영역은 인간 정신의 신적(神的)인 핵이며 신성(神性)의 영역으로서 이른바 ‘초월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이같은 그의 이론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생래적(生來的)인 지각으로서의 신성(神性)이 인간 속에 내재한다는 성경의 진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롬 1:19-20).
꿈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꿈에 나타나는 치유와 회복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목표를 지닌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 이와 같은 목표는 곧 인간 내면의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중시하는 기독교 성화론(聖化論)의 이상과도 일치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꿈을 다룬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꿈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꿈의 올바른 해석으로 얻어지는 교훈을 통해 자신의 영적 성화의 길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꿈을 해석한 한 예를 들어보자. 한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 아이가 혹시 남들 앞에서 이상스런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꿈속에서조차도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이제는 입에서 흰 거품을 내뱉는 것을 보고 큰 두려움을 갖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후 그 어머니는 꿈의 의미를 몰라 잠시 당황했으나, 곧 기도와 감사 가운데 그 꿈을 기억해 내는 동안, 그것은 곧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 아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수치심이 자신의 영적 성장에 방해 가 된다는 점을 성령께서 조명해 주셨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 어머니는 이 점에 대해 깊이 뉘우치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 날 이후 아이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위의 경우는 일반적인 꿈이 적절한 해석과 함께 현재의식에 이해될 때, 꿈 해석은 영적인 성화의 길을 달려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여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은 꿈을 통해 자신들의 내적 삶과 외적 삶 사이의 막힌 담을 헐게 되고, 또 꿈을 해석할 때 그들의 영적 가치관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에, 범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특별한 꿈에 대해서는 어떤가? 이타적인 목적의 꿈, 특히 복음전파를 위한 목적의 꿈이 성경과 교회사의 기록 속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필자는 많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 이같은 목적의 꿈이 오늘날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종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꿈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필요나 영적인 상황을 알려주시곤 한다.
이럴 때 그들은 꿈에 나타난 대상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상담을 하거나 또는 직접 물질로 돕곤 한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다짐하며 살아갈 때, 성령께서 복음 전할 대상자들을 꿈속에서 보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언제 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지시하실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이같은 고백들이 진정 신학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꿈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신학의 인간론 내지는 성령론의 범주에 삽입될 필요를 요청 받게 될 것이다. 현재 꿈 해석에 관한 현대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많은 연구 결과들은 이미 일부 신학계와 영성운동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다.
꿈 해석의 신학적 적용을 지지하는 이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반적인 꿈은 적절한 해석과 함께 할 때 영적 성화를 향한 친절한 안내자이며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더욱 깊이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타적인 목적의 특별한 꿈이 복음에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다가온다고 보는데, 이를 통하여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세계 복음화를 완수하기 위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꿈 해석의 전통은 고대교회의 몬타누스주의 정죄와 교권제도 발생 이후 현재까지 교회사 속에서 줄곧 외면을 당해왔다. 그러나 이미 진보주의 신학계에서는 꿈 해석에 관한 융의 이론을 적극 도입해 왔으며, 현대의 치유사역과 영성운동에서도 이 이론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사례가 높아가고 있다. 융의 이론은 마치 신학계의 진보와 보수 사이를 갈라놓은 격이 되어서, 진보 측에서는 이를 적극 수용하는 반면 보수 측에서는 이를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주제에 대해 고조되는 관심과 질문은 현대의 기독교가 꿈 해석이라는 주제에 대해 적어도 책임성 있는 신학적 평가를 내려야만 할 때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꿈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상적인 경험이다. 인간이 꿈을 꾸지 않고 잠을 자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개의 경우 밤잠을 자면서 수 차례의 꿈을 꾸게 된다. 무의식 속에서 경험된 꿈들은 깊은 충격이나 인상이 남는 꿈을 제외하고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의식적 꿈의 활동이 현재의식 속에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시 잊혀지게 되며, 결과적으로 마치 꿈을 꾸지 않고 잠을 잔 것으로 느끼게 된다. 꿈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필자는 크게 일반적인 꿈과 특별한 꿈으로 구분하려 한다.
일반적인 것으로는 하루 동안에 겪었던 신체적, 심리적 경험에 따라 무의식 속에서 주제와 자료들이 형성되어 꿈으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격렬한 신체적, 심리적 경험을 하게 된 날은 꿈도 역시 강렬하게 표현될 때가 많다. 이렇게 볼 때 일반적인 꿈은 신체와 영혼의 리듬과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치유와 회복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일반적인 꿈의 기능과는 별도로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표현되는 꿈도 있다.
불길한 악몽, 태몽,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투시적인 차원의 꿈, 그리고 과거나 미래에 대한 예시적인 차원의 꿈도 있다. 이러한 꿈은 단순한 신체와 심리 현상보다는 꿈꾸는 당사자나 타인들을 향한 좀더 깊은 인간 내면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꿈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꿈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꿈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무의식 속에서 여러 상징들과 느낌 등으로 표현되는 꿈의 언어들은 현재의식에 곧바로 그 의미가 깨달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전문적인 이해와 훈련의 과정이 요구된다. 꿈 해석이 잘못될 경우 자신에게는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도 크고 작은 해악(害惡)을 일으키는 불씨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타인의 꿈에 대한 해석을 전문적으로 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편견과 욕심과 비난의 정신에 기울어진 잘못된 해석을 일삼기도 한다. 그러자 현대인들중에는 꿈에 대한 해석을 추구하는 일을 아예 잘못된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꿈이란 그저 단순한 일상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를 간과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심리학적 접근 꿈에 대한 해석이라 하면 누구든지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융(Karl G. Jüng)이 끼친 학문적 공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프로이드 이전까지는 인간의 정신을 단순히 의식으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인간의 의식을 현재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류하고 무의식 세계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하게 되었다. 프로이드는 특히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함에 있어서 그들이 경험한 꿈에 대한 해석을 활용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는 꿈과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별히 인간의 꿈은 성욕과 생활력의 근원으로서의 리비도(libido)의 작용에 기인한다는 점을 세상에 발표하였다. 프로이드의 제자인 융은 프로이드가 주로 성적인 리비도에 관련시켜 꿈을 해석한 것과는 달리, 꿈에는 인간 심층 내부의 정신적인 에너지와의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인간 무의식 속의 깊은 영역에는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집단무의식이란 개인의 무의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개인과 관계되는 집단의 공동 의식 세계를 의미한다. 융은 이 집단무의식을 통해서 마침내 인간 정신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가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르는 인격 완성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위와 같은 학문적 전통에 서있는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인간 내면의 무의식의 활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들은 무의식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상징적인 언어를 통하여 언제나 현재의식과 만나고 또 이를 돕기 원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꿈에 나타난 무의식적 원리를 잘 이해하고 또 올바른 해석을 통해 현재의식에 적용하게 될 때, 인간은 자신과 또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해 강력한 내적 안내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강조하고 있다.
성경적 접근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체적, 심리적 원인으로 발생하는 꿈의 일반적인 기능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이타적(利他的) 목적의 꿈에 대한 소개가 성경에서 매우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꿈은 대개 투시적이거나 예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야곱은 벧엘의 꿈(창 28:10-22)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하시면서 후손들을 인도하며 축복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우리는 꿈의 사람 요셉, 선지자 다니엘 등을 통해 그들의 꿈이 올바른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것을 본다. 그런가 하면 구약 예언서들의 많은 부분이 꿈과 환상의 기록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신약성경에도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 등을 막론하고 꿈과 환상에 대한 기록들이 많다. 마리아는 꿈에 천사가 이르는 대로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다(눅 1:36-40). 요셉은 꿈의 경고를 받아 가족을 이집트로 피신함으로서 큰 화를 면하게 되었다(마 2:13-22). 구약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바, 말세에 부어지는 성령으로 인한 예언과 환상과 꿈에 대한 언급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해설에 나타난다(행 2:17).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에는 꿈과 환상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한 사도들의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에 나타난 꿈들이 대부분 이타적인 목적을 지닌 특별한 꿈이라고 해서,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꾸는 꿈도 다 이같이 이타적인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투시적이거나 예시적인 꿈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인 꿈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을 해석하고자 한다면, 먼저 꿈을 꾼 당사자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치유와 회복의 관점에서 꿈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이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타적인 목적의 특별한 꿈도 있다. 이럴 경우, 주께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사역 속에서 꿈은 여전히 복음전파와 교회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사적 접근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예언과 꿈과 환상 등의 직감적인 기능들을 통해 많이 나타났다는 점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인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에 있어서도 꿈 해석의 전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직접적인 계시 주장과 극단적인 예언 활동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몬타누스주의 (Montanism)가 주후 200년경에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리고 3-4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대교회는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성령의 인도를 추구하기보다는 교권제도의 발전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고, 성례전적 영성이 개인적 영성을 압도하게 되었다.
제롬(Jerome)은 이단사설을 억제하고 교권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가르치기를, 개인적인 꿈과 환상보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강조하였다. 결과적으로 도심과 형식적인 교회 의식을 떠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영교(靈交)를 추구하기 원하는 자들이 사막과 산 속에 수도원들을 설립하게 되었다. 중세교회는 오랜 동안 프라토-어거스틴(Plato-Augustine) 유형의 실재론적인 영성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을 다시 도입하게 되자, 꿈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서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견해가 학문적으로 우세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스콜라철학의 후기의 경향으로서, 르네상스의 영향을 힘입어 유명론(Nominalism)이 크게 부상하게 되자 신앙과 이성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신비롭고 반이성적으로만 여겨지던 꿈에 대한 해석 문제는 신앙을 다루는 주제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을 정통적 신앙의 권위로 인정하던 16세기 종교개혁교회들은 자연히 꿈에 대한 해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17세기 유럽의 개신교회들은 교리 논쟁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때마침 불어닥친 계몽주의의 소용돌이는 교회와 전통적 신앙을 합리주의적 비판으로 거의 질식시키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18세기에 경건주의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경건의 능력을 강조하여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의 영향이 가시지 않아, 꿈과 같은 신비적이며 비합리적인 주제는 신학의 냉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영향으로 인해, 꿈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꿈에 대해 부정적인 전통적 신학의 흐름에 도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적 접근 그러면 꿈에 대한 연구가 과연 신학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융의 심리학적 이론은 신학적으로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쉴라이엘마허(Schleiermacher)의 종교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쉴라이엘마허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이란 신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absolute dependance feeling)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의식과 인간의 자아의식의 구분은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해지는데, 여기서 신의 존엄성과 인간의 부족함이 비교되어 죄(罪)라는 관념이 생기게 된다.
마찬가지로 융의 심리학적 표현에 의하면, 죄성이란 무의식의 심연(深淵)으로부터 분리된 현재의식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융은 집단무의식의 차원을 넘는 곳에 인간의 현재의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 영역은 인간 정신의 신적(神的)인 핵이며 신성(神性)의 영역으로서 이른바 ‘초월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이같은 그의 이론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생래적(生來的)인 지각으로서의 신성(神性)이 인간 속에 내재한다는 성경의 진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롬 1:19-20).
꿈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꿈에 나타나는 치유와 회복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목표를 지닌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 이와 같은 목표는 곧 인간 내면의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중시하는 기독교 성화론(聖化論)의 이상과도 일치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꿈을 다룬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꿈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꿈의 올바른 해석으로 얻어지는 교훈을 통해 자신의 영적 성화의 길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꿈을 해석한 한 예를 들어보자. 한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 아이가 혹시 남들 앞에서 이상스런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꿈속에서조차도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이제는 입에서 흰 거품을 내뱉는 것을 보고 큰 두려움을 갖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후 그 어머니는 꿈의 의미를 몰라 잠시 당황했으나, 곧 기도와 감사 가운데 그 꿈을 기억해 내는 동안, 그것은 곧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 아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수치심이 자신의 영적 성장에 방해 가 된다는 점을 성령께서 조명해 주셨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 어머니는 이 점에 대해 깊이 뉘우치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 날 이후 아이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위의 경우는 일반적인 꿈이 적절한 해석과 함께 현재의식에 이해될 때, 꿈 해석은 영적인 성화의 길을 달려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여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은 꿈을 통해 자신들의 내적 삶과 외적 삶 사이의 막힌 담을 헐게 되고, 또 꿈을 해석할 때 그들의 영적 가치관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에, 범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특별한 꿈에 대해서는 어떤가? 이타적인 목적의 꿈, 특히 복음전파를 위한 목적의 꿈이 성경과 교회사의 기록 속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필자는 많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 이같은 목적의 꿈이 오늘날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종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꿈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필요나 영적인 상황을 알려주시곤 한다.
이럴 때 그들은 꿈에 나타난 대상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상담을 하거나 또는 직접 물질로 돕곤 한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다짐하며 살아갈 때, 성령께서 복음 전할 대상자들을 꿈속에서 보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언제 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지시하실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이같은 고백들이 진정 신학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꿈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신학의 인간론 내지는 성령론의 범주에 삽입될 필요를 요청 받게 될 것이다. 현재 꿈 해석에 관한 현대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많은 연구 결과들은 이미 일부 신학계와 영성운동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다.
꿈 해석의 신학적 적용을 지지하는 이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반적인 꿈은 적절한 해석과 함께 할 때 영적 성화를 향한 친절한 안내자이며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더욱 깊이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타적인 목적의 특별한 꿈이 복음에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다가온다고 보는데, 이를 통하여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세계 복음화를 완수하기 위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꿈 해석의 전통은 고대교회의 몬타누스주의 정죄와 교권제도 발생 이후 현재까지 교회사 속에서 줄곧 외면을 당해왔다. 그러나 이미 진보주의 신학계에서는 꿈 해석에 관한 융의 이론을 적극 도입해 왔으며, 현대의 치유사역과 영성운동에서도 이 이론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사례가 높아가고 있다. 융의 이론은 마치 신학계의 진보와 보수 사이를 갈라놓은 격이 되어서, 진보 측에서는 이를 적극 수용하는 반면 보수 측에서는 이를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주제에 대해 고조되는 관심과 질문은 현대의 기독교가 꿈 해석이라는 주제에 대해 적어도 책임성 있는 신학적 평가를 내려야만 할 때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계시(啓示)
계시(啓示)
영어 : Revelation
헬라어 : 명사 – 아포칼립시스 άποκάλυψις, 동사 – 아포칼립토άποκαλύπτω
히브리어 : 니글라, 갈라
라틴어 : revelatio 구약에서는 신약에서 사용된 계시(아포칼립시스)와 같이명사로 사용된 곳이 없으며 동사(니글라,Niph)가 ‘나타났는데(was revealed)’로 표현되어있고 갈라가 ‘계시하다, 알게하다, 벌거벗다, 열다, 밝히다’ 등의 뜻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구약성경 전체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는 하나님의 계시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죄를 짓고 타락한 후에 스스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알려주시기 전에는 알 길이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초월자로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열심히 알리시고 계신다. 구약과 관련된 하나님의 지식은 경험적인 지식, 곧 단순한 사실만을 알리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천사, 사람, 선지자, 말씀, 생물, 자연, 꿈, 환상 등에 의해 관계적으로 교훈된 경험과 지식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역사 가운데 직접 참여하심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말안에 많은 의미와 계시가 들어있다. 출애굽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와 교훈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현재와 미래에서 기대되고 또 우리의 영적 훈련을 위한 생명의 말씀(성경)이 된다.
신약에서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계시문학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성경 전체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계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창조, 역사, 말씀, 인간의 양심 등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계시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의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되어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최고의 행위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와 다시오실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계시라 할 수 있다.
계시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하여 원어의 어근을 중심으로 연구해 보자. 칼립토(καλύπτω)는 ‘파묻다, 숨기다, 덮다’는 뜻으로 아포칼립토(ὰποκακαλὺττω) ‘벗기다, 드러내다’의 어근이다(출14:28, 27:2, 24:15-16, 마8:24, 눅23:30 등). 칼륌마(κὰλυμμα)는 ‘베일, 두건, 덮개’ 등을 의미한다. 모세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웠다(출34:33). 고린도후서 3:7 이하에서 바울은 모세의 이야기를 가지고 구약의 계시와 복음을 비교한다. 만일 일시적인 광채가 영광스럽다면, 복음의 영원한 광채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 여기에서 ‘베일’은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을 읽을 때, 그들의 마음에 드리워져 있는 ‘베일’을 상징한다. 아나칼립토(ὰνακαλὺπτω)는 ‘열다, 벗기다, 제거하다’ 를 의미하고, 카타칼립토(κατακαλὺπτω)는 ‘자신을 덮다, 가리다’, 예배시간에 ‘너울을 쓰다’를 의미한다.
1. 구약에서의 계시 구약에서 계시로 사용되고 있는 계시의 도구들도 신약과 동일하다. 표적(창24:12). 선견자들(삼상9:6), 꿈(창28:12), 신탁(삼상14:37), 제사장의 지시(신17:9, 12), 황홀경, 예언 등과 같은 계시의 수단들이 사용되었다. 금식은 그러한 계시를 받기 위한 예비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단9:3). 구약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수3:10, 사37:4, 신5:23). 하나님은 숨어 계시며 자신이 원할 때에만 자신을 계시하신다(사45:15).
2.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그 자신을 계시하신다. 출애굽 사건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을 위해 이스라엘을 분리시키셨다(출19:4). 출애굽 사건이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잘 계시하고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작품이다(사7:1).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로 그리고 고레스같은 나라와 사람을 사용하여 구속사를 이끌어 가신다. 2) 하나님은 그 자신을 은혜롭고 거룩한 분으로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윤리적인 의미에서 거룩하시다(십계명).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신다. 순종없는 제사는 가증스러운 것이다(삼하12:7; 왕상17:1; 암2:6; 사1:…).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심 속에서 그의 영광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출20:5).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를 보여주시고 용서를 베푸신다(출34:6-7).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축복을 가져다주신다(사40:1; 53장, 61:1-). 여기에서 창조자와 주님(주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나타난다. 3)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동일한 말씀으로 유지하고 지배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직접 말씀해 주시거나 천사나 선지자를 통하여 또는 기록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신실함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 대하여 간음죄가 된다.
3. 계시에 대한 유대교의 태도 1) 일반적인 관점 – 유대교는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를 기대하지 않는다. 유대교에서의 초점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들에서 나타난 과거의 계시에 근거한다. 구전은 단지 설명을 의미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앞으로도 알려지고 또 알려질 것이다. 2) 묵시 – 묵시는 계시를 대치한다(묵시라는 용어는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이 용어는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현저히 팔레스타인적인 것이다. 묵시의 장르는 위경에 있으며 하나님의 추월성이 강조된다. 새 시대는 이미 존재한다. 악이 절정에 달할 때 새 시대는 능력 있게 나타날 것이다. 선견자(선지자)들은 싸우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러한 환상을 계시해 준다. 이러한 주제들의 진지성, 세계사에 대한 개념, 그리고 계시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로 인해 묵시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3) 자연계시 – 헬리니즘 유대교는 한편으로는 변증적인 이유로 인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쟁적인 이유로 인해 보다 더 내재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필로와 지혜서는 세사의 아름다움과 목적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따라서 우상 숭배는 비록 용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정받을만한 것이다. 헬라 철학에서처럼 필로에게서도 아래로부터 위로의 운동이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서 피로는 범신론의 위협을 방지하기가 어렵다. 바로 여기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계시된 율법과 자연법을 동일시하는 견해가 나타난다.
4. 신약에서의 계시 신약은 구약의 계시를 이어받고 있으며 이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은 묵시에 대한 종말론적 영향을 제외하고는 유대교를 무시한다. 계시에 대한 신약의 견해의 특징적인 역동성은 역사와 종말론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1) 공관복음서에서의 계시 – 세례(침례) 요한의 증거(마3:2)와 예수님의 최초의 메시지(막1:15)는 하나님이 도래하고 있으며, 그의 왕국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계시적인 하나님의 행위에 대비해야만 한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 실재로서 현존한다. 예수님께서는 계시를 부여해주고(마11:27), 그것을 구현시키며 결국 그 자신을 나타낸 것처럼(눅17:30) 계시를 드러낼 것이다(막8:38). 신자들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있는 그대로의 그를 볼 수 있다(마16:17).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하늘에 계신 그의(예수님의) 아버지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Then Jesus said: ‘Simon son of Jonah, you are favoured indeed! You did not learn that from motal man; ot was revealed to you by my heavenly Father. Mt16:17, NEB]. 예수 안에 현존하는 계시를 알리는 것, 그 자체가 계시의 행위이다. 여기서의 장애물은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지식이다(마11:25). 예수님의 계시의 목적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계시를 영화롭게하고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다(막7:8; 마태5:17). 이러한 계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마8:11). 그러나 계시는 모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죄인들로 하여금 순종하는 믿음과 신앙고백을 통해 그러한 계시에 응답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다. 2) 초대 그리스도교에서의 계시 이해 – 여기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보다 강력한 경향을 발견한다. 이미 오신 메시야는 다시 오실 것이다. 메시야는 하늘에 계시다가 어느 날 다시 나타나실 것이다(행3:21). 메시야의 지상에서의 말씀들과 행위들은 구약의 약속들을 성취시켰다. 그러나 메시야의 목적은 그가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에야 비로서 이루어질 것이다(행10:36). 성령을 주신 것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짓는 현재의 고리이다. 3) 신약의 서신들에서의 계시 – 서신들에서 계시는 일차적으로 예수 안에서 성취되고 취후의 날에 완성될 하나님의 역사적 도래를 가리킨다. 구약은 계시의 거룩한 말씀이다. 그러나 구약은 계시 그 자체로 불리우지는 않으며, 신약에서의 성취를 돕는 것으로 나온다(롬4:23-24). 진정한 주제는 종말론이다. 즉 그리스도(고전1:7), 하나님의 심판(롬2;5) 또는 진노(롬1:18), 적그리스도(살후2:3), 하나님의 의(롬1:16), 그의 자녀들(롬8:19), 그들의 영광(롬8:18)과 구원(벧전1:5) 등의 나타남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구원의 수단으로서 믿음이 계시된다(갈3:23). 선포와 받아들임은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계시이다(살전2:13).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인류의 모든 죄를 아들에게 전가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받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와 부활을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
5. 요한문헌에서의 계시
1) 요한복음서와 서신들 -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보혜사 성령을 통해 감동과 감화의 계시로 깨달아 알게 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 와서 내주하시는 임마누엘 성령님(요14장)은 그리스도인들안에 영원히 내주하실 것이다(요14:16…will be with you forever).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주(현재)와 내재(미래) -(요14:15-26)를 체험하는 믿음은 성화 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게 돕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요한은 로고스(λογος)란 용어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와 연결시킨다. 이 로고스는 우주적이면서도 또한 개인적이다. 우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 성육신이 된 로고스 안에서는 메시야적인 것이든, 신비적인 것이든 관련된 모든 것들(빛, 생명, 기쁨, 하나님과의 영적인 결합)이 만난다. 하지만 이것은 혼합주의나 자연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절대적이며 역사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계시의 최고의 징표는 사랑이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구원사는 선재하신 그리스도에게 연결된다(요8:58). 예수의 지상 사역은 일차적으로 현현의 시각에서 본다(요1:14; 요일1:1). 예수를 통해 되와 사망의 세계에 하나님의 실재가 빛을 발한다(요3:14). 불신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믿는 자들은 모든 은헤와 진리가 충만한 그(예수 그리스도)를 본다(요1:14).
2) 요한계시록 – 이 책은 계시(아포칼립시스àποκὰλὺψς)라고 불리운다. 이 책에서는 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로고스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책의 관심의 초점은 하늘의 세계가 드러날 미래에 주어지고 있다. 이 책은 절대화된 국가 권력과 충돌하고 있던 교회에게 힘을 복돋우어 주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이 잔인한 국가와 고난받고 있는 교회 위에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궁극적인 정복의 세계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6. 계시의 한계와 확증 구약의 언약을 성취한 신약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곳에서 자신을 계시로 증거하셨지만(행14:16-17). 이스라엘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계시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인정한다(요4:22). 하지만 이러한 계시는 이제 모든 인류에게 보다 완전히 전달된다(막13:10; 행1:8 등). 동시에 신약은 거짓 계시에 대항하여 참된 계시를 확증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표적들은 계시를 보여준다(마11:5-6; 요5:36; 고전2:4). 그러나 마귀의 기적들도 존재한다(막13:22-23; 살후2:9-10). 천사 조차도 진정한 계시의 보증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갈1:8; 고후11:14). 참된 계시를 판단하는 보다 나은 시금석은 열매이다(마7:15). 성령은 분별의 은사를 주신다(고전12:10).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참된 계시의 가장 분명한 기준이다(고전12:3) 그러나 신앙고백에는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고전13:1).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요일4:1)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함으로써 그 진실성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역시 사랑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한다(요일4:8; 요13:35). 사랑은 신앙고백이 형식적으로 되지 않도록 하며, 신앙고백은 사랑이 도덕주의로 빠지지 않게 한다.
7. 신학적인 요약 신약에서 계시는 감추어졌던 사실들을 드러내주는 것과 초월적인 하나님의 현현을 가리킨다. 계시는 죄가운데 빠져있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이킴이다. 계시는 구약에서 준비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실현되었고 재림시에 이루어질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계시는 이러한 내용을 전달해 주는 메시지, 즉 계시의 효과적인 전달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전달에 의해 계시는 개인들을 위한 계시가 된다. 요약해서 말하면 계시란 그리스도안에서의 교제를 위해 성부 하나님이 그 자신을 희생하신 것이다.
영어 : Revelation
헬라어 : 명사 – 아포칼립시스 άποκάλυψις, 동사 – 아포칼립토άποκαλύπτω
히브리어 : 니글라, 갈라
라틴어 : revelatio 구약에서는 신약에서 사용된 계시(아포칼립시스)와 같이명사로 사용된 곳이 없으며 동사(니글라,Niph)가 ‘나타났는데(was revealed)’로 표현되어있고 갈라가 ‘계시하다, 알게하다, 벌거벗다, 열다, 밝히다’ 등의 뜻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구약성경 전체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는 하나님의 계시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죄를 짓고 타락한 후에 스스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알려주시기 전에는 알 길이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초월자로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열심히 알리시고 계신다. 구약과 관련된 하나님의 지식은 경험적인 지식, 곧 단순한 사실만을 알리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천사, 사람, 선지자, 말씀, 생물, 자연, 꿈, 환상 등에 의해 관계적으로 교훈된 경험과 지식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역사 가운데 직접 참여하심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말안에 많은 의미와 계시가 들어있다. 출애굽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와 교훈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현재와 미래에서 기대되고 또 우리의 영적 훈련을 위한 생명의 말씀(성경)이 된다.
신약에서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계시문학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성경 전체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계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창조, 역사, 말씀, 인간의 양심 등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계시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의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되어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최고의 행위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와 다시오실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계시라 할 수 있다.
계시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하여 원어의 어근을 중심으로 연구해 보자. 칼립토(καλύπτω)는 ‘파묻다, 숨기다, 덮다’는 뜻으로 아포칼립토(ὰποκακαλὺττω) ‘벗기다, 드러내다’의 어근이다(출14:28, 27:2, 24:15-16, 마8:24, 눅23:30 등). 칼륌마(κὰλυμμα)는 ‘베일, 두건, 덮개’ 등을 의미한다. 모세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웠다(출34:33). 고린도후서 3:7 이하에서 바울은 모세의 이야기를 가지고 구약의 계시와 복음을 비교한다. 만일 일시적인 광채가 영광스럽다면, 복음의 영원한 광채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 여기에서 ‘베일’은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을 읽을 때, 그들의 마음에 드리워져 있는 ‘베일’을 상징한다. 아나칼립토(ὰνακαλὺπτω)는 ‘열다, 벗기다, 제거하다’ 를 의미하고, 카타칼립토(κατακαλὺπτω)는 ‘자신을 덮다, 가리다’, 예배시간에 ‘너울을 쓰다’를 의미한다.
1. 구약에서의 계시 구약에서 계시로 사용되고 있는 계시의 도구들도 신약과 동일하다. 표적(창24:12). 선견자들(삼상9:6), 꿈(창28:12), 신탁(삼상14:37), 제사장의 지시(신17:9, 12), 황홀경, 예언 등과 같은 계시의 수단들이 사용되었다. 금식은 그러한 계시를 받기 위한 예비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단9:3). 구약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수3:10, 사37:4, 신5:23). 하나님은 숨어 계시며 자신이 원할 때에만 자신을 계시하신다(사45:15).
2.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그 자신을 계시하신다. 출애굽 사건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을 위해 이스라엘을 분리시키셨다(출19:4). 출애굽 사건이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잘 계시하고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작품이다(사7:1).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로 그리고 고레스같은 나라와 사람을 사용하여 구속사를 이끌어 가신다. 2) 하나님은 그 자신을 은혜롭고 거룩한 분으로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윤리적인 의미에서 거룩하시다(십계명).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신다. 순종없는 제사는 가증스러운 것이다(삼하12:7; 왕상17:1; 암2:6; 사1:…).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심 속에서 그의 영광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출20:5).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를 보여주시고 용서를 베푸신다(출34:6-7).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축복을 가져다주신다(사40:1; 53장, 61:1-). 여기에서 창조자와 주님(주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나타난다. 3)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동일한 말씀으로 유지하고 지배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직접 말씀해 주시거나 천사나 선지자를 통하여 또는 기록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신실함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 대하여 간음죄가 된다.
3. 계시에 대한 유대교의 태도 1) 일반적인 관점 – 유대교는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를 기대하지 않는다. 유대교에서의 초점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들에서 나타난 과거의 계시에 근거한다. 구전은 단지 설명을 의미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앞으로도 알려지고 또 알려질 것이다. 2) 묵시 – 묵시는 계시를 대치한다(묵시라는 용어는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이 용어는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현저히 팔레스타인적인 것이다. 묵시의 장르는 위경에 있으며 하나님의 추월성이 강조된다. 새 시대는 이미 존재한다. 악이 절정에 달할 때 새 시대는 능력 있게 나타날 것이다. 선견자(선지자)들은 싸우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러한 환상을 계시해 준다. 이러한 주제들의 진지성, 세계사에 대한 개념, 그리고 계시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로 인해 묵시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3) 자연계시 – 헬리니즘 유대교는 한편으로는 변증적인 이유로 인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쟁적인 이유로 인해 보다 더 내재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필로와 지혜서는 세사의 아름다움과 목적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따라서 우상 숭배는 비록 용서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정받을만한 것이다. 헬라 철학에서처럼 필로에게서도 아래로부터 위로의 운동이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서 피로는 범신론의 위협을 방지하기가 어렵다. 바로 여기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계시된 율법과 자연법을 동일시하는 견해가 나타난다.
4. 신약에서의 계시 신약은 구약의 계시를 이어받고 있으며 이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은 묵시에 대한 종말론적 영향을 제외하고는 유대교를 무시한다. 계시에 대한 신약의 견해의 특징적인 역동성은 역사와 종말론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1) 공관복음서에서의 계시 – 세례(침례) 요한의 증거(마3:2)와 예수님의 최초의 메시지(막1:15)는 하나님이 도래하고 있으며, 그의 왕국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계시적인 하나님의 행위에 대비해야만 한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 실재로서 현존한다. 예수님께서는 계시를 부여해주고(마11:27), 그것을 구현시키며 결국 그 자신을 나타낸 것처럼(눅17:30) 계시를 드러낼 것이다(막8:38). 신자들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있는 그대로의 그를 볼 수 있다(마16:17).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하늘에 계신 그의(예수님의) 아버지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Then Jesus said: ‘Simon son of Jonah, you are favoured indeed! You did not learn that from motal man; ot was revealed to you by my heavenly Father. Mt16:17, NEB]. 예수 안에 현존하는 계시를 알리는 것, 그 자체가 계시의 행위이다. 여기서의 장애물은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지식이다(마11:25). 예수님의 계시의 목적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계시를 영화롭게하고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다(막7:8; 마태5:17). 이러한 계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마8:11). 그러나 계시는 모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죄인들로 하여금 순종하는 믿음과 신앙고백을 통해 그러한 계시에 응답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다. 2) 초대 그리스도교에서의 계시 이해 – 여기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보다 강력한 경향을 발견한다. 이미 오신 메시야는 다시 오실 것이다. 메시야는 하늘에 계시다가 어느 날 다시 나타나실 것이다(행3:21). 메시야의 지상에서의 말씀들과 행위들은 구약의 약속들을 성취시켰다. 그러나 메시야의 목적은 그가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에야 비로서 이루어질 것이다(행10:36). 성령을 주신 것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짓는 현재의 고리이다. 3) 신약의 서신들에서의 계시 – 서신들에서 계시는 일차적으로 예수 안에서 성취되고 취후의 날에 완성될 하나님의 역사적 도래를 가리킨다. 구약은 계시의 거룩한 말씀이다. 그러나 구약은 계시 그 자체로 불리우지는 않으며, 신약에서의 성취를 돕는 것으로 나온다(롬4:23-24). 진정한 주제는 종말론이다. 즉 그리스도(고전1:7), 하나님의 심판(롬2;5) 또는 진노(롬1:18), 적그리스도(살후2:3), 하나님의 의(롬1:16), 그의 자녀들(롬8:19), 그들의 영광(롬8:18)과 구원(벧전1:5) 등의 나타남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구원의 수단으로서 믿음이 계시된다(갈3:23). 선포와 받아들임은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계시이다(살전2:13).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인류의 모든 죄를 아들에게 전가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받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와 부활을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
5. 요한문헌에서의 계시
1) 요한복음서와 서신들 -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보혜사 성령을 통해 감동과 감화의 계시로 깨달아 알게 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 와서 내주하시는 임마누엘 성령님(요14장)은 그리스도인들안에 영원히 내주하실 것이다(요14:16…will be with you forever).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주(현재)와 내재(미래) -(요14:15-26)를 체험하는 믿음은 성화 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게 돕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요한은 로고스(λογος)란 용어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와 연결시킨다. 이 로고스는 우주적이면서도 또한 개인적이다. 우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 성육신이 된 로고스 안에서는 메시야적인 것이든, 신비적인 것이든 관련된 모든 것들(빛, 생명, 기쁨, 하나님과의 영적인 결합)이 만난다. 하지만 이것은 혼합주의나 자연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절대적이며 역사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계시의 최고의 징표는 사랑이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구원사는 선재하신 그리스도에게 연결된다(요8:58). 예수의 지상 사역은 일차적으로 현현의 시각에서 본다(요1:14; 요일1:1). 예수를 통해 되와 사망의 세계에 하나님의 실재가 빛을 발한다(요3:14). 불신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믿는 자들은 모든 은헤와 진리가 충만한 그(예수 그리스도)를 본다(요1:14).
2) 요한계시록 – 이 책은 계시(아포칼립시스àποκὰλὺψς)라고 불리운다. 이 책에서는 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로고스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책의 관심의 초점은 하늘의 세계가 드러날 미래에 주어지고 있다. 이 책은 절대화된 국가 권력과 충돌하고 있던 교회에게 힘을 복돋우어 주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이 잔인한 국가와 고난받고 있는 교회 위에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궁극적인 정복의 세계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6. 계시의 한계와 확증 구약의 언약을 성취한 신약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곳에서 자신을 계시로 증거하셨지만(행14:16-17). 이스라엘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계시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인정한다(요4:22). 하지만 이러한 계시는 이제 모든 인류에게 보다 완전히 전달된다(막13:10; 행1:8 등). 동시에 신약은 거짓 계시에 대항하여 참된 계시를 확증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표적들은 계시를 보여준다(마11:5-6; 요5:36; 고전2:4). 그러나 마귀의 기적들도 존재한다(막13:22-23; 살후2:9-10). 천사 조차도 진정한 계시의 보증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갈1:8; 고후11:14). 참된 계시를 판단하는 보다 나은 시금석은 열매이다(마7:15). 성령은 분별의 은사를 주신다(고전12:10).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참된 계시의 가장 분명한 기준이다(고전12:3) 그러나 신앙고백에는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고전13:1).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요일4:1)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함으로써 그 진실성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역시 사랑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한다(요일4:8; 요13:35). 사랑은 신앙고백이 형식적으로 되지 않도록 하며, 신앙고백은 사랑이 도덕주의로 빠지지 않게 한다.
7. 신학적인 요약 신약에서 계시는 감추어졌던 사실들을 드러내주는 것과 초월적인 하나님의 현현을 가리킨다. 계시는 죄가운데 빠져있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이킴이다. 계시는 구약에서 준비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실현되었고 재림시에 이루어질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계시는 이러한 내용을 전달해 주는 메시지, 즉 계시의 효과적인 전달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전달에 의해 계시는 개인들을 위한 계시가 된다. 요약해서 말하면 계시란 그리스도안에서의 교제를 위해 성부 하나님이 그 자신을 희생하신 것이다.
생명 얻는 회개(悔改)는 무엇인가?
생명 얻는 회개(悔改)는 무엇인가?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제자들은 고넬료의 회심을 두고 “생명을 얻는 회개”을 주셨다고 합니다. 회개(悔改)란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이고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면서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합니다. 더 착해지기도 하고 더 악해지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거나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를 않습니다.
중생한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변화는 회심(回心)입니다. 거듭남으로 심어진 새 생명은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됩니다. 성령세례는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즉, 세상과 죄악을 향하던 옛 생활에서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방향 전한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회심입니다. 오늘은 회개와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갖기를 원합니다. 회개를 통하여 발생되는 회심이 얼마나 크고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나를 깨닫게 됩니다.오늘은 회개를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1. 두 가지의 회개 A.생명을 얻는 회개 = B.원죄에 대한 회개 원죄가 무엇인가? 마귀가 죄의 본질입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 (요일3:8)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구원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회개를 하나로 보는데 혼돈이 옵니다. 회개는 두가지로 보아야 합니다. 원죄를 회개하는 것과 생명을 얻는 회개 입니다.
세례요한이 외쳤던 회개는 허물을 사하는 원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율법을 어긴죄 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것은 허물, 곧 우리의 인류의 대표 조상의 죄 입니다.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죄를 사하는 회개를 외치면서 정직하게 살라고 외칩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3:10-14) 세례요한은 율법을 잘지키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베드로의 회개를 외친 회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죄를 회개하라고 하신 외침입니다. 우리도 성령이 내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베드로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여야 성령이 오셔서 내 영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야 내영이 새롭게 태어납니다.사도행전 2장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6-38)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 지르던 유대인들에게 베드로의 회개의 외침이 있은후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회개는 구원받은 사람은 끝난 회개입니다.
유대인의 구원은 베드로를 통해 구원받았고 이방인은 사도바울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하셨습니다.죽을죄 사형(지옥)에 해당되는 죄는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에 이제 자범죄만 회개 하면 됩니다.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도 멸하셨지만 목욕한 자는 손발만 씻으면 되는데, 이 회개는 반복적인 회개이고 눈물흘리고 통회할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생각 날때마다 회개하면 되는 죄입니다. 마치 신랑한테 신부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것같이 고백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얻는 회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끝내놓으셨습니다.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안 믿어지면 이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 죄를 져도 의인입니다. 세상 살면서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생명을 얻는 회개를 통해서 성화가 이루어 집니다.
생명얻는 회개
1. 반복적 회개: 죄를 지을 때 자백하면 됩니다.
2. 생명을 얻는 회개: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을 듣고 단번에 구원 받습니다.
3. 생명을 얻는 회개는 구원의 확신을 얻게됩니다.
4. 반복적 회개는 성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반복적 회개(육신이 죽을때까지 반복 할 회개)
1. 자범죄는 육신이 약하여 율법을 범한 죄로써 경범죄 입니다.
2. 고백과 자백하며 죄를 미워하며 슬퍼하며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회개의 결과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죄를 회개치 않을 때=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이 옵니다. 상급이 없습니다.
반복적인 죄를 짓는자는 미련한자입니다. ①징계가 옵니다. 시89:32-34 (히12:7-8) ② 기도응답이 없습니다. (사1:15) (잠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시89:32-34)그때에 내가 막대기로 그들의 죄 지은 것을 벌하며 채찍으로 그들의 불법을 벌하리라.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완전히 거두지 아니하고 나의 신실함도 없어지게 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거나 내 입술에서 나간 것을 변개하지 아니하리로다 (히12:7-8)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모든 사람이 징계를 받으므로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가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 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②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 집니다. ③ 마음의 평강을 얻게 됩니다. ④ 징계를 면제 받습니다.
반복적 회개의 오해들 ① 반복적 회개를 통하여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 입니다. ② 회개 하지않으면 한번 구원받은 것이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③ 한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로되 아들이면 징계를 받습니다. (요10:27-28) 내 양은 나의 음성을 듣고, 나도 내 양을 안다. 내 양은 나를 따른다.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을 얻는 회개의 방법은?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엡1:13-14 / 행11:14) (엡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행11:14) 그가 네게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전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고넬료는 이방인으로 믿음으로 경건, 경외,구제,기도가 상달 되었지만 구원이 없었고 확신이 없었습니다.(행10:1-8) 이와같이 교회는 다니고 믿음은 있다고하나 성령이 내주하지 않아서 항상 불안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지옥갈까? 하여서 두려워 떠는자는 구원을 다시 점검하여 보아야 합니다. 은사를 받은 것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지 성령님이 내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만 사모하여 큰 은사를 소유했던 사람들이 이단 교주가 되어서 멸망하는 것을 우리눈으로 본 증거들 입니다. 이것을 보고 오해 하여서 성령 받은자도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곡해합니다. 은사는 논밭에서 추수하는 자에게 필요한 연장을 나누어 주는 것이나 같습니다. 일이 끝나면 연장은 반납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없이 은사만 사모하거나 말씀없이 은사만 받았다면 산을 옮기는 은사가 있다하여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일하는 삯만 받는 것입니다. 은사는 말씀과 같이 가야 합니다.그 은사를 통하여서 주님께 영광돌리며 복음 전하는데 사용하여야 합니다.말씀으로 내 속에 성령님이 계셔서 나를 주장하고 인쳐주셔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내영이 탄생하고 자라게 됩니다.
내 영이 주의 영과 하나가 되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은사는 성령의 도구이지 성령님이 아닙니다. 성령 받는것과 성령의 은사받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에 은사를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거나 모여들면 다음으로 이어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말씀선포 였습니다.말씀도 없이 목적도없이 은사로 병만 고쳐주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병고쳐 주고 복음 전하고 그 영혼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은사는 육체에 성령께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육체는 죽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영에게 주는 것입니다. 영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 고넬료와 친족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생명얻는 회개를 하였고 구원(성령)을 받았습니다.(행11:18) (행11:18) 할례받은 신자들은 베드로의 말을 다 듣더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생명 얻는 회개의 결과 ①회개하지 않으면 영생이 없고 심판을 받게됩니다. (단12:2-3 / 요5:28-29) (요5:28-29) 이 말을 한다고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 부활할 것이며,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할 것이다. (단12:2-3) 이미 죽은 사람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다시 깨어나 영원히 살며, 어떤 사람은 깨어나 영원히 부끄러움과 멸시를 당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의 밝은 별처럼 빛날 것이다.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 사람은 영원히 별처럼 빛날 것이다.
② 생명을 얻는 회개가 이루어지면, 구원의 확신, 심판의 면제,를 받습니다. 믿는 자들 중에도 심판의 두려움이나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두려워 떠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느분이 이런 댓글을 올렷습니다. 지금은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의인 중에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이런분은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남이 몰라주어도 본인은 압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본인은 심판을 받지않는다는 것을 압니다.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죽음에서 사면장을 받은자 입니다.
두가지의 제사와 회개의 의미 (히7:1-15)
①아론의반차를 따라하는 일회적 제사 (히10:1-4)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②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 (히10:17-18)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아니고 주님께서 맺어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도구입니다.(고전12장) 그것을 사용할때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져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라 주신 것이 아닙니다.예수님을 높히고 복음 전하는데 사용되야 합니다. 성도는 지옥갈 수 가 없습니다. 감옥에서 사면을 받아나왔는데 다시 감옥에 가려는 사람도없고 그곳에 보내 달라고 애원하시겠습니까? 이제 깨닫고 확신하시길 바랍니다.은사는 육체의 것이고 말씀은 영의 것입니다. 바른 회개가 필요하며,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제자들은 고넬료의 회심을 두고 “생명을 얻는 회개”을 주셨다고 합니다. 회개(悔改)란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이고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면서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합니다. 더 착해지기도 하고 더 악해지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거나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를 않습니다.
중생한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변화는 회심(回心)입니다. 거듭남으로 심어진 새 생명은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됩니다. 성령세례는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즉, 세상과 죄악을 향하던 옛 생활에서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방향 전한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회심입니다. 오늘은 회개와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갖기를 원합니다. 회개를 통하여 발생되는 회심이 얼마나 크고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나를 깨닫게 됩니다.오늘은 회개를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1. 두 가지의 회개 A.생명을 얻는 회개 = B.원죄에 대한 회개 원죄가 무엇인가? 마귀가 죄의 본질입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 (요일3:8)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구원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회개를 하나로 보는데 혼돈이 옵니다. 회개는 두가지로 보아야 합니다. 원죄를 회개하는 것과 생명을 얻는 회개 입니다.
세례요한이 외쳤던 회개는 허물을 사하는 원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율법을 어긴죄 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것은 허물, 곧 우리의 인류의 대표 조상의 죄 입니다.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죄를 사하는 회개를 외치면서 정직하게 살라고 외칩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3:10-14) 세례요한은 율법을 잘지키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베드로의 회개를 외친 회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죄를 회개하라고 하신 외침입니다. 우리도 성령이 내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베드로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여야 성령이 오셔서 내 영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야 내영이 새롭게 태어납니다.사도행전 2장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6-38)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 지르던 유대인들에게 베드로의 회개의 외침이 있은후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회개는 구원받은 사람은 끝난 회개입니다.
유대인의 구원은 베드로를 통해 구원받았고 이방인은 사도바울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하셨습니다.죽을죄 사형(지옥)에 해당되는 죄는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에 이제 자범죄만 회개 하면 됩니다.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도 멸하셨지만 목욕한 자는 손발만 씻으면 되는데, 이 회개는 반복적인 회개이고 눈물흘리고 통회할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생각 날때마다 회개하면 되는 죄입니다. 마치 신랑한테 신부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것같이 고백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얻는 회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끝내놓으셨습니다.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안 믿어지면 이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 죄를 져도 의인입니다. 세상 살면서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생명을 얻는 회개를 통해서 성화가 이루어 집니다.
생명얻는 회개
1. 반복적 회개: 죄를 지을 때 자백하면 됩니다.
2. 생명을 얻는 회개: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을 듣고 단번에 구원 받습니다.
3. 생명을 얻는 회개는 구원의 확신을 얻게됩니다.
4. 반복적 회개는 성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반복적 회개(육신이 죽을때까지 반복 할 회개)
1. 자범죄는 육신이 약하여 율법을 범한 죄로써 경범죄 입니다.
2. 고백과 자백하며 죄를 미워하며 슬퍼하며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회개의 결과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죄를 회개치 않을 때=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이 옵니다. 상급이 없습니다.
반복적인 죄를 짓는자는 미련한자입니다. ①징계가 옵니다. 시89:32-34 (히12:7-8) ② 기도응답이 없습니다. (사1:15) (잠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시89:32-34)그때에 내가 막대기로 그들의 죄 지은 것을 벌하며 채찍으로 그들의 불법을 벌하리라.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완전히 거두지 아니하고 나의 신실함도 없어지게 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거나 내 입술에서 나간 것을 변개하지 아니하리로다 (히12:7-8)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모든 사람이 징계를 받으므로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가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 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②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 집니다. ③ 마음의 평강을 얻게 됩니다. ④ 징계를 면제 받습니다.
반복적 회개의 오해들 ① 반복적 회개를 통하여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 입니다. ② 회개 하지않으면 한번 구원받은 것이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③ 한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로되 아들이면 징계를 받습니다. (요10:27-28) 내 양은 나의 음성을 듣고, 나도 내 양을 안다. 내 양은 나를 따른다.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을 얻는 회개의 방법은?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엡1:13-14 / 행11:14) (엡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행11:14) 그가 네게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전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고넬료는 이방인으로 믿음으로 경건, 경외,구제,기도가 상달 되었지만 구원이 없었고 확신이 없었습니다.(행10:1-8) 이와같이 교회는 다니고 믿음은 있다고하나 성령이 내주하지 않아서 항상 불안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지옥갈까? 하여서 두려워 떠는자는 구원을 다시 점검하여 보아야 합니다. 은사를 받은 것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지 성령님이 내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만 사모하여 큰 은사를 소유했던 사람들이 이단 교주가 되어서 멸망하는 것을 우리눈으로 본 증거들 입니다. 이것을 보고 오해 하여서 성령 받은자도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곡해합니다. 은사는 논밭에서 추수하는 자에게 필요한 연장을 나누어 주는 것이나 같습니다. 일이 끝나면 연장은 반납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없이 은사만 사모하거나 말씀없이 은사만 받았다면 산을 옮기는 은사가 있다하여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일하는 삯만 받는 것입니다. 은사는 말씀과 같이 가야 합니다.그 은사를 통하여서 주님께 영광돌리며 복음 전하는데 사용하여야 합니다.말씀으로 내 속에 성령님이 계셔서 나를 주장하고 인쳐주셔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내영이 탄생하고 자라게 됩니다.
내 영이 주의 영과 하나가 되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은사는 성령의 도구이지 성령님이 아닙니다. 성령 받는것과 성령의 은사받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에 은사를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거나 모여들면 다음으로 이어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말씀선포 였습니다.말씀도 없이 목적도없이 은사로 병만 고쳐주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병고쳐 주고 복음 전하고 그 영혼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은사는 육체에 성령께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육체는 죽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영에게 주는 것입니다. 영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 고넬료와 친족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생명얻는 회개를 하였고 구원(성령)을 받았습니다.(행11:18) (행11:18) 할례받은 신자들은 베드로의 말을 다 듣더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생명 얻는 회개의 결과 ①회개하지 않으면 영생이 없고 심판을 받게됩니다. (단12:2-3 / 요5:28-29) (요5:28-29) 이 말을 한다고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 부활할 것이며,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할 것이다. (단12:2-3) 이미 죽은 사람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다시 깨어나 영원히 살며, 어떤 사람은 깨어나 영원히 부끄러움과 멸시를 당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의 밝은 별처럼 빛날 것이다.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 사람은 영원히 별처럼 빛날 것이다.
② 생명을 얻는 회개가 이루어지면, 구원의 확신, 심판의 면제,를 받습니다. 믿는 자들 중에도 심판의 두려움이나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두려워 떠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느분이 이런 댓글을 올렷습니다. 지금은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의인 중에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이런분은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남이 몰라주어도 본인은 압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본인은 심판을 받지않는다는 것을 압니다.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죽음에서 사면장을 받은자 입니다.
두가지의 제사와 회개의 의미 (히7:1-15)
①아론의반차를 따라하는 일회적 제사 (히10:1-4)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②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 (히10:17-18)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아니고 주님께서 맺어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도구입니다.(고전12장) 그것을 사용할때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져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라 주신 것이 아닙니다.예수님을 높히고 복음 전하는데 사용되야 합니다. 성도는 지옥갈 수 가 없습니다. 감옥에서 사면을 받아나왔는데 다시 감옥에 가려는 사람도없고 그곳에 보내 달라고 애원하시겠습니까? 이제 깨닫고 확신하시길 바랍니다.은사는 육체의 것이고 말씀은 영의 것입니다. 바른 회개가 필요하며,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영혼 구령에 있어서 기도의 위치[J. 오스왈드 샌더스]
영혼 구령에 있어서 기도의 위치[J. 오스왈드 샌더스]
영혼을 구령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성령님과 협력하여 쓰임을 받기를 진정으로 갈망하고 또 소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룩한 중보기도의 사역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숙달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하여 우시고 또한 기도하셨다면, 그의 종된 우리도 또한 그 동일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기도는 영혼 구령자의 계획과 프로그램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구원은 인간의 역사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만일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포기되어야 마땅합니다. 상당한 대가가 지불되는 만큼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더욱 강력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기도하는 우리의 위치를 더욱 굳게 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기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우리가 참된 기도를 하기 위해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든 죄에 대해서 분명한 회개를 하고, 그 죄를 버려야 합니다. 과연 이렇게 할 용의가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혼 사이에서 계속해서 갈등하시렵니까? 우리 마음이 안정을 찾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후에야 우리들은 영혼들에 대한 짐을 감당하게 되고, 또한 새로운 생명이 심겨지고 영혼들이 거듭나는데 이르기까지 해산하는 고통을 능히 감내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한 내용을 들어보고, 또한 그의 모든 기도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될 수 있었는지를 주목해 보시기바랍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에바브라디도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골4:12)
진젠도르프 백작이 10세에서 13세 사이의 몇몇 소녀들의 영적인 교육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게 된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비록 그들의 태도가 책망할 만한 것이 없고, 여전히 그들의 모습과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실이 그의 영혼을 무겁게 했으며, 그들을 위한 간절한 중보 기도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부유한 젊은 귀족이었던 진젠도르프는 몇몇 소녀들의 영적인 복지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한 그의 관심이 더욱 강렬해지고, 마침내 힘을 다하는 기도를 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때, 참으로 특별한 결과를 내게 되었다. 그가 자신이 맡은 반을 위해 간절히 구했던 축복이 임하였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축복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역사상 유례없는 선교사역의 꽃을 피운 모라비안 운동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역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영혼 구령자의 기도는 우선을 자신을 이한 기도로 시작해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전도하고자 하는 영혼을 위한 기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는 다음과 같이 삼중적인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첫번째;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하고자 하는 양심적인 용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을 한다는 것을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임이 틀림없습니다. 당신에게 담대함이 필요한가요? 그렇다면 초대 교회의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 기도를 하십시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빌기를 다하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29-31).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7).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이전에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능히 하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 구령하고자 하는 영혼을 향해 나아갈 때,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무차별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거나, 성령의 감동없이 말하는 것은 종종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그 대상이 되는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되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기꺼이 복음을 전하기를 기대하시지만,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F.B. Meyer[마이어]는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서 그가 말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짐을 계속해서 느끼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전도자 빌립의 경우는 이에 대한 탁월한 사례입니다(행8:26). 우리가 접촉해야 할 영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순간 그 영혼을 위한 메시지를 하나님이 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간마다 인도해 주시도록 지속적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습관을 들이게 된다면, 주님은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켜주시면서 우리가 언제 말해야 하고, 또한 언제 잠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세번째; 무엇을 말해야 할지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모든 영혼 구령자들이 과거에 전혀 경험이 없었을 때가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복음을 증거하도록 당신을 부르셨다면, 하나님께서 또한 증거할 메시지도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필요를 아시며, 또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기 때문에 가장 합당한 성경구절을 기억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하시리라”(요14:26).
얻고자 애쓰는 영혼을 위한 전도자의 기도, 또한 삼중적이어야 합니다.
첫번째, 무관심이나 적대감이 없도록 기도해야 하며, 영혼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 그들의 마음이 열려있도록 위해서 시도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전도자보다 앞서서 일하시지 않는다면, 영혼의 견고한 요새를 헛되이 공격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지속적인 믿음의 기도는 종종 적대적인 마음으로 견고해진 영혼도 깨뜨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번째, 마음 밭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진리의 영)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성령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영혼을 각성케 하는 일을 하십니다.
세번째, 영혼이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진짜 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가 영적인 전쟁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나타난 “강한 자”인 사단은 아담의 모든 후손을 사로잡아 두고 있으며, 영혼 구원을 향해 진행되는 모든 과정마다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의 기도만이 강한 자를 결박하고, 영혼을 구해낼 수가 있습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계12:11). 기도의 전사들은 반드시 갈보리의 승리에 호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는 어린양의 피가 마귀의 권세를 영원히 깨뜨렸으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빼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든 왓트(Gordon Watt)는 “참된 기도는 악한 자의 공격에 대해 강력한 영적인 힘을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해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뿐 아니라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을 패배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십자가 사역에 호소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영혼의 해방을 위해서 어린 양의 피에 호소하십시오. 우리의 기도는 그 목표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는 한 헛되이 드려질 수 있습니다. 사격수는 온 세상 가운데 오직 한 지점만을 조준합니다. 그가 총을 쏜 후에야 자신이 과녁을 맞혔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압니다.
우리의 기도도 동일한 순서를 따라야 합니다. 기도는 명확해야 하며, 그러할 때 우리가 드린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호의 이름을 아뢰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까요? 여기서도 성령님의 인도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간구는 성령님이 가르치신 것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향력 안에 있는 영혼들에 대한 부담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R. A. 토레이 박사의 사역 초기에 앞서 언급한 방법을 통해 그 마음에 두 영혼에 대한 부담을 주셨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수년 동안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지만, 그들은 회심하지 못했습니다. 수년 동안 계속해서 그는 날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후에 그 도시에 설립된 선교회를 맡아 섬길 때, 그 두 삶이 같은 날 저녁에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우리는 다음 성경구절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롬8:26)
우리의 기도는 구체적이며, 또한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우리 마음에 내키는 대로 기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사30:18)는 구절의 다른 번역본에는 “대저 여호와는 체계적인 하나님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체계적으로 하게 되면, 종종 우리의 기도 가운데 확연히 드러나는 조급해 하는 일이 사라질 것이며, 인내심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고는 급히 도망치듯 하기가 일쑤입니다.
그 옛날 청교도는 “문을 장난삼아 두드리는 어리석은 아이들은 누군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계속해서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두드리는 이에게[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11:9-10). 응답이 하늘 전화선을 타고 오기 전에는 결코 전화기를 내려놓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눅18:1) 마십시오. 그러나 믿는 마음이 없으면 상황은 더욱 꼬일 것이며, 기도에 대한 응답은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을 근심케 하거나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신 분이십니다.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기도는 영혼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만일 누가 어떤 성도의 믿음의 기도가 없이도 구원을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참으로 의심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될 줄로 압니다.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영혼을 구령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성령님과 협력하여 쓰임을 받기를 진정으로 갈망하고 또 소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룩한 중보기도의 사역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숙달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하여 우시고 또한 기도하셨다면, 그의 종된 우리도 또한 그 동일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기도는 영혼 구령자의 계획과 프로그램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구원은 인간의 역사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만일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포기되어야 마땅합니다. 상당한 대가가 지불되는 만큼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더욱 강력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기도하는 우리의 위치를 더욱 굳게 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기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우리가 참된 기도를 하기 위해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든 죄에 대해서 분명한 회개를 하고, 그 죄를 버려야 합니다. 과연 이렇게 할 용의가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혼 사이에서 계속해서 갈등하시렵니까? 우리 마음이 안정을 찾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후에야 우리들은 영혼들에 대한 짐을 감당하게 되고, 또한 새로운 생명이 심겨지고 영혼들이 거듭나는데 이르기까지 해산하는 고통을 능히 감내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한 내용을 들어보고, 또한 그의 모든 기도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될 수 있었는지를 주목해 보시기바랍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에바브라디도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골4:12)
진젠도르프 백작이 10세에서 13세 사이의 몇몇 소녀들의 영적인 교육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게 된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비록 그들의 태도가 책망할 만한 것이 없고, 여전히 그들의 모습과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실이 그의 영혼을 무겁게 했으며, 그들을 위한 간절한 중보 기도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부유한 젊은 귀족이었던 진젠도르프는 몇몇 소녀들의 영적인 복지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한 그의 관심이 더욱 강렬해지고, 마침내 힘을 다하는 기도를 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때, 참으로 특별한 결과를 내게 되었다. 그가 자신이 맡은 반을 위해 간절히 구했던 축복이 임하였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축복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역사상 유례없는 선교사역의 꽃을 피운 모라비안 운동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역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영혼 구령자의 기도는 우선을 자신을 이한 기도로 시작해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전도하고자 하는 영혼을 위한 기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는 다음과 같이 삼중적인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첫번째;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하고자 하는 양심적인 용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을 한다는 것을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임이 틀림없습니다. 당신에게 담대함이 필요한가요? 그렇다면 초대 교회의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 기도를 하십시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빌기를 다하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29-31).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7).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이전에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능히 하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 구령하고자 하는 영혼을 향해 나아갈 때,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무차별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거나, 성령의 감동없이 말하는 것은 종종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그 대상이 되는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되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기꺼이 복음을 전하기를 기대하시지만,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F.B. Meyer[마이어]는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서 그가 말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짐을 계속해서 느끼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전도자 빌립의 경우는 이에 대한 탁월한 사례입니다(행8:26). 우리가 접촉해야 할 영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순간 그 영혼을 위한 메시지를 하나님이 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간마다 인도해 주시도록 지속적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습관을 들이게 된다면, 주님은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켜주시면서 우리가 언제 말해야 하고, 또한 언제 잠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세번째; 무엇을 말해야 할지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모든 영혼 구령자들이 과거에 전혀 경험이 없었을 때가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복음을 증거하도록 당신을 부르셨다면, 하나님께서 또한 증거할 메시지도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필요를 아시며, 또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기 때문에 가장 합당한 성경구절을 기억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하시리라”(요14:26).
얻고자 애쓰는 영혼을 위한 전도자의 기도, 또한 삼중적이어야 합니다.
첫번째, 무관심이나 적대감이 없도록 기도해야 하며, 영혼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 그들의 마음이 열려있도록 위해서 시도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전도자보다 앞서서 일하시지 않는다면, 영혼의 견고한 요새를 헛되이 공격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지속적인 믿음의 기도는 종종 적대적인 마음으로 견고해진 영혼도 깨뜨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번째, 마음 밭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진리의 영)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성령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영혼을 각성케 하는 일을 하십니다.
세번째, 영혼이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진짜 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가 영적인 전쟁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나타난 “강한 자”인 사단은 아담의 모든 후손을 사로잡아 두고 있으며, 영혼 구원을 향해 진행되는 모든 과정마다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의 기도만이 강한 자를 결박하고, 영혼을 구해낼 수가 있습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계12:11). 기도의 전사들은 반드시 갈보리의 승리에 호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는 어린양의 피가 마귀의 권세를 영원히 깨뜨렸으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빼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든 왓트(Gordon Watt)는 “참된 기도는 악한 자의 공격에 대해 강력한 영적인 힘을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해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뿐 아니라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을 패배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십자가 사역에 호소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영혼의 해방을 위해서 어린 양의 피에 호소하십시오. 우리의 기도는 그 목표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는 한 헛되이 드려질 수 있습니다. 사격수는 온 세상 가운데 오직 한 지점만을 조준합니다. 그가 총을 쏜 후에야 자신이 과녁을 맞혔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압니다.
우리의 기도도 동일한 순서를 따라야 합니다. 기도는 명확해야 하며, 그러할 때 우리가 드린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호의 이름을 아뢰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까요? 여기서도 성령님의 인도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간구는 성령님이 가르치신 것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향력 안에 있는 영혼들에 대한 부담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R. A. 토레이 박사의 사역 초기에 앞서 언급한 방법을 통해 그 마음에 두 영혼에 대한 부담을 주셨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수년 동안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지만, 그들은 회심하지 못했습니다. 수년 동안 계속해서 그는 날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후에 그 도시에 설립된 선교회를 맡아 섬길 때, 그 두 삶이 같은 날 저녁에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우리는 다음 성경구절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롬8:26)
우리의 기도는 구체적이며, 또한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우리 마음에 내키는 대로 기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사30:18)는 구절의 다른 번역본에는 “대저 여호와는 체계적인 하나님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체계적으로 하게 되면, 종종 우리의 기도 가운데 확연히 드러나는 조급해 하는 일이 사라질 것이며, 인내심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고는 급히 도망치듯 하기가 일쑤입니다.
그 옛날 청교도는 “문을 장난삼아 두드리는 어리석은 아이들은 누군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계속해서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두드리는 이에게[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11:9-10). 응답이 하늘 전화선을 타고 오기 전에는 결코 전화기를 내려놓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눅18:1) 마십시오. 그러나 믿는 마음이 없으면 상황은 더욱 꼬일 것이며, 기도에 대한 응답은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을 근심케 하거나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신 분이십니다.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기도는 영혼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만일 누가 어떤 성도의 믿음의 기도가 없이도 구원을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참으로 의심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될 줄로 압니다.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