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4/2009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안식일의 임무가 무엇이었습니까?( 20:12)

선민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안식일을 주신 근본 뜻은,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20:12)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삶이 자기 얼굴을 잊고 사는 시간이 많듯이 세상살이가 바쁘면 신앙인들이라 해도 하나님을 잊고 지내기가 쉽습니다. 그러다가 주일이 되면 주일이라는 그 날이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일곱 째 날만 되면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날입니다. 사람은 곧 잘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말씀도 매일 매일 가까이 하지 않으면 곧 잘 잊어버리고 세상살이에 골몰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의 결핍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날을 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날에 일손을 금하라 하심도 엿새 동안의 그 업무에 연관하지 못하게 함이요, 그 날에 불을 지피지 말라 하심도 근신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게 하려 하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하나님을 온전히 기억하게 하는 날을 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처럼 일곱 째 날과 모든 율법은 선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잇게 해 줍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며 섬기게 하던 이 모든 율법과 안식일이 예수님의 그림자 역할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율법과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던 것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차원, 어떻게 다를까요?
 
지금 우리는 할례 언약 안에서 율법과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룬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 참예하게 되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12:8)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였으나 때가 이르자 안식일의 주인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율법 당시에는 안식일의 주인을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었고 안식일의 주인과 관계를 맺고 싶어도 맺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은 그 주인이 이를 때까지 청지기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를 때까지 선민은 청지기(안식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 3:23-25)
 
율법 아래서는 안식일만 되면 안식일에 나를 드렸지만 이제 예수님에게 나를 드린바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주관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맡긴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여 나를 맡으시고 주의 뜻대로 인도 하소서~ 이것이 우리의 믿음과 기도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나를 드려 예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의 관리 하에서 안식일의 종이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종이 되었으니 안식일이 나를 맡아 주관하던 것을 예수님이 나를 맡아 주관하고 계십니다.
 
청지기 아래 있던 자가 그 주인의 소유가 되어 주인의 주관 아래 있게 되면 전에 나를 주관하던 그 청지기는 나를 상관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빼앗아 자기관할 하에 둘 종은 없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12:8) 주인은 그 종에게 매이는 신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매이는 신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매이는 법은 없습니다.
 
아직도 안식일 법에 매여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신분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나는 실체를 외면하고 그림자가 된 것을 붙들고 의를 이루려고 하고 있는 자가 아닌가?

자유하게 하는 율법

율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럽고 무겁고, 죄만을 깨닫게 해주는 저주스러운 것, 죽어도 지킬 수 없는 것이 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 능히 행할 수 있는 것, 온전하고 복이 되는 것이 되기도 한다. 1:25절에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드려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이 율법은 바울이 말한 율법과는 또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0)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7:9-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0)
 
바울이 전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로마나 갈라디아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율법은 분명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이었지만 야고보가 권면하고 있는 이미 성숙한 성도들에게는 율법은 "자유하게"하는 "온전한" 율법이며 또 능히 ”행할 수 있는" 율법이며 "복된 율법"이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한 율법이 어떤 자들에게는 “무거운” 것이 되는데 반하여 어떤 자들에게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천천히 설명해 보자. 율법은 결코 둘이 아니요, 하나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나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법이나 모세의 법이나 그리스도의 법이나 바울의 율법이나 야고보의 율법은 같은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이 율법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두 종류이다. 한 종류의 사람은 옛사람이 살아있는 종교인이다. 또 한 종류는 옛사람이 죽어있는 성도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율법은 각기 다른 모습을 띄게 되는 것이다. 법은 한 법이로되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1. 먼저 무거운 율법으로 보이는 경우를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율법은 무거운 짐일 뿐만 아니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 저주 받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사항인데 반하여 인간은 그 요구를 이행할 만큼 유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혀 인간은 부패하여 있고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오히려 바울의 말처럼 율법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될 자라는 정죄를 받게만 할 뿐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잘 보이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유혹을 받게 되고,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게 되리라는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빠졌던 함정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구원교리를 설파하였으며 그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리가 이미 행위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큰 영향을 미쳐서 “행위무용론” 내지는 “율법폐기론”으로 치닫고 있어서 복음을 값싼 복음으로 만들고 있고 입으로 만의 구원을 외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도의 올바른 행실이 아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행위를 얼마나 많이 강조하고 있는가? 심지어 심판대 앞에서도 “행함을 따라(according to that he had done) (고후 5:10)"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듯 행함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절대 무시되고 있는 현상은 지나치게 이신칭의를 강조한데서 비롯된다. 아니 율법에 대한 중대한 오해 때문에 발생한 현상인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서는 루터의 말처럼 “지푸라기” 정도로 밖에는 안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결코 지푸라기 서신이 아니다. 30년 가까이 예수님을 보아 오면서 함께 자라왔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예수님의 의중을 몰라서 그의 뜻에 반하는 “행위”를 존중하는 글을 썼겠는가? 여러 말할 필요 없이 행위는 중요한 것이다. 행위는 열매이다. 열매가 나쁜 것은 잘못된 신앙임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한 야고보의 해석에 귀를 기울여봐야 한다.
 
2. 이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보이는 경우를 보자
전설한 것과 같이 한 율법이로되 어떤 사람에게는 무거운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하게 하는 율법”으로 보인다. 왜 그런가? 야고보의 말과 같이 온전한 율법이 되는 이유, 행할 수 있는 율법이 되는 이유, 자유하게 되는 율법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왜 온전한 율법인가? - 모세의 율법은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처럼 “무흠”하지 못했다.( 8:7) 다시 말해서 온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케 하려고 오셨다.
 
“내가 온 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5:17)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을 믿는 자 안에 보내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이본성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으니까 성령을 통하여 율법을 지키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계명들(율법)을 지키는 자는 저안에 거하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고, 계명들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저 안에 거한다고 볼 수가 없다는 말인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성령이 거하시는 증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율법을 지키게 만드시는 분이시지 율법을 배격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율법폐기론이나 행위무용론은 성령의 뜻을 아주 오해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어찌 613가지나 된다는 율법 조항 하나인들 걸리지 않게 살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을 지킬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써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써 되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의 법은 행위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문제 삼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곧 ‘그리스도의 법’( 6:2)이다. 이 법은 행위로는 간음을 행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 간음을 행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 되어 버림으로 알고 보면 그리스도의 법은 율법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이렇게 성격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법은 구약율법 보다 온전하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율법을 지킬 수가 있을까? 현실적으로 행위를 규제하는 옛 율법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데 마음으로 까지 범죄 하지 않아야하는 그리스도의 법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이 엄하고도 무서운 그리스도의 법도 성령으로써는 지킬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은 성격으로 뿐만 아니라 성취 면에서도 온전한 것이다.
 
2) 왜 행할 수 있는 법인가?  - 전설한 것처럼 옛 법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인생들에게 온전해진 그리스도의 법이 어떻게 준행 가능한 것이 될 수가 있겠는가? 물론 변화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옛사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법을 지키려면 옛사람은 죽어야 한다. 죄 성으로 찌들어 있는 옛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못 박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분이 이루어 놓으신 사업의 결과, 곧 나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옛사람의 정욕대로 살면서도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믿고 있으니 율법으로 부터는 해방을 받았는지는 모르나 여전히 육체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옛사람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었음을 철저히 믿어야 한다. 믿는 만큼 옛사람은 죽어지게 되어 있다. 이제는 나로 인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로 인해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놀랍게도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서 무슨 죄가 나오겠는가? 마음에 미움도 간음도 도둑심보도 없는데 무슨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거듭나고 옛사람이 죽은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흠 있는 율법은 말하기를 “간음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그 계명을 지키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성령을 받으면 간음하고 싶은 마음이 원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부터 간음은 성사되지 않는다. 그러니 행위로 나타나질 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신약에서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힘 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의지로 내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이미 죽은 나에게 무슨 의지나 힘이 있을까?) 오직 성령으로 인하여 사는 것인즉 율법 역시 성령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못할 것이 세상에 있겠는가?
 
옛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 옛사람은 죽었기 때문에 아예 미움까지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러니 누구인들 미워하겠으며 원수인들 사랑하지 못하겠는가? 이래서 율법은 ‘행할 수 없는’ 무거운 율법이 아니라 ‘행할 수 있는’ 율법이 되는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는 자는...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1:25)
 
3) 자유하게 하는 율법 - 이 율법은 행함을 통하여 점점 더 자유함에 나가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옛날의 율법은 사람을 종으로 만들었다. 무슨 종인가? 율법의 종이며, 육체의 종이며, 죄의 종이며, 마귀의 종이며, 사망의 종이었다. 예를 들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써도 안 된다. 타고난 아담의 본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율법이 무섭고...그 육체의 욕구에 빈번히 지게 되니 육체의 종이고, 또 죄를 지었으니 죄의 종이며, 마귀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니 마귀의 종이요, 더 나아가서 그 결과로써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사망의 종인 것이다.
 
그러나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보니 죄의 정욕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육체로부터의 자유자다. 율법을 행할 수 있으니 율법의 정죄가 없다. 곧 율법으로 부터의 자유자다. 죄를 안 지으니 죄와 상관이 없다. 죄로 부터도 자유자다. 따라서 마귀도 나를 공격하지 못하니 마귀로 부터도 자유자요, 사망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으니 사망으로부터도 자유자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이토록 놀라운 해방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십자가는 위대한 것이요, 영원한 자랑거리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율법은 "속박의 율법" 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 되는 것이다. 자유의 율법이 실제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 실례를 들어보자.
 
나에게서 돈을 꾸어가고 몇 년째 갚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보기만 해도 화가 나고 미운 생각이 났다. 다시는 안 꾸어 주리라 마음을 먹으면서 얄미운 생각에 치를 떨었다. 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가? 그런데 육체와 함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오직 성령으로 산다. 당연히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처음엔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신이 죽었음을 인정하면서 성령님께 순종하고자 결심을 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사실 이때에 그는 계명(율법)을 행한 것이다. 그랬더니 성령께서는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주신다. 정말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진정으로 용서를 하고 나니까 미운 마음이 없어지고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행하고 나니 율법의 정죄로 부터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그가 어떤 자유를 얻게 되는가?
 
*우선 미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자신의 분한으로부터도 자유함을 얻었다.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기고 멸시했던 마음으로 부터도 자유를 얻었다.

더 나아가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이 얼마나 큰 복인가? 물론 이처럼 자유의율법대로 행한 자들은 미래에 큰 상을 받게 될 것이지만 현재로써도 얼마나 큰 복인가? 그렇다.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응해진 것이다. 할렐루야~! 

왜 예수님의 십자가야만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구원에 있어서 “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율법으로부터 승리였으며, 죄의 사망과 권세로부터의 완전한 승리였으며,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두 번 다시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대속의 효력은 언제까지 지속되어지는 것일까? 영원토록 지속되어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 외에 무엇인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단적인 주장이 되는 것이다.

어떤 교회나 단체의 교주를 만나야만 구원이 있다는 곳은 명백한 이단이며.... 어떤 율법과 계명, 규범과 규약을 지켜야만 의인이 되며 구원을 얻는다는 곳은 명백한 이단이 되어지며..... 안식일이나 유월절을 지켜야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곳은 명백한 이단이 되어진다. 하다못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곳도 이단이 된다.

구원의 조건은 오직 예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 이유는 예수의 십자가 대속은 완전한 제물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온전히 받으셨기 때문이다.

정통교단인 장로교와 감리교와 침례교, 성결교회등등 정통교단은 오직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물론 정통교단의 이름과 명칭만 사용하는 이단들은 제외된다) 다시 말하여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곳은 명백한 이단이 되는 것이다.

이단의 첫 번째 조건은 오직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곳이며,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외에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곳이다.

무엇인가 지켜야만 한다거나, 무엇인가 깨달아야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누구를 만나야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경과 다른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하거나, 성경을 이상한 뜻으로 달리 해석하는 방법도 사용한다. 특히 자신들의 교회에서만 구원이 있으며 어떤 특별한 지식이나 깨우침이 있어야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며, 그들은 당연히 이단이라고 불린다.

왜 그럴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완전한 것이었으며, 영원한 효력을 갖는 것이고, 오직 한번 단번에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온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로 온전히 받아들이셨다. 즉 구원을 위하여 예수의 믿음 외에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곳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완전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류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두 번 오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즉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들이 자신을 다시 온 예수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모두 비성경적인 거짓말이 되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셨으며, 승리하셨기 때문에 두 번 오실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두 번째 오시는 이유는 오직 심판을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미 죄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두 번째 나타나심은 죄와는 상관이 없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9:28)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4:1)

우리는 죄를 위하여 두번 다시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으며, 우리는 예수의 피로 힘입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17-22)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를 인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이미 영원한 제사,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고, 하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심판을 위하여 오실 것이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4)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율법으로부터 승리이며 율법의 마침이 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인하여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하여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2:21-3:1)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따위를 지켜야만 죄사함을 얻거나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며, 음식물 규례를 지켜야만 주장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그러한 것들은 이미 그림자이고, 예수님이 바로 실체가 되신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4-17)

그래서 바울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분노의 서신을 보내었던 것이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4:10-11)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은혜구원과 성화구원

구원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혼란을 겪는 가장 큰 원인은 은혜구원과 성화구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구원은 누구나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내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진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구원을 받는데는 체 5분도 걸리지 않으며, 이로써 우리는 사탄의 주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관권 아래로 들어가며,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은혜구원만으로 구원을 마쳤다고 믿고, '이제 구원(천국행)은 따 논 당상이니 세상에 빠져 마음껏 즐기며 살아보자!'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구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성화구원입니다. 성화구원은 죽었던 내 영이 물과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중생', 내 영이 진리와 은혜 가운데 거룩히 자라나는 '성화', 온전한 예수님의 형상을 이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영화'의 단계를 거치는 것입니다.

구원에 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좁고 험난한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시 홍해를 건넌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40년동아 연단 받으며 광야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 은혜구원과 성화구원이 나누어진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딤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이곳의 내용은 킹 제임스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딤전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로마서 8/29-30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하여 예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마태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일단 하나님은 성경에 있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지 않도록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은혜구원을 받고 온전한 진리를 알아가 성화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게 하려고 부르셨고,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은혜구원을 주셨으며, 마지막으로 성화구원을 통해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게 하려고 은혜구원을 받아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성화구원을 이뤄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

 고후 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구원과 관련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에베소서 2장 8~9절로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선물로 주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성화구원과 관련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빌립보서 2 12절로 항상 주의 말씀에 복종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룰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에서 이룬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의롭게 여겨지는 것이 은혜구원이고,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서 실현되 실제로 의로워지는 것이 성화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10/10 도둑은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오지만,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마태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벧전 1/16 이는 기록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시기 때문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구원으로 생명을 얻고, 성화구원으로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이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가출한 청소년 딸이 윤락가에서 잔뜩 빚을 지고 고통 받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찾아와 모든 빚을 대신 치뤄주고 사랑으로 감싸 다시 집으로 데려 오는 것이 은혜구원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딸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다시 구습을 좇아 가출해 예전 생활로 돌아간다면 은혜구원이 아무 소용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집에 돌아온 딸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며,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올바로 가져, 아버지께 효도하고 주위사람에게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야 하는 것이 성화구원입니다.

 마태 25/26 그의 주인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줄로 알았으니 요한 14/15 너희가 사랑하면 계명들을 지키라. 요한 13/34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은혜 구원에만 안주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머무른 사람은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소리를 들음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옛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 성화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은혜구원에는 아무 행동도 필요치 않지만 성화구원에 이르기 위해선 열심히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아무리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라도 서로 상대방만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불륜과 외도에 빠진다면 이혼에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형제들로 더불어 화평함과 하나님께 대해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마태 3/12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고 하니라.

그러므로 은혜구원 받은 모든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성화구원에 해당하는 자신의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알곡은 은혜구원과 성화구원을 모두 받은 사람이고, 쭉정이는 은혜구원만 받고 성화구원은 등한시 해 버림을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은혜구원과 성화구원을 구분하지 못하면 이처럼 신앙에 있어서 큰 모순과 심판에 빠질 수 있으므로 성경을 통해 확실히 구분하고 체득해야 합니다. 
<신실한 크리스챤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