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럽고 무겁고, 죄만을 깨닫게 해주는 저주스러운 것, 죽어도 지킬 수 없는 것이 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 능히 행할 수 있는 것, 온전하고 복이 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약 1:25절에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드려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이 율법은 바울이 말한 율법과는 또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9-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바울이 전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로마나 갈라디아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율법은 분명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이었지만 야고보가 권면하고 있는 이미 성숙한 성도들에게는 율법은 "자유하게"하는 "온전한" 율법이며 또 능히 ”행할 수 있는" 율법이며 "복된 율법"이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한 율법이 어떤 자들에게는 “무거운” 것이 되는데 반하여 어떤 자들에게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천천히 설명해 보자. 율법은 결코 둘이 아니요, 하나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나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법이나 모세의 법이나 그리스도의 법이나 바울의 율법이나 야고보의 율법은 같은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이 율법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두 종류이다. 한 종류의 사람은 옛사람이 살아있는 종교인이다. 또 한 종류는 옛사람이 죽어있는 성도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율법은 각기 다른 모습을 띄게 되는 것이다. 법은 한 법이로되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1. 먼저 무거운 율법으로 보이는 경우를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율법은 무거운 짐일 뿐만 아니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 저주 받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사항인데 반하여 인간은 그 요구를 이행할 만큼 유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혀 인간은 부패하여 있고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오히려 바울의 말처럼 율법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될 자라는 정죄를 받게만 할 뿐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잘 보이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유혹을 받게 되고,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게 되리라는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빠졌던 함정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구원교리를 설파하였으며 그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리가 이미 행위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큰 영향을 미쳐서 “행위무용론” 내지는 “율법폐기론”으로 치닫고 있어서 복음을 값싼 복음으로 만들고 있고 입으로 만의 구원을 외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도의 올바른 행실이 아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행위를 얼마나 많이 강조하고 있는가? 심지어 심판대 앞에서도 “행함을 따라(according to that he had done) (고후 5:10)"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듯 행함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절대 무시되고 있는 현상은 지나치게 이신칭의를 강조한데서 비롯된다. 아니 율법에 대한 중대한 오해 때문에 발생한 현상인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서는 루터의 말처럼 “지푸라기” 정도로 밖에는 안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결코 지푸라기 서신이 아니다. 30년 가까이 예수님을 보아 오면서 함께 자라왔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예수님의 의중을 몰라서 그의 뜻에 반하는 “행위”를 존중하는 글을 썼겠는가? 여러 말할 필요 없이 행위는 중요한 것이다. 행위는 열매이다. 열매가 나쁜 것은 잘못된 신앙임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한 야고보의 해석에 귀를 기울여봐야 한다.
2. 이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보이는 경우를 보자
전설한 것과 같이 한 율법이로되 어떤 사람에게는 무거운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하게 하는 율법”으로 보인다. 왜 그런가? 야고보의 말과 같이 온전한 율법이 되는 이유, 행할 수 있는 율법이 되는 이유, 자유하게 되는 율법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왜 온전한 율법인가? - 모세의 율법은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처럼 “무흠”하지 못했다.(히 8:7) 다시 말해서 온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케 하려고 오셨다.
“내가 온 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마 5:17)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을 믿는 자 안에 보내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이본성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으니까 성령을 통하여 율법을 지키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계명들(율법)을 지키는 자는 저안에 거하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고, 계명들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저 안에 거한다고 볼 수가 없다는 말인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성령이 거하시는 증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율법을 지키게 만드시는 분이시지 율법을 배격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율법폐기론이나 행위무용론은 성령의 뜻을 아주 오해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어찌 613가지나 된다는 율법 조항 하나인들 걸리지 않게 살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을 지킬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써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써 되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의 법은 행위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문제 삼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곧 ‘그리스도의 법’(갈 6:2)이다. 이 법은 행위로는 간음을 행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 간음을 행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 되어 버림으로 알고 보면 그리스도의 법은 율법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이렇게 성격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법은 구약율법 보다 온전하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율법을 지킬 수가 있을까? 현실적으로 행위를 규제하는 옛 율법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데 마음으로 까지 범죄 하지 않아야하는 그리스도의 법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이 엄하고도 무서운 그리스도의 법도 성령으로써는 지킬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은 성격으로 뿐만 아니라 성취 면에서도 온전한 것이다.
2) 왜 행할 수 있는 법인가? - 전설한 것처럼 옛 법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인생들에게 온전해진 그리스도의 법이 어떻게 준행 가능한 것이 될 수가 있겠는가? 물론 변화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옛사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법을 지키려면 옛사람은 죽어야 한다. 죄 성으로 찌들어 있는 옛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못 박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분이 이루어 놓으신 사업의 결과, 곧 나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옛사람의 정욕대로 살면서도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믿고 있으니 율법으로 부터는 해방을 받았는지는 모르나 여전히 육체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옛사람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었음을 철저히 믿어야 한다. 믿는 만큼 옛사람은 죽어지게 되어 있다. 이제는 나로 인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로 인해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놀랍게도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서 무슨 죄가 나오겠는가? 마음에 미움도 간음도 도둑심보도 없는데 무슨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거듭나고 옛사람이 죽은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흠 있는 율법은 말하기를 “간음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그 계명을 지키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성령을 받으면 간음하고 싶은 마음이 원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부터 간음은 성사되지 않는다. 그러니 행위로 나타나질 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신약에서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힘 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의지로 내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이미 죽은 나에게 무슨 의지나 힘이 있을까?) 오직 성령으로 인하여 사는 것인즉 율법 역시 성령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못할 것이 세상에 있겠는가?
옛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 옛사람은 죽었기 때문에 아예 미움까지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러니 누구인들 미워하겠으며 원수인들 사랑하지 못하겠는가? 이래서 율법은 ‘행할 수 없는’ 무거운 율법이 아니라 ‘행할 수 있는’ 율법이 되는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는 자는...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3) 자유하게 하는 율법 - 이 율법은 행함을 통하여 점점 더 자유함에 나가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옛날의 율법은 사람을 종으로 만들었다. 무슨 종인가? 율법의 종이며, 육체의 종이며, 죄의 종이며, 마귀의 종이며, 사망의 종이었다. 예를 들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써도 안 된다. 타고난 아담의 본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율법이 무섭고...그 육체의 욕구에 빈번히 지게 되니 육체의 종이고, 또 죄를 지었으니 죄의 종이며, 마귀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니 마귀의 종이요, 더 나아가서 그 결과로써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사망의 종인 것이다.
그러나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보니 죄의 정욕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육체로부터의 자유자다. 율법을 행할 수 있으니 율법의 정죄가 없다. 곧 율법으로 부터의 자유자다. 죄를 안 지으니 죄와 상관이 없다. 죄로 부터도 자유자다. 따라서 마귀도 나를 공격하지 못하니 마귀로 부터도 자유자요, 사망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으니 사망으로부터도 자유자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이토록 놀라운 해방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십자가는 위대한 것이요, 영원한 자랑거리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율법은 "속박의 율법" 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 되는 것이다. 자유의 율법이 실제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 실례를 들어보자.
나에게서 돈을 꾸어가고 몇 년째 갚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보기만 해도 화가 나고 미운 생각이 났다. 다시는 안 꾸어 주리라 마음을 먹으면서 얄미운 생각에 치를 떨었다. 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가? 그런데 육체와 함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오직 성령으로 산다. 당연히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처음엔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신이 죽었음을 인정하면서 성령님께 순종하고자 결심을 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사실 이때에 그는 계명(율법)을 행한 것이다. 그랬더니 성령께서는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주신다. 정말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진정으로 용서를 하고 나니까 미운 마음이 없어지고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행하고 나니 율법의 정죄로 부터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그가 어떤 자유를 얻게 되는가?
*우선 미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자신의 분한으로부터도 자유함을 얻었다.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기고 멸시했던 마음으로 부터도 자유를 얻었다.
더 나아가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이 얼마나 큰 복인가? 물론 이처럼 자유의율법대로 행한 자들은 미래에 큰 상을 받게 될 것이지만 현재로써도 얼마나 큰 복인가? 그렇다.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응해진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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