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4/2011

야다(알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한 것

구약성경이 쓰여진 히브리어에서 "알다"라는 뜻의 단어를 "yadah"라고 한다. 그런데 yadah라는 단어에는 "알다"라는 뜻 외에도 "경험하다" "성관계를 하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히브리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다"라는 뜻의 단어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인들에게 "안다"는 것은 "경험한 것"이었다. 돌려말하자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인식론적으로, 머리로, 지성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자신의 조상들이 직접 만났던 하나님이 중요했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이 중요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역사"란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더 나아가 히브리인들에게 안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성관계를 같이하는 정도로 서로를 알 때와 같이 속속들이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는 동침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누가 누가를 알지 못하였고"라는 표현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부부가 동침하는 정도로 속속들이 아는 것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안다"는 것의 의미였다.

사실 인식론적으로, 이성적으로 안다는 것은 히브리적 개념이 아니라 헬라적 개념이다.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육체, 가슴(마음),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헬라인들은 이 중 마음(가슴)을 마음(heart)과 생각(mind) 두개로 나누어 생각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동양인들은 마음과 생각을 하나로 여기는 성향이 강하지만 서양인들은 감정, 느낌을 의미하는 마음(heart)과 머리의 지시적, 인지적 행동인 생각을 의미하는 생각(mind)로 명확히 구분하는 경향을 보인다. heart와 mind를 번역할 때 한국인들은 별 차이를 느끼지 않을지 모르나 서양인들의 구분은 명확하다.

로마가 지배할 당시, 헬라적 사고와 세계관이 세계를 지배할 때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헬라적 개념을 동원 하나님을 설명했다. 지성, 이성, 인식론, 즉 mind를 이용한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중세시대를 거쳐 "신학"으로 발전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신학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배우는 학문이 되었다.

나 자신이 신학을 시작하면서 "진정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인식론적으로, 지적으로 혹은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신학자들의 견해와 이론을 안다는 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일까? 이론으로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이나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도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지금까지의 삶을 경험을 통해 볼 때 "내가 아는 하나님"은 되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오직 내가 경험한 하나님 뿐이었다. 내가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나에게 위로해주셨던 하나님, 내가 주를 떠나고자 했을 때 나를 경책하셨던 하나님,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을 때 용서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그러한 순간마다 책에 씌여있는 활자로부터 내 영혼과 삶에 역사하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변모되었다.

우리 시대에 수많은 교회에서 수많은 성경공부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참석해 본 성경공부 중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모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성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나 삶 가운데 경험한 하나님을 그러한 성경공부에서 발견하기 어려웠다. 사람은 가슴이 움직이면 몸도 움직인다. 때로 머리가 움직여서 움직일 때도 있으나 가슴이 타오르면 사람은 행동하게 되어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비판받는 이유는 우리의 성경공부가 가슴은 만지지 못하고 머리만 만지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경험한 하나님은 없고, 머리로 생각하여 알게 된 하나님만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설명한다고 하여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과 믿음에 대한 이성적 비판은 언제나 비판을 위한 도구였지 진정 그 비판의 핵심이 되는 문제가 이성적으로 해소되었다고 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는 진정 "진리"가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빼고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고자 우리는 이성적, 논리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납득하거나 동의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론적, 이성적, 논리적 설명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어떠해야 할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화된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그분을 이렇게 만나고 이렇게 그분과 동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나의 말 더 나아가 그런 삶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 본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함이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은 자여! 하나님을 안다 말하지 말라. 하나님을 경험했는지 아닌지는 시험과 환란을 통해 흔들어보면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시험이 닥쳐올 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눈앞의 요단강도, 여리고성도 건너게 하실 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머리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던 자들은 시험이 오면 넘어진다. 이성으로 이해한 하나님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분이 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험하자! 골방으로 나아가 무릎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자! 생각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머리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과 영혼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지 않겠는가!

카보드(영광) - 영광은 무거운 것

히브리어로 무겁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를 "카베이드"라고 한다. 그런데 이 동사의 명사형 카보드는 "영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왜 일까?

영광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저 크고, 화려하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영광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영광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우리의 명예를 드높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광이란 단어와 "무겁다"라는 단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어원적인 연결성은 알지 못하나 "영광"이 가지는 참 의미를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아닐까? 우리가 가진 영광의 개념과는 달리 영광이란 "무거운" 것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함이 아닐까? 영광이란 "무거움" 고됨, 고난을 수반하는 것이며, 그러한 무거움을 견뎌낸 자에게만 주시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듯한 느낌을 이 단어를 볼 때 마다 느끼게 된다.

중세의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영향을 받은 스콜라주의적 신학이었다. 그들의 신학은 소위 "영광의 신학"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는지를 세상적 기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부유할 것이다.

그 사람의 부유함이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한 때에 홀로 목숨을 걸고 이와 반대되는 신학을 펼친사람이 있다. 바로 마틴 루터이다. 훗날 신학자들은 그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에 참여할 것을 역설하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성공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다. 끊임없는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루터는 교황청 뿐만 아니라 제국의 황제에게 조용히 저항했다.

그의 삶은 생사를 건 사투의 연속이었다. 결혼 후 그의 아내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루터에게 배우고자 하는 신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처야 했다. 수많은 책을 쓰고 글을 남겼으나 루터는 돈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그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었고 그의 십자가 신학은 그의 십자가의 삶에 투영되어 나타났다.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흔히 듣게 되는 용어 중에 "성공 복음"이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부유하게 성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류의 설교와 주장을 통칭해서 "성공 복음"이라 부르는 것 같다. 이것은 중세의 "영광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재현된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중세 카톨릭이 범하는 우를 다시 범하는 시대 속에 한국 교회가 이미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영광은 무거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루터가 주장한 것과 같이 복음은 고난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다. 십자가는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해준다. 그것이 복음이요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할 길이다. 루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7)

나비(선지자)-선지자는 말씀을 들은 자

우리는 선지자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 대언하는 자로 생각한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스피커다. 우리에게 선지자의 개념은 "말을 하는" 것과 깊은 인상을 맺고 있다. 하지만 히브리어로 선지자 나비(Nabi)는 어원적으로 the one who was spoken to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말을 들은 자"라는 뜻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왜 그토록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에 이 히브리어 나비는 명확한 대답을 준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많은 말들을 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가르는 기준은 무슨 말을 하느냐가 된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말을 하느냐, 아니면 듣지 않은 말을 스스로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다.

에스라 시대에 가면 선지자 학교가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선지자 후보생들이 유명한 선지자에게 모여 들어 선지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까? 자신들의 선생에게서 들은 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전파하지는 않았을까?

오늘날 매 주일마다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일까? 아니면 신학교에서 배운, 책에서 읽은 말들을 되뇌이는 앵무새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신학생으로서 나는 과연 배운 것을 전할 것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것을 전할 것인가?

미국에서 죠지 휘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 제 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기 전 미국의 영적 상태를 어떤 한 역사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The generality of preachers spoke of an unknown, unfelt Christ. The  reason why congregations have been so dead is because they had dead men preaching to them. 설교가들이 자신이 느끼지도 못한 그리스도를 설교했기 때문에 회중이 죽었다고. 죽은 자가 설교를 하는 것과 같았다고... 자신이 느끼지 못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징표가 아닐까?

하나님과의 계약적인 관계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가득 채워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 중 영혼이 가난한 자, 몸에 병이 들어 있는 자, 생활이 궁핍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애를 풍요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여러분들은 하나님에 대해 부요의 이미지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요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마음 속에 부정적인 자세가 사라지고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면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부요의 기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나타나게 하려면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계약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체결하시고 그 계약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게 하려면 하나님의 계약 조건을 여러분이 먼저 이행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연결하는 계약 조문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

여러분들이 계약 조문을 이행하지는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한 위대한 이미지만 가졌다고 하여 여러분 생애가 풍성함과 부요로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풍요함으로 채워지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 드려 계약 조건을 이행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시간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넉넉한 시간을 주시고, 몸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물질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물질에 궁핍함이 없도록 기적을 베풀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그릇을 보시고 그 그릇에 따라 흔들어 넘치게 하여 여러분에게 안겨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쪽박을 내놓으면 쪽박에 넘치고, 되를 내놓으면 되에 넘치며, 말을 내놓으면 말에 넘치도록 축복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애를 하나님의 풍요로 채우시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