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로 무겁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를 "카베이드"라고 한다. 그런데 이 동사의 명사형 카보드는 "영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왜 일까?
영광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저 크고, 화려하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영광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영광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우리의 명예를 드높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광이란 단어와 "무겁다"라는 단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어원적인 연결성은 알지 못하나 "영광"이 가지는 참 의미를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아닐까? 우리가 가진 영광의 개념과는 달리 영광이란 "무거운" 것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함이 아닐까? 영광이란 "무거움" 고됨, 고난을 수반하는 것이며, 그러한 무거움을 견뎌낸 자에게만 주시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듯한 느낌을 이 단어를 볼 때 마다 느끼게 된다.
중세의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영향을 받은 스콜라주의적 신학이었다. 그들의 신학은 소위 "영광의 신학"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는지를 세상적 기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부유할 것이다.
그 사람의 부유함이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한 때에 홀로 목숨을 걸고 이와 반대되는 신학을 펼친사람이 있다. 바로 마틴 루터이다. 훗날 신학자들은 그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에 참여할 것을 역설하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성공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다. 끊임없는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루터는 교황청 뿐만 아니라 제국의 황제에게 조용히 저항했다.
그의 삶은 생사를 건 사투의 연속이었다. 결혼 후 그의 아내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루터에게 배우고자 하는 신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처야 했다. 수많은 책을 쓰고 글을 남겼으나 루터는 돈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그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었고 그의 십자가 신학은 그의 십자가의 삶에 투영되어 나타났다.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흔히 듣게 되는 용어 중에 "성공 복음"이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부유하게 성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류의 설교와 주장을 통칭해서 "성공 복음"이라 부르는 것 같다. 이것은 중세의 "영광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재현된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중세 카톨릭이 범하는 우를 다시 범하는 시대 속에 한국 교회가 이미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영광은 무거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루터가 주장한 것과 같이 복음은 고난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다. 십자가는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해준다. 그것이 복음이요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할 길이다. 루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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