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6:19)
‘아폴로 13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폴로 11호에서 17호까지 달에 무사히 착륙했지만 13호는 산소탱크 폭발로 달에 착륙하지 못하고 지구로 귀환하는 내용입니다. 13호가 지구로 돌아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대기권을 통과하는 일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자동장치가 고장 나서 수동으로 들어올 때 대기권을 너무 빨리 통과하면 타버리게 되고, 너무 늦으면 튕겨 나가 우주 미아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아폴로 13호는 안전하게 지구로 돌아오지만, 궤도를 수정해서 돌아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2번의 궤도 수정을 했던 사람입니다. 첫 번째는 구원으로 향하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걸음이고 두 번째는 축복의 문을 열기 위해 100세에 가진 이삭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관련 내용을 살피며 우리도 동일하게 궤도 수정에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우선순위의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계속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우선순위의 수정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궤도 수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기에 그의 희망이고 전부였습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으라는 사라의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며(창 21:11) 쫓아내었기에 이삭만 남았는데 그마저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드림의 신앙’이었습니다.
드렸다는 말은 헬라어로 완료시제입니다. 아직 이삭을 드리지 않았는데 이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시고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 구하지만 드릴 줄 아는 신앙입니다. 만일 내 신앙이 드릴 줄 아는 신앙이 아니라면 궤도 수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드릴 줄 아는 신앙을 가진 것은 창세기 14장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중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은혜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로 작정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부활의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의 결정체는 부활입니다. 그때에는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서 힌트를 얻자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무작정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분명 이삭이 다시 살아날 것을 하나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저자도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따라가는 삶인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인생의 궤도를 하나님께로 수정하여 은혜의 인생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목동제일교회)
1/26/2012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8~17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할 정도로 그들을 그리워했습니다. 그 간절함 때문에 로마에 가기 위해 수차례 시도해보았지만 그때마다 길이 막혔던 바울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바울의 마음이 로마 성도들을 향하여 불타듯하고 있는 것입니까?
로마 성도들을 견고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교회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지만(8절), 로마교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앞으로 계속 언급이 되겠지만,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고 하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인 기독교인들과의 신학적 논쟁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무슨 신령한 은사(11절)-복음에 대한 탁월한 이해에서 나오는 가르침-를 나눠줌으로 로마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어 견고히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13절). 참 목자 바울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문제 있는 곳에 가기를 꺼려합니다. 자신을 환영해주고, 대접해 주는 사람들에게 가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갈등에 휩싸여 있고 자신을 환영해 줄지 안 해줄지도 모를 그런 곳에 가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영적 지도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열이 있는 곳, 상처가 있는 곳, 다툼이 있는 곳이 바로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더욱 사모하여 가야할 곳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누구에게 빚을 졌습니까?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 받을 때, 예수님께로부터 ‘너는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행 9:15). 그때부터 자신 같은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이방인을 위한 사명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그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했습니다(고전 9:16). 그리하여 바울은 복음의 황무지였던 서바나(스페인, 당시 땅 끝) 까지도 로마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선교하고자 했습니다(롬 15:23,24).
특별히 복음에 대한 확신(16절)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17절)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그의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하였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은 매우 부담스러운 마음입니다. 빚을 갚아야 할 생각 때문에 잠자리도 편하지 않고, 눈만 뜨면 빚 갚을 생각으로 땀 흘려 일합니다. 우리도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모르고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다하여 복음 전도와 제자 삼는 일에 우리 자신을 확실히 내 던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할 정도로 그들을 그리워했습니다. 그 간절함 때문에 로마에 가기 위해 수차례 시도해보았지만 그때마다 길이 막혔던 바울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바울의 마음이 로마 성도들을 향하여 불타듯하고 있는 것입니까?
로마 성도들을 견고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교회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지만(8절), 로마교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앞으로 계속 언급이 되겠지만,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고 하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인 기독교인들과의 신학적 논쟁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무슨 신령한 은사(11절)-복음에 대한 탁월한 이해에서 나오는 가르침-를 나눠줌으로 로마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어 견고히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13절). 참 목자 바울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문제 있는 곳에 가기를 꺼려합니다. 자신을 환영해주고, 대접해 주는 사람들에게 가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갈등에 휩싸여 있고 자신을 환영해 줄지 안 해줄지도 모를 그런 곳에 가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영적 지도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열이 있는 곳, 상처가 있는 곳, 다툼이 있는 곳이 바로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더욱 사모하여 가야할 곳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누구에게 빚을 졌습니까?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 받을 때, 예수님께로부터 ‘너는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행 9:15). 그때부터 자신 같은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이방인을 위한 사명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그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했습니다(고전 9:16). 그리하여 바울은 복음의 황무지였던 서바나(스페인, 당시 땅 끝) 까지도 로마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선교하고자 했습니다(롬 15:23,24).
특별히 복음에 대한 확신(16절)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17절)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그의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하였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은 매우 부담스러운 마음입니다. 빚을 갚아야 할 생각 때문에 잠자리도 편하지 않고, 눈만 뜨면 빚 갚을 생각으로 땀 흘려 일합니다. 우리도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모르고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다하여 복음 전도와 제자 삼는 일에 우리 자신을 확실히 내 던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머리를 이해하십시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대상16:36)
“그 사람은 사무실에서 머리야”라는 말을 듣는다.
이 때의 머리(head)란 지도자, 수장(chief), 우두머리, 지휘자로서 자명 하게 드러난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을 볼 때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말씀도 이해가 된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씀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 그런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고려해 볼 때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의 머리로서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을 생각하기란 혼돈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등한 위치와 격(格)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고전 11:3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머리’이다.
헬라어 ‘케파레(kepare)’로 사용된 ‘머리’라는 단어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들어서서 여자들의 머리에 쓰는 것을 가르치는 가운데 이런 교훈을 준 것이다. 권세를 암시하는 것으로 ‘머리’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남녀 관계의 위계질서(位階秩序)에 대한 가르침으로써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의 전통 안에서 있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 권세를 하나님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게로 연결되는 ‘명령의 연쇄’를 단정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아선 안 된다. 상하관계(上下關係)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NIV, RSV, NASB와 NEB는 헬라어 ‘케파레’를 영어의 축자적 의미인 ‘머리’로 옮겨 신중하게 번역하는 반면, 다른 현대 번역본들은 비유적인 의미를 선택한다. 그리하여 TEV(Todays English Version)은 케파레를 ‘…에 대한 지고성(superemover)’으로 옮긴다. LB(Living Bible)은 이 본문을 ‘아내는 남편에게 그 남편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라고 옮겨 놓았다.
데이비드 로어리(David K. Lowery)는 말을 들어보라. “머리(케파레)라는 단어는 종속과 기원의 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구약 적 개념이며, 후자는 신약적인 개념이다.” 흔히70인 역으로 불리는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역본을 해석할 때 많은 학자들은 ‘머리’에 대한 바울적 용법의 배후에서 ‘출처, 기원 또는 최고, 왕관, 완성’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머리’는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말
14세기에 헬라어를 말하는 탁월한 교회지도자인 알렉산더 시실은 이 본문을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남자의 케파레(머리)는 그리스도시라. 왜냐하면 그 각 남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훌륭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의 케파레(머리)는 남자니라. 왜냐하면 그녀는 그의 육신으로부터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케파레(머리)는 본성을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14에 따르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이 땅에 오사 육신이 되셨다. 또한 요한복음 8장 42절, 13장 3절, 16장 27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났다’고 언급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대한 가장 적합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그리스도는 남자의 존재 근원이요 남자는 여자의 존재 근원이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존재 근원이시라.” (큐티와 일대일)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무실에서 머리야”라는 말을 듣는다.
이 때의 머리(head)란 지도자, 수장(chief), 우두머리, 지휘자로서 자명 하게 드러난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을 볼 때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말씀도 이해가 된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씀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 그런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고려해 볼 때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의 머리로서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을 생각하기란 혼돈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등한 위치와 격(格)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고전 11:3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머리’이다.
헬라어 ‘케파레(kepare)’로 사용된 ‘머리’라는 단어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들어서서 여자들의 머리에 쓰는 것을 가르치는 가운데 이런 교훈을 준 것이다. 권세를 암시하는 것으로 ‘머리’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남녀 관계의 위계질서(位階秩序)에 대한 가르침으로써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의 전통 안에서 있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 권세를 하나님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게로 연결되는 ‘명령의 연쇄’를 단정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아선 안 된다. 상하관계(上下關係)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NIV, RSV, NASB와 NEB는 헬라어 ‘케파레’를 영어의 축자적 의미인 ‘머리’로 옮겨 신중하게 번역하는 반면, 다른 현대 번역본들은 비유적인 의미를 선택한다. 그리하여 TEV(Todays English Version)은 케파레를 ‘…에 대한 지고성(superemover)’으로 옮긴다. LB(Living Bible)은 이 본문을 ‘아내는 남편에게 그 남편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라고 옮겨 놓았다.
데이비드 로어리(David K. Lowery)는 말을 들어보라. “머리(케파레)라는 단어는 종속과 기원의 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구약 적 개념이며, 후자는 신약적인 개념이다.” 흔히70인 역으로 불리는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역본을 해석할 때 많은 학자들은 ‘머리’에 대한 바울적 용법의 배후에서 ‘출처, 기원 또는 최고, 왕관, 완성’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머리’는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말
14세기에 헬라어를 말하는 탁월한 교회지도자인 알렉산더 시실은 이 본문을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남자의 케파레(머리)는 그리스도시라. 왜냐하면 그 각 남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훌륭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의 케파레(머리)는 남자니라. 왜냐하면 그녀는 그의 육신으로부터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케파레(머리)는 본성을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14에 따르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이 땅에 오사 육신이 되셨다. 또한 요한복음 8장 42절, 13장 3절, 16장 27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났다’고 언급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대한 가장 적합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그리스도는 남자의 존재 근원이요 남자는 여자의 존재 근원이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존재 근원이시라.” (큐티와 일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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