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2010

베푸시는 아버지 - 성령님(The Holy Spirit)

성령님(The Holy Spirit)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로 인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그 누구라도 그렇게 사랑할 수 없었던 것과같이 그분을 사랑했다. 그들은 인간다움에 있어서 약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깊이 갈망했다. 나는 예수님의 두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분의 친절과 애정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분께서 격려하시고 간곡히 타이르실 때에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고치실 때에 그분의 손의 만지심을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까스로 상상할 수 있다. 나의 가슴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모함으로 소용돌이친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과 눈을 마주 대하는 것보다 더 깊은 갈말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연결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의 심령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크나큰 아픔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 계신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그 전과 같지 않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임재가 없는 표면적인 삶은 그들의 능력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에게 의미 깊은 선물을, 너무나 기이한 선물이라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들에게 실제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바로 그 선물을 주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 그것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예수님은 그분의 친구들을 위해 그분의 물리적인 임재보다도 더 나은 그 무엇을 보물 창고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매우 놀라운 것인 반면에 내가 그 선물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은 한 사람으로서 이것을 쓰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선물은 우리 안에 거하려고 오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임을 나타내시며,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아들을 위하여 단장되는 신부 안에서 기다리시는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알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도록 도우시므로 예수님은 성령님을 "돕는자"라고 부르신다. 성령님은 내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울 것이다. 또한 성령님은 애정으로 우리를 만지시며,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며, 지칠 때에 우리에게 생기를 주시며, 우리 존재의 내면의 휴식 안에서 능력으로 우리를 강화시킬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그 모든 것, 우리의 정체성의 진리와 목적,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상속의 그 부유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가슴의 보물 창고로부터 영원한 보화를 취하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 주실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연합과 화평 안에서 다른 믿는 자들과 함께 묶으실 것이며, 우리가 오래지 않아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될 것이라는 지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실 것이다.

이 성령님의 선물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로서 예수님의 선물과 나란히 서며 그것은 바로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생각하기에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나의 마음을 성령님께 열 때에 그분의 영이 내 안에 살기 위하여 들어오시도록 정돈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내면으로부터 외면으로까지 주님을 알고 따르도록,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도록 나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헤와 이해의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그분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행하도록 준비된 것들을 할 수 있는 힘을 부여 받는다. 또한 성령님은 상담과 지식의 영이기 때문에 그분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성령님의 내재하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필요한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성령님은 힘의 영이기 때문에 자신의 개입하심으로 인하여 주님의 유쾌한 두려움(delightful fear)이 우리의 심령을 채우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 맞출 때에 아버지 앞에서 떨게 하신다. 오, 성령님의 선물(은사)은 훌륭한 실체다!

확실한 자비의 은사(The Gift of Sure Mercy)
성경에 있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구절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사야 55장에 기록된,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에게로 돌이킬 때에 선포하는 주님의 친절하고도 자비로운 의도들이다. 측량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인내의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마음의 친절하심을 선포할 때에 이 본문의 강력한 시적인 구절은 인간의 마음에 경이로운 감화를 준다. 1절에서 3절까지의 구절들을 묵상해 보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나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이사야 55:1-3)

인간의 언어로서 이보다 더 은혜로운 구절이 쓰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사야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그 누구에게라도 풍성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선포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관계없이 크게 축복하시며 자신의 사랑의 마음에 대한 낭비할 만큼의 공급 위에서 잔치를 베푸신다. 그리고 경이로운 진리는 그것이 일회적인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윗의 확실한 자비'라는 명목 아래 영원하신 방법으로 자신의 자비에 대한 풍요로운 조달을 주신다.

사도행전 13장22절에 기록된 다윗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서 인출된 하늘의 결론은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 마음에 열중하는 자, 하나님 마음을 좇는 자(a man after God's ow heart)', '나의 모든 뜻을 행한 자'라는 것이었다. 이제 당신이 구약성경에서 다윗의 삶의 어떤 것이라도 읽는 것에 시간을 보냈다면 당신은 이 남자가 여느 사람 못지않게 연약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다윗은 깨뜨릴 수 있는 그 모든 계명을 깨뜨렸으며, 깊은 흑암의 때와 타협의 시기를 가졌고, 그의 모든 삶을 통하여 시련의 한복판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구약시대의 다른 왕들과 구별되었던 것은 절망과 두려움의 가장 밑바닥에서조차 하나님 안에서 그가 붙잡고 있던 꾸준한 확신이었다. 즉, 어떤 것이 다윗의 마음속에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윗의 연약함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좋아하셨고 즐거워하셨다는 바로 그 지식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순간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팔 안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친절하심 안에서의 이 확신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사랑받게 했다(심각한 타협의 시기에 악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에 반응하는 시편 18편의 휼륭한 요약을 보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확실한 자비'를 주셨고 다윗은 그것으로 인하여 그분을 높였다. 이사야 55장에서 우리에게 주는 훌륭한 언질은 만약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헌신과 동일한 영원한 언약-확실한 자비의 언약-을 주실 것라는 점이다.

이사야 본문(55장)은 누구라도 목마른 자는 와서 이 약속을 함께 나누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선지자의 입으로부터 선포되어진 메시지는 누구라도 기꺼이 하나님께 나아오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그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원은 누구에게라도 허용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또 다른 자원들로부터 먹고 마시려고 선택해야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으로써 그의 논쟁을 더욱 강화시킨다! 우리는 이 자원으로부터 먹고 마시게끔 창조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다른 곳으로 다니며 본질적인 음식과 음료가 아닌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영양가 있게 하려고 애쓰겠느냐?

그는 우리에게 이 영양분의 장소에 이르는 실제적인 경로를 제시한다. "나의 말을 경청하고 좋은 것을 취하여라" 목마른 영혼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장소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그분의 사랑에 의해서 강화되기 위해서 그분을 가까이 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는 유쾌한 풍요로움이 있으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위하여 귀를 세우고 자신께 경청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 모든 행로에서 그들을 자비로 넘치게 할 자신의 마음의 그 영원한 헌신 - 다윗의 확실한 자비 - 을 그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보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부터 유일한 한 가지를 원하신다 - 친밀한 관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이 자신의 구애에 반응하기 위해 돌아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의 모든 것을 다 행하셔서라도 그 관계가 용이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록하신 말씀을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 그 말씀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허용하신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 우리를 볼 수 있는 신자들의,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함께 나눌 잔칫상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심령이 뜨겁게 달구어진 신자들의 공동체 안으로 우리들을 배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움직임을 통해 개인적으로 오셔서 우리들에게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시며, 우리를 창조하신 그 사역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곧 자신의 갈망임을 분명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그분의 "확실한 자비"의 헌신으로 덮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약속,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다!

확실한 자비에 대한 몇 가지 약속들(Some Promises Concerning Sure Mercy)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자비의 확실함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몇 가지 열거해 보겠다. 예레미야애가 3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극심한 불순종과 타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어 미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놀라운 개요를 준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영어성경에는 '자비들과 궁휼들이'로 되어 있음. 역주)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모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3:22-24)

하나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다!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인지! 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긍휼(들)을 묵상하며(복수형인 것을 주목하라-모든 종류의 필요를 위한 모든 종류의 긍휼인 것이다!)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헌신에 대한 위대한 신실하심에 의지하며 날마다 신선한 길로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전부는, 그분만이 나의 몫이며 그분 외에 다른 어떤 자원들을 찾지 않아야 할 것을 내가 깨닫는 것이다. 시편 106편에 큰 환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묵상하고 인정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은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다루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으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고"(시106:44-45)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분의 백성들에게 심판을 가져오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누그러뜨리셨다. 다르게 표현하면 일정 기간 동안 반항을 통하여 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리한 후, 다시금 그분께로 가까이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응답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을 때에 그분의 대답은 그들의 사악함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서'에 비례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에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자신의 '확실한 자비'의 성품에 따라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여러분의 주의를 다시금 이사야 55장 후반절에 나타난 확실한 자비의 약속이 선포된 후에 사악한 길을 떠나서 주님을 구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풍성한 용서와 자비'의 약속으로 이끌기 원하다. 그 선포 직후에, 거기에는 엄청난 자비에 이르는 하나님의 헌신을 강조하는 놀라운 구절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이 구절에서 나의 주의를 사로잡는 것은 베푸시는 자비 안에서의 그분의 관대함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분의 자비를 베푸시는 길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함, 즉 그분은 연약한 자들과의 자비로운 상호작용에 너무나도 헌신적이어서 그분의 자비의 양을 정하는 것은 마치 당신이 하늘과 땅의 거리를 재려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베푸시는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들의 연약함 가운데에서 하나님께로 나아올 자들에게 향하는 자비이다.

<컨 투 파파/게리 윈스/순전한나드>

훈련하시는 아버지 - 훈련으로서의 고난의 재 정의 (Redefining hardship as Discipline)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사역에 이르는 문을 여는 얼쇠는 바로 형성하는 훈련이며 그것에 의해서, 훈련된 자들은 공의와 펴안의 추수를 거두며 주님의 임재의 기쁨 안에서 동행한다.

형성하는 훈련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할 또 다른 한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히브리서 12장 7절에서 우리에게 "훈련으로서 고난을 인내하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니라" 라고 교훈하신 바로 그 실체다. 성과 위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만약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한다면 모든 일들이 우리를 위해서 잘 되어 갈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하기에 힘든 구절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잘못해서 점수를 잃지 않는 한 고난은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은 하며 이러한 인식은 믿음에 관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가르침에 대한 어떤 그릇된 접근에 의해서 야기되어 왔다. 이러한 접근들은 만약 우리가 적당한 신앙이 있고 올바른 일을 말하고 행한다면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천국이 될 것이며 초록색 신호등만 켜 있는 낙원이며 가시 없는 장미꽃 들이요, 물질을 획득하며 영적인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재안한다.

삶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의 한 가지 문제는 그것이 성경의 전체적인 의도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고난은 고침 받아야만 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교정하고 지적하기 위해서만 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배웠다. 또한 고난은 신실하고 순종적인 아들들과 딸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따르게 하고 그들을 주목하는 세상에게 신실함과 순종함을 나타내려고 오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7절이 오직 교정하는 훈련(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제 11장에서 다룰 것이다)으로 해석되는 반면에, 야고보서 1장 2-4절까지의 구절은 고난의 축복을 입증하며 형성하는 훈련을 언급한다는 사실에는 착오가 없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들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2절에서 '시험들'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페이라로스(peiramos)'인데 스트롱 용어 색인(Strong's Concordance)에는 '실험에 의해서, 악의 경험에 의해서, 암시에 의해서, 역경에 의해서 증명되기 위하여 집어 넣어지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3절에서 '시련'이라고 번역된 원래의 단어는 '도키미온'(dokimio)으로서, '조사하는 혹은 시험해보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 구절들에서 시험에 처해지게 된 것이란 바로 신앙 그 자체이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우리로 하여금 만약 우리에게 적당한 신앙이 있다면 우리는 전혀 시험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살피고 성장해 온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며, 그것이 여러 가지 압박 아래에서 견딜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이사야 64장 8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생동감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치 토기장이의 손에 들려진 진흙과도 같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뜻대로 빚으시고 만드신다. 그러고 나면 어떤 토기장이라도 다 알고 있듯이 그 새로 빚은 토기는 불 속에 넣어져서 그것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다. 이것은 어떤 흠이 있는지와 완성된 그릇으로서 토기장이 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그 그릇의 숙련된 형성은 불의 필요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불로 인해서 그릇이 가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한 최고의 예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니엘과 세 명의 청년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니엘 3장에는 이들 세 명의 남자에 관한 그들의 삶 속에 죄나 혹은 신앙의 결핍에 관해서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유다의 식민지 기간 동안 바벨론에서 살면서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이들의 이름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이름으로 바뀐다)와 다니엘은 그들의 삶 위에 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가장 뛰어나고 명석한 자들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들은 너무나도 신실하여 그 이방 왕이 그들의 충절을 요구할 때 풀무불 속에서 죽게 될 것을 훤히 알면서도 거절한다. 그들의 결정이 도전 받았을 때, 그 세 명의 젊은이들은 왕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이유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력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하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왕은 분이 가득하여 풀무불을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고 젊은이들을 풀무불 속으로 집어 던지게 했다. 그 불이 너무나도 강하여 청년들을 데리고 갔던 종들이 그 과정에서 불에 타서 죽고 말았다. 하지만,그 안에는 그 세 사람만이 아니라 '신의 아들'과 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나서 불꽃 가운데에서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의 신실함은 그들을 시험의 범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신실함은 바로 시험의 한복판에서 드러났던 것이다!

고난은 우리의 아들로서의 신분을 실제적인 것 그대로 제시하며, 우리의 신실함을 바로 그것의 실질적인 상태에서 드러낸다. 만약 불이 그릇에서 흠을 드러낸다면 토기장이는 그것을 다시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땅의 토기장이와는 달리 우리의 아버지이신 우두머리 토기장이께서는 그 흠 있는 그릇을 버리지 않으시고 자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부드럽게 하시며 우리의 가치로움이 보일 때가지 우리를 다시 고쳐 만드신다.

예수님은 물론 이 실체에 대한 신약의 모델이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분의 신분이 고난에 의해서 증명된 사실은 히브리서 5장에 나타나 있다. 본문을 읽어보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함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울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위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구원이 되시고"(히5:7-9)

예수님의 죽으심은 바로 고난의 경험이었으며, 스스로 순종을 배우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을 구원의 근원이 되게 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순종적이지 않다거나 아니면 그분께서 구원의 근원이 아니시기라도 하다는 것을 뜻하는가? 물론 아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기반이 생기기도 전부터 언제나 순종적이셨으며 또한 언제나 구원의 근원이셨다. 본문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신분이 증명되고 질문 받지 않도록 예수님의 순종하심은 실제적인 고난의 배경에서 보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행하신다. 하나님은 시험이 오는 것을 허락하시며 그것은 우리가 신실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당시에 있는 우리의 필요성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에 자신의 능력과 사랑에 있어서 확신하신다. 고난을 향한 사도 바울의 태도를 생각해 보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아버지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방침(The Father's testing Policy)
우리는 시험을 통과함으로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서 신실하게 되었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온전한 상속을 확증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우리가 시험 도중에 무너진다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미숙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붙잡아 주시고, 안위하시고, 다음 번 증명을 위해서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그분의 사랑과 회복을 경험할 것이다.우리는 그것들에 의해서 격려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하시고 증명하시는 방침은 곧 '실패하려고 해도 실패할 수 없는 방침'인 것이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책을 펴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시험'을 주시기 때문이다. 당신은 언제라도 성경구절을 펴서 역사 속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조사된 다른 성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시험 기간 동안 우리가 친구들과 말하는 것을 허락하시며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가 하나님에게 질문하는 것을 허락하시며 만약 우리가 기꺼이 신뢰하고 기다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대답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은 우리가 합격할 때까지 시험을 치르도록 허락하신다. 하나님의 시험 방침은 그야말로 낙방하려고 해도 낙방할 수 없는 방침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방법이시며 그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들과 함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여러분이 환난들과 시련들을 직면할 것을 요구 받을 때 마음에 압도당하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처럼 대우하신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 시련 속으로 들어설 때, 그분의 아들인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시험을 모두 마쳤을 때에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이 여러분 안에 온전히 형성될 것이며,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의 상속에 대한 온전한 기쁨을 알게 될 것이다.

<컴 투 파파/게리 윈스/순전한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