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The Holy Spirit)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로 인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그 누구라도 그렇게 사랑할 수 없었던 것과같이 그분을 사랑했다. 그들은 인간다움에 있어서 약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깊이 갈망했다. 나는 예수님의 두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분의 친절과 애정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분께서 격려하시고 간곡히 타이르실 때에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고치실 때에 그분의 손의 만지심을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까스로 상상할 수 있다. 나의 가슴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모함으로 소용돌이친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과 눈을 마주 대하는 것보다 더 깊은 갈말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연결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의 심령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크나큰 아픔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 계신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그 전과 같지 않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임재가 없는 표면적인 삶은 그들의 능력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에게 의미 깊은 선물을, 너무나 기이한 선물이라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들에게 실제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바로 그 선물을 주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 그것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예수님은 그분의 친구들을 위해 그분의 물리적인 임재보다도 더 나은 그 무엇을 보물 창고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매우 놀라운 것인 반면에 내가 그 선물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은 한 사람으로서 이것을 쓰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선물은 우리 안에 거하려고 오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임을 나타내시며,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아들을 위하여 단장되는 신부 안에서 기다리시는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알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도록 도우시므로 예수님은 성령님을 "돕는자"라고 부르신다. 성령님은 내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울 것이다. 또한 성령님은 애정으로 우리를 만지시며,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며, 지칠 때에 우리에게 생기를 주시며, 우리 존재의 내면의 휴식 안에서 능력으로 우리를 강화시킬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그 모든 것, 우리의 정체성의 진리와 목적,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상속의 그 부유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가슴의 보물 창고로부터 영원한 보화를 취하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 주실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연합과 화평 안에서 다른 믿는 자들과 함께 묶으실 것이며, 우리가 오래지 않아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될 것이라는 지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실 것이다.
이 성령님의 선물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로서 예수님의 선물과 나란히 서며 그것은 바로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생각하기에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나의 마음을 성령님께 열 때에 그분의 영이 내 안에 살기 위하여 들어오시도록 정돈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내면으로부터 외면으로까지 주님을 알고 따르도록,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도록 나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헤와 이해의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그분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행하도록 준비된 것들을 할 수 있는 힘을 부여 받는다. 또한 성령님은 상담과 지식의 영이기 때문에 그분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성령님의 내재하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필요한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성령님은 힘의 영이기 때문에 자신의 개입하심으로 인하여 주님의 유쾌한 두려움(delightful fear)이 우리의 심령을 채우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 맞출 때에 아버지 앞에서 떨게 하신다. 오, 성령님의 선물(은사)은 훌륭한 실체다!
확실한 자비의 은사(The Gift of Sure Mercy)
성경에 있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구절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사야 55장에 기록된,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에게로 돌이킬 때에 선포하는 주님의 친절하고도 자비로운 의도들이다. 측량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인내의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마음의 친절하심을 선포할 때에 이 본문의 강력한 시적인 구절은 인간의 마음에 경이로운 감화를 준다. 1절에서 3절까지의 구절들을 묵상해 보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나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이사야 55:1-3)
인간의 언어로서 이보다 더 은혜로운 구절이 쓰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사야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그 누구에게라도 풍성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선포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관계없이 크게 축복하시며 자신의 사랑의 마음에 대한 낭비할 만큼의 공급 위에서 잔치를 베푸신다. 그리고 경이로운 진리는 그것이 일회적인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윗의 확실한 자비'라는 명목 아래 영원하신 방법으로 자신의 자비에 대한 풍요로운 조달을 주신다.
사도행전 13장22절에 기록된 다윗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서 인출된 하늘의 결론은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 마음에 열중하는 자, 하나님 마음을 좇는 자(a man after God's ow heart)', '나의 모든 뜻을 행한 자'라는 것이었다. 이제 당신이 구약성경에서 다윗의 삶의 어떤 것이라도 읽는 것에 시간을 보냈다면 당신은 이 남자가 여느 사람 못지않게 연약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다윗은 깨뜨릴 수 있는 그 모든 계명을 깨뜨렸으며, 깊은 흑암의 때와 타협의 시기를 가졌고, 그의 모든 삶을 통하여 시련의 한복판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구약시대의 다른 왕들과 구별되었던 것은 절망과 두려움의 가장 밑바닥에서조차 하나님 안에서 그가 붙잡고 있던 꾸준한 확신이었다. 즉, 어떤 것이 다윗의 마음속에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윗의 연약함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좋아하셨고 즐거워하셨다는 바로 그 지식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순간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팔 안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친절하심 안에서의 이 확신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사랑받게 했다(심각한 타협의 시기에 악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에 반응하는 시편 18편의 휼륭한 요약을 보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확실한 자비'를 주셨고 다윗은 그것으로 인하여 그분을 높였다. 이사야 55장에서 우리에게 주는 훌륭한 언질은 만약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헌신과 동일한 영원한 언약-확실한 자비의 언약-을 주실 것라는 점이다.
이사야 본문(55장)은 누구라도 목마른 자는 와서 이 약속을 함께 나누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선지자의 입으로부터 선포되어진 메시지는 누구라도 기꺼이 하나님께 나아오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그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원은 누구에게라도 허용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또 다른 자원들로부터 먹고 마시려고 선택해야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으로써 그의 논쟁을 더욱 강화시킨다! 우리는 이 자원으로부터 먹고 마시게끔 창조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다른 곳으로 다니며 본질적인 음식과 음료가 아닌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영양가 있게 하려고 애쓰겠느냐?
그는 우리에게 이 영양분의 장소에 이르는 실제적인 경로를 제시한다. "나의 말을 경청하고 좋은 것을 취하여라" 목마른 영혼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장소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그분의 사랑에 의해서 강화되기 위해서 그분을 가까이 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는 유쾌한 풍요로움이 있으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위하여 귀를 세우고 자신께 경청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 모든 행로에서 그들을 자비로 넘치게 할 자신의 마음의 그 영원한 헌신 - 다윗의 확실한 자비 - 을 그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보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부터 유일한 한 가지를 원하신다 - 친밀한 관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이 자신의 구애에 반응하기 위해 돌아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의 모든 것을 다 행하셔서라도 그 관계가 용이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록하신 말씀을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 그 말씀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허용하신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 우리를 볼 수 있는 신자들의,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함께 나눌 잔칫상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심령이 뜨겁게 달구어진 신자들의 공동체 안으로 우리들을 배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움직임을 통해 개인적으로 오셔서 우리들에게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시며, 우리를 창조하신 그 사역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곧 자신의 갈망임을 분명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그분의 "확실한 자비"의 헌신으로 덮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약속,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다!
확실한 자비에 대한 몇 가지 약속들(Some Promises Concerning Sure Mercy)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자비의 확실함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몇 가지 열거해 보겠다. 예레미야애가 3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극심한 불순종과 타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어 미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놀라운 개요를 준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영어성경에는 '자비들과 궁휼들이'로 되어 있음. 역주)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모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3:22-24)
하나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다!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인지! 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긍휼(들)을 묵상하며(복수형인 것을 주목하라-모든 종류의 필요를 위한 모든 종류의 긍휼인 것이다!)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헌신에 대한 위대한 신실하심에 의지하며 날마다 신선한 길로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전부는, 그분만이 나의 몫이며 그분 외에 다른 어떤 자원들을 찾지 않아야 할 것을 내가 깨닫는 것이다. 시편 106편에 큰 환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묵상하고 인정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은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다루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으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고"(시106:44-45)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분의 백성들에게 심판을 가져오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누그러뜨리셨다. 다르게 표현하면 일정 기간 동안 반항을 통하여 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리한 후, 다시금 그분께로 가까이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응답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을 때에 그분의 대답은 그들의 사악함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서'에 비례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에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자신의 '확실한 자비'의 성품에 따라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여러분의 주의를 다시금 이사야 55장 후반절에 나타난 확실한 자비의 약속이 선포된 후에 사악한 길을 떠나서 주님을 구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풍성한 용서와 자비'의 약속으로 이끌기 원하다. 그 선포 직후에, 거기에는 엄청난 자비에 이르는 하나님의 헌신을 강조하는 놀라운 구절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이 구절에서 나의 주의를 사로잡는 것은 베푸시는 자비 안에서의 그분의 관대함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분의 자비를 베푸시는 길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함, 즉 그분은 연약한 자들과의 자비로운 상호작용에 너무나도 헌신적이어서 그분의 자비의 양을 정하는 것은 마치 당신이 하늘과 땅의 거리를 재려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베푸시는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들의 연약함 가운데에서 하나님께로 나아올 자들에게 향하는 자비이다.
<컨 투 파파/게리 윈스/순전한나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