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혁명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엘리야가 누구였고, 무엇을 했고, 그리고 그의 인생이 어떻게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엘리야는 열왕기상 17장에서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를 대적할 하나님의 선지자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대적은 바알의 여선지라로서 그를 여러 번 반복해서 죽이려고 했던 이세벨이었다. 엘리야는 바알의 많은 선지자들을 죽일 수 있었고, 결국 이세벨을 멸망시킬 예후에게 기름 부을 수 있었다. 그의 마지막 행동으로 그는 회오리바람에 의해 하늘로 올라가기 전 ‘갑절’의 겉옷(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한 것을 뜻함-역자 주)을 엘리사에게 주었다.
우리가 다가올 ‘엘리야’ 예언들과 그의 초점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한다. 가장 중요한 예언은 말라기 4장에서 오는데, 성경은 그 이후 4백 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두 절이 주님의 재림 전에 일어날 엘리야 혁명에 대한 기대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4:5-6)
이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 나는 이것이 자비로운 혁명이라고 믿는데, 이유는 이것의 목적이 재앙적인 심판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복의 핵심적인 사항은 아버지들의 마음과 그들의 자녀들의 마음이 서로에게 돌아서는 것이다. 이러한 돌아섬은 교회 생활의 모든 수준과 사회의 모든 수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진정한 아버지의 부재는 황량한 공허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해이해진 성적 도덕심과 동성연애, 그리고 많은 질병들과 시회적인 기능장애를 가져온 주요 원인이다. 또한 주님의 집에서의 진정한 아버지들의 부재는 심각한 많은 기능 장애가 예수님의 몸에서 일어나게 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마지막 부분은 오늘날 매우 심각한 메시지를 전당해 주고 있다.
엘리야에 대한 약속은 구약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있음으로 인해 모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심지어 그 후 4백 년이 지난 예수님의 시대에도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게 알려져 있었다. 오늘날 정통주의 유대인들은 말라기가 예언한 것과 같이 엘리야가 돌아올 때를 위해서 유월절에 여전히 의자 하나를 그를 위해 비워 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에 대해서 마태복음 17장 10-13절에서 질문했다.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으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레(침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께서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유대인들의 기대가 옳다고 인정하였다. 그분은 또한 세례(침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눅1:17)으로 왔다는 것과 향후 그의 재림 전에 ‘오는 엘리야’가 있을 것을 확증하셨다. 예수님은 엘리야의 임무를 모든 것의 회복으로 단순화시켜서 설명하셨는데,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3:20-21)
회복(헬라어 원문에서는 아포카타시스 apokatastasis)이라는 단어는 매우 강력한 단어이다. 이것은 ‘진정한 신정정치’의 회복, 그리고 ‘원래 의도의 회복’을 의미한다. 물론 이 본문이 의미하는 것들은 매우 심오하다. 엘리야 혁명 전까지 하늘은 예수님을 받아 두고 있다. 세례(침례) 요한이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한 것처럼, 엘리야 혁명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할 것이다. 우리는 세례(침례) 요한의 혁명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은 회개는 가지고 왔지만 만유의 회복은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의 재림에 앞서 일어날 모든 것들의 회복을 위한 씨가 되었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디자인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분을 모든 나라들의 통치자로 세울 것이다. 이것이 정확히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그의 신부들을 위한 재림 전에 이 땅에서 사탄을 쳐부수는 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그때까지’라는 요인 – The until Factor -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라.”(마22:44)
이 본문은 우리에게 종말의 일을 알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본문은 사도행전 3장과 더불어 하나님의 시간-‘때까지의 요소’-에 대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아들이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네가 인류를 구속한 후, 너는 네 우편에 앉을 것이다. 너는 내가 ‘너의 적들이 너의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이 땅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을 완수할 것이다. 너는 이곳에 머리로서 있고 땅에 있는 너의 몸이 너의 적들을 쳐부술 것이다. 마지막 세대는 ‘발’ 세대가 될 것이고, 너의 적들을 이 땅에서 다스릴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너는 그들을 구하거나, 공중으로 들림받게 하거나, 구원하거나, 그 어떤 것이라도 하기 위해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 너의 몸은 사탄을 쳐부수는 일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아름다운 신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일들의 회복과 사탄을 발판으로 만드는 것은 같은 일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일어날 일들이다. 이 본문이 값싸게 취급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은 이 본문이 시편110편, 마가복음12:36, 누가복음20:43, 히브리서1:13, 10:13, 그리고 마태복음22;44절에서 있도록 하셨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이 땅 위에 있는 바알의 영과 이세벨의 영을 쳐부수는 것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우리는 거짓 선지자의 짐승들과 싸울 것이고, 우리는 그들을 모두 전멸시킬 것이다. 그들이 짓밟혀졌을 때 우리는 주님께로 가서 말하길, “세상 나라가 우리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계11:15)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 나라들을 주님께 그의 소유로 드릴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신랑에게 드리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혼인 지침금이 될 것이다.
신부에 대한 사랑에 못 이겨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그 자리에 계시지 못하시고 구름 사이로 나타나셔서 우리 모두 휩쓸어 데려가실 것이다.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 우리의 그 매력적인 왕자가 흰 말을 타고 오실 것이다(19:11을 보라). 그러나 그는 게으르고 더럽혀진 여자를 위해 오시지는 않는다. 그는 극복해 내고, 정복해 내고, 사랑으로 일해 온, 자신의 사명을 성취한 신부를 위해 오신다(계19:7을 보라). 엘리야 혁명은 이 모든 일들을 촉매제이다.
참조: 일곱 산에 대한 이해 돕기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예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러한 일곱 개 기둥으로 구성된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이 단어들과 관련된 헬라어 원어를 공부한 후에 나에게 더욱 분명해진 것은 능력이란 정부를 뜻하는 것이고. 부는 경제를 뜻하며, 지혜란 교육을 말하고, 힘이란 가정에 대해서 말하며, 존귀란 종교에 대해서 말하고, 영광이란 예술이나 오락과 같은 축전(celebration)을 뜻하며, 찬송이란 미디어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문화적인 기반들 또는 사회의 각 부분들을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을 참고로 하셨으면 합니다.(SeerDeborah)
<일곱산에 관한 예언/조니 엔로우/순전한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