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2011

삼위일체 하나님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3:32)

로마서 6 23절에『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이렇게 기록되어 있음과 같이 죄의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상통하는 길이 막혔을  죽음에 이르고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의 값이 사함을받고 없어졌을  막혔던 하나님과의 상통하는 길이 다시 열리며동시에 영적 생명이 다시 살아나며 영생에 이르기까지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고린도전서 15 45절에 기록된바 "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느니라"고 나와 있는바하나님께서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명하여 가라사대 선악을 구별하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네가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2:17) 그러나 아담은  먹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상통하던 영은 죽었고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이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들의 영은 죽어 있었습니다생명이 되는 영이 죽어 있다는 것은 영영 하나님과 상통하는 길이 막혀 있다는 것이니 이는 영영 멸망할  없는끝장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사탄의 밥이 되어 영영 멸망의 끝장으로 화하는 것을 버려   없어 당신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고  고귀한 피가 주님을 믿는 자의 죄를 사해 주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사함을 받은 자에게는 선물로 주님의 생명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과 화해하고상통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이러므로 아담의 죄로 죽었던 아담 후손들의 영들이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게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9/28/2011

진정한 회개로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시140:13)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제자가 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 우리 또한 어떤 과정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외치신 말씀이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회개하라’라는 말씀은 히브리적인 사고로 봤을 때는 강압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더 사랑하고 예의를 갖춘 표현입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길은 회개에 있습니다. 역대하 7장14절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회개하면 하늘에서 듣고 이 땅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받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비결 중의 하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고백할 때 영혼이 깨끗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울고불고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너머의 세상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새로운 세계가 보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회개 가운데로 나아가면 내가 누구인지 발견됩니다. 그래서 애통하며 울게 되지만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는 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며,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 베드로에게 거룩한 두려움이 임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에게 거룩한 두려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무서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낮고 약한 자를 쓰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부족한 자들만 골라 쓰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 스스로 부족하고 무능력하게 여기는 자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받아주시면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문은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목동제일교회)

9/27/2011

계속 비슷한 문제로 실패하십니까?

사람이 실수하거나 무너지는 것이 전혀 뜻밖의 새로운 분야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비슷한 문제로 계속 실패한다. 예를 들어서 욱하는 성미 때문에 인생 내내 실수하고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의 말을 하고 다니는 버릇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말 때문에 실수한다.

그것 때문에 혼쭐이 났으면서도 세월이 흘러 조금 경계심을 늦추고 있으면 또 같은 패턴의 잘못을 저지른다. 멀쩡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툭 튀어나온다. 매번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으니 당사자나 주위의 사람도 어이가 없을 정도다.

이런 반복적인 죄를 이기려면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문제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창20:11].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실수가 아니라 아내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거짓말임을 고백한다. "수틀리면 부부가 함께 말을 맞추어 거짓말을 하자"는 한심한 인생관을 수립해놓고 행동한 것이다.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어떤 어둠의 권세에 굴복하여 미리 마음으로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패배적인 행동 패턴을 정해놓고 살다가 어느 순간 상황만 생기면 그 패배적 결심이 화약처럼 표면 위로 터져버리며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정직하게 살아봤자 손해만 보더라. 힘든 상황에 부딪치면 적당히 둘러대서 그 상황을 빠져나오고 보겠다"라는 기회주의적 지침을 정해놓고 사는 사람은 위기 상황만 닥치면 거짓말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이미 마음으로 패배한 것이다. 아마 20년 전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바라보던 애굽 사람들을 기억했을 것이다. 사탄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나쁜 기억을 떠올려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이 인생이 결정된다. 잠깐 방심하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순식간에 두렵괴 부정적인 과거의 실패의 기억에 사로잡혀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성경께서 우리의 생각을 붙잡아주시도록 늘 기도해야 한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하게 해야 한다.[고후10:5].

세상적인 생각과 두렵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생각을 맞추면 된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의 일을 하려고 하라. 그분이 내 인생 모든 분야의 주인이심을 선포하고 순간순간 내 삶에 간섭하시게 하라.
<다시가슴이뛴다중에서/한홍>

두려워하지 않게 하심, 기도에 응답해 주심.

사도행전 12 : 1 ~ 19
*조요(照耀)하며(7절) : 밝게 비치다.

예루살렘 교회는 헤롯의 음모로 인하여 환난을 당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환난 당하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당하는 교회와 신자들을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우십니까?

두려워하지 않게 하심.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권력자 헤롯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사도 베드로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교회는 큰 슬픔을 당하였고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그렇지만 환난 가운데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바랐습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도 의연했습니다. 그는 평안히 잠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하고 있는 교회에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주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6:33하)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두려움이라는 무기로 신자들을 무기력에 빠지게 하고 좌절하게 하여 결국에는 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할 때에 담대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환난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있다면 환난 때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담대함으로 두려움을 떨쳐버리십시오.

기도에 응답해 주심. 
하나님께서 야고보는 순교하도록 하셨지만 베드로는 탈옥시키셨습니다. 갑자기 야고보를 잃은 교회는 베드로가 투옥되자 베드로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교회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기도입니다. 세상은 권력과 칼, 정치적인 음모로 공격해 오지만 우리는 기도의 무기로 강력하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기에 때에 합심하여 기도하는 교회의 기도를 들으시고 베드로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즉각 탈옥시키셨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한 교회는 오히려 하나님의 큰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기도에 참여했던 이들조차도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놀라운 역사에 대해 반신반의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역사를 이루십니다.

환난을 당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새롭고도 놀라운 형태의 기도응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환난은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이며, 공동체가 하나 될 수 있는 섭리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경험할 수 있고, 승리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일용할 양식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교회의 주된 사명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84:11)

그 사람과 단체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선 그들이 하는 일을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성경은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교회가 언제 세워졌고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는가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복음전도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전도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복음전도입니다. 우리는 의미상의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실제적입니다. 사도신경의 다섯 가지 기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산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복음전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당신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신학적 영적으로 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의 통로입니다. 그 분께만 쉼이 있습니다. 그 쉼은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로 말미암아 동일하게 이 능력을 쓸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분이 가지고 있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권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아무런 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다운로드 받아서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을 쓰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을 쓰기 위해서는 믿음이라고 하는 신용카드를 꺼내야 합니다.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가라’는 것입니다. 가는 것은 대충 가거나 시늉만 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심하십시오. 끝까지 가야합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듯이 끝까지 가는 것을 소망하십시오. 가지 않으면 역사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만히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사람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드는 곳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가야합니다.

세 번째는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죠. 제자를 만든다는 것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칼 바르트는 “제자를 삼는 데 나와 똑 같은 사람을 만들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관계 전도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영향력입니다. 영향력은 직위나 외모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강력한 영향력은 여러분들의 성품으로부터 나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보면 그것은 다 성품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 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입니까?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흔히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격려로 됩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에서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말을 한다고 해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격려가 가능하게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임마누엘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함께하심, 이 임마누엘의 축복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목동제일교회)

9/26/2011

교회의 터전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9)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을 보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반석이 무엇인지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베드로를 반석으로 보고 베드로를 교황으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반석으로 보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보게 되면 바로 이어지는 23절 말씀을 통해 해석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가 세워진 반석을 베드로로 본다면 사탄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이상한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이 교회가 세워진 근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틀리지 않지만 이 반석의 성경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베드로전서 2장 4절에서도 산 돌이신 예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반석은 베드로도 신앙고백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하여 신앙의 집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참된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참된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시기에 음부의 권세가 결코 교회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일례로 중국에서 문화혁명 당시에 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당했고, 수많은 목회자들이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문화혁명 후 등소평이 문화혁명은 공산주의가 행한 실패의 산물이라고 말하며 다시금 교회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때에 수많은 순교자들과 핍박으로 인해 과연 교회에 누가 모이겠는가 생각했지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워가십니다.
교회의 창립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를 세워가십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인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세우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일 수 없습니다.
북극점에 18번째로 도달한 산악인 최종열씨는 북극점에 도착한 후 허무감과 허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내가 왜 3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혹독한 훈련으로 보내었는지 너무나 허탈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토대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으면 한 산악인의 감정과 우리의 감정이 전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목동제일교회)

9/25/2011

거룩함의 네 요소

첫 번째 요소는 ‘위엄’이다. 왕좌에 앉아 있는 왕처럼 하나님은 위엄이 있으시다. ‘영광’이라는 말은 거룩함의 바로 ‘위엄’의 요소를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분은 위대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분은 거룩하시지만 우리는 죄인들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은 ‘거룩하다’는 말을 세 번 사용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 6:3).

두 번째 요소는 그분의 ‘의지’이다. 그분은 추상적 개념이나 수학적 공식 같은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의지를 갖고 계신데, 그 의지에 따라 일들을 성취하신다. 무엇보다 그분은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시고, 하나님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신다.

세 번째 요소는 ‘진노’이다. 그분의 진노는 변덕스러운 분노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보이시는 정당한 반응이다.

네 번째 요소는 ‘의’(義)이다.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이 실현될 때 그분의 의가 이루어진다. 그분은 이 세상이 그분의 도덕적 성품에 따라서 살도록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도덕적 의(義)의 훌륭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네 요소들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그분의 위엄과 영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말씀은 “내가 도덕적으로 의로운 만큼 너희도 도덕적으로 의로운 존재가 되라”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만큼’ 거룩하게 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될 수 있다.
그분이 거룩하시듯이 우리도 거룩해야 하고, 그분이 ‘구별되시듯이’ 우리도 ‘구별되어야’ 한다.

온 세상의 구주(救主)가 되심과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는 것...

사도행전 13 : 13 ~ 41
바울 일행은 구브로(바보)를 떠나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동역자가 떠나는 아픔과 지치고 병든 몸으로 산맥을 넘어가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복음 전파를 향한 그들의 열정은 도무지 식을 줄 몰랐습니다. 도대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救主)가 되심’입니다 
바울 일행이 어렵게 도착한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전한 첫 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신 구주(救主),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 매 안식일마다 읽고 외웠던 율법과 선지자들이 약속한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임당할 죄가 없으셨지만 나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것, 무덤에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 부활하신 일 등은 구약의 메시아 약속의 완전한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요, ‘온 땅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모든 인류의 죄와 사망의 문제는 깨끗이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해결되었습니다. 이것은 죄와 사망의 짐에 눌려 신음하는 우리 인류에게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놀랍고, 가슴 떨리도록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잠잠하지 말고, 기회가 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는 이 놀라운 복음을 힘써 전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올 해가 가기 전에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사망의 바다에서 더 건져 올려 그 생명의 구원을 얻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행위의 율법을 지킴으로는 결코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의롭다함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믿는 자에게 쏟아 부어 주시는 완전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모든 믿는 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의롭다함과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참으로 믿는 자는 죄사함과 의롭다함 뿐 아니라 이미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의 약속을 바라봄으로 영원하지 않은 이 땅의 것들을 말씀의 진리 앞에 상대화시키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죄사함 받은 자로서 먼저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좀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을 통해 사도 바울처럼 가까이 있는 이웃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으로 긍휼히 여기고 힘을 다해 사랑하며 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9/24/2011

감정에 따라 살지 않고 믿음에 따라 산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기 감정과 느낌에 죄우되지 않는 삶을 살도록 저를 이끌어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려운 훈련이다. 자신이 신령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기도로써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 싸움을 할 때, 자신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 감정이 어떻든 간에 내게는 문제가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감정에 따라 살지 앓고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차갑거든 뜨겁든 관계없이 말이다. 물론 뜨거운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시편에서 볼 수 있듯이, 다윗 같은 사람도 차가워진 적이 많이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6:5)라고 말했다. 갑자기 슬프고 불안해져서 기쁨이 싹 달아나는 경우가 우리에게 종종 생긴다.

우리가 아무 기쁨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으면서도 잠깐 동안 아무 기쁨 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과 함께 일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삶을 극복하도록 훈련하고 성숙하게 하심을 믿어야 한다.

세례를 받음은.....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2:7)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한 에피소드를 통해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너무나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속에서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인데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엣 것을 찾는 자들은 오늘 본문 1-4절 말씀을 통해 4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원문을 보면 “나는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화 함께 죽었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수도 중요하고, 오늘 학습과 세례를 받는 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영적인 고백입니다.
그리고 내가 과거에 대해 철저하게 끊어지고 회개하며 죽었다고 고백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하나님 안에 감추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빅터 플랭클린은 의미요법을 통해 세 가지 가치를 소개하는데 간단히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여시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만 과거에 묻혀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힘든 것을 토대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나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건강한 의미를 계속 도출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위의 것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해 주십니다.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땅히 죽어야 할 나를 바라보게 되고,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앞에 도래할 천국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계속해서 생명을 경험하게 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신비스러운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는 다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승리하시는 성도들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동제일교회)

대적 자를 죽이심

사도행전 12 : 20 ~ 25
* 효유(曉喩)한대(21절) : 연설하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하는 교회에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악한 계획을 무력화 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패배를 모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궁극적인 승리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대적 자를 죽이심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면서 교회를 핍박했던 헤롯이 세상을 완전히 지배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갑자기 죽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신으로 대접을 받을 정도로 교만했던 그를 하나님께서는 치셨고 헤롯은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롯이 5일 동안 복통을 앓다가 죽었다고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자들도 다스리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헤롯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승리합니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승리한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역사철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는 자들은 대적 자들을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믿고 위기를 돌파해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 중에서도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대적 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대적 자보다 더 위대하신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그리스도인의 승리 비결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1:15)

세상도 믿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몇 년 전 타임지에서 각 세기마다 중요한 인물들을 선정한 적이 있었는데 20세기의 인물로 아인슈타인을 선정했습니다. 그 아인슈타인이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과학의 기초는 진리이다. 과학의 기초는 믿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이 없으면 과학도, 인문학도, 신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일반적인 면에서도 믿음은 중요합니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킨 것은 그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의미와 목표는 하나님 그분을 믿게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 중 모세에게 산 위로 올라가 손을 들라고 명합니다. 이 말씀에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깃발을 보면 그가 어디 소속인지 아는 것처럼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주권자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은 일은 우리가운데 일어납니다. 우리 가운데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는 역사가 말씀 가운데 담겨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단 한 사람도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알고 믿으라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일 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보내고 산으로 들어가십니다. 이 때 마가복음 6장 48절에는 독특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들을 보시고’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목해서 보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는 제자들이 풍랑 가운데서 믿음을 체험하는 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음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가셨습니다. 왜 물 위로 걸어가셨을까요?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고 믿음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 전체는 믿음입니다.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는 중복되어 있습니다만 구조적으로 보면 다릅니다. 사무엘상하는 왕정의 시작을, 열왕기상하는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합니다. 역대상하는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 기록되었는데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알려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모세오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는 앞의 성경을 다시 한 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 동일합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제자들을 통해,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 설명해주려고 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민수기 13장 14장을 신명기 1장이 또 기록하는데 모세는 의미있는 단어를 씁니다. 개역개정은 둘 다 정탐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바뀌기 전 성경은 민수기에서는 탐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정탐은 소가 풀을 먹기 위해 대충 훑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탐사는 주의해서 살펴보아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탐사하라고 했지만 그 사람들은 정탐, 즉 대충 훑어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이라는 말과 진실이라는 말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탐한 땅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며,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 살고 있었고, 아낙자손도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뚜기같아 보였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로 보면 믿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힘과 능력으로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니죠. 바로왕, 홍해, 아말렉의 위험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거기 아낙 자손이 있는 것 아십니다. 그러나, 나아가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나아가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리더는 사실을 사실대로만 보고 말하면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만 본다면 누가 순교하고, 누가 선교하며, 누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만 봅니다. 불평과 원망이 극에 달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른 백성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용서를 구하는 모세의 믿음의 간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은 하지만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믿음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시며 28절에서 너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라’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그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믿고 나아가기 바랍니다. 얕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풍요가 넘치는 곳으로 여겨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자신이 가는 곳이 삭막하고 오아시스가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살 줄 믿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믿음의 사람이 세워져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목동제일교회)

9/22/2011

가장 질긴 잡초를 뽑아야 산다!

'인생'이라는 동산에서 자라는 가장 질긴 잡초들 중 하나는 바로 자아이다. 사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이것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자신의 자아가 죽었다고 우리가 확신하는 그 순간, 자아는 어디선가 건재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서 우리 삶의 열대들에 독(毒)을 뿌리고 우리의 평안을 파괴한다.

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은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현실이 되면 절반의 승리가 우리 것이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믿음으로 우리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면 승리는 완성된다.

그런데 이 온전한 승리에 도달하려면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 근본적인 변화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일을 우리도 겪어야 한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거부당하고 포기하고 격리되고 추방당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십자가에 못 박힌 삶에 대한 교훈을 적용하는 데 실패했다.

승리하는 영혼이 건강한 영혼이다.
그런데 자아가 판단 받지도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않는다면 승리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자기 자랑이나 자기 비하에 빠져 있다면 아직도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신앙과 순종은 우리의 삶 가운데 십자가를 끌어들일 것이고, 자기 자랑과 자기 비하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줄 것이다.
<임재체험중에서...>

그 아이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전도자 한 사람이 감방 너머로 다른 죄수들에게 말했다. 영향력 있는 전도자로 동유럽 전체에 이름을 날리던 그가 한 아이를 전도하지 못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중이었다. 다른 죄수들은 그 사람이 수천 명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백하는 좌절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주신 기회를 종종 일부러 무시하면서 "다음에 하면 되겠지",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언제나 다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전도의 기회를 무시하는 신자는, 이 이야기의 복음전도자처럼 그 순간이 영원히 날아가버렸음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그 순간에 어쩌면 우리 평생에 단 한 번 찾아온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었을 때 전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당신을 질책하실지 모른다. 그때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죄’중에서 아주 중하고 악한 ‘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기도문 후반부 간구에서 가장 먼저 눈이 띄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값없이 주시는 무조건즉인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인단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의 다른 어떤 조건도 없이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자기 나라 백성이 된 영혼들에게 죄의 용서의 조건으로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를 덧붙이고 계신 것이다.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천하고 가증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나는 '증오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에 가장 극명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과 악의(악의)와 복수심으로 활활 타고 있는데 다른 죄들을 자백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지독히 거르스는 죄를 내 마음에 키우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요, 왕의 백성이요, 목자의 양떼인 우리는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중하고 악한 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실상을 보라. 서로에게 악한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주님의 식탁에 마주 않다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는 일이 흔하지 않은가?

주님은 "먼저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이 명쾌하고 통렬한 말씀을 망각하지 말자! 우리의 형체자매들을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때, 우리는 마귀를 압도하는 가장 강력한 승리를 얻게 된다.

9/21/2011

‘믿음 테스트’를 잘 통과하셨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걱정하거나 낙심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이 시련 때문에 내가 더 잘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믿음 때문에 인생의 해석이 다릅니다. 현실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보고 해석합니다. 고난에 대한 생각과 사고방식이 아예 다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련은 '믿음의 시험', '우리의 믿음에 대한 시험을 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이 내가 믿는 믿음, 즉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믿고 영생을 믿느냐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테스트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낙제시키시 위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통과해서 더 높은 단계로 진급해 올라가기 위한 것입니다. 인생의 단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더 나은 단계로 진급하기 위해 그때마다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여호수아도 믿음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물이 불어난 요단강 법궤를 매고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을 때, 요단당이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담대한 믿음에서 오는 희락입니다. 하나님을 대강 우물쭈물 믿으면 손해입니다. 왜 그럴까요? 적당히 믿었기 때문에 영적인 힘이 없는 탓입니다.

주중에 적당히 살아 영적인 힘이 없는 사람은 주일에 교회에 나와도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찬송도 마음껏 부르지 못합니다. 죄의식때문이지요. 일주일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니까 하나님 앞에 가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듭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자마자 재빨리 도망치듯 나가버립니다.

그렇다고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재미있게 지내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교회에 와도 재미가 없고, 세상에 나가도 재미가 없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는 삶이 아니라 나가도 불편하고 들어와도 불편한 것이 예수를 믿으나 대강대강 믿는 사람들입니다. 시련을 만났을 때, 그것이 어떤 시련이든지 간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사람이나 자기의 실력, 돈과 명예, 권력이나 우상을 신뢰해서는 절대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나는 부족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만 믿습니다"라는 담대한 믿음으로 전진할 때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승리의 경험을 한 번, 두 번 하다보면 이제 시련이 오는 것이 점차 두렵지 않게 됩니다. 시련은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회하라는 하나님의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시련의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 결과를 통해 삶의 축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입니다. 우리는 이 시험에 반드시 믿음으로 합격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입니다. 우리는 이 시험에 반드시 믿음으로 합격해야 합니다. 시험 자체가 즐거운 것은 물룬 아닙니다.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여 한 단계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있어도절망은없다중에서...>

‘기도’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지?

우리는 모구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기도가 어려운 것은 그 행위 자체에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진정 어려운 일이며, 참으로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기도를 성가신 짐으로 여깁니다.
신령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짐을 짊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개중에는 매일 조금씩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마저도 기도하는 이유는 단지 주님이 기도를 엄격히 요구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노력으로 변할수록 기도생활에 소홀하기가 더욱 쉬워집니다.
그런 경유 영적 생황을 훼손하는 결과들이 즉시는 아니더라도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기도와 관련에 일어나는 어려움은 대부분 올바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섬세하고 정교한 도구입니다. 그것을 올라보 사용하는 것은 위대한 기술, 곧 거욱한 기술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기술에 정통(精通)하려면 일정한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곧 '실천'과 '인내'입니다.
실천이 없는 신자는 참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실천은 인내가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의 영, 곧 성령님은 우리에게 영의 기도를 가르치십시다.
성령님은 말씀과 매일의 기도 훈련을 통해 기도하는 습관과 기도행활에 관한 거룩한 통찰력을 허락하시고, 참 기도의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법칙을 가르펴주십니다.

기도생활에소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에 어기고 기도의 본질에 어긋난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의 기도생활은 아무 결실도 보지 못한 채 성가신 의무로 변질되고 맙니다.

하지만 기도를 지배하는 법칙, 곧 하나님이 기도의 특권을 베푸실 때 친히 정하였던 법칙을 찾아 따른다면 견실하고 흠 없는 기도생활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나아가 더 많은 기도를 드리도록 독려해줄 열매도 많이 맺게 될 것입니다.

<영의기도중에서....>

Via Dolorosa (고난의 길) / Sandi Patti

라틴어 Via Dolorosa는 ‘슬픔의 길’이라는 의미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걷던 약 800 m 의 길을 말합니다. 어려서 소프트 볼 선수였고 보칼리스트로 활약한 Sandi Patti가 영화 '나자렛 예수'에서 이 곡을 불러 널리 알려졌지요. 그녀는 1986년부터 활동을 하면서 약 20여 년 동안 39번의 도브상, 5번의 그래미 어워드 수상과 함께 그녀의 앨범 중 3개의 앨범이 플래티넘(100만장) 기록하고 5개의 앨범이 골드(50만장)판매를 기록한 화려한 경력의 CCM 계의 디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합병원' 의 주제가로서 김 태영이 ‘혼자만의 사랑’이란 곡으로 번안해서 불러 많은 사랑과 주목을 받았던 노래입니다.

Via Dolorosa (고난의 길) / Sandi Patti
그 날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 거리에서 군병들이 그 좁은 길을 봉쇄코자 했지만 갈보리에서 사형당할 사람을 보려고 무리들이 몰려들었네 그는 맞아서 피를 흘리고, 그의 등에는 채찍자국이 선명했네. 그의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매 걸음마다 그를 죽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조롱을 당하셨네

고난의 길이라는 비아 돌로로사 거리에 메시야, 그리스도 왕께서 어린 양처럼 오셨네 그러나 그는 당신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길을 걸으시기로 하셨네 갈보리까지 이어지는 그 비아 돌로로사 거리를 그날 예루살렘의 비아 도로로사 거리 군인들이 그 좁은 골목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십자가에 매달아 사형토록 형을 받은 남자를 볼려고 군중들은 몰려들었지

고통의 길이라고 부르는 비아 도로로사 길에 한 마리의 어린 양 예수, 구세주가 나타난 거야 그는 여러분과 내게 사랑을 베풀려고 그 비아 도로로사 길을 택하셨던 거야.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실 피가 예루살렘의 심장을 통해서 흘러 넘쳤네.

고난의 길이라는 비아 돌로로사 거리에 메시야, 그리스도 왕께서 어린 양처럼 오셨네 그러나 그는 당신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길을 걸으시기로 하셨네 갈보리까지 이어지는 그 비아 돌로로사 거리를 .

Nobody, Nobody... 아무도 없구나

나는 무실론자들이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똑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을 어릴 때 붙잡아놓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대부분 무신론자로 남게 되고, 설령 믿음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자신들에게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야말로 마음 밭으로 비유하면 '좋은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좋은 땅은 결국 가시덤불이나 돌밭, 아니면 길가가 되어간다. 그러니 이들이 한 살이라도 어릴 때에 예수를 믿게 해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가 중국을 거쳐 서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를 쓰시겠다는 말씀이셨다. 그때부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학교를 세우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 되었다.

하나님은 참 묘하시다.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나를 깨우시더니만, 1년만 헌신해보라는 신호를 보내셨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나는 3년간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3년을 계획하고 이곳 중국에 왔지만, 나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성령님과 깊은 사랑에 빠졌고, 그와 동시에 내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어 살아가기로 마음을 정하게 되었다.

<네인생을주님께걸라중에서....>

9/20/2011

좋은 청중, 준비된 복음전도자

사도행전 10 : 34 ~ 48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고넬료와 그의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이방인 구원이라는 선교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들의 생명구원의 선교현장에서 풍성한 생명구원의 사역원리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원리는 무엇입니까?

좋은 청중 
이방인의 첫 열매인 고넬료는 좋은 청중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하는 준비된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혼자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을 초청하여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24, 33절). 베드로를 통하여 증거 된 복음을 진지하게 들었고, 말씀을 듣는 중에 임한 성령께 자신을 맡기고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좋은 청중이 있는 곳에 풍성한 생명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좋은 청중은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자신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듣도록 초청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풍성한 생명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곳을 보면 그곳에는 반드시 좋은 청중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좋은 청중들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좋은 청중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좋은 청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혼 추수의 현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혼 추수의 현장은 곧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군이 적다”(마 9:37) 

준비된 복음전도자 
사도 베드로는 준비된 복음전도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증거 하였습니다. 주님의 종 된 자세로 양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 부활하셔서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들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 가운데 성령이 말씀을 듣는 이방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들의 중생을 확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베드로의 복음증거는 이방인들의 회심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말씀을 증거 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된 복음전도자를 통하여 놀라운 생명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풍성한 생명구원의 역사를 이루고자 한다면 복음전도자로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준비된 복음전도자는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고 순종할 줄 압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고 청중들이 받아드릴 수 있도록 전할 줄도 압니다. 청중과 복음의 소통을 성령 안에서 훌륭하게 잘 합니다.

믿음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16:19)

우리의 가정을 세우고 우리를 인도하고 복되게 할 수 있는 한 길이 있다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며, 성경 말씀대로 나아가면 우리는 주 안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일을 한다 할지라도 나의 자녀와 아내 즉 나의 가정에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가시길 소망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을 짜증나고 화나게 하지 말라고 볼 수 있으며, 자녀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밀지 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것을 말해보면, 명확하지 않은 기준(경계선), 예상할 수 없는 징계, 균형 잃은 책망, 자녀들에게 분풀이 하는 것 등일 것입니다.

둘째는 자녀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항상 좋은 것만 주는 것이 아니라 훈계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0-11절 말씀을 보면 훈계는 우리를 유익함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훈련시키지 않으십니다.
잠언 13장 24절을 보면 매를 아끼는 자, 차마 때리지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자녀를 교양(교훈)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교훈으로 키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절한 교훈을 준다는 말입니다. 먼저는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어릴 때 일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 때에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어린 때를 국한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성장해도 부모님은 여전히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부모의 자녀들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를 알려줘야 합니다. 어떤 것이 바른 신앙생활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지,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영적인 가르침을 해 주어야 합니다.

왜 이런 가르침이 필요합니까?
어느 대학기관에서 연구를 해보았더니 자녀들이 자라는데 있어서 교회가 주는 영적인 영향력은 1% 라고 합니다. 반면 가정이 주는 영적인 영향력은 무려 83%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여러 가지로 가르치고 훈련시키지만 가정에서 자녀를 영적으로 양육시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말씀과 기도로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들로 세워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목동제일교회)

‘교회는 다니는데…’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휴학하고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고 4학년으로 복학해서 교회라는 데를 처음 갔습니다. 법과대학에서 사법시험을 치를 준비를 하는 사람이었지만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완전 무식이었습니다. 죄가 뭔지도 말랐으니까요.

그런데 교회 나가자마자 목사님에게 들은 말이, 제가 죄인임을 고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저를 화나게 했습니다.

'나는 나중에 죄인을 다스릴 검사가 될 사람이네, 교회 처음 나온 사람한테 죄인임을 고백하라니, 목사님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인가?'

하지만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진짜 무식한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목사님에게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예글 들면, 기도는 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법고기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를 다니다 1년 반쯤 지나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제게는 사법고시 합격보다 더 급한 기도제목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제목이란, 제가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였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럴 수 있느냐고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도 평생 교회 다닐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 교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도 1년 넘도록 교회 다녔지만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 앞에 굴복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에게도 혹시 저와 같은 경험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냥 교회만 다니지 마십시오.
당신이 만약 모태신앙이라면, 당신의 어미니의 예수님이 아닌, 당신의 아버지의 예수님이 아닌 당신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요 주님으로 만나지 못했고, 예수님이 마음속에 살아계신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당신도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나를결정한다중에서...주영수>

99%는 아무 의미없다 100% 전부를 요구하신다 - EM바운즈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 즉 자신에게 속한 것과 자신에게서 비롯하는 것 모두를 바치는 사라에게는 기도를 통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이것이 온전한 기도의 비밀이자 능력 있는 기도의 조건이다. 그런 기도는 놀라운 결실을 맺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전부를 요구하신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아무 쓸모가 없다. 주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다.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하나님과 세상과 자아[自我]를 동시에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쓸모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우리의 전인(전인)이 기도해야 한다. 전인, 곧 생명과 마음과 기질과 정신이 모두 기도에 동참해야 한다. 모든 요소가 제각기 기도에 관여한다. 의심, 두 마음, 산만한 감정 등은 기도 골방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우리 몸이 기도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은 곧 우리의 기도하는 태도와 자세를 반영한다. 기도할 때 몸을 엎드리는 자세는 영혼의 복종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도 교만하게 우쭐한 마음과 산만한 정신 상태로 단지 형식에 불과한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기도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단6:10]
솔로몬도 성전을 봉헌할 때 무릎을 꿇고 시도했다[왕상8:54]
주님도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시기 직전에 무릎을 꿇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다[눅22:41]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그 당시 영혼의 상태에 가장 걸맞은 자세로 취하기 마련이다. 몸은 그런 식으로 영혼과 더불어 기도에 동참한다.
기도란,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간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리 '이 시간에 무엇을 구할까?'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헛되고 악하고 무익한 생각은 모두 배제하고, 온전히 하나님게 정신을 집중해 하나님과 하나님께 구할 것과 과거의 축복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마음도 기도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에 즐거이 복종하려면 하나님께 온전한 마음을 바쳐야 하듯이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는 데에도 온전한 마음이 필요하다.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119: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도 온전한 마음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구하는 일에도 온전한 마음이 필요하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복 있는 사람"[시1:1]이라고 일컫는다. 하나님은 온전한 마음의 소유자에게 임하신다.

인간의 모든 힘이 기도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은 두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두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9/19/2011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11:7)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상고하면서 부활의 주님이 어떠한 주님이신지를 깨닫고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떠날 기약이 되었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의 마음에 번민이 많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1절에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고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부족한 제자들처럼 오늘 우리도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영적 고뇌가 있을 것입니다.하지만 부족한 제자들과 우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그것을 세 가지 정도로만 묵상하려고 합니다.

약속 중의 하나는 미래에 대한 약속입니다.
내일이 오늘만 못하다면 살 맛이 날까요예수님께서 연약한 제자들에게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미래에 대한 말씀이셨습니다그것은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미래를 책임져 주시겠다는 귀중한 말씀입니다이 약속을 하신 분이 부활의 주님이십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썩지않고 변하지 않는 하늘나라가 예비되었다는 미래의 소망보다 우리를 안심하게 하고 우리의 행복을 책임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친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15:12-15의 말씀을 읽읍시다주님께서는 주님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숨기지 않으셨습니다십자가와 부활과 천국과 성령의 강림을 알려주셨습니다성령으로 임하셔서 친구가 되어주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심으로 우리를 친구 삼아주시는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그 증거는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이런 확실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그것을 알 수 있는 첫째는 평안함입니다그리고 기쁨입니다.평안이 내적인 것이라면 기쁨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가족으로 삼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역사가 있을까요우리가 세상을 살면 영적인 곤고함이 일어납니다그러나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족으로 삼으셔서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때 이런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함께 하는 분지켜 주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 때 훨씬 더 담대할 수 있습니다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여러분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세상에서 승리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목동제일교회)

9/18/2011

20년을 기도한 끝에 겨우 얻은 성경책입니다.

"그들이 간청하고 간청했지만 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든 서로 나눠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절대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양손에 꼭 쥐고 있던 그 귀한 물건을 슬픈 얼굴로 펄쳐보였다.

"정말로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책을 얻기 위해 50년 동안 기도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이 책을 얻기 위해 20년 동안 기도해오다가 남한의 목회자로부터 겨우 얻었던 터라 도저히 줄 수가 없었습니다."

북한에는 성경책이 거의 없다. 공산주의자들의 지독한 탄압으로 인해 그곳의 신자들은 성경책을 금덩이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다. 어떤 사람은 중국에서 북한으로 성경책을 밀반입하다가 국경 근처에서 체포되어 쇠몽둥이에 맞아 거의 죽을 뻔했다. 슬프게도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계속해서 보고되고 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그 진정한 가치를 너무도 잘 아는 곳 이외의 모든 곳에서 그저 무시당하고 오용된다. 우리가 만약 20년을 기도한 끝에 그 책을 간신히 얻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대접할 수 있을까?

<순교자의소리/주를위해살다중에서...>

15년 동안 그를 용서하기 않았습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저는 소위 말하는 산전수전(산전수전)을 겪었습니다. 아파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기도 했고, 버거운 시집살이를 겪는 와중에 남편은 3년 동안 거의 나가 살다시피 했으며, 전셋집에서 내쫓겨 길바닥에 나앉은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별의 별 일들을 다 겪게 하시며, 과거의 모든 어두운 것들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제가 포기하지 못해 이를 악물고 붙잡고 있던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씩 다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돈이 생명이었고, 자식과 친구가, 때로는 나 자신이 생명인 것 같았습니다.

하루는 기도하러 가서 말씀을 묵상하는데 마음에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현미야, 다 내려놔라.'
'내려놨다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저는 어느 것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끈질지게 제 생각을 고집했는지 모릅니다.

남편이 3년만에 탕자처럼 돌아와서는 제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나갔다 들어온 것에 대해 곁으로는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비수를 품고 원수 갚을 것을 헤아리며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남편의 죄에 재판관이 되어 이후 15년 동안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거야.'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사랑할 수 있어!'

15년간 하지 못한 용서가 하루아침에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한 이유는 '나'라는 그릇이 비워지지 않아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용서하셨는데, 내 의(義)로 가득 차 있던 저는 나를 아프게 한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릇이 비워지지 않으니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채우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비워지기 위해 그릇은 날마다 씻기는 곳에 가야 합니다. 그릇은 계속 더러워지는데 그릇 스스로 자신을 씻을 수 없기 때문에 생수가 부어지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출처:기도할 수 밖에 없었어요 중에서...>

감정에 따라 살지 않고 믿음에 따라 산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기 감정과 느낌에 죄우되지 않는 삶을 살도록 저를 이끌어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려운 훈련이다. 자신이 신령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기도로써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 싸움을 할 때, 자신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 감정이 어떻든 간에 내게는 문제가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감정에 따라 살지 앓고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차갑거든 뜨겁든 관계없이 말이다. 물론 뜨거운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시편에서 볼 수 있듯이, 다윗 같은 사람도 차가워진 적이 많이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6:5)라고 말했다. 갑자기 슬프고 불안해져서 기쁨이 싹 달아나는 경우가 우리에게 종종 생긴다.

우리가 아무 기쁨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으면서도 잠깐 동안 아무 기쁨 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과 함께 일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삶을 극복하도록 훈련하고 성숙하게 하심을 믿어야 한다.

9/17/2011

효도는 도덕생활의 기초 (잠언 6:20-23)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도덕생활의 기초는 효도함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효도를 장려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도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내리시는 축복을 말씀합니다.
성경 도처에서 효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정신의 근간이 되는 십계명에서도 제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잠 23:25, 30:17, 엡 6:1~, 딤전 5;8). 구약시대에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출 21:15), 어미를 저주는 하는 자(출 21;17)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효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요약:
1. 사람은 절대관계와 상대관계 속에 있습니다.
2. 부모님은 효도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3. 최고의 효행은 신앙생활을 잘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출처/강동수목사 설교 중에서

자녀양육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벧전1:22)

살면서 부딪히는 어려움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자녀 양육이 가장 만만치 않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 부모들은 많은 것들을 희생합니다. 하지만 자녀 양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육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자녀들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 그분의 역사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절대로 부모의 뜻대로만 자라주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기 위해 다음 네 가지를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훌륭한 본보기 삼고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삶의 방법을 택해서 살아가면 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다른 무엇을 하려고 애쓰기 전에 나를 먼저 사랑해주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형성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들이 먼저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며 살 때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따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분명하고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는 올바른 신앙의 기초를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면 자녀들이 곁길로 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날마다 풍성히 누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나누어 줘야 합니다.

셋째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를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만이 우리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삶으로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또한 자녀들에게 늘 그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와 늘 함께하심을 고백하고, 주님께 날마다 집중하게 될 때,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를 드리게 될 때 우리는 담대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떻든 우리가 이 네 가지를 확실히 믿고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붙잡고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것은 확신합니다. (목동제일교회)

9/16/2011

말이 남기는 상처

숲에서 한 나무꾼이 나무를 베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나무꾼은 큰 나무 아래로 피했다. 비가 그친 뒤 나무꾼은 고마운 마음에 그 나무는 베지않기로  결정했다.나무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언제든지 제 그늘에서 편히 쉴수 있게 해 드릴게요.”
그러자 나무꾼은 손 사래를 치며 말했다. “네 덕분에 피를 피한 것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앞으로 다시 올 일은 없을 거야. 네몸에서 나는 냄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거든.”

나무는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상처를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도끼로 저를 치세요.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으니까요.”나무꾼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나무와 인연을 끊고 싶어서 시키는 대로 하고 떠났다.

몇십 년이 지난 뒤 고양한 냄새가 나던 나무 주변에는 다시 어린 나무가 자라 숲이 무성해 졌다. 그곳에서 나무를 베던 나무꾼은 옛날 그 나무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나이가 들어 현명해진 나무꾼은 도끼로 나무에게 상처를 입힌 일을 후회하며 말했다.

“내가 몸통에 낸 상처 때문에 네가 썩어  버렸을까 걱정했다. 지난 세월 나는 얼마나 후회 속에서 살았는지 몰라. 미안하구나.”

그러자 나무는 대답했다.
“당신이 도끼로 나를 내리친 순간은 너무도 고통스러웠죠. 하지만 상처가 아문 뒤에는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당신이 냄새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한 말은 잊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평생 잊지 못할 듯 하군요.”<출처:월간 좋은 생각>

9/15/2011

은혜는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15:22)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말은 불가능한 말이지만, 실제 그런 현상들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가 해야 할 일들을 분담하여 돕는 교회. 심지어 세상이 칭찬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없이 그 일이 가능하며, 그리스도 없이 하는 일을 통해서도 감동과 눈물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예배 음악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우리의 가슴에 설득력 있는 메시지가 던져져서 나의 인격과 나의 앞날과 나의 인생에 대한 깊은 생각에 까지 나간다 할지라도 그 예배의 자리에 예배 받으실 하나님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은혜와 기쁨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분을 만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가 그런 은혜를 누린 자였는데, 말씀을 통해 3가지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첫째는 삭개오가 예수님께로 나아갔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향에는 영적 장애물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도 그랬습니다. 작은 키와 많은 사람이 그를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작은 키가 본인 자신의 문제라면 많은 사람들은 외부의 환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그 장애물을 넘었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첫 만남 속에 감춰진 비밀을 발견할 때 은혜를 누립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를 아셨습니다. 다시 말해 삭개오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지만 예수님은 삭개오를 이미 알고 계셨고, 그를 보고 계셨고, 그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홀로 있는 것 같은 그 자리에서도 주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가 우리를 감격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변화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삭개오는 그가 가졌던 재물. 매국노라는 욕을 먹어도 견디고 참을 수 있었던 그 재물. 그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재물을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고 감격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의지의 대상이 변화되며, 진정한 영적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목동제일교회)

나이로 살기보다는 생각으로 살아라

99℃사랑이 아닌 100℃사랑으로 살아라. 속담에..『밥은 봄처럼, 국은 여름처럼, 장은 가을처럼, 술은 겨울처럼』이란 말이 있다. 모든 음식에는 적정 온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랑에도 온도가 있다.

사랑의 온도는 100℃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99℃에서 멈춰 버린다. 기왕 사랑하려면 사랑이 끓어오르는 그 시간까지 사랑하여라. 계란후라이가 아닌 생명으로 살아라.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면 생명(병아리)으로 부활하지만.

남이 깰 때까지 기다리면 계란 후라이 밖에 안 된다. 더군다나 뱀은 그 허물을 벗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지 않은가? 남이 너를 깨뜨릴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관습의 틀을 벗고, 고정관념을 깨뜨려, 매일 새롭게 태어나라. 돼지로 살기보다는 해바라기로 살아라 돼지는 하늘을 쳐다보지 못한다. 넘어져야 비로소 하늘을 쳐다 볼 수 있다. 하지만 해바라기는 늘 하늘을 향해 있다.

해바라기가 아름다운 것은, 아무리 흐린 빛도 찾아내 그 쪽을 향하는데 있다. 나이로 살기보다 생각으로 살아라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고 만다. 생각의 게으름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일이다.

나이로 보다 생각으로 세상을 들여다보아라 생리적 나이는 어쩔 수 없겠지만, 정신적 나이, 신체적 나이는 29살에 고정해 살아라.

인상파로 보다 스마일맨으로 살아라 잘 생긴 사람은 가만있어도 잘 나 보인다. 그러나 못생긴 사람은 가만있는 것만으로도 인상파로 보이기 십상이다. 너는 '살아있는 미소'로 누군가에 기쁨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어라.

- 좋은글 中에서 -

슬픔을 맡기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가수인 헤리 로더는 공연 중에 자신의 아들이 전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웃으며 노래를 불렀고, 공연을 마쳤습니다.

공연 후, 헤리는 아들의 시선을 붙잡고 우는 대신에 오히려 군인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헤리 로더는 한 잡지사와의 인텨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고난을 맞는 인간의 태도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비관해서 좌절하든지, 술을 계속 마셔서 파멸하든지, 하나님께 슬픔을 맡겨 자유하든지... 저는 하나님께 저의 슬픔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위로와 힘을 공급해주셨고,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슬픔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찬양을 통해 고난 중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삶의 정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징검다리/정장복, 주승중)

9/14/2011

아브라함을 통해 비춰진 부모의 모습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가운데 가정을 주시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을까요?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비쳐지는 성부 하나님의 모습과 이삭을 통해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육신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살펴보며 육신의 아버지로서의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정말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도 아셨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까요?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젖 먹는 자기 자식을 잊겠느냐?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잊지 않겠다.” 그러면서 우리를 자신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것을 발견하지만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서 아들을 향한 희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생각하면 희생을 떠올립니다. 이 희생을 생각하면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셨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는 아브라함을 통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또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기 위해 갔지만 우리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이삭에게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부모의 믿음을 보고 자녀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말로 자녀를 양육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에 대한 믿음과 순종에 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가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순종하며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복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은혜와 복을 받는 길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더라도 순종할 때 은혜와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목동제일교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9 : 1~ 9
* 다메섹(2절) : 예루살렘으로부터 240Km 떨어져 있음. 바울은 핍박을 피하여 온 자들을 뿌리를 뽑을 작정으로 이곳까지 감.

다소 사람 바울의 회심은 교회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그의 회심을 계기로 교회사는 ‘이방인 선교’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만나주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어떠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회심 장면은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열성적 찬성자였고, 예루살렘 교회의 적극적 핍박자였던 바울입니다.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이유도 도망친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아 교회에 결정적 타격을 주고, 어떻게든 복음 확산을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얼마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열심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사울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최대의 위험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울의 거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거부할 수 없는 빛과 부르심을 통해 바울이 예수님과 스데반의 거룩한 순교의 모습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셨습니다.

비록 교회의 핍박자요, 성도들의 원수일지라도 주님은 바울 역시 복음이 필요한 한 영혼으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되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먼저 우리를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구속해주시는 무조건적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인격적인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권적인 은혜이지만 강제적인 은혜는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의 회심 사건은 강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바울의 회심 사건은 너무나도 인격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거부할 수 없는 빛과 소리로 임하셔서 그를 엎드러지게 하셨지만 사울의 인격 자체를 침해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사울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도록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질문하심으로 그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십니다. 이에 대해 사울 역시 ‘주여 뉘시오니이까?’ 하고 대답하며 인격적으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를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속박하는 것은 죄의 세력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존중하시고, 인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특별한 체험이나 드라마틱한 간증거리가 있어야만 은혜가 아닙니다. 매일 아침 조용한 음성으로 직접 우리의 내면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바로 그 하나님의 방식 그대로 인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의 온 마음과 뜻, 정성을 다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

사도행전 10 : 17 ~ 33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심으로 이방인 구원이라는 새로운 선교의 지평을 여셨습니다. 이들의 만남을 볼 때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고넬료와 베드로는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는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하셨고 베드로에게는 고넬료라는 이방인을 만나 그를 구원하라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고넬료와는 다르게 베드로는 쉽게 그 메시지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환상을 본 후 에 고민하다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고서야 하나님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28~29절).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환상을 기대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한다면 성경을 골똘히 묵상하고,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도 가운데서 묵상할 때 주변상황의 변화, 내적인 확신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본 후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 고민했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일어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즉각적으로 순종했고,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결국에 순종하였습니다.
순종은 쉽지 않습니다. 정복자 고넬료가 별로 유명하지도 않는 유대인 베드로를 초청하는 것,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는 것, 모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의 결과입니다. 사역의 현장에 열매가 없는 이유는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없는 곳에서는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 사역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사결정과 행동의 이유가 무엇인지,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세상의 요구, 육체의 요구에 따른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인지. 순종한대로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육체의 열매를 거둘 수도 있고, 성령의 열매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순종을 할 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열매를 얻게 됩니다.

출처:매일선교소식

9/13/2011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라!

유명한 수필가인 영국의 찰스 램은 인도의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매일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해서 다섯시까지 줄곧 일을 했다.

그러다보니 마음대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시간을 지배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세월이 흘러 그가 정년퇴직을 하는 날이 되었다.  그는 구속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무척 기뻐했다.

찰스 램은 정년퇴직하는 날  마지막 출근을 했다.
"선생님, 명예로운 정년 퇴직을 축하합니다."
찰스 램의 평소의 소원을 알고 있던 여직원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이제는 밤에만 쓰던 작품을 낮에도 쓰게 되셨으니 작품이 더욱 빛나겠군요."
찰스램도 활짝 웃으며 유쾌하게 대답했다.

"햇빛을 보고 쓰는 글이니 별빛만 보고 쓴 글보다 더 빛이 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찰스램은 혼자 중얼거렸다.

"아아, 이렇게 자유로운 몸이 되길 얼마나 학수고대했던가."
마음껏 읽고 쓸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기쁨 때문에 그는 가벼운 흥분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3년후 찰스램은 자기의 정년퇴직을 축하해 주었던 여직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사람이 하는 일 없이 한가한 것이 눈코뜰새 없이 바쁜 것보다 얼마나 못 견딜 노릇인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오. 바빠서 글 쓸 새가 없다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글을 쓰지 못하는군요. 할일없이 빈둥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요. 좋은 생각도 일이 바쁜 가운데서 떠오른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소 아가씨는 부디 내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두고 언제나 바쁘고 보람있는 나날을 꾸며나가기 바라오."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아비를 조롱하여 어미를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30:17)

영화 대부에서 갱들은 서로 화합하자고 하지만 결국 화합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화에서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상황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화목하지 못한 곳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요한 몸을 포기하면서라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진실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화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서로 화목하기를 원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소금으로서 살아갈 때만 화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금을 생각해보면 먼저 맛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또 방부제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소금의 기능 중에는 고르게 하는 역할도 있습니다. 김치를 담글 때 소금에 저리는 이유는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물을 드릴 때 소금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물은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죽여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예배 드리는 우리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자신을 죽여서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해야 할 일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물되는 일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고 내 주변과도 화목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은 녹아져야만 그 기능을 감당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녹아져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수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목동제일교회)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가정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약5:16)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 중에서 사람을 만드시고 더욱 기뻐하셨습니다. 사람은 더 다양하게 더 귀한 의미와 표현들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정만큼 전능하신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기관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신 가족관계의 표현은 놀라운 하나님의 아이디어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떠한 가정을 이루라고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을까요? 사람들은 세상에서 많은 폭풍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안전지대가 필요한 데 그래서 주어진 것이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저런 좌절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특히 살아가면서 정서적인 아픔을 당할 때도 많습니다. 화가나고 외롭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합니다. 이런 정서적인 시련가운데 우리를 지켜줄 울타리가 있다면 그것은 가정이 아닐까요? 우리를 보호하는 기관으로서 가정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가정이 배움의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머니 품에서부터 가장 기본적인 것을 배웁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의미에서 믿음의 가정에서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첫째는 관계입니다. 사람은 만나고 살아가기 때문에 관계를 가르쳐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가치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가치를 가르쳐야 하는 데 그것은 어떤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격인데 그것 역시 비언어적인 것입니다. 인격은 내면의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나의 모습인데 아이들은 그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알고, 따라가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느 분은 신앙 생활을 릴레이 경주에 비유합니다. 릴레이는 바톤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는 경기인데 우리는 그 중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신앙의 바톤을 내 자녀에게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내 자녀는 또 그의 자녀에게 넘기는 것이죠. 가정은 가르치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세 번째 가정은 사역을 위한 장소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사역을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진짜 예배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을 어디서부터 할 수 있을까요? 바로 가정에서부터입니다. 구제하는 부모 아래의 자녀 중 궁핍한 자를 본 일이 없습니다.

가정은 안전가옥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남을 섬기는 것을 배웁니다. 가정을 통해 온전함에 이르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목동제일교회)

9/12/2011

웃음을 뿌리는 마음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빛깔과 느낌입니다.

얼굴이 밝게 빛나고 웃음이 가득한 사람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얼굴이 어둡고 늘 찡그리는 사람은 쉽게 좌절합니다.

얼굴은 마음과 직결되며 마음이 어두우면 얼굴도 어둡습니다.
마음이 밝으면 얼굴도 밝습니다. 이는 행복하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속에 꿈과 비전을 간직하면 행복에 익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웃음이 얼굴에 가득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건강에 유익합니다.

목 위에서부터 출발하여 얼굴에 나타나는 미소나 웃음은 예외입니다.
그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얼굴의 뿌리, 웃음의 뿌리는 마음입니다.

출처 : <이야기마을 옹달샘> 중에서

행복은.....

행복은 깊이 느낄 줄 알고, 단순하고 자유롭게 생각할 줄 알고 삶에 도전할 줄 알고 남에게 필요한 삶이 될 줄 아는 능력으로 부터 나옵니다. - 스톰 제임슨 -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번 약속한 일은 상대방이 감탄할 정도로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신용과 체면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그만큼 서로의 믿음이 약해진다. 그러므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카네기 -

행복의 비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앤드류 매튜스 -

행복하자면 두 가지 길이 있다. 욕망을 줄이거나,소유물을 늘리거나 하면 된다. 어느 쪽이라도 된다.- B. 프랭클린 -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칸트 -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 헬렌 켈러 -

참다운 사랑의 힘은 태산(泰山)보다도 강하다.그러므로 그 힘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 황금일지라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소포클레스 -

폭풍 속에서만 항해의 예술이 표현되고 전쟁터에 있어야만 군대는 용감해진다. 인간의 용기는 그 사람이 곤란하고 위험한 경우에 빠졌을 때에만 알 수 있다.- 다니엘 -

미래를 사랑하는 마은은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A. 카뮈 -
실패했다는 것은 크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도전하지 못한 비겁함은 더 큰 치욕이다.- 로버트 H. 슐러 -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 해서, 또는 이익이 있으므로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 행복을 느낌으로 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파스칼 -

이기심과 불평이 정신을 유혹하고 흐리게 하는 것처럼, 사랑은 그렇게 기쁨으로 시야를 맑게하고 날카롭게 만들어준다.- 헬런 켈러 -

인생의 오욕에 대항하는 최선의 무기는 용기와 자애와 인내 입니다.용기는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자애는 농담을 하게 해주며 인내는 안정을 줍니다.- 헤르만 헤세 -

당신이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모두 다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언제든지,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오래도록 당신이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모두 다 하라. - 존 웨슬리의 생활신조 -

사과할 때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솔직해지는 1분은 자기를 기만한 며칠, 몇 달, 몇 년보다 값지다.- 켄 블랜차드 -

내가 갖고 싶은 것은 강인함, 용기, 위엄과 같이 내부에서 우러나지만 쉽사리 얻기 어려운 아름다움이다. - 루비디 (미국의 배우) -

성실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이기려고 애쓴다. - 나폴레옹 -
남을 이기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욕심부터 물리쳐라. - 여불위 (중국 정치가) -
잘못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 루소 -

행복은 깊이 느낄 줄 알고, 단순하고 자유롭게 생각할 줄 알고 삶에 도전할 줄 알고 남에게 필요한 삶이 될 줄 아는 능력으로 부터 나옵니다. -스톰 제임슨 -

9/10/2011

{미드라쉬, 노아이야기, 32} *아브라함의 예언과 성취*

*아브라함이 100살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은 얼마나 귀한 아들인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는 전부요 사라에게는 전부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들을 잡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사환을 데리고 3일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산 밑에서 아브라함은 두 사환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 오리라>(창 22:5)

데리고 가면 틀림없이 이삭을 죽이지 못 하게 할 것같으니까 아브라함이 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삭과 함께 올라가는 데 이삭이 물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아브라함은 산으로 오르면서 엉뚱한 말 두 마디를 말했습니다.<이삭과 함께 오리라><하나님이 준비하셨다>그런데 결과는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입술의 능력은 이렇게 강한 것입니다.

1. 말에는 각인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뇌세포의 98%가 말의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말하면 그것이 각인되어 그 말대로 됩니다. 피곤하다고 말하면 피곤하여 지는 것입니다. 종다고 말하면 좋다는 말이 각인되어 좋게 되는 것입니다. 누에고치는 자기 입에서 나온 실 300m로 자기 몸을 감싸게 됩니다. 입의 말은 온몸을 감싸게 되는 각인력이 있습니다.

2. 말에는 견인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행일치라고 말하지 행언일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을 잘하여야 합니다. 그 말이 자기를 끌어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87세된 노인이 트럭에 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기력이 왕성하였습니다. 시체를 검안한 의사가 미망인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경의로운 분이십니다.
저런 몸이었다면 벌써 돌아가셔야 할 몸인 데 어떻게 이렇게 장수하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하여도 의학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때 미망인 할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항상 낙관적인 생각, 낙관적인 말만 하였따는 것입니다. 잠자기 전에는 꼭 이런 말을 하시고 주무셨습니다. "내일은 기분이 더 좋아 질 것이다" "나에게는 희망이 있다" "하나님은 좋ㄹ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렇습니다. 말에는 견인력이 있습니다.

3. 말에는 성취력이 있습니다.
자주 말하는 것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맙니다. 그거이 그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처녀에게 어느 점장이가 <너는 시집가서 잘 살기는 틀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처녀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언젠가는 틀려질거야. 잠시 잘 되는 것뿐이야>라고 비관하였습니다. 잘 안되면 <점장이 말이 맞아! 난 틀렸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은 폐인이 되었습니다. 말에는 성취력이 있습니다.
어느 수학선생님이 자기가 가리키는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누었습니다. 각각 다른 교실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머리가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정도의 머리다. 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아! 자 풀기 시작하여라>

그러나 다른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문제는 너무나 어렵다. 아인슈타인도 풀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시도하여 보아라>

나중에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할수 있다는 말을 들은 아이들은 100%가 그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도 풀지 못 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은 한 명도 이 문제를 풀지 못 하였습니다. 말은 성취력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주장하셔서 언제나 축복된 말, 소망의 말, 긍정적인 말, 미래를 끌어가는 말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언은 성취 입니다.

9/08/2011

행복의 조건은 고난의 이해로부터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6)

이 세상에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기의 잘못이나 더러는 의를 행하다가 어려움이나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난을 당할 때의 자세입니다. 고난 당할 때 자세를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그것이 온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신앙의 성숙으로 이끌게 됩니다.

고난이라는 삶의 현실 속에서 ‘나는 왜 이럴까’하면서 푸념만 하면서 살 수 는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니엘의 고백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혹시 자신을 뒤돌아보고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회개하면 됩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거리끼는 것이 없다면 견디고 참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거스틴은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고 고통은 동일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난하고 모독하지만 선한 성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긍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다가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선택은 확연하게 다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죄도 없으셨고 누구를 해한 적도 없으시고 거짓말을 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이 부당하게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도 당할 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잘 견디고 참으면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기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견디신 본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2:6) 자신을 낮추시고 몸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의를 위해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을 생각하고 참고 인내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목동제일교회)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삶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관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5:8~9)

우리의 신앙생활을 ‘관계의 성숙’이라고도 정의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숙,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전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관계를 올바로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우리 가정 안에서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길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출발입니다.

전도서4:12에서 세 겹줄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혼자 혹은 둘보다 셋즉 함께 하는 것이 정말 귀합니다우리가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지탱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있는 죄악 때문에 우리가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죄는 서로를 지적하고 견제하게 합니다그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516절은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즉 서로가 진정성을 가지고 다가서면관계는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아울러 서로 기도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을 통해서온전한 관계가 유지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19절은 우리가 서로 더욱 화평하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누구나 부족하고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이 세상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연약한 존재들입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묻어놓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고 계십니다특별히 우리는 덕을 세워가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덕을 세운다는 것은 원어적인 의미로 우리의 공동체를 세워가라는 뜻입니다. 덕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뿐만이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세워가는 사람입니다혼자 살 수 없는 우리는 반드시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이 두 가지는 반드시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덧붙여서 매일 시간을 내어 ‘큐티’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하고 생기가 넘쳐나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건강하게 세우시기 바랍니다나아가 가정 가운데 부부간에 자녀들과의 관계에도 올바로 세워나가시기 바랍니다그것이 바로 참 행복입니다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숙한 관계의 삶을 사는 분들이 가정과 우리 교회 가운데 넘쳐 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목동제일교회)


9/07/2011

직면한 영적 도전…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은 더욱 영적인 도전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날이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날로 흉포해져가고 교활하며 더욱 극도의 음란에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능가한지는 이미 오래 전입니다. 영혼을 죽이려는 사탄의 흉계요 덫이요 함정입니다.
세상은 영혼의 발목을 단숨에 날려버리려는, 아니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는 사탄이 몰래 묻어둔 지뢰밭이 되어버렸습니다.

사탄은 영혼을 그 창조주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떼어놓기 위해 온갖 음모와 거짓으로 속이며 삼킬 자를 찾아 우는 사자와도 같이 으르렁거리며 두루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주 광명한, 아름답디 아름다운 천사로까지 가장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어야할 사명을 지닌 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영적타락은 몹시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부터 이상한 조짐이 일기 시작한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이 있으며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고 사람들은 쾌락을 좇으며 타락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곳에 다시 오실 날이 임박해질 때 세상이 그러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우리가 더욱 주의할 것들은 사탄의 간교한 흉계들입니다.
특히 자라나는 생명들을 죽이기 위한 사탄의 술책들입니다. 그것들은 음악이니 게임이니 하는 달콤하고도 유혹스런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영혼을 포획해 버리고 맙니다.
지금도 너무나도 수많은 아이들이, 심지어 어른들까지도 더러우며 잔인한, 음란한 컴퓨터게임에 몰입하여 자신들의 영혼을 사탄에게 내어주고 있는 무서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급하고 난폭하며 파괴적이고도 절망적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며 장차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거센 풍랑이 이는 성난 바다위에 이리저리로 표류하는 난파선과도 같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각종 대중매체들을 통한 사탄의 융단폭격은 쉼 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로인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혼들이 상처를 입고 영적전쟁터에서 나뒹굴고 있기도 합니다.
저질스러운 드라마나 쓰레기 같은 코미디프로그램들은 영혼을 갉아먹는 사탄의 졸개들이며 그것들을 생산해 내는 자들은 맘몬으로부터 죽음과 저주의 보상을 받으며 그 일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욱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에 말입니다.
문밖에 이미 이르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악하니라”

출처:예수님의 교실

영적인 힘을 기르는 법

1.말이 삶보다 앞서지 말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삶은 신실해 집니다.

2.말과 행함을 일치시키십시오. 존재의 힘이 생깁니다.

3.말이 삶보다 많지 않게 하십시오. 삶이 단순해 집니다.

4.남을 평하기에 앞서 자신을 살피십시오. 고요히 높은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5.행하기에 앞서 기도하십시오. 삶의 시간을 절약하게 됩니다.

6.말씀에 행함을 일치 시키십시오. 거룩한 주의 발자취를 다르게 됩니다.

7.하나님만을 두려워 하십시오.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이 편지는깊은 생각 깨끗한 마음으로 하루씩 완결하는 삶을 살며 직업을 성직으로 여기고 살려는 이들이 나누는 영혼의 대화입니다.

샬롬!!
출처: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나를 생각하게 하는 글

나는 믿는다고 하면서 의심도 합니다. 나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잘난체도 합니다.
나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하면서 닫기도 합니다. 나는 정직하자고 다짐하면서 꾀를 내기도 합니다.

나는 떠난다고 하면서 돌아와 있고 다시 떠날 생각을 합니다. 나는 참아야 한다고 하면서 화를 내고 시원해 합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다가 우스운 일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는 외로울수록 바쁜 척합니다.

나는 같이 가자고 하면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으라 하면 같이 가고 싶어집니다. 나는 봄에는 봄이 좋다 하고 가을에는 가을이 좋다 합니다. 나는 남에게는 쉬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계속 일만 합니다.

나는 희망을 품으면서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나는 벗어나고 싶어하면서 소속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변화를 좋아하지만 안정도 좋아합니다. 나는 절약하자고 하지만 낭비할때도 있습니다.

나는 약속을 하고나서 지키고 싶지 않아 핑계를 찾기도 합니다. 나는 남의 성공에 박수를 치지만 속으로는 질투도 합니다. 나는 실패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만 내가 실패하는 것은 두렵습니다.

나는 너그러운 척하지만 까다롭습니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하지만 불평도 털어놓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들 만나기를 좋아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하지만 미워할 때도 있습니다.

흔들리고 괴로워하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다음이 있습니다.
그 내일을 품고 오늘은 이렇게 청개구리로 살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마음이 쉬는 의자》중에서 -

사울이 어떻게 했길래 교회는 성장하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9 : 19 ~ 31사울의 회심 사건은 초대 교회가 든든히 서고, 수적으로도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어떻게 했길래 교회는 성장하게 되었습니까?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성령의 권능으로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회심 사건은 결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성도들은 도무지 사울의 회심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성도들을 체포하기 위해 회심한 척 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바나바의 중재로 의심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사울을 향한 반대는 교회 밖에서도 거세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힘써 전파하는 것을 들은 다메섹 유대인들이나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더 이상 유대인들의 존경받는 율법사가 아니라, 죽이고 싶도록 미운, 꼴도 보기 싫은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동족 유대인들의 핍박과 교회 안의 냉소적 분위기에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을 더 얻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어려울수록 상황이나 사람들의 반응에 개의치 말고, 성령께 초점을 맞추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복음 전파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난관은 극복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큰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복음 증거는 참으로 용감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로 복음을 증거한 곳은 다메섹 회당이었습니다. 그곳은 그리스도인 체포 공문을 전달하려 했던 곳으로 ‘체포’라는 단어가 금방 떠오르는 바로 그 회당이었습니다(행 9:2, 20참조). 하지만 전혀 망설이지 않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는 이전에 스데반이 순교한 바로 그 곳에서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이런 담대한 복음 증거는 유대인들의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를 쓰며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때문에 사울은 성난 유대인들을 피해 광주리에 담겨서 간신히 탈출하기도 하고, 테러리스트를 피해 은둔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난을 피하지 않는 사울의 열정적 복음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갈 수 있었습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처럼 주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힘든 환경 중에 있더라도 더욱 용감하게 복음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고난이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영광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기독대학인회(ESF) 제공

9/06/2011

나비와 고치와의 관계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2:51)

영국의 식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연구실에서 고치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황제나비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고치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나비에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문제였습니다고통스러워하는 나비의 ‘투쟁’을 지켜보던 월리스는 순간,‘내가 이 나비를 도우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는 칼로 고치의 옆 부분을 살짝 그었습니다.

그러자 예상 밖의 결과가 빚어지고 말았습니다나비는 고치를 빠져 나와서 날개를 폈습니다하지만 곧 축 늘어지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나비는 고통과 험난한 투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을 지니고 세상에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는 어쩌다 영혼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닙니다우리의 영혼이 신체를 얻은 것입니다우리는 성장하는 육체를 지녔고일을 하며죽어야 할 운명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통은 우리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작가 스콧 펙의 말처럼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영적인 성장을 위해 의도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행복한 삶을 사는 10가지 작은 원칙’-(아서 칼리안드로배리 렌슨)

9/05/2011

기회포착의 10가지 요령

1. 예감이 있으면 붙잡을 준비를 하라.  모든 때가 다 좋은 때가 아니다. 모험심이 있어야만 적절한 순간에 기회를  잡을 수 있다.

2. 붙잡으려는 열심이 있어야 한다.  기회를 발견하려는 노력 없이는 기회는 나타나지 않는다.

3. 잠재의식을 활용하라.  늘 목표의식을 갖고 생활하면, 당신의 잠재의식이 당신으로 하여금 기회가 있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4. 실패하더라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  한 번 기회를 잃었어도 낙망하지 말고 다음 기회를 포착할 태세를 갖추는  유연성을 가져라.

5. 기회 다음에 또 다시 기회가 있음을 잊지 말라. 하나의 기회를 포착했다고 안심해서도 안되며, 보다 향상하겠다는 의욕을  잃어서도 안 된다.

6. 곤궁과 환란 속에서도 기회를 발견하라. 실패 속에서도 가능성을 발견하며 힘든 상황도 기회로 활용해 보자.

7. 항상 마음의 준비가 여유가 있어야 한다. 늘 마음을 열어 놓고 느긋이 준비하고 있을 때 기회가 찾아온다.

8.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기회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9. 안될 것이라 생각하기보다는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적극주의자가 되야 수많은 기회들과 그것을 붙잡는 법을 발견할 수 있다.

10. 메모를 잘 활용해야 한다. 기회는 눈깜짝할 새 지나가 버리고 만다. 이를 마음 속에 잡아 두려면 메모를  잘 이용해야 한다. 자기 일에 몰두하면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건,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우리 아들 인물나네

어린시절, 어머니는 고향 마을 목화밭에서 채 피지 않아 버려진 목화를 이삭 줍듯 거두어왔습니다.

좋은 목화는 가을 수확기에 농가에서 모두 따 거둬들였지만, 그것은 늦가을의 된서리를 맞고 제대로 솜털이 피어나지 않아 버려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몇날 며칠 동안이나 밤을 지새우며 솜털을 탔고, 물레를 돌려 실을 자아냈습니다. 그리고 직접 베틀로 무명을 짜서 옷을 지었습니다. 처음부터 솜의 질이 좋지 않는 까닭에 무명천은 마치 삼베처럼 거칠었습니다.

설날이 되어도 아들에게 화려한 색동옷을 사 입힐 수 없었던 어머니는 비록 거친 옷이지만 직접 만들어서 물감을 곱게 들여 입혀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우리 아들 인물 나네!"

내가 입은 것은 단순한 무명옷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봉사 활동을 하느라 흙을 지게로 운반하는 시간에는 그 옷을 벗어 두었습니다. 어머니가 고생해서 만드신 옷이 해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벗은 몸으로 지게를 지고 흙을 나르다 보니 어깨에 피멍이 들고 상처가 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피명이 든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옷은 거칠고 등은 아팠어도 나는 행복한 아들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신 눈물이 씨줄이 되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날줄이 되어 죄인을 살리신 생명의 옷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얻은 이 구원이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지!

그 감격으로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 아들 인물 나네!"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 눈물을 먹은 마을 / 이중표

시련에서 맞서 싸워야 한다. ...이주연목사

올 한해도 역시 우리의 삶은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삶의 시련은 삶을 성장 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단을 주문합니다.

팅클리라는 분은 시련에 대하여 이러한 단상를 남겨 주었습니다.
당신이 직면하는 시련으로부터 피하거나 숨지 마십시오.
그것은 한낱 당신의 고뇌를 더해 줄 뿐 입니다.

우리는 두려워 말고 밀려오는 온갖 시련과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참 용기를 보게되고 두려움은 멀리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당당한 태도로 겁에 질린 원수들과 맞선다면 우리의 용기는 더욱 커질 것이며 또 우리의 여생의 닥쳐올 온갖 어려움과 맞서 이길수 있는 삶의 진리는 더욱 완벽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무서워 도망친다면, 그 해결되지 못한 고뇌들이 떼를 지어서 어느 날엔가 당신의 덜미를 잡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시련을 피하지 말고 우린 맞서야 합니다. 맞선다면 내일의 시련은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시련과 맞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패배할 때까지 더 많은 시련이 밀려 올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시련과 맞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9/04/2011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불순종한 죄입니다[행전7:17-36.]

백성들은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거스려 말한다는 이유로 스데반을 심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흥분하여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해 스데반은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임을 거침없이 선포합니다.

과거 애굽 시절, 바로 밑에서 힘든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이스라엘 가운데 모세가 나게 하시고, 기적적인 섭리를 통해 바로의 공주에게 양육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삼았느냐?’며 밀치며 완악하게 거부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조상들이 모세를 거부하고 거역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모세가 예표했던 참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또 다시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어리석음과 죄악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그 보내신 자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막무가내로 자기 고집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마음 중심에 모셔 들여서 그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일부터 지금 시작할 수 있기 바랍니다. 순종에서부터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조상들의 역사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죄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바로의 압제 하에 고난 받고 있던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를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리석게도 구원자인 모세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미디안 땅에서 더욱 단련하시고, 준비시키셔서 때가 되었을 때 다시 보내셔서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이 신실하신 구원의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자신들의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에게만 관심이 많고, 크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과 구원의 역사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 교회의 역사를 열심히 배움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 그 배운 역사대로 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열심을 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잘못된 편견과 고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나아가 거듭되는 영적인 침체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 8 : 26~ 40
*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27절) : 구약에서 ‘스바’라 불렸고(왕상 10:1), 애굽 남방 나일강 상류지방의 넓은 지역으로 구스 족속(사 11:11) 후손의 나라. 간다게는 국왕의 칭호임.

* 내시(28절) : 일반적으로 거세된 자라는 의미보다 국가관리의 직위였음.

빌립을 통하여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관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이 사건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져가는 상징과 같은 사건입니다. 복음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파되어가고 있습니까?

오직 성령의 인도함으로 이루어집니다.
복음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마리아를 뒤로 하고 광야로 내려가라는 성령님의 지시는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좀 할 만한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립 집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광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수레를 타고 가던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고관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다시 한 번 수레로 가까이 나아갈 것을 명하셨고, 이번에도 빌립은 순종하여 나아갑니다. 다른 민족, 다른 인종, 다른 신분, 다른 직업 등 차이점이 많았지만 성령님이 가라 하시니 자신을 부인하고 순종하여 나아간 것입니다. 그 결과, 빌립은 황량한 광야에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이 읽고 있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며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까지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잘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깨달은 말씀에 힘들더라도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복음에 접근할 때 이루어집니다. 
빌립의 전도 과정은 처음과 끝이 모두 상대방에게로 다가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먼저 광야로 내려갔고, 수레로 가까이 다가갔고, 상대방이 읽고 있던 그 책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하겠다 했을 때, 격식을 따지지 않고 그 현장에서 세례를 베풀어 그 믿음을 견고히 세워줍니다.

철저하게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빌립을 철저히 낮추셔서 에디오피아 고관의 눈높이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도우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이 여왕의 고관만이 아니라 훗날 에디오피아 온 나라에 전파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복음 전파가 힘든 이유는 성령에 민감하지 못하고, 한 영혼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그를 위해 그의 관점까지 우리가 철저히 낮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리고 빌립처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고 헌신하며 섬기는 역사가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삶의 현장에서 복음 역사가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출처:매일선교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