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나에게 지금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경고했던 모든 일이 말세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두려워 낙심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각처에서 일어날 지진에 대해 경고하셨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살아서 우리의 바로 눈앞에서 모든 종말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11절, “곳곳에 큰 지진”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머리를(눈을)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21:28).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놀라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그처럼 무시무시한 뉴스를 보거나 들으면 두려워 떱니다. 하지만 그때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고 그분이 우리 믿음의 주시며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분은 우리를 소망과 평강으로 결승점까지 이끌고 가실 것입니다.
오늘, 어떤 나쁜 소식이 당신의 영혼을 낙담하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눈을 들어 온전히 예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분은 아주 곧 오십니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히브리서 10:23).
6/01/2011
다가오는 폭풍 가운데 희망 (HOPE IN THE COMING STORM)
다윗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폭풍을 직면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명확한 묘사를 보여줍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사도행전 2:25).
이것을 직역하면 “내가 그분의 얼굴을 보며 항상 그분의 임재 안에 있었도다,”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2:26).
여기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항상 자신의 얼굴 앞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골방에 있기 위해 지속적으로 은밀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계신 후에야 자신의 아버지가 항상 자신과 함께 하신다고 온전히 설복하시고 사역하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그분이 나의 우편에 계시므로 이 지구상 어느 것도 나를 요동하게 하지 못한다.” 여기서 요동하다(move)의 헬라어는 “동요하는, 흔들리는, 불안한”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 악한 것들, 닥쳐오는 사건들, 그 어느 것도 나를 낙심하게 하거나 내 확신을 흔들 수 없다. 내 아버지께서 완전히 통제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우리가 다가오는 폭풍을 직면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영혼을 훼방하지 않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골방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은 온전히 설복할 때까지 우리의 무릎을 꿇고 그분의 임재를 연습하며 그분을 찾으며.
하나님은 명백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든지 요동하거나 동요하지 말라. 눈을 나에게 고정하라 그러면 너는 네 기쁨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다윗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렇게 증거 하셨습니다.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사도행전 2:28).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너희가 시간의 종말의 때에 직면하게 될 모든 것을 직면했다. 다가오는 폭풍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동일하게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내 아버지의 임재 안으로 달려갔고 그분이 나의 모든 염려를 거두어 가셨다.
그분이 이 일의 결과를 모두 나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나는 마지막 날 끝까지 내게 필요한 모든 기쁨, 소망과 안식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분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평강과 기쁨이 있다.”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2:26).
이것을 직역하면 “내가 그분의 얼굴을 보며 항상 그분의 임재 안에 있었도다,”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2:26).
여기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항상 자신의 얼굴 앞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골방에 있기 위해 지속적으로 은밀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계신 후에야 자신의 아버지가 항상 자신과 함께 하신다고 온전히 설복하시고 사역하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그분이 나의 우편에 계시므로 이 지구상 어느 것도 나를 요동하게 하지 못한다.” 여기서 요동하다(move)의 헬라어는 “동요하는, 흔들리는, 불안한”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 악한 것들, 닥쳐오는 사건들, 그 어느 것도 나를 낙심하게 하거나 내 확신을 흔들 수 없다. 내 아버지께서 완전히 통제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우리가 다가오는 폭풍을 직면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영혼을 훼방하지 않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골방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은 온전히 설복할 때까지 우리의 무릎을 꿇고 그분의 임재를 연습하며 그분을 찾으며.
하나님은 명백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든지 요동하거나 동요하지 말라. 눈을 나에게 고정하라 그러면 너는 네 기쁨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다윗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렇게 증거 하셨습니다.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사도행전 2:28).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너희가 시간의 종말의 때에 직면하게 될 모든 것을 직면했다. 다가오는 폭풍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동일하게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내 아버지의 임재 안으로 달려갔고 그분이 나의 모든 염려를 거두어 가셨다.
그분이 이 일의 결과를 모두 나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나는 마지막 날 끝까지 내게 필요한 모든 기쁨, 소망과 안식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분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평강과 기쁨이 있다.”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2:26).
그분은 전쟁을 쉬게 하십니다 (HE MAKES WARS TO CEASE)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시편 46:9).
영혼의 전투로 인해 부서지고 찢어진 하나님의 자녀에게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지요! 내 영혼의 전쟁은 그분의 전쟁이며 오로지 그분만이 끝낼 수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는 육이나 마귀가 나를 괴롭혀 내가 패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 전쟁은 야고보에 의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서 4:1). 이 정욕들은 탐욕, 자존심과 질투를 포함합니다.
전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은 동일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정욕의 전쟁이 내 생전에 과연 끝날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묻는 질문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까?
그에 대한 답변은, 물론, 이 전쟁은 끝나야만 하고, 끝날 것이며 이제껏 알지 못했던 가장 큰 평강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전쟁이 끝나며, 누가 끝을 냅니까? 그것이 만일 나의 전투이며 끝내는 것이 나의 의무라면 하나님이 나에게 방법을 보여주셔야만 합니다. 만약 그것이 진실로 그분의 전투이면,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끝내셔야만 하고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을 알므로 인내하도록 인내심을 주셔야만 합니다.
야고보가 사용한 헬라어는 stratenomai 인데 육적인 성향에 대항하는 전투, 전쟁에 임한 군인을 암시합니다. 이 말은 stratia 라는 어근에서 나왔는데 큰 무리, 군대 진영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우리를 대항하여 진을 친 무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육적인 성향들은 우리 마음을 두려움과 불신으로 공격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파선시키고자 우리를 잠식하고 혼란에 빠뜨리기로 작정한 군대, 사악한 무리입니다.
다윗이 시편 46:9에서 사용한 전쟁이란 말의 히브리 원어를 살펴보면, 매우 기뻐할 이유가 있게 됩니다. milchamah 는 ~을 먹고 살다, 소진하다, 게걸스레 먹다, 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이 실제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오로지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대적이 우리를 소진해버리고 우리를 삼키는 것을 중지시킬 것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정욕이 우리를 먹이로 삼거나 우리를 이기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욕의 전쟁을 그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이며 그분은 절대로 패하지 않으십니다.
영혼의 전투로 인해 부서지고 찢어진 하나님의 자녀에게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지요! 내 영혼의 전쟁은 그분의 전쟁이며 오로지 그분만이 끝낼 수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는 육이나 마귀가 나를 괴롭혀 내가 패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 전쟁은 야고보에 의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서 4:1). 이 정욕들은 탐욕, 자존심과 질투를 포함합니다.
전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은 동일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정욕의 전쟁이 내 생전에 과연 끝날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묻는 질문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까?
그에 대한 답변은, 물론, 이 전쟁은 끝나야만 하고, 끝날 것이며 이제껏 알지 못했던 가장 큰 평강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전쟁이 끝나며, 누가 끝을 냅니까? 그것이 만일 나의 전투이며 끝내는 것이 나의 의무라면 하나님이 나에게 방법을 보여주셔야만 합니다. 만약 그것이 진실로 그분의 전투이면,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끝내셔야만 하고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을 알므로 인내하도록 인내심을 주셔야만 합니다.
야고보가 사용한 헬라어는 stratenomai 인데 육적인 성향에 대항하는 전투, 전쟁에 임한 군인을 암시합니다. 이 말은 stratia 라는 어근에서 나왔는데 큰 무리, 군대 진영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우리를 대항하여 진을 친 무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육적인 성향들은 우리 마음을 두려움과 불신으로 공격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파선시키고자 우리를 잠식하고 혼란에 빠뜨리기로 작정한 군대, 사악한 무리입니다.
다윗이 시편 46:9에서 사용한 전쟁이란 말의 히브리 원어를 살펴보면, 매우 기뻐할 이유가 있게 됩니다. milchamah 는 ~을 먹고 살다, 소진하다, 게걸스레 먹다, 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이 실제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오로지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대적이 우리를 소진해버리고 우리를 삼키는 것을 중지시킬 것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정욕이 우리를 먹이로 삼거나 우리를 이기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욕의 전쟁을 그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이며 그분은 절대로 패하지 않으십니다.
가시관을 쓰시고 흘리신 보혈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짓눌려 씌워졌습니다. 가시관의 뾰족뾰족 솟은 가시가 주님의 머리와 이마를 사정없이 찔러서 피가 줄기줄기 흘러내렸습니다.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저주의 상징으로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번역하는 생각이 저주를 몰고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저주가 먼저 온 것이 아니고 잘못된 생각이 먼저 와서 저주를 이끌어 오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 환경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우리의 생각부터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시사 잘못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이 땅의 저주를 속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생각은 온 세계에 평화와 축복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 땅의 가시와 엉겅퀴가 부정적인 생각과 열등의식과 좌절감 등 잘못된 생각들을 가시관을 쓰시고 흘리신 보혈로 제하셔서, 들에 나가면 들이 복을 받고, 집에 들어오면 집이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을 만지면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으며 짐승의 새끼가 복을 받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아니하며 남에게 꾸어 주는 축복을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무려 32,500가지의 축복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흘리신 보혈은 저주에서 씻음을 받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축복을 다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얽매고 있는 저주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지금 곧 예수님의 가시관을 쓰신 모습을 상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이마에서 흘리신 피를 보십시오. 여러분의 저주를 묶어 버리고 여러분을 축복 속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주님이 흘리신 보혈입니다. 이 보혈을 의지하고 믿기만 하면 여러분은 이미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리라”(잠언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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