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4/2011

아브라함을 통해 비춰진 부모의 모습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가운데 가정을 주시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을까요?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비쳐지는 성부 하나님의 모습과 이삭을 통해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육신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살펴보며 육신의 아버지로서의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정말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도 아셨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까요?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젖 먹는 자기 자식을 잊겠느냐?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잊지 않겠다.” 그러면서 우리를 자신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것을 발견하지만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서 아들을 향한 희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생각하면 희생을 떠올립니다. 이 희생을 생각하면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셨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는 아브라함을 통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또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기 위해 갔지만 우리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이삭에게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부모의 믿음을 보고 자녀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말로 자녀를 양육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에 대한 믿음과 순종에 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가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순종하며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복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은혜와 복을 받는 길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더라도 순종할 때 은혜와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목동제일교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9 : 1~ 9
* 다메섹(2절) : 예루살렘으로부터 240Km 떨어져 있음. 바울은 핍박을 피하여 온 자들을 뿌리를 뽑을 작정으로 이곳까지 감.

다소 사람 바울의 회심은 교회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그의 회심을 계기로 교회사는 ‘이방인 선교’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만나주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어떠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회심 장면은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열성적 찬성자였고, 예루살렘 교회의 적극적 핍박자였던 바울입니다.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이유도 도망친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아 교회에 결정적 타격을 주고, 어떻게든 복음 확산을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얼마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열심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사울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최대의 위험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울의 거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거부할 수 없는 빛과 부르심을 통해 바울이 예수님과 스데반의 거룩한 순교의 모습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셨습니다.

비록 교회의 핍박자요, 성도들의 원수일지라도 주님은 바울 역시 복음이 필요한 한 영혼으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되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먼저 우리를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구속해주시는 무조건적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인격적인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권적인 은혜이지만 강제적인 은혜는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의 회심 사건은 강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바울의 회심 사건은 너무나도 인격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거부할 수 없는 빛과 소리로 임하셔서 그를 엎드러지게 하셨지만 사울의 인격 자체를 침해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사울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도록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질문하심으로 그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십니다. 이에 대해 사울 역시 ‘주여 뉘시오니이까?’ 하고 대답하며 인격적으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를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속박하는 것은 죄의 세력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존중하시고, 인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특별한 체험이나 드라마틱한 간증거리가 있어야만 은혜가 아닙니다. 매일 아침 조용한 음성으로 직접 우리의 내면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바로 그 하나님의 방식 그대로 인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의 온 마음과 뜻, 정성을 다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

사도행전 10 : 17 ~ 33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심으로 이방인 구원이라는 새로운 선교의 지평을 여셨습니다. 이들의 만남을 볼 때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고넬료와 베드로는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는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하셨고 베드로에게는 고넬료라는 이방인을 만나 그를 구원하라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고넬료와는 다르게 베드로는 쉽게 그 메시지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환상을 본 후 에 고민하다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고서야 하나님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28~29절).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환상을 기대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한다면 성경을 골똘히 묵상하고,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도 가운데서 묵상할 때 주변상황의 변화, 내적인 확신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본 후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 고민했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일어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즉각적으로 순종했고,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결국에 순종하였습니다.
순종은 쉽지 않습니다. 정복자 고넬료가 별로 유명하지도 않는 유대인 베드로를 초청하는 것,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는 것, 모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의 결과입니다. 사역의 현장에 열매가 없는 이유는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없는 곳에서는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 사역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사결정과 행동의 이유가 무엇인지,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세상의 요구, 육체의 요구에 따른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인지. 순종한대로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육체의 열매를 거둘 수도 있고, 성령의 열매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순종을 할 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열매를 얻게 됩니다.

출처:매일선교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