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2009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그리스도의 재림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록 6장의 흰 말 탄자와 계12장의 흰 탄자는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일곱 인으로 봉한 책 가운데 첫째 인을 떼실 때, 네 생물중에 하나가 천둥 같은 소리로 ‘와서 보라’ 고 하였다. 그때에 요한이 보니 흰 말 한 마리가 있고 그 위에 말 탄자가 활을 가지고 또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였다. 4대 병마 가운데 붉은 말은 전쟁 검은 말은 기근, 청황색 말은 사망이라는 데는 의가 없다 .그러나 흰 말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그 해석의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주석저서 70권(국내40 국외30권)을 수집하여 비교대조 연구한 결과 흰 말을 그리스도 및 복음 운동으로 보는 견해는 34%이고 적그리스도로 보는 견해가24%였다. 이 흰 말이 예수님인데 적그리스도라고 한다든지 그와 반대로 적그리스도인데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대한 정답은 우선 원어상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하고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바로 적용시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1. 먼저 스가랴6장의 흰 말 탄자와 계6장의 흰 말 탄자를 같은 사건으로 보면 안된다. 이것은 외형적(흰말)으로만 같을 뿐이지 그 내용상으로는 전혀 다르다. 다음과 같이 도표로 구분 하였다.
내용 스가랴5장 게시록6장 1 말의 출처 두 놋산 사이 어린 양이 첫째 인을 떼실 때 2 말의 수 백마들(복수) 한 마리 말 3 말의출동 자동적이다 피동적이다.생물이 ‘오라’고 외칠때 4 말의 사역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함 하나님의 심판(재난) 5 말의 방향 북방(흑마가 뒤를따름) 방향이 없고 적마가 뒤를 따름 6 말 탄 자 없음 말 탄자가 활을가지고 면류관이 있음 7 배 경 과거사건(이루어진 예언) 미래사건(미래에 이루어질 사건) 위에 나타나 있는 대로 단지 ‘희다’ 는 것 외에는 같은 점이 없다. 그러므로 슥6장의 흰 말과 맞추어 계 6장의 흰 말 탄자를 그리스도의 승리로 보는 견해는 지나친 오류라고 지적한다.
2. 계6장의 흰말탄자와 계19장의 흰 말탄자를 같은 사건으로 보아도 안된다. 그러나 이경우도 단지 흰 말이라는 것 외에는 동일한 점이 없다. 사탄은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데 선수이다.(고전11장14절) 뱀은 사탄 마귀를 가리키지만(계12장9) 구약의 광야 뱀은 정반대로 예수님을 가리켰다.(요3:14)계6장의 적그리스도9짐승)가 흰 말을 탔다는 이유 때문에 계19장의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상징적인 비유에서 상반되어 진리를 정각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인 것이다. 다음 도표에 계6장과 계19장을 비교, 대조 하여보았다.
내용 계시록6장의 흰 말 탄자 계시록19장의 흰 말 탄자 1 이름 없음 신실과 진실 2 모습 눈이 없음 불꽃같은 눈이 있음 3 복장 복장이 없음 피에 적신 옷 4 상급 면류관(단수) 많은 왕관(복수) 5 무기 살 없는 활 한 검 6 부하 추종자가 없음 백마 부대가 뒤를 따름 7 승리방법 이기려고 하더라(불확실) 단번의 승리 8 표상 상징 실제(예언의 성취) 9 시기 일곱 인이 시작한 때 일곱째 나팔이 지난 후 10 목적 많은 사람들을 기만해서 죽임 천년 왕국 건립
3. 복음과 예언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마24장은 예수님의 종말 교훈으로 일명 소계시록 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와 계시록의 순서는 정확하게 일치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음 도표와 같다- 인 요한계시록(예언서) 마태복음(복음서)
1. 6:2 흰 말 24:5 적그리스도
2. 6:4 붉은 말 24:6 전쟁
3. 6:5 검은 말 24:7 기근
4. 6:8 청황색 말 24:9 사망
5. 6:9-11 순교자의 호소 24:10 순교
6. 6:12-17 어린 양의 진노의 날 24:29-31 그리스도의 재림
7. 8:1 반시 동안 고요함 24:32-33 무화가 나무를 배우라
4. 말씀의 순서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을 때 하나님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쓰고 일곱 인으로 봉한 백을 하늘에서나 땅 아래서나 아무도 뗄 사람이 없으므로 크게 울었다(계5:1-4)그리고계6장에 와서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셨다. 그때 네 생물중 하나가 천둥 같은 소리 같은 큰 소리로 오라고 외칠 때 요한이 보니 흰 말 한 마리와 그 말을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했다.(계6:1-2)
무슨 말인가 바로 성도를 짓밟고 또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대적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우주의 대주재자시오, 심판의 주권자이시다. 지금 그 분께서 일곱 인 중에 첫 인을 떼신 것이다. 그때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리 소리 같이 ‘오라‘고 외쳤다. 만일 흰 말 탄자가 예수님 이라고 한다면 문맥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판의 진행에 있어서 일대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예수님이 인을 떼시는 주권자이신데 어떻게 네 생물일 외치는 말에 순종하여 흰 말을 타고 출동하시는가? 하나님의 계시 체계에 이러한 혼선의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질서 정연하다. 즉 하나님--그리스도--천사--요한--일곱교회--천사(계1:1) 이러한 순으로 계시가 진행된다. 흰 말 탄자가 예수님 이라고하면 계시의 순서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흰 말 탄자는 적그리스도가 분명하다. 어린 양 - 인을 떼시는 분 네 생물 - 심판의 수종자 흰 말 - 심판의 도구(적그리스도)
5. 계시록은 반드시 다니엘서와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 다니엘서의 구약에서의 위치는 신약에서의 위치와 동일하다. 더욱 계시록은 다니엘서를 보충하여 완성시키면서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1260일(계11:3,12:6) 42달(계13:5) 한 때 두 때 반 때 (계12:14)등은 다니엘서에 근거 하지 않으면 바른 해석을 할 수가 없다. 이 일수는 다니엘 70이레 예언 가운데 남은 ‘한 이레’(7년)의 절반 (1260일)에 해당하는 일수이다.(단9:27,7:25,11)70이레 가운데 69이레는 이미 정확하게 성취되었고 남은 한 이레(7년)의 예언이 남았는데 A.D70년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불태운 티도장군(TITUS)와 같은 그가(적그리스도가)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로 출연하여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7년 조약을 굳게 체결하게 되면 마지막 한 이레가 시작되면서 교회의 무서운 박해가 시작된다. 여기서 단9:27을 그가(HE) 바로 계6:2절의 흰 말 탄자이다. 여기서 6:2절의 흰 말 탄자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은 단9:27도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문맥상으로 깊이 연구하면 그는 적그리스도인 것이 분명해진다. (70이레의 해석 참조)
6.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3-4)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지 아노라(요일2:18) 위의 성구들이 밝힌 대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기 전에 먼저 세계적인 배도가 일어난다. 이 배도의 주동자는 적그리스도이다. 이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어린 양이 인을 떼실 때에 흰 말의 출현은 곧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흰 말 뒤에 나타나는 붉은 말9전쟁) 검은 말(기근) 창백한 말(사망)등으로 땅의 4분의1이 피해를 입는 것은 바로 흰말 곧 적그리스도에 의해서 나타나는 종말의 현상인 것이다. 혹자는 흰 말을 복음의 승리 또는 두 증인의 사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흰 말의 뒤를 따라 나타나는 위의 현상들은 복음과 상반되어지기 때문에 받아드려지지 않는다.
7. 마지막으로 원어의 해석이 적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 지나친 영해와 상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원 뜻을 잘못 해석하는 위험을 방지하는 일과 난해 해석 등은 원어에 의존하는 길 밖에 없다. 구약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에는 한 단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고유번호가 있다. 그리고 그 단어에는 성性과 시제 품성등이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나타나있다. 하나님이 지상의 언어 가운데 이 두 언어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시록에 잇는 많은 상징들을 해석할 때 원문을 무시하는 경향들이 있기 때문에 오류에 빠지는 일이 허다하다. 계6:1-2벌의 헬라어 원문을 바로 해석하면 한사람도 흰 말 탄자를 (계6:2) 계시록 19:11과 짝 맞추어서 그리스도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원문 해석을 반대할 자도 있지 못 할 것이다. 이것은 말씀자체가 증거하는 권위인 것이다.
(1)흰 말 탄 자가 가진 활 활은 심판의 도구가 아니다. 흰 말 탄자가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그 손에는 마땅히 활이 아니라 검을 들어야 한다(계2:12) 진짜 흰 말 타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시는 눈이 불꽃같은 충신과 진실의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계6장의 흰 말 탄자는 활은 기만의 화살이 분명하다.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호7:16) ‘저희 열조 같이 배반하고 궤사를 행하여 속이는 활같이 빗나가서(시78:57)
(2)흰 말 탄자가 받는 면류관 계시록 19장과 짝을 지어서 여기 흰 말 탄자가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그 면류관이 동일해야한다. 그런데 원문에는 동일하지 않으니 동일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계6:2절에 나오는 흰 말탄자의 면류관은 운동경기에서 이긴 자가 쓰는 월계관(즉 ‘스테파노스“)이고 계19:12의 면류관은 임금이 쓰시는 왕관 즉 ‘디아데마타’이다. 계시록 6:2절과19:12를 동일한 면류관으로 번역한 것은 크나큰 오류이다. 공동변역에도 원문대로 월계관(CROWN)과 (DIADEM)으로 구분 하였다. 또 한 계6:2절의 면류관은 단수이며 19:12절의 면류관은 복수이다. 우리 예수님의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다. 만왕의 왕이시며 창조주이시며 평강의 왕 공의의 왕등 수많은 왕이시다 그러나 6:2절의 면류관은 단수이다. 계6:2 면류관 ‘스테파노스’단수, 화관 - 적그리스도 계19:12 면류관 ‘디아데마타’복수 완관들 - 예수님
(3)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니콘 카이 히나 니케-세) ‘니콘‘은 승리하다를 뜻하는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그리고 ’니케세‘는 이기다의 제1 부정과거 능동태 가정법이다. 즉 한 번은 이기었으나 그 다음은 불확실하다. 이 구절이 예수님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승리는 ‘에니케센’이다(계5:5) 이 말은 ‘이기다’ 를 뜻 하는 제1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며 이것은 과거에 단번데 이기신 결과적 승리를 뜻 한다. 예수님의 승리는 과거 단 1회적인 위대한 결정적 승리이다. 이제 활을 들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는 불확실한 미래사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단번의 승리요 그 승리는 영원한 완전승리이다, 그 분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시다. 이제 곧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심판의 책을 인수하여 영광의 구름을 타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승리의 왕이시다. 손에 활을 들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 없어징 월계관을 쓰고 이제 이기고 또 이기시려고 하는 세상의 정복자가 아니시다.
(4)‘그들의’ 땅 4분의 1의 권세 오늘까지 많은 계시록 해석자들은 원어상의 해석을 무시하고 자기 주관적 해석이나 외국의 번역에만 의존하여 땅 4분의 1에게는 청황색 말에게만 국한된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네 병거 (흰 말,붉은 말,검은 말 ,청황색 말) 에 주어진 권세를 의미한다. 뉴톰슨 관주 주석에는 이것을 바르게 해석하였다. (P405) '저희가 땅 4분의 1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계6:8) 이 때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은 모두 단수인데 ‘저희’표준어 번역에는 ‘그들‘ 복수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땅의4분의 1의 권세가 네 병거를 해석하여 준다. 전쟁의 붉은 말, 흉년의 검은 말,사망의 청황색 말, 땅의 짐승은 곧 적그리스도이다. 계시록에 나타난 짐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를 뜻 한다.(계13:1,17 19:20)
(5)상징과 실상을 혼동하면 우상이 된다. 성경에는 많은 상징과 비유가 있다. 상징은 실상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을 해석할 때 상징을 실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상징과 실상을 바로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성경 해석상의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 실상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되 상징은 그속에 있는 영적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많은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6장의 흰 말은 상징이고 19장의 흰 말은 실제이다. 성경에서 흰 색은 언제나 거룩하고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승리를 뜻하였다. 흰 세마포(계6:11) 흰 구름(계14:14) 흰 보좌(계20:11)흰 돌(2:17)흰 두루마기(계6:11)흰 옷(계3:4)이것들은 모두 예수님의 거룩성과 관계있다. 뱀은 사단을 상징하지만 이스라엘 광야에서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셨다. 이때 모세가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지시하고 불뱀에 물린 자는 누구든지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였다.
(민21:9) 놋 뱀은 먼 훗날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수님의 모형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든은 이 상징이 되는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먼 훗날까지 놋으로 만든 뱀을 만들어 예배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이해하지 못하면 멸망당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깨달았더라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였을 것이다. 히스기야왕이 즉위하자 그때까지 이스라엘이 신으로 예배하던 놋뱀 우상을 모두 부수고 ‘느후스단’ 이라고 하였다.
(왕하18:4)‘느후스단’은 놋조각 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놋뱀의 상징적인 의미를 바로 정각하지 못한 까닭에 하나의 놋조각에 불과한 ‘느후스단’을 신으로까지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놋뱀의 놋조각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겨 여러 신당에서 아세라 목상과 함께 ‘느후스단’ 우상을 만들어 경배 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서 산당으로 방황하는 자 가운데는 영적 미숙 단계에서 진리의 실상과 상징을 혼동하여 ‘느후스단’ 우상에서 경배하는 자가 허다함을 각성하고 산당의 우상을 모두 부수고 성전 예배로 돌아와서 진리를 바로 깨닫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될 것이다.
계시록 6장의 흰 말 탄자와 계12장의 흰 탄자는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일곱 인으로 봉한 책 가운데 첫째 인을 떼실 때, 네 생물중에 하나가 천둥 같은 소리로 ‘와서 보라’ 고 하였다. 그때에 요한이 보니 흰 말 한 마리가 있고 그 위에 말 탄자가 활을 가지고 또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였다. 4대 병마 가운데 붉은 말은 전쟁 검은 말은 기근, 청황색 말은 사망이라는 데는 의가 없다 .그러나 흰 말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그 해석의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주석저서 70권(국내40 국외30권)을 수집하여 비교대조 연구한 결과 흰 말을 그리스도 및 복음 운동으로 보는 견해는 34%이고 적그리스도로 보는 견해가24%였다. 이 흰 말이 예수님인데 적그리스도라고 한다든지 그와 반대로 적그리스도인데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대한 정답은 우선 원어상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하고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바로 적용시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1. 먼저 스가랴6장의 흰 말 탄자와 계6장의 흰 말 탄자를 같은 사건으로 보면 안된다. 이것은 외형적(흰말)으로만 같을 뿐이지 그 내용상으로는 전혀 다르다. 다음과 같이 도표로 구분 하였다.
내용 스가랴5장 게시록6장 1 말의 출처 두 놋산 사이 어린 양이 첫째 인을 떼실 때 2 말의 수 백마들(복수) 한 마리 말 3 말의출동 자동적이다 피동적이다.생물이 ‘오라’고 외칠때 4 말의 사역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함 하나님의 심판(재난) 5 말의 방향 북방(흑마가 뒤를따름) 방향이 없고 적마가 뒤를 따름 6 말 탄 자 없음 말 탄자가 활을가지고 면류관이 있음 7 배 경 과거사건(이루어진 예언) 미래사건(미래에 이루어질 사건) 위에 나타나 있는 대로 단지 ‘희다’ 는 것 외에는 같은 점이 없다. 그러므로 슥6장의 흰 말과 맞추어 계 6장의 흰 말 탄자를 그리스도의 승리로 보는 견해는 지나친 오류라고 지적한다.
2. 계6장의 흰말탄자와 계19장의 흰 말탄자를 같은 사건으로 보아도 안된다. 그러나 이경우도 단지 흰 말이라는 것 외에는 동일한 점이 없다. 사탄은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데 선수이다.(고전11장14절) 뱀은 사탄 마귀를 가리키지만(계12장9) 구약의 광야 뱀은 정반대로 예수님을 가리켰다.(요3:14)계6장의 적그리스도9짐승)가 흰 말을 탔다는 이유 때문에 계19장의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상징적인 비유에서 상반되어 진리를 정각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인 것이다. 다음 도표에 계6장과 계19장을 비교, 대조 하여보았다.
내용 계시록6장의 흰 말 탄자 계시록19장의 흰 말 탄자 1 이름 없음 신실과 진실 2 모습 눈이 없음 불꽃같은 눈이 있음 3 복장 복장이 없음 피에 적신 옷 4 상급 면류관(단수) 많은 왕관(복수) 5 무기 살 없는 활 한 검 6 부하 추종자가 없음 백마 부대가 뒤를 따름 7 승리방법 이기려고 하더라(불확실) 단번의 승리 8 표상 상징 실제(예언의 성취) 9 시기 일곱 인이 시작한 때 일곱째 나팔이 지난 후 10 목적 많은 사람들을 기만해서 죽임 천년 왕국 건립
3. 복음과 예언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마24장은 예수님의 종말 교훈으로 일명 소계시록 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와 계시록의 순서는 정확하게 일치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음 도표와 같다- 인 요한계시록(예언서) 마태복음(복음서)
1. 6:2 흰 말 24:5 적그리스도
2. 6:4 붉은 말 24:6 전쟁
3. 6:5 검은 말 24:7 기근
4. 6:8 청황색 말 24:9 사망
5. 6:9-11 순교자의 호소 24:10 순교
6. 6:12-17 어린 양의 진노의 날 24:29-31 그리스도의 재림
7. 8:1 반시 동안 고요함 24:32-33 무화가 나무를 배우라
4. 말씀의 순서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을 때 하나님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쓰고 일곱 인으로 봉한 백을 하늘에서나 땅 아래서나 아무도 뗄 사람이 없으므로 크게 울었다(계5:1-4)그리고계6장에 와서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셨다. 그때 네 생물중 하나가 천둥 같은 소리 같은 큰 소리로 오라고 외칠 때 요한이 보니 흰 말 한 마리와 그 말을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했다.(계6:1-2)
무슨 말인가 바로 성도를 짓밟고 또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대적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우주의 대주재자시오, 심판의 주권자이시다. 지금 그 분께서 일곱 인 중에 첫 인을 떼신 것이다. 그때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리 소리 같이 ‘오라‘고 외쳤다. 만일 흰 말 탄자가 예수님 이라고 한다면 문맥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판의 진행에 있어서 일대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예수님이 인을 떼시는 주권자이신데 어떻게 네 생물일 외치는 말에 순종하여 흰 말을 타고 출동하시는가? 하나님의 계시 체계에 이러한 혼선의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질서 정연하다. 즉 하나님--그리스도--천사--요한--일곱교회--천사(계1:1) 이러한 순으로 계시가 진행된다. 흰 말 탄자가 예수님 이라고하면 계시의 순서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흰 말 탄자는 적그리스도가 분명하다. 어린 양 - 인을 떼시는 분 네 생물 - 심판의 수종자 흰 말 - 심판의 도구(적그리스도)
5. 계시록은 반드시 다니엘서와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 다니엘서의 구약에서의 위치는 신약에서의 위치와 동일하다. 더욱 계시록은 다니엘서를 보충하여 완성시키면서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1260일(계11:3,12:6) 42달(계13:5) 한 때 두 때 반 때 (계12:14)등은 다니엘서에 근거 하지 않으면 바른 해석을 할 수가 없다. 이 일수는 다니엘 70이레 예언 가운데 남은 ‘한 이레’(7년)의 절반 (1260일)에 해당하는 일수이다.(단9:27,7:25,11)70이레 가운데 69이레는 이미 정확하게 성취되었고 남은 한 이레(7년)의 예언이 남았는데 A.D70년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불태운 티도장군(TITUS)와 같은 그가(적그리스도가)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로 출연하여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7년 조약을 굳게 체결하게 되면 마지막 한 이레가 시작되면서 교회의 무서운 박해가 시작된다. 여기서 단9:27을 그가(HE) 바로 계6:2절의 흰 말 탄자이다. 여기서 6:2절의 흰 말 탄자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은 단9:27도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문맥상으로 깊이 연구하면 그는 적그리스도인 것이 분명해진다. (70이레의 해석 참조)
6.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3-4)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지 아노라(요일2:18) 위의 성구들이 밝힌 대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기 전에 먼저 세계적인 배도가 일어난다. 이 배도의 주동자는 적그리스도이다. 이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어린 양이 인을 떼실 때에 흰 말의 출현은 곧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흰 말 뒤에 나타나는 붉은 말9전쟁) 검은 말(기근) 창백한 말(사망)등으로 땅의 4분의1이 피해를 입는 것은 바로 흰말 곧 적그리스도에 의해서 나타나는 종말의 현상인 것이다. 혹자는 흰 말을 복음의 승리 또는 두 증인의 사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흰 말의 뒤를 따라 나타나는 위의 현상들은 복음과 상반되어지기 때문에 받아드려지지 않는다.
7. 마지막으로 원어의 해석이 적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 지나친 영해와 상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원 뜻을 잘못 해석하는 위험을 방지하는 일과 난해 해석 등은 원어에 의존하는 길 밖에 없다. 구약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에는 한 단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고유번호가 있다. 그리고 그 단어에는 성性과 시제 품성등이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나타나있다. 하나님이 지상의 언어 가운데 이 두 언어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시록에 잇는 많은 상징들을 해석할 때 원문을 무시하는 경향들이 있기 때문에 오류에 빠지는 일이 허다하다. 계6:1-2벌의 헬라어 원문을 바로 해석하면 한사람도 흰 말 탄자를 (계6:2) 계시록 19:11과 짝 맞추어서 그리스도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원문 해석을 반대할 자도 있지 못 할 것이다. 이것은 말씀자체가 증거하는 권위인 것이다.
(1)흰 말 탄 자가 가진 활 활은 심판의 도구가 아니다. 흰 말 탄자가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그 손에는 마땅히 활이 아니라 검을 들어야 한다(계2:12) 진짜 흰 말 타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시는 눈이 불꽃같은 충신과 진실의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계6장의 흰 말 탄자는 활은 기만의 화살이 분명하다.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호7:16) ‘저희 열조 같이 배반하고 궤사를 행하여 속이는 활같이 빗나가서(시78:57)
(2)흰 말 탄자가 받는 면류관 계시록 19장과 짝을 지어서 여기 흰 말 탄자가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그 면류관이 동일해야한다. 그런데 원문에는 동일하지 않으니 동일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계6:2절에 나오는 흰 말탄자의 면류관은 운동경기에서 이긴 자가 쓰는 월계관(즉 ‘스테파노스“)이고 계19:12의 면류관은 임금이 쓰시는 왕관 즉 ‘디아데마타’이다. 계시록 6:2절과19:12를 동일한 면류관으로 번역한 것은 크나큰 오류이다. 공동변역에도 원문대로 월계관(CROWN)과 (DIADEM)으로 구분 하였다. 또 한 계6:2절의 면류관은 단수이며 19:12절의 면류관은 복수이다. 우리 예수님의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다. 만왕의 왕이시며 창조주이시며 평강의 왕 공의의 왕등 수많은 왕이시다 그러나 6:2절의 면류관은 단수이다. 계6:2 면류관 ‘스테파노스’단수, 화관 - 적그리스도 계19:12 면류관 ‘디아데마타’복수 완관들 - 예수님
(3)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니콘 카이 히나 니케-세) ‘니콘‘은 승리하다를 뜻하는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그리고 ’니케세‘는 이기다의 제1 부정과거 능동태 가정법이다. 즉 한 번은 이기었으나 그 다음은 불확실하다. 이 구절이 예수님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승리는 ‘에니케센’이다(계5:5) 이 말은 ‘이기다’ 를 뜻 하는 제1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이며 이것은 과거에 단번데 이기신 결과적 승리를 뜻 한다. 예수님의 승리는 과거 단 1회적인 위대한 결정적 승리이다. 이제 활을 들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는 불확실한 미래사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단번의 승리요 그 승리는 영원한 완전승리이다, 그 분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시다. 이제 곧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심판의 책을 인수하여 영광의 구름을 타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승리의 왕이시다. 손에 활을 들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 없어징 월계관을 쓰고 이제 이기고 또 이기시려고 하는 세상의 정복자가 아니시다.
(4)‘그들의’ 땅 4분의 1의 권세 오늘까지 많은 계시록 해석자들은 원어상의 해석을 무시하고 자기 주관적 해석이나 외국의 번역에만 의존하여 땅 4분의 1에게는 청황색 말에게만 국한된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네 병거 (흰 말,붉은 말,검은 말 ,청황색 말) 에 주어진 권세를 의미한다. 뉴톰슨 관주 주석에는 이것을 바르게 해석하였다. (P405) '저희가 땅 4분의 1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계6:8) 이 때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은 모두 단수인데 ‘저희’표준어 번역에는 ‘그들‘ 복수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땅의4분의 1의 권세가 네 병거를 해석하여 준다. 전쟁의 붉은 말, 흉년의 검은 말,사망의 청황색 말, 땅의 짐승은 곧 적그리스도이다. 계시록에 나타난 짐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를 뜻 한다.(계13:1,17 19:20)
(5)상징과 실상을 혼동하면 우상이 된다. 성경에는 많은 상징과 비유가 있다. 상징은 실상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을 해석할 때 상징을 실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상징과 실상을 바로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성경 해석상의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 실상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되 상징은 그속에 있는 영적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많은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6장의 흰 말은 상징이고 19장의 흰 말은 실제이다. 성경에서 흰 색은 언제나 거룩하고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승리를 뜻하였다. 흰 세마포(계6:11) 흰 구름(계14:14) 흰 보좌(계20:11)흰 돌(2:17)흰 두루마기(계6:11)흰 옷(계3:4)이것들은 모두 예수님의 거룩성과 관계있다. 뱀은 사단을 상징하지만 이스라엘 광야에서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셨다. 이때 모세가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지시하고 불뱀에 물린 자는 누구든지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였다.
(민21:9) 놋 뱀은 먼 훗날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수님의 모형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든은 이 상징이 되는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먼 훗날까지 놋으로 만든 뱀을 만들어 예배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이해하지 못하면 멸망당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깨달았더라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였을 것이다. 히스기야왕이 즉위하자 그때까지 이스라엘이 신으로 예배하던 놋뱀 우상을 모두 부수고 ‘느후스단’ 이라고 하였다.
(왕하18:4)‘느후스단’은 놋조각 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놋뱀의 상징적인 의미를 바로 정각하지 못한 까닭에 하나의 놋조각에 불과한 ‘느후스단’을 신으로까지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놋뱀의 놋조각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겨 여러 신당에서 아세라 목상과 함께 ‘느후스단’ 우상을 만들어 경배 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서 산당으로 방황하는 자 가운데는 영적 미숙 단계에서 진리의 실상과 상징을 혼동하여 ‘느후스단’ 우상에서 경배하는 자가 허다함을 각성하고 산당의 우상을 모두 부수고 성전 예배로 돌아와서 진리를 바로 깨닫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될 것이다.
자아를 버려라
자아를 버려라 A. W. 토저 씀 / 이용복 옮김
자아중심적인 삶과 침례 ‘인간의 악하고 교만하고 도착적(倒錯的)인 본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라는 문제를 놓고 기독교 안에서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 한 가지 입장은 심리학과 정신의학에 많이 의존한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자아와 이기심과 교만과 도착성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의 꾸지람 때문에 생긴 강박관념과 왜곡된 개념을 처리함으로써 인간관계 등의 삶을 질을 개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목양자들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신경정신과로 보내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옵게도 기독교 안에는 또 다른 입장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아를 교육하고 관용하고 세련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아를 끝장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성경의 교훈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자연적 자아와 교만을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바하와 베토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의 교만한 자아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은 자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는 치료법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한 구절로 요약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의 삶에서 요구되는 결단이요 믿음과 헌신의 태도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아와 자기중심주의와 교만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해서 우리는 우리의 자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제 너는 끝장났다. 너는 폐위(廢位)되었다. 너는 더 이상 지배권을 휘두를 수 없다.” 참된 회개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자아 중심적 삶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것과 어울리는 삶을 거부할 수 있다.
자아를 거부하고 회개하라! 그러면 자아에게 지배당하는 나라에서 도망하여 임마누엘의 나라로 넘어가 영적 승리와 복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기 아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아직도 문제를 일으키는 옛 사람, 즉 자아 중심적 옛 생활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다. 침례가 이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금 우리가 행하는 침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물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혹은 물에 젖은 손을 머리에 잠시 얹는 의식으로 전락해버렸다.
많은 사람은 내면에 일어난 영적 변화를 가시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침례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라. 침례는 이기적이고 도착적(倒錯的)인 인간의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상징한다. 성도에게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 가운데 그분과 함께 다시 산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침례의 본질적 의미이다. 결혼반지가 결혼을 증거하고 상징하듯이 물 침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옛 자아를 완전히 멸하라 자아의 옛 본성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입장을 양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두 입장을 조화시켜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하나는 우리의 자아를 끝장내고 영적 승리를 통해 새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 자아를 헝겊 조각을 붙여서 그것을 수선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영적으로 승리하고 복음 얻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접근법은 당신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공동체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사람의 인격과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실 때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의 모든 공동체와 협의회와 단체 안에서 동일하게 그것을 이루신다. 그것이 무엇이라 불리든 상관없이 말이다. 자아의 옛 생명에 헝겊 조각을 붙여서 수선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신약은 인간의 옛 자아를 완전히 멸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가르친다.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할지라도 옛 자아의 지혜는 거짓된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 안에는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새로운 자아, 즉 그리스도 안에 새 사람만이 살아야 한다.
이런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산 자로 여겨야 한다. 그러나 ‘나’, ‘나 자신’, ‘나를’ 위주의 자연적 자아는 죄악으로 가득한 과거를 잊으려고 애쓰면서 끊임없이 옛 것에 집착한다. 자연적 자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변화하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초대한 발전시키려고 발버둥친다.
인간은 창조 때에 부여받은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에 좌절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주신 재능을 우리가 이 땅에서 충분히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뜻을 담은 청사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창조하셨다. 우리 각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미래상이 널리 펼쳐져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삶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들의 청사진의 한가운데에는 비바람만 겨우 피할 수 있는 작은 오두막 한 채가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힘들게 발버둥 친 후에는 그 옆에 헛간 하나만 달랑 보태진다.
인간적인 노력을 아무리 기울이더라도 빈 공간은 채워지지 않는다. 자신의 인간적 본성이 몸부림치도록 내버려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담도 완성되고, 대문도 세워졌습니다. 지붕은 흠 하나 없이 완벽합니다. 정말로 완전한 집이 탄생했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과 사고력과 창조력이 어느 정도인지 깊이 연구해보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능력과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지 않는다면, 아직도 그들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한 것이다.
잠재의식 속의 욕구 인간은 자기의 가능성을 완전히 발휘하여 꿈이나 목표를 이루려는 욕구를 잠재의식 속에 가지고 있다. 이것은 충만하고 완전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욕구로서, 종종 과거로부터 도피해서 확신 가운데 미래에도 도전하고 싶어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욕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 마음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꿈과 희망에 부응하는 것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자기들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확실히 아는 것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것이 자기들에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아를 지탱해줄 다양한 보조 장치에 의지하고, 교만에 영양분을 공급하며, 자신의 명백한 결점을 숨긴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계속 받으면,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과 실제 인격 사이의 간격이 좁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상을, 또 다른 이는 문화를 의지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조상의 혈통과 자연환경과 가정환경에 의지하여 인간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조상을 자랑하고 목에 힘을 주면서 국가나 문화의 우월성을 내세운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인종적, 문화적, 교육적 우월성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내 본성에 관한 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분의 도움과 능력이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없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새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체험한다.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풍부한 자원을 갖는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구주께서 그의 중심을 차지하시고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실 때 그의 옛 자아는 죽는다. 그의 옛 사람은 “그렇게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은 모른다.”라고 부르짖었지만, 이제 그의 새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라고 외치면서 믿음과 기쁨 가운데 평안을 누린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라고 전하고(골 1:27), 계속해서 “너희도 그분(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가르쳤다(골 2:10)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중요한 원리가 담긴 편지를 썼다. 우리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받아들여진 것을 확신함으로써 믿음과 소망의 본질을 상기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울이 깨달은 원리이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 말씀을 아는 것이 온전한 영적 구원과 평안의 길이라고 가르쳤다.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결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
- A.W. 토저 지음 / 이용복 옮김 <내 자아를 버려라>(규장)에서 발췌 -
자아중심적인 삶과 침례 ‘인간의 악하고 교만하고 도착적(倒錯的)인 본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라는 문제를 놓고 기독교 안에서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 한 가지 입장은 심리학과 정신의학에 많이 의존한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자아와 이기심과 교만과 도착성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의 꾸지람 때문에 생긴 강박관념과 왜곡된 개념을 처리함으로써 인간관계 등의 삶을 질을 개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목양자들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신경정신과로 보내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옵게도 기독교 안에는 또 다른 입장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아를 교육하고 관용하고 세련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아를 끝장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성경의 교훈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자연적 자아와 교만을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바하와 베토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의 교만한 자아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은 자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는 치료법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한 구절로 요약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의 삶에서 요구되는 결단이요 믿음과 헌신의 태도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아와 자기중심주의와 교만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해서 우리는 우리의 자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제 너는 끝장났다. 너는 폐위(廢位)되었다. 너는 더 이상 지배권을 휘두를 수 없다.” 참된 회개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자아 중심적 삶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것과 어울리는 삶을 거부할 수 있다.
자아를 거부하고 회개하라! 그러면 자아에게 지배당하는 나라에서 도망하여 임마누엘의 나라로 넘어가 영적 승리와 복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기 아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아직도 문제를 일으키는 옛 사람, 즉 자아 중심적 옛 생활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다. 침례가 이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금 우리가 행하는 침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물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혹은 물에 젖은 손을 머리에 잠시 얹는 의식으로 전락해버렸다.
많은 사람은 내면에 일어난 영적 변화를 가시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침례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라. 침례는 이기적이고 도착적(倒錯的)인 인간의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상징한다. 성도에게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 가운데 그분과 함께 다시 산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침례의 본질적 의미이다. 결혼반지가 결혼을 증거하고 상징하듯이 물 침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옛 자아를 완전히 멸하라 자아의 옛 본성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입장을 양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두 입장을 조화시켜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하나는 우리의 자아를 끝장내고 영적 승리를 통해 새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 자아를 헝겊 조각을 붙여서 그것을 수선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영적으로 승리하고 복음 얻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접근법은 당신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공동체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사람의 인격과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실 때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의 모든 공동체와 협의회와 단체 안에서 동일하게 그것을 이루신다. 그것이 무엇이라 불리든 상관없이 말이다. 자아의 옛 생명에 헝겊 조각을 붙여서 수선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신약은 인간의 옛 자아를 완전히 멸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가르친다.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할지라도 옛 자아의 지혜는 거짓된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 안에는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새로운 자아, 즉 그리스도 안에 새 사람만이 살아야 한다.
이런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산 자로 여겨야 한다. 그러나 ‘나’, ‘나 자신’, ‘나를’ 위주의 자연적 자아는 죄악으로 가득한 과거를 잊으려고 애쓰면서 끊임없이 옛 것에 집착한다. 자연적 자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변화하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초대한 발전시키려고 발버둥친다.
인간은 창조 때에 부여받은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에 좌절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주신 재능을 우리가 이 땅에서 충분히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뜻을 담은 청사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창조하셨다. 우리 각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미래상이 널리 펼쳐져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삶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들의 청사진의 한가운데에는 비바람만 겨우 피할 수 있는 작은 오두막 한 채가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힘들게 발버둥 친 후에는 그 옆에 헛간 하나만 달랑 보태진다.
인간적인 노력을 아무리 기울이더라도 빈 공간은 채워지지 않는다. 자신의 인간적 본성이 몸부림치도록 내버려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담도 완성되고, 대문도 세워졌습니다. 지붕은 흠 하나 없이 완벽합니다. 정말로 완전한 집이 탄생했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과 사고력과 창조력이 어느 정도인지 깊이 연구해보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능력과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지 않는다면, 아직도 그들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한 것이다.
잠재의식 속의 욕구 인간은 자기의 가능성을 완전히 발휘하여 꿈이나 목표를 이루려는 욕구를 잠재의식 속에 가지고 있다. 이것은 충만하고 완전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욕구로서, 종종 과거로부터 도피해서 확신 가운데 미래에도 도전하고 싶어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욕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 마음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꿈과 희망에 부응하는 것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자기들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확실히 아는 것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것이 자기들에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아를 지탱해줄 다양한 보조 장치에 의지하고, 교만에 영양분을 공급하며, 자신의 명백한 결점을 숨긴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계속 받으면,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과 실제 인격 사이의 간격이 좁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상을, 또 다른 이는 문화를 의지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조상의 혈통과 자연환경과 가정환경에 의지하여 인간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조상을 자랑하고 목에 힘을 주면서 국가나 문화의 우월성을 내세운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인종적, 문화적, 교육적 우월성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내 본성에 관한 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분의 도움과 능력이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없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새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체험한다.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풍부한 자원을 갖는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구주께서 그의 중심을 차지하시고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실 때 그의 옛 자아는 죽는다. 그의 옛 사람은 “그렇게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은 모른다.”라고 부르짖었지만, 이제 그의 새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라고 외치면서 믿음과 기쁨 가운데 평안을 누린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라고 전하고(골 1:27), 계속해서 “너희도 그분(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가르쳤다(골 2:10)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중요한 원리가 담긴 편지를 썼다. 우리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받아들여진 것을 확신함으로써 믿음과 소망의 본질을 상기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울이 깨달은 원리이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 말씀을 아는 것이 온전한 영적 구원과 평안의 길이라고 가르쳤다.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결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
- A.W. 토저 지음 / 이용복 옮김 <내 자아를 버려라>(규장)에서 발췌 -
I.H.O.P - 우리의 신앙고백Statement of Faith
I.H.O.P(국제기도의집) - 우리의 신앙고백Statement of Faith
우리는 오직 성경의 66권의 책이 영감된 것임이며, 그러므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모든 것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에 대한 최종의 권위를 가진다. (마5:18; 요10:35, 17:17; 딤후3:16-17; 벧후1:20-2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하신 하나님이시며,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동정녀에 잉태되어 탄생하셨고, 죄 없는 삶을 사셨으며, 죄인들을 위하여 형벌을 받으시고, 대신 속죄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신 분임을 믿는다.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과, 죄의 용서, 그리고 영생을 이루셨다.
그는 삼일만에 육체로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거기서 성도들을 위하여 영원히 중보기도를 하신다. (마1:18-25; 요1:1-18; 롬8:34; 고전 15:1-28; 고후5:21; 갈3:10-14; 엡1:7; 빌2:6-11; 골1:15-23; 히7:25, 9:13-15, 10:19; 벧전2:21-25; 요일2:1-2) 우리는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또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음을 믿는다.
구원을 받기 위하여, 어떤 제전, 의식, 혹은 인간 편에서의 어떤 행위나 활동도 요구되지 않으며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를 기쁘시게 할 일을 하게 하며,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또한 성화되게 한다. (요1:12-13, 6:37-44, 10:25-30; 행16:30-31; 롬3-4, 8:1-17, 31-39, 10:8-10; 엡2:8-10; 빌2:12-13; 딛3:3-7; 요일1:7, 9)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며, 성령안에서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또한 인치심을 받은 것을 믿는다. 성령께서는 중생케하시며, 영원히 거하시며, 그리스도인들을 경건한 삶과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은혜롭게 능력을 갖게 한다. 회심한 뒤에, 성령께서는 복음 사역과 증거를 위하여, 신자들을 충만케 하시며 능력을 주시며 기름부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또한 이적과 기사를 믿으며, 동시에 신약 성경에 기록된 성령님의 모든 은사들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증거하며, 교회를 능력있게 하고 덕스럽게 하여 그 부르심과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함을 믿는다. (마3:11; 요1:12-13, 3:1-15; 행4:29-30; 롬8:9, 12:3-8; 고전 12:12-13; 고후1:21-22; 갈3:1-5; 엡1:13-14, 5:18) 우리는 참되신 한 하나님이 영원토록, 삼위 –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 안에서 존재하시며, 이 분들은 한 하나님으로서, 신성과 능력과 영광이 동일하심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지탱하시며, 유지하시며, 다스리시며,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섭리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온전하게 성취하셔서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심을 믿는다. (시104, 139; 마10:29-31, 28:19; 행17:24-28; 고후 13:14; 엡1:9-12, 4:4-6; 골1:16-17; 히1:1-3; 계1:4-6)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을 때에, 그들은 즉시로 그리스도의 축복된 임재 앞으로 옮겨 가게 되며, 거기서 그들의 몸이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구세주와 함께 실제적인 교제를 나누며 즐거워할 것을 믿는다. 구원받은 자들은 위대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없이 행복한 교제를 나누며 영원토록 함께 살 것이다.
우리는 또한 불신자들이 죽을 때에, 그들은 지옥으로 갈 것이며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떠나 영원하고도 실제적인 고문을 받는, 불타는 연못에서 형벌을 받을 심판의 날까지 기다릴 것이다. (마25:46; 눅16:19-31; 요5:25-29; 고전 15:35-58; 고후5:1-10; 빌1:19-26, 3:20-21; 살후1:5-10; 계20:11-15, 21:1-22:15)
우리는 물세례와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가 지켜야 할 두가지 규례임을 믿는다. 그것들은 구원을 받는 수단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충성된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성화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된다. (마26:26-29, 28:19; 롬6:3-11; 고전 11:23-34; 벧전3:21)
우리는 이 시대의 끝에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재림 하실 것을 믿으며, 그때 그는 그의 왕국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친히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지구에 돌아 오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교회가 큰 능력과 승리로 대환난을 통과할 것을 믿는다. 우리는 교회가 대환난 끝에 휴거할 것을 믿는다.
우리는 또한 종말의 거대한 영혼의 추수와, 성령님 안에서 전례없는 연합과 순결함 그리고 능력을 경험할, 승리하는 교회의 출현을 믿고 기도한다. (시2:7-9, 22:27-28; 요14:12, 17:20-26; 롬11:25-32; 고전15:20-28, 50-58; 엡4:11-16; 빌3:20-21; 살전4:13-5:11; 살후1:3-12; 계7:9-14)
우리는 아담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의롭게 그리고 죄 없이 창조 되었음을 믿는다. 그의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의 후손은 죄의 전가를 받아,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타고난 본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노를 받고 저주받을 자녀들로서, 자신들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며,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서 가납하실 공로를 내 놓을 수도 없다. (창1-3; 시51:5; 사53:5; 롬3:9-18, 5:12-21; 엡2:1-3)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근본적인 도구로서, 그는 교회를 통하여 이 땅에서 그의 구원의 목적을 완성하실 것을 믿는다. 성도들의 봉사의 일을 온전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
우리는 또한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과, 성도들의 지역 공동체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여자들도 남자와 못지 않게 부르심을 받고 은사를 받아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믿는다. (마16:17-19; 행2:17-18, 42; 엡3:14-21; 4:11-16; 딤전2:11-15; 히10:23-25; 벧전2:4-5, 9-10)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불러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여, 희생적인 구제와 실제적인 봉사로서 그들의 필요를 따라 섬기게 하신 것을 믿는다. 이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의 표현이며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사58:6-12, 61:1; 마5-7, 28:18-20; 눅4:18, 21:1-4; 갈2:10; 딤전6:8), 사단은, 본래 위대하고 선한 천사 루시퍼였으나,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하였다는 것을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 났으며, 그에게 속한 귀신들의 무리와 함께 이 땅위에서 암흑하고, 악하고, 불안정한 반대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일하고 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아 패배를 당하였고, 그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불 못에 영원히 던져지게 될 것이다. (사14:10-17; 겔28:11-19; 마12:25-29, 25;41; 요12:31, 16:11; 엡6:10-20; 골2:15; 벧후2:4; 유6; 계12:7-9, 20:1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하신 하나님이시며,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동정녀에 잉태되어 탄생하셨고, 죄 없는 삶을 사셨으며, 죄인들을 위하여 형벌을 받으시고, 대신 속죄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신 분임을 믿는다.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과, 죄의 용서, 그리고 영생을 이루셨다.
그는 삼일만에 육체로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거기서 성도들을 위하여 영원히 중보기도를 하신다. (마1:18-25; 요1:1-18; 롬8:34; 고전 15:1-28; 고후5:21; 갈3:10-14; 엡1:7; 빌2:6-11; 골1:15-23; 히7:25, 9:13-15, 10:19; 벧전2:21-25; 요일2:1-2) 우리는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또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음을 믿는다.
구원을 받기 위하여, 어떤 제전, 의식, 혹은 인간 편에서의 어떤 행위나 활동도 요구되지 않으며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를 기쁘시게 할 일을 하게 하며,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또한 성화되게 한다. (요1:12-13, 6:37-44, 10:25-30; 행16:30-31; 롬3-4, 8:1-17, 31-39, 10:8-10; 엡2:8-10; 빌2:12-13; 딛3:3-7; 요일1:7, 9)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며, 성령안에서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또한 인치심을 받은 것을 믿는다. 성령께서는 중생케하시며, 영원히 거하시며, 그리스도인들을 경건한 삶과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은혜롭게 능력을 갖게 한다. 회심한 뒤에, 성령께서는 복음 사역과 증거를 위하여, 신자들을 충만케 하시며 능력을 주시며 기름부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또한 이적과 기사를 믿으며, 동시에 신약 성경에 기록된 성령님의 모든 은사들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증거하며, 교회를 능력있게 하고 덕스럽게 하여 그 부르심과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함을 믿는다. (마3:11; 요1:12-13, 3:1-15; 행4:29-30; 롬8:9, 12:3-8; 고전 12:12-13; 고후1:21-22; 갈3:1-5; 엡1:13-14, 5:18) 우리는 참되신 한 하나님이 영원토록, 삼위 –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 안에서 존재하시며, 이 분들은 한 하나님으로서, 신성과 능력과 영광이 동일하심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지탱하시며, 유지하시며, 다스리시며,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섭리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온전하게 성취하셔서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심을 믿는다. (시104, 139; 마10:29-31, 28:19; 행17:24-28; 고후 13:14; 엡1:9-12, 4:4-6; 골1:16-17; 히1:1-3; 계1:4-6)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을 때에, 그들은 즉시로 그리스도의 축복된 임재 앞으로 옮겨 가게 되며, 거기서 그들의 몸이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구세주와 함께 실제적인 교제를 나누며 즐거워할 것을 믿는다. 구원받은 자들은 위대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없이 행복한 교제를 나누며 영원토록 함께 살 것이다.
우리는 또한 불신자들이 죽을 때에, 그들은 지옥으로 갈 것이며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떠나 영원하고도 실제적인 고문을 받는, 불타는 연못에서 형벌을 받을 심판의 날까지 기다릴 것이다. (마25:46; 눅16:19-31; 요5:25-29; 고전 15:35-58; 고후5:1-10; 빌1:19-26, 3:20-21; 살후1:5-10; 계20:11-15, 21:1-22:15)
우리는 물세례와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가 지켜야 할 두가지 규례임을 믿는다. 그것들은 구원을 받는 수단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충성된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성화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된다. (마26:26-29, 28:19; 롬6:3-11; 고전 11:23-34; 벧전3:21)
우리는 이 시대의 끝에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재림 하실 것을 믿으며, 그때 그는 그의 왕국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친히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지구에 돌아 오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교회가 큰 능력과 승리로 대환난을 통과할 것을 믿는다. 우리는 교회가 대환난 끝에 휴거할 것을 믿는다.
우리는 또한 종말의 거대한 영혼의 추수와, 성령님 안에서 전례없는 연합과 순결함 그리고 능력을 경험할, 승리하는 교회의 출현을 믿고 기도한다. (시2:7-9, 22:27-28; 요14:12, 17:20-26; 롬11:25-32; 고전15:20-28, 50-58; 엡4:11-16; 빌3:20-21; 살전4:13-5:11; 살후1:3-12; 계7:9-14)
우리는 아담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의롭게 그리고 죄 없이 창조 되었음을 믿는다. 그의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의 후손은 죄의 전가를 받아,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타고난 본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노를 받고 저주받을 자녀들로서, 자신들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며,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서 가납하실 공로를 내 놓을 수도 없다. (창1-3; 시51:5; 사53:5; 롬3:9-18, 5:12-21; 엡2:1-3)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근본적인 도구로서, 그는 교회를 통하여 이 땅에서 그의 구원의 목적을 완성하실 것을 믿는다. 성도들의 봉사의 일을 온전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
우리는 또한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과, 성도들의 지역 공동체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여자들도 남자와 못지 않게 부르심을 받고 은사를 받아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믿는다. (마16:17-19; 행2:17-18, 42; 엡3:14-21; 4:11-16; 딤전2:11-15; 히10:23-25; 벧전2:4-5, 9-10)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불러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여, 희생적인 구제와 실제적인 봉사로서 그들의 필요를 따라 섬기게 하신 것을 믿는다. 이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의 표현이며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사58:6-12, 61:1; 마5-7, 28:18-20; 눅4:18, 21:1-4; 갈2:10; 딤전6:8), 사단은, 본래 위대하고 선한 천사 루시퍼였으나,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하였다는 것을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 났으며, 그에게 속한 귀신들의 무리와 함께 이 땅위에서 암흑하고, 악하고, 불안정한 반대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일하고 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아 패배를 당하였고, 그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불 못에 영원히 던져지게 될 것이다. (사14:10-17; 겔28:11-19; 마12:25-29, 25;41; 요12:31, 16:11; 엡6:10-20; 골2:15; 벧후2:4; 유6; 계12:7-9, 20:10)
영혼을 먼저 살찌우라
영혼을 먼저 살찌우라- Soul Nourishment First - 죠지 뮬러 저
주님은 제게 한 가지 진리를 가르쳐주셨는데, 저는 지난 14년 동안 그 진리가 주는 유익을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진리가 무엇인지 요점을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날마다 마땅히 해야하는 모든 일 가운데 첫 번째로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주님 안에서 나의 영혼이 만족을 얻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 진리를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내가 주님을 얼마나 섬기고 있는가', 혹은 '내가 얼마나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의 영혼은 과연 행복한 상태에 있는가' 또는 '나의 속사람은 얼마나 강건한 상태에 있는가' 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발견하기 이전에 저는 진리를 찾아 갈구하였고, 믿는 이들의 유익을 구하였으며, 낙심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주님 안의 평안이 없었고, 영혼은 메말랐으며, 속사람은 날마다 힘을 얻지 못했는데, 이 모두는 제 영혼이 합당한 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적어도 10년 동안,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곧바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과 그것을 묵상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제 마음은 위로와 격려와 훈계와 책망과 교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은 주님과의 체험적인 교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 신약성경부터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귀하신 말씀 위에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한 후, 제가 처음 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구절을 하나하나 상고하면서 그 구절들로부터 영적인 축복을 얻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이 일은 공적인 말씀 사역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설교준비를 위해서 말씀을 묵상해온 방식을 따라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만 제 자신의 영혼의 양식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을 대한 결과, 제 영혼이 자백과 감사와 중보와 간구하는 심령으로 가득하게 되며, 비록 예전처럼 기도로 시작하지 않고 묵상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묵상이 기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잠시동안 자백, 중보나 간구, 또는 감사를 드린 후에 다음 말씀, 혹은 다음 구절로 넘어갔는데, 이와 같이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가면서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말씀 묵상의 목적은 제 자신의 영혼을 위한 양식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 항상 자백과 감사와 간구와 중보가 묵상과 함께 어우러졌으며, 속사람은 거의 변함없이 영양을 섭취하게 되어 놀랄 정도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불편한 때라도 거의 예외없이 아침시간부터 주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저와 교통하는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공적인 말씀 사역을 위한 말씀 묵상이 아니라 제 자신의 속사람을 살찌우기 위한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다른 성도를 위한 양식이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전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과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전에는 일어나자마자 가능한 빨리 기도하려고 했으며, 아침식사를 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기도에 전념하려고 했습니다. 제 영혼이 심하게 황폐되어 있던 때를 빼고는,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기도로 시작했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서 제 영혼의 양식과 회복, 속사람이 부흥되고 새로워질 필요가 있을 때에만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저는 종종 영혼의 위로와 격려와 겸손의 필요 등을 깨닫기도 전에 무릎을 꿇은 채 15분이나 30분, 혹은 한시간 가량을 허비했던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어지러운 마음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겨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식으로 고통을 당하는 데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먼저 진리의 말씀으로 꼴을 얻고, 하나님의 귀하신 말씀을 통해 제게 비추어주신 것들에 대해, 그분과의 체험적인 교제 가운데서 저의 아버지이자 친구되신 주님께(물론 나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 하나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귀한 것을 왜 진작 발견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의아스러울 따름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한 번도 책에서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말씀 묵상에 대해 설교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이러한 일을 소개하고 격려하는 교제를 나누는 어떤 형제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로서 속사람을 위한 양식을 얻기 위해 아침마다 마땅히 해야하는 첫 번째 일이 말씀 묵상이라는 사실을 제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이제 이 일은 다른 일들처럼 제게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조금도 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속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묵상은 우리 속사람의 양식을 얻기 위해 매일 아침 맨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처럼, 우리도 속사람을 위해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속사람을 위한 음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일은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물이 배수로를 따라 흘러가듯 우리 생각을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고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 마음에 적용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진솔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는 정해진 어떤 형식을 따르기보다는 어떤 필요, 곧 경건의 능력이나, 경건한 열망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좋은 때를 얻기 위해 어느 정해진 시간 동안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혼의 습관이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되려면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결과로 풍성한 꼴을 얻은 다음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격려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교훈하시며, 우리를 겸손케 하시며 책망하시는 것을 체험한 후에 기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영적으로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한 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더욱 우리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 말씀 묵상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묵상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않고 기도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방황하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말씀 묵상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인 유익과 영혼의 소생함이 너무도 크고 크기 때문에, 저는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고, 또한 직접 실천에 옮기도록 간절하게 강력히 권하는 바입니다. 전에 저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찾아왔던 크고 작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축복하심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힘을 얻어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이 말씀을 묵상한 결과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14년 동안 직접 제가 체험해본 결과,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확신있게 권하는 바입니다. 이에 한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기도를 마치고 나서 일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곤 했습니다. 성경전체를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읽었으며, 때로는 신약을 읽기도 하고, 또 구약을 읽기도 했는데, 제 생애 26년 이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복되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또한 정해진 시간뿐만 아니라 하루 중 아무 때라도 성경을 읽었으며,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우리 영혼이 이른 아침부터 상쾌하게 되고 행복감으로 가득해지는 것과, 이와 같은 영적인 준비도 없이 매일의 삶에 임하여 섬기거나 고난을 당하거나 시험을 겪는 것은 실로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셔서 이러한 말씀 묵상의 복락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출처: 조지 뮐러 영성의 비밀
주님은 제게 한 가지 진리를 가르쳐주셨는데, 저는 지난 14년 동안 그 진리가 주는 유익을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진리가 무엇인지 요점을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날마다 마땅히 해야하는 모든 일 가운데 첫 번째로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주님 안에서 나의 영혼이 만족을 얻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 진리를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내가 주님을 얼마나 섬기고 있는가', 혹은 '내가 얼마나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의 영혼은 과연 행복한 상태에 있는가' 또는 '나의 속사람은 얼마나 강건한 상태에 있는가' 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발견하기 이전에 저는 진리를 찾아 갈구하였고, 믿는 이들의 유익을 구하였으며, 낙심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주님 안의 평안이 없었고, 영혼은 메말랐으며, 속사람은 날마다 힘을 얻지 못했는데, 이 모두는 제 영혼이 합당한 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적어도 10년 동안,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곧바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과 그것을 묵상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제 마음은 위로와 격려와 훈계와 책망과 교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은 주님과의 체험적인 교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 신약성경부터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귀하신 말씀 위에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한 후, 제가 처음 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구절을 하나하나 상고하면서 그 구절들로부터 영적인 축복을 얻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이 일은 공적인 말씀 사역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설교준비를 위해서 말씀을 묵상해온 방식을 따라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만 제 자신의 영혼의 양식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을 대한 결과, 제 영혼이 자백과 감사와 중보와 간구하는 심령으로 가득하게 되며, 비록 예전처럼 기도로 시작하지 않고 묵상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묵상이 기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잠시동안 자백, 중보나 간구, 또는 감사를 드린 후에 다음 말씀, 혹은 다음 구절로 넘어갔는데, 이와 같이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가면서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말씀 묵상의 목적은 제 자신의 영혼을 위한 양식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 항상 자백과 감사와 간구와 중보가 묵상과 함께 어우러졌으며, 속사람은 거의 변함없이 영양을 섭취하게 되어 놀랄 정도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불편한 때라도 거의 예외없이 아침시간부터 주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저와 교통하는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공적인 말씀 사역을 위한 말씀 묵상이 아니라 제 자신의 속사람을 살찌우기 위한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다른 성도를 위한 양식이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전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과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전에는 일어나자마자 가능한 빨리 기도하려고 했으며, 아침식사를 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기도에 전념하려고 했습니다. 제 영혼이 심하게 황폐되어 있던 때를 빼고는,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기도로 시작했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서 제 영혼의 양식과 회복, 속사람이 부흥되고 새로워질 필요가 있을 때에만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저는 종종 영혼의 위로와 격려와 겸손의 필요 등을 깨닫기도 전에 무릎을 꿇은 채 15분이나 30분, 혹은 한시간 가량을 허비했던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어지러운 마음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겨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식으로 고통을 당하는 데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먼저 진리의 말씀으로 꼴을 얻고, 하나님의 귀하신 말씀을 통해 제게 비추어주신 것들에 대해, 그분과의 체험적인 교제 가운데서 저의 아버지이자 친구되신 주님께(물론 나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 하나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귀한 것을 왜 진작 발견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의아스러울 따름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한 번도 책에서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말씀 묵상에 대해 설교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이러한 일을 소개하고 격려하는 교제를 나누는 어떤 형제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로서 속사람을 위한 양식을 얻기 위해 아침마다 마땅히 해야하는 첫 번째 일이 말씀 묵상이라는 사실을 제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이제 이 일은 다른 일들처럼 제게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조금도 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속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묵상은 우리 속사람의 양식을 얻기 위해 매일 아침 맨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처럼, 우리도 속사람을 위해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속사람을 위한 음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일은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물이 배수로를 따라 흘러가듯 우리 생각을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고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 마음에 적용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진솔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는 정해진 어떤 형식을 따르기보다는 어떤 필요, 곧 경건의 능력이나, 경건한 열망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좋은 때를 얻기 위해 어느 정해진 시간 동안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혼의 습관이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되려면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결과로 풍성한 꼴을 얻은 다음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격려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교훈하시며, 우리를 겸손케 하시며 책망하시는 것을 체험한 후에 기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영적으로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한 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더욱 우리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 말씀 묵상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묵상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않고 기도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방황하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말씀 묵상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인 유익과 영혼의 소생함이 너무도 크고 크기 때문에, 저는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고, 또한 직접 실천에 옮기도록 간절하게 강력히 권하는 바입니다. 전에 저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찾아왔던 크고 작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축복하심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힘을 얻어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이 말씀을 묵상한 결과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14년 동안 직접 제가 체험해본 결과,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확신있게 권하는 바입니다. 이에 한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기도를 마치고 나서 일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곤 했습니다. 성경전체를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읽었으며, 때로는 신약을 읽기도 하고, 또 구약을 읽기도 했는데, 제 생애 26년 이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복되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또한 정해진 시간뿐만 아니라 하루 중 아무 때라도 성경을 읽었으며,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우리 영혼이 이른 아침부터 상쾌하게 되고 행복감으로 가득해지는 것과, 이와 같은 영적인 준비도 없이 매일의 삶에 임하여 섬기거나 고난을 당하거나 시험을 겪는 것은 실로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셔서 이러한 말씀 묵상의 복락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출처: 조지 뮐러 영성의 비밀
소명의 4가지 핵심 요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리더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리더들이 갖는 소명은 오랜 성찰과 고민, 그리고 삶의 정황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찬 리더에게 있어서 소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이 소명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이끌고 섬기는 토대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 리더의 소명은 개인의 욕망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명과 개인의 욕망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마이크 포스와 테리 엘튼이 공저한 <팀 리더십의 핵심>(국제제자훈련원)에는 크리스천 리더들이 자신의 소명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내적 감동 흔히들 '소명'(the calling)을 '내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명의 여부를 확인할 때 흔히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는지'를 먼저 점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5절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로부터 선교사로 파송되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안디옥교회의 리더들은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던 중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시는 성령의 명령(Calling)을 듣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명령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던 이유는 바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그 명령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 원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무언가 좀 더 본질적인 것을 원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내적 감동이 있는 자에게 소명을 허락하십니다.
2. 공동체의 확인 그러나 그런 소명을 리더 자신만 알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소명인지 아니면 개인의 욕망인지를 구분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소명을 확인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의 확인'입니다. 아무리 리더 자신의 내적인 감동이 크다 하더라도 공동체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명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리더는 자신의 소명을 반드시 공동체를 통해 확인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내적 감동을 확인 받을 때, 크리스천 리더는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 단순히 개인의 생각이나 욕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아가, 어떠한 이유 때문에 리더가 자신의 소명에 흔들릴 때, 공동체의 확인을 통해 우리의 소명을 다시금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3. 기회 리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보다도 오히려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확인과 함께 소명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기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내적 동기가 충분하다고 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소명을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어떤 기회를 계속해서 제공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그곳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곧 소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기회는 우리가 영적인 성장과 발전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크리스천 리더의 소명을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인 이유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르신 자에게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소명과 관련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 역시 공동체의 확인을 통해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회는 리더의 가슴 속에 강한 내적 동기를 유발시킵니다.
4. 계속적인 성장과 발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올바른 위치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에게는 끊임없는 소명의식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치지 않는 열정과 날마다 새로운 마음이 솟아납니다. 그것은 소명 자체가 가져다 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분명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사역은 결코 도태되거나 정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금새 권태감이 들거나 매너리즘에 빠진다면 그 일은 결코 하나님으로 온 소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날마다 성장하며 발전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소명은 결코 리더의 마음을 나태롭게 놔두지 않으며, 어떤 목표를 이루더라도 또 다시 새로운 목표를 찾아 나아가도록 리더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명을 가진 리더는 그 사명이 다하는 날까지 소명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내적인 감동이 있습니다. 공동체는 그 리더의 소명을 인정하고 함께 돕기 위해 힘을 모아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리더에게 부어주신 소명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내적 감동과 공동체의 확인,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통해 소명을 이뤄감으로써 리더는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성장과 발전을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마이크 포스와 테리 엘튼의 <팀 리더십의 핵심> 중에서
1. 내적 감동 흔히들 '소명'(the calling)을 '내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명의 여부를 확인할 때 흔히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는지'를 먼저 점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5절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로부터 선교사로 파송되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안디옥교회의 리더들은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던 중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시는 성령의 명령(Calling)을 듣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명령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던 이유는 바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그 명령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 원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무언가 좀 더 본질적인 것을 원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내적 감동이 있는 자에게 소명을 허락하십니다.
2. 공동체의 확인 그러나 그런 소명을 리더 자신만 알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소명인지 아니면 개인의 욕망인지를 구분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소명을 확인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의 확인'입니다. 아무리 리더 자신의 내적인 감동이 크다 하더라도 공동체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명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리더는 자신의 소명을 반드시 공동체를 통해 확인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내적 감동을 확인 받을 때, 크리스천 리더는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 단순히 개인의 생각이나 욕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아가, 어떠한 이유 때문에 리더가 자신의 소명에 흔들릴 때, 공동체의 확인을 통해 우리의 소명을 다시금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3. 기회 리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보다도 오히려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확인과 함께 소명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기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내적 동기가 충분하다고 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소명을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어떤 기회를 계속해서 제공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그곳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곧 소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기회는 우리가 영적인 성장과 발전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크리스천 리더의 소명을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인 이유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르신 자에게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소명과 관련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 역시 공동체의 확인을 통해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회는 리더의 가슴 속에 강한 내적 동기를 유발시킵니다.
4. 계속적인 성장과 발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올바른 위치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에게는 끊임없는 소명의식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치지 않는 열정과 날마다 새로운 마음이 솟아납니다. 그것은 소명 자체가 가져다 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분명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사역은 결코 도태되거나 정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금새 권태감이 들거나 매너리즘에 빠진다면 그 일은 결코 하나님으로 온 소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날마다 성장하며 발전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소명은 결코 리더의 마음을 나태롭게 놔두지 않으며, 어떤 목표를 이루더라도 또 다시 새로운 목표를 찾아 나아가도록 리더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명을 가진 리더는 그 사명이 다하는 날까지 소명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내적인 감동이 있습니다. 공동체는 그 리더의 소명을 인정하고 함께 돕기 위해 힘을 모아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리더에게 부어주신 소명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내적 감동과 공동체의 확인,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통해 소명을 이뤄감으로써 리더는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성장과 발전을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마이크 포스와 테리 엘튼의 <팀 리더십의 핵심> 중에서
성령의 영감(靈感)을 얻으려면?
성령의 영감(靈感)을 얻으려면? 성경의 영감에 관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에게 성경은 부분적으로 하나의 신비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진리를 인간에게 전하기로 하셨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 때가 많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하나님이 말씀하기로 선택하셨다.얼마나 큰 기적인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이 이해하며 행동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과 교통(交通)하셨다.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떻게 인간의 언어가 궁극적인 진리를 담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 안에서 성경을 통해 호흡하실 때 성경의 언어가 우리에게 진리를 전한다고 믿는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우리를 조명(照明)하신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시는 과정을 설명해주셨다.제자들은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영적 귀를 가진 자들은 듣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거침돌은 바로 완악한 마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3:9-16).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을 가로막는 ‘완악한 마음’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성경구절을 읽거나 말하거나 되풀이할 때마다 말씀이 기계적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청중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실 때라도 그분의 존재와 권세가 성공을 보장해준 것은 아니었다. 신적인 교통은 두 사람, 곧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이다.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기적적인 연합 하나님은 성경기자들의 인간적 능력과 관심을 사용하시면서 이들과 함께 일하시고, 이들을 통해 일하셨으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신다.성경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기적적인 연합을 통해 하나가 된다.
이것이 큰 신비이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신비도 인정해야 한다.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을 상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신다.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무신 것처럼, 성경은 지상적인 동시에 천상적이어서 거대한 교통의 틈을 잇는 다리를 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기 위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비이다.“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할” 때(벧후 1:21), 이들은 천상의 일을 성취하는 능력으로 충만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이들의 모든 달란트와 순종을 사용하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의 말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성별될 만큼 이들은 성령이 충만했고, 하나님의 전망이 이들의 저작을 통해 빛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과 시인들과 역사가들이 평범한 인간 그대로였던게 분명하다. 이들은 각자의 책과 편지를 쓰면서 회상, 편집, 조사, 세세한 선택, 특정 사실의 포함과 배재와 같은 평범한 기술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누가는 자기가 조사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한다.“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눅 1:1-4).하나님은 성경기자들의 기술을 취하시고,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를 포함하여 미래 세대에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셨다.
성경에서 어떤 부분이 인간적이고 어떤 부분이 신적인가? 성경은 솔기 없는 옷이다.말씀에는 이러한 구분을 불가능하게 하는 통일성이 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성육신의 신비를,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비록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전달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그러나 이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다만 이것을 믿고 영감의 진리 가운데 사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내가)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 119:16).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속을 믿기 위해 믿음을 훈련하듯이 믿음으로 성경에 접근한다. 베드로가 우리 주님께 말했듯이 우리도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말해야 한다 - 이사벨 앤더스 트룹, 기독교 교양
오히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하나님이 말씀하기로 선택하셨다.얼마나 큰 기적인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이 이해하며 행동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과 교통(交通)하셨다.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떻게 인간의 언어가 궁극적인 진리를 담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 안에서 성경을 통해 호흡하실 때 성경의 언어가 우리에게 진리를 전한다고 믿는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우리를 조명(照明)하신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시는 과정을 설명해주셨다.제자들은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영적 귀를 가진 자들은 듣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거침돌은 바로 완악한 마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3:9-16).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을 가로막는 ‘완악한 마음’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성경구절을 읽거나 말하거나 되풀이할 때마다 말씀이 기계적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청중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실 때라도 그분의 존재와 권세가 성공을 보장해준 것은 아니었다. 신적인 교통은 두 사람, 곧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이다.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기적적인 연합 하나님은 성경기자들의 인간적 능력과 관심을 사용하시면서 이들과 함께 일하시고, 이들을 통해 일하셨으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신다.성경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기적적인 연합을 통해 하나가 된다.
이것이 큰 신비이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신비도 인정해야 한다.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을 상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신다.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무신 것처럼, 성경은 지상적인 동시에 천상적이어서 거대한 교통의 틈을 잇는 다리를 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기 위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비이다.“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할” 때(벧후 1:21), 이들은 천상의 일을 성취하는 능력으로 충만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이들의 모든 달란트와 순종을 사용하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의 말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성별될 만큼 이들은 성령이 충만했고, 하나님의 전망이 이들의 저작을 통해 빛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과 시인들과 역사가들이 평범한 인간 그대로였던게 분명하다. 이들은 각자의 책과 편지를 쓰면서 회상, 편집, 조사, 세세한 선택, 특정 사실의 포함과 배재와 같은 평범한 기술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누가는 자기가 조사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한다.“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눅 1:1-4).하나님은 성경기자들의 기술을 취하시고,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를 포함하여 미래 세대에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셨다.
성경에서 어떤 부분이 인간적이고 어떤 부분이 신적인가? 성경은 솔기 없는 옷이다.말씀에는 이러한 구분을 불가능하게 하는 통일성이 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성육신의 신비를,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비록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전달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그러나 이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다만 이것을 믿고 영감의 진리 가운데 사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내가)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 119:16).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속을 믿기 위해 믿음을 훈련하듯이 믿음으로 성경에 접근한다. 베드로가 우리 주님께 말했듯이 우리도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말해야 한다 - 이사벨 앤더스 트룹, 기독교 교양
성도들의 믿음을 척량하는 갈대
성도들의 믿음을 척량하는 갈대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혼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11:1-2) 오늘은 11장으로 넘어왔다. 11장도 10장처럼 별도로 해석되어야 하는 내용이다. 13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교회가 박해받게 될 내용이 전체적으로 서술되었다. 학자들은 11장은 계시록 중에서도 해석하기에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한다. 이유로는 해석상의 난점과 혼란점이 대체로 그 해석의 기본입장에 따라 각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기에 대한 해석들은; ⓐ. 어떤 이는 ‘환난중에서 참 믿음에 있는 유대인들을 헤아려보라는 것이라’하였고, ⓑ. 다른 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내용이지만, 유형교회에 근거를 두고는 있으나 무형교회(Invisible church) 곧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척량하는 것’이라고 애매한 해법으로 설명하였고, ⓒ. 또 다른 이는 ‘이스라엘이 이슬람의 오마르 모스크 (오마르는 건물 명칭. 모스크는 회교도의 성전이란 뜻)를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스라엘 성전이 지어지면, 적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앉게 될 때 바깥마당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짓밟는 일’이라고 해석하였다.
유대인의 성전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성이 함락될 때 파괴되었다. 예수님은 성전을 향하여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고 예언했는데 예언대로 됐다(마24:2,눅19:44). 주후 70년경 유대나라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키다가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함락시킬 때 성전을 불로 태워버렸다. 파괴되기 이전의 성전은 돌로 지어졌고, 제단 안에는 금붙이가 많았는데 불이 나서 금이 녹아내렸다. 군사들이 금을 찾기 위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허물고 들추어냄으로서 예수님의 예언대로 되어진 것을 역사는 증거 한다.
이러한 성전 터에 모하멧(Mohammed; 570-632 AD)을 교주로 섬기는 이슬람교의 ‘오마르 모스크’가 건립되어 졌다. Islam 성지는 Arabia Mecca에 있으며 코란(Koran)을 정경으로 하며 주후 612년에 시작된 종파다. 원래 이스라엘 성전은 모리아 산에 세워졌는데, 그 성전 안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했던 반석이 있다(창22:2~). 이슬람교는 그들의 교주 모하멧이 이 반석에서 하늘에 들려올라가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성전이 세워졌던 그 자리에 모하멧의 사원인 ‘오마르 모스크’를 짓고 제2의 성지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모하멧을 믿는 아랍의 2억 인구는 자기들의 오마르 모스크를 헐고 그 자리에 유대인의 성전을 짓는 것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혹이라도 유대인들이 그 자리에 성전을 짓기 위해 오마르 모스크를 헐었다가는 아랍이 성전(Holy war)을 선포하고 결사적인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현지에 가서 보면 외국인들은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만 유대인들은 절대로 못 들어가게 한다. 유대인들은 그 근체에서 얼씬도 못하게 막는다. 이러한 그들의 모스크를 헐고 이스라엘 성전을 새로 짓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성전이 재건되고 그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앉게 된다는 해석은 설득을 얻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11장을 이해하기 위해 단원을 넷으로 세분해서 척량의 대상과, 두증인의 정체와 그들의 부활은 언제인가?
세상에 나타나는 짐승의 시대(Beast era)에 관한 내용으로 나누어서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① 성전과, 제단 척량과, 성전 밖 마당문제.(1-2) ② 두 증인의 정체와 영적전쟁.(3-6) ③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Beast)의 등장.(7-10) ④ 사명 자들의 부활은 3일반 후(After)에 있다.(11-13) 1. 신자들의 믿음을 세 부류로 분류하라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11:1) 천사는 요한에게 갈대 하나를 주면서 성전과 제단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척량하고 성전 바깥마당은 척량하지 말라한다. 문자적으로 볼 때 제단은 성전 안에 있는 위치가 되겠고, 따라서 성전은 경배하는 자들이 들어갈 건물이다. 그리고 마당은 문자대로 건물 바깥에 아무것도 가려진 것이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천사는 두 곳만 척량하고 밖은 하지 말라 하면서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서 42달 동안 거룩한 성을 짓밟게 된다고 한다. 갈대는 척량(Measure)하기 위한 잣대와 같은 의미다. 따라서 요한에게 말한 갈대는 신자들의 믿음을 재는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을 셋으로 분류시킨다고 알려주신다. 첫째로 좋은 믿음은 제단 안에서의 경배하는 신자들의 믿음이다. 두 번째로 중간 믿음은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신자들이다. 마지막으로는 성전 밖 마당에서 예배하는 자들과 같은 자들로 분류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경배하는 자라면 성전과 제단에 관한 비밀을 알아야 된다.
성전의 유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성전을 Tabernacle 이라 한다. 미쉬칸(mishkan)은 ‘머물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성막은 이동시킬 수 있는 장소로서 모세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백성들 가운데 거하는 장소이다. 성막 안에는 하나님의 법궤를 두고 광야기간 동안 함께 하시면서 먹이시고 입히시며 인도하며 만나주시던 것이 성막이다. 그러므로 회막( Tabernacle)은 모임에 있다. 이 낱말은 약속에 의하여 만남을 뜻한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교회에 모이는 목적은 하나님을 만남에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하시고(출29:42-43), 또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하였으므로(민17:4) 성전은 하나님과의 교제(Follow ship)를 위한 만남에 있음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교회라는 성전에 모일 때,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어야 된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려 하시는가?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하시고(출29:42),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하셨다(출33:11). 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하였다(민7:89). 그러므로 신자가 교회에 출석하는 목적은 사람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은총을 주신 예수를 만나서 교제함이 목적이어야 된다. 또한 척량문제는 땅에서 만의 척량이 아니다. 하늘에서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경에 일렀으되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말씀은 불변의 진리다(갈6:7-8).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과정을 지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떻게 죽던 한번은 죽어야 된다. 그러나 문제는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하였다.(고전15:42-44) 2. 성전 안에서의 경배 성도들 성막의 원리에 근거하여 세 부류의 신자들로 척량(Measurement)하라는 뜻이 무엇인지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성막이 이동될지라도 그 안에 설치되는 기구들은 변동 없이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이처럼 신자들은 생활과 주변이 흔들리고 변동이 생겨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서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된다. 물론 이러한 사람은 번제단에서 태워졌던 번제물처럼 그리스도에 의하여 자신의 죄가 용서받은 신자를 말한다. 또한 제사장들이 물두멍에서 자신의 손을 깨끗하게 씻음과 같이 성령과 물로 거듭나는 삶의 신자를 말한다. 진설병: 히브리어서 ‘레쳄 패님(lechem p?nim)’과 헬라어서 ‘프로테시스(πρ?θεσιs)’는 성막 안에 있는 진설상에 두어서 하나님 앞에 항상(Always) 있게 함이다. 이토록 하나님의 제단에 감사함으로 자신의 헌물을 항상 넉넉하게 채우는 신자라야 된다는 것이다.
진설병의 의미는 일상생활에 대한 감사함이다. 감사는 찬양과는 분명히 다르고 찬양은 경배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역사에 관한 것이다. 감사는 우리 생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서 당연히 해야 할 우리의 의무다. 그러기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하신 것이다(살전5:16,18). 왜 감사의 삶이 되어야하는가? 감사가 되지못하면 바깥마당에서 경배하는 신자가 되기 때문에 항상 감사의 삶이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한다고 좋은 일이나 나쁜 일,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인식하면 안 된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파멸시키는 것뿐이기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하심이라” 하셨다(요일3:8). 그러므로 감사의 조건을 알아야 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였으니, ‘안에서’와 ‘관해서’란 말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에게 발생되는 모든 일에 ‘관해서’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든 예수 ‘안에서’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 감사는 위대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준비단계이다. 계속되는 감사는 성령의 한 열매가 된다. ⓑ. 감사는 본질적으로 성령 충만의 표현이기에 감사가 없다는 것은 성령 충만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 끝으로 감사의 삶은 기적을 일으키므로 이러한 신자는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로 척량 을 받는다.
감사하는 삶의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예물(헌물)로 항성 채우는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감사함으로 예물을 드리는 믿음은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자 일수밖에 없다. 등대: 순금으 로 만들어진 ‘럭니아(λυχν?α)’는 성전 안을 밝혀주는 일곱 등잔으로 구성해 성전 안 왼편에 놓여진다. 등불은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나타내) 빛이시다. 찬양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에 대한 성품에 관한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향하여 관심을 모으시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시도록 하는 일이다. 금 등대는 일곱 개의 불이 붙여진다.
일곱은 하나님의 특별 속성인데, 하나님의 지식, 지혜, 선, 성결, 의, 진실, 주권,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삶이어야 된다. 찬양은 소리 내는 찬송이 아니다. 찬양은 범사에 감사로서 항상 마음에 평강을 누리면서 기쁨으로 생활할 때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속성이 높임을 받게 하는 삶이 찬양이다. 따라서 찬양으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사람은 성전 안을 밝히는 믿음이므로 이러한 신자는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이다. 이러한 신자는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함이 항상 떠나지 아니하는 분향단의 삶이다. 분향단: 히브리어 ‘퀘토레트(qetoreth madsch)’와 헬라어 ‘더미아마(θυμ?αμα)’는 하나님 앞으로 올리는 헌향(獻香)이다. 이 헌향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함을 말한다.
중요함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이 헌향이 하나님에게 상달될 때 죄 사함이 받아져서,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로 들어가려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으로 사는 신자는 자신의 허물이 사함 되는 삶이 하나님 앞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삶의 신자는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의 자격은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쳐서, 감사와 찬양과 주님을 사랑하는 향연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함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중요함은 이들의 믿음은 증거궤가 있는 지성소로 일컫는 제단까지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안타깝게도 맑고 빛나는 세마포를 입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들어갈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2층천까지 들어갈 자로 계수된다는 뜻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장자에 속하는 왕권이나 순교자의 반열도 아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어린양 신부의 반열은 더더욱 아니다.
제단에서의 경배 성도들 제단은 휘장으로 가려진 하나님의 지성소를 가리킨다. 앞에서 보았듯이 분향단을 지나야 비로써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다. 궤안에는 만나와, 싹 난지팡이와, 십계명의 돌 판이 들어있다. 만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을 살리시는 말씀이다.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질서유지를 말한다. 돌판은 십계명자체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것들을 넣어두고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 판을 궤위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하셨다(출25:21-22).
또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막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장소”라 하였다.(출30:6) 이처럼 제단에서부터 분향단까지 돌아오는 믿음의 소유자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믿음이다. 이사야, 다니엘, 엘리야, 엘리사, 호세아, 예레미아 등 많은 선진들이 날마다의 삶에서 그랬듯이, 이러한 신자는 장자의 총회에 들어갈 믿음이란 뜻이다. 이들은 깨끗하고 맑고 빛나는 세마포를 입은 자들이요, 어린양의 신부들을 만나게 될 자들이다.
이들은 부활과 휴거된 자들, 구약 선진들,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순교자들처럼, 이기는 자들이기에 그들에게도 장자의 총회에 들어가는 자격을 주어서 시온에 들어갈 자들이다. 이 무리들은 셋째하늘 나라인 시온에 들어갈 반열의 소유자로 인정함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갈대를 주면서 이런 자들을 척량(Measurement) 하라고 요한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2층천 하늘나라(βασιλε?α)와 3층천 하늘나라(Σι?ν)에 들어갈 성도들로 분류가 끝나게 된다. 따라서 극심한 대환난의 고통은 성전 밖 마당만 밟고 다니던 자들은 하나님의 계수에서 탈락시키신다. 저들은 42달 동안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었다 하시는데 왜 저들이 이러한 고통을 당해야 되는가를 깨달아야 된다.
성전 밖에서의 경배 신자들 성전 밖이란 성막에서 보면 성막 뜰 밖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물두멍과 번제단이 놓여있다. 물두멍(Laver)은 제사장들이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손발을 씻게 하여 깨끗함으로서 죽임을 면하게 하는 기구다. 그리고 번제단(Altar of burnt offering)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지은 죄를 속죄받기 위하여 죄와 허물에 따르는 짐승을 드리고, 그것을 제물로 불태워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도록 하는 기구다. 물두멍: 히브리어 ‘키이요(kiyyor)’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자들의 더러운 손을 씻게 하는 기구다.
물두멍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부족하고 죄 많고, 스스로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준다. 따라서 거울같이 맑은 물두멍에 자신을 비취어보면서 일그러지고 모나고 불완전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기구다. 그래서 자신을 씻지 않으면 죽임밖에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기도해서 깨끗한 성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번제: 히브리어 olah와 헬라어 ‘홀로카우토마(oλοκα?τωμα)’는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을 잡아서 불에 태우고 죄 용서함을 받게 하는 희생을 드리는 기구를 번제단(Altar of burnt offering)이라 한다.
번제단은 완전하게 잡은 짐승을 불에 태우는 것과 같이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삶을 말한다. 그럼에도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같은 방법으로 생을 산다면, 계속해서 씻기만 하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라면 당연히 성전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신자라는 말이다. 또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다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번제단 주위에 머물고 있는 생이라면, 그도 역시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자가 아니다. 성전 바깥마당(뜰)만 밟고 다니는 신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잣대로 잴 때 제외되는 것은 성전 안에서의 경배를 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따라서 깨끗한 세마포를 입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믿음은 교회에 들락거리기는 하지만 교회마당에서 예배하는 자들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자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믿음에서 열심히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믿음이 부한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데 주님께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믿음이 부한 자라 믿음이 부족함이 없다하나 네 심령이 곤고한 것과 네 영혼이 가련한 것과 영적으로는 세마포도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신자라 했다. 벌거벗었기 때문에 “불로 연단된 금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하셨다(계3:18).
이러한 자들에게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하시면서(계3:19) “내 아버지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하였노니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1-4)하셨다. 이것이 대환난에 남겨지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다. 자기 육신을 위한 일에는 열심을 내고 돈 모으는 일에는 밤낮 수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게으른 사람들이었다.
이런 것이 벌거벗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고 따라서 제단과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 밖 마당에서 경배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척량에서 탈락시킨 것은 대환난에서 자신들의 의지를 어떻게 나타내느냐에 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예수 이름을 붙들고 죽임을 당하면 첫째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이 있다.
그러나 자기 육신의 죽음이나 고통 등을 이기지 못하고 666표를 받을 자들이 많기 때문에 1층천 낙원에 들어갈 자들은 척량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그들 중에는 예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666표를 안 받고 죽더라도 낙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연단장으로 가야될 자들도 많다. 이들은 그곳에서 회개될 때 백보좌 심판에서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는데, 그들도 1층천에 들어가기 때문에 성전 밖 마당에서 경배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은 대환난을 통하여 엄청난 박해가 있게 된다는 교훈이다.
교회가 당하는 박해는 8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요한은 거룩한 성이 42달 동안 박해가 있다고 한다.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 도성을 가리키는 뜻이 아니다. 세계 어디든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다 거룩한 성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의 모스크 맞은편에 성전이 재건되고 그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앉게 된다는 해석은 옳지 않다. 이 단원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성전과 제단과 성전 밖 마당에서 경배하는 자들의 영적상태라는 해석은 바른 해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을 유대인들로 국한시키고 세계적인 그리스도인들로 보지 않았다는 잘못을 범하였다는 교훈이다. 다른 면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받았고 지상에 남아서 대환난을 당하는 자들은 유대인들과 믿지 아니했던 자들로만 해석하는 잘못이라는 교훈이다. 그런데 분명하게 교회라고 밝히고 있는데도 그리스도인들이 없다고 한다면 앞뒤가 틀리는 해석이라는 교훈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10-12장까지는 구원계획에서부터 마지막에 교회가 박해받는 과정까지의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총체적인 요약임을 깨닫지 못하고 제9장과 연결시키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장죠셉 목사
지금까지 여기에 대한 해석들은; ⓐ. 어떤 이는 ‘환난중에서 참 믿음에 있는 유대인들을 헤아려보라는 것이라’하였고, ⓑ. 다른 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내용이지만, 유형교회에 근거를 두고는 있으나 무형교회(Invisible church) 곧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척량하는 것’이라고 애매한 해법으로 설명하였고, ⓒ. 또 다른 이는 ‘이스라엘이 이슬람의 오마르 모스크 (오마르는 건물 명칭. 모스크는 회교도의 성전이란 뜻)를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스라엘 성전이 지어지면, 적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앉게 될 때 바깥마당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짓밟는 일’이라고 해석하였다.
유대인의 성전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성이 함락될 때 파괴되었다. 예수님은 성전을 향하여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고 예언했는데 예언대로 됐다(마24:2,눅19:44). 주후 70년경 유대나라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키다가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함락시킬 때 성전을 불로 태워버렸다. 파괴되기 이전의 성전은 돌로 지어졌고, 제단 안에는 금붙이가 많았는데 불이 나서 금이 녹아내렸다. 군사들이 금을 찾기 위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허물고 들추어냄으로서 예수님의 예언대로 되어진 것을 역사는 증거 한다.
이러한 성전 터에 모하멧(Mohammed; 570-632 AD)을 교주로 섬기는 이슬람교의 ‘오마르 모스크’가 건립되어 졌다. Islam 성지는 Arabia Mecca에 있으며 코란(Koran)을 정경으로 하며 주후 612년에 시작된 종파다. 원래 이스라엘 성전은 모리아 산에 세워졌는데, 그 성전 안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했던 반석이 있다(창22:2~). 이슬람교는 그들의 교주 모하멧이 이 반석에서 하늘에 들려올라가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성전이 세워졌던 그 자리에 모하멧의 사원인 ‘오마르 모스크’를 짓고 제2의 성지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모하멧을 믿는 아랍의 2억 인구는 자기들의 오마르 모스크를 헐고 그 자리에 유대인의 성전을 짓는 것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혹이라도 유대인들이 그 자리에 성전을 짓기 위해 오마르 모스크를 헐었다가는 아랍이 성전(Holy war)을 선포하고 결사적인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현지에 가서 보면 외국인들은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만 유대인들은 절대로 못 들어가게 한다. 유대인들은 그 근체에서 얼씬도 못하게 막는다. 이러한 그들의 모스크를 헐고 이스라엘 성전을 새로 짓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성전이 재건되고 그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앉게 된다는 해석은 설득을 얻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11장을 이해하기 위해 단원을 넷으로 세분해서 척량의 대상과, 두증인의 정체와 그들의 부활은 언제인가?
세상에 나타나는 짐승의 시대(Beast era)에 관한 내용으로 나누어서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① 성전과, 제단 척량과, 성전 밖 마당문제.(1-2) ② 두 증인의 정체와 영적전쟁.(3-6) ③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Beast)의 등장.(7-10) ④ 사명 자들의 부활은 3일반 후(After)에 있다.(11-13) 1. 신자들의 믿음을 세 부류로 분류하라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11:1) 천사는 요한에게 갈대 하나를 주면서 성전과 제단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척량하고 성전 바깥마당은 척량하지 말라한다. 문자적으로 볼 때 제단은 성전 안에 있는 위치가 되겠고, 따라서 성전은 경배하는 자들이 들어갈 건물이다. 그리고 마당은 문자대로 건물 바깥에 아무것도 가려진 것이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천사는 두 곳만 척량하고 밖은 하지 말라 하면서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서 42달 동안 거룩한 성을 짓밟게 된다고 한다. 갈대는 척량(Measure)하기 위한 잣대와 같은 의미다. 따라서 요한에게 말한 갈대는 신자들의 믿음을 재는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을 셋으로 분류시킨다고 알려주신다. 첫째로 좋은 믿음은 제단 안에서의 경배하는 신자들의 믿음이다. 두 번째로 중간 믿음은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신자들이다. 마지막으로는 성전 밖 마당에서 예배하는 자들과 같은 자들로 분류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경배하는 자라면 성전과 제단에 관한 비밀을 알아야 된다.
성전의 유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성전을 Tabernacle 이라 한다. 미쉬칸(mishkan)은 ‘머물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성막은 이동시킬 수 있는 장소로서 모세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백성들 가운데 거하는 장소이다. 성막 안에는 하나님의 법궤를 두고 광야기간 동안 함께 하시면서 먹이시고 입히시며 인도하며 만나주시던 것이 성막이다. 그러므로 회막( Tabernacle)은 모임에 있다. 이 낱말은 약속에 의하여 만남을 뜻한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교회에 모이는 목적은 하나님을 만남에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하시고(출29:42-43), 또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하였으므로(민17:4) 성전은 하나님과의 교제(Follow ship)를 위한 만남에 있음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교회라는 성전에 모일 때,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어야 된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려 하시는가?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하시고(출29:42),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하셨다(출33:11). 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하였다(민7:89). 그러므로 신자가 교회에 출석하는 목적은 사람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은총을 주신 예수를 만나서 교제함이 목적이어야 된다. 또한 척량문제는 땅에서 만의 척량이 아니다. 하늘에서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경에 일렀으되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말씀은 불변의 진리다(갈6:7-8).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과정을 지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떻게 죽던 한번은 죽어야 된다. 그러나 문제는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하였다.(고전15:42-44) 2. 성전 안에서의 경배 성도들 성막의 원리에 근거하여 세 부류의 신자들로 척량(Measurement)하라는 뜻이 무엇인지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성막이 이동될지라도 그 안에 설치되는 기구들은 변동 없이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이처럼 신자들은 생활과 주변이 흔들리고 변동이 생겨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서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된다. 물론 이러한 사람은 번제단에서 태워졌던 번제물처럼 그리스도에 의하여 자신의 죄가 용서받은 신자를 말한다. 또한 제사장들이 물두멍에서 자신의 손을 깨끗하게 씻음과 같이 성령과 물로 거듭나는 삶의 신자를 말한다. 진설병: 히브리어서 ‘레쳄 패님(lechem p?nim)’과 헬라어서 ‘프로테시스(πρ?θεσιs)’는 성막 안에 있는 진설상에 두어서 하나님 앞에 항상(Always) 있게 함이다. 이토록 하나님의 제단에 감사함으로 자신의 헌물을 항상 넉넉하게 채우는 신자라야 된다는 것이다.
진설병의 의미는 일상생활에 대한 감사함이다. 감사는 찬양과는 분명히 다르고 찬양은 경배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역사에 관한 것이다. 감사는 우리 생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서 당연히 해야 할 우리의 의무다. 그러기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하신 것이다(살전5:16,18). 왜 감사의 삶이 되어야하는가? 감사가 되지못하면 바깥마당에서 경배하는 신자가 되기 때문에 항상 감사의 삶이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한다고 좋은 일이나 나쁜 일,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인식하면 안 된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파멸시키는 것뿐이기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하심이라” 하셨다(요일3:8). 그러므로 감사의 조건을 알아야 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였으니, ‘안에서’와 ‘관해서’란 말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에게 발생되는 모든 일에 ‘관해서’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든 예수 ‘안에서’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 감사는 위대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준비단계이다. 계속되는 감사는 성령의 한 열매가 된다. ⓑ. 감사는 본질적으로 성령 충만의 표현이기에 감사가 없다는 것은 성령 충만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 끝으로 감사의 삶은 기적을 일으키므로 이러한 신자는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로 척량 을 받는다.
감사하는 삶의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예물(헌물)로 항성 채우는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감사함으로 예물을 드리는 믿음은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자 일수밖에 없다. 등대: 순금으 로 만들어진 ‘럭니아(λυχν?α)’는 성전 안을 밝혀주는 일곱 등잔으로 구성해 성전 안 왼편에 놓여진다. 등불은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나타내) 빛이시다. 찬양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에 대한 성품에 관한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향하여 관심을 모으시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시도록 하는 일이다. 금 등대는 일곱 개의 불이 붙여진다.
일곱은 하나님의 특별 속성인데, 하나님의 지식, 지혜, 선, 성결, 의, 진실, 주권,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삶이어야 된다. 찬양은 소리 내는 찬송이 아니다. 찬양은 범사에 감사로서 항상 마음에 평강을 누리면서 기쁨으로 생활할 때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속성이 높임을 받게 하는 삶이 찬양이다. 따라서 찬양으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사람은 성전 안을 밝히는 믿음이므로 이러한 신자는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이다. 이러한 신자는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함이 항상 떠나지 아니하는 분향단의 삶이다. 분향단: 히브리어 ‘퀘토레트(qetoreth madsch)’와 헬라어 ‘더미아마(θυμ?αμα)’는 하나님 앞으로 올리는 헌향(獻香)이다. 이 헌향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함을 말한다.
중요함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이 헌향이 하나님에게 상달될 때 죄 사함이 받아져서,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로 들어가려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으로 사는 신자는 자신의 허물이 사함 되는 삶이 하나님 앞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삶의 신자는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의 자격은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쳐서, 감사와 찬양과 주님을 사랑하는 향연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함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중요함은 이들의 믿음은 증거궤가 있는 지성소로 일컫는 제단까지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안타깝게도 맑고 빛나는 세마포를 입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들어갈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2층천까지 들어갈 자로 계수된다는 뜻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장자에 속하는 왕권이나 순교자의 반열도 아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어린양 신부의 반열은 더더욱 아니다.
제단에서의 경배 성도들 제단은 휘장으로 가려진 하나님의 지성소를 가리킨다. 앞에서 보았듯이 분향단을 지나야 비로써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다. 궤안에는 만나와, 싹 난지팡이와, 십계명의 돌 판이 들어있다. 만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을 살리시는 말씀이다.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질서유지를 말한다. 돌판은 십계명자체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것들을 넣어두고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 판을 궤위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하셨다(출25:21-22).
또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막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장소”라 하였다.(출30:6) 이처럼 제단에서부터 분향단까지 돌아오는 믿음의 소유자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믿음이다. 이사야, 다니엘, 엘리야, 엘리사, 호세아, 예레미아 등 많은 선진들이 날마다의 삶에서 그랬듯이, 이러한 신자는 장자의 총회에 들어갈 믿음이란 뜻이다. 이들은 깨끗하고 맑고 빛나는 세마포를 입은 자들이요, 어린양의 신부들을 만나게 될 자들이다.
이들은 부활과 휴거된 자들, 구약 선진들,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순교자들처럼, 이기는 자들이기에 그들에게도 장자의 총회에 들어가는 자격을 주어서 시온에 들어갈 자들이다. 이 무리들은 셋째하늘 나라인 시온에 들어갈 반열의 소유자로 인정함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갈대를 주면서 이런 자들을 척량(Measurement) 하라고 요한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2층천 하늘나라(βασιλε?α)와 3층천 하늘나라(Σι?ν)에 들어갈 성도들로 분류가 끝나게 된다. 따라서 극심한 대환난의 고통은 성전 밖 마당만 밟고 다니던 자들은 하나님의 계수에서 탈락시키신다. 저들은 42달 동안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었다 하시는데 왜 저들이 이러한 고통을 당해야 되는가를 깨달아야 된다.
성전 밖에서의 경배 신자들 성전 밖이란 성막에서 보면 성막 뜰 밖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물두멍과 번제단이 놓여있다. 물두멍(Laver)은 제사장들이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손발을 씻게 하여 깨끗함으로서 죽임을 면하게 하는 기구다. 그리고 번제단(Altar of burnt offering)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지은 죄를 속죄받기 위하여 죄와 허물에 따르는 짐승을 드리고, 그것을 제물로 불태워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도록 하는 기구다. 물두멍: 히브리어 ‘키이요(kiyyor)’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자들의 더러운 손을 씻게 하는 기구다.
물두멍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부족하고 죄 많고, 스스로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준다. 따라서 거울같이 맑은 물두멍에 자신을 비취어보면서 일그러지고 모나고 불완전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기구다. 그래서 자신을 씻지 않으면 죽임밖에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기도해서 깨끗한 성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번제: 히브리어 olah와 헬라어 ‘홀로카우토마(oλοκα?τωμα)’는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을 잡아서 불에 태우고 죄 용서함을 받게 하는 희생을 드리는 기구를 번제단(Altar of burnt offering)이라 한다.
번제단은 완전하게 잡은 짐승을 불에 태우는 것과 같이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삶을 말한다. 그럼에도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같은 방법으로 생을 산다면, 계속해서 씻기만 하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라면 당연히 성전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신자라는 말이다. 또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다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번제단 주위에 머물고 있는 생이라면, 그도 역시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자가 아니다. 성전 바깥마당(뜰)만 밟고 다니는 신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잣대로 잴 때 제외되는 것은 성전 안에서의 경배를 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따라서 깨끗한 세마포를 입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믿음은 교회에 들락거리기는 하지만 교회마당에서 예배하는 자들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자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믿음에서 열심히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믿음이 부한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데 주님께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믿음이 부한 자라 믿음이 부족함이 없다하나 네 심령이 곤고한 것과 네 영혼이 가련한 것과 영적으로는 세마포도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신자라 했다. 벌거벗었기 때문에 “불로 연단된 금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하셨다(계3:18).
이러한 자들에게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하시면서(계3:19) “내 아버지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하였노니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1-4)하셨다. 이것이 대환난에 남겨지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다. 자기 육신을 위한 일에는 열심을 내고 돈 모으는 일에는 밤낮 수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게으른 사람들이었다.
이런 것이 벌거벗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고 따라서 제단과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 밖 마당에서 경배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척량에서 탈락시킨 것은 대환난에서 자신들의 의지를 어떻게 나타내느냐에 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예수 이름을 붙들고 죽임을 당하면 첫째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이 있다.
그러나 자기 육신의 죽음이나 고통 등을 이기지 못하고 666표를 받을 자들이 많기 때문에 1층천 낙원에 들어갈 자들은 척량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그들 중에는 예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666표를 안 받고 죽더라도 낙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연단장으로 가야될 자들도 많다. 이들은 그곳에서 회개될 때 백보좌 심판에서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는데, 그들도 1층천에 들어가기 때문에 성전 밖 마당에서 경배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은 대환난을 통하여 엄청난 박해가 있게 된다는 교훈이다.
교회가 당하는 박해는 8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요한은 거룩한 성이 42달 동안 박해가 있다고 한다.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 도성을 가리키는 뜻이 아니다. 세계 어디든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다 거룩한 성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의 모스크 맞은편에 성전이 재건되고 그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앉게 된다는 해석은 옳지 않다. 이 단원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성전과 제단과 성전 밖 마당에서 경배하는 자들의 영적상태라는 해석은 바른 해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을 유대인들로 국한시키고 세계적인 그리스도인들로 보지 않았다는 잘못을 범하였다는 교훈이다. 다른 면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받았고 지상에 남아서 대환난을 당하는 자들은 유대인들과 믿지 아니했던 자들로만 해석하는 잘못이라는 교훈이다. 그런데 분명하게 교회라고 밝히고 있는데도 그리스도인들이 없다고 한다면 앞뒤가 틀리는 해석이라는 교훈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10-12장까지는 구원계획에서부터 마지막에 교회가 박해받는 과정까지의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총체적인 요약임을 깨닫지 못하고 제9장과 연결시키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장죠셉 목사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 - God's Vision For the Last-Day Church - By David Wilkerson 나는 여러분과 하나님의 마지막 시대 의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비전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떠할 것인지 성경이 명확하게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미국교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가증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미국 전역과 전세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맞게 살아가는 남은 교회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 교회들은 거룩한 삶을 인도하며, 의를 설교하고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살아있으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고 예수님을 위한 강한 영향을 주는 생명체이며 완전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종파들은 대부분 성령없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임재가 없으며 모든 영적인 은사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능력, 회개 또는 구원의 메시지가 없는 일종의 종교예식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들은 세상과 편안하며 영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입니다. 그들은 죄를 달랩니다. 즉 동성연애를 방관하며 이혼을 간과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비웃으며 천국, 지옥, 회개 그리고 심판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내던집니다. 그런 교회들은 심지어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의아해 합니다. 그 교회들은 너무 차갑고, 약하고 겁이 많아서 세상이 그 교회들을 조롱합니다. 그 교회에는 영향력, 존경, 사회에 대한 영향 등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사단을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단의 군대를 지옥으로 몰아냈으며 기도로 감옥의 문을 열고 통치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어떠한 무기도 그 교회에 대항해서 번창할 수 없었습니다! 초기 신자들은 그러한 믿음과 능력을 갖고 있어서 저는 자들이 일어나 뛰고 거지들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였고 듣지 못하는 귀를 열었고 모든 종류의 질병을 고쳤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죽은 자들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1세기 교회의 복사본이나 반복판이 되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초대교회보다 훨씬 더 강력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훨씬 더 강력한 예수님의 나타나심과 더불어 더 힘있고 더 강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성령으로부터의 기름부으심이 클것입니다.
오순절보다도 더 강력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마지막을 위해서 가장 좋은 포두주를 아끼십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이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는 어떤 예언적 진실이 잠기워져 있으며 마지막 시대에만 그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 니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다니엘 12:9-10)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세상에서 새로운 일들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일들은 이미 성경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자신이 이것들을 보았으나 그의 모든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지혜를 가지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하니라...."(8절)
그러나 오늘날 성령은 이러한 것들을 영적이고 분별력 있는 성도들에게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9-10) 성령은 우리에게 이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바로 지금 주님은 주님의 마음을 따라 강력한 그러나 겸손한 목자의 군대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현대적인 교회를 세운 죄와 죽음으로부터 돌아선 굶주린 양의 남은 무리들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지옥의 문이 이기지 못하는 무대가 교회를 위하여 설치되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뜨겁고 미지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의 기초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지상의 어떤 권력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내가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생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복음이 완전히 선포될(fully preached)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다음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직 이 세대에 "완전히 선포되지"(fully preached) 않았습니다! 몇몇 하나님의 남종과 여종의 사역을 제외하고 오늘날 우리가 듣는 복음은 바울이 이야기한 "완전히 선포된"(fully preached) 복음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세대에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fully preached)"(로마서 15:19) 그리고 그는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말보다 훨씬 이상가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말과 행위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8절)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단지 나의 선포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말이 기적적인 행위들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섰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19절) 만약 바울이 자신의 말을 따르는 기사와 표적없이 전하고 가르쳤다면 그의 메시지는 온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것은 완전히 선포된 복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린도후서 12:12) 이 구절에서 바울의 말을 주의해 보십시오. 표적, 기사, 능력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이러한 말을 들을 때 겁을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러한 말들이 사악한, 능력에 주려있는 설교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가증스러운 것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완전히 선포된 복음의 통탈할만한 왜곡을 보아왔습니다. 많은 지혜있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믿는 이들이 충격을 받거나 억울함을 당했습니다. 그들을 믿음과 능력의 인물로 세우는 사기꾼들이 초자연적인 역사를 조롱하고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짓말장이들은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자존심과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활동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그것들이 TV와 신문에서 저주를 받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행상주의, 연출법,거짓 치유, 확증되지 않은 주장, 돈을 쫓는 것, 과장 등을 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눈에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사 가운데 가장 부끄러운 에피소드중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성공의 복음"이 따라왔습니다. 이것은 그 왜곡을 가중시켰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복권에 당첨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유하게 된다는 약속, 자동차, 옷, 땅, 집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나타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삶에서 현실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복음은 예수님을 자기자식을 애지중지하는 포도주 많이 마시기 대회의 열광자로 묘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왜곡들이 많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목사들과 전도사들과 평신도들을 완전히 선포된 복음의 진리로부터 돌아서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표적과 기사, 기적 등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친애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는데 능하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치료자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강하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위대한 초자연적인 역사가 신약의 교회에서는 아무 왜곡없이 일어났습니다. 광고나 쇼맨쉽, 혹은 모든 능력이나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 하나 없이 말입니다. 이 바울의 사역은 본보기를 제공합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너무 긴 설교를 해서 유두고라고 불리우는 한 젊은이가 창문 문지방에 앉아있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소년은 3층에서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유두고가 죽은채 들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0:5-12)바울이 아래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모든 사람을 조용히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행했습니다. 그는 죽은 젊은이의 몸위로 자신의 몸을 뻗쳤습니다. 갑자기 유두고에게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 젊은이는 부활했습니다.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능력있는 기적입니까!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바울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무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두고를 그의 전도여행에 동행하여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도록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던 젊은이를 보라. 하나님은 그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위대한 믿음과 능력의 사람, 바울의 설교를 들으십시오"라는 팜플렛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 일은 일어나지 조차 않은 것 같았습니다. 대신에 모든 사람이 단지 3층에 다시 올라가서 성찬식을 갖고 바울은 계속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은 유두고를 더 이상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왜일까요? 교회가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전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는 표적과 기사가 따랐습니다. 이 강력한 역사가 성도들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 위대한 역사는 "특별한 기적(special miracles, 희한한 능)"이라고 불리웠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사도행전 19:11-12)
어떻게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그런 영광을 가질 수 있을까요? 바울은 믿는 이들을 그런 물건을 가지고 보냈으며 그들은 차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이 의복을 걸치고 기도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고 그것을 입으면 그분께서 당신을 치료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물건들을 이마나 팔다리 혹은 몸에 놓았을 때 그들은 곧바로 병상이나 구걸하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고침받았습니다! 이 "특별한 기적(special miracles, 희한한 능)"은 믿는 이들의 일상생활과 예배에서 기대되는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위해서 팡파르가 울리는 거대한 집회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이 능력의 역사를 주님과 동행하는 매일의 삶의 한 부분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만약 선포(preaching)만으로 하나님의 열망을 채울 수 있다면 미국은 오래 전에 그리스도께 속하였을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3개월간의 대담한 선포(preaching)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 (9절) 에베소는 불경하고, 우상숭배가 많은 마술에 빠져든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마술책과 주술, 묘기, 마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3개월간 용감히 선포한 후 그들은 더욱 더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바울의 손을 통하여 특별한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갑자기 아 픈자가 고침을 받았고 저는 자가 건강한 다리를 갖게 되었으며 눈먼 자의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때가 에베소의 사단의 권세가 물러나기 시작한 때입니다.
스게와라고 하는 제사장의 일곱 아들은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바울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에게서 악귀를 쫓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안에 있던 군대는 그들을 대항하여 공격했습니다. 그들의 옷을 찢고 격렬하게 그들을 쳤습니다. 그들은 발가벗은채 소리지르며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도망쳤습니다! 이 말이 전 도시에 퍼졌습니다.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17절). 사람들은 "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사단의 능력보다 뛰어난 권세를 갖고있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시의 광장에서 큰 불을 놓았습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19절) 수천권의 귀신을 쫓아내는 법, 마술, 신비과학, 마법에 관한 책들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표적과 기사와 능력의 행사와 함께 접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선포와 가름침 이상의 것들을 하도록계획하고 계십니다.
나는 복음이 능력과 성령의 나타내심 -능력의 기사를 행하고 복음이 사실 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완전히 선포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바울은 대담하게 증언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린도전서 2:4) 희랍어로는 여기에 "증거를 가지고"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증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과 성령은 기사를 통해 나를 도우십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히브리서 2:4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바울의 메시지를 표적과 기사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히브리서 2:4) 신약의 성도들은 한가지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사도행전 4:30) 이 사도들은 완전한 복음을 전파하며 어디든 갔습니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나니"(사도행전 2:43)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5:12)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6절) 마지막으로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표적과 기사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가장 결론적인 구절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나니 (사도행전 14:3) 이 구절은 사도들이 오랫동안 담대히 섬기며 은혜와 회개에 대해 선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가 그들의 손으로 행해지도록 하셨습니다! 반대로 오늘날의 교회는 약하고 비효율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더 이상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능력의 행사를 행하시기를 그만두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언제 이런 초자연적인 활동이 멈췄는지 아무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죽었을 때 기적이 멈추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이 멈춘 것이 약 AD 150년 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께서 "이만하면 됐다! 수천년동안 나는 표적과 기사를 믿는 자들을 위해 행했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은 완성된 성경을 갖고 있고 더 지혜롭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중단하겠다. 더 이상 기적, 표적, 치유는 없다!"라고 말씀하신 날이나 주간이나 달이나 해를 감히 찝어낼 수 있겠습니까. 친애하는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들 뒤에는 놀라운 속임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시대에는 사탄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사를 가지고" 등장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2:9)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인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마가복음 13:22) 생각해 보십시오. 사단, 거짓 그리스도인, 거짓 선지자, 모두가 자신의 메시지를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확인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그런 강력한 표적을 행하는 사단에게 노출시키시고 강력한 무기나 초자연적인 역사없이 우리를 내버려 두실것이라고 믿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단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나 하나님은 할 수 없으시다"라고 이야기하는 교회를 가지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남은 교회가...두루 나가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마가복음 16:20)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의 무리들 가운데 있는 모든 거짓 표적과 기사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의 막대기가 바로오의 뱀을 삼킨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이 마지막 시대에 모든 사단의 악한 역사를 삼켜버릴 것이라고 나는 대답할 것입니다.
사단의 업적은 하나님의 믿을 수 없는 표적과 기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의 기사는 진짜이며, 진실되고,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잘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그 기사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평범한, 거룩한, 구별된 성도의 손으로부터 뿜어나올 것입니다. 이 성도들은 비밀스런 기도의 골방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은 작지만 준비된 군대로서 믿음으로 가득차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 열망이 없을 것입니다.
팡파레가 없이도 그들은 병원으로 가정으로 길가로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의 손에 손을 얹고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보게될 것입니다. 그들은 사단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지위나 권세를 던져버릴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너무나 강력해서 그들의 기도는 복음을 위하여 전세계를 열어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그들의 능력의 역사로 확인하실 것입니다! 이 마지막시대의 남은 교회는 떡으로만 살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하나님이 쓰시기에는 너무나 평범하다고 생각한다면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마지막 시대의 사역을 이름있는 전도사나 목사를 통해 하시지 않을 것입다. 그들만으로는 하나님의 영의 거대한 움직임을 다룰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주부, 십대, 나이 든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을 필요로 하실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군대는 떡으로만 사는 습관을 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예수님은 사단이 광야에서 돌을 떡으로 바꾸어 보라고 시험했을 때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떡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자연적인 물질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음식, 집, 옷, 노동, 봉급을 포함합니다. 떡은 생계 즉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상의 것들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들만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삶은 직업, 집, 지불해야 할 돈으로 싸여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는 자기들의 필요, 자신들의 상처, 자신의 문제, 자신이 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떡으로만 살고있습니다! 물론 직업을 가지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명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떡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일생의 시간을 그저 생존하는데에만 사용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배우자를 찾는 것만을 생각하며 모든 시간을 허비합니까? 그들의 기도중 얼마가 하나님께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달라고 요청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그들은 떡으로만 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부부가 자기 자녀의 문제를 가지고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까? 이 한가지의 문제가 그들의 모든 생각과 모든 기도를 삼켜버립니다. 그들은 한가지 필요 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태복음 6: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10절)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 지난 6개월동안 가장 많이 생각해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시간과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까? 주로 떡의 문제나 개인적인 필요였습니까? 떡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여러분에게 생명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광야에서 살고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일어나서 떡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떡을 주시자 그들은 고기를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개인적인 필요를 채워 달라고 외쳤습니다.
40년 동안 매일 그러했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그것은 지루함, 고역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위해서 그런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분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살아야 한다! 나는 네게 떡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말아라. 계속 나아가라! 내가 네게 말하였다. 그곳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강과 나무와 숲과 초원이 있는 땅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땅이 너희의 것이 되기를 원한다!" 만약 여러분의 전생애가 생존하는데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예수님에게 사로잡혀 그의 말씀안에 자라며 당신의 마음을 신랑을 위해 꾸며진 신부로서 준비시키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루하며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생명의 일부분을 이곳 저곳에서 맛볼 수 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생명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은 떡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기르고 계십니다. 대신에 그들은 밤 12시에도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생존의 광야에서 살아가는데 지쳤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떡으로만 살아가는 젖을 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이 받는 훈련은 성령으로부터 와서 비밀스런 기도의 골방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자신을 끊임없이 준비된 상태에 있도록 준비하는데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군대의 모든 구성원은 반드시 중심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대한 마지막 부으심을 행할 자세를 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요한은 "주를 위하여 준비된(prepared) 백성을 준비시키기(make ready) 위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선포, 자신의 마음을 준비시키라는 백성들에 대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디모데후서 2:21)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 마음을 여호와 께로 향하여(prepare)그만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새로운 일을 하실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무엘상 7:3) 또한 다윗은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라고 말했습니다.(시편 10:17)
이 마지막 구절에서 다윗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알기 위한 간단한 3단계의 계획의 틀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께 청원함(기도함)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마음을 준비함 하나님은 여러분이 알도록 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세계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가장 많은 성령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잔에서 부어주실 것입니다. 커다란 회개가 여러분의 이웃과 직장동료와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느곳에서든지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은 교회에서 돌아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을 찾을 것입니다. 그들은 준비된 마음을 갖고있는 사람을 필사적으로 찾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수만명의 평범한 종들을 그분의 마지막 시대의 사람 대 사람의 사역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안에서, 여러분을 통해서 지금 그분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광야의 생활을 인내하면서 그냥 앉아계십니까?
오늘 하나님께 고백하십시오. "오 하나님 제 인생이 가치가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지금 절망의 광야에서 떡으로만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빠지십시오. 매일 주님을 찾기를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키는데는 혁명적인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의미와 완전함이 있게 되는 것은 이러한 준비를 통해서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감정과 성품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안에 있는 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준비된 것을 보시면 그분의 사역을 하기 위한 놀라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앞에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여러분은 악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마음을 오로지하여(not prepared his heart)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함으로 악을 행하였더라 (역대하 12:14) 우리는 이시간에도 능력의 역사를 위하여 자기 백성을 준비시키시는 권능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이사야 42:13)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키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마지막 시대의 부으심을 위해 무장되고 준비된 종이 되십시오. 그러면 이 마지막 시간에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안에 살아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Used with permission granted by World Challenge, P. O. Box 260, Lindale, TX 75771 USA.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가증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미국 전역과 전세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맞게 살아가는 남은 교회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 교회들은 거룩한 삶을 인도하며, 의를 설교하고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살아있으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고 예수님을 위한 강한 영향을 주는 생명체이며 완전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종파들은 대부분 성령없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임재가 없으며 모든 영적인 은사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능력, 회개 또는 구원의 메시지가 없는 일종의 종교예식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들은 세상과 편안하며 영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입니다. 그들은 죄를 달랩니다. 즉 동성연애를 방관하며 이혼을 간과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비웃으며 천국, 지옥, 회개 그리고 심판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내던집니다. 그런 교회들은 심지어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의아해 합니다. 그 교회들은 너무 차갑고, 약하고 겁이 많아서 세상이 그 교회들을 조롱합니다. 그 교회에는 영향력, 존경, 사회에 대한 영향 등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사단을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단의 군대를 지옥으로 몰아냈으며 기도로 감옥의 문을 열고 통치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어떠한 무기도 그 교회에 대항해서 번창할 수 없었습니다! 초기 신자들은 그러한 믿음과 능력을 갖고 있어서 저는 자들이 일어나 뛰고 거지들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였고 듣지 못하는 귀를 열었고 모든 종류의 질병을 고쳤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죽은 자들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1세기 교회의 복사본이나 반복판이 되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초대교회보다 훨씬 더 강력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훨씬 더 강력한 예수님의 나타나심과 더불어 더 힘있고 더 강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성령으로부터의 기름부으심이 클것입니다.
오순절보다도 더 강력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마지막을 위해서 가장 좋은 포두주를 아끼십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이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는 어떤 예언적 진실이 잠기워져 있으며 마지막 시대에만 그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 니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다니엘 12:9-10)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세상에서 새로운 일들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일들은 이미 성경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자신이 이것들을 보았으나 그의 모든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지혜를 가지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하니라...."(8절)
그러나 오늘날 성령은 이러한 것들을 영적이고 분별력 있는 성도들에게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9-10) 성령은 우리에게 이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바로 지금 주님은 주님의 마음을 따라 강력한 그러나 겸손한 목자의 군대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현대적인 교회를 세운 죄와 죽음으로부터 돌아선 굶주린 양의 남은 무리들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지옥의 문이 이기지 못하는 무대가 교회를 위하여 설치되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뜨겁고 미지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의 기초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지상의 어떤 권력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내가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생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복음이 완전히 선포될(fully preached)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다음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직 이 세대에 "완전히 선포되지"(fully preached) 않았습니다! 몇몇 하나님의 남종과 여종의 사역을 제외하고 오늘날 우리가 듣는 복음은 바울이 이야기한 "완전히 선포된"(fully preached) 복음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세대에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fully preached)"(로마서 15:19) 그리고 그는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말보다 훨씬 이상가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말과 행위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8절)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단지 나의 선포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말이 기적적인 행위들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섰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19절) 만약 바울이 자신의 말을 따르는 기사와 표적없이 전하고 가르쳤다면 그의 메시지는 온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것은 완전히 선포된 복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린도후서 12:12) 이 구절에서 바울의 말을 주의해 보십시오. 표적, 기사, 능력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이러한 말을 들을 때 겁을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러한 말들이 사악한, 능력에 주려있는 설교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가증스러운 것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완전히 선포된 복음의 통탈할만한 왜곡을 보아왔습니다. 많은 지혜있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믿는 이들이 충격을 받거나 억울함을 당했습니다. 그들을 믿음과 능력의 인물로 세우는 사기꾼들이 초자연적인 역사를 조롱하고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짓말장이들은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자존심과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활동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그것들이 TV와 신문에서 저주를 받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행상주의, 연출법,거짓 치유, 확증되지 않은 주장, 돈을 쫓는 것, 과장 등을 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눈에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사 가운데 가장 부끄러운 에피소드중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성공의 복음"이 따라왔습니다. 이것은 그 왜곡을 가중시켰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복권에 당첨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유하게 된다는 약속, 자동차, 옷, 땅, 집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나타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삶에서 현실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복음은 예수님을 자기자식을 애지중지하는 포도주 많이 마시기 대회의 열광자로 묘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왜곡들이 많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목사들과 전도사들과 평신도들을 완전히 선포된 복음의 진리로부터 돌아서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표적과 기사, 기적 등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친애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는데 능하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치료자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강하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위대한 초자연적인 역사가 신약의 교회에서는 아무 왜곡없이 일어났습니다. 광고나 쇼맨쉽, 혹은 모든 능력이나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 하나 없이 말입니다. 이 바울의 사역은 본보기를 제공합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너무 긴 설교를 해서 유두고라고 불리우는 한 젊은이가 창문 문지방에 앉아있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소년은 3층에서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유두고가 죽은채 들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0:5-12)바울이 아래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모든 사람을 조용히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행했습니다. 그는 죽은 젊은이의 몸위로 자신의 몸을 뻗쳤습니다. 갑자기 유두고에게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 젊은이는 부활했습니다.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능력있는 기적입니까!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바울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무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두고를 그의 전도여행에 동행하여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도록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던 젊은이를 보라. 하나님은 그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위대한 믿음과 능력의 사람, 바울의 설교를 들으십시오"라는 팜플렛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 일은 일어나지 조차 않은 것 같았습니다. 대신에 모든 사람이 단지 3층에 다시 올라가서 성찬식을 갖고 바울은 계속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은 유두고를 더 이상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왜일까요? 교회가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전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는 표적과 기사가 따랐습니다. 이 강력한 역사가 성도들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 위대한 역사는 "특별한 기적(special miracles, 희한한 능)"이라고 불리웠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사도행전 19:11-12)
어떻게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그런 영광을 가질 수 있을까요? 바울은 믿는 이들을 그런 물건을 가지고 보냈으며 그들은 차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이 의복을 걸치고 기도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고 그것을 입으면 그분께서 당신을 치료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물건들을 이마나 팔다리 혹은 몸에 놓았을 때 그들은 곧바로 병상이나 구걸하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고침받았습니다! 이 "특별한 기적(special miracles, 희한한 능)"은 믿는 이들의 일상생활과 예배에서 기대되는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위해서 팡파르가 울리는 거대한 집회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이 능력의 역사를 주님과 동행하는 매일의 삶의 한 부분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만약 선포(preaching)만으로 하나님의 열망을 채울 수 있다면 미국은 오래 전에 그리스도께 속하였을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3개월간의 대담한 선포(preaching)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 (9절) 에베소는 불경하고, 우상숭배가 많은 마술에 빠져든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마술책과 주술, 묘기, 마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3개월간 용감히 선포한 후 그들은 더욱 더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바울의 손을 통하여 특별한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갑자기 아 픈자가 고침을 받았고 저는 자가 건강한 다리를 갖게 되었으며 눈먼 자의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때가 에베소의 사단의 권세가 물러나기 시작한 때입니다.
스게와라고 하는 제사장의 일곱 아들은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바울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에게서 악귀를 쫓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안에 있던 군대는 그들을 대항하여 공격했습니다. 그들의 옷을 찢고 격렬하게 그들을 쳤습니다. 그들은 발가벗은채 소리지르며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도망쳤습니다! 이 말이 전 도시에 퍼졌습니다.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17절). 사람들은 "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사단의 능력보다 뛰어난 권세를 갖고있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시의 광장에서 큰 불을 놓았습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19절) 수천권의 귀신을 쫓아내는 법, 마술, 신비과학, 마법에 관한 책들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표적과 기사와 능력의 행사와 함께 접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선포와 가름침 이상의 것들을 하도록계획하고 계십니다.
나는 복음이 능력과 성령의 나타내심 -능력의 기사를 행하고 복음이 사실 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완전히 선포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바울은 대담하게 증언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린도전서 2:4) 희랍어로는 여기에 "증거를 가지고"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증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과 성령은 기사를 통해 나를 도우십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히브리서 2:4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바울의 메시지를 표적과 기사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히브리서 2:4) 신약의 성도들은 한가지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사도행전 4:30) 이 사도들은 완전한 복음을 전파하며 어디든 갔습니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나니"(사도행전 2:43)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5:12)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6절) 마지막으로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표적과 기사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가장 결론적인 구절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나니 (사도행전 14:3) 이 구절은 사도들이 오랫동안 담대히 섬기며 은혜와 회개에 대해 선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가 그들의 손으로 행해지도록 하셨습니다! 반대로 오늘날의 교회는 약하고 비효율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더 이상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능력의 행사를 행하시기를 그만두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언제 이런 초자연적인 활동이 멈췄는지 아무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죽었을 때 기적이 멈추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이 멈춘 것이 약 AD 150년 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께서 "이만하면 됐다! 수천년동안 나는 표적과 기사를 믿는 자들을 위해 행했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은 완성된 성경을 갖고 있고 더 지혜롭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중단하겠다. 더 이상 기적, 표적, 치유는 없다!"라고 말씀하신 날이나 주간이나 달이나 해를 감히 찝어낼 수 있겠습니까. 친애하는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들 뒤에는 놀라운 속임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시대에는 사탄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사를 가지고" 등장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2:9)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인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마가복음 13:22) 생각해 보십시오. 사단, 거짓 그리스도인, 거짓 선지자, 모두가 자신의 메시지를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확인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그런 강력한 표적을 행하는 사단에게 노출시키시고 강력한 무기나 초자연적인 역사없이 우리를 내버려 두실것이라고 믿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단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나 하나님은 할 수 없으시다"라고 이야기하는 교회를 가지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남은 교회가...두루 나가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마가복음 16:20)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의 무리들 가운데 있는 모든 거짓 표적과 기사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의 막대기가 바로오의 뱀을 삼킨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이 마지막 시대에 모든 사단의 악한 역사를 삼켜버릴 것이라고 나는 대답할 것입니다.
사단의 업적은 하나님의 믿을 수 없는 표적과 기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의 기사는 진짜이며, 진실되고,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잘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그 기사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평범한, 거룩한, 구별된 성도의 손으로부터 뿜어나올 것입니다. 이 성도들은 비밀스런 기도의 골방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은 작지만 준비된 군대로서 믿음으로 가득차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 열망이 없을 것입니다.
팡파레가 없이도 그들은 병원으로 가정으로 길가로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의 손에 손을 얹고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보게될 것입니다. 그들은 사단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지위나 권세를 던져버릴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너무나 강력해서 그들의 기도는 복음을 위하여 전세계를 열어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그들의 능력의 역사로 확인하실 것입니다! 이 마지막시대의 남은 교회는 떡으로만 살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하나님이 쓰시기에는 너무나 평범하다고 생각한다면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마지막 시대의 사역을 이름있는 전도사나 목사를 통해 하시지 않을 것입다. 그들만으로는 하나님의 영의 거대한 움직임을 다룰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주부, 십대, 나이 든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을 필요로 하실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군대는 떡으로만 사는 습관을 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예수님은 사단이 광야에서 돌을 떡으로 바꾸어 보라고 시험했을 때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떡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자연적인 물질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음식, 집, 옷, 노동, 봉급을 포함합니다. 떡은 생계 즉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상의 것들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들만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삶은 직업, 집, 지불해야 할 돈으로 싸여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는 자기들의 필요, 자신들의 상처, 자신의 문제, 자신이 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떡으로만 살고있습니다! 물론 직업을 가지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명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떡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일생의 시간을 그저 생존하는데에만 사용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배우자를 찾는 것만을 생각하며 모든 시간을 허비합니까? 그들의 기도중 얼마가 하나님께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달라고 요청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그들은 떡으로만 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부부가 자기 자녀의 문제를 가지고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까? 이 한가지의 문제가 그들의 모든 생각과 모든 기도를 삼켜버립니다. 그들은 한가지 필요 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태복음 6: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10절)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 지난 6개월동안 가장 많이 생각해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시간과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까? 주로 떡의 문제나 개인적인 필요였습니까? 떡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여러분에게 생명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광야에서 살고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일어나서 떡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떡을 주시자 그들은 고기를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개인적인 필요를 채워 달라고 외쳤습니다.
40년 동안 매일 그러했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그것은 지루함, 고역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위해서 그런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분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살아야 한다! 나는 네게 떡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말아라. 계속 나아가라! 내가 네게 말하였다. 그곳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강과 나무와 숲과 초원이 있는 땅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땅이 너희의 것이 되기를 원한다!" 만약 여러분의 전생애가 생존하는데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예수님에게 사로잡혀 그의 말씀안에 자라며 당신의 마음을 신랑을 위해 꾸며진 신부로서 준비시키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루하며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생명의 일부분을 이곳 저곳에서 맛볼 수 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생명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은 떡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기르고 계십니다. 대신에 그들은 밤 12시에도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생존의 광야에서 살아가는데 지쳤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떡으로만 살아가는 젖을 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이 받는 훈련은 성령으로부터 와서 비밀스런 기도의 골방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자신을 끊임없이 준비된 상태에 있도록 준비하는데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군대의 모든 구성원은 반드시 중심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대한 마지막 부으심을 행할 자세를 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요한은 "주를 위하여 준비된(prepared) 백성을 준비시키기(make ready) 위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선포, 자신의 마음을 준비시키라는 백성들에 대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디모데후서 2:21)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 마음을 여호와 께로 향하여(prepare)그만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새로운 일을 하실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무엘상 7:3) 또한 다윗은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라고 말했습니다.(시편 10:17)
이 마지막 구절에서 다윗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알기 위한 간단한 3단계의 계획의 틀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께 청원함(기도함)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마음을 준비함 하나님은 여러분이 알도록 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세계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가장 많은 성령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잔에서 부어주실 것입니다. 커다란 회개가 여러분의 이웃과 직장동료와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느곳에서든지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은 교회에서 돌아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을 찾을 것입니다. 그들은 준비된 마음을 갖고있는 사람을 필사적으로 찾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수만명의 평범한 종들을 그분의 마지막 시대의 사람 대 사람의 사역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안에서, 여러분을 통해서 지금 그분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광야의 생활을 인내하면서 그냥 앉아계십니까?
오늘 하나님께 고백하십시오. "오 하나님 제 인생이 가치가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지금 절망의 광야에서 떡으로만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빠지십시오. 매일 주님을 찾기를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키는데는 혁명적인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의미와 완전함이 있게 되는 것은 이러한 준비를 통해서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감정과 성품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안에 있는 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준비된 것을 보시면 그분의 사역을 하기 위한 놀라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앞에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여러분은 악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마음을 오로지하여(not prepared his heart)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함으로 악을 행하였더라 (역대하 12:14) 우리는 이시간에도 능력의 역사를 위하여 자기 백성을 준비시키시는 권능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이사야 42:13)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키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마지막 시대의 부으심을 위해 무장되고 준비된 종이 되십시오. 그러면 이 마지막 시간에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안에 살아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Used with permission granted by World Challenge, P. O. Box 260, Lindale, TX 75771 USA.
다윗의 장막 - 릭 조이너
(암9:11) 그 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고, 그 터진 울타리를 고치면서 그 허물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 집을 옛날과 같이 다시 지어 놓겠다. 주님은 모세의 장막을 다시 지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솔로몬 성전을 다시지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이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다윗의 장막이다. 이것은 지금이 그때이기때문에 우리가 이해해야하는 것중 하나이다. 지금은 주님이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고 있는 때이다.
(암9:11-13) 그 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고, 그 터진 울타리를 고치면서 그 허물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 집을 옛날과 같이 다시 지어 놓겠다. 9:12 그래서 에돔 족속 가운데서 남은 자들과 나에게 속해 있던 족속을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하게 하겠다. 이것은 이 일을 이루실 주의 말씀이다. 9:13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 때가 되면, 농부는 곡식을 거두고서, 곧바로 땅을 갈아야 하고, 씨를 뿌리고서 곧바로 포도를 밟아야 할 것이다. 산마다 단 포도주가 흘러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 넘칠 것이다. 위의 구절들은 추수의 때가 너무 빨라서 땅에서 씨를 얻을 수 있기전에 그것은 성숙할 것이고, 추수꾼들이 씨를 심는 사람들의 뒤로 바짝 쫓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추수가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때에 다가가고 있고, 이 모든 것은 다윗의 장막의 회복과 연관된다.
(암9:13-15)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 때가 되면, 농부는 곡식을 거두고서, 곧바로 땅을 갈아야 하고, 씨를 뿌리고서 곧바로 포도를 밟아야 할 것이다. 산마다 단 포도주가 흘러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 넘칠 것이다. 9:14 내가 사로잡힌 내 백성 이스라엘을 데려오겠다. 그들이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 안에서 살면서 포도원을 가꾸어서 저희가 짠 포도주를 마시며, 과수원을 만들어서 저희가 가꾼 과일을 먹을 것이다. 9:15 내가 이 백성을 그들이 살아갈 땅에 심어서 내가 그들에게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뿌리가 뽑히지 않게 하겠다. 주 너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바로 그시기에 일어나고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우리는 그때가 앞으로 올것이라고 계속해서 말해서는 안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그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고 그것을 하고 계시다. 추수가 다가오고 있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있는 때이고 이스라엘과 교회사이 커다란 특별한 운명이 있는 때이다, 즉 우리는 자연적 (natural) 그리고 영적(spiritual) 자손들(seeds)을 이해해야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마지막 시대에 거하시는 장소(dwelling place)가 다윗의 장막과 같은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마지막 시대에 교회는 다윗의 장막과 같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장막을 이해할때 우리는 다윗의 마을을 이해할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가 지금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계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다윗의 마음을 풀고계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이식하고 계시고(a heart transplant),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 즉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신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고 우리가 받게 될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언적으로 솔로몬의 통치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의 영원한 구조는 그리스도가이땅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왕국시대 (Kingdom Age)를 나타낸다. 또한 우리는 다윗의 왕국을 이땅에 하나님이 영원이 거하는 거주지 (dwelling place)를 준비하고 세우며 우리 자신을 준비되게 하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시대에 다윗과 그의 사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윗의 사역은 지금의 시대와 더 연관성이 있고, 예수님 외에 성경의 어떤 리더들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교회에 생겨나기 원하는 리더쉽의 종류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심 받은 곳에 들어갈 수 있기전에, 리더쉽이 타락하고 영적으로 미침으로 인해 리더쉽에 있어 커다란 싸움(고투)이 있을 것이 믿는다.
나는 사울와의 통치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때 기름부음받았으나 일그러져 버린 리더쉽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가 우리가 하나님이 지금 시대에 계시하게 될 다윗의 사역의 실제 마음과 목적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테스트(시험)중이 하나이고,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잘 검토해야한다.
사울왕은 다윗을 멸망시키고자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다윗이 그의 운명을 성취하는 것을 막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믿기에 거의 모든 영적 세대에 이런 과정이 있어왔다고 믿는다. 각각의 새로운 영적 세대와 더불어 살아남기 위한 가장 큰 전쟁은 전 세대와 더불은 전쟁이다. 그것은 적과의 전쟁이 아니고, 우리 부모(parents)와의 전쟁이다; 새로운 세대가 전세대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가 궁극적인 테스트(시험)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테스트들(시험들)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evil)로 시험하지(tempt) 않으시나, 하나님은 우리를 테스트(test)하신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테스트하는지 당신은 아는가? 승격(promotion)을 위해서이다. 우리는 우리가 승격될 수 있도록, 우리가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과 성령님의 인치심을 더 받을 수 있도록, 테스트를 치루어야한다. 중요한 테스트가 다가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테스트를 치루고 있다. Francis Frangipane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 중의 하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테스트들중 하나도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패스할때까지 그 테스트를 계속 치룬다. 여러분들중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러한 현재 테스트를 지나가고 그 길로 부터 내려오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아직 내가 믿기에 우리중 많은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테스트가 다가오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님으로 부터 돌아서면 그들에게 내릴 것이라 약속된 가장 최악의 저주는 그들이 자신들의 자식들을 먹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가장 최악이었다.
나는 교회사가 자신들의 자식들을 먹는 교회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 하고 싶다. 그것은 악행의 궁극적인 사인이다. 우리는 탁태에 대해 법을 통과시키도록 계속 노력해야한다, 그러나 자연법(the laws of nature)은 이미 통과되었다. 대부분의 짐승들은 그들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 인류는 자신들의 자식들을 기꺼이 희생한다. 교회안에서 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목적에 가장 큰 위험은 교회 자체로 부터 나오고 있다; 교회가 그들 자신의 어린아이들을 먹어치우고 있다.
오래전에, 내가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주님의 임재에 사로 잡혔을때, 주님은 낙태에 대한 그의 분노를 내게 보여주셨다. 주님은 낙태를 증오한다. 낙태는 궁극적인 인류의 악행중 하나 (우리 자신의 아이들을 삼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낙태를 싫어하시는 정도를 우리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교도들의 유적인 낙태에 대해서는 교회에 분노하시는 것만큼 분노하시지 않는데,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 심고 계신 씨앗을 낙태시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새로운 사역, 새로운 복음전도, 새로운 교회를 위해서 교회내에 심고 계신 씨앗을 낙태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들의 어린 아이들을 낙태하는 그와 같은 어둠 가운데 더이상 살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가 이교도들이 그들의 육적 자손을 낙태하는 같은 이유로 주님이 우리안에 심고 계신 씨앗을 낙태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불편한 시대(inconvenient time)에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아이들은 굉장히 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젊은 여자들에게 증거하도록 감동을 주었을때 하나님에게 반응하였더라면, 얼마나 많은 젊은 여자들이 낙태를 자행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씨앗들(자식들)을 낙태했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에 분노하고 계시고, 심판이 하나님의 집안에서 시작된다. 나는 당신이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낙태를 했는지에 대해 관심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것으로 부터 자유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회개할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로 부터 악한 양심을 제거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것으로 부터 자유하여, 하나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원하신다. 교회들이 새로운 신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도시들은 새로운 교회들을 필요로한다. 우리 가운데 오는 새로운 신자에 대한 어떤 것이 있다. 새신자는 모든 사람들을 분발케하고 새로운 열정과 신선함을 가져온다. 회중들이 새로운 신자들을 필요로 하듯이 도시들은 새로운 회중들을 필요로한다. 우리는 우리 도시에 새로운 회중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중이다.
(암9:11-13) 그 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고, 그 터진 울타리를 고치면서 그 허물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 집을 옛날과 같이 다시 지어 놓겠다. 9:12 그래서 에돔 족속 가운데서 남은 자들과 나에게 속해 있던 족속을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하게 하겠다. 이것은 이 일을 이루실 주의 말씀이다. 9:13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 때가 되면, 농부는 곡식을 거두고서, 곧바로 땅을 갈아야 하고, 씨를 뿌리고서 곧바로 포도를 밟아야 할 것이다. 산마다 단 포도주가 흘러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 넘칠 것이다. 위의 구절들은 추수의 때가 너무 빨라서 땅에서 씨를 얻을 수 있기전에 그것은 성숙할 것이고, 추수꾼들이 씨를 심는 사람들의 뒤로 바짝 쫓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추수가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때에 다가가고 있고, 이 모든 것은 다윗의 장막의 회복과 연관된다.
(암9:13-15)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 때가 되면, 농부는 곡식을 거두고서, 곧바로 땅을 갈아야 하고, 씨를 뿌리고서 곧바로 포도를 밟아야 할 것이다. 산마다 단 포도주가 흘러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 넘칠 것이다. 9:14 내가 사로잡힌 내 백성 이스라엘을 데려오겠다. 그들이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 안에서 살면서 포도원을 가꾸어서 저희가 짠 포도주를 마시며, 과수원을 만들어서 저희가 가꾼 과일을 먹을 것이다. 9:15 내가 이 백성을 그들이 살아갈 땅에 심어서 내가 그들에게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뿌리가 뽑히지 않게 하겠다. 주 너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바로 그시기에 일어나고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우리는 그때가 앞으로 올것이라고 계속해서 말해서는 안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그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고 그것을 하고 계시다. 추수가 다가오고 있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있는 때이고 이스라엘과 교회사이 커다란 특별한 운명이 있는 때이다, 즉 우리는 자연적 (natural) 그리고 영적(spiritual) 자손들(seeds)을 이해해야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마지막 시대에 거하시는 장소(dwelling place)가 다윗의 장막과 같은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마지막 시대에 교회는 다윗의 장막과 같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장막을 이해할때 우리는 다윗의 마을을 이해할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가 지금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계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다윗의 마음을 풀고계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이식하고 계시고(a heart transplant),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 즉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신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고 우리가 받게 될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언적으로 솔로몬의 통치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의 영원한 구조는 그리스도가이땅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왕국시대 (Kingdom Age)를 나타낸다. 또한 우리는 다윗의 왕국을 이땅에 하나님이 영원이 거하는 거주지 (dwelling place)를 준비하고 세우며 우리 자신을 준비되게 하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시대에 다윗과 그의 사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윗의 사역은 지금의 시대와 더 연관성이 있고, 예수님 외에 성경의 어떤 리더들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교회에 생겨나기 원하는 리더쉽의 종류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심 받은 곳에 들어갈 수 있기전에, 리더쉽이 타락하고 영적으로 미침으로 인해 리더쉽에 있어 커다란 싸움(고투)이 있을 것이 믿는다.
나는 사울와의 통치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때 기름부음받았으나 일그러져 버린 리더쉽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가 우리가 하나님이 지금 시대에 계시하게 될 다윗의 사역의 실제 마음과 목적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테스트(시험)중이 하나이고,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잘 검토해야한다.
사울왕은 다윗을 멸망시키고자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다윗이 그의 운명을 성취하는 것을 막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믿기에 거의 모든 영적 세대에 이런 과정이 있어왔다고 믿는다. 각각의 새로운 영적 세대와 더불어 살아남기 위한 가장 큰 전쟁은 전 세대와 더불은 전쟁이다. 그것은 적과의 전쟁이 아니고, 우리 부모(parents)와의 전쟁이다; 새로운 세대가 전세대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가 궁극적인 테스트(시험)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테스트들(시험들)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evil)로 시험하지(tempt) 않으시나, 하나님은 우리를 테스트(test)하신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테스트하는지 당신은 아는가? 승격(promotion)을 위해서이다. 우리는 우리가 승격될 수 있도록, 우리가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과 성령님의 인치심을 더 받을 수 있도록, 테스트를 치루어야한다. 중요한 테스트가 다가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테스트를 치루고 있다. Francis Frangipane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 중의 하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테스트들중 하나도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패스할때까지 그 테스트를 계속 치룬다. 여러분들중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러한 현재 테스트를 지나가고 그 길로 부터 내려오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아직 내가 믿기에 우리중 많은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테스트가 다가오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님으로 부터 돌아서면 그들에게 내릴 것이라 약속된 가장 최악의 저주는 그들이 자신들의 자식들을 먹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가장 최악이었다.
나는 교회사가 자신들의 자식들을 먹는 교회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 하고 싶다. 그것은 악행의 궁극적인 사인이다. 우리는 탁태에 대해 법을 통과시키도록 계속 노력해야한다, 그러나 자연법(the laws of nature)은 이미 통과되었다. 대부분의 짐승들은 그들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 인류는 자신들의 자식들을 기꺼이 희생한다. 교회안에서 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목적에 가장 큰 위험은 교회 자체로 부터 나오고 있다; 교회가 그들 자신의 어린아이들을 먹어치우고 있다.
오래전에, 내가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주님의 임재에 사로 잡혔을때, 주님은 낙태에 대한 그의 분노를 내게 보여주셨다. 주님은 낙태를 증오한다. 낙태는 궁극적인 인류의 악행중 하나 (우리 자신의 아이들을 삼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낙태를 싫어하시는 정도를 우리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교도들의 유적인 낙태에 대해서는 교회에 분노하시는 것만큼 분노하시지 않는데,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 심고 계신 씨앗을 낙태시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새로운 사역, 새로운 복음전도, 새로운 교회를 위해서 교회내에 심고 계신 씨앗을 낙태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들의 어린 아이들을 낙태하는 그와 같은 어둠 가운데 더이상 살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가 이교도들이 그들의 육적 자손을 낙태하는 같은 이유로 주님이 우리안에 심고 계신 씨앗을 낙태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불편한 시대(inconvenient time)에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아이들은 굉장히 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젊은 여자들에게 증거하도록 감동을 주었을때 하나님에게 반응하였더라면, 얼마나 많은 젊은 여자들이 낙태를 자행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씨앗들(자식들)을 낙태했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에 분노하고 계시고, 심판이 하나님의 집안에서 시작된다. 나는 당신이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낙태를 했는지에 대해 관심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것으로 부터 자유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회개할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로 부터 악한 양심을 제거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것으로 부터 자유하여, 하나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원하신다. 교회들이 새로운 신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도시들은 새로운 교회들을 필요로한다. 우리 가운데 오는 새로운 신자에 대한 어떤 것이 있다. 새신자는 모든 사람들을 분발케하고 새로운 열정과 신선함을 가져온다. 회중들이 새로운 신자들을 필요로 하듯이 도시들은 새로운 회중들을 필요로한다. 우리는 우리 도시에 새로운 회중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중이다.
기도시간은 행복한 시간이고 기쁨의 시간이고 영광을 얻는 시간입니다- 조호남목사님
기도시간은 행복한 시간이고 기쁨의 시간이고 영광을 얻는 시간입니다- 조호남목사님
시36:7-10.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1. 기도는 생명의 주님께 생명을 주입받는 시간입니다.
* 기도는 생명의 주님께 생명을 주입받는 시간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 사망의 쏘는 것은 죄인데 죄로 우리를 죽입니다. 생명의 성령은 우리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고 죄의 충동을 막아주고 육체의 소욕을 통해서 역사하는 마귀의 역사를 막아 주십니다.
* 죄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위에서 내리시는 생명밖에 없는데 이것이 영적원리입니다. 생명의 능력을 입지 않으면 교회다녀도 실패합니다.
* 교회는 은혜 받게 하는 장소이니 반드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씨를 뿌렸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들었다고 다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반드시 순종을 해야 합니다.
* 깨어 기도하라! 주님오심을 사모하라! 천국에 소망을 두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기름부음을 받으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은혜를 주십니다. 또한 회개하지 않고 진실로 기도하지 않으면 은혜가 오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생명은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소망하게 하고 충성하게 합니다. 사랑과 소망과 충성은 은혜로 하는 것이니 필수적으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 사람이 밥을 먹어야 공부를 하고 운동도 하듯이 영적인 것은 은혜를 입어야 하는데 이것이 안보이지만 실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 하나님의 능력을 입을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승리할 수 있고 주의 뜻대로 살 수 있고 소망할 수 있고 열매될 수 있고 그만큼 말씀대로 살수 있습니다.
* 기도는 생명을 얻는 시간이요 또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 만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시고 우리가 원하는 은혜를 주실 수도 있고 주님께서 보실 때 필요한 은혜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 회개가 필요하면 회개부터 시켜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포근하고 기쁩니다.
* 이 은혜가 행복하게 하는데 더 큰 은혜를 주실 때가 오는데 연단을 받았거나 순종했거나 깨어졌거나 하면 더 큰 은혜를 주시는데 이는 영광입니다. 은혜안에는 생명이 행복이 영광이 들어있습니다.
* “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 무엇보다 즐거움을 느꼈다. 그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운 뒤에 다른 사람도 이런 은혜를 받도록 하는데 부르심을 받았다“고 레리크렙은 말했습니다. * 주님을 만난 후에 큰 행복을 느꼈고 그 행복을 누리면서 그 어떤 것도 주님과는 비교가 안된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축복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 친밀함 가운데서 기름부음을 부어주시는 것이 영광이고 앞으로 영광을 주시겠다는 맛보기입니다.
* 큰 기름부음은 최고의 행복인데 은혜안에서 최고의 행복을 지금부터 누립니다.
2. 기도시간은 행복한 시간이고 기쁨의 시간이고 영광을 얻는 시간입니다.
* 기도는 참 행복한 시간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시간이고 그 후도 응답을 영광을 기대하고 상급을 기대하니 기쁩니다.
*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영광의 주님으로부터 영광을 얻습니다. 처음은 미약해도 쌓여서 그 어느날 큰 은혜를 주시고 큰 기름부음을 주십니다.
*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았다거나 끝까지 잘 참아서 주님께 인정받았으면 여기에서부터 큰 총애와 은혜를 주셔서 그 맛을 누리게 하시고 사명을 감당케 하는 큰 기름부음을 주십니다.
* 그래서 기도는 영광을 얻는 시간이고 행복을 얻는 시간이고 영광의 수준에서 주님과 대면하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3. 기도시간은 주님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 기도시간은 행복과 영광과 생명이 포함된 것인데 한마디로 하면 주님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입니니다.
* 백성 제사장 대제사장이 하나님 만나는 것이 다르듯이 수준에 따라 사랑을 나누는 것도 다릅니다.
* 기도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데 영원히 영광중에 사는 생명이고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행복과 기쁨을 주십니다.
* 어느정도 수준이 되면 주님을 만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되는데 그 시간이 영광의 시간입니다.
*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시간이니 조금씩 조금씩 올려주시는 경우도 있고 요셉처럼 갑자기 올려 주실 수도 있는데 기도가 꾸준히 쌓였기 때문에 주십니다.
4. 기도시간은 주님과 친밀해지는 시간입니다.
*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변화되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해 고생은 한것 같은데 나중에 하늘에 가면 상이 없습니다.
* 이로써 성령으로 주님을 섬기고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이 주님과 친밀하면서 섬겨야 합니다.
* 그런데 친밀함을 무시하는데 친밀함은 자아가 깨져야 하고 연단 받아야 합니다. 큰 건물을 지을수록 땅을 깊이 파는데 이는 건축에 중요한 부분중에 하나입니다.
* 친밀함이 안된 것은 그 위에 세워진 어떤 일도 그냥 무너지고 별것이 아니고 귀히 쓰실 수도 없습니다.
* 기도시간은 주님과 친밀해지는 시간입니다.
* 은혜는 영광을 얻는 것이기에 은혜를 단시간에 주시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받고 행한만큼 주십니다.
* 주님을 만난 것이 다 다릅니다. 백성, 제사장, 대제사장을 만나주시는 레벨이 다르듯이 주님께서 만나주시는 것도 다르고 은혜 주심도 다르고 쓰심도 다르니 친밀함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 친밀하면 항상 그 수준에서 만나주십니다. 모세는 나와 대면해서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 말씀을 전하는 것도 말씀을 듣는 것도 기도도 찬양도 이 모든 것이 주님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나 은총을 입는 기회인데 이때 성령의 감화 감동을 주시는데 감화 감동이 다 다릅니다.
* 더 강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잔잔히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강하게 느꼈어도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은 그렇게 큰 은혜가 아니고 내 감정이 예민하게 반응해서 그런 것입니다.
* 영광스런 은혜는 한번 받으면 계속 그 수준으로 갑니다.
* 은혜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안에서 신앙생활이 가능하고 큰 결단을 하고 순종하면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더 큰 영광을 주시고 더 큰 은총을 입게 되는데 이 때가 되면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 환경적인 것은 없어도 이런 은혜가 있다면 큰 성공을 한 것입니다. 환경이 좋으면 은혜를 받은 것 같은데 영적상태는 심히 메말라 있으면 환경이 좋으니 영혼도 좋은 줄 아는데 아닙니다.
* 큰 것을 잃고 적은 것을 얻은 것인데 장사 같으면 크게 손해를 본 것이고 거의 망한 것인데 성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 그래서 내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고 영광의 시간 복된 시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기본이 나는 무능하고 세상 죄악은 관영하고 우리는 은혜로 신앙생활이 가능하니 기도하는 것입니다.
*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영적법칙을 무시하는 것이고 영광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 사도바울의 기도처럼 성령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사랑의 넓이 깊이를 알게 하시고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이렇게 기도하면 주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 절제하고 포기하고 주님 때문에 고난받고 이럴때 은혜를 더 주십니다. 평안하고 칭찬받으면 은혜가 떨어지니 정신차려야 합니다.
* 주님과 친밀함이 너무나 중요하니 여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저도 기도할 때마다 다시 확인을 합니다. 시간이 가면 다시 희미해지고 흐려지니 다시 메모해놓고 다시 기도하고 그러면 기름부음이 와서 다시 확인시켜주십니다.
* 은혜의 행복 진리의 행복 그 나라의 행복,,, 이 모든 것이 기도할 때 성령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줄 알게 됩니다.
* 밧데리 같으면 다 떨어지면 충전하듯이 기도시간은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기도시간은 약속받는 시간입니다.
5. 기도를 통해서 주님도 행복을 얻으십니다.
* 생명은 은혜에 있는데 죄로 인해 생명이 끊겼는데 다시 은혜를 받게 되었으니 얼마든지 은혜를 받을 수 있는데 은혜 앞에서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 은혜를 받아본 사람은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처음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게 됩니다. 누구나 다 주님의 은혜로 가득 찰 때가 오고 은혜가 점점 오면서 평안 보람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 내상에서 먹고 마시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실체입니다. 실제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 실지로 만족이 되고 기쁨이 되고 평안이 됩니다. 실지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신앙인생을 영원토록 행복하게 해주고 나 존재가치를 보배롭게 해줍니다.
* 십자가의 피로 성령으로 주의 교훈으로 이끌어주신 은혜이고 고난의 댓가를 지불하고 주신 은혜이니 인정을 해야 합니다.
* 이 가치를 알기 때문에 기도해서 이런 은혜를 받으라는 것이고 은혜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정해주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 너무 행복하니 많은 사람들도 이런 행복을 맛보았으면 좋겠기에 전하는 것인데 깨어 기도하라! 주님오심을 사모하라! 천국을 소망하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기름부음을 받으라! 는 이 메시지를 통해서 이 행복을 경험하기에 모든 사람도 이렇게 깨어 기도하고 주님 오심을 사모하게 해야겠다 싶어 전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은혜를 받으면 중보기도부터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그렇게 감격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 기도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행복한 여러분을 통해서 주님도 행복을 얻으시는데 이것이 행복이고 보물이고 가치입니다. 아멘 조호남 목사님
시36:7-10.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1. 기도는 생명의 주님께 생명을 주입받는 시간입니다.
* 기도는 생명의 주님께 생명을 주입받는 시간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 사망의 쏘는 것은 죄인데 죄로 우리를 죽입니다. 생명의 성령은 우리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고 죄의 충동을 막아주고 육체의 소욕을 통해서 역사하는 마귀의 역사를 막아 주십니다.
* 죄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위에서 내리시는 생명밖에 없는데 이것이 영적원리입니다. 생명의 능력을 입지 않으면 교회다녀도 실패합니다.
* 교회는 은혜 받게 하는 장소이니 반드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씨를 뿌렸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들었다고 다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반드시 순종을 해야 합니다.
* 깨어 기도하라! 주님오심을 사모하라! 천국에 소망을 두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기름부음을 받으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은혜를 주십니다. 또한 회개하지 않고 진실로 기도하지 않으면 은혜가 오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생명은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소망하게 하고 충성하게 합니다. 사랑과 소망과 충성은 은혜로 하는 것이니 필수적으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 사람이 밥을 먹어야 공부를 하고 운동도 하듯이 영적인 것은 은혜를 입어야 하는데 이것이 안보이지만 실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 하나님의 능력을 입을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승리할 수 있고 주의 뜻대로 살 수 있고 소망할 수 있고 열매될 수 있고 그만큼 말씀대로 살수 있습니다.
* 기도는 생명을 얻는 시간이요 또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 만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시고 우리가 원하는 은혜를 주실 수도 있고 주님께서 보실 때 필요한 은혜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 회개가 필요하면 회개부터 시켜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포근하고 기쁩니다.
* 이 은혜가 행복하게 하는데 더 큰 은혜를 주실 때가 오는데 연단을 받았거나 순종했거나 깨어졌거나 하면 더 큰 은혜를 주시는데 이는 영광입니다. 은혜안에는 생명이 행복이 영광이 들어있습니다.
* “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 무엇보다 즐거움을 느꼈다. 그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운 뒤에 다른 사람도 이런 은혜를 받도록 하는데 부르심을 받았다“고 레리크렙은 말했습니다. * 주님을 만난 후에 큰 행복을 느꼈고 그 행복을 누리면서 그 어떤 것도 주님과는 비교가 안된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축복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 친밀함 가운데서 기름부음을 부어주시는 것이 영광이고 앞으로 영광을 주시겠다는 맛보기입니다.
* 큰 기름부음은 최고의 행복인데 은혜안에서 최고의 행복을 지금부터 누립니다.
2. 기도시간은 행복한 시간이고 기쁨의 시간이고 영광을 얻는 시간입니다.
* 기도는 참 행복한 시간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시간이고 그 후도 응답을 영광을 기대하고 상급을 기대하니 기쁩니다.
*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영광의 주님으로부터 영광을 얻습니다. 처음은 미약해도 쌓여서 그 어느날 큰 은혜를 주시고 큰 기름부음을 주십니다.
*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았다거나 끝까지 잘 참아서 주님께 인정받았으면 여기에서부터 큰 총애와 은혜를 주셔서 그 맛을 누리게 하시고 사명을 감당케 하는 큰 기름부음을 주십니다.
* 그래서 기도는 영광을 얻는 시간이고 행복을 얻는 시간이고 영광의 수준에서 주님과 대면하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3. 기도시간은 주님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 기도시간은 행복과 영광과 생명이 포함된 것인데 한마디로 하면 주님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입니니다.
* 백성 제사장 대제사장이 하나님 만나는 것이 다르듯이 수준에 따라 사랑을 나누는 것도 다릅니다.
* 기도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데 영원히 영광중에 사는 생명이고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행복과 기쁨을 주십니다.
* 어느정도 수준이 되면 주님을 만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되는데 그 시간이 영광의 시간입니다.
*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시간이니 조금씩 조금씩 올려주시는 경우도 있고 요셉처럼 갑자기 올려 주실 수도 있는데 기도가 꾸준히 쌓였기 때문에 주십니다.
4. 기도시간은 주님과 친밀해지는 시간입니다.
*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변화되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해 고생은 한것 같은데 나중에 하늘에 가면 상이 없습니다.
* 이로써 성령으로 주님을 섬기고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이 주님과 친밀하면서 섬겨야 합니다.
* 그런데 친밀함을 무시하는데 친밀함은 자아가 깨져야 하고 연단 받아야 합니다. 큰 건물을 지을수록 땅을 깊이 파는데 이는 건축에 중요한 부분중에 하나입니다.
* 친밀함이 안된 것은 그 위에 세워진 어떤 일도 그냥 무너지고 별것이 아니고 귀히 쓰실 수도 없습니다.
* 기도시간은 주님과 친밀해지는 시간입니다.
* 은혜는 영광을 얻는 것이기에 은혜를 단시간에 주시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받고 행한만큼 주십니다.
* 주님을 만난 것이 다 다릅니다. 백성, 제사장, 대제사장을 만나주시는 레벨이 다르듯이 주님께서 만나주시는 것도 다르고 은혜 주심도 다르고 쓰심도 다르니 친밀함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 친밀하면 항상 그 수준에서 만나주십니다. 모세는 나와 대면해서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 말씀을 전하는 것도 말씀을 듣는 것도 기도도 찬양도 이 모든 것이 주님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나 은총을 입는 기회인데 이때 성령의 감화 감동을 주시는데 감화 감동이 다 다릅니다.
* 더 강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잔잔히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강하게 느꼈어도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은 그렇게 큰 은혜가 아니고 내 감정이 예민하게 반응해서 그런 것입니다.
* 영광스런 은혜는 한번 받으면 계속 그 수준으로 갑니다.
* 은혜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안에서 신앙생활이 가능하고 큰 결단을 하고 순종하면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더 큰 영광을 주시고 더 큰 은총을 입게 되는데 이 때가 되면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 환경적인 것은 없어도 이런 은혜가 있다면 큰 성공을 한 것입니다. 환경이 좋으면 은혜를 받은 것 같은데 영적상태는 심히 메말라 있으면 환경이 좋으니 영혼도 좋은 줄 아는데 아닙니다.
* 큰 것을 잃고 적은 것을 얻은 것인데 장사 같으면 크게 손해를 본 것이고 거의 망한 것인데 성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 그래서 내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고 영광의 시간 복된 시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기본이 나는 무능하고 세상 죄악은 관영하고 우리는 은혜로 신앙생활이 가능하니 기도하는 것입니다.
*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영적법칙을 무시하는 것이고 영광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 사도바울의 기도처럼 성령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사랑의 넓이 깊이를 알게 하시고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이렇게 기도하면 주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 절제하고 포기하고 주님 때문에 고난받고 이럴때 은혜를 더 주십니다. 평안하고 칭찬받으면 은혜가 떨어지니 정신차려야 합니다.
* 주님과 친밀함이 너무나 중요하니 여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저도 기도할 때마다 다시 확인을 합니다. 시간이 가면 다시 희미해지고 흐려지니 다시 메모해놓고 다시 기도하고 그러면 기름부음이 와서 다시 확인시켜주십니다.
* 은혜의 행복 진리의 행복 그 나라의 행복,,, 이 모든 것이 기도할 때 성령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줄 알게 됩니다.
* 밧데리 같으면 다 떨어지면 충전하듯이 기도시간은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기도시간은 약속받는 시간입니다.
5. 기도를 통해서 주님도 행복을 얻으십니다.
* 생명은 은혜에 있는데 죄로 인해 생명이 끊겼는데 다시 은혜를 받게 되었으니 얼마든지 은혜를 받을 수 있는데 은혜 앞에서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 은혜를 받아본 사람은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처음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게 됩니다. 누구나 다 주님의 은혜로 가득 찰 때가 오고 은혜가 점점 오면서 평안 보람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 내상에서 먹고 마시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실체입니다. 실제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 실지로 만족이 되고 기쁨이 되고 평안이 됩니다. 실지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신앙인생을 영원토록 행복하게 해주고 나 존재가치를 보배롭게 해줍니다.
* 십자가의 피로 성령으로 주의 교훈으로 이끌어주신 은혜이고 고난의 댓가를 지불하고 주신 은혜이니 인정을 해야 합니다.
* 이 가치를 알기 때문에 기도해서 이런 은혜를 받으라는 것이고 은혜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정해주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 너무 행복하니 많은 사람들도 이런 행복을 맛보았으면 좋겠기에 전하는 것인데 깨어 기도하라! 주님오심을 사모하라! 천국을 소망하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기름부음을 받으라! 는 이 메시지를 통해서 이 행복을 경험하기에 모든 사람도 이렇게 깨어 기도하고 주님 오심을 사모하게 해야겠다 싶어 전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은혜를 받으면 중보기도부터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그렇게 감격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 기도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행복한 여러분을 통해서 주님도 행복을 얻으시는데 이것이 행복이고 보물이고 가치입니다. 아멘 조호남 목사님
23가지 영적 분별법(릭 조이너)
23가지 영적 분별법(릭 조이너)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분별하는 법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을 받은 자니라.'(고후13:5) 종교적 열심을 분별해 봅시다. (두려움, 죄의식, 자만심, 명예욕)
1. 당신은 주된 임무가 잘못됐다고 생각되는 것을 짤라내는 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당신보다 영적으로 어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충고(reprimand)를 받았을 때, 너무 어이가 없어 하며 경직된 적이 있습니까?
3. 당신은 신학을 근거로 하나님 말만 듣고 사람 말은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적인 자랑, 자긍심, 교만)
4. 당신은 다른 사람과 다른 교회나 선교회에 좋은점을 찾기보다 나쁜 점을 먼저 보는 경향이 있습니까?
5. 당신은 하나님의 기준에 못 미친다는 생각 때문에 강한 죄의식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기초하기보다 실적에 기초하려는 종교적 열심의 유혹)
6. 당신은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 방향을 주는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 하나님 나라 경찰, 보호자 역할을 자처, 실제로는 하나님의 교회에 분열과 문제를 일으킴)
7. 당신의 지도방식이 약한 자에 대해 지배적이며, 거만하며, 관대하지 않습니까?(야고보서 3:17,18 참조)
8.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의 삶과 사역 또한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보다 우리 실적 때문에...)
9. 당신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영적 성숙함과 절제력 때문에 우월하다고 느끼십니까? (남과 비교하는 자체가 우리의 목표인 예수님을 잊은 것임)
10. 당신은 하나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적 교만, 자기중심적 사고 조심, 참조 야고보서 4:6)
11. 당신의 기도생활이 기계가 돌아가듯이 이루어집니까? (기도시간이 끝나면 일거리 하나 처리한 느낌이 드는가?)
12. 당신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대로 알도록 합니까?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
13. 당신이 감정표현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사람들이 당신을 꺼려합니까? (법궤 앞에서 춤추는 다윗, 사무엘하 7:23)
14. 당신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나타낼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격렬한 감정표현을 합니까?
15. 당신은 주님을 위해 여행을 많이 하거나, 일을 많이 하는 것 때문에 낫다고 생각합니까?
16. 당신이 사역하는 곳의 역사가 다른 곳보다 크게 일어나기 때문에 고무적입니까? (반대 경우를 생각해 보면)
17. 당신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현재보다 더 빨리 응답하시고 더 일하셨던 것 같습니까? (종교적 열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가까이 갈 수 없게 막습니다. 현재도 과거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예수님을 통하여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18. 당신은 새로운 기독교 단체나 모임을 먼저 이상하게 놓고 보십니까? (시기, 자만심, 우리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새로운 것을 안 하실 것이라는 착각)
19. 당신은 당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현상들을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봅니까? (자만심, 하나님도 내가 보는 것같이 볼 것이다 라는 착각. 인내하고 열매를 보고 판단. 데살로니가전서 5:21)
20. 당신은 교회 내에 육적 일이 보이면 즉시 격노한 반응을 보입니까? 21. 당신은 교회가 성숙하지 못하다고 즉시 격노한 반응을 나타냅니까?
22. 당신은 당신의 판단에 의해 완벽하거나 완벽에 가깝지 않은 일에는 참여하지 않으려고 합니까?
23. 당신은 지금까지 질문을 읽으면서 아하 이것은 내가 아는 이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생각이 많이 떠올랐습니까? 바울은 너희는 너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모든 질문에 완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종교적 열심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 속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열심... 바리새인의 누룩...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자... 특히 4번과 6번 질문에 걸리신 분은 종교적 열심으로 잘못된 분별력을 받은 것 입니다. 나는(릭 조이너) 다른 사람이나 다른 모임,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예외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나 모임, 교회 회복을 위해 사랑으로 일하는 것이 보일 때는 귀를 기울입니다.
진정한 분별력의 열매는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특히 8, 9, 10, 15, 16번 질문에 걸리는 분은 자기 스스로 의로움(자기義)이라는 종교적 열심에 걸리는 분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자기를 스스로 낮추며, 이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 이것도 종교적인 열심이며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거짓 겸손입니다. 순교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분별해 보아야합니다. (자살충동을 그렇게 표현하기도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을 받은 자니라.'(고후13:5) 종교적 열심을 분별해 봅시다. (두려움, 죄의식, 자만심, 명예욕)
1. 당신은 주된 임무가 잘못됐다고 생각되는 것을 짤라내는 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당신보다 영적으로 어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충고(reprimand)를 받았을 때, 너무 어이가 없어 하며 경직된 적이 있습니까?
3. 당신은 신학을 근거로 하나님 말만 듣고 사람 말은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적인 자랑, 자긍심, 교만)
4. 당신은 다른 사람과 다른 교회나 선교회에 좋은점을 찾기보다 나쁜 점을 먼저 보는 경향이 있습니까?
5. 당신은 하나님의 기준에 못 미친다는 생각 때문에 강한 죄의식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기초하기보다 실적에 기초하려는 종교적 열심의 유혹)
6. 당신은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 방향을 주는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 하나님 나라 경찰, 보호자 역할을 자처, 실제로는 하나님의 교회에 분열과 문제를 일으킴)
7. 당신의 지도방식이 약한 자에 대해 지배적이며, 거만하며, 관대하지 않습니까?(야고보서 3:17,18 참조)
8.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의 삶과 사역 또한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보다 우리 실적 때문에...)
9. 당신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영적 성숙함과 절제력 때문에 우월하다고 느끼십니까? (남과 비교하는 자체가 우리의 목표인 예수님을 잊은 것임)
10. 당신은 하나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적 교만, 자기중심적 사고 조심, 참조 야고보서 4:6)
11. 당신의 기도생활이 기계가 돌아가듯이 이루어집니까? (기도시간이 끝나면 일거리 하나 처리한 느낌이 드는가?)
12. 당신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대로 알도록 합니까?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
13. 당신이 감정표현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사람들이 당신을 꺼려합니까? (법궤 앞에서 춤추는 다윗, 사무엘하 7:23)
14. 당신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나타낼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격렬한 감정표현을 합니까?
15. 당신은 주님을 위해 여행을 많이 하거나, 일을 많이 하는 것 때문에 낫다고 생각합니까?
16. 당신이 사역하는 곳의 역사가 다른 곳보다 크게 일어나기 때문에 고무적입니까? (반대 경우를 생각해 보면)
17. 당신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현재보다 더 빨리 응답하시고 더 일하셨던 것 같습니까? (종교적 열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가까이 갈 수 없게 막습니다. 현재도 과거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예수님을 통하여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18. 당신은 새로운 기독교 단체나 모임을 먼저 이상하게 놓고 보십니까? (시기, 자만심, 우리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새로운 것을 안 하실 것이라는 착각)
19. 당신은 당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현상들을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봅니까? (자만심, 하나님도 내가 보는 것같이 볼 것이다 라는 착각. 인내하고 열매를 보고 판단. 데살로니가전서 5:21)
20. 당신은 교회 내에 육적 일이 보이면 즉시 격노한 반응을 보입니까? 21. 당신은 교회가 성숙하지 못하다고 즉시 격노한 반응을 나타냅니까?
22. 당신은 당신의 판단에 의해 완벽하거나 완벽에 가깝지 않은 일에는 참여하지 않으려고 합니까?
23. 당신은 지금까지 질문을 읽으면서 아하 이것은 내가 아는 이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생각이 많이 떠올랐습니까? 바울은 너희는 너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모든 질문에 완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종교적 열심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 속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열심... 바리새인의 누룩...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자... 특히 4번과 6번 질문에 걸리신 분은 종교적 열심으로 잘못된 분별력을 받은 것 입니다. 나는(릭 조이너) 다른 사람이나 다른 모임,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예외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나 모임, 교회 회복을 위해 사랑으로 일하는 것이 보일 때는 귀를 기울입니다.
진정한 분별력의 열매는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특히 8, 9, 10, 15, 16번 질문에 걸리는 분은 자기 스스로 의로움(자기義)이라는 종교적 열심에 걸리는 분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자기를 스스로 낮추며, 이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 이것도 종교적인 열심이며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거짓 겸손입니다. 순교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분별해 보아야합니다. (자살충동을 그렇게 표현하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정동수 교수]
하나님의 이름
1: 엘로힘 사람의 존재 목적: 하나님의 영광(엡1:14) 기독교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17:3). 알아야 바르게 구한다(요일5:13-15). 복음의 진수: 그분을 아는 것(빌3:8, 10)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대단히 중요하다(창33:28, 야곱에서 이스라엘, 출3:13) 이름은 한 인격체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마28:19; 요16:23; 행3:16). 엘로힘(Elohim): 2,500여 회(창1:1), 창1에만 32회(여호와는 안 나옴). 그 뒤 2:4부터 여호와가 나오고 많은 경우 주 하나님(여호와 엘로힘)이 나옴.
A 기원 1: ‘강하다, 능력이 있다’를 뜻하는 ‘엘’(El)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 하나님(El)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으니 그의 힘이 유니콘의 힘과 같도다...야곱과 이스라엘에 관하여 말할진대, 하나님(El께서 무슨 일을 이루셨느냐! 하리로다(민23:22-23). 주 너희 하나님은 신들의 신이시요, 주들의 주시며 위대하시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El)이시니라(신10:17). B 창조의 하나님(창1:1-2:3까지 34회): 주권자, 통치자(창1:1; 히11:3, 무에서 유 창조), 하늘과 땅의창조주, 소유자(행17:24)
B 기원 2: ‘맹세하다, 선포하다’를 뜻하는 ‘알라’(Alah)와 상관이 있다는 견해 1. 이 이름은 언약을 맺는 하나님을 강조한다(창조든 언약이든 능력이 없으면 할 수 없다, 권능의 하나님). 2. 창세기 17장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전능자 하나님(엘샤다이)이니라(1절)...내가 내언약을 나와 너와 네 뒤를 이을 네 씨 사이에 대대로 세워 영존하는 언약으로 삼고 너와 네 뒤를 이을 네 씨의 하나님(Elohim)이 되리라(7절). 3. 창6:13, 18; 9:15, 16(노아와의 언약, 엘로힘) 4. 창50:24(요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 5. 왕상8:23(솔로몬의 기도) 6.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렘31:33; 32:38; 사40:1)
C 엘로힘은 복수이다.
1. 복수 명사이면서 단수 동사나 형용사를 취한다.
2. 처음에 하나님께서(복수 명사)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단수 동사)(창1:1).
3.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나니 나는 하나님(복수)이니라(사46:9): I am God.
4. 이방 신들 혹은 잡신들을 나타낼 때는 엘로힘이 복수로 쓰였다(출12:12; 삼상4:8; 창3:5).
5. 우리가(Let us...): 창1:26; 3:22; 11:7; 사6:8 D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신들이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출7:1; 시82:1, 6)
E 재판관들(출22:8-9)
F 천사들(시8:5)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개역 개정, 표준 새번역(하나님) 히2:7은 분명히 천사들이다(잠시 동안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님). 내가 주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분은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하나님(엘로힘)이시니 내가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리로다(시91:2).
하나님의 이름 2: 여호와 이 단어는 ‘4자음문자’(Tetragrammaton)라고 널리 알려진 히브리어 ‘YHWH’에서 왔다
A. 위엄 있는 이름: 출20:7의 명령(신18:15:22; 왕상22:5-7), 개역성경과 ASV Jehovah=LORD, Adonai = Lord 흠정역: 주(LORD, 그리스어 큐리오스)께서 내 주(Lord, 그리스어 큐리오스)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마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이 구절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한 것이다.
흠정역: 주(LORD, 히브리어 여호와)께서 내 주(Lord, 히브리어 아도나이)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 개역: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주의 날: 행2:20과 욜2:31, 롬10:13과 욜2:32
B. 여호와: 구약에 6000번 이상(창2:4부터, 여호와(주) 엘로힘(하나님)) 어원: 히브리 동사 havah: "to be," or "being." 이것은 또한 히브리 동사 chavah: "to live," or "life." 스스로 존재하는 분, 영원한 생명의 근원(사43:10,11; 시102:27)
C. 여호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이름 히브리 사람들: 1) 거짓 신, 참 하나님(엘로힘), 참 여호와(No), 2) 내 하나님, 내 여호와(No), 3)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여호와(No)
D. 한 하나님(신6:3-4)
E.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 I AM THAT I AM(출3:14, 15; 요8:58). 출6:3(창2:4부터 여호와) 1. 이름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음. 2.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계시된 이름 노아의 아들들: 그분은 함과 야벳, 셈의 자손 모두에게 엘로힘. 그런데 셈의 자손(아브라함)의 엘로힘은 여호와이다(대하14:11). 여호와: 공의와 거룩함의 하나님(엡4:24) 공의(시11:7; 창18:25) 거룩함(레19:2; 사6:3; 합1:13; 출32:33). 레위기: 하나님께 가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1-7장까지 대부분 여호와만 나옴) 사랑의 하나님(렘31:3; 사63:9) 여호와: 교제하며 도우시는 하나님(창4:26), 에노스(힘 없는 자) 은혜의 하나님(창6:8; 출6:6) 구속의 하나님(출34:5-7; 슥13:9: 사45:22, 24) 시89:15-16
하나님의 이름 3: 여호와 이레(창22:14)
1. 역사적 배경
A. 주전 2000년경,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약속을 주심(창12:1-3; 행7:2-3): 땅, 민족, 복의 근원
B. 창15:5-7, 씨와 땅, 창16:3 86세, 하갈과 이스마엘, 창17:6-8, 99세, 씨와 땅, 21장: 100세, 이삭의 출생
C. 엘로힘이 나타남(22:1):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 이삭의 복종, 하나님의 섭리
2. 이름의 의미
A. 22:7, 8, Where is the lamb? God will provide himself a lamb: providence
B. 아브라함의 믿음: 5절 돌아오리라(히11:17-19).
C. 여호와이레에서 이레(jireh)는 ‘see’ 즉 ‘보는 것’을 뜻한다.
D. 하나님은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신다. see=forsee, foreseeing=prevision, provision
E. 이레는 선견자(seer)를 뜻한다(삼상9:9; 대상9:22; 사30:10).
F. 이레는 예비한다를 뜻한다(22:8).
G.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14절), Moriah: jireh, Jehovah(여호와께서 보신다). 개역성경은 준비 하리라로 번역함
3. 이름의 중요성
A. 구출을 기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실까? 더 순수하고 믿음직한 관계가 성립됨.
B. 16절: 내가 내 아들을 아끼지 아니한 것처럼...너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C. 그 장소의 이름이 사람들에게는 속담거리가 되었지만(14절) 아브라함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 15-6: 주가 말하노라(saith, oracle), 약속의 확증(17-18): 씨와 복의 약속 14절: 중세 유대인 주석가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자신을 보이시리라”로 해석함.
4. 모형과 실체
A.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희생물을 드렸다(창12:8; 13:4 등).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함(히10:4; 사40:16). 이삭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희생 예물이었다. 그런데 이삭은 모형에 지나지 않았다(히11:l9). 이삭을 위해서도 양이 대신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택한 희생예물을 가르쳐 주신다(미6:6-7).
B. 모리아: 솔로몬 성전의 터(대하3:1), 다윗이 대신 속죄를 한 곳(대상21장, 21:26). 핵심 요점: 대신 속죄의 희생 제사를 드린 곳(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이후)
C. 대하7장: 솔로몬이 수많은 짐승과 함께 성전을 봉헌함, 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참, 하나님께서 친히 거기에 마음을 두시겠다고 약속함. 이것은 짐승 희생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함.
D. 실체: 갈보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14절), 그것: 양, 대신 속죄 제물(요8:56) 아버지가 아들을 대신 속죄 제물로 주셨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모형이다(요3:16; 롬8:3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교훈: 아들의 희생(그리스도의 희생)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요19:30)하실 때에 여호와이레의 모든 것이 실제로 완 성됨. E. 7절: 어린양(요1:29; 벧전1:18-19), 계5:11-13), see, foresee, prevision, provision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8절).
하나님의 이름 4: 여호와닛시(출17:15)
1. 역사적 배경
A. 출애굽(출12장), 홍해(14-15장), 마라(출15:22-26), 엘림(우물 열두 개, 종려나무 일흔 개, 출15:27), 신 광야의 만나(16장), 르비딤(17장, 물이 없음, 반석(고전10:4), 17장, 맛사와 므리바)
2. 이름의 의미
A. 빵과 물의 위험보다 더 큰 위험: 사람의 위험
B. 여호와닛시(OT5251) 깃발, 장대(막대기, 민21:8), banner, pole, standard
3. 아말렉
A. 에서의 손자(창36:12), 이삭의 자손이었으나 항상 이스라엘을 괴롭힘
B. 민족들 중에서 첫째(민24:20)
C. 이집트 탈출 때에 고통을 줌(신25:17-19)
D. 그 결과 영원히 멸절됨(출17:14-16)
E. 약 400년 뒤 사무엘과 사울(삼상15:2-3, 26-28), 아각 20절
F. 사울의 실패가 사울에게 되돌아옴(삼하1:10)
G. 히스기야가 끝을 냄(대상4:42-43), 히스기야가 주께 사랑을 받음
H. 에스더 시대의 하만, 아각 사람(아말렉 족속 아각 왕의 후예, 에3:1)
4. 이스라엘의 승리
A. 맛사와 므리바의 확신
B. 여호수아(호세아, 민13:8, 16),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신약의 예수, 마:121; 행7:45; 히4:8) C. 모세, 하나님의 막대기(뱀, 재앙들, 홍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닛시(깃발)
D. 깃발: 막대기, 무엇이든 들 수 있는 것
5. 영적인 적용
A. 아말렉: 세상(요일2:15-16; 5:19)
B. 육신(갈5:17; 5:24; 롬7:18)
C. 마귀와 영적 사악함(엡6:12)
D. 홍해와 르비딤의 차이 홍해(출14:13): 일할 필요가 없다(구원, 엡2:8-10). 르비딤(출17:9): 싸워야 한다(성화, 딤후4:7; 유3). 전신갑주(엡6:11-17)
E.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된다 막대기: 하나님의 임재, 도우심(참조 12 스파이 민14:42-45)
F. 하나님이 함께 하면 이긴다(신20:3-4; 시118:6) 막대기는 상징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깃발이시다.
G. 예수 그리스도(사11:1; 롬1:3)가 우리의 승리의 원천이다. 여호와-예수님이 우리의 깃발이다 요3:14 요일5:4 롬8:31, 37 고전15:57 고후2:14
하나님의 이름 5: 여호와 샬롬(삿6:24)
1. 역사적 배경
A.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후 상태(삿2:7, 10) 이스라엘은 목적을 잃어버렸다(출19:5-6). 단지 정복하고 먹고 누리는 것으로 낙을 삼음. 영적인 사명의 자각이 없으면 하나가 되기 어려움(평강이 없음). 재판관(사사) 시대의 어려움: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극을 주셔서 주님을 의지하게 함(삿2:21-22). 적들이 하는 일(삿6:3-4), 백성은 굴에서 삶(삿6:3) 재판관 시대: 번영과 패망, 범죄와 회개의 사이클 기드온, 힘이 약한 므낫세 지파의 청년 7년간의 미디안 학대(6:1), 핍절하게 됨(6:6), 대언자(6:7-10) 등의 상황 설명 2. 이름의 의미 A. 샬롬(OT7965), 온전한(신27:6), 끝을 내다(왕상9:25; 단5:26), 충만하다(창15:16), 배상하다(출 21:34 등, make good), 안부(창43:27, welfare), 완전하다(대상29:19), 완전한 마음
B. 샬롬: 약 170회, 화평, 평강(평강의 시대; 왕상4:25)
C. 평화의 통치자(사9:6) D. 화평 헌물(레3; 7:11-21), 속죄(at-one-ment), 화해와 평안이 주어짐 E. 영적 육적 복은 모두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할 때 주어진다.
3. 평화의 근원: 여호와
A. 하나님 자신이 화평 중에 거하며 자신의 백성을 돌보신다(출3:7; 사63:9; 삿10:16)
B. 렘29:10-11 C. 사48:18 D. 명령의 목적: 화평을 주는 것(레26:3, 6; 시29:11; 축복 기도 민6:24-26)
4. 여호와의 임재
A. 옷니엘(3:10), 에훗(3:15), 삼갈(3:31), 드보라(4, 5장), 바락(4:6)
B. 기드온에게는 주님 자신이 주의 천사로 나타남. 새로운 시작
C.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을 얻었어야만 했다(히4; 신12:9)
D. 불순종으로 인해 불안이 최고조에 달함
E. 6:12-13, 주님의 임재가 없음(사57:20-21)
F. 주님의 임재로 인해 두려워 함(6:22-23)
G. 주님의 임재를 알 때 내 자신의 위치를 알 때 ‘여호와샬롬’(삿6:23)이 임함(사26:2-4)
H. 제단은 기념비, 우리 주님이 멸망이 아니라 평강을 주기를 원함을 보여 줌(겔33:11)
5. 여호와-예수
A. 히7:2; 눅1:78-79; 2:14; 눅19:42; 행10:36; 엡2:17-18; 롬5:1
B. 요14:27; 16:33 롬15:33; 고후13;11 등
C. 우리의 성별이 평강의 지표이다(빌4:7, 9)
D. 화평이 다스리게 하라(골3:15)
E. 재림을 기다리며(살전5:23)
F. 평강의 근원: 주 예수 그리스도(요20:19; 21; 26) 하나님의 이름
6: 엘샤다이(전능자) 출6:3, 여호와와 전능자
1. 역사적 배경 창17:1-2, 아브라함의 언약 재확인(창12:2; 13:16; 15:5) 육신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얻음 99세에 이름을 바꾸고 아들의 약속을 얻음
2. 이름의 의미 엘(El), 약 200회 하나님으로 번역됨(시77:14; 신3:24; 느9:32) 엘(El): power(창31:29; 잠3:27; 미2:1) 샤다이(Shaddai): 구약에 48회 등장, 이와 비슷한 단어는 ‘젖가슴’ 혹은 ‘품’으로 번역됨: 그러므로 ‘만족을 주다’, ‘공급하다’ 등의 뜻을 가짐. 요셉에 대한 축복(창49:24-25), 하나님(엘)은 돕는분, 전능자(샤다이)는 복 주시는 분 사60:15,16, 젓을 빠는 복 사66:10-13, 이런데 나오는 품 혹은 젖은 원래 shad이며 샤다이와 같은 어원이다. 풍요의 여신 개념은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 이집트의 이시스, 행19의 다이아나 여신 히브리말에서 ‘들’은 ‘사덴’(sadden)인데 이것 역시 비슷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능자 하나님: 복의 근원, 충만하게 베풀어 주시는 분
3. 이름의 중요성 13년이 지나서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창17:17) 이 이름이 등장함(롬4:19-21; 히11:11). 사람의 몸이 죽은 것을 살리신다. 야곱의 경우도 다리를 전 후에 들어감 먼저 사람이 낮아져야 하나님이 일하신다. 아브람(높이 올려진 아버지)을 아브라함으로(많은 사람들의 아버지, 창17:6) 이삭(창28:3), 야곱(35:11; 43:14; 48:3-4; 49:25) 발람(민24:4,16) 욥기: 31회(48회 중), 나중의 복이 더 큼(욥40:2 엘샤다이는 채워 주는 분: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룻1:20-21; 욥42:5-6). 위로(시91:1) 심판하는 분(계1:9; 4:8; 16:7, 14; 19:15; 21:22-23) 여기의 어린양은 심판하는 분, 원래는 사랑과 긍휼의 존재였으나 계시록에서는 7개의 봉인을 열어 심판을 행한다. 사람들이 어린양의 진노를 피해 숨는다(계6:16).
4. 적용
하나님의 이름 7: 여호와라파 구약성경의 목적(고전10:6)
1. 역사적 배경
출15:22-26, 출애굽 후의 첫 번째 어려움, 사흘 동안 물을 찾지 못함, 하나님의 권능을 잊음. 마라: 써서 먹을 수 없음, 물을 치유함 26절: Jehovah-rapha: ‘rapha’(OT7503) 60-70회, 항상 ‘회복하다’, ‘고치다’의 의미로 쓰임 이스라엘은 불평의 명수: 불평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도망가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믿음의 방법만이 해결책이다:
1. 상황을 바꿈으로(고침),
2. 다른 것을 줌으로(엘림),
3. 견디는 은혜: 영적 성장(고후12:7-10), 아브라함: 여호와이레, 이스라엘: 여호와라파
2. 치유의 필요성 질병: 아담의 죄의 산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요9)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서도 질병이 생기고(마8:14-15) 악한 영들이 질병을 일으키기도 했다(욥2:7; 막9:17; 눅13:16; 고후12:7).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질병이 생기는 것을 인정했다(시 39:9-11; 90:3-12). 아비멜렉, 게하시, 여호람, 웃시야, 미리암의 경우처럼 특정한 죄로 인해 특별한 질병이 생기기도 했고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대하지 않음으로 질병이 생기기도 했다(고전11:29-30).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유행하던 병에는 악성 열병, 마비 병, 이질 설사, 눈병 등이 있다. 다윗의 범죄(대상21:12-14): 육적 히스기야의 사례(왕하20:1-6): 육적 영적인 병(사1:5-6; 렘17:9) 마라의 세상: 쓰고 고달프다
3. 치유의 하나님: 구약 마라: 크리스천에게도 있음(룻1:20-21) 미리암(민12:13), 시103:2-3, 나아만(왕하5:1-14) 렘14:19-20; 30:15 치유: 렘30:15-17; 렘3:22; 사30:26; 61:1 치유의 방해물: 사람(신30:14; 대하16:12; 렘8:21-22) 사람들이 주님께로 오지 않는다(대하36:16-17; 요5:40)
4. 치유의 예수님: 신약 눅4:18; 눅4:23; 마4:23; 11:4-5 몸의 치유의 궁극적 목적(영혼의 치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요8:11) 마라의 완성: 자연적인 물은 부패되어 있다(요4:13-14; 7:37-38) 말4:2 인간 의사는 궁극적인 문제, 영원한 문제에 도움이 못된다(욥13:4). 계22:17
5. 치유의 은사 치유의 선물(은사)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는 일은 다르다. 치유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기적적인 능력의 일부이다(히2:3-4). 성경 역사의 어느 특정한 때에 일어난 표적이다.
사도 바울의 예: 사역의 후반부에서 에바브로디도를 고칠 수 없었으며(빌2:25-27) 또 선교 여행 때 자기와 동행한 드로비모를 고치지 못하고 아픈 채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딤후4:20). 그는 자기의 후계자 디모데를 고칠 수 없었고 대신 일반적인 처방을 디모데에게 권했고(딤전5:23) 심지어 자신도 고칠 수 없었다(고후12:7-10).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적절한 약을 사용했다(약5:14). 교회 시대에는 모든 질병에 대해 기도와 의학적인 처방을 의지해야 하며 이것만이 병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자세이다.
하나님의 이름 8: 여호와카데쉬(레20:8) 레20:7-8, 어떤 죄인인가? (청교도 자매의 예) 여호와의 이름 순서의 의미 창세기: 죄, 구속, 여호와이레(창22;14), 출애굽기: 유월절 어린양, 마라에서 여호와라파(출15:22-26), 르비딤에서(맛사와 므리바에서) 여호와닛시(출17:8-16) 레위기: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다룸, 여호와카데쉬, 성별(sanctification) 첫 번째 성별: 안식일(창2:3), sanctify는 그 뒤에 출13:1-2에서 다시 나타난다. 레위기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거룩한 삶을 다룬다(롬6:12-14; 엡4:1)
1. Sanctify의 뜻 dedicate, consecrate, sactuary, hallow, holy(구분하다) 레23장의 모든 명절들은 구분되었으므로 거룩한 명절들이다(2-4). 희년: 50번째 해의 속죄일에 지킴, 이 날도 거룩히 구분하는 날임(레25:10). 이스라엘 백성(사63:17-18), 시온 산, 예루살렘, 성막(tabernacle), 성전(temple)도 모두 구분된 것들이다(사35:8; 사23:17-18). 사람에게 적용될 때(렘1:5; 출13:2; 신7:6; 시86:2) 대제사장의 머리(출28:36) sanctify는 모두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출31:13; 슥8:3).
2. 하나님과 관련해서 Holy One of Israel: 창조주로서 창조 세계와 분리된 존재(신4:35; 삼상2:2; 사44:6) 거룩함은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다(레11:44-45; 사6:3; 벧전1:16). Holy Spirit(시51:11) 하나님의 거룩함은 이방 신들에 대한 경고에서 잘 드러난다(출20:3; 신10:17-18; 렘16:20; 합1:13) 모세의 노래(출15:11)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함이다(롬3:23). 시편 기자의 서원(시27:4), 주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대상16:29; 시29:2;
3. 성도들과 관련해서 주님의 아름다움이 있는 자들(시90:17; 벧후1:4; 엡4:24) 주님의 명령(레19:2) 성도들은 그분이 원하는 거룩한 일을 하게 된다(레19:3-4). 레20:7앞의 내용을 보면 20:7을 이해하게 된다.
4. 신약성경의 적용 성도들의 성별(요17:16-19) 주님 자신이 우리의 설별이 됨(고전1:30) 교회로 부르신 목적(엡1:4) 성도들의 몸의 성별(롬12:1-2) 주님의 징계의 목적(히12:10,14) 맨 마지막의 교회(엡5:26-27; 요일3:3; 살전4:3; 5:23)
5. 거룩함과 사랑이 충돌할 때 거룩함을 추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1: 엘로힘 사람의 존재 목적: 하나님의 영광(엡1:14) 기독교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17:3). 알아야 바르게 구한다(요일5:13-15). 복음의 진수: 그분을 아는 것(빌3:8, 10)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대단히 중요하다(창33:28, 야곱에서 이스라엘, 출3:13) 이름은 한 인격체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마28:19; 요16:23; 행3:16). 엘로힘(Elohim): 2,500여 회(창1:1), 창1에만 32회(여호와는 안 나옴). 그 뒤 2:4부터 여호와가 나오고 많은 경우 주 하나님(여호와 엘로힘)이 나옴.
A 기원 1: ‘강하다, 능력이 있다’를 뜻하는 ‘엘’(El)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 하나님(El)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으니 그의 힘이 유니콘의 힘과 같도다...야곱과 이스라엘에 관하여 말할진대, 하나님(El께서 무슨 일을 이루셨느냐! 하리로다(민23:22-23). 주 너희 하나님은 신들의 신이시요, 주들의 주시며 위대하시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El)이시니라(신10:17). B 창조의 하나님(창1:1-2:3까지 34회): 주권자, 통치자(창1:1; 히11:3, 무에서 유 창조), 하늘과 땅의창조주, 소유자(행17:24)
B 기원 2: ‘맹세하다, 선포하다’를 뜻하는 ‘알라’(Alah)와 상관이 있다는 견해 1. 이 이름은 언약을 맺는 하나님을 강조한다(창조든 언약이든 능력이 없으면 할 수 없다, 권능의 하나님). 2. 창세기 17장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전능자 하나님(엘샤다이)이니라(1절)...내가 내언약을 나와 너와 네 뒤를 이을 네 씨 사이에 대대로 세워 영존하는 언약으로 삼고 너와 네 뒤를 이을 네 씨의 하나님(Elohim)이 되리라(7절). 3. 창6:13, 18; 9:15, 16(노아와의 언약, 엘로힘) 4. 창50:24(요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 5. 왕상8:23(솔로몬의 기도) 6.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렘31:33; 32:38; 사40:1)
C 엘로힘은 복수이다.
1. 복수 명사이면서 단수 동사나 형용사를 취한다.
2. 처음에 하나님께서(복수 명사)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단수 동사)(창1:1).
3.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나니 나는 하나님(복수)이니라(사46:9): I am God.
4. 이방 신들 혹은 잡신들을 나타낼 때는 엘로힘이 복수로 쓰였다(출12:12; 삼상4:8; 창3:5).
5. 우리가(Let us...): 창1:26; 3:22; 11:7; 사6:8 D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신들이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출7:1; 시82:1, 6)
E 재판관들(출22:8-9)
F 천사들(시8:5)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개역 개정, 표준 새번역(하나님) 히2:7은 분명히 천사들이다(잠시 동안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님). 내가 주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분은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하나님(엘로힘)이시니 내가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리로다(시91:2).
하나님의 이름 2: 여호와 이 단어는 ‘4자음문자’(Tetragrammaton)라고 널리 알려진 히브리어 ‘YHWH’에서 왔다
A. 위엄 있는 이름: 출20:7의 명령(신18:15:22; 왕상22:5-7), 개역성경과 ASV Jehovah=LORD, Adonai = Lord 흠정역: 주(LORD, 그리스어 큐리오스)께서 내 주(Lord, 그리스어 큐리오스)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마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이 구절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한 것이다.
흠정역: 주(LORD, 히브리어 여호와)께서 내 주(Lord, 히브리어 아도나이)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 개역: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주의 날: 행2:20과 욜2:31, 롬10:13과 욜2:32
B. 여호와: 구약에 6000번 이상(창2:4부터, 여호와(주) 엘로힘(하나님)) 어원: 히브리 동사 havah: "to be," or "being." 이것은 또한 히브리 동사 chavah: "to live," or "life." 스스로 존재하는 분, 영원한 생명의 근원(사43:10,11; 시102:27)
C. 여호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이름 히브리 사람들: 1) 거짓 신, 참 하나님(엘로힘), 참 여호와(No), 2) 내 하나님, 내 여호와(No), 3)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여호와(No)
D. 한 하나님(신6:3-4)
E.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 I AM THAT I AM(출3:14, 15; 요8:58). 출6:3(창2:4부터 여호와) 1. 이름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음. 2.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계시된 이름 노아의 아들들: 그분은 함과 야벳, 셈의 자손 모두에게 엘로힘. 그런데 셈의 자손(아브라함)의 엘로힘은 여호와이다(대하14:11). 여호와: 공의와 거룩함의 하나님(엡4:24) 공의(시11:7; 창18:25) 거룩함(레19:2; 사6:3; 합1:13; 출32:33). 레위기: 하나님께 가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1-7장까지 대부분 여호와만 나옴) 사랑의 하나님(렘31:3; 사63:9) 여호와: 교제하며 도우시는 하나님(창4:26), 에노스(힘 없는 자) 은혜의 하나님(창6:8; 출6:6) 구속의 하나님(출34:5-7; 슥13:9: 사45:22, 24) 시89:15-16
하나님의 이름 3: 여호와 이레(창22:14)
1. 역사적 배경
A. 주전 2000년경,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약속을 주심(창12:1-3; 행7:2-3): 땅, 민족, 복의 근원
B. 창15:5-7, 씨와 땅, 창16:3 86세, 하갈과 이스마엘, 창17:6-8, 99세, 씨와 땅, 21장: 100세, 이삭의 출생
C. 엘로힘이 나타남(22:1):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 이삭의 복종, 하나님의 섭리
2. 이름의 의미
A. 22:7, 8, Where is the lamb? God will provide himself a lamb: providence
B. 아브라함의 믿음: 5절 돌아오리라(히11:17-19).
C. 여호와이레에서 이레(jireh)는 ‘see’ 즉 ‘보는 것’을 뜻한다.
D. 하나님은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신다. see=forsee, foreseeing=prevision, provision
E. 이레는 선견자(seer)를 뜻한다(삼상9:9; 대상9:22; 사30:10).
F. 이레는 예비한다를 뜻한다(22:8).
G.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14절), Moriah: jireh, Jehovah(여호와께서 보신다). 개역성경은 준비 하리라로 번역함
3. 이름의 중요성
A. 구출을 기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실까? 더 순수하고 믿음직한 관계가 성립됨.
B. 16절: 내가 내 아들을 아끼지 아니한 것처럼...너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C. 그 장소의 이름이 사람들에게는 속담거리가 되었지만(14절) 아브라함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 15-6: 주가 말하노라(saith, oracle), 약속의 확증(17-18): 씨와 복의 약속 14절: 중세 유대인 주석가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자신을 보이시리라”로 해석함.
4. 모형과 실체
A.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희생물을 드렸다(창12:8; 13:4 등).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함(히10:4; 사40:16). 이삭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희생 예물이었다. 그런데 이삭은 모형에 지나지 않았다(히11:l9). 이삭을 위해서도 양이 대신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택한 희생예물을 가르쳐 주신다(미6:6-7).
B. 모리아: 솔로몬 성전의 터(대하3:1), 다윗이 대신 속죄를 한 곳(대상21장, 21:26). 핵심 요점: 대신 속죄의 희생 제사를 드린 곳(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이후)
C. 대하7장: 솔로몬이 수많은 짐승과 함께 성전을 봉헌함, 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참, 하나님께서 친히 거기에 마음을 두시겠다고 약속함. 이것은 짐승 희생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함.
D. 실체: 갈보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14절), 그것: 양, 대신 속죄 제물(요8:56) 아버지가 아들을 대신 속죄 제물로 주셨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모형이다(요3:16; 롬8:3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교훈: 아들의 희생(그리스도의 희생)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요19:30)하실 때에 여호와이레의 모든 것이 실제로 완 성됨. E. 7절: 어린양(요1:29; 벧전1:18-19), 계5:11-13), see, foresee, prevision, provision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8절).
하나님의 이름 4: 여호와닛시(출17:15)
1. 역사적 배경
A. 출애굽(출12장), 홍해(14-15장), 마라(출15:22-26), 엘림(우물 열두 개, 종려나무 일흔 개, 출15:27), 신 광야의 만나(16장), 르비딤(17장, 물이 없음, 반석(고전10:4), 17장, 맛사와 므리바)
2. 이름의 의미
A. 빵과 물의 위험보다 더 큰 위험: 사람의 위험
B. 여호와닛시(OT5251) 깃발, 장대(막대기, 민21:8), banner, pole, standard
3. 아말렉
A. 에서의 손자(창36:12), 이삭의 자손이었으나 항상 이스라엘을 괴롭힘
B. 민족들 중에서 첫째(민24:20)
C. 이집트 탈출 때에 고통을 줌(신25:17-19)
D. 그 결과 영원히 멸절됨(출17:14-16)
E. 약 400년 뒤 사무엘과 사울(삼상15:2-3, 26-28), 아각 20절
F. 사울의 실패가 사울에게 되돌아옴(삼하1:10)
G. 히스기야가 끝을 냄(대상4:42-43), 히스기야가 주께 사랑을 받음
H. 에스더 시대의 하만, 아각 사람(아말렉 족속 아각 왕의 후예, 에3:1)
4. 이스라엘의 승리
A. 맛사와 므리바의 확신
B. 여호수아(호세아, 민13:8, 16),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신약의 예수, 마:121; 행7:45; 히4:8) C. 모세, 하나님의 막대기(뱀, 재앙들, 홍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닛시(깃발)
D. 깃발: 막대기, 무엇이든 들 수 있는 것
5. 영적인 적용
A. 아말렉: 세상(요일2:15-16; 5:19)
B. 육신(갈5:17; 5:24; 롬7:18)
C. 마귀와 영적 사악함(엡6:12)
D. 홍해와 르비딤의 차이 홍해(출14:13): 일할 필요가 없다(구원, 엡2:8-10). 르비딤(출17:9): 싸워야 한다(성화, 딤후4:7; 유3). 전신갑주(엡6:11-17)
E.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된다 막대기: 하나님의 임재, 도우심(참조 12 스파이 민14:42-45)
F. 하나님이 함께 하면 이긴다(신20:3-4; 시118:6) 막대기는 상징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깃발이시다.
G. 예수 그리스도(사11:1; 롬1:3)가 우리의 승리의 원천이다. 여호와-예수님이 우리의 깃발이다 요3:14 요일5:4 롬8:31, 37 고전15:57 고후2:14
하나님의 이름 5: 여호와 샬롬(삿6:24)
1. 역사적 배경
A.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후 상태(삿2:7, 10) 이스라엘은 목적을 잃어버렸다(출19:5-6). 단지 정복하고 먹고 누리는 것으로 낙을 삼음. 영적인 사명의 자각이 없으면 하나가 되기 어려움(평강이 없음). 재판관(사사) 시대의 어려움: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극을 주셔서 주님을 의지하게 함(삿2:21-22). 적들이 하는 일(삿6:3-4), 백성은 굴에서 삶(삿6:3) 재판관 시대: 번영과 패망, 범죄와 회개의 사이클 기드온, 힘이 약한 므낫세 지파의 청년 7년간의 미디안 학대(6:1), 핍절하게 됨(6:6), 대언자(6:7-10) 등의 상황 설명 2. 이름의 의미 A. 샬롬(OT7965), 온전한(신27:6), 끝을 내다(왕상9:25; 단5:26), 충만하다(창15:16), 배상하다(출 21:34 등, make good), 안부(창43:27, welfare), 완전하다(대상29:19), 완전한 마음
B. 샬롬: 약 170회, 화평, 평강(평강의 시대; 왕상4:25)
C. 평화의 통치자(사9:6) D. 화평 헌물(레3; 7:11-21), 속죄(at-one-ment), 화해와 평안이 주어짐 E. 영적 육적 복은 모두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할 때 주어진다.
3. 평화의 근원: 여호와
A. 하나님 자신이 화평 중에 거하며 자신의 백성을 돌보신다(출3:7; 사63:9; 삿10:16)
B. 렘29:10-11 C. 사48:18 D. 명령의 목적: 화평을 주는 것(레26:3, 6; 시29:11; 축복 기도 민6:24-26)
4. 여호와의 임재
A. 옷니엘(3:10), 에훗(3:15), 삼갈(3:31), 드보라(4, 5장), 바락(4:6)
B. 기드온에게는 주님 자신이 주의 천사로 나타남. 새로운 시작
C.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을 얻었어야만 했다(히4; 신12:9)
D. 불순종으로 인해 불안이 최고조에 달함
E. 6:12-13, 주님의 임재가 없음(사57:20-21)
F. 주님의 임재로 인해 두려워 함(6:22-23)
G. 주님의 임재를 알 때 내 자신의 위치를 알 때 ‘여호와샬롬’(삿6:23)이 임함(사26:2-4)
H. 제단은 기념비, 우리 주님이 멸망이 아니라 평강을 주기를 원함을 보여 줌(겔33:11)
5. 여호와-예수
A. 히7:2; 눅1:78-79; 2:14; 눅19:42; 행10:36; 엡2:17-18; 롬5:1
B. 요14:27; 16:33 롬15:33; 고후13;11 등
C. 우리의 성별이 평강의 지표이다(빌4:7, 9)
D. 화평이 다스리게 하라(골3:15)
E. 재림을 기다리며(살전5:23)
F. 평강의 근원: 주 예수 그리스도(요20:19; 21; 26) 하나님의 이름
6: 엘샤다이(전능자) 출6:3, 여호와와 전능자
1. 역사적 배경 창17:1-2, 아브라함의 언약 재확인(창12:2; 13:16; 15:5) 육신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얻음 99세에 이름을 바꾸고 아들의 약속을 얻음
2. 이름의 의미 엘(El), 약 200회 하나님으로 번역됨(시77:14; 신3:24; 느9:32) 엘(El): power(창31:29; 잠3:27; 미2:1) 샤다이(Shaddai): 구약에 48회 등장, 이와 비슷한 단어는 ‘젖가슴’ 혹은 ‘품’으로 번역됨: 그러므로 ‘만족을 주다’, ‘공급하다’ 등의 뜻을 가짐. 요셉에 대한 축복(창49:24-25), 하나님(엘)은 돕는분, 전능자(샤다이)는 복 주시는 분 사60:15,16, 젓을 빠는 복 사66:10-13, 이런데 나오는 품 혹은 젖은 원래 shad이며 샤다이와 같은 어원이다. 풍요의 여신 개념은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 이집트의 이시스, 행19의 다이아나 여신 히브리말에서 ‘들’은 ‘사덴’(sadden)인데 이것 역시 비슷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능자 하나님: 복의 근원, 충만하게 베풀어 주시는 분
3. 이름의 중요성 13년이 지나서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창17:17) 이 이름이 등장함(롬4:19-21; 히11:11). 사람의 몸이 죽은 것을 살리신다. 야곱의 경우도 다리를 전 후에 들어감 먼저 사람이 낮아져야 하나님이 일하신다. 아브람(높이 올려진 아버지)을 아브라함으로(많은 사람들의 아버지, 창17:6) 이삭(창28:3), 야곱(35:11; 43:14; 48:3-4; 49:25) 발람(민24:4,16) 욥기: 31회(48회 중), 나중의 복이 더 큼(욥40:2 엘샤다이는 채워 주는 분: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룻1:20-21; 욥42:5-6). 위로(시91:1) 심판하는 분(계1:9; 4:8; 16:7, 14; 19:15; 21:22-23) 여기의 어린양은 심판하는 분, 원래는 사랑과 긍휼의 존재였으나 계시록에서는 7개의 봉인을 열어 심판을 행한다. 사람들이 어린양의 진노를 피해 숨는다(계6:16).
4. 적용
하나님의 이름 7: 여호와라파 구약성경의 목적(고전10:6)
1. 역사적 배경
출15:22-26, 출애굽 후의 첫 번째 어려움, 사흘 동안 물을 찾지 못함, 하나님의 권능을 잊음. 마라: 써서 먹을 수 없음, 물을 치유함 26절: Jehovah-rapha: ‘rapha’(OT7503) 60-70회, 항상 ‘회복하다’, ‘고치다’의 의미로 쓰임 이스라엘은 불평의 명수: 불평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도망가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믿음의 방법만이 해결책이다:
1. 상황을 바꿈으로(고침),
2. 다른 것을 줌으로(엘림),
3. 견디는 은혜: 영적 성장(고후12:7-10), 아브라함: 여호와이레, 이스라엘: 여호와라파
2. 치유의 필요성 질병: 아담의 죄의 산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요9)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서도 질병이 생기고(마8:14-15) 악한 영들이 질병을 일으키기도 했다(욥2:7; 막9:17; 눅13:16; 고후12:7).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질병이 생기는 것을 인정했다(시 39:9-11; 90:3-12). 아비멜렉, 게하시, 여호람, 웃시야, 미리암의 경우처럼 특정한 죄로 인해 특별한 질병이 생기기도 했고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대하지 않음으로 질병이 생기기도 했다(고전11:29-30).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유행하던 병에는 악성 열병, 마비 병, 이질 설사, 눈병 등이 있다. 다윗의 범죄(대상21:12-14): 육적 히스기야의 사례(왕하20:1-6): 육적 영적인 병(사1:5-6; 렘17:9) 마라의 세상: 쓰고 고달프다
3. 치유의 하나님: 구약 마라: 크리스천에게도 있음(룻1:20-21) 미리암(민12:13), 시103:2-3, 나아만(왕하5:1-14) 렘14:19-20; 30:15 치유: 렘30:15-17; 렘3:22; 사30:26; 61:1 치유의 방해물: 사람(신30:14; 대하16:12; 렘8:21-22) 사람들이 주님께로 오지 않는다(대하36:16-17; 요5:40)
4. 치유의 예수님: 신약 눅4:18; 눅4:23; 마4:23; 11:4-5 몸의 치유의 궁극적 목적(영혼의 치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요8:11) 마라의 완성: 자연적인 물은 부패되어 있다(요4:13-14; 7:37-38) 말4:2 인간 의사는 궁극적인 문제, 영원한 문제에 도움이 못된다(욥13:4). 계22:17
5. 치유의 은사 치유의 선물(은사)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는 일은 다르다. 치유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기적적인 능력의 일부이다(히2:3-4). 성경 역사의 어느 특정한 때에 일어난 표적이다.
사도 바울의 예: 사역의 후반부에서 에바브로디도를 고칠 수 없었으며(빌2:25-27) 또 선교 여행 때 자기와 동행한 드로비모를 고치지 못하고 아픈 채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딤후4:20). 그는 자기의 후계자 디모데를 고칠 수 없었고 대신 일반적인 처방을 디모데에게 권했고(딤전5:23) 심지어 자신도 고칠 수 없었다(고후12:7-10).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적절한 약을 사용했다(약5:14). 교회 시대에는 모든 질병에 대해 기도와 의학적인 처방을 의지해야 하며 이것만이 병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자세이다.
하나님의 이름 8: 여호와카데쉬(레20:8) 레20:7-8, 어떤 죄인인가? (청교도 자매의 예) 여호와의 이름 순서의 의미 창세기: 죄, 구속, 여호와이레(창22;14), 출애굽기: 유월절 어린양, 마라에서 여호와라파(출15:22-26), 르비딤에서(맛사와 므리바에서) 여호와닛시(출17:8-16) 레위기: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다룸, 여호와카데쉬, 성별(sanctification) 첫 번째 성별: 안식일(창2:3), sanctify는 그 뒤에 출13:1-2에서 다시 나타난다. 레위기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거룩한 삶을 다룬다(롬6:12-14; 엡4:1)
1. Sanctify의 뜻 dedicate, consecrate, sactuary, hallow, holy(구분하다) 레23장의 모든 명절들은 구분되었으므로 거룩한 명절들이다(2-4). 희년: 50번째 해의 속죄일에 지킴, 이 날도 거룩히 구분하는 날임(레25:10). 이스라엘 백성(사63:17-18), 시온 산, 예루살렘, 성막(tabernacle), 성전(temple)도 모두 구분된 것들이다(사35:8; 사23:17-18). 사람에게 적용될 때(렘1:5; 출13:2; 신7:6; 시86:2) 대제사장의 머리(출28:36) sanctify는 모두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출31:13; 슥8:3).
2. 하나님과 관련해서 Holy One of Israel: 창조주로서 창조 세계와 분리된 존재(신4:35; 삼상2:2; 사44:6) 거룩함은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다(레11:44-45; 사6:3; 벧전1:16). Holy Spirit(시51:11) 하나님의 거룩함은 이방 신들에 대한 경고에서 잘 드러난다(출20:3; 신10:17-18; 렘16:20; 합1:13) 모세의 노래(출15:11)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함이다(롬3:23). 시편 기자의 서원(시27:4), 주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대상16:29; 시29:2;
3. 성도들과 관련해서 주님의 아름다움이 있는 자들(시90:17; 벧후1:4; 엡4:24) 주님의 명령(레19:2) 성도들은 그분이 원하는 거룩한 일을 하게 된다(레19:3-4). 레20:7앞의 내용을 보면 20:7을 이해하게 된다.
4. 신약성경의 적용 성도들의 성별(요17:16-19) 주님 자신이 우리의 설별이 됨(고전1:30) 교회로 부르신 목적(엡1:4) 성도들의 몸의 성별(롬12:1-2) 주님의 징계의 목적(히12:10,14) 맨 마지막의 교회(엡5:26-27; 요일3:3; 살전4:3; 5:23)
5. 거룩함과 사랑이 충돌할 때 거룩함을 추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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