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2009

성도들의 믿음을 척량하는 갈대

성도들의 믿음을 척량하는 갈대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혼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11:1-2) 오늘은 11장으로 넘어왔다. 11장도 10장처럼 별도로 해석되어야 하는 내용이다. 13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교회가 박해받게 될 내용이 전체적으로 서술되었다. 학자들은 11장은 계시록 중에서도 해석하기에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한다. 이유로는 해석상의 난점과 혼란점이 대체로 그 해석의 기본입장에 따라 각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기에 대한 해석들은; ⓐ. 어떤 이는 ‘환난중에서 참 믿음에 있는 유대인들을 헤아려보라는 것이라’하였고, ⓑ. 다른 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내용이지만, 유형교회에 근거를 두고는 있으나 무형교회(Invisible church) 곧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척량하는 것’이라고 애매한 해법으로 설명하였고, ⓒ. 또 다른 이는 ‘이스라엘이 이슬람의 오마르 모스크 (오마르는 건물 명칭. 모스크는 회교도의 성전이란 뜻)를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스라엘 성전이 지어지면, 적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앉게 될 때 바깥마당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짓밟는 일’이라고 해석하였다.

 유대인의 성전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성이 함락될 때 파괴되었다. 예수님은 성전을 향하여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고 예언했는데 예언대로 됐다(마24:2,눅19:44). 주후 70년경 유대나라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키다가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함락시킬 때 성전을 불로 태워버렸다. 파괴되기 이전의 성전은 돌로 지어졌고, 제단 안에는 금붙이가 많았는데 불이 나서 금이 녹아내렸다. 군사들이 금을 찾기 위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허물고 들추어냄으로서 예수님의 예언대로 되어진 것을 역사는 증거 한다.

이러한 성전 터에 모하멧(Mohammed; 570-632 AD)을 교주로 섬기는 이슬람교의 ‘오마르 모스크’가 건립되어 졌다. Islam 성지는 Arabia Mecca에 있으며 코란(Koran)을 정경으로 하며 주후 612년에 시작된 종파다. 원래 이스라엘 성전은 모리아 산에 세워졌는데, 그 성전 안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했던 반석이 있다(창22:2~). 이슬람교는 그들의 교주 모하멧이 이 반석에서 하늘에 들려올라가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성전이 세워졌던 그 자리에 모하멧의 사원인 ‘오마르 모스크’를 짓고 제2의 성지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모하멧을 믿는 아랍의 2억 인구는 자기들의 오마르 모스크를 헐고 그 자리에 유대인의 성전을 짓는 것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혹이라도 유대인들이 그 자리에 성전을 짓기 위해 오마르 모스크를 헐었다가는 아랍이 성전(Holy war)을 선포하고 결사적인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현지에 가서 보면 외국인들은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만 유대인들은 절대로 못 들어가게 한다. 유대인들은 그 근체에서 얼씬도 못하게 막는다. 이러한 그들의 모스크를 헐고 이스라엘 성전을 새로 짓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성전이 재건되고 그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앉게 된다는 해석은 설득을 얻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11장을 이해하기 위해 단원을 넷으로 세분해서 척량의 대상과, 두증인의 정체와 그들의 부활은 언제인가?

세상에 나타나는 짐승의 시대(Beast era)에 관한 내용으로 나누어서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① 성전과, 제단 척량과, 성전 밖 마당문제.(1-2) ② 두 증인의 정체와 영적전쟁.(3-6) ③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Beast)의 등장.(7-10) ④ 사명 자들의 부활은 3일반 후(After)에 있다.(11-13) 1. 신자들의 믿음을 세 부류로 분류하라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11:1) 천사는 요한에게 갈대 하나를 주면서 성전과 제단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척량하고 성전 바깥마당은 척량하지 말라한다. 문자적으로 볼 때 제단은 성전 안에 있는 위치가 되겠고, 따라서 성전은 경배하는 자들이 들어갈 건물이다. 그리고 마당은 문자대로 건물 바깥에 아무것도 가려진 것이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천사는 두 곳만 척량하고 밖은 하지 말라 하면서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서 42달 동안 거룩한 성을 짓밟게 된다고 한다. 갈대는 척량(Measure)하기 위한 잣대와 같은 의미다. 따라서 요한에게 말한 갈대는 신자들의 믿음을 재는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을 셋으로 분류시킨다고 알려주신다. 첫째로 좋은 믿음은 제단 안에서의 경배하는 신자들의 믿음이다. 두 번째로 중간 믿음은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신자들이다. 마지막으로는 성전 밖 마당에서 예배하는 자들과 같은 자들로 분류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경배하는 자라면 성전과 제단에 관한 비밀을 알아야 된다.

성전의 유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성전을 Tabernacle 이라 한다. 미쉬칸(mishkan)은 ‘머물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성막은 이동시킬 수 있는 장소로서 모세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백성들 가운데 거하는 장소이다. 성막 안에는 하나님의 법궤를 두고 광야기간 동안 함께 하시면서 먹이시고 입히시며 인도하며 만나주시던 것이 성막이다. 그러므로 회막( Tabernacle)은 모임에 있다. 이 낱말은 약속에 의하여 만남을 뜻한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교회에 모이는 목적은 하나님을 만남에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하시고(출29:42-43), 또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하였으므로(민17:4) 성전은 하나님과의 교제(Follow ship)를 위한 만남에 있음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교회라는 성전에 모일 때,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어야 된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려 하시는가?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하시고(출29:42),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하셨다(출33:11). 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하였다(민7:89). 그러므로 신자가 교회에 출석하는 목적은 사람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은총을 주신 예수를 만나서 교제함이 목적이어야 된다. 또한 척량문제는 땅에서 만의 척량이 아니다. 하늘에서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경에 일렀으되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말씀은 불변의 진리다(갈6:7-8).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과정을 지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떻게 죽던 한번은 죽어야 된다. 그러나 문제는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하였다.(고전15:42-44) 2. 성전 안에서의 경배 성도들 성막의 원리에 근거하여 세 부류의 신자들로 척량(Measurement)하라는 뜻이 무엇인지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성막이 이동될지라도 그 안에 설치되는 기구들은 변동 없이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이처럼 신자들은 생활과 주변이 흔들리고 변동이 생겨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서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된다. 물론 이러한 사람은 번제단에서 태워졌던 번제물처럼 그리스도에 의하여 자신의 죄가 용서받은 신자를 말한다. 또한 제사장들이 물두멍에서 자신의 손을 깨끗하게 씻음과 같이 성령과 물로 거듭나는 삶의 신자를 말한다. 진설병: 히브리어서 ‘레쳄 패님(lechem p?nim)’과 헬라어서 ‘프로테시스(πρ?θεσιs)’는 성막 안에 있는 진설상에 두어서 하나님 앞에 항상(Always) 있게 함이다. 이토록 하나님의 제단에 감사함으로 자신의 헌물을 항상 넉넉하게 채우는 신자라야 된다는 것이다.

진설병의 의미는 일상생활에 대한 감사함이다. 감사는 찬양과는 분명히 다르고 찬양은 경배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역사에 관한 것이다. 감사는 우리 생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서 당연히 해야 할 우리의 의무다. 그러기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하신 것이다(살전5:16,18). 왜 감사의 삶이 되어야하는가? 감사가 되지못하면 바깥마당에서 경배하는 신자가 되기 때문에 항상 감사의 삶이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한다고 좋은 일이나 나쁜 일,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인식하면 안 된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파멸시키는 것뿐이기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하심이라” 하셨다(요일3:8). 그러므로 감사의 조건을 알아야 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였으니, ‘안에서’와 ‘관해서’란 말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에게 발생되는 모든 일에 ‘관해서’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든 예수 ‘안에서’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 감사는 위대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준비단계이다. 계속되는 감사는 성령의 한 열매가 된다. ⓑ. 감사는 본질적으로 성령 충만의 표현이기에 감사가 없다는 것은 성령 충만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 끝으로 감사의 삶은 기적을 일으키므로 이러한 신자는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로 척량 을 받는다.

감사하는 삶의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예물(헌물)로 항성 채우는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감사함으로 예물을 드리는 믿음은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자 일수밖에 없다. 등대: 순금으 로 만들어진 ‘럭니아(λυχν?α)’는 성전 안을 밝혀주는 일곱 등잔으로 구성해 성전 안 왼편에 놓여진다. 등불은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나타내) 빛이시다. 찬양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에 대한 성품에 관한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향하여 관심을 모으시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시도록 하는 일이다. 금 등대는 일곱 개의 불이 붙여진다.

 일곱은 하나님의 특별 속성인데, 하나님의 지식, 지혜, 선, 성결, 의, 진실, 주권,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삶이어야 된다. 찬양은 소리 내는 찬송이 아니다. 찬양은 범사에 감사로서 항상 마음에 평강을 누리면서 기쁨으로 생활할 때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속성이 높임을 받게 하는 삶이 찬양이다. 따라서 찬양으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사람은 성전 안을 밝히는 믿음이므로 이러한 신자는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이다. 이러한 신자는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함이 항상 떠나지 아니하는 분향단의 삶이다. 분향단: 히브리어 ‘퀘토레트(qetoreth madsch)’와 헬라어 ‘더미아마(θυμ?αμα)’는 하나님 앞으로 올리는 헌향(獻香)이다. 이 헌향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함을 말한다.

 중요함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이 헌향이 하나님에게 상달될 때 죄 사함이 받아져서,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로 들어가려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으로 사는 신자는 자신의 허물이 사함 되는 삶이 하나님 앞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삶의 신자는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의 자격은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쳐서, 감사와 찬양과 주님을 사랑하는 향연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함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중요함은 이들의 믿음은 증거궤가 있는 지성소로 일컫는 제단까지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안타깝게도 맑고 빛나는 세마포를 입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들어갈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2층천까지 들어갈 자로 계수된다는 뜻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장자에 속하는 왕권이나 순교자의 반열도 아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어린양 신부의 반열은 더더욱 아니다.

 제단에서의 경배 성도들 제단은 휘장으로 가려진 하나님의 지성소를 가리킨다. 앞에서 보았듯이 분향단을 지나야 비로써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다. 궤안에는 만나와, 싹 난지팡이와, 십계명의 돌 판이 들어있다. 만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을 살리시는 말씀이다.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질서유지를 말한다. 돌판은 십계명자체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것들을 넣어두고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 판을 궤위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하셨다(출25:21-22).

또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막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장소”라 하였다.(출30:6) 이처럼 제단에서부터 분향단까지 돌아오는 믿음의 소유자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믿음이다. 이사야, 다니엘, 엘리야, 엘리사, 호세아, 예레미아 등 많은 선진들이 날마다의 삶에서 그랬듯이, 이러한 신자는 장자의 총회에 들어갈 믿음이란 뜻이다. 이들은 깨끗하고 맑고 빛나는 세마포를 입은 자들이요, 어린양의 신부들을 만나게 될 자들이다.

이들은 부활과 휴거된 자들, 구약 선진들,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순교자들처럼, 이기는 자들이기에 그들에게도 장자의 총회에 들어가는 자격을 주어서 시온에 들어갈 자들이다. 이 무리들은 셋째하늘 나라인 시온에 들어갈 반열의 소유자로 인정함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갈대를 주면서 이런 자들을 척량(Measurement) 하라고 요한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2층천 하늘나라(βασιλε?α)와 3층천 하늘나라(Σι?ν)에 들어갈 성도들로 분류가 끝나게 된다. 따라서 극심한 대환난의 고통은 성전 밖 마당만 밟고 다니던 자들은 하나님의 계수에서 탈락시키신다. 저들은 42달 동안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었다 하시는데 왜 저들이 이러한 고통을 당해야 되는가를 깨달아야 된다.

 성전 밖에서의 경배 신자들 성전 밖이란 성막에서 보면 성막 뜰 밖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물두멍과 번제단이 놓여있다. 물두멍(Laver)은 제사장들이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손발을 씻게 하여 깨끗함으로서 죽임을 면하게 하는 기구다. 그리고 번제단(Altar of burnt offering)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지은 죄를 속죄받기 위하여 죄와 허물에 따르는 짐승을 드리고, 그것을 제물로 불태워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도록 하는 기구다. 물두멍: 히브리어 ‘키이요(kiyyor)’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자들의 더러운 손을 씻게 하는 기구다.

물두멍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부족하고 죄 많고, 스스로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준다. 따라서 거울같이 맑은 물두멍에 자신을 비취어보면서 일그러지고 모나고 불완전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기구다. 그래서 자신을 씻지 않으면 죽임밖에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기도해서 깨끗한 성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번제: 히브리어 olah와 헬라어 ‘홀로카우토마(oλοκα?τωμα)’는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을 잡아서 불에 태우고 죄 용서함을 받게 하는 희생을 드리는 기구를 번제단(Altar of burnt offering)이라 한다.

 번제단은 완전하게 잡은 짐승을 불에 태우는 것과 같이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삶을 말한다. 그럼에도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같은 방법으로 생을 산다면, 계속해서 씻기만 하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라면 당연히 성전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신자라는 말이다. 또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다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번제단 주위에 머물고 있는 생이라면, 그도 역시 성전 안에서의 경배하는 자가 아니다. 성전 바깥마당(뜰)만 밟고 다니는 신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잣대로 잴 때 제외되는 것은 성전 안에서의 경배를 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따라서 깨끗한 세마포를 입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믿음은 교회에 들락거리기는 하지만 교회마당에서 예배하는 자들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자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믿음에서 열심히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믿음이 부한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데 주님께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믿음이 부한 자라 믿음이 부족함이 없다하나 네 심령이 곤고한 것과 네 영혼이 가련한 것과 영적으로는 세마포도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신자라 했다. 벌거벗었기 때문에 “불로 연단된 금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하셨다(계3:18).

이러한 자들에게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하시면서(계3:19) “내 아버지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하였노니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1-4)하셨다. 이것이 대환난에 남겨지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다. 자기 육신을 위한 일에는 열심을 내고 돈 모으는 일에는 밤낮 수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게으른 사람들이었다.

이런 것이 벌거벗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고 따라서 제단과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 밖 마당에서 경배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척량에서 탈락시킨 것은 대환난에서 자신들의 의지를 어떻게 나타내느냐에 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예수 이름을 붙들고 죽임을 당하면 첫째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이 있다.

그러나 자기 육신의 죽음이나 고통 등을 이기지 못하고 666표를 받을 자들이 많기 때문에 1층천 낙원에 들어갈 자들은 척량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그들 중에는 예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666표를 안 받고 죽더라도 낙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연단장으로 가야될 자들도 많다. 이들은 그곳에서 회개될 때 백보좌 심판에서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는데, 그들도 1층천에 들어가기 때문에 성전 밖 마당에서 경배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은 대환난을 통하여 엄청난 박해가 있게 된다는 교훈이다.

교회가 당하는 박해는 8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요한은 거룩한 성이 42달 동안 박해가 있다고 한다.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 도성을 가리키는 뜻이 아니다. 세계 어디든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다 거룩한 성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의 모스크 맞은편에 성전이 재건되고 그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앉게 된다는 해석은 옳지 않다. 이 단원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성전과 제단과 성전 밖 마당에서 경배하는 자들의 영적상태라는 해석은 바른 해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을 유대인들로 국한시키고 세계적인 그리스도인들로 보지 않았다는 잘못을 범하였다는 교훈이다. 다른 면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받았고 지상에 남아서 대환난을 당하는 자들은 유대인들과 믿지 아니했던 자들로만 해석하는 잘못이라는 교훈이다. 그런데 분명하게 교회라고 밝히고 있는데도 그리스도인들이 없다고 한다면 앞뒤가 틀리는 해석이라는 교훈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10-12장까지는 구원계획에서부터 마지막에 교회가 박해받는 과정까지의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총체적인 요약임을 깨닫지 못하고 제9장과 연결시키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장죠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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