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동산에서 자라는 가장 질긴 잡초들 중 하나는 바로 자아이다. 사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이것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자신의 자아가 죽었다고 우리가 확신하는 그 순간, 자아는 어디선가 건재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서 우리 삶의 열대들에 독(毒)을 뿌리고 우리의 평안을 파괴한다.
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은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현실이 되면 절반의 승리가 우리 것이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믿음으로 우리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면 승리는 완성된다.
그런데 이 온전한 승리에 도달하려면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 근본적인 변화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일을 우리도 겪어야 한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거부당하고 포기하고 격리되고 추방당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십자가에 못 박힌 삶에 대한 교훈을 적용하는 데 실패했다.
승리하는 영혼이 건강한 영혼이다.
그런데 자아가 판단 받지도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않는다면 승리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자기 자랑이나 자기 비하에 빠져 있다면 아직도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신앙과 순종은 우리의 삶 가운데 십자가를 끌어들일 것이고, 자기 자랑과 자기 비하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줄 것이다.
<임재체험중에서...>
9/22/2011
그 아이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전도자 한 사람이 감방 너머로 다른 죄수들에게 말했다. 영향력 있는 전도자로 동유럽 전체에 이름을 날리던 그가 한 아이를 전도하지 못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중이었다. 다른 죄수들은 그 사람이 수천 명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백하는 좌절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주신 기회를 종종 일부러 무시하면서 "다음에 하면 되겠지",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언제나 다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전도의 기회를 무시하는 신자는, 이 이야기의 복음전도자처럼 그 순간이 영원히 날아가버렸음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그 순간에 어쩌면 우리 평생에 단 한 번 찾아온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었을 때 전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당신을 질책하실지 모른다. 그때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주신 기회를 종종 일부러 무시하면서 "다음에 하면 되겠지",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언제나 다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전도의 기회를 무시하는 신자는, 이 이야기의 복음전도자처럼 그 순간이 영원히 날아가버렸음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그 순간에 어쩌면 우리 평생에 단 한 번 찾아온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었을 때 전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당신을 질책하실지 모른다. 그때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죄’중에서 아주 중하고 악한 ‘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기도문 후반부 간구에서 가장 먼저 눈이 띄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값없이 주시는 무조건즉인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인단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의 다른 어떤 조건도 없이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자기 나라 백성이 된 영혼들에게 죄의 용서의 조건으로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를 덧붙이고 계신 것이다.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천하고 가증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나는 '증오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에 가장 극명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과 악의(악의)와 복수심으로 활활 타고 있는데 다른 죄들을 자백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지독히 거르스는 죄를 내 마음에 키우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요, 왕의 백성이요, 목자의 양떼인 우리는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중하고 악한 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실상을 보라. 서로에게 악한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주님의 식탁에 마주 않다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는 일이 흔하지 않은가?
주님은 "먼저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이 명쾌하고 통렬한 말씀을 망각하지 말자! 우리의 형체자매들을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때, 우리는 마귀를 압도하는 가장 강력한 승리를 얻게 된다.
주기도문 후반부 간구에서 가장 먼저 눈이 띄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값없이 주시는 무조건즉인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인단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의 다른 어떤 조건도 없이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자기 나라 백성이 된 영혼들에게 죄의 용서의 조건으로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를 덧붙이고 계신 것이다.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천하고 가증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나는 '증오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에 가장 극명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과 악의(악의)와 복수심으로 활활 타고 있는데 다른 죄들을 자백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지독히 거르스는 죄를 내 마음에 키우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요, 왕의 백성이요, 목자의 양떼인 우리는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중하고 악한 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실상을 보라. 서로에게 악한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주님의 식탁에 마주 않다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는 일이 흔하지 않은가?
주님은 "먼저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이 명쾌하고 통렬한 말씀을 망각하지 말자! 우리의 형체자매들을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때, 우리는 마귀를 압도하는 가장 강력한 승리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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