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2009

하나님의 말씀, 뜻과 방법을 알아냄 3

하나님의 말씀, 뜻과 방법을 알아냄 3

연합 - 결정을 짓는 데 있어서 한 사람 이상이 개입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동의와 일치가 필수적입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 안에 있으면 반드시 일치하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남편과 아내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완전한 합의와 평강에 있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결정에 개입되어 있는 다른 이들과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로 더불어 일치하여야 되겠습니다. 또 시편 133장은 우리에게 연합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소원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고 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온 지식적인 말씀이고 또 그것은 하나님의 전체 말씀에 비추어, 성령과 그 내용 양쪽으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말씀의 신호등은 파란 불로 변했습니다. 그런 뒤에 우리가 두 세 증인들의 입으로 확인을 가져온 몇 가지의 개인적 예언과 적절한 권고를 받은 것으로 가정하십시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성령의 열매를 갖고 잇고, 또 성령으로 인한 점검 표나 제지는 없으나 그 대신 평안의 느낌, 허용이 있습니다. 관련된 모든 점이 일치가 되면 만사가 질서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말씀에 의거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며 또 레마의 확인된 말씀에 의해서 그의 구체적인 뜻임을 확신하여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뜻에 관한 이러한 2가지의 파란 신호들은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세 번째 신호등, 하나님의 길도 하나님의 역사가 성취되기 전에 마찬가지로 파란 신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 - 말씀은 하늘나라의 승인을 알려 주며, 하나님의 뜻으로 진전되고 있는 역사가 당신을 위함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의 소원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을 알아야만 됩니다.  하나님의 길은, 그의 맞는 시간, 방법,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필요한 도구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그러나 반드시 어째서는 아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속되는 지도와 환경적인 지배,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때까지 밀고 나갈 만한 인내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길을 손에 넣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너희가 오래 참음의 필요가 있으니, 그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예언의] 약속을 받게 함이다”(6:12). 인내를 갖고 있는 사람은 결국 약속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심히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어서 이러한 세 번째 신호들이 있는지도 심지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같이 하나님의 길은 우리들의 길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이사야55:9).

간혹,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그의 길보다 결정을 내리기가 더욱 쉬운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은 성경책을 검토함으로써 결정될 수 잇고, 그 뜻은 개인적인 마음속에 일어나는 원칙과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확인을 받아서 결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매일마다 걸어나가야 하는 어떤 시간적 과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의 모든 구체적인 사항은 미리 앞서서 계시해 주시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개인 예언이 그 길은 보여 주며 올바른 방향을 결정적인 교차로에서 가리켜 주는 이정표를 제공해 주며 또 다음 회전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를 알려 주는 역할을 일부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나 많은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 주시지 않을 때가 있으므로 그래서 그 길은 우리가 그때, 그때 한 부분씩 끼워 맞추어서 하나로 연결시켜 그림을 완성시키는 일과 똑 같은 방법으로 성취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간혹 한 부분 그 자체로는 개별적으로 의미를 나타내지 못하지만 전체 그림을 볼 수 잇도록 완성되었을 때만이 그 중요성을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위한 하나님의 길 - 우리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생애 속에서 본보기를 이루는 이러한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호와를 위한 위대한 종족의 아버지가 되며 또 모국이며 본거지가 되는 가나안을 점령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구체적인 뜻으로써 말씀으로 전해졌고 또 수 차례의 예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시키는 길은 그 땅을 종과 횡으로 걸어야하는 것이었습니다(13:17). 그의 개인적인 책임이란 그의 일생 동안 계속해서 바라보며 걸어나가며 또 지정해 놓은 경계 점 내에 그가 발을 밟고 가는 곳마다 그와 그의 자손이 유업으로 물려받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00년 이후에  여호수아가 땅을 차지하는 하나님의 길은 달랐다.

하나님께서 점령하도록 선택해 놓으셨던 특정한 장소는 가나안이었고, 그러나 그가 종족으로 커지도록 지정해 두신 장소는 애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의 성취가 이루어진 정해 놓은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정복하였고 또 그 땅을 소유하게 된 때로서 4세기가 지난 휠씬 지난 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참음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모리 족속의 죄가 충분히 찰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또 그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들처럼 되도록 번성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속히 내려왔지만, 그러나 그의 길이 완전히 알려지게 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에게는 몇 세기에 관한 예언을 말씀해 주시며, 또 개인들에게는 전 생애에 따른 예언을 말씀해 주십니다,

모세는 이러한 과정의 두 번째 좋은 본보기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3백만이나 되는 선민을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도록 그에게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전해졌고 또 표적과 이적을 확인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을 가는 본래의 여정인 11일의 여로가 아닌 2년의 광야를 통과하는 여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정은 애굽에서의 염병, 홍해를 가르심 그리고 사막에서의 기적과 만나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을 밤에는 불기둥으로 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바로가 그들을 풀어 놓아 주도록 명령을 내릴 때까지, 또 그 뒤에는 광야에서 또다시 참을성 잇게 견디어야 했습니다. 비록 해방된 노예의 세대가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점령하시기를 바라셨던 특정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결과적으로 인내력을 잃게 되고 죄를 짓고 또 반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와 젊은 세대가 그 대신 예언을 성취시켰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예정표를 연장시켜서 40년의 방향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실 준비가 될 때까지 구름과 불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달성시키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요하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장막이 그의 처소가 되도록 하는 것과 율법의 조항이 그들을 지켜주며 또 그들과 하나님과 또 서로간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 등입니다. 또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무리를 하나님의 질서로 조작된 12개의 지파로 변모시켰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하신 장막 주위에서 이루어진 변화입니다. 이러한 기간은 전쟁에 대한 적절한 훈련을 쌓는데 충분하여 실제로 원수들과 대결할 기회가 왔을 때, 거인들을 몰아내고 땅을 점령하는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 믿음으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어떤 공식에 따름이 아니라, 믿음의 흐름에 따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서 그가 대결한 족속들을 각기 정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유별난 길을 알아내야 했습니다. 예를 든다면 여리고는 특별한 길로 점령되어야 했는데 그들이 단순하게 아이 성을 점령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전쟁에 지고 말았습니다. 다윗 역시 전쟁마다 매번 다르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충돌 속으로 모험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길의 파란 신호등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파란 신호가 실지로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로 주어졌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특정된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역은 때가 제대로 차서 시작되어야 하며 만일 때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의 태도가 또한 올바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들을 우리가 용서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 우리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뜻입니다. 그러나 몇 사람은 쓸데없는 말로 일을 망쳐 버리고 있습니다. “모르고 그랬으니 내 실수를 용서해 주라, 그러면 나도 네 잘못을 눈감아 주지 그리고 너도 앞으로 그런 바보가 되지 않도록 내가 기도해 주면 되겠지?”

우리의 행위는 또한 하나님의 간혹 있는 특유한 계획을 따라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허다한 경우,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면 실질적이 못됩니다. , 그것은 육의 사람이 행하려고 하는 그러한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걷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적인 지식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고 또 예언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길을 구하는 대신에 오히려 어떤 다른 이를 흉내 냄으로써 그 일을 행하려고 시도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경제적인 번영에 관한 개인 예언을 받았으나, 그들이 그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길을 결코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목표를 끝내 성취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길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대로 따라서 행하도록 시작은 했으나, 점점 그들의 옛날 길로 다시 되돌아가서 그들의 생애를 위한 하나님의 뜻 위에 부어진 기름부음을 잃게 됩니다.

일단 말씀에 비추어 정식 확인이 되었고, 또 그 뜻이 나타나게 되었으면, 그 길은 잘 알려지게 될 때가지 기다려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의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소서.”(시편27:11)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하심을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셨으나, 그의 길들은 모세에게 알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또 모세와 같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사가 하늘 아래서 이루어지는 시간을 정해 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올바른 길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성도의 노력은 그의 말씀의 권세와 더불어 그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그의 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든 3가지 신호등이 파란 불로 켜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해서 전속력을 다해서 전진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의 말씀, 뜻과 방법을 알아냄 2

하나님의 말씀, 뜻과 방법을 알아냄 2


그의 완전한 뜻을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WAY)

하나님의 지시로 소원 - 시편기자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시편 40:8). 하나님의 가장 큰 즐거움은 그의 자녀들이 그의 뜻을 행하기를 소원하는 데 있습니다. –, 자진해서 육을 못박기를 기뻐하며 성령님의 원하시는 바를 이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그의 뜻을 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시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기뻐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시편 37:4). 이 구절은 이중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갖기를 원하시는 바를 소원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함에 따라서, 그분께서는 예언적인 감동으로 이루어진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 소원은 하나님의 뜻의 초자연적인 암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수적인 확증들이 없이 소원 자체만으로는 우리가 소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못됩니다.

레마와 성서적 조명 - Rhema, 희랍어 말씀’ –‘말하다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레마)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레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말씀이나 혹은 설명이며, 레마는 우리의 개인적인 특정한 상황에 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레마는 적절한 때 로고스에서 나온 성령의 감동으로 나온 말씀으로서 생명을 가져다 주며 그 말씀을 성취하고 시행할 만한 능력과 믿음을 줍니다. 레마의중요성은 하나님의 말씀 (Rhema)인 성령의 검(6:17)을 가지고 관련된 본보기를 보여 줍니다.

레마는 예언의 말씀과 같은 것으로 다른 이를 통하여 받을 수도 잇고 아니면 성경을 개인적으로 묵상하다가 아니면 기도를 하는 도중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조명으로 주실 수도 있습니다. 로고스는 고정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 그리고 레마는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개인적 체험에서 직접 어떤 일에 적용될 수 있도록 선포된 로고스와 일치된 특정한 부분입니다.

레마는 당신의 영속에서 태어난 감동으로 이루어진 말씀으로써, 동굴 속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던 조용하고도 작은 음성과 같은 성령의 속삭이십니다. 이것은 당신의 혼에 오는 하나님의 감동 즉, 하나님에게서 오는 번쩍하는 생각이나 혹은 창조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영속에서 잉태되었으나, 하나님의 조명으로 당신의 선천적 이해력으로 태어나옵니다.

진정한 레마는 그와 함께 깊은 마음속의 확신과 성령의 증거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아주 선명히그의 뜻을 레마로서 계시해 주십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는 그것을 어떤 특정한 구절의 조명을 통하여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읽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것을 너에게 적용한다고 말씀하시며 되살아나게 하는 레마를 보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방법으로 그의 사역의 지시를 받으셨습니다(누가4:16-21). 이러한 형태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시를 계시의 지식혹은 성서적 조명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선지자와 개인에 관한 예언 -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개인적인 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는 말씀을 해 주시기 위해서 오늘날에도 선지자를 쓰고 계십니다. 이러한 방향을 제시하는 예언들은 예언의 은사로 역사하는 어떤 이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집니다. 성도들과 다른 사역 자들도 비록 어떤 사건에 관한, 지혜의 말씀이나 혹은 지식의 말씀을 받을 수 있지만,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는 말씀들은 대체로 선지자의 직임으로부터 나와야 됩니다.

오랜 역사와 실적으로 입증된 선지자의 말씀이라면 신중이 여기고 귀중히 여기고 또 즉시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근원에서 나왔든지 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고려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증명된 사역 경력이 없는 어떤 이가 어떤 말씀을 주었을 때, 그리고 그 말씀과 결부시킬 수가 없거나 혹은 그 말씀에 대한 정확한 증거를 갖지 못했을 경우에, 그 말씀대로 실천하기 전에 몇 명의 사람들을 통한 더 많은 확증을 얻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우리가 완전히 거부할 수 있는 말씀들은 오직 비성서적이거나 혹은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들뿐입니다.

성령의 은사들  - 성령은 그의 아홉 가지 은사들, 특히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과 같은 계시 은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사역 자들과 실업 인들은 그들의 교화와 사업에서 현명한 결정들을 짓기 위하여 이러한 은사들을 적용하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들은 인간적인 지식이 부족하고 또 성경이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지 않는 경우, 가족에 대한 결정들을 내릴 때 이러한 은사들을 필요로 합니다.

헌신된 크리스챤에게는 옳고 그른 것의 선택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두 가지 옳은 일들 사이에 선택이 필요할 때에는, 초자연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각자 성도들에게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도와 주기 위해서 또한 현명한 결정들을 통해서 따라 가도록 돕기 위해서 유익합니다.

성령의 열매들  -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단지 은사들의 초자연적인 나타남으로 인도함 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열매는 은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똑같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열매와 은사는 같은 동전의 양면과 똑같아서 그 동전이 쓰여지려면 양면이 다 좋은 모양을 갖추어야 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는 경향이 잇고, 또 카리스마주의자들은 은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스스로 경쟁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열매와 은사는 양쪽 다 우리 생활 속에 나타나는 영의 활동입니다.

이사야는 예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이사야 55:12) 영적인 평안에 따라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영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 때문에 실천하는 것은 성령으로 인한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즉, 성령의 은사와 열매 양쪽을 다 포함하여 행위로 옮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행도하고 또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고린도후서5:7).

이러한 것 중에서, 하나님의 평안이 특별히 중요합니다. 바울은 영적인 생각은 그 속의 삶과 평안의 정도로 분간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 그는 또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심령을 지배 , 다스리고 또 지시하도록 교훈하였습니다(3:15),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모든 혼란, 의심과 우유부단을 압도시켜야 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7).

만일, 당신이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바란다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시편 34:14). 하신 말씀을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그 다음 순간, 당신의 혼과 영속을 살펴보아서 그 상황에 관한 얼마나 많은 기쁨과 평안을 당신이 지니고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십시오.

그 사건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몇 가지가 분명히 두드러지게 보입니까? 당신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두려움입니까? 소망을 품고 있습니까? 아니면, 낭패하고 있습니까? 기쁨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평안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중압감을 느낍니까? 절제입니까? 아니면, 초조함을 갖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어느 사건에 처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다면 성령에 의하여 인도하심을 박게 되며 또 마음속에서 올바른 열매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러한 것을 갖고 잇지 않다면, 그때에는 하나님의 뜻의 파란 신호가 켜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신호들이 당신에게 앞으로 나가도록 불을 켜 줄 때까지 아무런 일도 행하지 말고 어떤 서약이나 혹은 최종적 결정들을 내리지 마십시오.

성령의 증거, 허가, 혹은 제지 - 바울 사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기를 원하셨던 바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그가 사역을 위한 길을 떠날 때에 어느 길로 가야 하라 바를 초자연적으로 알아내기 가 불가능하였을 경우에는, 그는 그저 스스로 생각해서 가장 좋다고 여기는 쪽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만일, 성경께서 그 시점에서 그에게 그 장소에 가기를 원치 아니하셨다면 성령은 바울에게 그의 영속에 어떤 점검 표나 제지를 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과 16장에서 생긴 일들은 그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다른 길로 가게 하시고 그 대신 마케도니아로 여정을 바꿈으로써 사도가 이러한 방법으로 움직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하나님이 구체적인 뜻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뜻도 갖고 계심을 입증해 줍니다.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됨이 하나님의 일반적 뜻이었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또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도 갖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애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따르기를 위해서는, 우리는 성령의 점검 표들과 제지에 극히 민감해야 되겠습니다.

성령은 또한 우리가 그의 생각을 알도록 도와 주시기 이하여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실 것입니다”(8:16). 예를 들어서, 선지자 아가보는 바울에게 그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며, 또 예루살렘에서 투옥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그러한 계시가 그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못되기 때문에 그냥 길을 떠났습니다. 성령은 그의 노정에서 거의 가는 도시마다 같은 진리를 증거해 주었습니다(행전20:22; 21:1-14). 아가보의 예언은 종전에 그에게 주어진 수없이 많은 개인적 예언 속에서 말씀하였던 바로 또 하나의 확인이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의 파란 신호등이 비취기를 원한다면, 그런 뒤에 당신의 영속에 허가를 받아야만 됩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암시나 혹은 제지를 절대로 무시하지 마십시오. 무시하는 경우 당신의 영적 감각들은 둔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제정해 놓으신 파란 신호등을 껌벅거리는 노란 신호등으로 마음속에 변화시켜 줄 것이며 그리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자기 의지로 또 당신의 방법들로 목표를 정하거나 혹은 끝없는 혼란과 우유부단의 상태로 묶여 있도록 만들어 주게 됩니다.

현명한 상담  - 예수님의 성서적인 이름들 중의 하나는 상담자”(이사야9:6)입니다. 상담을 통하여 예수님의 뜻과 방법을 보여 주시는 그분과 똑 같은 그의 성품과 인격을 보여 주십니다. 그의 이름은 또한 영원한 아버지선한 목자이십니다. 왜냐하면, 목사와 부모와 상담(즉 우리 자신보다 더욱 현명하고 성숙한 사람들로부터의 신령한 충고)은 하나님의 뜻을 결정짓는 중요한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상담자를 찾아볼 필요를 확신케 해 주는 수 없는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너는 모략으로 싸울,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잠언11:14; 12:15; 15:22; 19:20; 20:18; 24:6).

권고를 구하는 것은 그렇다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미리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오히려 마음 문을 열고서 권고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지자, 목사, 부모나 혹은 장로에게 접근할 때에, 우리는 마치 우리가 벌써 마음을 결정했다는 말씨와 태도로 나가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것을 행하도록 말씀하셨지만, 그런 나는 당신이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정말 그것을 당신에게 행하도록 말씀하셨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과 논쟁하여 들겠습니까? 그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에게 적당한 권고를 주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구원을 강요하시지 않는 정도 이상으로 그의 권고도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확인 - 하나님의 뜻을 결정짓는 원칙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사실로써 그것을 받아들이기 전에 매사에 두세 증인들의 입으로 학인을 얻어야 하는 성서적 요구 조건입니다. 확인을 받는 데 대한 이러한 원칙은 모세의 율법에서 확립되었고(신명기17:6; 19:15) 또 은혜 시대의 교회에서는 사도 바울에 의해서 재확립되었습니다(고후13:1).

이 규정은 권고의 말씀, 예언의 말씀 혹은 레마 말씀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 단 하나님의 성경 구절로만이 확립될 수 없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도 한가지 예언, 한가지 레마, 한가지 권고 혹은 한가지 다른 어떤 것으로는 확립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두 세가지 다른 근원으로부터 확인을 받기 전까지는 한가지 말씀에 관한 판단을 보류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거슬리는 일이 안됩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중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당신이 한가지 예언을 받아들이기 전에 최소한도 두 명 또 더 좋기는 세 명의 증인들이 있도록 하시는 것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뜻과 방법을 알아냄 1

하나님의 말씀, 뜻과 방법을 알아냄 1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 하늘나라와 어긋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가를 확신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3가지W’s”를 따르는 것 입니다. , 어떤 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Word),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 뜻(Will), 그 일을 성취시킬 수 있는 그의 길(Way)입니다.

정상적인 절차는 당신이 첫 번째 신호등인 말씀(Word)에서 가라는 신호를 갖게 된 것을 확실히 하는 데 있습니다. 만일, 그 신호가 빨간 색이면(아니오), 더 이상 나가지 마십시오. 신호가 파란 불이면, 하나님의 뜻(Will)인 다음 신호등까지 계속해서 나가십시오.

한결같이 파란 신호가 계속될 때까지 페달을 밟고 계십시오. 노란 신호(요 주의: 아직까지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릴 수 없음)는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길(Way)인 세 번째 신호(노란색)등이 파란 불이 되면, 당신은 적당한 속도로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 당신은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있고 또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었으므로 결정을 마무리 짓고서 곧장 행동을 개시하십시오

세 번째 신호등이 특별히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진지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Word)대로 행하는 일에 열심이며, 또 그 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길(Way)dl 분명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에는 그다지 충실하지가 못합니다. 이러한 신호등들을 각각 자세히 살펴보게 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되어, 믿음으로 걷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대로, 개인적 예언을 올바른 위치에 두고, 또 여호와에게서 온 우리의 개인에게 주신 레마를 성취하도록 어떻게 해 주시는가를 알게끔 도와 주실 것입니다.

           말씀(The Word)
성경은 만사에 있어서 최고 권위가 되며, 또 최종적인 결론이 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인간의 형태 속에 계신 하나님의 계시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록된 형태의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서는 읽고 또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게시되 또 기록된 생각, 소원, 그리고 목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속한 이 책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또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 라고 기도로 탄원하며 또 하나님은 이를 성취하십니다. 성경은 전 인류와 특히 크리스천들은 위하여 선과 악, 옳고 그른 것에 관한 해야 될 것과 해서는 안된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가 시종일관으로 한결같습니다.

어떤 이가 말씀에 의존할 파란 신호를 받게 되면, 그는 권위 있는 확인을 얻기 위해서 그저 하나의 막연한 성경 구절 정도 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로고스의 일부분입니다. 또 어떤 특정한 목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특정된 레마를 아무에게나 함부로 적용해서도 안됩니다. 예) 이사야 사람 앞에서 옷을 벗고 나서라는.. 호세야 창녀에게 장가 들라는..

교리를 성립시키려는 의도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개인 예언을 우리 시대의 인물에 도일하게 적용하여 아무나 따를 수 있는 견본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을 찾아 보고 결정하는 목적이 우리의 소욕을 합리화시키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소욕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시키고 또 로고스와 부합시키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파란 신호가 켜지기 전에 말씀의 영과 또 말씀의 글자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또 말씀의 영 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 성격, 그리고 원칙입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파란 불을 비추어 주는 한두 개의 구절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그런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반대되며, 또 그의 일반적인 원칙에 반대된다면, 당신은 그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며, 또 그것을 내용에서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령하거나 혹은 종교적으로 들리더라도, 어떤 근원에서 유래되었던 당신에게 밀려드는 모든 생각, 인상과 암시들을 전체 성경에 비추어서 파 헤쳐 보십시오. 속임수와 망상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며, 또 당신이 이기적으로 그렇기를 바라며 해석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로고스Logos, 희랍어 말씀’ –불변하는 창조적인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시편 119:89-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딤전 3:16, 고전2:13. 로고스는 하나님의 전체 기록된 말씀. 성경입니다. 로고스는 완전한 하나님의 계기로써, 성경 속에 알려진 그의 인격, 특성, 계획과 영원한 목적)으로 하여금 심령 속의 속임수로 오는 모든 자의 망상을 쫓아내고 또 파괴시키도록 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좌우의 날 선 검만이 혼과 영을 쪼갤 수 있어서 생각과 짐작이 혼의 영역이나 영의 영역에서 오는가의 여부를 나타내줄 수 있습니다.

생각과 소원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파란 신호를 받게 될 때까지는 기도 간청으로 만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만일 당신의 생각이나 소원이 성경에 왜곡되고, 부적당하고, 법에 어긋나고 또 하나님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 부도덕적인 경우, 그런데도 그것을 당신에게 행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하나입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15:7). 성령은 절대로 당신에게 하나님의 성품이나 혹은 성경 말씀과 상반되는 어떤 일을 행하라고 일러 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기도와 묵상에서 응답으로 보이는 어떠한 상반된 생각은 혼(이성, 우리가 생각하는, 지성)의 상상, 이기적인 속임수, 혹은 마귀에게서 온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경 말씀을 잘못 인용하여 자기 자신의 속임수와 파멸을 자초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베드로후서 3:16).

진정한 양심적인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구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지 않는 한 그들의 기도는 응답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은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한15:14-15). 만일 당신의 탄원이 성서적으로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신념과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에게서 어떤 생각을 받기 전에, 혹은 어떤 사업에 착수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절대적인 파란 신호를 받는 것을 확실히 하세요. 그러나 그런 후에라도, 아직은 전속력을 내어 달리도록 길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충분한 승인, 권한과 기름 부음을 당신이 받기 전에 두 개 이상의 신호가 켜지는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Will)
하나님께서 전 인류에 관한 일반적인 뜻을 갖고 계심과 똑같이 개인에 관해서도 역시 구체적인 뜻을 지니고 계십니다.

모든 진정한 레마와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적과 또 그리스도의 전체 몸에 덕을 세우도록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에서 나가는 지시가 눈으로 향하는 것과 귀로 향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처럼 각자 구성원과 또 교회에서의 사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뜻과 지시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각 개인에게 맞게 적용되도록 개인을 위해 마련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업, 여행, 사역과 또 우리의 경제적인 용도에 관한 많은 결정을 내리는 일반적인 기준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많은 구체적 사항들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남자가 혼자서 사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결혼을 존중하나 어느 믿음 있는 여인에게 장가들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크리스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상호간의 매력과 연애감정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저 기업의 성과가 법적이고 또 성서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느 개인이 그 기업에 가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절대로 그의 일반적인 뜻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때로는 그의 일반적 뜻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자로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나를 가르쳐 주소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생애를 위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게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의 뜻을 알게 해 주시는 방법들을 살펴본 뒤에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어떻게 오늘날 그의 구체적인 뜻을 사람들에게 계시하도록 성도들에게 역사하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서 속에서 하나님의 개인적(Person)이며 개별적인(Individual) 계시(예언)의 방법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요셉: 꿈으로 지시하셨습니다.
모세: 불 속에서 나오는 들리는 음성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엘리야: 조용하고도 적은 음성으로 속삭여 주셨습니다.
마리아: 천 사장 가브리엘을 보내 주셨습니다.
바울: 예수님의 영화로우신 몸으로 개인적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다윗: 사무엘과 나단의 예언을 통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후: 선지자 엘리사와 다른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보내 주셨습니다.
디모데: 하나님께서 장로회의 예언과 함께 안수함을 통항 하나님께서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계시의 지식을 통하여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이러한 모든 방법을 주심으로써, 우리도 우리 자신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어떠한 지침서와 보증을 필요로 합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신호들을 통과 하였고 또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것이 말씀의 내용과 영의 양쪽이 다 일치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 우리는 성령님께서 성경적인 방법들을 따름으로서 정확한 확신과 방향을 가져다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 - 하나님의 음성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나님의 음성듣기 - 하나님의 음성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나는 음성의 종류를 대별하여 두 가지로 나누고자 한다. 한 가지는 보편적이고 익숙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신자라면 누구나 듣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보편적이고 익숙한 방법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
성경을 읽는 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우, 가끔 반복하여 같은 말씀을 보여 주시는 경우, 잊었던 구절이 갑자기 생각나는 경우,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도전, 격려, 평강, 확신 등을 주시는 경우 등이다. 신자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듣는, 또한 가장 안전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성령이 우리 영에게 말씀하시는 경우
기도, 찬양, 말씀 묵상 중에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우리 영에게 증거 하실 때(8:16), 우리의 심령에는 기쁨, 확신, 평강 등이 임한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부담이나 소원이나 소망을 주셔서 그것을 두고 기도하거나 행하게 하신다. 또는 필요할 때 이전에 읽었거나 암송한 구절을 기억나게 하셔서 우리를 위로, 책망,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훈련을 하면 이 두 가지 방법도 더욱 잘 활용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일상 생활을 통해 같이 지내는 사람이나 또는 특별한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또한 말하는 본인도 모르게 우연하고 단순하게 지나치는 한마디 이나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환경을 통해
성공이나 실패의 환경으로 말씀하신다. 실패, 병과 고통, 경제적 파탄, 비극, 일의 성취 등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도 불순종하거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환경도 있다. 물론 이것도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되지만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불순종의 열매일 수도 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가 두 조각이 난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나타난 심판의 결과이다(왕상11:11-12). 대때로 사람들은 어던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은 경우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일너지 않은 것은 모르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뜻이 아닌 모양이다라면서 자위하는 경우가 있다.

만일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 반대의 경우조차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자신의 불순종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특별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방법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다른 한 가지는 특별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방법이다. 바로 우리가 음성 듣기 훈련을 하고자 하는 분야이다.

예언적 인상들(prophetuc impressions)
신자라면 누구나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주시는 예언적 인상이나 생각들을 체험할 수 있다. 또는 몸의 어떤 부분이나 마음에 어떤 생각이나 인상또는 부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기 때문에(19:10) 신자라면 누구나 이런 것들을 체험할 수 있다.

언젠가 예배를 인도하는 중에 마음이 답답하고 의심이 가득 찬 사람이 회중 속에 있음을 느꼈다. 나의 심령에 그렇게 부딪쳤기 때문이다. 나는 예배 중에 기도를 하면서 우리 중에 심령이 답답하고 의심에 차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어느 자매가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해하려는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시고 그들을 책망하셨다.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태9:3-4). 예수님은 생전 알지도 못한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인이며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의 남성 편력이 어떠한가를 아셨다.

나 또한(H.K.L) 이전에는 가끔씩 대화하는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나의 생각이나 느낌인줄 알고 자백하며 회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판단과 정죄를 서슴치 않고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들의 심령을 만지시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성장시키셨으며, 때로는 상대방의 아픈 부위나, 상처가 어떠함을 보이시기도 하며, 내게 느끼게도 하셔서 기도할 때면 상대방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 기도를 않할 수 없을 정도까지 몰고 가시기도 하신다.

때로는 외로움과 곤란 속에 있으면서도 자존심과 열등의식에 잡혀 빠져 나오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도록 상대방의 마음과 환경을 마음의 눈으로 보이시고 듣게 하시며 느끼게도 하신다. 사람에 따라서는 몸의 어떤 부분이 아프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자신도 모르게 손이 상처 부위로 가서 기도하기도 한다.

환상이나 꿈
꿈은 자면서 보는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꿈을 통해 경고, 책망, 훈계 등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성경에도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신자들 중에서 가끔 자기들이 본 환상이나 꿈에 대해 의미를 불러보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잡몽과 겹쳐 해석이 불분명한 경우도 많다. 환상은 자지 않으면서 영안(靈眼)이 열려서 보는 것을 말한다. 열린 환상(open vision)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본 것같이 내용이 선명하거나 영화 장면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비몽사몽간 또는 입신(trance)하여 보는 것을 말한다(10장의 베드로, 22장의 바울, 계시록의 사도 요한 등). 입신하면 내가 바로 환상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음 성(voice)
하나님과의 대화 중에 듣는 음성은 대부분이 내적 음성’(inner voice)이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한다. 마음으로 듣지만 분명하고 또렷하여 어떤 경우에는 육성으로 들은 것보다 더 오래 기억이 남는다. 성령의 음성은 대부분이 부드럽고, 상쾌하고, 나지막하다, 이를 세미한 음성이라고도 한다(still small voice, 왕상 19:12). 한편 들리는 음성(audible voice, 3:17, 17:5; 9:4-5)은 나도(작가 구요한) 이전에 가끔 들은 적이 있지만 그렇게 흔하지는 않다.

단어문장을 보는 것
꿈이나 환상 중에 어떤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어나 문장을 보는 것을 말한다(5:5참조).

상징적인 행동(symbolic acts; acted parables)
음녀와 결혼한 호세아(1), 벗은 몸과 발로 3년 거리를 다닌 이사야(20:1-6), 마른 뼈에 예언한 에스겔(37)과 같이 예언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경우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회개시키시면서 개같이 팔 다리로 기게 하거나, 혓바닥으로 무엇을 핥게 하시는 경우도 있다.

자동 필기 또는 영서(spiritual writing, 5:5절 이하)
어떤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문자로 기록하기도 한다. 언젠가 어느 분이 상형문자 비슷한 영서를 받아 쓴 것을 보여주면서 해석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도무지 무슨 글자인지 몰랐지만 마치 방언 통역하듯 주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무엇이라고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훈련을 하면 여기에 나열된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지만 가장 보편적으로 들을 수 있는 형태로는, 마음의 인상들이나 나도 모르게 불쑥 들어오는 생각들, 나도 모르게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말들, 내적 음성 즉 세미한 음성 듣기에 익숙해지면 하나님과 말을 주고 받는 대화가 가능해진다.

이처럼 하나님은 여러 모양과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의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음성의 종류를 숙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래야 자기가 실제로 들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서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참고도서: 초자연적인 세계의 실재[타드 벤틀리]





하나님의 음성듣기: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는 계속된다






 신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


      최근에 어느 기도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들이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내 마음속에서 성난 두 얼굴이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마치 불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그러자 옆에 있던 어느  자매가 말하기를 아마 한 얼굴은 저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 방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쓸데없는 말과 나쁜 소문을 퍼뜨려 갈등을 조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그림을 본 처음의 자매가 이렇게 말했다.아마 다른 얼굴은 저였을 것입니다. 저도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으니까요?



기도회에서 일어난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 해야 할까? 일부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언이라고 부르며 개발, 훈련 및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직통 계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예언이나 직통 계시를 받는 사람들을(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매도한다.


과연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존재하고는가? 예언의 은사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웨인 그르뎀 박사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을 평이한 글로 개편한 [신약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 예언의 은사,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 1988, rev, 2000]에서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계속되며 교회는 이 은사를 적극적으로 개발, 활용할 것을 권장한다.

그루뎀은 고린도전서 14장의 자세한 주석을 통해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웨인 그루뎀 박사는 미국의 명문 하바드(B.A), 웨스트민스트 신학대학원(M. Div)을 거쳐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으며 현재 미국 트리니트복음주의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다음은 신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에 대한 웨인 그루뎀 교수의 견해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예언의 은사
신약이 말하는 에언의 은사는 우리 마음(또는 생각)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주신 것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의 권이에 종속되는 것으로서 안위와 권면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고전14:3), 회개와 전도를 하는 것(고전 14:25)이 그 주된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고린도전서 14:25절은 예언과 계시를 동의어로 사용된다. 예언이나 계시는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주시는 것이다. 그루뎀은 예언이나 환상을 보는 자들을 무조건 신비주의자로 정죄하고 이단시하는 정통보수신학에 제동을 건다. 그루뎀 교수는 특히 예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미국 그레이스교회의 존 맥아더의 견해를 신랄하게 반박한다.

 동시에 그는 오늘날의 예언은 기록된 성경말씀과 같이 정확무오한 것이 아니라 오류의 가능성도 있으므로 분별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의 예언을 과신하는 자들에게도 따끔한 경고가 된다.

기록된 성경말씀과 예언의 은사
오늘날의 예언은 우리들이 통상적으로말하는 하나님의 말씀, 즉 절재적인 신적 권위를 가지며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기록된 성경말씀과는 다른 것이다. 오늘날의 예언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이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14:29)라고 말하며 또한 예언을 멸시하지 말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5:20-21)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틀린계시를 주시지 않지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한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일지라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어려우며(, 10장에서 베드로가 받은 보자기 속의 동물 환상), 또한 우리의 생각 때문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자기가 받은 계시를 여호와의 말씀이나라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잘못 이해한 데서 생긴 오류이다. 오늘날의 게시는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계시와는 다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세나 예레미아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셨다고 기록한다(18:18-20; 1:9; 2:7)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말하고 기록한 예언은 절대적인 신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셨을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권위를 보증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예언이며 전 시대를 위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다(딤후3:16).

신약에서도 구약의 선지자들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선지자가 아니라 사도들이다. 신약의 사도들(및 일부 사도의 지도 하의 제자들)이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자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했다(고전2:13; 1:8-12).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동격에 두고 있다(벧후3:2).

신약에는 사도나 사도의 위임을 받은 일부-마가, (11;27), 안디옥(13:1), 두로(21:4), 가이샤라(21:8-9), 로마(12:6), 고린도(고전14),  에베소(4;11),  및 데살로니가(살전5;2) 등 전 교회에 골고루 흩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루뎀은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가지고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성경말씀과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사적인 게시,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구루뎀은 하나님께서는 게시를 두 가지 통로를 통해 교회에 주신 적이 없다는 기적종식론자(기적과 기적 행하는 은사들이 사도시대에 끝나고 주장하는 사람)로 대표되는 리차드 개핀 교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성경이 분명하게 분명하게 말하는 고린도전서 14:24-28절에 의할 때 예언의 은사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개핀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예언의 은사는 지금도 계속된다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번 포잍레스 교수는 구루뎀과 개핀의 견해를 비교 평가한 후, 사소한 오류를 지적한 후 전체적으로 그루뎀의 팔을 들어준다(Miracies 강의에서). 포이 트레스에 의하면 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 계시라는 말을 전문 술어로 지나치게 좁게 정의하여 특별 계시는 곧 성경말씀이라고 단정지어 버리기 때문에 개핀가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고 비판한다.

성경에는 계시또는 계시하다라는 말이 꼭 정확무오한 특별 계시, 곧 성경말씀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1:18),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11:25),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 가는 것(1:17)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저명한 신약학자인 D. A. 카슨도 [주석상의 오류, Exegetical Fallacies]에서 조직신학자가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계시와 성경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계시의 정의를 혼동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한다.

또한 예언과 같은 특별 계시적인 은사는 교회 설립은 은사(Church founding gift)이므로 초대 교회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런 은사가 필요 없다는 주장에 대해, 포인트레스는 만일 사도들이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이런 은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성경 반입이 금지된 오지의 선교사들에게 이런 은사가 더욱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하고 반문한다.

더군다나 포이트레스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 없이 고린도전서 14:1절과 데살로니가전서 5:20절이 명확하게 인정하는 예언의 은사를 사람인 자기들이 무엇이길래 부정하느냐면서 그들의 횡포를 책망한다.

얼마 전, 한국의 교회성장연구소가 부산에서 제일 큰S장로교회의 담임 목사인 정0도 목사와 인터뷰한 내용이 오디오 테이프에 실렸다. 그는 교회 성장에 관한 질문에 대해, 수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것이 교회성장에 절대적인 역활을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사용상의 유의점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포함하는 에언의 은사는 유익하지만 위험한 만큼 엄격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는 마귀의 시험에 빠지기 쉽다. 사실 신앙의 거성들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영계를 제대로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사도 요한도 계시의 와중 속에서 피조물인 천사를 경배했다가 두 번이나 책망을 받지 않았는가?(계시록 19:10).

하나님의 음성의 종류
피터 로드 목사가 쓴 [하나님의 음성 듣기, Hearing God]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늘 날 우리 집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열렸는데 피로연의 안내 역활을 맡은 한 청년이 로드 목사에게 말했다. “, 목사님 저 덤불 속에 18가지 종류의 귀뚜라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구뚜라미라고? 나는 이 집에 오래 살았지만 귀뚜라미 소리를 의식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나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곤충학을 전공하는 그 대학생은 육신의 귀를 사용하여 200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귀뚜라미 소리를 분변(分辯)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사람은 듣기를 배우는 것이라며 듣는 귀를 개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으며 동시에 수많은 소리가 들리지만 듣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릴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 번이나 불렀지만 사무엘은 그 이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모르고 제사장 엘리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삼상3:4-8) 제사장 엘리가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루심에 응답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신자들이나 목회를 오래 한 목사님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알고 난 후에, 못 들은 것이 아니라 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라서 무시한 적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더러 한다. 듣는 귀를 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할 때는 입으로 말하는 육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와 교통하시는 방법 전체를 말한다. 영어로는voice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육성의 소리만이 아니라 의사를 표시하는 투표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드러내시는 모든 방법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