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9/2009

모든 참된 사역의 주춧돌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할 대마다 우리는 이적이나 신유 또는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은사들은 아주 귀하고 놀라운 은사들이고, 소수의 사람들은 그 가치를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은사 중에 가장 귀한 은사는 모든 은사들을 연합한 것보다 더 많이 하늘나라를 세우는 은사인 말씀을 증거 하는 은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의 수단이었습니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가장 큰 은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면 교회는 부르심에 합당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선포의 권능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말씀에 우리자신을 헌신하면, 반드시 말씀대로 우뚝서게 됩니다...

참된 기름부음 받은 말씀선포는 이 땅의 영역에서 영원한 나라를 맛볼 수 있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참된 말씀선포가 없는 곳에는 부활의 생명이 있을 수 없으며, 교회는 일시적이고 심각한 속임수로 무장한 마치 독재자와 같은 사단에게로 끌려가게 됩니다.

심지어 가장 위대한 이적이 행해졌더라도, 말씀선포로 하나님의 권능의 증거가 설명되어져야 하고 또한 그 말씀으로 사람들이 구원받거나 회개하도록 부르십니다. 가장 귀한 영적 단어들이 그 의미가 왜곡되어 사용되어지는 것처럼, 말씀선포도 그 의미가 아주 심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말씀선포를 생각할 때 종종 손으로 설교 단상을 쾅쾅치는 모습이나 설교자가 화나서 외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선포는 예수님 자신은 물론 그동안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의로운 사람들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사역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선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역의 핵심으로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교회를 부르신 근본 이유로서 절대 그만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모든 참된 사역의 주춧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신뢰하십니다.우리의 사역의 마지막에 성공했느냐 아니냐는 우리가 얼마나 말씀의 메시지를 잘 선포하였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의 질이 좋고 나쁜가는 우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선포할 말씀을 잘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고, 그 다음은 우리가 얼마나 그 말씀처럼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말씀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로 말씀의 요구대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릭 조이너의"하나님의 강한 능력으로 역사하기" 중에서)

예수님의 양식

예수님의 양식, 요한복음 4:27-38
예수님께서 이방 땅인 사마리아 지방으로 지나가시다가 한 여인을 만나서 그 여인의 아픈 과거에 대해 다 아시는 것을 얘기하시고, 이 사건을 통해서 그 여인을 전도하십니다. 이 여인은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이 보통 사람들과는 그 능력과 사랑의 크기에 있어서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분, 바로 메시야, 구세주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얘기 나누시는 사이에 (예수님으로서는 이런 얘기/대화가 바로 이 땅에 오신 사명 가운데 하나이십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근데 먹을 것을 사서 돌아와보니 예수님께서 한 이방 여인과 얘기를 나누시더니, 조금 있다가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사람 같이 치지도 않던 사마리아 이방 사람, 그것도 남녀 차별 의식이 극심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시하는 여인과 얘기를 나누시는데, 묻기도 뭐하고 그래서 그냥 있다가, 그 여인이 물동이도 놔두고 동네로 막 뛰어들어가기에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떠난 다음에 예수님께 선생님 잡수시지요 하고 여쭸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영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아, 우리가 먹을 것을 사러 마을로 들어간 사이에 아까 동네로 물동이 놔두고 뛰어간 그 여인이나 아니면 다른 누가 예수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나 보구나!”

근데 이것은 예수님 얘기를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양식을 먹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양식을 자신을 이 땅에 육신으로 보내신 아버지 뜻을 이루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 같은 사람들하고 핀트/주파수가 안 맞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아까 그 사마리아 여인하고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내가 생수를 주겠노라 하시니까, 그 여인이 말하기를 “우물은 깊고 당신은 물 길을 두레박도 없는데 어떻게 생수를 줍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요4:13-14절에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 주시려는 생수는 우리 속의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씻어주는 영혼의 생명수를 말합니다. 핀트가 안 맞은 것입니다. 예수님하고 사람 사이에, 예수님하고 우리 사이에 자주 발생하는 소통 장애입니다. 그만큼 사람들 생각이 이 땅 위엣 것에만 묶여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만큼 예수님 마음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겁니다.

비슷한 사건이 또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 바로 직후에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가시다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의논 끝에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않아서 저러시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16:8-12. 주로 먹고 사는 문제 위주로 예수님 말씀을 주로 이해하면 예수님하고 이렇게 핀트가 안 맞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9-10절에 말씀하신 대로 “먹고 사는 것과 관련해서 내가 그 큰 이적을 두 번이나 보여줬는데도 너희들은 아직도 나를 제대로 믿지 못하는구나.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먹고 사는 것은 책임져 준다고! 세상 일은 내가 책임져 줄 테니 이제부터 나하고 코드를 맞추고 나처럼 생각하고, 내 관심사에 대해 너도 좀 관심을 갖고, 나처럼 일하고 살지 않겠니!”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골3:1-2처럼 풀어서 얘기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저는 요4:34절을 처음 보았을 때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예수님은 아버지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시는 분이시구나! 양식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고, 누구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식사처럼 생각하신다는 뜻 아닙니까?

예수님은 지금 목도 마르시고 배도 무척 고프신 상태이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마음은, 우리 주님의 영혼은 전혀 목 마르시지 않고, 주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드신 것이나 매한가지이고, 아니 드신 것보다 더 배부르고 만족스러우실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비록 배는 주리시지만 저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 경멸 당하는 이방인에다, 거기다 남녀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무시 당하는 여자입니다, 여섯 번째 남자와 사는 정말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신 것이 너무 기쁘셨습니다. 이 여인 앞에 서 계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메시야/그리스도이신 것을 이 여인이 알고 믿게 된 것이 너무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우셨습니다.

거기다가 갈기갈기 찢기고 상하고 상처투성이인 이 여인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마음을 짓누르는 부끄러움을 덜어내주신 것도 주님께는 너무 기쁜 일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세상 눈으로 볼 때는 낮고 낮은 사람이지만, 하늘 아버지께서 부으신 존귀한 영혼을 가진 이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느라 식사 거르신 것, 당연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계셨더라면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느라, 저희를 가르치시고 저희 고민 들어주시느라, 주저 않고 식사 거르실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와 일을 다 마치신 다음에 그 시간, 그 수고가 바로 내 양식이었노라, 이렇게 기쁨으로 말씀하셨을 겁니다.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하시고 영혼 구원, 죄 사함, 병자 치료, 상한 마음의 회복, 이런 아버지 뜻을 이루시는데 자신을 제한 없이 쏟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수고 끝에 우리 각자가 구원 받은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의 보람, 영혼의 기쁨을 얻기 위해 이런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수고와 희생 없이는 절대로 이런 영혼의 기쁨과 마음의 보람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양식/식사처럼 여기셨고 지금도 그렇게 여기시는 일들, 즉 아버지의 뜻이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첫째는 요6:38-40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들을 전도해서 구원하시고 영생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또 요9:1-7절 말씀처럼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병자가 낫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의 양식/식사처럼 하셨던 일이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39대의 죽음 직전까지 가는 극한 채찍을 맞으셔서 완벽하게 준비하신 일이요, 지금도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생명의 성령님을 통해 여전히 하시고 있는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자신의 양식처럼 여기시면서 이루신 세 번째 일은 요17:4절 말씀처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일입니다. \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권세가 큰 세상 왕좌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곳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왜? 십자가 위로 가셔서 피를 흘리셔야만 우리 죄를 씻고, 우리를 죄와 마귀의 지배로부터 빼내셔서 아버지께 드리고, 그것이 아버지를 대적한 마귀를 심판하고 아버지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로 서슴없이 가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핍박을 당하시면서도 진리 말씀을 증거하셨고, 뺨도 맞으셨고, 오해도 받으셨고 배신도 당하셨습니다. 침 뱉음도 당하셨고, 채찍에 맞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희 교회에 두어 달 출석하시다가 민속촌 쪽으로 이사가신 박 권사님이 계십니다. 허리가 어찌 굽었는지 교회 앞 마당을 지나가시면서도 허리가 굽어서 땅을 보고 가시느라 교회를 지나치시는 것도 모르셨던 그런 분이십니다. 길 위에서 행상을 하시면서 여러 자녀들을 다 고등교육 시키셨고, 그러느라 허리가 그렇게 90도 각도까지 굽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아니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은 사람의 그 어떤 희생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희생이십니다. 피조물이요 죄인인 우리 사람들을 위해 낮은 곳 이 땅 위로 기꺼이 오시고, 하늘의 수만 군사를 부르실 수 있었지만 기꺼이 변명 한 마디 않으시고 병사들에게 잡히셨고, 그 뒤에 모욕과 수치와 고통과 피흘리심과 죽으심의 과정을 묵묵히 지나가셨습니다. 영광만을 받으셔야 마땅한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모욕, 수치, 고통, 피흘리심, 죽음을 거치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8절은 예수님 스스로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고통/희생/수고를 두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아버지께는 복종/순종/충성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철두철미 복종/순종/충성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저는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하나님께 철두철미 복종/순종하지도 못하고, 주님의 100분의 1, 천분의 1도 충성하지 못하는 저 자신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그저 머리만 숙여지고, 주님께서 도우셔서 그런 사람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부탁드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양식, 즉 그분의 고통/희생/수고는 우리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요13:1절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죽기까지 사랑하셨다고 증거합니다. 우리의 죄를 남김 없이, 영원히 씻어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 오르셔서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다 쏟으시는 희생을 감수하십니다. 왜? 사랑하시기에 하신 일입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가는 39대의 참혹한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와 병을 자신의 몸에 담당하시기 위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수고/희생/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부끄럽지만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는 까닭입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번번히 우리를 용서하시고, 평생 동안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강권하십니다. 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내게 맡겨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일어나 빛을 발하라! 사랑의 복음으로 네 어두운 마음을 밝혀라! 그리고 나가서 내가 얼마나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영원토록 함께 있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지, 증거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유동의목사:예안교회>

교회에 들어서는 미운물건

1994년 12월, 인도 델리(Delhi)에서 10만명의 영적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제7회 세계종교회가 있었다. 여기에는 52개국의 기독교, 정교회, 가톨릭, 모슬렘, 힌두교, 유대교,등 1,200여명의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참가하였다.(여기엔 한국기독교 목사 세 사람과 국회의원 두 사람이 참석하여 우리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국기독교를 단일종교회에 가입시켜버렸다) 그리고 서명한 것이 단일종교회(United Religion Organization-URO)이다. 기독교가 여러 종교와 연합하고 UN에 가입된 것이 여자가 일곱 머리(G-7)와 열 뿔(CFR) 가진 짐승(UN)을 탔다는 말이다.

단일종교회는 UN산하 기구로 등록시켰고 UN이 종교를 단일화 시키려는 것은 우상숭배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성서적인 신앙과는 모순되는 견해를 보이며, UN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범신론자들이 바라는 우상을 신으로 섬기도록 하려는 것뿐이다. 멀지 않아서 지구주민들은 그것에게 예배하고 그것의 도구가 되어서 그 우상에게 헌신하는 꼴이 될 것이다.(계13:8)

단일종교회(URO)는 남아프리카 Cape Town에서 1999년도 세계종교총회에서 결의된 종교문제를 UN에 넘겼다. UN은 단일정부를 만들기 위한 새세계질서(New world order)에서 ‘새 비법(New mystic)’으로 교회를 활용해야 된다면서 추천한 전직 UN부사무총 ‘로버트 물러(Robert M?ller)’는 전에 UN부 사무총장으로 있었던 사람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예배하는 교회안에 UN기를 세우게 하고, UN기를 세우는 교회는 UN이 공인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지구에 다시 온다면, 먼저 UN을 방문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소원이 인류가 하나 되는 것이기에 UN에서 그 일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That people the world over should display the UN flag in all houses of worship, that the UN represents the body of Christ. If Christ came back to earth, his first visit would be to United Nations to see if his dream of human oneness and brotherhood had came true.)

다니엘은 “또 잔포하여 미운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단9:27)” 또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지어다.(마24:15,막13:14,눅21:20)하셨다.” 이것을 세분하면 주의 양 무리들을 인도하는 목사들 중에서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사상, 곧 Cyber culture에서 적용되는 Biochip을 받고 UN기를 강단에 받아드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예배하는 교회 안에 UN기를 세우도록 하고,(That people the world over should display the UN flag in all houses of worship,)

Worship 단어 앞에 Houses는 일반 가정이나 집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되므로 ‘교회’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었기에 세계의 모든 곳에서 예배하는 장소에는 가정이던 직장이던 어떤 형태로던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에 UN기를 세우겠다는 의도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교회 안이라고 명시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지성소란 의미를 갖는 강단에 UN기를 세우는 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째서 UN기(Flag)가 미운 물건이며 가증한 것인가? 이미 널리 알려졌듯이 지구주의자(Globalist)들이 단일정부를 만드는 모체로 UN을 활용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G-7, NATO, UNESCO, CFR, GATT, WTO, 등 많은 국제기구들을 UN산하에 두고서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새 세계질서 New world order(라틴어; Novus ordo seclorum)를 진행하키는 것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자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물건이 날개를 위지하여 설 것이며,(단9:27)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마24:15)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계17:4)

다니엘은 거룩한 곳에서 제사(제박)와 예물(민차하)을 금지한다고 기록하였다. 마태와 요한은 ‘거룩한 곳(장소)’이 아니라 ‘거룩한 성도들’이라고 복수로 기록하였다. 가증한 물건에 대하여 마태는 아주 더러운 우상(βδλυμα)으로 기록하고, 요한은 βδλυμα의 소유격 복수 브데루그마톤(βδλυμτων)으로 기록하였다.

두 가지에서;
첫째는; 거룩한 성소인 강단에 UN기라는 미운물건이 세워진다는 의미로 보이고,
둘째는; 거룩한 성도들이 VeriChip이라는 미운물건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계17:5)

이마에 기록되는 이름이 사단의 것이란 표시다. 기록되는 이름은 비밀이므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표시다. 표를 주는 주체는 큰 바벨론이요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다. 가증한 것에 대하여는 앞에서 강단에 새워지는 UN기라 하였고 또 사람에게 주어지는 지구신분번호가 되는 VeriChipeh UN의 이름으로 줄 것이고, UN이 지구정부집권부가 되기 때문에 UN이 가증한 것들의 어미(모체)가 되는 것이다.

요한은 계시록 17장 4절에서 여자로 묘사되는 교회가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혀진다고 하였는데 이는 사단이 주는 옷이다. 성도들이 거듭나면 흰 세마포 옷을 입히듯이, 거듭나지 못하고 벌거벗고 있었던 신자들이 짐승의 표를 받으므로 인하여 자기를 사단에게 굴복시키는 행위이며 경배라는 프로스쿠네오(προσκυνω)이다. 이런 사람에게 사단이 붉은 옷을 입혀준다. 그리고 자주 빛 옷을 입었다는 뜻은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을 죽는데 넘겨준 피의 마름이다.(계17:6)

교회가 미운물건을 수용할 때 목사는 UN산하단체인 단일종교회(URO)로부터 성직자격증을 받아야 목회를 할 수 있게 된다. 누구나 짐승의 표를 몸에 받으면 그 순간에 자신의 의지를 사단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이때 사단은 그 사람에게 붉은 빛 옷을 입히고 이마에 사단의 것이라는 표시를 하는데 그것이 이마에 표를 받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이 되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짐승의 표만은 받지 말아야 한다.

UN기를 세우는 교회는 UN이 공인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하고,(That the UN represents the ‘body of Christ,)

Represents는 여러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나타낸다’는 뜻이므로 UN이 교회를 장악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UN기를 강단에 세우는 교회는 UN이 공인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한다고 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할 권한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예수 외에 그 누구에게도 권한이 없다. UN기를 세우는 교회의 목사는 UN에서 성직자에게 임명장 같은 인가서나 자격증 같은 것을 주어서 ‘UN을 위해 봉사하는 목사’로 인정하며, 따라서 그런 교회는 UN이 공인하는 교회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대하여 1994년 12월에 인도 델리(Delhi) 제7회 종교지도자들이 단일종교회(United religion organization-URO)를 만들 때, ‘성직자의 수임(受任)에는 UN의 공인을 피할 수 없이 받아야 된다’고 했다. 세계의 모든 교회는 목사이던 사제이던 UN으로부터 성직에 관한 임명장 같은 조치가 취해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Certificate을 받는 성직자는 교회의 강단에 UN기를 세워서 UN이 공인하는 교회임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UN이 인정하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Body of Christ)라고 명시한 것을 보아서 다른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를 박해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때가 되면 얼마나 많은 교회가 UN으로부터 인정받으려할까? UN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자를 미혹시킬까? 지금도 짐승의 표를 상징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그때가 되면 UN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VeriChip이 짐승의 표가 아니라고 속이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또한 자신을 위대한 목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가짜 박사학위까지 받고 행세하는 사람들이 UN의 이름으로 주는 임명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교회)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계17:6)

얼마나 많은 교회가 UN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으려할까? UN으로부터 인가받은 교회라고 얼마나 자랑할 것인가? UN 제0000호 목사, UN 제0000호 교회라며 명함이나 광고로 자랑하지 않겠는가? 거짓교회가 되어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과 대환난사역자들을 죽이겠기에 피에 취한다고 경고하였겠는가?

만일 그리스도가 지구에 다시 온다면, 먼저 UN을 방문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소원이 인류가 하나 되는 것이기에 UN에서 그 일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If Christ came back to earth, his first visit would be to the United Nations to see if his dream of human oneness and brotherhood had came true).

그들은 ‘만일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면, 먼저 UN으로 올 것이라’ 하였다. 이 말에는 중대한 음모가 담겨진 표현이다. 그 음모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이전에 세상은 일차적으로 대격변이 있어야 된다고 성경은 교훈한다. 이러한 큰 격변후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가 혼돈(Chaos)된 상황 중에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가 나타나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속여야 된다. 그리스도는 시공간을 초월하지만, 인간인 지구 통치자는 시공간을 초월할 수 없으므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또한 실제로 UN이 세계의 중심기구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가 UN에서 자신이 메시야라고 거짓을 행세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UN에 온다고 인식시켜야 되겠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교단이나 신학교라는 의미는 없어진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정부 통치자의 강령만을 강론해야 된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그러한 교회의 지도자나 성도들은 적그리스도정부가 강요하는 짐승의 표를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앞날을 내다 본 ‘제랄드 바니(Gerald Barney)’는 단일종교회가 시작될 때, ‘종교는 반드시 죽는다’ 면서, 종교가 멸망될 때, ‘두 갈래 길에서의 선택은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 정통신앙을 입증시키며 사람다운 도리에 맞게 올바로 견디는 길과. ⓑ,앞으로 나타나게 될 음녀의 사람이 되어 그것을 따르는 길뿐이라’ 하였다 <장죠셉목사님>

그리스도 재림은 심판의 시작

1. 성경적 재림  - 성경적 그리스도 재림은 성도들의 바램이자 믿는자와 불신자의 갈림길이다. 그러나 말세지말을 맞이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기독교 이단들은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치며 성도들을 혼란하게 한다. 그리스도가 천상에 재림하여 조사심판 중이라 말하는 자가있는가 하면 이미 재림하였다가현재는 죽었으나 다시 재림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하며 아예 자신들이 추종하는 교주를 재림주라고믿고 따르기도 한다.

전통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을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부활 이후 승천하시던 모습 그대로 임하실것이라 가르친다. 당연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신령한 분을 기다리는 것이며 승천하실 때와 같이 구름 사이로 임하실 것이라 믿고있다. 그런가하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함과 같이 누구나 알수 있도록 임하실것이라 생각한다.

또 재림 시기는 도적 같이 임함으로 아무도 그때나 시기를 알수 없고 오직 하나님 주권으로 갑작스럽게 발생하며 재림하시는 모습은 우주적 변고를 동반한다는 것을 예언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재림은 은밀하게 임하는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 곧 믿는자던 믿지 않는자던 아무런차별 없이 누구나 알수 있도록 임하지만 갑작스럽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미 재림했다는 주장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을까? 자신들이 추종하는 교주의 몸이 신령한것도 아닐것이고 전 우주적 변고가 발생한 적도 없으며 누구나 알수 있도록 하늘로 부터 임한 사건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재림했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적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구분하지 못하고 재림 하시는 그리스도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해보기로 한다.

2. 적 그리스도 - 적 그리스도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존재다. 하지만 적 그리스도를 잘 구분하지 못함으로 오히려 미혹 받고 따르는 일이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대적한다는 의미는 곧 반대하고 공격한다. 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대적을 하지않는자들에 대해서 판단을 못하게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방법에는 반대 하는것만 있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위장하는것도 적 그리스도의 소행임을 알아야 하며 이들이 더 무서운 대적자임을 알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은 오직 예수만 그리스도로 믿는다. 이것을 조금 자세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언약하신대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유다땅 베들레헴에 출생하였고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으며 약 3년 반 동안 성취사역을 마치고 유대인에 의해 빌라도에게 넘겨져 심판 받았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사십일 동안 계시다 사도들 눈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신 바로 그분만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뜻이다. 물론 그분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 재림할 것이다.

그런데 누구인가 초림하시고 성취사역을 행하시던 그리스도가 행하시던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이나 말투를 흉내내며 마치 그리스도인양 행동하면 바로 이것이 적 그리스도가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성경을 통해 알고 배우던 그리스도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믿음이 더가고 미혹을 받으며 추종을 하기시작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다.

사실 기독교 이단으로 지목되는 수많은 종파들중에서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초림하신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오히려 더욱 그리스도의 증인 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만약 정면으로 부정하기만 한다면 구분하기 간단하겠지만 오히려 더욱 강조하는것 처럼 보임으로 구분하기 더욱 어렵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말하는것은 예수만 오직 구원자로 믿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도 그리스도이고 다른 어떤 자도 그리스도다. 혹 예수도 그리스도이며 나도 그리스도다. 라고 말하면 그것이 곧 적 그리스도가 된다. 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존재에게만 부를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 언약이 오직 단 한분의 그리스도만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도 그리스도이고 다른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곧 예수도 하나님 나라 왕이고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 나라 왕이라는 뜻이됨으로 서로 대적이 된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한분이고 나라도 하나며 왕도 하나이고 그리스도 또한 하나이다. 이를 부정하고 그리스도가 두명, 혹은 세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에게 미혹된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언약대로 오신 예수만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다른 존재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 보이고 놀라운 이적을 베푼다할지라도 적 그리스도임으로 피하는것이 옳겠다. 하지만 이것을 안다해도 미혹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것이다. 왜냐하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특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3. 재림주 특징 - 그리스도가 사도들을 통해 약속하신대로 재림하실때 그리스도 곧 재림주 특징은 무엇일까? 재림주는 자신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하는것이 아니라 이미 초림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믿지않는 자들은 심판하는 특징을 가진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이 적 그리스도를 구분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는 내용이된다.

기독교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실것이라 약속했고 자신이 재림주로왔으니 믿어야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며 미혹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성경 증언과 완전히 다른 반대말을 하는것이지만 대부분 성도들은 잘 구분을 못하고 미혹받는것으로 보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알수 있다 즉 그리스도가 재림한 후에 그분을 목격하고 믿는것을 과연 믿음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사실을 보고 믿는것은 믿음이 아니라 아는것일 뿐이다. 또 믿음의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신다. 라고 했을때 재림하신 이후 믿는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이전에 믿고있던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일까?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재림하기 이전 과거에 믿고 있었던 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지만 약속에 의지하여 믿는자들을 믿음의 성도라 한다는 뜻이다. 반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신 이후에는 그분을 보고 사실을 현실적으로 아는것일뿐 믿는것이 아니며 오히려 심판 대상이 됨을 알아야 할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재림은 믿고있었던 성도들에게는 구원이지만 믿지않고있던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이다.재림하시는것을 보고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은 믿는것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알고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며 구원 얻을 시기는 이미 지났으며 두려움과 공포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아야 한다. 도적같이 임한다는 말은 미리 준비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4. 예수만 그리스도 - 재림하시는 그리스도 구원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언약하신 대로 이루시는 초림 예수만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며, 재림은 천재지변을 동반하는 놀라움과 모든 사람이 목격할 수 있는 경이로움으로 임하고, 재림하신 이후는 불신자들에게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21장 25절-28절) <출처:예수그리스도의향기>

종교 중독의 다양한 형태들

1. 과도한 종교 활동

과도한 종교 활동에 중독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얻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 잡혀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행을 높이 평가해 줄 날을 고대하며 맹렬하게 일에 몰두한다. 하나님께서 고통스런 현실의 삶을 바꿔주실 날을 소망하며 열심을 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고를 감찰하사 고통을 제해주시거나, 아니면 그들의 인생을 다른 사람 인생보다 더 안락하게 해주시리라는 일종의 기적을 소망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업적과 선행, 그리고 희생의 토대 위에서 행복이라는 왕국을 만들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의 능력으로 삶의 성공을 도모하는 자와 다를 바 없다.

교회의 기관에 속해서 봉사해야만 한다는 중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모든 지역 활동에 교회가 참가하여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의 잡다한 일들의 홍수 속에서 가정이 등한시됨은 당연지사이다.

이 같은 행태 속에는 선행이 하나님의 축복을 얻게 해준다는 그릇된 믿음이 짙게 배어 있다. 다른 중독현상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하나의 술책이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허둥대며, 빨리 달린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다른 사람들 보다 한 발짝 앞서 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좀 더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다.

2. 나태
상처주는 신앙을 가진 자는 게으르다. 나태는 상처주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보이는 자기 파멸적 행위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들의 신앙은 사실상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그들은 재빨리 하나님께 달려가 해결해 주길 원한다. 결혼 상담자를 만나기보다는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에게 하기를 원하는 일들을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를 요구한다.

결혼 상담자를 찾아가기가 거추장스럽다. 그리고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이 같은 책임 있는 일을 하기 보다 게으른 사람은 단지 기도에만 매달린다.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결혼생활을 지켜주시리라 믿는다.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결혼상담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고통스러운, 그러나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성장 단계이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그들이 이 과정을 통과하길 원하신다.

수많은 종교적 중독자들은 나태와 게으름의 세계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있다. 그곳에서 만사가 자신들을 위해서 기적적으로, 신비스럽게 성취되길 갈망한다. 하나님께는 그들이 도랑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보길 원하신다. 그래서 즉시로 그들 자신들에게 직면해 오는 난관을 대적하여 뚫고 나가서 성장하길 원하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태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섬겨주는 하나님을 원한다. 하나님께 봉사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난관을 제거해 주고 고통을 즉각적으로 멈추게 하는 마약과 같은 우상을 원하고 있다. 이 같은 신앙은 상처주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중독성이 있다. 그것은 성도의 타락을 조장하는 무책임한 신앙이다. 왜냐하면 이 신앙은 성도들에게 완전히 그릇된 소망과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3. 투자로서의 헌금
다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면 더 많이 돌아오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영적인 예배 행위나 헌신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인 투자행위라 해야 옳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재산이 불어나리라 믿는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청지기 사역에 충실한 자에게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축복이 반드시 재물의 형태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자기 수입의 35-40%까지 헌금하는 사람들이 있다. 축복과 재물을 약속받는 것이 헌금을 드리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엉터리 신앙인들은 자동차를 달라는 자신의 기도가 확실히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아래 실로 터무니없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기도 한다. 그는 얼마간의 돈을 마련하여 자동차를 할부로 구입한다. 그리고는 득의양양하게 운전해 온다. 그 다음에는 신문에 이 사실을‘기적’이라며 투고한다. 신문에 실린 이 기사가 아직도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읽혀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일 더 좋은 신앙을 가지고 더 많은 돈을 바치기만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물질적 소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은연중 배우게 된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이러한 증거들로 인해서 그들은 더 많은 돈을 하나님께 바친다. 자신들이 바라는 소중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리라 기대하면서. 하나님은 돈으로 매수되거나 살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로 이 같은 행동을 자행한다. 그들의 돈은 하나님께 바쳐지기 보다 일확 천금을 노릴 수 있는 라스 베가스 도박판에 투자됨이 차라리 더 낫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요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종종 그들의 투자한 돈에 보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중독이 하나님의 진실한 추종자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무모한 도박꾼과 같은 신앙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3. 자기 집착
자기 집착은 상처주는 신앙 형태, 종교적 중독, 그리고 다른 모든 중독들로 발전하기도 한다. 자신의 고통과 필요, 그리고 위안에만 관심을 쏟는 자기 집착자들은 다른 사람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거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욕구가 최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등 이것이 이상하지 않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양을 먹임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라 명하셨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도취에 빠진 이기적인 사람들은 다른 양을 먹이거나,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해 나가는가 하고 주목할 따름이다. 그들이 눈을 비비고 보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해주시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해주신다. 그리고 축복을 주기도 하신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기도 한다. 때로 그분은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하고 불치의 병까지도 쾌유시켜 주신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간섭으로 불릴 수 있는 이러한 일들이 종종 있다. 이것을 흔히 기적이라 부른다.

그것이 기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아주 희귀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기적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 자체 보다 기적 자체를 믿는 신앙에 더 가깝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기적이나 은사나 능력에만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4. 극단적인 편협성
극단적인 편협성의 소유자들은 타인의 다양한 행동이나 의견들을 수용하지 못한다. 자기방식만을 고집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융화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용납하기보다는 그들을 무시해 버린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그들 생활 속의 부정적인 면을 발견하려 한다. 우월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그 신앙 행동을 경멸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자 한다. 특별히 그들의 신앙을 지배하고자 한다.

극단적인 편협성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신앙관과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들과 가족관계까지도 희생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한,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질타한다. 다른 사람들이 의무를 태만히 하고 있다고 정죄하기도 한다. 자기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가장 고상한 믿음의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착각 하에서,(이것은 이단에 속한 자들이 갖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임)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믿음의 행위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이로써 그들을 지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릇된 믿음을 낳는다.

그리고 지극히 율법적인 신앙관을 만들어 낸다. 자녀들은 그들의 이러한 편협성에 감히 저항하지 못한다. 그들 부모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종종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할 기회조차 원천봉쇄 당한다.

5. 종교적 엑스타시에 도취됨
신앙 생활이 종종 삶의 고통과 좌절에 대해 커다란 위안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더 이상 삶의 문제들에 짓눌려 살지 아니한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모든 문제가 단 번에 해결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지도 않는다. 이것은‘나의 짐은 가볍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믿는 신앙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위안 중에는 위와는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적 엑스타시(황홀경)통해서 얻어지는 거짓된 위안이다. 이 위안은 중독성이 있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의 실체에서 멀어지게 한다.

교회 수련회를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종교적 흥분이 어떤 것인지를 익히 짐작할 것이다. 의례히 수련회 마지막 밤이 되면 산에 올라가서 열렬히 기도하고, 눈물을 쏟으며 결단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산상 체험”(mountain top experience)이다.

수련회가 끝나면 그들은 캠프를 떠난다. 이 때 그들은 황홀하고 신령한 신앙 체험을 잃어버리지 말도록 목사님이나 전도사로부터 단단히 주의받는다. 그러나 “산상 체험”의 흥분이 점점 가라앉고 냉정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들은 종교적 흥분자가 아니라 결국은 현실의 “평범한 사람”(downer)으로 돌아온다. 학생들은 캠프에서 만났던 동료, 목사님, 그리고 선생님과는 생판 다른 사람들, 즉 자기를 도와주지도, 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기적적인 신앙 체험을 하고 난 후, 현실에 적응하려 하지 않거나, 또는 적응하지 못한다. 현실에 적응하기 보다 거짓된 종교 체험과 영적 흥분을 조장한다. 자극적인 종교적 충동이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힘을 주고 흥분시킨다. 그것이 그들의 우울한 기분을 바꿔주고 현실적 고통에 위안을 가져다 준다.

좋은 기분을 느끼고 싶거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에는 언제고 이같은 병적인 흥분 상태에 반복적으로 빠져든다. “즉각적인 종교 체험”을 일삼는 자들은 마치 알콜 중독자나 약물 중독자, 그리고 마약 주사를 맞는 자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함이 아니라 현실 감각을 바꾸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교 중독자들이다. 그리고 찰나적인 쾌락과 기분 전환에 도취되어 삶을 사는 자들이다.

종교 중독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지 못한다. 도리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장벽을 만들 뿐이다. 그것은 사람을 중독시켜 하나님을 경배하는 참다운 신앙 체험에서 멀어지게 한다.

모든 사악한 것을 이루기 위해 허둥대게 만들 뿐이다. 타락한 신앙인에게 남겨지는 것은 결국 더 큰 고통일 뿐이다. 이 고통들은 해악된 그들 신앙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었던 원래의 고통을 확대 재 생산한다. 모든 종교적 중독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송두리째 파괴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뢰 자체를 혐오한다.

상처주는 신앙도 이와 동일하다. 상처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도 없고, 또 신뢰하려고도 않는다. 그들의 신앙은 쇠붙이의 녹처럼 부식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는 존재가 될 뿐이다. 이미 고질화된 그들의 신앙의 틈새에는 강압, 율법적인 종교 활동, 중독, 억압, 그리고 열광적인 노력 등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행위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심령은 결코 안식을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너무나도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6. 상처주는 신앙에 대한 역설
약물에 중독되었을 경우에는 그 약물 사용을 절제하면 된다. '그러나 신앙에 중독되었을 경우에는 단순히 절제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신앙적 중독이 다른 약물 중독과 구별되는 요인이다. 여기 상처주는 신앙의 역설적 교훈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알콜 중독을 방지하는 방법은 금주(禁酒)나 절주(節酒)이다. 절제를 못하는 사람은 중독되게 마련이다. 술을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그는 점점 더 중독 증상을 보이게 된다. 식사량도 마찬가지이다. 무리하게 과식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소량의 음식을 먹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는 적게 먹는 데에서 만족하는 법을 찿아야 한다.

그러나 신앙에는 이 같은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참되고 순결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가 굳이 신앙 행위를 중단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신뢰하고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신앙이 완전히 성숙된 자는 없다. 그런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신앙의 위인이고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이상형의 사람이다.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상처주는 신앙의 다양한 형태들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 조차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장 파괴적인 신앙과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다. 결코 신앙이라고 볼 수 없는 일들이 엄연히 신앙의 탈을 쓰고 행세하는 오늘날이다.

일단 어떤 사람이 그릇된 신앙에 중독되면, 그를 치료하여 순전한 신앙인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병적인 요소를 하나 하나 발견하는 작업이 이 치료의 시발이다. 상처주는 신앙과 행태를 연구하는 일은 신앙의 초보자들에게도 귀중한 경험이 된다. 왜냐하면 이 작업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경배하는 더 깊은 신앙적 차원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업에는 실로 만만찮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신앙 중독자의 내면상태를 관찰하고 해악된 신앙의 요소를 발견하여 제거하는 일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착에 깊이 빠져 있고, 자신의 신앙에 너무 강하게 도취되어 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들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병들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병이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파괴해 왔는지를 깨닫게 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그릇된 신앙을 버리게 하고 바른 신앙을 갖게 하는 작업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하나님과 신앙을 뒷전으로 제쳐놓고,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만들어 온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고통이 하나님과 교제하기 보다, 그분을 지속적으로 악용하는 것에서 얻는 고통보다 훨씬 덜 하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상처주는 신앙 지식을 계속 가지고 살아갈 때 발생하는 고통과 두려움보다 훨씬 가볍다는 사실도 직시하여야 한다.

독성을 가진 신앙을 해독시키고자 하는 노력들 속에서, 중독자들은 몇몇 어려운 단계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당신과의 교제를 위해 베풀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참다운 신앙의 토대 위에서 이뤄지는 영적 교제만이 우리를 참된 만족과 진정한 기쁨으로 인도한다. <공진수 목사-경신교회>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과 행동

예수를 따르는 첫째 요건은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과 행위입니다. 이 첫 요건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심각한 왜곡현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모든 십자군적 발상은 자기 부인을 부인하는데서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 제일 먼저 해내야 할 일은 바로 자기 부인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은 곧 자기 비움을 뜻합니다. 자기 비움이란 내 속에 가득 차 있는 온갖 탐욕을 비워내는 일입니다.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먼저 비워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유혹했던 마귀의 세 가지 탐욕을 비워내야 합니다. 자기 비움의 정반대는 바로 독선을 통한 자기 채움입니다. 독선은 정말 금물입니다. 종교적 독선은 더더구나 예수따르미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첫 번째 금기사항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종교인일수록 비종교인보다 더 독선적이고, 종교적 지도층일수록 더 독선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자기의 비움은 비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비움은 남의 채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의 탐욕을 비워내되 남에게는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 주는 것, 이것이 자기 비움의 참뜻입니다. 남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로 가득 채워 주게 되면, 나와 남 사이에는 누룩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남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온갖 장벽들, 성의 장벽•인종의 장벽•계급의 장벽•종교의 장벽•이념의 장벽 등이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같은 장벽들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은 바로 이 장벽 허물기 선교활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인과 종간의 벽,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벽, 그리고 남녀간의 벽을 헐어버렸습니다.

나를 철저히 비워 남을 가득히 좋은 가치로 채워주는 이 행위는 나에게 뜻밖의 큰 선물을 안겨다 줍니다. 그것은 새로운 나의 발견입니다. 곧 비워진 내 자신이 새로운 자신으로 채워진다는 뜻입니다. 나는 더 아름다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이른바 '참 나'가 나와 남 사이에 생긴 새로운 관계(하나님나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게 되지요. “보라 내가 새로운 존재로다” 하는 기쁨의 고백이 터져나오게 되지요.

결국 나를 비워 남을 채워주는 과정에서 내 빈 공간은 마침내 새로운 자아로 채워지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따르미들이 감동으로 체험하게 되는 영적 환희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같은 영적 기쁨을 항상 체험했기에 “항상 기뻐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기쁨은 사랑의 기쁨이기에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사랑은 바로 자기 비움의 사랑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무서운 외재신(外在神)은 이 같은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직접 체험하셨던 하나님은 자기를 비워 아들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아빠'(Abba) 하나님이십니다.

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낳게 하는 힘을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이시지요. 오랫동안 혈루병에 걸린 여성이 예수님 옷자락만 만져도 그녀에게 값없이 흘러들어간 그 힘. 그녀에게 나음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는 그 사랑의 힘. 그것이 바로 자기를 비우시는 하나님 사랑의 작동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새롭고 건강하고 온전한 존재로 우뚝 설 수 있게 해주는 값없이 그저 주시는 값진 힘 말입니다.

십자가를 앞세우지 않고 등에 져야

둘째로 예수따르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이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역사적 의미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가 무엇을 뜻했는지를 살펴봅시다.

십자가는 고대 세계에서 행해진 가혹한 형벌의 도구였습니다. 페르샤와 카르타고에서는 고급관료들이나 군지휘관과 같은 상류층을 징벌할 때 십자가가 처형틀로 활용되었습니다. 로마에 와서는 달아난 노예나 폭행죄를 범했던 하류층을 처벌할 때 십자가를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식민지에서 로마체제에 반역하는 자들을 징벌할 때 이 방법을 애용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도록 짐짓 고안된 형틀입니다. 원래 고통의 시간은 길게 느껴지게 마련이기에 육체적으로 그 고통을 최대한 연장시키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극도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처형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옷을 벗기고 먼저 채찍으로 때린 뒤 무거운 십자가를 지워 모멸과 고통의 행진을 하게 했지요. 그뿐입니까. 나무에 달려 천천히 죽어 가는 죄인의 머리 위에는 시체를 뜯어먹으려는 까마귀나 독수리 떼가 그 죽음을 기다리며 날고 있었고 십자가 밑에는 들개들이 먹이를 뜯어먹으려고 으르렁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범죄인의 시신은 온전하게 매장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시체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대접도 허용하지 않은 인간 존엄성의 완벽한 박탈 행위였습니다.

이 같은 십자가 처형에 견주어 보면, 근대식 또는 현대식 사형방식은 다분히 인간적이라 하겠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 사용된 길로띵은 한순간에 대컥 죽게 하니까 '자비로운 사형틀'로 볼 수 있지요. 총살도 그렇습니다. 약물로 죽이는 것은 더욱더 인간적 배려에 바탕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당시의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처형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 사형틀에 우리 주님께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뜻은 자기를 부인함에 있어 가장 잔인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을 각오를 하란 뜻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따르기란 정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십자가형이 없어진 오늘의 상황에서는 '십자가 지기'가 무엇을 뜻할까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겪으셨던 육체적 아픔과 정신적 고통은 철저한 자기 부인의 고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억울한 고통과 극심한 수치심을 이겨내는 것, 특히 예수로부터 세속적 메시아를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의 값싼 기대와 소망을 과감하게 좌절시키는 아픔을 이겨내는 것, 이것이 십자가 지는 뜻이지요.

세상 사람들의 강렬한 값싼 기대를 저버리는 용기는 곧 자기 부정의 용기입니다. 특히 십자가 처형이 없어진 오늘의 상황에서 십자가 짐의 뜻은 육체적 고난보다 메시아 도래라는 탐욕적 기대를 철저히 비워내는 자기 부인의 아픔을 뜻하겠습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십자가는 그의 허무한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세속적 욕망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허망하고 허무한 고행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 허무한 죽음은 승리지상주의적 욕망의 완벽한 포기를 뜻합니다. 특히 공생애 기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기적 행위에 견주어 볼 때, 무력하기 짝이 없이 십자가를 지고 그 고통과 수치의 길로 걸어가셨던 예수의 처량한 모습은 너무나 놀랍게도 허망해 보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정도로 무력한 예수의 모습은 승리주의(triumphalism)의 철저한 극복의 모습이기에 그 허무한 모습이 결단코 허무주의의 표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소망과 능력의 징표입니다.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진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고 가는 것이지 앞세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 예수따르미들은 '십자가 지기'와 '십자가 앞세우기'간의 차이를 뚜렷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세우기는 십자가를 이용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이용하여 자기 탐욕을 채우는 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사롭게는 십자가를 개인의 부(富)를 가져다주는 종교적 부적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보석을 만들어 자기 신분의 상승을 과시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플러스(+)의 부적으로 보는 생각이 깔려있지요.

십자가 앞세우기를 집단적으로 강조할 때 그것은 집단이기주의를 극대화하는 일로 이어지고, 그 집단의 승리를 담보해내려는 집단적 탐욕의 몸짓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한 십자군은 으레 십자가 군기를 앞세워 진군했습니다. 이교도(異敎徒)나 이단자를 박멸하기 위해 십자군을 출동시킬 때 으레 십자가를 앞세웠습니다. 이때 십자가는 부족주의적 승리를 위한 부적으로 작동하게 되지요. 이것은 예수 십자가 지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행태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예수 십자가 지기'를 오히려 지워버리는 반(反)예수적 행위라 하겠습니다.

오늘 개신교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경멸을 받게 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 까닭 중에 하나가 십자가 지고 가라는 예수의 명령을 개신교도들이 십자가 앞세워 가라는 명령으로 오해했거나 왜곡시켜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에 교회 십자가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 십자가는 바로 종교적 탐욕과 독선의 상징으로 여겨질 것이며 값싼 축복을 바라는 신자들의 종교적 부적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 예수따르미에서 사탄따르미로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예수의 꾸지람을 들었던 베드로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똑똑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고백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끔찍스러운 책망을 하셨습니다. '믿싸오니'를 외치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했던 베드로, 진정한 메시아는 고난의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했던 베드로, 오로지 승승장구하는 승리자 메시아만 믿싸오니를 외치면서 예수를 좇았던 베드로는 바로 오늘의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이 모습을 예수님은 사탄의 모습으로 보신 것입니다. 수제자가 사탄의 제자로 일시 나타났던 셈이지요.

그렇습니다. 골고다의 수치와 고통, 그 억울한 죽음, 그 허무한 패배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믿으미들은 진정한 예수따르미가 아니라 사탄따르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점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했던 사탄은 결단코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이용하고 악용하며 남을 비워 자기를 채우는 이기적 존재입니다. 남에게는 절망, 고통, 비겁함으로 가득 채워 주면서 자기에게는 쾌락과 특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바로 사탄의 특기입니다. 마치 나치가 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패배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께서 극구 승리의 큰길로 내닫기를 원했던 베드로의 얼굴은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했던 바로 그 사탄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오늘 한국 개신교도(예수믿으미)들이 자기들에 대한 세상의 비판을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고, 앞으로 더욱더 '믿싸오니'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십자가를 앞세워 자기집단 확장에만 열을 올린다면, 이제는 영의 귀를 활짝 열어 예수믿으미이에게 벼락처럼 꾸짖는 주님의 육성 곧 "사탄아 물러가라 너희들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큰 교회들이 십자가를 앞세워 불투명한 교회 운영에 더욱 열중하고 십자가를 앞세워 자식에게 세습시키면서 예수를 오히려 내쫓는 짓에 더욱 심취하는 듯하여 더욱 곤혹스럽습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들은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을 우렛소리로 두렵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완상 / 한성대 총장, 새길공동체 말씀증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