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9/2009

예수님의 양식

예수님의 양식, 요한복음 4:27-38
예수님께서 이방 땅인 사마리아 지방으로 지나가시다가 한 여인을 만나서 그 여인의 아픈 과거에 대해 다 아시는 것을 얘기하시고, 이 사건을 통해서 그 여인을 전도하십니다. 이 여인은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이 보통 사람들과는 그 능력과 사랑의 크기에 있어서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분, 바로 메시야, 구세주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얘기 나누시는 사이에 (예수님으로서는 이런 얘기/대화가 바로 이 땅에 오신 사명 가운데 하나이십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근데 먹을 것을 사서 돌아와보니 예수님께서 한 이방 여인과 얘기를 나누시더니, 조금 있다가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사람 같이 치지도 않던 사마리아 이방 사람, 그것도 남녀 차별 의식이 극심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시하는 여인과 얘기를 나누시는데, 묻기도 뭐하고 그래서 그냥 있다가, 그 여인이 물동이도 놔두고 동네로 막 뛰어들어가기에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떠난 다음에 예수님께 선생님 잡수시지요 하고 여쭸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영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아, 우리가 먹을 것을 사러 마을로 들어간 사이에 아까 동네로 물동이 놔두고 뛰어간 그 여인이나 아니면 다른 누가 예수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나 보구나!”

근데 이것은 예수님 얘기를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양식을 먹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양식을 자신을 이 땅에 육신으로 보내신 아버지 뜻을 이루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 같은 사람들하고 핀트/주파수가 안 맞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아까 그 사마리아 여인하고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내가 생수를 주겠노라 하시니까, 그 여인이 말하기를 “우물은 깊고 당신은 물 길을 두레박도 없는데 어떻게 생수를 줍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요4:13-14절에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 주시려는 생수는 우리 속의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씻어주는 영혼의 생명수를 말합니다. 핀트가 안 맞은 것입니다. 예수님하고 사람 사이에, 예수님하고 우리 사이에 자주 발생하는 소통 장애입니다. 그만큼 사람들 생각이 이 땅 위엣 것에만 묶여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만큼 예수님 마음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겁니다.

비슷한 사건이 또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 바로 직후에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가시다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의논 끝에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않아서 저러시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16:8-12. 주로 먹고 사는 문제 위주로 예수님 말씀을 주로 이해하면 예수님하고 이렇게 핀트가 안 맞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9-10절에 말씀하신 대로 “먹고 사는 것과 관련해서 내가 그 큰 이적을 두 번이나 보여줬는데도 너희들은 아직도 나를 제대로 믿지 못하는구나.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먹고 사는 것은 책임져 준다고! 세상 일은 내가 책임져 줄 테니 이제부터 나하고 코드를 맞추고 나처럼 생각하고, 내 관심사에 대해 너도 좀 관심을 갖고, 나처럼 일하고 살지 않겠니!”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골3:1-2처럼 풀어서 얘기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저는 요4:34절을 처음 보았을 때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예수님은 아버지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시는 분이시구나! 양식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고, 누구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식사처럼 생각하신다는 뜻 아닙니까?

예수님은 지금 목도 마르시고 배도 무척 고프신 상태이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마음은, 우리 주님의 영혼은 전혀 목 마르시지 않고, 주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드신 것이나 매한가지이고, 아니 드신 것보다 더 배부르고 만족스러우실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비록 배는 주리시지만 저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 경멸 당하는 이방인에다, 거기다 남녀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무시 당하는 여자입니다, 여섯 번째 남자와 사는 정말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신 것이 너무 기쁘셨습니다. 이 여인 앞에 서 계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메시야/그리스도이신 것을 이 여인이 알고 믿게 된 것이 너무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우셨습니다.

거기다가 갈기갈기 찢기고 상하고 상처투성이인 이 여인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마음을 짓누르는 부끄러움을 덜어내주신 것도 주님께는 너무 기쁜 일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세상 눈으로 볼 때는 낮고 낮은 사람이지만, 하늘 아버지께서 부으신 존귀한 영혼을 가진 이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느라 식사 거르신 것, 당연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계셨더라면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느라, 저희를 가르치시고 저희 고민 들어주시느라, 주저 않고 식사 거르실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와 일을 다 마치신 다음에 그 시간, 그 수고가 바로 내 양식이었노라, 이렇게 기쁨으로 말씀하셨을 겁니다.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하시고 영혼 구원, 죄 사함, 병자 치료, 상한 마음의 회복, 이런 아버지 뜻을 이루시는데 자신을 제한 없이 쏟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수고 끝에 우리 각자가 구원 받은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의 보람, 영혼의 기쁨을 얻기 위해 이런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수고와 희생 없이는 절대로 이런 영혼의 기쁨과 마음의 보람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양식/식사처럼 여기셨고 지금도 그렇게 여기시는 일들, 즉 아버지의 뜻이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첫째는 요6:38-40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들을 전도해서 구원하시고 영생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또 요9:1-7절 말씀처럼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병자가 낫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의 양식/식사처럼 하셨던 일이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39대의 죽음 직전까지 가는 극한 채찍을 맞으셔서 완벽하게 준비하신 일이요, 지금도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생명의 성령님을 통해 여전히 하시고 있는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자신의 양식처럼 여기시면서 이루신 세 번째 일은 요17:4절 말씀처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일입니다. \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권세가 큰 세상 왕좌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곳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왜? 십자가 위로 가셔서 피를 흘리셔야만 우리 죄를 씻고, 우리를 죄와 마귀의 지배로부터 빼내셔서 아버지께 드리고, 그것이 아버지를 대적한 마귀를 심판하고 아버지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로 서슴없이 가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핍박을 당하시면서도 진리 말씀을 증거하셨고, 뺨도 맞으셨고, 오해도 받으셨고 배신도 당하셨습니다. 침 뱉음도 당하셨고, 채찍에 맞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희 교회에 두어 달 출석하시다가 민속촌 쪽으로 이사가신 박 권사님이 계십니다. 허리가 어찌 굽었는지 교회 앞 마당을 지나가시면서도 허리가 굽어서 땅을 보고 가시느라 교회를 지나치시는 것도 모르셨던 그런 분이십니다. 길 위에서 행상을 하시면서 여러 자녀들을 다 고등교육 시키셨고, 그러느라 허리가 그렇게 90도 각도까지 굽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아니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은 사람의 그 어떤 희생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희생이십니다. 피조물이요 죄인인 우리 사람들을 위해 낮은 곳 이 땅 위로 기꺼이 오시고, 하늘의 수만 군사를 부르실 수 있었지만 기꺼이 변명 한 마디 않으시고 병사들에게 잡히셨고, 그 뒤에 모욕과 수치와 고통과 피흘리심과 죽으심의 과정을 묵묵히 지나가셨습니다. 영광만을 받으셔야 마땅한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모욕, 수치, 고통, 피흘리심, 죽음을 거치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8절은 예수님 스스로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고통/희생/수고를 두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아버지께는 복종/순종/충성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철두철미 복종/순종/충성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저는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하나님께 철두철미 복종/순종하지도 못하고, 주님의 100분의 1, 천분의 1도 충성하지 못하는 저 자신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그저 머리만 숙여지고, 주님께서 도우셔서 그런 사람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부탁드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양식, 즉 그분의 고통/희생/수고는 우리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요13:1절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죽기까지 사랑하셨다고 증거합니다. 우리의 죄를 남김 없이, 영원히 씻어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 오르셔서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다 쏟으시는 희생을 감수하십니다. 왜? 사랑하시기에 하신 일입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가는 39대의 참혹한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와 병을 자신의 몸에 담당하시기 위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수고/희생/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부끄럽지만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는 까닭입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번번히 우리를 용서하시고, 평생 동안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강권하십니다. 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내게 맡겨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일어나 빛을 발하라! 사랑의 복음으로 네 어두운 마음을 밝혀라! 그리고 나가서 내가 얼마나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영원토록 함께 있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지, 증거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유동의목사:예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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