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따르는 첫째 요건은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과 행위입니다. 이 첫 요건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심각한 왜곡현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모든 십자군적 발상은 자기 부인을 부인하는데서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 제일 먼저 해내야 할 일은 바로 자기 부인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은 곧 자기 비움을 뜻합니다. 자기 비움이란 내 속에 가득 차 있는 온갖 탐욕을 비워내는 일입니다.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먼저 비워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유혹했던 마귀의 세 가지 탐욕을 비워내야 합니다. 자기 비움의 정반대는 바로 독선을 통한 자기 채움입니다. 독선은 정말 금물입니다. 종교적 독선은 더더구나 예수따르미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첫 번째 금기사항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종교인일수록 비종교인보다 더 독선적이고, 종교적 지도층일수록 더 독선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자기의 비움은 비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비움은 남의 채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의 탐욕을 비워내되 남에게는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 주는 것, 이것이 자기 비움의 참뜻입니다. 남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로 가득 채워 주게 되면, 나와 남 사이에는 누룩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남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온갖 장벽들, 성의 장벽•인종의 장벽•계급의 장벽•종교의 장벽•이념의 장벽 등이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같은 장벽들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은 바로 이 장벽 허물기 선교활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인과 종간의 벽,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벽, 그리고 남녀간의 벽을 헐어버렸습니다.
나를 철저히 비워 남을 가득히 좋은 가치로 채워주는 이 행위는 나에게 뜻밖의 큰 선물을 안겨다 줍니다. 그것은 새로운 나의 발견입니다. 곧 비워진 내 자신이 새로운 자신으로 채워진다는 뜻입니다. 나는 더 아름다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이른바 '참 나'가 나와 남 사이에 생긴 새로운 관계(하나님나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게 되지요. “보라 내가 새로운 존재로다” 하는 기쁨의 고백이 터져나오게 되지요.
결국 나를 비워 남을 채워주는 과정에서 내 빈 공간은 마침내 새로운 자아로 채워지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따르미들이 감동으로 체험하게 되는 영적 환희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같은 영적 기쁨을 항상 체험했기에 “항상 기뻐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기쁨은 사랑의 기쁨이기에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사랑은 바로 자기 비움의 사랑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무서운 외재신(外在神)은 이 같은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직접 체험하셨던 하나님은 자기를 비워 아들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아빠'(Abba) 하나님이십니다.
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낳게 하는 힘을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이시지요. 오랫동안 혈루병에 걸린 여성이 예수님 옷자락만 만져도 그녀에게 값없이 흘러들어간 그 힘. 그녀에게 나음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는 그 사랑의 힘. 그것이 바로 자기를 비우시는 하나님 사랑의 작동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새롭고 건강하고 온전한 존재로 우뚝 설 수 있게 해주는 값없이 그저 주시는 값진 힘 말입니다.
십자가를 앞세우지 않고 등에 져야
둘째로 예수따르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이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역사적 의미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가 무엇을 뜻했는지를 살펴봅시다.
십자가는 고대 세계에서 행해진 가혹한 형벌의 도구였습니다. 페르샤와 카르타고에서는 고급관료들이나 군지휘관과 같은 상류층을 징벌할 때 십자가가 처형틀로 활용되었습니다. 로마에 와서는 달아난 노예나 폭행죄를 범했던 하류층을 처벌할 때 십자가를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식민지에서 로마체제에 반역하는 자들을 징벌할 때 이 방법을 애용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도록 짐짓 고안된 형틀입니다. 원래 고통의 시간은 길게 느껴지게 마련이기에 육체적으로 그 고통을 최대한 연장시키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극도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처형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옷을 벗기고 먼저 채찍으로 때린 뒤 무거운 십자가를 지워 모멸과 고통의 행진을 하게 했지요. 그뿐입니까. 나무에 달려 천천히 죽어 가는 죄인의 머리 위에는 시체를 뜯어먹으려는 까마귀나 독수리 떼가 그 죽음을 기다리며 날고 있었고 십자가 밑에는 들개들이 먹이를 뜯어먹으려고 으르렁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범죄인의 시신은 온전하게 매장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시체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대접도 허용하지 않은 인간 존엄성의 완벽한 박탈 행위였습니다.
이 같은 십자가 처형에 견주어 보면, 근대식 또는 현대식 사형방식은 다분히 인간적이라 하겠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 사용된 길로띵은 한순간에 대컥 죽게 하니까 '자비로운 사형틀'로 볼 수 있지요. 총살도 그렇습니다. 약물로 죽이는 것은 더욱더 인간적 배려에 바탕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당시의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처형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 사형틀에 우리 주님께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뜻은 자기를 부인함에 있어 가장 잔인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을 각오를 하란 뜻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따르기란 정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십자가형이 없어진 오늘의 상황에서는 '십자가 지기'가 무엇을 뜻할까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겪으셨던 육체적 아픔과 정신적 고통은 철저한 자기 부인의 고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억울한 고통과 극심한 수치심을 이겨내는 것, 특히 예수로부터 세속적 메시아를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의 값싼 기대와 소망을 과감하게 좌절시키는 아픔을 이겨내는 것, 이것이 십자가 지는 뜻이지요.
세상 사람들의 강렬한 값싼 기대를 저버리는 용기는 곧 자기 부정의 용기입니다. 특히 십자가 처형이 없어진 오늘의 상황에서 십자가 짐의 뜻은 육체적 고난보다 메시아 도래라는 탐욕적 기대를 철저히 비워내는 자기 부인의 아픔을 뜻하겠습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십자가는 그의 허무한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세속적 욕망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허망하고 허무한 고행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 허무한 죽음은 승리지상주의적 욕망의 완벽한 포기를 뜻합니다. 특히 공생애 기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기적 행위에 견주어 볼 때, 무력하기 짝이 없이 십자가를 지고 그 고통과 수치의 길로 걸어가셨던 예수의 처량한 모습은 너무나 놀랍게도 허망해 보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정도로 무력한 예수의 모습은 승리주의(triumphalism)의 철저한 극복의 모습이기에 그 허무한 모습이 결단코 허무주의의 표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소망과 능력의 징표입니다.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진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고 가는 것이지 앞세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 예수따르미들은 '십자가 지기'와 '십자가 앞세우기'간의 차이를 뚜렷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세우기는 십자가를 이용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이용하여 자기 탐욕을 채우는 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사롭게는 십자가를 개인의 부(富)를 가져다주는 종교적 부적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보석을 만들어 자기 신분의 상승을 과시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플러스(+)의 부적으로 보는 생각이 깔려있지요.
십자가 앞세우기를 집단적으로 강조할 때 그것은 집단이기주의를 극대화하는 일로 이어지고, 그 집단의 승리를 담보해내려는 집단적 탐욕의 몸짓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한 십자군은 으레 십자가 군기를 앞세워 진군했습니다. 이교도(異敎徒)나 이단자를 박멸하기 위해 십자군을 출동시킬 때 으레 십자가를 앞세웠습니다. 이때 십자가는 부족주의적 승리를 위한 부적으로 작동하게 되지요. 이것은 예수 십자가 지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행태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예수 십자가 지기'를 오히려 지워버리는 반(反)예수적 행위라 하겠습니다.
오늘 개신교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경멸을 받게 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 까닭 중에 하나가 십자가 지고 가라는 예수의 명령을 개신교도들이 십자가 앞세워 가라는 명령으로 오해했거나 왜곡시켜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에 교회 십자가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 십자가는 바로 종교적 탐욕과 독선의 상징으로 여겨질 것이며 값싼 축복을 바라는 신자들의 종교적 부적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 예수따르미에서 사탄따르미로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예수의 꾸지람을 들었던 베드로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똑똑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고백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끔찍스러운 책망을 하셨습니다. '믿싸오니'를 외치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했던 베드로, 진정한 메시아는 고난의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했던 베드로, 오로지 승승장구하는 승리자 메시아만 믿싸오니를 외치면서 예수를 좇았던 베드로는 바로 오늘의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이 모습을 예수님은 사탄의 모습으로 보신 것입니다. 수제자가 사탄의 제자로 일시 나타났던 셈이지요.
그렇습니다. 골고다의 수치와 고통, 그 억울한 죽음, 그 허무한 패배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믿으미들은 진정한 예수따르미가 아니라 사탄따르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점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했던 사탄은 결단코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이용하고 악용하며 남을 비워 자기를 채우는 이기적 존재입니다. 남에게는 절망, 고통, 비겁함으로 가득 채워 주면서 자기에게는 쾌락과 특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바로 사탄의 특기입니다. 마치 나치가 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패배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께서 극구 승리의 큰길로 내닫기를 원했던 베드로의 얼굴은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했던 바로 그 사탄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오늘 한국 개신교도(예수믿으미)들이 자기들에 대한 세상의 비판을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고, 앞으로 더욱더 '믿싸오니'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십자가를 앞세워 자기집단 확장에만 열을 올린다면, 이제는 영의 귀를 활짝 열어 예수믿으미이에게 벼락처럼 꾸짖는 주님의 육성 곧 "사탄아 물러가라 너희들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큰 교회들이 십자가를 앞세워 불투명한 교회 운영에 더욱 열중하고 십자가를 앞세워 자식에게 세습시키면서 예수를 오히려 내쫓는 짓에 더욱 심취하는 듯하여 더욱 곤혹스럽습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들은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을 우렛소리로 두렵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완상 / 한성대 총장, 새길공동체 말씀증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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