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2009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첩경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0-12)

흔히들 영적 전쟁을 신령하고 초자연적으로만 이해하려 듭니다. 예컨대 성령 은사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싸움을 하는 모습부터 연상합니다. 당연히 그 싸움에 이기기 위해선 성령의 은사를 받으며 기도에 아주 능해지려는 쪽으로만 관심과 노력을 집중합니다.

무슨 싸움이든 가장 먼저 반드시 싸워야 할 명분이 확실히 서 있어야 합니다. 그 명분이 더 확고하고 의로울수록 전의를 불태우며 잘 싸울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상대와 자신의 전력을 사전에 정확하게 비교해야 합니다. 특별히 상대의 전략을 꿰뚫어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전쟁을 수행하는 원칙은 아군의 최소 희생으로서 적군에게 최대의 타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선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상대를 알고 자기를 알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며 최고의 병법서를 쓴 중국의 손자도 마지막 36번째 계책에 도망가는 것도 아주 훌륭한 전략이라고 갈파했습니다.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도 이런 원리들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대표적 예로 성경이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이 바로 악의 힘은 너무 강하기에 아예 피하는 것이 이길 수 있는 길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사단과 성도의 전력을 상호 비교한 것입니다. 사단의 전략을 꿰뚫어 보는 것도 당연히 승리의 첩경이 됩니다.

가장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사단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동서고금의 원칙을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선 인간을 대상으로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인간과 자신의 전력을 비교하며, 인간의 전략을 꿰뚫어 보고 있으며, 싸움의 명분을 확고히 해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인간을 대상으로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아예 영적 전쟁이 없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영혼을 미혹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춰지지 않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상만 전부로 알게 해 잘 먹고 잘 마시는 일에 집착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불신자는 아예 하나님을 찾을 생각도 않습니다. 평생을 사단의 종이 되어 있는 줄도 전혀 모르고 그 조종에 놀아납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전략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신자에게 먹혔던 최고 전략이 신자에게도 그대로 먹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들의 전략을 꿰뚫어 보는 정도가 아니라 신자와도 전혀 싸우지 않고도 이기고 있습니다. 신자가 영적 전쟁이 없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더러 아주 열심히, 그것도 신자가 가진 신령한 은사를 다 동원해서 싸우게 하면서도 이깁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혈과 육의 싸움”의 반대어가 “신령한 은사에 의한 싸움”이라고 간주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니까 더더욱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전쟁을 치를 대상과 갖고 싸울 무기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는 무기일 뿐입니다. 혈과 육이야말로 정작 싸워야 할 대상 즉, 적군입니다. 말하자면 혈과 육의 싸움의 반대어는 사단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혈과 육의 싸움을 하고 있으면 사단과 싸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역으로 사단과 싸우려면 혈과 육의 싸움만 안 하면 되고 또 바로 그것이 승리의 지름길입니다. 사단은 신자로 항상 혈과 육의 싸움에 몰두하도록 만들어서 자기는 전혀 싸우지 않고도 이기려 드는 전략을 주로 쓰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쫓는 것도 분명 영적 전쟁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귀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자기 병사 중에 장교로 쓸 자를 뽑거나 일상적 전쟁에서 패배 직전에 이르게 되자 꺼내드는 최후의 수단이므로 사실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또 그러니까 신자도 분명히 기도와 말씀에 능한 사역자나 신령한 은사를 받은 자가 맞상대를 해주어야 합니다.

사단이 윤리적 죄와 세상 쾌락으로 유혹하는 경우도 많긴 합니다. 이 또한 올바른 신자라면 말씀과 기도에 능하지는 않아도 친숙하므로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간혹 넘어가더라도 내주하신 성령이 깨닫게 해서 회개로 인도합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으로 무장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권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역으로 사단의 입장이 되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가 기도하고 말씀보고 나아가 신령한 은사로 무장하면 자신이 지고 만다는 것은 사단 스스로 너무나 잘 알 것 아닙니까? 따라서 눈에 훤히 보이는 귀신을 물론이고 명백히 죄와 쾌락이라고 알 수 있거나 감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시험과 유혹은 잘 동원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럼 사단이 택할 수 있는 최선책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명백한 영적전쟁보다는 신자들이 알게 모르게 혈과 육의 전쟁에 메이도록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일부러 아주 격렬하고도 명백한 싸움을 딴 곳에 벌여서 아주 신령한 신자들의 시선과 수고와 능력을 그곳에만 묶어두려 하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신자들이 영적 전쟁을 너무 신령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사단의 전략에 말려든 것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귀신 쫓지 않는다고, 심지어 기도와 말씀을 보지 않는다고 영적 전쟁에 지고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차 말하지만 기도와 말씀은 무기이지 그 자체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묶여서 그것만 해결하려 기도하고 말씀 보면 여전히 영적 전쟁에 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신자가 그러는 것이 바로 사단이 벌려 놓은 실제적이고도 본격적인 영적 전투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작금의 교회의 실상이 거의 그런 일에 묶여 있으니 겉으로는 아무리 영적 전쟁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거의 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정작 말씀과 기도에 능한 자들마저 사단이 그들의 힘을 소진시키려 전략적으로 벌려 놓은 일부 전선에만, 어쩌면 자신의 은사와 능력을 자랑도 할 겸, 묶여 있는 실정입니다.

신자들이 혈과 육의 싸움에 자기도 모르게 지고 있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전쟁의 명분과 전의에서 사단에게 완전히 밀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며, 왜 믿어야 하며, 어떻게 믿게 되었으며, 믿은 결과가 무엇이며, 믿음으로 도달할 곳이 어디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기독교만은 믿음 자체가 이 땅에선 혈과 육의 싸움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절대 전부도 실체도 아니기에 영원히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소망으로 살겠다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자 끝이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비천한 몸으로 이 땅에까지 와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단의 종이 되어 혈과 육에 묶여 하나님을 배반한 원수였음에도 당신의 보혈로 깨끗케 해주셔서 호흡이 있는 동안 그분께 경배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하도록 한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혈과 육은 아예 존재하지 않기에 더 이상 그것들과 싸울 이유나 필요조차 없게 된 것 아닙니까?

요컨대 신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 그분의 영적전쟁을 치를 명분과 힘에서 밀리니까 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실력으로 사단을 이길 수 있다는 착각부터 버리고, 성령의 은사마저 십자가를 놓치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단이 진짜 완전히 패배했던 적은 골고다 십자가뿐이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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