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자신의 목숨을 복음을 위해 아낌없이 던질 수 있었던 사도들 중 한 사람인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뜻이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는 ‘어두움’속에서 ‘확실한 예언’의 등불을 응답의 새 날을 알리는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밝히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그에게 맡겨 진 사역을 온전히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사역 자로서 안수 받을 때 그에게 선포된 ‘예언적장로회’의 예언을 사용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딤전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딤전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사도 바울은 심지어 한 개인에게 주어진 ‘개인적 예언이 가나안을 쟁취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전쟁처럼 한 성도를 부르신 아버지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전쟁에 꼭 필요한 무기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참으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예언적 음성인 ‘레마’는 두 말이 선 검과 같아서 우리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영적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될 영적 무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기는 그저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신이 받은 예언적 소명과 예언 사역을 통하여 받은 ‘개인적 예언’을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선포함으로 실제 이 전쟁을 실패로 만들려는 영적인 세력들을 베어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장소에서 다시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 위해서 먼저 선포되어야 했고 그 예언을 믿고 기도할 ‘다니엘’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장을 보내서 영적인 방해세력들을 제거하셔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그분의 뜻도 이와 같이 예언의 검을 통하여 방해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단9-10장)
엡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레마:4487)을 가지라”
단(10:12-14)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 십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
등불과 기름
마25:8-10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하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을 닫힌지라”
마25: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주님은 신랑을 맞도록 부름을 받은 처녀들의 비유에서 등불은 준비하였지만 기름을 충분히 예비하지 못하여 그 부르심에서 떨어지는 자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적 소명을 성령께서 주시는 메시지와 감동 그리고 예언 사역을 통하여 확인 받는 것은 그 부르심을 성취하는 여정에서 등불을 갖는 것과 같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등불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결코 우리의 부르심을 성취하도록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한 것처럼 성령을 통해서 전달해 주신 자신의 부르심, 예언적 소명을 그 부르심이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선도하고 묵상하므로 스스로를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자신을 부르신 예언적 소명의 유전에 믿음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기름을 끌어 올려야 합니다.
겔36:36-37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실패하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개인적 예언들과 자신이 받은 예언적 감동과 소명은 그들이 믿음으로 화합할 때 비로소 성취되는 조건부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렘18:9-10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극단적인 두 가지 위험한 결정
예언적 소명들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라는 말은 결코 하나님의 때가 되지 전에 육적인 어떤 일을 시도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성취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두 가지의 결정을 내린다고 지난 50년간 예언 사역을 이끌어온C.I본부의 빌 해몬 감독은 그의 저서 ‘신지자와 개인적 예언’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성령께서 주신 개인적인 예언적 소명을 서랍 속에 가둬 두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개인 적 예언’을 받고도 그것을 서랍 속에 묻어둔 채 그저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영적인 도박사’(?)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을 믿고 자신의 아버지 집에서 떠나는 믿음의 행위가 있었기에 그는 그 언약을 유업으로 얻은 것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화답으로 우리의 믿음과 그 믿음을 증명할 행위를 보여야 합니다.
겔36:36-37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극단적인 결정의 두 번째는 때가 되기도 전에 ‘열심’과 믿음으로 보이는 ‘불신’으로 주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 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 실패와 좌절의 사막에서 예언적 소명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후사를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의 응답이 지체되자 주님의 시간보다 먼저 나아가 자신의 종을 양자로 삼아 자신의 후사를 스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잘못된 선택을 막아 주셨습니다.
창15:3-4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희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러나 자신의 아내 ‘사라’가 경수가 끊기는 상황이 오자 그는 또다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께서 채워주지 않은 빈 공간을 ‘여종의 몸을 통해서’라는 육적인 방법을 채워 넣으므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이미 동일한 실수를 앞서 한번 교정해 주셨던 하나님은 이번에는 그가 실수하는 것을 미리 막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선택한 ‘미리 나아감’에 대하여 주님은 분명하게 다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너희 후사는 네 아내 사라를 통하여 줄 것이다.”
창17:21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창18: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비록 아브라함은 오랜 기다림 속에서 잠시 믿음이 흔들려 주님의 시간보다 더 빨리 나아감으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시간과는 동떨어지게 믿음이 아닌 자신의 열심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러한 현실의 환경 속에서 무엇이 이루어질 것인가? 라는 불신의 생각으로 주님의 시간보다 먼저 나아가는 실수를 저지르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만이 ‘불신’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보다 빨리 나아가는 것도 결국은 그 환경 속에서 새 일을 행하실 주님을 믿지 못한 ‘불신’으로 인하여 시작된 것임을 잘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