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5/2010

부르심을 이루는 확실한 예언

벧후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자신의 목숨을 복음을 위해 아낌없이 던질 수 있었던 사도들 중 한 사람인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뜻이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는 ‘어두움’속에서 ‘확실한 예언’의 등불을 응답의 새 날을 알리는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밝히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그에게 맡겨 진 사역을 온전히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사역 자로서 안수 받을 때 그에게 선포된 ‘예언적장로회’의 예언을 사용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딤전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딤전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사도 바울은 심지어 한 개인에게 주어진 개인적 예언이 가나안을 쟁취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전쟁처럼 한 성도를 부르신 아버지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전쟁에 꼭 필요한 무기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참으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예언적 음성인 레마는 두 말이 선 검과 같아서 우리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영적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될 영적 무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기는 그저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신이 받은 예언적 소명과 예언 사역을 통하여 받은 개인적 예언을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선포함으로 실제 이 전쟁을 실패로 만들려는 영적인 세력들을 베어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장소에서 다시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 위해서 먼저 선포되어야 했고 그 예언을 믿고 기도할 다니엘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장을 보내서 영적인 방해세력들을 제거하셔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그분의 뜻도 이와 같이 예언의 검을 통하여 방해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9-10)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레마:4487)을 가지라

(10:12-14)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 십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

등불과 기름
25:8-10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하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을 닫힌지라

25: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주님은 신랑을 맞도록 부름을 받은 처녀들의 비유에서 등불은 준비하였지만 기름을 충분히 예비하지 못하여 그 부르심에서 떨어지는 자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적 소명을 성령께서 주시는 메시지와 감동 그리고 예언 사역을 통하여 확인 받는 것은 그 부르심을 성취하는 여정에서 등불을 갖는 것과 같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등불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결코 우리의 부르심을 성취하도록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한 것처럼 성령을 통해서 전달해 주신 자신의 부르심, 예언적 소명을 그 부르심이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선도하고 묵상하므로 스스로를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자신을 부르신 예언적 소명의 유전에 믿음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기름을 끌어 올려야 합니다.

36:36-37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실패하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개인적 예언들과 자신이 받은 예언적 감동과 소명은 그들이 믿음으로 화합할 때 비로소 성취되는 조건부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18:9-10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극단적인 두 가지 위험한 결정
예언적 소명들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라는 말은 결코 하나님의 때가 되지 전에 육적인 어떤 일을 시도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성취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두 가지의 결정을 내린다고 지난 50년간 예언 사역을 이끌어온C.I본부의 빌 해몬 감독은 그의 저서 신지자와 개인적 예언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성령께서 주신 개인적인 예언적 소명을 서랍 속에 가둬 두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개인 적 예언을 받고도 그것을 서랍 속에 묻어둔 채 그저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영적인 도박사’(?)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을 믿고 자신의 아버지 집에서 떠나는 믿음의 행위가 있었기에 그는 그 언약을 유업으로 얻은 것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화답으로 우리의 믿음과 그 믿음을 증명할 행위를 보여야 합니다.

36:36-37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극단적인 결정의 두 번째는 때가 되기도 전에 열심과 믿음으로 보이는 불신으로 주님의 불기둥구름기둥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가 실패와 좌절의 사막에서 예언적 소명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후사를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의 응답이 지체되자 주님의 시간보다 먼저 나아가 자신의 종을 양자로 삼아 자신의 후사를 스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잘못된 선택을 막아 주셨습니다.

15:3-4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희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러나 자신의 아내 사라가 경수가 끊기는 상황이 오자 그는 또다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께서 채워주지 않은 빈 공간을 여종의 몸을 통해서라는 육적인 방법을 채워 넣으므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이미 동일한 실수를 앞서 한번 교정해 주셨던 하나님은 이번에는 그가 실수하는 것을 미리 막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선택한 미리 나아감에 대하여 주님은 분명하게 다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너희 후사는 네 아내 사라를 통하여 줄 것이다.”

17:21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18: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비록 아브라함은 오랜 기다림 속에서 잠시 믿음이 흔들려 주님의 시간보다 더 빨리 나아감으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시간과는 동떨어지게 믿음이 아닌 자신의 열심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러한 현실의 환경 속에서 무엇이 이루어질 것인가? 라는 불신의 생각으로 주님의 시간보다 먼저 나아가는 실수를 저지르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만이 불신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보다 빨리 나아가는 것도 결국은 그 환경 속에서 새 일을 행하실 주님을 믿지 못한 불신으로 인하여 시작된 것임을 잘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부르심을 이루는 능력/임동철/HPWM>

사랑하는 하나님 - 묵상말씀 – 고후9:10-11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후9:10-11)

아둘람 훈련의 의미 외에 다른 의미로도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다윗에게 모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 뛰어나고 총명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깊이 뿌리 내린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치고 빈곤한 자들로, 사울의 정부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돌봐주십시오. 이제 다른 이가 우리를 돌봐줄 때가 되었습니다!” 이상적인 관계, 말뿐인 관계는 아둘람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아둘람은 하나님께서 진짜 살아 계심을 경험하는 곳으로, 큰 역경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시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이 우리의 공급자 되심을 알아가는 장소였습니다.

아둘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해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힌트를 얻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좋은 장소입니다.  아둘람에서 맞이하게 되는 어려움은 시온에서 받게 될 축복을 위한 훈련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가장 어려운 때에, 여러분은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나의 기도
기브아에서도, 아둘람에서도 당신만이 저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공급함을 바라볼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옵소서. 다른 이들에게, 그들과 제가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기름부음이나 성공으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길 원치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의 여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 원하신다.

출처:사랑하는하나님/ 마이크 비클의 365일 묵상집

조직신학 요약 2 - 하나님에 대하여

1.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누구인가'라고 하는 질문은 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는 의문입니다. 푸르고 높은 창공을 바라보면서 또 천체의 크고 놀라울 정도의 정교한 법칙을 볼 때면 우주의 신비를 알아보았으면 하는 갈망심을 갖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정서일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관심은 오랜 고대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며, 그래서 인간을 가리켜 종교적인 동물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포괄적으로 신에 대한 생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거룩한 산타 크로스나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로 이해하는 소박한 부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무엇이나 원하는 대로 다 가져다 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는, 철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궁극적인 실재"라고 보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주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하나님을 서술하며, 온갖 철학적인 술어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는, 신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하여 묻기도 하고 의견도 교환하지만 일시적이고 감각적인 호기심이 채워지고 나면 무감각해지는 사람들로서 우리 나라에서 비교적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신의 존재나 신에 대한 이해마저도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힘든 만큼 신의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에 봉착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2.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상에서처럼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가지각색이며 아주 불완전합니다. 그것은 제한된 인간의 두뇌와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완전한 설명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본인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어떠한 형체에도 제한을 받지 않고 또한 일정한 모양도 갖고 있지 않으신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태양이나 달 등의 어떤 자연에 비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조각품이나 부어서 만든 어떤 신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인간들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늙고 상하고 변하고 또 결국은 언젠가는 없어져 버리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으시며 오직 홀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셋째,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영혼의 아버지이시며,지상의 모든 생명체의 창조자이시며 또한 주인이십니다.

넷째,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보다 훨씬 높은 인격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의지할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속에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다섯째, 인간은 한계를 가진 불완전한 동물이지만,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어디서나, 언제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절대자이십니다.

여섯째, 가장 놀라웁고 축복스러운 말씀은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3.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더욱더 구체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여러가지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예배드리는 자들은,그 를 대함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어떤 일정한 형태를 가진 분을 대하는 것 같이 할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려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활동적이고 살아 계시며 인격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신 후에 어머니가 그 자녀를 염려하는 것보다 더 힘있고 진지하게 우리들 하나하나를 염려해 주시고 항상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처음과 나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언제나 변치 않으십니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의 모든 물체는 끊임없이 변하고 삼라만상은 시시로 달라지나 하나님만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무미건조한 성품이나 부동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점과 완전하고 절대적인 성품을 지니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그의 능력에 의하여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인간들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아시며, 또한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감찰하고 계십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에게는 "불가능"이란 말이 있을 수 없고 또 원하시는 것을 성취 못하심이 결코 없으십니다.

일곱째,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영원 가운데서 어느 일정한 장소에 뿐만 아니라 모든 장소에 모두 계십니다.

여덟째,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완전무결하심을 나타내 주십니다.

아홉째,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며 모든 판단에 있어서 공평하시고 편벽됨이 없으십니다.

열 번째, 하나님은 모든 환경에 있어서 믿음직하며 우리가 마음 전체를 바쳐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직 그만이 변절함이 없는 성실성을 소유하고 계시며 언제나 인간들에게 새 힘과 소망을 주십니다.

열한번째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동정하고 계십니다.

열두번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의 사랑은 한이 없으신 관계로 기독교를 가리켜 사랑의 종교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열세번째,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세 位를 가지신 유일하신 신이신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三位를 가리켜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삼위는 하나이며 일체 가운데서 삼위이십니다. 이 삼위에 대한 설명은 후에 성령에 관하여 설명할 때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

4.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러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창세기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가운데는 천사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도 있으며, 사람과 짐승과 여러가지 생물들처럼 볼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며 관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만물들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이와 같은 질서가 세상 끝나는 날까지 게속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 인간을 가장 사랑하셔서 인간을 위하여 특별히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은 인간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과 행해서는 안될 것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으로서 십계명 가운데 명시되어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을 죄의 권세 속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이 그의 죄 값으로 마땅히 당하여야할 고난을 대신 당하시고 대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을 속죄하시는 업무가 완성되었으며, 인간을 위한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5.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상에서 살펴본 하나님은 과연 우리 인간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무엇때문에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집 나간 방탕한 아들을 날마다 애타게 문밖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그 부친의 아들을 향한 父情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도록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애타게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 인간들이 구원받도록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유일하게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원하십니다.

셋째,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본래의 모습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