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2009

제자들의 순교

1. 스테판(Stephen) - 스테판은 첫 번째로 순교당한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배반자들과 살인자들에게 신실하게 복음을 전했으며, 이것이 그의 죽음을 야기시켰다. 죄의 찔림으로 흥분한 유대인들의 광란적 반응은 그를 성읍 밖으로 내몰아 돌로 쳐죽이기에 이르렀다. 스테판이 박해받았던 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이듬해의 봄인 오순절 시기였다고 추정되며, 이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즉시,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또는 선지자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 박해가 가해졌다. 이 사실은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가해졌으니,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지더라.}( 8:1)고 기록한 것을 보면 즉시 알 수 있다.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던 니카놀을 포함한 약 2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스테판에 의해 일어난 박해" 기간 중에 순교당했다.

2.
야고보(James) - 그 다음 우리가 만날 순교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이다. 그는 요한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친척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와 마리아는 종자매이다). 야고보의 순교는 스테판이 죽은 후 약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이는 헤롯 아그립파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자마자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얻을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매서운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3.
빌립(Philip) - 그는 갈릴리 벳새다에서 태어났으며 최초로 "제자"로 불린 사람이다. 그는 북아시아(Upper Asia)에서 신실하게 주를 섬겼으며, 프리기아의 헤리오폴리스에서 순교당했다. 그는 채찍에 맞았으며, 감옥에 갇힌 후 A.D. 54년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4.
마태(Matthew) - 마태는 세리였으며, 나사렛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티아와 에디오피아에서 사역을 하였고, 에디오피아에서 박해받았으며 A.D. 60년 나다바에서 미늘창으로 살해당하였다.

5.
작은 야고보(James)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이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기도 하다. 94세 때 그는 유대인들에게 구타당하고 돌로 맞아, 결국 뇌에 손상을 입고 순교했다.

6.
맛디아(Matthias) - 맛디아는 다른 대부분의 제자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다 이스카리옷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임명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돌매질을 당하였으며 후에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했다.

7.
안드레(Andrew)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이며,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에데사에에서 붙들려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는데, 땅에서 십자가의 두 끝을 수직으로 못박혀 죽었다.

8.
마가(Mark) - 마가는 레위 족속의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 의하여 그들의 우상인 세라피스를 기리는 웅장한 종교 의식을 할 때 순교당하였다. 그는 무자비한 처형 방법으로 몸이 찢기며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9.
베드로(Peter)다른 많은 성도들 가운데서 복받은 제자인 베드로는 죽음을 선고받아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제롬은 베드로의 죽음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머리가 땅으로, 다리가 위를 향하는 자세로, 즉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는 이렇게 주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만큼 자신이 고귀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10.
바울(Paul)처음에는 사울이라 불렀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숭고한 희생과 말할 수 없는 수고를 치룬 후, 역시 네로의 박해 아래서 순교하였다. 압디아스(Abdias)는 진술하기를, 네로가 바울에게 처형을 선고하기 위하여 그의 병사 네레가 (Nerega)와 파테미우스(Parthemius)를 보냈다고 한다. 그 두 병사는 바울에게 오면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바울이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소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곧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의 무덤 가에서 침례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에 그 병사들은 바울을 마을 밖 사형 집행장으로 끌고갔으며, 그곳에서 바울은 기도를 마치고 칼에 목이 베여 순교당했다.

11.
유다(Jude)야고보의 형제이며 다대오(Thaddeus)로 불렸다. 그는 A.D.72년 에데사(Edessa)에서 십자가형을 받았다.

12.
바돌로매(Batholomew) 바돌로매는 여러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잔인하게 폭행당하였으며, 포악한 우상 숭배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13.
도마(Thomas)도마는 디두모(Didymus)라고 불리며, 파티아와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고, 이곳에서 이교도 제사장들을 격노케 하였다. 그래서 그는 창으로 몸이 관통되어 죽었다.

14.
누가(Luke)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자이며 복음 전파자이다. 그는 바울과 함께 많은 나라에서 선교하였으며, 그리스의 우상 숭배 제사장들에 의하여 올리브 나무에 목이 매달려 순교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5.
시몬(Simon) 시몬의 다른 이름은 젤로(Zelotes)이다. 그는 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MAuritania)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영국에서도 선교하였다. A.D. 74년에 그는 영국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16.
요한(John) "사랑받는 제자"는 큰 야고보(James the Great)의 형제이다. 에베소로부터 로마로 강제 송환 명령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기름이 끓는 솥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피해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그 후 도미티안(Domitian)은 그를 팟모 섬으로 추방하였고, 요한은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도미티안이 후계자인 네르바가 요한을 재송환하였다. 그는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참혹한 죽음을 피한 사람인 셈이다.

17.
바나바(Barnabas)바나바는 사이프러스(Cyprus) 출신이며, 유대인 자손이다. 그는 약 A.D. 73년경에 순교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계속되는 모든 박해와 끔찍한 처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매일 성장하였고, 사도들과 사도직분을 수행했던 형제들의 가르침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렸으며, 그 위에 성도들의 피가 풍성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1. 개역판 신약성서에는 '정의'(正義)라는 낱말이 놀랍게도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아니했다. '공의' (公義)는 명사적, 형용사적 및 부사적 용법을 합하여 8( ; ; ; 28:4; 살후 ,7; 벧전 ; ) 사용되었다. 이에 반하여 구약성서에서는 '공의' 88, '정의' 16번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성서의 '채댁' '체다카' 라는 두 낱말은 개역성경에서 거의 대 부분 ''()로 번역되었는데 '채댁' 130여회, '체다카' 150여회 사용되었다. 헬라어 신약성서 의 '디카이오쉬네'는 두 곳( ; )에서 '공의'로 번역되고 나머지는 모두 ''()로 번역되었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디카이오쉬네' 또는 ''가 사용된 회수는 90여회에 지나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는 '미쉬파트'(주로 '심판'을 뜻함) 380 여회 사용되었는 데 반하여 신약성서에는 '크리시스'('심판'을 뜻함) 48회 정도 사용되었을 따름이다.  

위의 통계에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하면:  
1) 신약성서에서는 구약성서에 비하여 ''라는 낱말이 현격하게 적게 사용되었다.  
2) 신약성서에서는 '심판' '공의'라는 낱말은 아주 드물게 사용되다.  
3) 개역판 신약성서에서는 '정의'라는 낱말이 전혀 사용되지 아니했다.  

이 낱말들이 신구약성서에서 각각 사용된 빈도(頻度)의 차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용법 (用法)의 차이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채댁' 또는 '체다카'는 수 없이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의미상의 주체로 하여 사용되었는 데 반하여 신약성서에서는 겨우 일곱 번만( ; , 21, 22,25,26; ) 그렇게 사용되었을 따름이다. 또 구약성서에서는 '미쉬파트'라는 낱말이 하나님이 수시(隋時)로 역사에 개입하여 잘못을 바로잡으시는 행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지마는 신약성서에서는 '심판'이라는 낱말은 역사의 끝에 있는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이미 내려진 현재적 심판을 가리킨다.

신약성서에서는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행위를 기술(記述)하는 데 '사랑' 또는 '은혜'라는 개념이 주로 사용된다.   일찍이 마르시온(Marcion)은 구약성서에 계시된 하나님과 신약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은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하다가 이단자로 규정되었다. 현명하게도 우리는 모두 노골적으로 마르시온과 같은 이단에는 빠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다수 암암리에 상정(想定)하기를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심판과 보복의 신()으로 행동하시고 신약시대에는 사랑과 용서의 신으로 행동하셨다고 한다. 구원사를 전개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방식이 동일한가 변하였는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2. 종교개혁을 통하여 이른바 바울의 '의인론'(義認論) 또는 '칭의론'(稱義論)이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개신교 신학자들의 거의 대다수는 의인론은 바울 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정수(精髓)라고 주장한다. 개신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의인론을 '교회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신앙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받아들인다. 바울의 의인론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행위와 믿음을 핵심적인 대립 개념으로 논의의 중심부에 놓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의인론의 근거와 목적이 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아직까지 철저하게 규명되지 못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3-4장에서 그의 의인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그 출발점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의인론의 근거로 선언하였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2). 신약성서에서 92회 사용된 '디카이오쉬네'() 가운데서 바울이 그의 5대 서신(, 고전, 고후, , )에서 52회 사용한 것을 볼 때에 바울이 ''를 중요한 신학적 개념으로 취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하여는 '' 일반의 개념을 규정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의'라는 정형구(定型句) 속에 사용된 ''()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3. '하나님의 의'가 무슨 뜻인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는 ''()라는 1격명사가 내용적으로 어떤 종류의 명사인지를 규정해야 하며 둘째는 '하나님의'라는 2격명사의 문법적 기능이 무엇인지를 규정해야 한다. '하나님의'라는 2격명사의 문법적 기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주로 '주어적 2'(gen. subj.)이냐 '목적어적 2'(gen. obj.)이냐를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왔다. 이에 반하여 ''()가 내용상으로 어떤 종류의 명사에 속하느냐에 대해서는 물음을 전혀 제기하지 아니했다.  
                                  
어그스틴(St. Augustine)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 ''()를 추상명사(抽象名詞)로 이해했다. 그러나 ''를 추상명사로 자명하게 전제하고 출발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의'라는 이격명사가 주어적 2격이냐 목적어적 2격이냐는 논의 가 '하나님의 의'라는 어구의 의미를 밝히는 데 실질적으로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다.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의'라는 어구의 문법적.언어적 의미 그 자체를 규명하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 대하여 맺는 관계를 끼어 넣어서 설명하려 하였다. '하나님의 의'라는 어구를 해석함에 있어서 문법적으로 가장 큰 혼란을 일으킨 사람은 루터(M. Luther)이다. 그는 아무런 문법적인 근거 없이 '하나님의'라는 2격 명사를 목적어적 2격이라 규정하고서 '하나님의의'의 뜻은 '하나님 앞에서 통용되는 의'(righteousness which holds before God; Gerechtighkeit, die vor Gott gilt)라고 하였다. 대다수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루터의 권위 때문에 그의 이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19세기말과 20세게 초에 몇몇 주석가들이 루터에 반대하여 '하나님의'라는 2격 명사를 주어적 2격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가운데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크레머(H. Cremer)의 해석이다. 크레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 특유(特有)한 의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재판관으로서의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의 구원작용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해링(Th. H ring) '하나님의 의'라는 어구에 대한 11개의 해석 유형을 소개하였다. 그 가운데서 주목할 만 것은 주어적 2격과 목적어적 2격 사이의 중간 노선으로서 '작자적(作者的) 2'(gen.suctoris)이다. '하나님의'를 작자적 2격으로 규정하는 경우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의로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근거 지어 주는 의를 뜻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의 뜻을 올바로 포착하지 못한 까닭은 ''()를 추상명사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가 추상명사이면 '의로움'을 뜻한다.   '의로움' '의로운' 또는 '의롭다'라는 형용사가 명사화 된 것이다. 2격 명사와 추상명사가 결합하는 경우에는 그 2격 명사로 지칭되는 인물의 존재가 어떠한 성질인지를 서술한다. "그 사람의 근면은 그의 최대의 장점이다"라는 문장에서 '그 사람의 근면'은 그 사람이 근면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근면'이라는 추상명사는 그 사람의 존재의 성질을 서술한다('그의 교만', '그의 성실', '그의 교활', '그의 건강' 등등 참고할 것). '하나님의 의'를 이러한 유형에 대입시키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바울의 표현 가운데서 로마서 3 25절과 26절에 각각 사용된 '그의[=하나님의] '라는 어구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러나 로마서 1 17, 3 21절과 22, 10 3절에 사용된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위의 유형에 귀속시킬 수 없다. 바울이 그의 의인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의인론의 기본 명제를 제시하는 이들 구절에 사용된 '하나님의 의'가 무슨 뜻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 길을 개척한 사람은 캐제만(E. K semann)이다. 그는 바울의 이 표현에 있어서 '' ()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행동명사(行動名詞, nomen actionis)이며 '하나님의'는 주어적 2격도, 목적어적 2격도 아니고 작자적 2격이라고 주장하였다. 캐제만의 이 획기적인 연구를 계기로하여 바울의 '하나님의 의'를 올바로 해석하는 가능성이 열렸다.
  
행동명사는 문자 그대로 행위나 행동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부활', '승천', '강림'(降臨), '구속'(救贖), '박해', '해방'은 행동 명사이다. 행동명사를 다시 두 종류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부활, 승천, 강림은 자동사(自動詞)가 명사화한 것이고 구속, 박해, 해방은 타동사(他動詞)가 명사화한 것이다. 자동사에서 유래한 행동명사와 결합된 2격 명사는 주어적 2격이다. '예수의 승천'이라는 어구에서 예수는 승천이라는 행위의 주체이다. 이 경우에 승천이라는 행위는 그 행위의 주체인 예수와 밀착되어 있다. 예수에게서 벗어나서 승천이라는 행위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구속', '사울의 박해', '모세의 해방'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구속 행위[사건], 사울이 일으킨 박해 행위[사건], 모세가 이룩한 해방 행위[사건]를 뜻한다.
                                                                                                                                 이 경우에 구속, 박해, 해방이라는 행위는 그것을 일으킨 장본인(張本人)의 몸에서 벗어나서 별개의 사건으로 존재한다. 타동사에서 유래한 행동명사와 결합된 2격 명사는 주어적 2격이 아니라 작자적 2(gen. auctoris)이다. 주어적 2격과 작자적 2격의 차이를 엄격하게 분별해야 한다. '그의 달음질'(주어적 2 + 자동사에서 유래한 행동명사)이라는 행위에서는 그 사람과 달음질이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구타(毆打)'(타동사에서 유래한 행동명사 + 작자적 2)라는 행위가 일어난 곳에서는 구타 행위의 결과가 그 행위자의 몸에서 벗어나서 존재한다. 즉 어떤 사람이 구타를 당한 사건을 반드시 수반한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에서 ''가 행동 명사이고 '하나님의'라는 2격 명사가 작자적 2격이면 ''는 원래 타동사를 명사화 시킨 명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시려고 행하시는 행위 또는 하나님께서 옳다고 판결해 주시는 행위이다.   바울이 사용한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의 어법에서 유래했다. 구약성서에서는 '여호와의 의'라고 표현하였다. 구약성서에서 '여호와의 의'는 무엇을 뜻하는가? 구약성서에서 '여호와의 의'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전승은 드보라의 노래이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여자 사사(士師)로서 침략자 야빈의 군대를 물리친 여장부인데 그가 부른 승리의 노래 가운데 '여호와의 의(복수명사)'라는 표현이 나온다.
                                                                                                                                "활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 ).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은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치드카요트 야웨' 인데, 직역하면 '여호와의 의()'이다. 드보라가 칭송한 '여호와의 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구원 또는 승리를 뜻한다. 공동번역성경은 이 표현을 '야훼의 승리', AV 'the righteous acts of the Lord', RSV 'the triumphs of the Lord', NAB 'the just deeds of the Lord', ZB 'die Heilstaten des Herrn'으로, E 'die rettende Taten des Herrn'이라고 각각 적절하게 번역하였다. '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행하신 모든 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삼상 ) 하였는데 '여호와의 의'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원수들의 위협 또는 억압으로부터 구출해 내신 구원의 행위이다. '여호와의 의'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개입하셔서 잘못된 현상을 바로 세우시는(to put things right) 행위이다. '여호와의 의'라는 표현에 사용된 ''()가 행동명사이며 '구원과 거의 동의어임은 다음과 같은 병행어법에서 잘 드러난다.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 라" ( 46:12,13).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 51:5,6).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56:1).   '여호와의 의'는 이스라엘 민족사의 각 시기에 따라 약간씩 다른 뉴앙스를 풍기게 되었다. 왕조 이전 시기에는 주변의 강대국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두원, 구출, 도우심, 승리 등을 뜻했으며( ; 삼상 ), 바빌론 유배 기간 중에 선포된 예언의 메시지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 생활로부터의 해방을 뜻했으며( 46:12,13; 45:13; 62;2; 51:10), 포로기 이후의 암담한 시기에는 종말론적 구원을 뜻했다( 51:5,6,8; 55:1; ). 왕조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사회 내부의 강자(强者)와 약자(弱者) 사이의 계급 갈등에 있어서는 약자와 가난한 자를 편드시는 하나님의 원조(援助)를 뜻했다( ; ,8; ; 31:1; 35:24,27; 36:10; 40:10; 50:6; 69:27; 71:2, 15,16, 19,24; 72:72:1,2; 88:12; 94:15).


이러한 경우에는 여호와를 의로우신 재판관으로 비유하여 묘사하기도 하였다. "1.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 9. 내 영혼이 여호화를 즐거워 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10.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 23.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24.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 27.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 28.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 하리이다" (35).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2.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 15.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16.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 19.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 24.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던 자가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다" ( 71).  


시편 기자들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의는 하나님과 인간 단독자 사이에 일어나는 구원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자와 약자 사이의 갈등에 개입하셔서 억울하게 빼앗긴 약자의 권리를 회복해주시는 구원 행위이다. 유배 생활에서 귀환한 후에 건설된 이스라엘 사회는 점점 더 제사장 중심의 종교 체제로 굳어져 갔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의에 매달리기보다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조건으로서의 개인적 의()를 이루는 데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하여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의에 도달하겠다는 이른바 공로주의 사상이 신약시대에 바리새파 사라들 가운데 팽배하게 되었다.


4. 히브리어에서 '' '의롭다 하다'라는 낱말은 원래 법정적(法廷的, forensic) 용어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 25:1). "옳은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하고 그른 사람에게 유죄를...."()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해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왕상 ). "(6.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겠노라"( ).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 그 의를 빼앗는 도다" ( ). "뇌물에 눈이 어두워 죄인을 옳다 하고 옳은 사람을 죄 있다 하는 자들아!"()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 ).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4.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며 악인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 82:3). maintain the right of the lowly and the destitute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 지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 50:8). "내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 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 ). "I must bear the indignation fo the Lord, because I have sinned against him, until he takes my side and executes judgment for me. He will bringme out to the light; I shall see his vindication."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삼하 ). "소송할 일이 있어 재판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앞에 와서 공정한 판결을 받을 것이오."() I would give them justice.(NRSV)


5.바울의 의인론에 사용되는 '의롭다 하다' 또는 '의롭게 하다'라는 능동형 동사와 '의롭다 함을 받다' 또는 '의롭게 되다'라는 수동형 동사이다. 능동형의 주어는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능동형의 목적어 또는 수동형의 주어로 등장하는 인간이 어떠한 부류인지를 올바로 파악해야만 의인론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누가? ( ,3); ; ,33; )   누구를?   '불 경건한 자' (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 시나니"   '이방 사람들' ( )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이방 사람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성경은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할례자와 무할례자' ( )   '예수를 믿는 자' ( )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자' ( )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 (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   '죄인'(?) (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6.의인론이 전개된 최초의 자리는 어디인가? 안디옥 사건( 2:11-14)과 의인론( 2:15-21) 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 2:14>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 3:6-14> 8: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 3:21-30>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 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한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4:1-12> 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 할례지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바꿔라

예배의 부흥, 말씀과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이 가는 곳마다 죽은 자가 일어나며 모든 묶임이 풀어지며 어둠이 물러 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바꾸라 이사야 40:27-31
          
이사야는 말합니다.
“너는 알지 못했느냐, 듣지 못했느냐, 하나님에 대한 너의 생각들이 얼마나 인간적인 줄 아느냐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왜 일까요?
-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믿음을 바꾸지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께 기도 드렸기 때문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이 말은 진짜 하나님을 보았는가, 진짜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는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 번째,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 땅 끝은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시고 곤비치 않으시며 그 분의 일을 이루는 분이십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여러 번 생각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아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육체적인, 인간적인, 종교적인, 철학적인 하나님을 빼 내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점을 넣으며,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십시요.

예배는 개인적인 영적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설교를 보자. 아모스, 이사야, 미가를 비롯해 여러 선지자의 설교는 현실과 무관하거나 공허하며 추상적인 게 아니다. 이들의 설교는 실제적인 삶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들의 설교는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어루만진다. 이들의 설교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학대하는지 지적한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라고 요구하신다

둘째, 기도를 보자. 기도는 삶의 모든 문제를 다룬다. 성경은 우리에게 왕과 나라와 정부와 세계의 정황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신문을 읽어야 하며 거기 실린 뉴스를 예배의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 헤드라인을 보면서, 세상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셋째, 세례를 보자. 세례 서약 가운데는 죄악을 버리겠다는 내용이 있다. 물론 이 서약은 자신의 삶에서 죄의 권세를 버리겠다는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이 서약은 놀라운 사회적 의도 내포한다. 이것은 교회가 연합된 몸으로서 공동의 악, 곧 사회에서 나타나는 악을 버린다는 것을의미한다.

넷째, 주의 만찬(성찬)을 보자. 주의 만찬에 참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라. 역사의 마지막에 펼쳐질 메시아 잔치에서는 모두가 주님의 식탁에 초대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잔치에서는 환영받을 것이다. 성만찬은 교회가 이러한 사람들을 바로 지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돌보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여기시듯이 우리도 세상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너무나도 실제적이다. 예배는 삶의 전 영역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는 세례와 성찬의 의미를 주의 깊게 살피기로 한다. 세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두 가지 성례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는 의식인 세례를 통해 사람들을 예배 공동체에 참여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독교 성례인 성찬은 그리스도의 가정을 유지하는 식탁이요 양식이며 영양이다. 세례와 성찬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예배와 세례
세례는 통과의례이다. 왜냐하면 세례는 삶의 한 길에서 다른 길로의 전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례는 옛 삶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한다. 신약에는 옛 삶과 새로운 삶을 비교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옛 삶의 특징을 열거하면서 이것들을육체의 일이라고 부른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21).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통과의례를 치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성령으로 행한다”(25). 바울은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성령의 열매를 열거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22,23). 세례 때, 우리는 이와 같은 새로운 양식의 삶에 열정을 쏟는다. 이러한 특징들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육체의 일(죄악된 본성)로 행하던 데서 벗어나 성령으로 행하는 데로 옮겨가는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3 5-14절에서 이러한 전환에 대한 또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옛 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을 말한다. 옛 사람을 벗는다는 것은 죄악된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을 벗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5-8).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 곧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와 사랑을 입는다는 뜻이다

세례에는 두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반응이다. 초대교회 수도사 마카리우스(Macarius)는 세례를 가리켜영혼의 갈망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숨겨진 임재라고 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유아세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성인세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의 말은세례에서 두 가지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은혜의 숨겨진 임재이며 둘째는 인간의 반응, 영혼의 갈망이다

세례에서 하나님의 행위는 새 마음을 가진 새사람을 창조하는 것이다. 세례에서 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물은 창조나 재창조와 관련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창조기사에서 땅은 물에서부터 형성되었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방주는 물 위에 안전하게 떠 있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물을 건너는 것은 통과의례이다.


이러한 성경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물이라는 상징과 관련된 신적인 측면인 하나님의 조행위를 볼 수 있게 한다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기꺼이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선택한다. 우리는 세례라는 씻음의 의식을 통과하기로 선택한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성도들에게여러분의 세례 가운데 사십시오라고 쓴 적이 있다

내가 열세 살 때 침례교회에서 침례를 받았을 때, 목사였던 나의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로버트, 그대는 마귀와 그의 모든 일을 버리겠느뇨?”  나는라고 대답했고, 그는 내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 루터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이제 나는 침례(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매일 나의 침례(세례)를 기억할 것이다. 나의 침례(세례) 가운데 산다는 것, 다시 말해 내가 침례(세례) 서약에서 했던 약속에 지속적으로 충실하며 산다는 것은 결혼생활에 충실하며 사는 것과 비슷하다.  


3
세기에 터툴리안(Tertullian)이라는 신학자는 한 무리의 이단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작은 물고기들을(물고기는 교회의 상징이었다) 죽이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물고기를 물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그의 말은 사람들이 세례서약에서 멀어지면, 다시 말해 악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약속을 멀리한다면, 사람들이 또다시죄악된 본성의 욕망을 만족시키거나 옛 사람을 입는다면이것은 신이 받은 세례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수년 전에 우리에게 일어났던 흐릿한 사건이 아니다. 세례는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실제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로버트 웨버-기독교 교양>


보고 듣고 깨닫기만 할뿐 ..... 1

보고 듣고 깨닫기만 할 뿐, 실제로 겨자씨 만한 믿음의 능력도 증거도 열매도 없는 순간의 감동과 교훈으로, 오히려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시킨 설교들의 특징  

1. 비유 - 비유란? 어려운 상황을 쉽게 알게 하기 위함에, 보다 더 알기 쉽도록 해석하기 위함에 비유다 그러나 오늘날 말씀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하고 변질시킨 수많은 교화와 목사들의 이단적인 설교들 자체가 하나같이 이 비유라는 명분 아래 자신들의 입맛대로 낱말을 비유하여 가르치고 있다

비유란? 어떠한 상황을 쉽게 설명하고자 함에 존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을, 낱말이나 숫자를 비유하여 해석한다는 그 자체가, 비유라는 의미는 사실 존재될 수 없으며낱말이 담고있는 고유의 뜻과 의미를 무시해 버리는 결과로오히려 말씀의 본질과 동떨어진 의미와 뜻으로 얼마든지 왜곡하고 훼손하고 변질시킬 수 있는 억지된 비유가, 오늘날 기독교의 수많은 목사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기에, 온갖 각양각색에 주장에 주장들이 변질에 변질들이이단에 이단들이 온 땅에 누룩처럼 퍼져 갈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다.

오늘날 수많은 종파와 교단이 생겨나고, 이단에 이단들이 생겨난 근본 이유가 바로 자신들의 입맛대로 난 낱말 풀이에 따른 비유를 앞세운 연고에서 발생된 것이다 오늘날 신흥 종교인 신천지 또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내세운 것들이 하나같이 낱말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낱말의 원 뜻을 무시해 버린, 비유에서 비롯된 거짓된 해석과 풀이를 내세워, 수많은 성도들을 미혹하게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머리와 지능을 앞세운 낱말과 숫자를 비유하거나 해석하여 알고 깨닫도록 인도하는 사람의 방식을 취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러한 비유는, 인본주의적인 사고와 판단에서 만들어진, 세상 학문과 상식을 바탕으로 한 목사들에 사람의 머리와 지능에서 비롯된 이론을, 기준화 한 연고다.

낱말을 비유한다면 그 낱말의 뜻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가치가 있으랴! 이에 글쓴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비유하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바뀌고, 그 본연의 뜻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라면 그 풀이와 해석은 천태만상이 아니겠는가

이에 낱말의 뜻이 보는 사람에 따라 각각이 다르다면,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낱말의 가치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성경의 말씀은 비유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밖에 없는 연고로, 비유하여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성경 말씀의 본질 대신, 끊임없이 변질되고 왜곡된 또 다른 성경을 만들어내는 결과와, 사람의 주장이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말씀보다 높아지고, 그해석이 오히려 말씀보다 중요한 중심을 차지하는 결과만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이단에 이단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배경과 원인을 제공하게 된 것이 바로 비유다.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처음 믿음(첫 사랑)도 없는 껍질에 불과한 직분과 겨자씨 만한 믿음의 능력도 없는 까닭은, 바로 말씀의 본질을 좇아난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니라, 말씀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하고 변질시킨 비유와 해석과 풀이를 좇는 연고로 열매와 증거가 없는 믿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온 땅에 가장 무서운 사단과 마귀와 이단과 누룩은 바로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시킨 사람의 비유와 해석과 풀이입니다오늘날 수많은 종파와 교단들이 끊임없이 갈라지고 생겨나고 이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근본 이유도 바로 낱말이나 숫자마저도 비유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멋대로 해석한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비밀을 낱말 풀이에 숨겨 놓으셨다면  낱말을 풀이 할 머리와 지능이 뛰어나고 영리한 자만이 가르치고, 구원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지능과 머리를 낮추시기 위함에, 오히려 미련하고 어리석은 듯한 사람을 들어 쓰시나니, 이는 사람의 지능과 머리를 앞세운 지식과 상식을 멸시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아난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좇아난 성결한 마음으로부터 얻게 하심에 비밀과 진리입니다.  

인간의 머리와 지능으로 보고 듣고 공부하고 연구하여 얻는 이론과 상식과 학문이 아니라, 성결한마음 가운데서 피어 오르는 사랑의 능력과 사랑의 지혜와 사랑의 비밀을 말함이니, 이에 관한 뜻은 인간의 머리와 상식으로 절대로 이해될 수도, 이해가 되지도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됨으로 얻게 되는 지혜와 비밀이나, 여러분을 가르친 목사님들은결코 사람의 머리와 지능으로 배우고 익힌 학문과 상식을 바탕으로 한 연고로이해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과 지혜입니다 이에 이단에 이단 들만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밖에 없기에, 이 땅에 가장 많은 이단을 배출한 종교 중에 하나가 된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이에 가장 큰 문제점이 세상학문에서 출발한 인본주의적 사고와 판단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비밀과 능력의 지혜를 이제부터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으로 온 저로 부터, 진정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이 무엇인지를 보고 듣고 느끼고 얻게 되는 기회와 계기를 얻어, 진정 무엇이 모든 것을 통달하는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와 비밀인지를 명명백백히 비교 해 보는 거울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대부분의 비유를 앞세운 자들은 하나같이 세상과 더불어 물질과 겸하여 하나님을 섬기려는 변질과 이단을, 사상과 교리와 설교를 만들어 행복학과 성공학을 바탕으로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과 더불어 물질과 겸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함으로써, 오직 세상에 속한 썩어 없어질 자신의 바램과 이상을 좇아 항상 이해 관계에 따라 죄만 반복하는 죄인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인도치 못하는 교훈과 감동들이거나 온갖 이론과 학문과 상식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와 거짓과 억지 간증만 앞세운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말에 따라 하나님을 믿으면, 금방이라도 모든 바램과 이상과 행복이 다 이루어질 것처럼, 성도들의 마음만 부풀게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평강이란 거짓된 설교와 교훈에 속아, 항상 뒤돌아서면 사라지고 마는 순간의 감동과 순간의 위안을 좇는 여러분의 믿음 속에 지금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세상살이에 점점 지치고 찌들어 가는 곤고한 마음입니까? 아니면 점점 갈핍한 마음만 깊어가는 목마름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선한 양심마저도 죽이는 자긍과 의욕과 확신을 마치 하나님 앞에 열정인 양 혹은 사명인 양 혹은 달린트인 양 여기는 교만이 주관하는 망령된 믿음입니까?

이해관계에 따라 평생을 죄만 반복하는 죄인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라 하심은 거듭나지 못한 채 죄의 수렁에서 반복하는 죄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십자가를 매고 좇지 않는, 십자가의 사랑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적이요 원수됨일 뿐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죄만 반복하는 하나마나한 회개(반성)만 할 뿐, 죄만 반복하는 어리석은 믿음들에게 존재되는 죄사함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세상을 좇아 교회만 다니는 교인이지, 결코 십자가의 사랑을 좇아난 거듭난 죄사함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평생을 다람쥐가 제자리에서 쳇바퀴 도는 식에 불과한 제자리 걸음의 믿음이요 첫 사랑(처음 믿음)도 없는 믿음인지라, 항상 죄 짓고 후회함만 반복하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평생을 자신만의 욕심된 축복만을 위한 망령된 기도만 외치는 어리석은 믿음과 미련한 신앙입니다.

 2. 낱말 풀이 - 낱말이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서로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낱말이 풀이되고 해석된다면, 낱말의 가치는 이 해석과 풀이만 하는 특정한 자들에게만 소용될 뿐,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알고 깨닫는, 의사를 전달하기에 합당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특정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극한될 뿐더러, 이 낱말을 풀이하고 해석하는 사람에따라 말씀의 본질과 진의가 항상 각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풀이와 해석 또한 사람에 따라 제 각각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어원이니, 헬라어 어원이니, 혹은 그리스어 어원이니, 혹은 한자 어원이니, 확실치도 않는 사람의 주장에서 비롯된 이론과 학문이 바탕으로 하는 가르침과 배움이기에 대부분의 성도들이 람의 머리와 지능으로 배우고 듣는 이론과 공부를 마치 그리스도의 말씀과 진리인 양 여기고 가르치는 까닭에, 오늘날 기독교는 각양각색의 주장들이 난무하는 온갖 이단들을 끊임없이 배출하는, 이 지구상에 가장 많은 이단을 배출한 종교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만들어낸 이단의 수효는 상상을 불허하고, 온 땅에 참인 양 독버섯처럼 퍼져있습니다 기독교가 끊임없이 종파에 종파로 갈리고 이단에 이단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근본 이유가 바로 인본주의적 사고인 사람의 머리와 지능이 중심한 사람의 해석과 풀이로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시킨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말과 이론을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가르침이 아니라, 신령한 은사와 진리와 지혜에 따라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의 은사와 진리에 따라 얻어지는 열매에서 비롯된 진리와 말씀입니다

이는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얻는 사랑의 지혜요 성결한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로 가르치고 배우는 말씀의 지혜는 우리의 양심을 세우는 참 빛이요 모든 어둠과 죄를 드러내 돌이키도록 인도하는 빛의 거울입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어둠과 죄를 밝히는 참 빛의 거울을 가지고 온 말씀의 사자입니다 저는 어둠과죄를 밝히는 빛의 말씀을 이 땅에 증거하러 온 참 증인입니다. 저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에, 태초 전부터 정하여 놓으신 바된 말씀으로 온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인간의 학문과 상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머리와 지능을 앞세운 풀이와 해석과 설교의 한계는 이미 심판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온갖 변질과 이단들과 열매 없는 가라지들만 만든 결과로, 이미 빛과 소금처럼 본과 귀감은 커녕 십자가의 사랑은 도덕적 윤리적 가치에 불과한 생색과 위선으로 변질되어 손가락질과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이름은 버러지만도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인즉, 이에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이 십자가의 사랑과 대적이 되었고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되었나니, 자신의 믿음이 십자가의 사랑을 오히려 욕되게 하고,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되는 믿음인 줄을 모르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교만한 성도들이 태반입니다.

자신의 의욕과 자긍과 확신과 다짐이 오히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선한 양심의 잣대를 죽이는 대적임을 알지 못하는 소경들이 가르치고 소경들이 배우는 세상입니다 이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이니, 둘다 다 평생을 이해관계에 따라 죄인의 길에서 죄만 반복하다 죽을 소경된 믿음들입니다.

말씀의 본질은 인간의 머리와 지능으로 해석하고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선한 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입니다. 말씀의 본질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결코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열매로 맺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깨달음은 잡교들의 깨달음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말씀의 본질에 따른 열매는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됨의 영광과 증거가 함께하는, 풍성한 연보와 넘치는 감사와 기쁨 속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느끼고 깨달아도 열매를 얻지못한 자는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자들보다 못한그 죄가 더 중하고 큰 자들일 뿐입니다. 이에 죄사함을 받았다는 양심들이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죄가 이방 국가보다 더 큼을 알지 못하느뇨! 이에 주께서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을 이방국을 들어치셨나니하나님의 모든 사도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사도를 죽인 자들이 누구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믿음와 목자와 성도들이 아니랴! 오호라! 믿는다고 하는 너희여! 너희는 태초 전부터 하나님 앞에 대적이요 원수됨이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만드신 근본 이유는? 오직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며 모든 근본의 근본이신 온전하고 완전하심에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됨으로 만들고자 하심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어 주시고자 하심에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는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지닌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어 주시고자 하심에 십자가의 사랑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합당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에 합당한 자격과 인치입니다.

보고 듣고 깨닫기만 할뿐 ..... 2

3.축복과 감동 -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못하였느니라( 1216~17)

회개를 이루었다고 여기는 망령된 자들이여! 너희가 정녕 거듭난 회개를 이루었다면 어떻게, 이해관계에 따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교만과 거짓의 죄를 반복하는 죄인의 길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마나한 반성만 붙들고 허우적거리느뇨!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가증한 너희들이여! 너희의 십자가를 매고 십자가의 사랑을 좇아 본과 귀감으로 온 땅에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고 이 참 복음을 전파하였느냐! 최고의 법과 최고의 강령을 좇아난 십자가의 사랑이 없는 연고로, 평생을 이해관계에 따라 죄만 반복하는 죄인으로 너희가 어떻게 사랑의 나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자신들의 구원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세상 바램과 이상과 축복으로 바꾼 에서와 같은 믿음이 아닌지 이제는 냉정하게 따지고 돌이켜 보아야 할 마지막 기회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아 십자가의 사랑을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맞습니까? 아니면 그저 교회만 다니는, 말씀과는 무관한 교인입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 215~17)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43~4)
 
여러분!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지하여 믿음이라고 여기십니까에서와 같이 자신의 썩어 없어질 세상에 속한 족할 수 없는 행복과 축복과 이상과 바램을 위해서, 항상 이해관계에 따라 죄만 반복한 채 거듭날 수 없는 하나마한 회개와 반성만 앞세울 뿐, 항상 죄만 반복하는 믿음으로 인하여 거듭나지 못한 에서와 같이 항상 죄만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썩어 없어질 세상에 속한 축복이나 바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 여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장 10~14)

이해관계에 따라 항상 죄가 반복한 연고로, 죄가 끊어지지 않은 채 항상 하나마나한 회개만 반복하기에, 오히려 죄를 합리화하는 자신의 주장과, 교만이 만들어낸 거짓과 억지가 말씀화 하나화된 믿음이 아닌지 이제는 명백히 분별하는 기회와 계기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죄가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연고로, 거듭날 수 없는데 그리스도의 회개를 이룬 양, 성령을 받았다는 억지와 거짓이 누룩처럼 온 땅에 퍼져 있는 것이 참담한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회개를 이루어 온전히 구원으로 이르기에 합당한 십자가의 사랑을 좇아난 신령한 하나님의 은사와 열매를 좇아난 믿음에서 빗나간 믿음이 아닌지 이제는 자신의 주장과 생각과 판단이 진정 정확하고 참된 이치와 믿음인지를 정말로 냉정하게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 416~1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 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47~ 11)
  
평생을 자신들의 욕심된 바램과 축복을 좇아 죄만 범하는 자들이 어떻게 십자가의 사랑을 지닌 마음을 얻어, 죄 사함과 구원을 얻을 수 있으랴! 주께서도 자신처럼 십자가를 매고 십자가의 사랑을 행하고 따르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십자가의 교훈이요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더불어 물질과 겸하여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는 십자가의 사랑 안에 속할 수 없고, 오직 이해관계에 따라 죄만 더해가는 죄인의 길에서 돌이키지 못한 자요 거듭나지 못한 연고로 죄만 반복하는 죄의 종일 뿐입니다. 썩어 없어질 자신들의 성공과 행복과 축복을 위해 간구하는 믿음속에는 사랑이 없는 연고로, 사랑 안에서 연합된 그리스도의 죄 사함도 믿음도 지혜도 은사도 성령도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축복과 행복을 위한 감동은 결단코 하나님의 감동과 교훈과 은혜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더욱 세상에 속한 썩어 없어질 세상 것을 바라도록 인도하여, 더욱 이해관계에 따라 죄만 더욱 쌓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목자인 양 가장한 사단의 영을 지닌 목사들이요 그리스도의 목자인 양 가장한 말과 이론의 신이요 세상 것으로 유혹케 하는 미혹의 신이요 물질을 구하도록 인도하는 물질의 신이 주관하는 소경의 목사들입니다.

달콤한 듯한 세상의 유혹으로 이끌어 더욱 세상에 속한 바램과 행복과 축복을 좇도록 유도하기 위한 변질된 이단의 설교와 말에 속아, 평생을 제자리 걸음만 반복하는 절대로 거듭날 수도 없는, 수 천 수 백번을 반복하는 하나마나한 회개(반성)만 붙들고 있는 탓에, 점점 죄에 길들여지거나 죄를 경히 여기거나, 오히려 죄에 대하여 담대해져가는 교만이 가르치는 교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발생되는 죄인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인도하지 못한 감동과 교훈과 눈물은 일축하여 하나님의 은혜도 교훈도 아닌, 도덕적 윤리적 가치의 율법주의자들이요 외식한 자들이요 세상과 더불어 물질과 겸하여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들의 변질과 누룩일 뿐입니다.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대적이 되고 십자가의 사랑과 원수가 되는 세상에 속한 삶을 합리화 하기 위함에 만들어진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의 교훈인 고진 감래(고생과 노력 끝에 열매와 결실을 맺는다는 교훈)를 앞세워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명분 아래, 금방이라도 성도들의 모든 바램과 이상과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부풀리게 하는 이들의 위로와 희망은 항상 뒤돌아 서면 사라지고 마는 누룩에 부풀린 밀가룩 반죽과 같은 감동과 교훈이다.

구원으로 이르기에 합당한 사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바램과 행복과 이상과 성공을 위한 만사 형통이 이들의 기도요 신앙과 믿음을 갖는 근본 이유다 이에 세상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자신들의 욕심된 이상과 바램과 욕구를 좇기 위함에 존재되는 믿음이다 이에 이해관계에 따라 죽을 때까지 죄가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죄가 멈출 수 있는 거듭남도 회개도 할 수 없는 망된 믿음과 기도만 지닌 자들의 감동과 교훈은 망령된 에서와 같이 오직 자신만의 썩어 없어질 축복과 행복을 위해 영원한 영광을 팔아 버린 눈물과 감동일 뿐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5:19~20)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 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아니하였어도 예언 하였은 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 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2317~22)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 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 하였음이니라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21~9)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진리와 말씀과 지혜와 비밀은 결코 인간의 머리나 지능을 앞세운 해석과 풀이와 낱말과 비유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이에 인본주의적 사고와 설교가 여러분을 말씀에 입각한 그리스도의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한 근본 이유입니다.

모세의 장막 다윗의 장막,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에 대한 이해

1.모세의 장막
1)
위치: 기브온 산
-
처음에는 법궤(하나님의 임재를 상징)가 있었으나 블레셋에 빼앗김 

2)특징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음
-
형식과 의식이 절대적임 : 제사장과 레위족이 율법대로만 제사함
-
즉흥적인 것임 없음
-
하나님의 영광이 없음(제한적임)
-
그러나 "질서"가 있음
-
하나님의 제사가 계속 드려짐

모세의 장막은 기존교회의 제한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를 예로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보다는 형식과 의식에 맞춰져 있으며 형식과 의식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데로 즉흥적으로 표현해 드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세의 장막에는 질서가 있었고 "말씀(율법)대로" 모든 것들이 드려졌다. 예를 들면 "빠른곡 + 느린곡 => 지성소" 라는 공식이 바로 그것이다.

2. 다윗의 장막
1)
위치: 시온산
2)
특징들
-
형식과 의식이 없음
-
형식이 없는 대신 즉흥적임
-
즉흥적인 고백과 춤, 여호와의 노래(Song of The Lord), 새노래로 가득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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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이 넘침
-
하나님의 법궤(임재의 상징)를 블레셋에서 다시 가져옴
-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없음
-
지성소 역시 없었음
-
언제든지 들어갈수 있었음
-
하나님의 열성이 넘침
-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영광은 없었음

다윗의 장막의(계시의) 회복은 1900년대 초에 오순절 부흥이 일어남으로 활성화 되어지다가 1960년대에 믿음 운동(믿음에 관한 메세지와 부요함과 건강, 믿음의 고백등의 메세지가 중심적이었던 부흥운동중 하나. 주요인물로는 케네스 해긴, 로버츠 슐러등이었었으며 5중직임중에 복음전하는자의 직임이 교회안에 회복되고 확립되었다.) 때에 비로서 적극적으로 교회안에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 교회적으로 다윗의 장막의 회복에 대한 이해함이 풀리기 시작한것은 5년 남짓이다. 이미 40년전에 전세계적을 회복된 운동이 40년이 지나서야 한국안에서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된자가 먼저되리라. 다윗의 장막은 예언적이고 즉흥적인 새노래들과 예언들로 넘쳤다. 또한 즉흥적인 충만함과 형식과 질서에서 탈피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었다. 다윗의 장막에는 "어떻게 해서 어떻게 하면 지성소다" 라는 공식(절차, 예식)이 없었다. 휘장, 성소, 지성소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다.

다윗의 장막에서 하나님께 대한 친밀함이 회복 된것은 정말 큰 축복이었다. 그전까지 하나님은 무서우시며 감히 범인은 접할 수 없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자는 죽었다. 다윗의 장막에서는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친밀함이 있다. 그러나 이 친밀함도 많은 경우에 "인본주의적"으로 잘못 이해되어진 경우가 많았다. 하나님과의 친구됨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하나님과의 친구됨은 정말 놀라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한 계시를 풀어놔준다. 그러나 이 하나님과의 친구됨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구되었다고 하는것을 "하나님을 나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동등됨으로 삼음"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주체는 하나님 이시다. 내가 하나님을 친구(친밀함의 대상으로)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구될수 있는 자격이 없는 나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친구로 삼아 "주신"것이다. 친밀함을 누리되 친밀함을 오해하지 말자. 그러나 아직 다윗의 장막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없었다.

3. 솔로몬의 성전
특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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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충만함이 넘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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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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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원한 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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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성전에서는 책임감과 성실성이 필요하다.그리고 나서 즉흥적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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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모세의 장막, 다윗의 장막)에 대한 조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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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이 하나님의 규격대로 지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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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력과 통치력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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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으로 자아의 제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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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충만한 목적에 들러오면 오직 우리의 마음에는 두 돌판(율법)만 있으면 된다. 바로 육이 아닌 심비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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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안에는 두돌판 말고도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었는데 싹난 지팡이=>소명과, 만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기적의 공급을 뜻함.

솔로몬의 성전의 특징을 자세히 보면 알수 있듯이 솔로몬의 성전은 다윗의 장막과 모세의 장막이 합쳐진 곳이었고 이 두장막이 합쳐진 곳에 하나님은 영광의 불을 내리신다. 그러나 이두가지의 조화가 쉬운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장막(기존 교회)은 나름대로 너무 의식과 예식쪽으로만 치우쳐서 다윗의 장막(은사적인 교회)의 즉흥성을 "경거망동이다.질서가 없다"고 비판할수 있고 다윗의 장막은 모세의 장막의 질서와 예식의 확립을 "(Spirit)은 없이 형식만 남은 빈 껍데기"라고 비판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의 장막은 다윗의 장막이 가지지못한 책임감과 성실성(혹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사적인 사람들이 사기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아왔는가? 다윗의 장막은 자유함과 즉흥적이며 친밀함이 있을수 잇지만 반대로 모세의 장막의 책임감과 성실성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이 두가지, 모세의 장막의 책임감과 성실성, 인격과 예식(하나님의 방법)과 다윗의 장막의 즉흥성과 자유함 친밀함이 넘침이 합쳐진 곳이 바로 솔로몬의 성전이었다.

솔로몬의 성전의 봉헌식때에 잡은 수를 셀 수 없는 제물들을 보라. 아마 솔로몬 성전은 여호와의 율법대로 도축되는 수를 셀수 없는 제물들의 비명과 피의 강을 이루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곳에는 노래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각종 악기들을 총동원하며 여호와께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새노래를 주님께 올려드렸다.

그결과는 하나님의 불과 영광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무렇게나 나타나는 것이 절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철저한 책임감과 성실성, 순복함과 의로움과 정결함이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책임감은 순수성을 가져다 주며 친밀감은 형식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하나님께 대한 친밀함이 클수록 예의 범절을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