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설교를 보자. 아모스, 이사야, 미가를 비롯해 여러 선지자의 설교는 현실과 무관하거나 공허하며 추상적인 게 아니다. 이들의 설교는 실제적인 삶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들의 설교는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어루만진다. 이들의 설교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학대하는지 지적한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라고 요구하신다.
둘째, 기도를 보자. 기도는 삶의 모든 문제를 다룬다. 성경은 우리에게 왕과 나라와 정부와 세계의 정황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신문을 읽어야 하며 거기 실린 뉴스를 예배의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 헤드라인을 보면서, 세상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셋째, 세례를 보자. 세례 서약 가운데는 죄악을 버리겠다는 내용이 있다. 물론 이 서약은 자신의 삶에서 죄의 권세를 버리겠다는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이 서약은 놀라운 사회적 의도 내포한다. 이것은 교회가 연합된 몸으로서 공동의 악, 곧 사회에서 나타나는 악을 버린다는 것을의미한다.
넷째, 주의 만찬(성찬)을 보자. 주의 만찬에 참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라. 역사의 마지막에 펼쳐질 메시아 잔치에서는 모두가 주님의 식탁에 초대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잔치에서는 환영받을 것이다. 성만찬은 교회가 이러한 사람들을 바로 지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돌보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여기시듯이 우리도 세상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너무나도 실제적이다. 예배는 삶의 전 영역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는 세례와 성찬의 의미를 주의 깊게 살피기로 한다. 세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두 가지 성례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는 의식인 세례를 통해 사람들을 예배 공동체에 참여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독교 성례인 성찬은 그리스도의 가정을 유지하는 식탁이요 양식이며 영양이다. 세례와 성찬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예배와 세례
세례는 통과의례이다. 왜냐하면 세례는 삶의 한 길에서 다른 길로의 전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례는 옛 삶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한다. 신약에는 옛 삶과 새로운 삶을 비교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옛 삶의 특징을 열거하면서 이것들을 ‘육체의 일’이라고 부른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21절).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통과의례를 치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성령으로 행한다”(25절). 바울은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성령의 열매를 열거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22,23절). 세례 때, 우리는 이와 같은 새로운 양식의 삶에 열정을 쏟는다. 이러한 특징들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육체의 일(죄악된 본성)로 행하던 데서 벗어나 성령으로 행하는 데로 옮겨가는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14절에서 이러한 전환에 대한 또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옛 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을 말한다. 옛 사람을 벗는다는 것은 죄악된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을 벗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5-8절).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 곧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와 사랑을 입는다는 뜻이다.
세례에는 두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반응이다. 초대교회 수도사 마카리우스(Macarius)는 세례를 가리켜 “영혼의 갈망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숨겨진 임재”라고 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유아세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성인세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의 말은세례에서 두 가지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의 은혜의 숨겨진 임재”이며 둘째는 인간의 반응, 곧 “영혼의 갈망”이다.
세례에서 하나님의 행위는 새 마음을 가진 새사람을 창조하는 것이다. 세례에서 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물은 창조나 재창조와 관련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창조기사에서 땅은 물에서부터 형성되었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방주는 물 위에 안전하게 떠 있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물을 건너는 것은 통과의례이다.
둘째, 기도를 보자. 기도는 삶의 모든 문제를 다룬다. 성경은 우리에게 왕과 나라와 정부와 세계의 정황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신문을 읽어야 하며 거기 실린 뉴스를 예배의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 헤드라인을 보면서, 세상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셋째, 세례를 보자. 세례 서약 가운데는 죄악을 버리겠다는 내용이 있다. 물론 이 서약은 자신의 삶에서 죄의 권세를 버리겠다는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이 서약은 놀라운 사회적 의도 내포한다. 이것은 교회가 연합된 몸으로서 공동의 악, 곧 사회에서 나타나는 악을 버린다는 것을의미한다.
넷째, 주의 만찬(성찬)을 보자. 주의 만찬에 참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라. 역사의 마지막에 펼쳐질 메시아 잔치에서는 모두가 주님의 식탁에 초대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잔치에서는 환영받을 것이다. 성만찬은 교회가 이러한 사람들을 바로 지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돌보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여기시듯이 우리도 세상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너무나도 실제적이다. 예배는 삶의 전 영역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는 세례와 성찬의 의미를 주의 깊게 살피기로 한다. 세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두 가지 성례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는 의식인 세례를 통해 사람들을 예배 공동체에 참여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독교 성례인 성찬은 그리스도의 가정을 유지하는 식탁이요 양식이며 영양이다. 세례와 성찬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예배와 세례
세례는 통과의례이다. 왜냐하면 세례는 삶의 한 길에서 다른 길로의 전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례는 옛 삶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한다. 신약에는 옛 삶과 새로운 삶을 비교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옛 삶의 특징을 열거하면서 이것들을 ‘육체의 일’이라고 부른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21절).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통과의례를 치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성령으로 행한다”(25절). 바울은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성령의 열매를 열거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22,23절). 세례 때, 우리는 이와 같은 새로운 양식의 삶에 열정을 쏟는다. 이러한 특징들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육체의 일(죄악된 본성)로 행하던 데서 벗어나 성령으로 행하는 데로 옮겨가는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14절에서 이러한 전환에 대한 또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옛 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을 말한다. 옛 사람을 벗는다는 것은 죄악된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을 벗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5-8절).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 곧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와 사랑을 입는다는 뜻이다.
세례에는 두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반응이다. 초대교회 수도사 마카리우스(Macarius)는 세례를 가리켜 “영혼의 갈망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숨겨진 임재”라고 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유아세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성인세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의 말은세례에서 두 가지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의 은혜의 숨겨진 임재”이며 둘째는 인간의 반응, 곧 “영혼의 갈망”이다.
세례에서 하나님의 행위는 새 마음을 가진 새사람을 창조하는 것이다. 세례에서 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물은 창조나 재창조와 관련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창조기사에서 땅은 물에서부터 형성되었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방주는 물 위에 안전하게 떠 있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물을 건너는 것은 통과의례이다.
이러한 성경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물이라는 상징과 관련된 신적인 측면인 하나님의 조행위를 볼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기꺼이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선택한다. 우리는 세례라는 씻음의 의식을 통과하기로 선택한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성도들에게 “여러분의 세례 가운데 사십시오”라고 쓴 적이 있다.
내가 열세 살 때 침례교회에서 침례를 받았을 때, 목사였던 나의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로버트, 그대는 마귀와 그의 모든 일을 버리겠느뇨?” 나는 “네”라고 대답했고, 그는 내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 루터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이제 나는 침례(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매일 나의 침례(세례)를 기억할 것이다. 나의 침례(세례) 가운데 산다는 것, 다시 말해 내가 침례(세례) 서약에서 했던 약속에 지속적으로 충실하며 산다는 것은 결혼생활에 충실하며 사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열세 살 때 침례교회에서 침례를 받았을 때, 목사였던 나의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로버트, 그대는 마귀와 그의 모든 일을 버리겠느뇨?” 나는 “네”라고 대답했고, 그는 내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 루터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이제 나는 침례(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매일 나의 침례(세례)를 기억할 것이다. 나의 침례(세례) 가운데 산다는 것, 다시 말해 내가 침례(세례) 서약에서 했던 약속에 지속적으로 충실하며 산다는 것은 결혼생활에 충실하며 사는 것과 비슷하다.
3세기에 터툴리안(Tertullian)이라는 신학자는 한 무리의 이단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작은 물고기들을(물고기는 교회의 상징이었다) 죽이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물고기를 물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그의 말은 사람들이 세례서약에서 멀어지면, 다시 말해 악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약속을 멀리한다면, 사람들이 또다시 “죄악된 본성의 욕망을 만족시키거나 옛 사람을 입는다면” 이것은 신이 받은 세례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수년 전에 우리에게 일어났던 흐릿한 사건이 아니다. 세례는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실제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로버트 웨버-기독교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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