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2011

가만히 있어 알지어다 (BE STILL AND KNOW)

전쟁을 그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에 이어 성경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 46:10)라고 말씀합니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는 raphah 로서 중지하다, 내버려두다, 약해지다, 연약해지다, 라는 의미입니다. 어근 rapha 에서 나왔고 고치다, 의사의 손에 의해 완전히 고쳐지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통틀어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분은 전쟁을 그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일을 마치실 때 까지 우리는 자기 의에서 나온 모든 노력을 그치고,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고 우리의 약점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우리의 미래와 회복을 우리의 위대한 의사이신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자여러분, 당신의 내적 갈등이 당신을 갈가리 찢어놓고 있습니까? 당신은 사탄의 일격을 받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당신을 상하거나 파괴할 수 없습니다. 아마 십중팔구 당신이 하나님을 더욱 훌륭히 섬기는 준비로 심도 깊은 십자가의 계시를 위해 벗겨지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당신은 오순절로 가기 전 모든 것이 벗겨진 베드로와 같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의 언덕을 밑바닥에 떨어진 채 목표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한 때 물위를 걸었고 기적적으로 많은 무리를 먹이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고, 축복받고, 뛰어나고, 쓸모 있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다른 누구보다도 주님을 실망시키는 죄를 범했고 그 후 그의 구원과 사역을 잃어버렸다고 통곡하며 슬퍼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는 거듭 되뇌어 물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험을 받을 때 왜 아무런 능력과 힘이 없었을까? 왜 원수를 대적하기 위해 비축된 도덕이나 의지력이 없었을까? 왜 하필 내가 실족한 사람이 되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그토록 끔찍한 일을 그의 주님께 행할 수 있었을까? 위기의 때에 아무런 힘도 없는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베드로의 실패를 야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유익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속사람 안에 깊이 뿌리박은 것을 드러내기 위해 허락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을 벗기는 일의 일부였습니다.

오직 실패만이 자존심과 자만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실패가 베드로를 깨뜨려 자신의 순결과 의를 포함하여 모든 일에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해야할 필요를 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십자가 그늘 안에서 우리는 가장 큰 유혹과 실패를 견디고 돌파하여 부활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THE LORD IS THY KEEPER)

구약 열왕기하 6장의 스릴 넘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킴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묘사해줍니다.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선전포고하고 대군을 이끌고 행진해 왔습니다. 군대가 행진해 나갈 때 그는 종종 그의 전쟁 참모들을 사저로 불러 다음 날의 전략을 짰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사가 적의 군대의 모든 동향을 자세히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사의 경고 덕에 여러 번 패전을 모면했습니다.

벤하닷은 진노하여 자신의 신복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우리 계획을 이스라엘 왕에게 일러주는 자가 있도다. 이 반역자가 누구냐?” 그 신복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주의 진영이나 궁정에는 반역자가 없나이다. 우리는 모두 진정으로 충성된 자들이니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열왕기하 6:12).

벤하닷은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해 말과 병거와 군사의 무리를 급파했습니다. “도단으로 가서 그를 나에게 데려오라” 그가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기습하여 늙은 선지자를 데려올 계획으로 밤에 가서 성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사환은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가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15절) 겁에 질려 엘리사에게 뛰어가 외쳤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는 포위당했습니다.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엘리사는 자신에 찬 미소를 띤채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열왕기하 6:16-17).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엘리사도 위기의 한가운데 서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천만 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3:6)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라”(시편 27:3)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시편 55:18)

나의 기도는 엘리사의 기도와 같습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만군의 여호와의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한 산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마음이 지혜로운 자(출 35:10, 시 78:72)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출 35:10)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KBS 주말저녁 드라마 근초고왕이 드디어 백제에 들어가 어라하가 되고 모두가 기다리던 내각 개편 조서가 남당에서 발표됩니다. 일등공신에 자기가 되지 않을까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초고왕의 시대에 이르러 2개의 좌평제도가 6두 제도로 바뀌게 되며 이는 2개의 좌평에 실어지는 세력에 대한 힘의 균형을 6개로 분산하여 그만큼 왕권강화에 중점을 둔 사항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진승, 두고, 위비랑, 복후검, 파윤, 아즈카이, 해건이 임명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딱 두 명만 무릎을 꿇고 감사하여 어쩔 줄 모릅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직분을 받게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고마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부르심과 구원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아무 육체도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출애굽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입니다(출 5:1, 5:3, 8). 여러분! 잘살기 위해서만 기도하면 안됩니다. 예배하기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예배 관을 바르게 확립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1-13)
불법이 성한 시대입니다. 사탄이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온갖 더러운 것,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도록 방해하는 죄들이 모두 사탄의 거짓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사탄이 다 심어놨습니다. 언제 우리의 마음속에 뿌려졌는지 악한 것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내 자신과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사탄의 거짓으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결국 마지막 싸움은 참과 거짓이며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탄이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라고 합니다 사탄은 싸움을 붙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길로 가라고 합니다. 사탄은 넓은 길을 놔두고 왜 좁은 길로 가냐고 합니다. 사탄은 세상의 축복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창녀같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까지 손을 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벼이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구원을 싸구려로 취급하여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우습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욥에게 고난이 닥쳐오자 욥의 아내가 한탄합니다. 이 한탄에 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 2:10)고 합니다. 머리 숙여지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볼 때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복만 받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화를 좀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그렇게 원망하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의 신앙은 복만 받겠다는 전제가 없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은 이런 마음입니다. 이런 성전입니다.

출애굽 때 광야에 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처소를 만듭니다. 장막을 만드는데 참여하게 될 사람들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마음)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출 35:10)라고 합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지혜는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둘째,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출 35:21)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출 35:26)라고 했습니다.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동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가슴일 떨리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를 해도 화장실 청소를 해도 감동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인격과 행위의 중심이며 '보물'은 궁극적 관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보물'을 '성전'으로 바꾸면 간단해 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성전이 되는 것이며 우리 마음은 오직 성전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출 35:29)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성전 짓는데 참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녀 누구나입니다. 중동지방에서 여자를 무시하던 고대 풍습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입니다. 마음이 있는 자는 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성전을 지으시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자 분들 이 성경구절은 외워 두세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는 사회가 바로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인도 카스트 못지 않은 신분계급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양반들은 상놈을 억눌렀고 상놈은 그 지배 아래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백정은 상놈의 대명사였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옷이나 갖신도 신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반이 지나갈 때에는 길을 비켜서야 했으며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가듯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습니다. 만일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중형에 처해졌습니다.

평양 신학교를 세운 마펫 선교사가 상놈 출신을 받아들여 교육을 시켰는데 그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박씨는 불행히도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마펫 선교사는 왕의 시의였던 애비슨을 데리고 와서 치료해주었습니다. 백정으로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박씨의 온 가족이 개종을 하였습니다.

박씨는 1895년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가 백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면서 반 이상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펫 선교사는 "예수의 사랑 앞에는 사람의 차별이 없다"고 양반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양반들은 "그러면 교회에서 양반과 백정의 자리를 구분하여 양반들에게 앞자리를 달라"고 타협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마펫 선교사는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1895년 4월 마펫은 한학자 최씨로 하여금 박씨를 도와서 정부에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할 것을 탄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정부는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평민들과 같이 초립과 망건을 착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해 3월에는 인구조사에 백정이 빠져 있자 이것을 시정하여 백정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백정 박씨의 개종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들 박동열은 1907년에 최초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박씨 자신도 은행업을 시작하여 사업가와 장로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백정조합 회장으로 선출되어 백정들에게 해방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일을 한 마펫 선교사는 현재 총신대와 장신대의 뿌리인 평양신학교를 세운 초대 교장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들을 귀가 열립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봉사해야 되는지, 좁은 길이 무엇인지 다윗은 본문을 통해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 한 절에 교육의 원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원문에는 사실 6개의 단어만 나옵니다.
첫 번째가 '기르고'로 번역된 '라아' 입니다. 이 뜻은 더 크게 보면 '방목하다'입니다. 기르고(교육) 주어입니다. 기르는데 방목합니다. 양을 돌보는 데는 방목이 필요합니다. 자유롭게 두는 것입니다. 억압은 안됩니다.

어머니는 딸이 세상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규율이 가장 엄한 어느 대학에 진학시킵니다. 착한 딸은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심정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됩니다. 어머니는 주말이면 200마일이 넘는 거리를 자동차를 몰고 달려가 딸을 집에 데려옵니다. 어머니는 22살인 딸이 아직도 미덥지가 않습니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빠지진 않을까. 나쁜 친구를 사귀지는 않을까. 교회에는 잘 출석하고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의 근심은 하루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딸의 심정은 어떨까요. 딸은 어머니의 간섭과 구속에 거의 정신이 돌 지경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어머니를 떠나 알라스카로 도망쳐 완전히 독립합니다. 어머니는 사랑을 주었는데 딸은 왜 그것을 못 견뎌하는 것일까요. 사랑은 간섭과 감독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끊임없이 희망과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인 것이 맡지만 믿음과 소망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어가 '완전함'으로 번역된 '톰'입니다. 이 단어는 '온전함, 번영, 순수함'입니다. 교육을 어떻게 합니까? 순수하게 자유롭게 가르칩니다.

세 번째 '레바브' 용기, 마음, 명철입니다. 본문은 '마음'으로 번역된 곳입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려는 마음,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네 번째 '능숙함'으로 번역된 '타분' 명철, 이해입니다. 도량이 넓은 그런 뜻입니다. 마음을 크게 가지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카프' 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도하도다'로 번역된 '나하' 인도하다 입니다. 카프, 나하 손으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솔선수범 하는 교육이 필요하고 이런 사람이 명철한 지도자, 인도자라는 것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지혜가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처럼 살면 됩니다.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5) 

우리는 얼마나 사람의 증언을 받고 싶어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 때문에 산다고 할 만큼 사람을 의식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래서 일하고, 그래서 치장하고, 그래서 공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이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대중의 박수가 없어도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사람의 증언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박수 소리가 없어도 사람들의 병을 고쳤고, 욕을 먹으면서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증언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오, 또한 성부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도 좀 자라납시다. 진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그 이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헤롯 궁전과 사탄의 제의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백부장이나 타는 그런 전차가 아니라 당나귀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왕궁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집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처럼 살기를 원해서입니다. 예수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삽니다. 그 사람이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설교 : 이영제 목사

☆ 보시기에 좋았더라.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은 성경에만 복음을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 꽃, 구름, 별들에도 기록하셨다"고 말했다.
 
자연을 사랑하고 친 생태적 생활습관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가까운 생활태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인간을 포함한 자연 생태계에 관심 가져야 한다.
 
가인의 후예들이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한 이후 인간은 자연을 거슬렀다.
 
그 결과 아름다운 삶터는 가시덤불로 뒤덮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슬픔과 고통의 대지로 바뀌었다.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지 않고, 자연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의 보복이 목전에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단지 물질세계가 아니다.
 
그 이전에 바로 기쁨이고, 좋음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꼭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